럼두들 등반기
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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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848 미터의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것은 뉴질랜드의 산악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함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여기에는 약간 부당한 측면이 있다. '에베레스트 정복'이라는 목표가 없었다고 해서, 등반대에게 고용된 포터의 신분이었다고 해서 그 영예를 공평하게 나눠갖지 못한 것은 명백한 역사의 오류다. 그의 조력이 없었다면 에드먼드 힐러리의 역사적 등정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힐러리가 없었다면 노르가이의 등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르가이에게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해야 할 이유가 없다. 애초 그들의 삶에서 자연이란 '정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W. E. 보우먼의 <럼두들 등반기>는 코믹 산악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만큼 소설의 요소마다 해학적인 장치가 넘쳐난다. 그 해학적 효과의 원천은 한마디로 '꿈보다 해몽'에 있다. 즉 표면에 드러난 서술과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 사이의 괴리가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소설은 해발 12,000.15미터 전인미답의 산 럼두들을 정복하러 나선 일곱 명의 원정대의 모험담으로 '럼두들 등반대의 등반 기록'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소설의 도입에서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그 등반은 '성공적'이었다고 이미 기록되어 있고, 권위있는 산악인들이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며 아름답게 포장한 서문과 머리말까지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원정대장 바인더의 시선에서 그 찬란한 모험담의 실체가 펼쳐지는데, 어리숙한 화자의 자의적 해석으로 정의된 온갖 사건들의 행간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을 읽는 묘미다.  


<럼두들 등반기>는 과장과 허풍으로 점철된 소설이지만 사소한 디테일에 있어서는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허풍선이의 떠벌리는 이야기같은 어처구니 없는 과장임에도 설화같은 두루뭉술한 서술은 지양한다. 소설 속에는 비록 가상의 공간이지만 '요기스탄'과 '럼두들'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명시되어 있으며, 등정의 계획과 진행 절차에 있어 실제 등반 상황의 메커니즘이  훌륭하게 재현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소설은 '터무니없는 농담'에서 '깜찍한 패러디'로 둔갑한다.


