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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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방 도시의 남자고등학교 교실에서 보잘 것 없는 네 명의 학생이 뭉치게 된다. 그들은 물리 숙제를 해오지 않아 선생님으로부터 기합을 받게 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드렁칡 같다고 하여 그들은 ‘만수산 4인방’이란 공동체적인 호칭 아래 우연찮게 묶이게 된다. 그 만수산 4인방은 중국집 배갈의 힘을 빌어 의형제 결의까지 하게되는데 사실 그들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으며 자신이 나머지 셋과는 전혀 수준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만 닮아있었다.
만수산 4인방 중 하나인 배승주를 보자. 그는 내세울 것이라곤 그의 잘생긴 외모 밖에 없고 누나의 옷을 빼앗아 입고 기타를 들고는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우수어린 눈빛으로 앉아있는 일이 고작인 한량이다. 조국 또한 내세울 게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거무스름하고 네모난 얼굴에 유난히 짧은 목을 가진 그는 활달하고 편안한 인간미를 가장한 떠벌이다. 덩치 있고 과묵해 보이는 두환은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복도에 내놓은 다리 한 짝을 맹렬히 떠는 것 외에 '소림사 18동인'의 조직이라는 실속없는 사업에 목을 메는 시시한 건달이다. 그중 나은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서술자 김형준의 사정도 그리 다를 것은 없다. 그는 가방 안에 토마스 울프나 토마스 만의 소설을 넣고 다니며 거만을 떨지만 그는 일류의 삶에 끼지 못해 발버둥치는 이류일 뿐이다. 

 

마이너리그’가 추적해 나가는 것은 이 제각기 다른 각각의 캐릭터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진술이 아니고 전혀 다른 캐릭터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특징인 그저그런 삶의 내면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라는 개별적 인물의 에피소드보다 '그들'이라는 소속하의 집단적 사건에 포커스가 맞추어 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전혀 다른 인물들을 하나로 얽히게 만든 계기는 아주 하찮은 것일수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삶의 결과는 다분히 필연적이다. 그 필연적인 운명의 근거는 그들의 삶이 이류에 속해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이 워낙에 공정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소수의 메이저들과 다수의 마이너들이 공존한다. 게다가 매스컴을 비롯한 각종 문화적 산물들조차 메이저의 삶만을 비추어 주며 강조한다. 다수의 마이너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문화현상에 열렬히 호응한다. 이처럼 메이저들에 대한 동경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출로 이어진다. 이런 현상은 마이너들을 점점 더 깊은 소외 속으로 몰아간다.

 

마이너들이 메이저의 세계로 진출할 기회는 엄격히 차단되어 있음에도 사회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메이저를 향해 우뚝 설 것을 강요한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모순적인 사회 구조에 대해 항변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투사나 열사를 칭송하는 법을 배워 왔고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본보기로 수많은 위인전집의 인물들을 들추어냈으며,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이란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만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학벌, 권력, 돈으로 상징되는 메이저들의 삶에 편입되기 위한 젊은 세대들의 피눈물나는 발버둥은 지금도 계속 되어 가고 있고 각종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사회 현상으로 인해 수많은 낙오자가 생기게 되며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폄하하며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것이다. 

 

'마이너리그'는 이처럼 고립된 다수의 마이너들을 위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마이너들의 극적인 성공담이나 좌절 극복의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글은 마이너들에게 바쳐진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교훈담이 아니라 담담하게 마이너들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소설일 따름이다.


해학과 풍자가 넘쳐나는 어조와 농담 속에서 만수산 4인방의 진지한 삶의 의미 따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사실 ‘팝송’을 죽어라고 ‘팝숑’이라고 발음하면서도 국제팬팔부의 부장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커서는 어느 무명 사진작가의 조수노릇을 하면서도 허황된 해외 나들이의 꿈만 키우며 빚쟁이들을 응수하는 일이 고작인 조국이나 자신의 외모를 과신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커서는 직장만 뻔질나게 바꾸어 대면서 정작 하는 일 없이 번번히 누나의 신세나 지는 배승주 따위의 인물은 독자들의 조롱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들이 마지막에 극적인 성공으로 졸부가 된다든가 유명인사가 된다는 설정도 이 소설에는 없다. 작가는 그저그런 삶의 이면을 그저그렇게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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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오디세이 2 - 혼돈의 시대 : 통일신라 ~ 고려 편, 김정환의 상상하는 힘을 길러주는 우리 역사 이야기 한국사 오디세이 2
김정환 지음 / 바다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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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력이 없이는 온전히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문헌 자료의 한계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을 뿐 아니라 하나의 사건도 집필자의 역사관에 따라 달리 서술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넣을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사 오디세이'는 문학과 건축, 유물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펼친다. 오늘날 전해지는 과거 문화 예술의 산물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역으로 이러한 유산들이 역사의 일면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한국사 오디세이'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역사를 파헤친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한국사 오디세이'의 두번째 시리즈 '통일신라~고려편'에서도 역사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사료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들과 더불어 문화예술 유산들에 얽힌 이야기를 다채롭게 들려준다.
통일 신라 시대의 역사에서는 다양한 설화와 시가들을 통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문학사를 조망해 볼 수 있게 했다. 특히 신라의 향가는 통일 신라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제시된다. 또 불국사, 석굴암 등 경주 지방에 남아 있는 문화 유산과 그에 얽힌 다양한 설화를 들려주면서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공간으로 옮겨 놓기도 한다. 책은 통일신라,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를 거치는 동안의 한반도의 역사적 흐름을 따르면서 주변국과의 정치적 영향관계 또한 놓치지 않고 설명해 준다.
삼국을 통일한 뒤 불교 예술을 화려하게 꽃피웠던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그 붕괴과정을 거쳐 진정한 혼돈의 시대라 할 수 있는 고려에 이른다.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도 문학작품에서 시작한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끊임없는 내우외환으로 유난히 탈이 많았던 고려 왕조의 혼란상은 속요 '쌍화점'의 음란한 노랫말로 특징지워진다. 또 상감청자를 위시한 고려시대 예술 기법과 그 형식을 통해 고려인들의 변화해가는 정신을 엿본다. 책은 무신정권과 잦은 민란, 몽고의 수 차례 침입으로 인하여 고려사회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흥미있는 일화들을 곁들여 자세히 서술한다.

