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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ㅣ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란 무엇인가? 책더미에 파묻혀 숨쉬는 독서가라면 작가를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선명하게 눈 앞에 펼쳐내는 마법사 쯤으로 여길 것이고, 무수한 수사 표현 따위를 공부해야하는 수험생이라면 의미 없는 일에 매달려 골치아픈 글로 두통을 유발하는 악당 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한편 글 감옥에 갇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날을 꿈꾸는 문청들에게 작가란 듣기만 해도 설레는 연인의 이름일 것이다.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작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 책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되는 분야로 범위를 좁히면, 작가란 말하자면 소설을 창조하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독서취향이 소설에 편중된 것 같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소설을 읽는 취향은 책을 통해 재미를 추구한다는 말일 테고, 그 재미란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하고 심오한 그 무엇에 반하는 가치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보다 높은 소양을 요구받는 이 사회에서 소설 읽기란 무척 조심스러운 길티 플래져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높은 소양을 삶과는 괴리된 추상적인 관념들에서 찾으려는 시도에 비한다면 소설 읽기야말로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인 노력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삶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은 제외하고라도 영화, 만화, 드라마 등 인간이 재미를 얻고자 기웃거리는 거의 모든 것들은 이야기가 핵심이다. 그뿐인가. 우리 삶 자체도 이야기다. 사회면 기사 한 꼭지 조차도 인물이 특정한 배경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닌가. 소설은 이러한 도처에 있는 이야기들을 실어나르는 수많은 형식 중에서도 정수에 해당한다. 심지어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쓰기 때문에 키르케고르보다 여섯 배는 더 심오하지요." 그런 소설을 읽는 것이 부끄럽다니!
도대체 이야기가 이런 취급을 받는 마당에 최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사람들, 즉 소설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작품을 통하지 않은 거장들의 목소리에는 주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매일 몇 시간이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원고지나 타자기, 혹은 컴퓨터와 고통스러운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도 그들은 소설의 효용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존 치버는 소설의 중요한 요소로 '거짓'을 들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삶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가장 깊은 감정을 표현해주는 교묘한 속임수"라는 말로 소설의 존재가치를 역설한다.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들어 보자. "소설은 오직 인간만이, 특정한 상황에서만 쓰는 것이죠. 어떤 목적 때문에 써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목적 중 하나는, 우리가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도록 이끌어준다는 거죠." 한편 모순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라고 하는 옴베르트 에코의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다. "늙은 노파를 죽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학 논문에서 그 생각을 표현하면 F를 받겠지요. 소설에서라면 그 생각은 '죄와 벌'이라는 산문 걸작이 됩니다." 요컨대 소설은 거짓과 모순이 허용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다 자유롭게 보여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설을 쓸 때보다 기사를 쓸 때 진실을 더 적게 말한'다고 하는 줄리언 반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생각도 비슷하다. "저널리즘에서는 기사가 가짜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기사 전체에 편견을 갖게 만듭니다. 대조적으로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작품 전체를 정당화해줍니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말하자면 저널리즘이 실어 나르는 사실 속에는 종종 진실이 결여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거짓인 소설은 역설적으로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설은 인간을 즐겁게 한다. 필립 로스는 "소설을 읽는 것은 깊고 독특한 기쁨이며, 성(性)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 활동"이라고 지적한다. 이러니 소설을 쓰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누군가는 가구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만들듯이, 작가는 소설을 만든다. 일관적인 메뉴얼이 있는 가구와 자동차도 생산자 혹은 소비자의 취향이나 용도에 따라 그 모양과 크기가 셀 수 없이 다양할 것인데, 인간의 인식과 감성에 호소하는 소설의 다양하기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작가가 가진 신념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 혹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요구에 따라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도 다양하다. 예컨대 가즈오 이시구로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음악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낸다. 오르한 파묵은 서구에 대한 문화적 열등의식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했고, 폴 오스터는 타인의 경험을 듣는 일을 통해 바깥 세상의 역동성을 체험한다. 표현에 있어서도 정해진 것이 없다. 밀란 쿤데라는 문학적 예술 형식을 완성하기 위한 수사적 기법에 깊이 몰두하는 모습이다. 반면 잭 케루악은 '기교'보다 '느낌'을 좋아하여 숙고를 거듭하기보다 즉흥적 문체를 사용하기를 즐겼다. 세상에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보다 이야기된 것이 더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번 이야기 속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작가들의 수많은 인식 속에서 어떤 것도 똑같이 묘사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살만 루슈디는 "글이란 작가가 쓴다기보다는 작가를 통과해 나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소설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라는 한 타인의 전체를 거쳐 탄생하는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역동적인 생산물이다. 이처럼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자면, 우리 세상을 둘러싼 이야기들의 풍요로움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그러니 왜 소설을 읽지 않는가 말이다.
소설가의 인생과 사상, 창작 방법과 작업 스타일에 대한 밀도 깊은 인터뷰는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자칫 표현론적 관점의 문학 해석을 강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크게는 작가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생산물로 귀결된다.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각자의 방식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줌으로써 그 작품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작가는 결국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만 이야기되는 존재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롤리타'가 유명한 것이지 제가 유명한 게 아니지요. 저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무명의, 그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에 불과하지요." 작가가 없으면 작품이 없는 것이 자연법칙에 따른 선후관계지만, 예술적 진리에 따르면 이는 반대다. 작품이 없다면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작가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를 탄생시키기 위함이다. 인종주의의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토니 모리슨의 삶도, 최악의 전쟁을 체험했던 커트 보네거트의 삶도 그들의 인생을 관통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작가적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 사이의 미묘한 긴장의 줄타기를 벌여야 했던 오르한 파묵이나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그 삶의 굴곡은 결국 소설을 통해 말해진다. 작품이 없다면 개인의 경험이나 나아가 민족적, 국가적, 전인류적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시작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헉슬리는 "작가는 우선 관찰하는 사실에 질서를 부여하고 삶에 의미를 불어넣고자 하는 갈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작가란 세상으로부터 취한 온갖 것을 끌어 안고서 자신의 작품에 그 모든 것을 내어준 뒤 그 뒤에 숨어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순교자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