럼두들 등반에 나선 대원들의 면면은 이렇다. 각종 질병을 달고 사는 등반대의 주치의, 길을 잃어 등반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길 안내자, 매번 현지인들과 포터들의 분노를 사는 사교수완가, 비본질적인 실험에 목을 매는 과학자, 가는 곳마다 피로증을 호소하는 보급담당자, 장비 세팅에 골몰하느라 정작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하는 사진사가 그들이다. 이처럼 각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그 분야에 관한 일이라면 모조리 망쳐버리는 대원들은 그들을 완벽한 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숙한 리더와 함께 등반에 나선다. 이 리더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이 좋게만 보이는 근거없는 낙관주의자다. 대원들의 의견 불일치는 고소난청의 탓으로, 격한 논쟁은 희박한 대기탓으로 돌리는 눈치 제로의 구제불능이다. 크레바스에 빠진 대원 한 명을 구해내기 위해 대원들을 모조리 크레바스 안에 넣어버리는 어설프기 짝이없는 리더지만 그들이 완벽한 팀이라는 고집스런 믿음만큼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인해 심각한 상황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둔갑한다. 이 무능력자들이 벌이는 일련의 해프닝을 통해 독자들은 어느모로 보나 이 오합지졸이 해발 10,0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등반대의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을까. 소설은 대원들이 엉뚱하고 요란스러운 일을 벌일 때 마다, 하루 8시간의 근로계약을 맺은 채 등반대를 따라나선 무뚝뚝한 포터들에게로 초점을 돌린다. 대원들이 처한 상황이 처절할수록 포터들의 절도있는 대응방식은 부각된다. 마침내는 등반대가 짐짝처럼 포터들에게 실려 럼두들 정상에 도달하는 대단원에 이른다. 작가는 오합지졸 등반대에게 연민과 애정을 아끼지 않는 한편, 이들을 희화화하면서 날카로운 풍자의 칼을 이면에 들이댄다. 웃음 뒤에는 나약한 유럽인들의 무모한 도전에 대한, 자연의 정복이라는 헛된 욕망에 대한 조롱이 숨어 있다. 이 '화려한 모험담'인 양 포장된 소설은 무가치한 목표를 향해 불필요한 자원을 쏟아붓고 아무 의미도 없는 성취에 자기만족하는 열강들의 정복욕에 대한 희화나 다름없다.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노르가이는 힐러리가 정상을 먼저 밟을 수 있도록 정상을 코앞에 두고 삼십 분 이상이나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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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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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보다 추한 것이 보여주는 것들이 더 많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추한 것들은 그 존재방식을 통해 그것에 무엇이 빠져있는지를 별수 없이 드러내고 만다. 추한 것들이 드러내는 결핍이 어쩌면 아름다운 것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일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든가 완전한 행복의 조건같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것들을 이루는 여러가지 요소를 소거시켜 보면 된다. 불완전한 것을 통해 완전한 것을 보여주는 역설은 문학적 서사에서만 기능하는 독창적 시도가 아니라, 사실 삶 전체를 아우르는 진실이다. 공포나 엽기, 재앙과 비극같은 것들이 영원한 행복이나 사랑, 감동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찬 이야기보다 더 진실되다고 믿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한 젊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열정이 만들어낸 그 존재는 애초에 '아름다운 외모의 특징들을 골라 짜 맞추'어진 괴물이다. 그러나 키 240미터에 누런피부, 희끄무레한 눈구멍과 색깔이 비슷한 두 눈, 쭈글쭈글한 피부에 새까만 입술을 가진 그 피조물은 창조주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역겹고 혐오스러운 외모를 지닌 채 살아 움직인다. 그 '추잡한' 외모는 보는 사람마다 공포로 자지러지게 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피조물의 외모를 좀 더 인간에 가깝도록 다듬었어야 했을까? 그건 아니다. 그 추잡한 외모는 인간의 삶에 다소 영향을 미칠지언정 인간의 조건을 규정짓는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이 맞이하는 파국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늘날에는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과학기술의 남용이 가져온 파국을 이야기하는 서사물이 넘쳐난다. 오만한 과학자들은 공룡을 되살려내고 좀비를 만들어내면서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다. 메리 W.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이러한 SF 서사 계보에 있어 거의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메리 W. 셸리의 이 1831년도 작품(개정판)은 오늘날 쏟아지는 상상하기 쉬운 단조로운 서사를 오히려 뛰어넘는다. 이 책에 나오는 괴물(원작에서는 이름조차 주어져 있지 않다)은 무자비한 파괴를 일삼는 공룡이나 좀비 따위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는 창조주에 의해 '사랑과 동정에 민감하게 만들어진' 마음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그 살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그는 애초에 '인간'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피조물을 인간에 가장 근접한 형상으로 만들었으면서 정작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책 <프랑켄슈타인>을 선과 악, 당위와 부당이 빚어내는 뚜렷한 대립각도의 이차원적 서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하는 힘이 바로 이 괴물의 정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그의 외모가 주는 오해와 달리 그는 인간적인 사고를 하고 인간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도덕성마저도 가졌지만 그 어떤 인간에게도 수용되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로서 그는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실낙원>을 읽으면서 자신을 괴롭혀왔던 결핍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바로 자기 존재 근원으로부터의 외면과 그에 따른 고독이 그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줄 유일한 인간인 창조주를 찾아 제노바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흡사 디아스포라적 삶의 괴기버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과 괴물의 경계 언저리에서 맴돌던 그 존재는 영원한 고독을 선고받는 순간 인간을 버리고 괴물의 삶을 선택한다. 그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가졌지만 자신은 갖지 못한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 사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안식처,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고통에 더욱 힘들어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도해야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이다. 그 괴물은 자신의 결핍이 인간의 중요한 조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도 없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소설의 첫번째 화자이자 주서사의 기록자인 월턴도 빙하가 떠다니는 망망대해에서 표류의 위험보다 자신을 알아줄 친구가 없다는 것을 더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말하는 공포는 결국 고독이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증오와 다툼, 파괴같은 것이 아니라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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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0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오래되서 전체 맥락만 기억나는데.. 다시 읽을 때가 된 모양 이군요.ㅎㅎㅎ
최근 이 글을 짚어주신 분들의 사유를 보며.
궁극은 뭐..단순할 지도 몰라도 표현에는 여러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문학이 장르로 ..여러 갈래를 파생시키는 현장을 목도하는 기분?!