역사는 캐캐묵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모든 것을 이루는 누적된 산물이다. 이는 역사가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긴밀하게 닿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사 오디세이'에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학, 음악, 건축물 등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역사 속에서 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정신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역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통일신라부분의 마지막에 경주의 문화유적을 전체적으로 갈음하면서 천 년 전의 시간을 오늘날의 경주라는 공간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과거와 오늘날의 단절된 별개의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한다.

'한국사 오디세이'는 사실 전달 위주로 되어 있는 기존의 역사 서적들과 다른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순한 사실의 전달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 속으로 침투해 주관적 논평을 곁들이기도 하고 역사의 내부에서 느낀 감정을 문체를 통해 표출해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딱딱한 역사적 사실도 좀더 쉽게 읽힌다. 독자는 마치 그 시대의 한 가운데 놓인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어 역사를 이해하는데 좀더 유연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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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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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최후 비밀(L'ultime secret)이지만 한국에서는 ‘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어차피 소설 속에서는‘최후 비밀’이란 것이 뇌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크게 틀린 번역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뇌’라는 장기의 이름을 통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실 ‘최후 비밀’은 첩보 소설 같은 냄새를 풍긴다.) 

다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하나의 굵직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행동하는가?” 바로 ‘동기’에 대한 문제이다.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되는 동기가 없으면 일상은 무미건조해지기 마련이다.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각기 다른 행동을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제각각의 행동들이 결국 특정한 몇 가지 동기에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1. 고통을 멎게 하는 것
2.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3.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4. 안락함을 위한 부차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5. 의무감
6. 분노.
7. 성애
8. 습관성 물질
9. 개인적인 열정
10. 종교
11. 모험
12. 최후 비밀에 대한 약속


이는 심리학에서 흔히 등장해 주는 매슬로우 등의 동기위계이론과도 비슷하면서도 좀 더 세부적이다. 매슬로우와 마찬가지로 베르베르의 동기론(?)은 순차적이면서 좀더 구체적이다.
그러나 베르베르가 11번까지의 동기들만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면 그것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동기'에 관한 논문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소설의 대전제가 되는 ‘우리가 무엇에 이끌려 행동하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과학적이면서도 소설적 허구가 가미된 ‘최후 비밀’의 존재를 밝혀 낸다. 최후 비밀이란 11번까지의 모든 동기들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동기이다. 이 비밀스런 존재는 우리의 뇌 속에 숨겨져 있다.

“컴퓨터는 기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기>라는 것에 영향을 받지도 않습니다. 딥 블루Ⅳ는 설령 승리한다 해도 얻을게 없습니다. 전기가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소프트웨어가 추가로 설치되는 것도 아닙니다.”라는 핀처의 위트 넘치는 대사에서처럼 최후 비밀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한 잠재능력을 끌어내도록 한다. 그것이 바로 강력하고 절대적인 쾌락을 느끼게 하는 우리의 뇌 속에 숨겨진 ‘최후 비밀’이란 비밀스런 장소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아직 판도라의 상자를 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끝까지 상기시킨다. 사람들은 예외적인 것이나 자기들의 삶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어찌 됐든 인간은 아직 ‘최후 비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강력한 동기를 가질 수 있고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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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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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이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지는 예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더라도 작가적 상상력이 더욱 중요한 경우가 있다. 그 작품을 둘러싼 어떤 이야기도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그러하다. '진주 귀고리 소녀'가 바로 이런 경우다. 그러나 작가인 트레이시 쉬발리에는 오히려 작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힘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에 대해 알려진 전기적 사실일 적을수록,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화가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가운데, 쉬발리에가 소설 구상을 위해 참조한 것은 베르메르가 생전에 남긴 그림 35점이 전부이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진주 귀고리 소녀' 뿐 아니라 베르메르의 그림 35점 모두가 이야기 속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일한 장소인 것으로 추측되는 배경, 동일한 소품들(노란색 코트, 귀고리, 악기 등), 심지어는 모델의 얼굴조차 겹쳐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그림 속 소품과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상상의 세계인 베르메르의 화실을 창조했고, 주변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자주 등장하는 노란색 코트는 아내의 것으로 모델에게 빌려준다는 설정을 통해 소품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이런 이유로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옆에 두고 소설을 읽으면, 쉬발리에의 소설 창작 과정을 역으로 상상할 수 있다. (친절하게도 책은 필요한 부분에 적절한 그림을 삽입해 놓았다.) 소설은 17세기를 살았던 한 화가의 작품 창작 과정을 그리고 있고, 그 화가의 그림들은 21세기의 소설가의 창작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예술끼리의 역동적인 소통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흥미를 더한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면 동일한 공간과, 소품, 인물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소설 속 세계는 협소하다. 소설의 중심적인 사건이 펼쳐지는 장소는 대체로 작은 화실 안이고, 조금 멀리 벗어나도 시청 주변의 시장, 도심을 흐르는 운하 정도이며, 기껏해야 델프트 시의 바깥까지 확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사건들을 지켜보는 그리트의 심리가 시시각각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매순간 변해가는 주인공의 속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정적인 공간에서 조차 역동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베르메르가 살았던 곳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델프트