깐짜나부리 2015-03-09 11:23   좋아요 1 | URL
그게 바로 문학의 묘미 아니겠어요. 그래서 문학을 좋아합니다.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책들은 도무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문학은 내 상황과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니까요.

[그장소] 2015-03-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런 표현이 좋아요..문학은 내 상황과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아~!!
이런거죠!! 묘미..ㅎㅎㅎ
좋다..정말.^^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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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사람들이 앓는 시대적 질병은 그 시대를 둘러싼 징후들이 개인에 침투한 결과다. 따라서 그 시대의 준거를 통해 진단되어야 한다. 한 시대의 고유한 질병에서 모든 역사와 철학, 사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 낸 질병이 개인에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증상에 대한 정밀한 진단이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따르면 현대인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신경증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맹수나 쥐, 해충, 바이러스같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타자'라는 적에 의해 생겨나는 질병이 아닌 바, 단순한 예방접종으로 치료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저자는 현대인의 질병은 이런 면역학적 시대를 뛰어넘는 증후로서 이의 진단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냉전이 종식되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현대에 접어들어 갈등은 사라지는 대신 그 양상이 훨씬 복잡해졌다. 이제 우리 사회 속의 개인들은 제국주의를 향해 저항하지도 않고 이데올로기를 위해 투신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투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유토피아의 실현을 요원하게 하는 각종 문제들이 산재해있다. 인재(人災)에 의한 사고, 정권에 대한 불만, 실업, 상대적 박탈감, 자살 등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개인은 그러나 자신의 환부조차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상대해야할 적, 다시 말해 적대적 타자가 종말을 고한 시대에 살고 있는 까닭이다.


책에 따르면 타자의 위협에서 벗어난 현대인이 맞서야 할 대상은 자아 그 자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폭력의 종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타자로부터 오는 폭력이 아니라 그 형태만 바뀐 또 다른 폭력이다. 저자는 이러한 폭력을 사회 시스템에 내재된 것이라고 설명한다.그가 말하는 시스템은 결국 사회 구조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전제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책은 현대는 부정성의 사회인 '규율사회'로부터 긍정성의 사회인 '성과사회'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즉 현대인의 질병은 강제와 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과 그 사회에 내재된 시스템에 의해 발병하는 것이다. 외적인 규제가 아닌 성과의 극대화를 위한 자아가 현대인이 맞서야 할 적이자 질병의 원인인 것이다.


책은 현대인의 신경증적 질병을 사회학적으로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며 그 처방의 실마리를 내어 놓는다. 성과사회에서 성과에 대한 압박은 활동의 과잉을 낳게 되고 이는 근본적으로 개인에게서 '사색적 주의'의 기회를 앗아 간다. '사색' 다시 말해 '심심함'의 결여는 모든 문화적 업적을 방해하는 요인이기에 심각한 문제다. 이는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적 병폐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활동의 과잉으로 인해 현대인은 유래 없이 풍부한 물적 자원을 누리고 있지만 예술과 종교, 문화 전반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은 상대적으로 빈곤해졌다.    


저자는 현대인의 신경증적 질병을 초래한 성과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피로는 개별적이고 고립된 피로라고 진단한다. 이 개별적인 피로는 성과에 대한 압박에서 발생하는 히스테리에서 온다. <피로사회>는 피로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트케를 인용하며, 이 고독한 피로에서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로 나아가기를 촉구한다. 이는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만들어내는 피로로서 개인에게 영감을 주고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거대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성과주의가 대신함으로써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적 질병을 가지고 왔으며, 영감을 주는 피로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이런 시대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피로사회>가 내놓은 이 시대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범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있지는 않다. 이 세계에는 '규율'이 '성과'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종교적 서사가 여전히 삶을 지배하는 나라들도 많다. 이 책에 따르면 자칫 이러한 사회를 전근대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련의 지표들이 보여주는 자본주의적 성과가 극대화된 대부분 국가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징후들은 이 책이 말하는 그대로다. 우리는 사회의 복잡성을 그 사회의 발전상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사회의 복잡성이 행복지수와 비례하지 않음은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로사회>가 내놓는 행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섬세한 비판은 적어도 현대인들이 자신의 환부를 똑똑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진단만으로도 영혼은 치유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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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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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청소년 소설들이 그렇듯 최상희의 소설집 <델 문도>가 던지는 질문은 '성장'이다.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성장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십대들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인생의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그 순간들은 소설 속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다른 배경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한 가지 접점을 향해 모여있다. 바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이다. 즉 성장이란 미지의 영역으로 존재하던 넓은 세계로 한 발짝 내딛는 일임을 이 책 속 인물들은 깨달아 간다.


여행 작가라는 작가 이력은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천편일률적인 삶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세계를 지구 곳곳으로 확장시킨 것이 그 첫 번째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 영국의 국제 공항, 이탈리아 베니스,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있다. 심지어 다른 정서와 문화적 배경을 안고 살아가는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입시지옥에 시달리지도 않고, 지나친 기술과 문명의 혜택으로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매몰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성장의 본질에 접근해 있다는 것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성장의 문제를 사회학적 보고서 내지는 시사 논평의 연장선으로 활용하려는 최근의 청소년 소설들의 경향에 비하면 이것이 얼마나 신선한 시도인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떠남'이라는 상황을 성장의 소재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여행과 성장의 비례관계는 여행의 효용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신념이다. 작가는 이러한 신념을 소설 속 플롯으로 끌어들인다. 'missing'에서 클로이 할머니가 주인공에게 한 말은 이 소설집 전체의 주제를 아우른다.  "하지만 가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애들이 있지. 그러다 어느 날 불쑥 다시 나타난단다. 조금 야위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힘이 넘쳐서 돌아와. 나는 알고 있지. 그 녀석들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거야." 인물들이 여행지에서 겪는 경험을 그대로 소설의 핵심 스토리로 활용하는가 하면('내기', '페이퍼 컷'), 여행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필름'). 과거 떠나온 곳에서의 기억이 현재 삶의 변화에 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고('missing', '기적 소리'), 현재의 삶이 인물들을 떠나게 만들기도 한다('노 프라블럼', '시튀스테쿰'). 그들이 떠나 온 곳이나 떠나 갈 곳은 모두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세계다. 아이들은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여 놓으며 세계의 변화를 경험한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가 언제나 낭만적이지는 않다. 환상은 대부분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키워지는 경우가 많고, 더 넓은 세계는 더 많은 위험을 예비한다. 안온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은 울타리 없는 야생에 그대로 내던져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책 속 주인공들의 떠남은 낭만으로서의 여정이 아니라 혹독한 세상에 대면하기 위한 준비다. 친구의 죽음이나 절연, 배신과 같은 일상을 흔드는 큰 사건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닥쳐온 여러 시련들은 주인공의 일상을 뒤흔든다. 뿐만 아니라 궁색한 생활의 현장과 위태로운 가족 공동체의 잔영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현실 극복에 대한 드라마틱한 액션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은 아이가 냉혹한 삶의 진실과 최초로 마주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델 문도(Del Mundo)'는 스페인 어로 '세상 어딘가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설집 <델 문도>는 말 그대로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다시 '이곳'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단순히 낭만적이거나 이국적인 체험으로 현혹하기보다 세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귀기울인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통해 수렴되는 인식이야말로 삶의 비밀이자 성장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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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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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우월하거나 결함이 있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김이 빠지는 일이다. 사이코패스가 활약하는 범죄소설 같은 것을 상상해보라. 이야기가 얼마나 시시하게 흘러갈지 뻔하지 않은가. 태생적인 범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가 벌이는 참극 같은 것은 서스펜스가 아닌 말초적 자극밖에는 주지 못한다. 그에게 범죄의 동기라는 것은 아예 없거나 일차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나 김영하처럼 이런 소재를 세련되게 풀어낸 작가도 물론 있지만, 사건이 플롯을 주도하는 스릴러 장르에 와서는 이런 인물들이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한날 미쳐서 벌인 사건이라면 이야기의 개연성은 작아지고 상상의 통로는 좁아질 것이 뻔하다. 흡사 좀비 영화처럼 좀비는 쫓고 사람들은 쫓길 뿐이다.