여자의 시선이 화가를 향하고 있는 사실에까지 쉬발리에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소설의 가장 큰 줄기라 할 수 있는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사랑도, 특별한 사건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묘사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극적인 애정 표현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영혼과 영혼이 서로 부딪혀 울리는 듯한 순결한 사랑이 그리트의 심리 속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전해질 듯 전해지지 않는 그리트의 사랑, 카타리나와의 아슬아슬한 신경전,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그리트의 감정,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나타나는 화가의 시선같은 것들을 담아 내기에 그 협소한 공간적 배경은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 

소설은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가 어떤 과정으로 탄생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림 속의 소녀가 보여준 미묘한 표정 속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동안 그리트의 심리를 그토록 자세히 그려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트의 복잡한 심리를 '진주 귀고리 소녀'의 탄생이라는 클라이맥스의 순간까지 끌어오기 위해 작가는 심리묘사에 지극히 공을 들였던 것이다. 행복함과 슬픔, 두려움의 감정이 뒤섞인 그림 속 소녀의 묘한 표정은 쉬발리에의 상상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그리트가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들-베르메르를 향한 설렘, 카타리나에 대한 죄책감, 하녀라는 신분적 한계에 마음 졸여야 하는 회한, 값비싼 진주 귀고리를 주인 몰래 달게 된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한 편의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소설가의 상상력이 17세기를 살았던 한 화가의 정신과 만나는 지점이다.


소설 창작의 결정적인 동기가 된 '진주 귀고리 소녀'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문체가 현대적이며, 사건 보다 인물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음에도 속도감 있게 읽힌다. 무엇보다 한 편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전기적 사실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냈다는 신선한 발상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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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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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로 '나비' 혹은 '나방'이라는 의미를 가진 '파피용(Papillon)'은 태양 에너지로 항해하는 거대한 우주 범선의 이름을 가리킨다. 인류에게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어 미지의 행성을 개척하고자 기나 긴 여행을 떠나는 14만 4천 명을 태운 우주 범선이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행성은 넉넉잡아 이천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이 거대한 우주 범선 안에 중력을 작용시키고 생태계를 조성하여 이천년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환멸을 느껴 떠나왔던 지구의 수많은 관습과 폐단들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그들만의 룰을 만들어 새로운 공동체를 조성해 나간다. 지구를 떠난 순간부터 그들은 그들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버린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된다.

이러한 기발한 생각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러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설에는 기막힌 프로젝트에 대한 발상이라든지, 그 전개 과정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만큼 자연스럽게 기술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실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는 인물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잠시도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소설의 과학적인 기술방법은 간혹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독자에 의해 비판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허구인 문학의 영역에서는 과학적 가설에 대한 설득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학기술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파피용'의 대단한 점은 단순히 과학적 상식에서 출발하여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거대한 모험을 상상해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베르베르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공상과학소설의 전형적인 플롯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그 시작은 과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철학, 심리, 사회적인 문제와 같은 인류의 깊이 있는 부분 까지 들추어 낸다. 인간 근원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파피용'호에 탑승한 14만 4천명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며 타락한 지구와 다른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한 계획과 연구를 거친 과학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이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완벽한 자연환경을 조성하였으나, 인간 간의 유대와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회환경까지는 통제하지 못한다. 바로 인간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이룩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인류 역사의 오류들을 반복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소설은 또 공상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나아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작에 비해 스케일이 훨씬 커진 '파피용'에는 인류의 세계관에 대한 패러다임마저 뒤바꾸어 버리는 어마어마한 결말까지 기다리고 있다. 이 결말은 일차적으로 신에대한 부정, 과학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파피용호 안에서 인류의 야만적인 역사를 반복해서 보여준 인간들이 진정으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의 시작지점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작가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과학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무한한 상상력, 빠르고 흥미진진한 전개 속에서 놓치기 쉬운 메시지를 베르나르는 언제나 깊숙이 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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