스릴러 소설을 긴장감있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무엇보다 개연성인데, 그 개연성은 대체로 동기에서 나온다. 그럴 법한 동기가 있고 그럴 법한 사건이 일어날 때 독자는 이야기에 쉽게 몰입한다. 사소한 계기로 평범한 일상이 돌연히 끔찍한 지옥으로 바뀌는 과정이 비약없이 서술되고 있을 때 우리 삶에서 비극같은 낯선 경험이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는 것이다. 스콧 스미스의 처녀작 <심플 플랜>은 바로 그런 소설이다. 평범한 일상에 끼어든 사소한 사건이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되어가는 과정이 매순간 납득할 수 있게 그려진다. 순간 순간을 수긍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문득 너무 멀리 와 있는 인물의 처지에 맞딱뜨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하고 생각하는 사이 소설은 더 이상 동떨어진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이야기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확히 평균 언저리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어느 날 거액의 현금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현장에는 그의 형과 형의 친구가 함께 있었다.스콧 스미스의 놀라운 재능이 발견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돈을 발견한 인물이 한 명이었거나 두 명이었다면 갈등이 고조되는 치밀한 심리적 정황을 설정하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명이라는 숫자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과 사회적 입지의 차이, 미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부각시키게 되고, 이로 인해 불안감은 증폭되며 단조로운 플롯은 순식간에 숨막히는 스릴러로 돌변한다. 두 명의 인물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의심과 경계 사이에 한 명이 더 개입함으로써 인물들은 게임처럼 복잡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세 사람의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이 터닝포인트가 되어 평범한 주인공은 평범한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소설에서 범죄의 가해자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은 또한 희생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원한과 보복, 이해관계가 얽혀 범죄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된다. 가령 파티에 필요한 샴페인을 사는 일을 포기하지 못해 닫힌 가게 문을 두드린다던가 하는 시시한 이유로 말이다. 범인은 사이코패스나 악당이 아닌데도 일은 벌어진다. 초현실적이거나 파괴적인 힘에 의한 공포는 허구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어 자극적일지언정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진정한 공포는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졌을 때 찾아온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완전 무결한 인간은 잘 없기 때문이다.


스콧 스미스의 장기는 발군의 심리묘사에 있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결론은 나 있다. 추적할 범인도 해결해야 할 미스터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는 오로지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물의 심리 변화만을 좇는다. 마치 <죄와 벌>의 살인에서 시작된 도입부와 자수로 끝나는 대단원 사이에 자리잡은 장황한 갈등과 번민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인물의 일탈적인 행동과는 별개로 그들의 심리상태는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모습을 더없이 리얼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스콧 스미스는 지금까지 단 두편의 소설-한 편의 범죄 소설과, 한 편의 공포 소설-만을 발표했다. 두 작품 모두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뚜렷한 장르적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 서스펜스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 안에 인간을 던져 놓고 그들을 관찰한다. 최초의 상황 외에는 아무런 작위적인 개입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지만 그 과정은 조금도 비약적이지 않다. 스콧 스미스가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 인간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하는 한 품격있는 페이지터너로서의 명성은 유지될 것이다. 그의 완벽주의로 인해 기다리는 팬들은 속이 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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