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왓치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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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스티븐 킹의 장기는 공포 스릴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천부적인 스토리텔러로서의 자질을 굳게 믿기 때문에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탐정'에 대한 일련의 스테레오타입들은 - 홈즈의 괴짜같은 성품, 포와로의 날카로움, 필립 말로의 고독 같은 - 장르의 매력을 어느 정도 보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대가 컸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미스터 메르세데스>로 시작된 스티븐 킹의 추리소설은 관습적인 장르 문법에서 매력적인 부분만 제거하는 파격을 시도한 것 같다. 인물의 매력도를 결정짓는 육체적인 매력같은 것은 배 나온 60대의 은퇴한 경찰 빌 호지스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소위 뇌색남이라고 일컬어지는 명민하고 재빠른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어서 머리 좋고 사리에 밝은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이 조력자들에게서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소극적이고 소심한 편이다. 빌 호지스는 한 마디로 '은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쇠락해 있다. 탐정이라 하기에는 카리스마가 부족해 캐릭터성이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범인을 사이코패스로 설정한 것도 파격적인 도전이다. 사이코패스물이 플롯을 단조롭게 만드는 이유는 사이코패스에게는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막가파식 범죄를 저지르고도 인간적인 심리적 갈등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이코패스가 범인인 이상 일반적인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범인의 추리는 인성에 근거한 추론보다는 사실적인 정보의 수집 차원에 국한되어 버린다.

게다가 스티븐 킹은 추리 소설의 묘미인 '범인 찾기'라는 내러티브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범인을 소설의 도입부에서 밝혀 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반전도 허용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수법을 통해 긴장감을 주기 보다 탐정과 범인의 밀고 당기는 대결을 통해 스릴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로는 꽤나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인 것이다.

추리 소설에서 기대되는 다양한 공식들을 배반하면서까지 스티븐 킹이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히려 지금의 현실에 가깝다. 작가는 선악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애가 사라져버린 냉혹한 현실 사회를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은 실제로 빌 호지스의 무능력(고전적인 탐정에 비해)을 부각시켜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대사회의 각종 문제들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 실업과 구직난, 대형 콘서트장 테러, 게임 중독 같은 현대 사회 이슈들을 표면화 시킴으로써 인간의 무력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빌 호지스 트릴로지로 일컬어지는 소설 - <미스터 메르세데스>, <파인더스 키퍼스>, <엔드 오브 왓치>는 스티븐 킹의 첫 탐정소설이라는 의의보다 오히려 가장 리얼리즘에 가까운 소설이라는 평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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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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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잘 읽히는 로맨스에도 언제나 한 가지 눈여겨 봐야 할 점이 있다.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가 주인공의 최종 상대로 낙점(?)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승자가 되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다. 적어도 작가가 추구하는 윤리적 이상에 부합한다. 비록 규범적으로나 관습적으로는 어긋나 보일지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로맨스는 작가가 생각하는 바른 인간상을 드러내 보이는 간접적인 수단인 셈이다.


에드워드 포스터의 대표작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에는 몇 군데 웃음 포인트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 하나 있다. 피렌체 한 호텔의 투숙객끼리 떠난 소풍에서 일행과 떨어진 여주인공 루시가 남자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인 마부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인데, 이탈리아어를 잘 모르는 그녀는 '신사(gentle men)'라는 말을 '좋은 남자들(buoni uomini)'이라고 바꾸어 말한다. 그것을 나름대로 알아들은 마부는 루시를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남자'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물론 그 곳에 서 있던 남자는 루시의 상대가 될 조지다. 중요한 것은 조지를 '좋은 남자'로 단정하고 루시를 그리로 이끈 사람이 아무런 인습의 구애를 받지 않는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포스터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전망 좋은 방>은 로맨스의 옷을 걸치고 있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 도덕적 교양서처럼 읽힌다. 범위를 좁히자면 좋은 배우자에 대한 윤리적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훌륭한 로맨스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싹트는 과정에 대한 감정적 깊이가 절실하게 드러나지 않고 사랑의 감정은 다소 과장되었고 지나친 도약을 거듭한다. 그러니 이 소설은 루시를 둘러싼 두 남자의 대립을 첨예하게 그리며 사랑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기보다 루시의 짝으로 어울리는 남자가 어떤 부류인지를 보여주는데 더 치중한다. 그러니까 두 남자 - 세실과 조지의 성격을 극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신사'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은 제목대로 '전망 좋은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논의는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되며 소설의 주제를 구현한다. 루시가 추구하는 전망이 문자 그대로의 전망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선율로 암시된다. 소설은 20세기 초 에드워드 왕조 시대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는데, 예법이라는 구태한 관습을 벗어내지 못한 사회는 전망 없이 꽉 막힌 방과 같다. 특히 루시로 대표되는 '숙녀'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소위 '신사'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의 구식 관념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전망에 연연하지 않는 조지의 자유분방함은 내면에 보헤미안 기질을 감추고 있는 루시의 영혼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 된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만난 조지와의 인연을 통해 피어오르기 시작한 루시의 열망은 그녀가 속해 있는 원래 사회로 돌아오게 되면서 다시금 봉인된다. 세실의 약혼자로서 예법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된 루시는 그 꼭두각시같은 삶 속에서 자신이 열망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된다.  

<전망 좋은 방>은 여행지의 로맨스라는 꽤나 근대적인 요소를 사용했다는 점 뿐 아니라 그 여행지에 대한 섬세하고 깊이 있는 묘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장소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여행지에서 싹트는 교류와 감정들, 낯선 문화에 대한 이질감까지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여행지로서의 이탈리아를 찬양하면서도 그들의 미개성을 지적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는 오늘날 선진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은연중에 과시하며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중성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무엇보다 현실의 갑갑함에서 벗어날 출구로서 여행의 효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고전 답지 않은 근대성을 엿볼 수 있다. 루시가 세실이라는 전근대적 인습에서 달아날 수단으로 -당시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을-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꿈꾸는 것은 조지를 선택한 것만큼이나 파격적인 스캔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 조지를 선택했다고해서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포스터는 결국 루시와 조지라는 '아웃사이더'를 통해 당시 사회상과 세태를 은근히 꼬집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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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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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목표는 사실을 진술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서술자를 믿을 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물론 작가는 그 판단에 대한 단서를 곳곳에 심어 놓는다. 영리한 작가는 이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해서 소설적 장치로 활용한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이 놀라운 것은 이 때문이다.


한 젊은 여자가 어떤 집안의 가정교사로 입주하면서 귀신을 보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 서사인데, 소설의 묘미는 이 기묘한 이야기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모호하게 하는 작가의 기교가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이 섬뜩한 이야기는 추운 겨울날 난롯가에서 더글라스라는 신사에 의해 낭독된다. 이 수기를 쓴 여자는 더글라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력적인 젊은 가정교사로, 내화의 대부분은 이 여인에 의해 서술된다. 그러나 이 원고는 훨씬 시간이 흐른 뒤 외화의 화자인 '나'에게 전해져 세상에 공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소설은 세 사람의 손을 거쳐 오는 동안 최초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각색 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처럼 귀신 이야기가 담긴 원고 자체의 진실성도 모호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분명해지는 것은 없다. 독자는 이제 베일에 싸인 화자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한다.


믿는다면, 무대가 되는 저택은 고딕 호러의 스산한 배경이 된다. 때마침 전직 가정교사와 하인이 죽었다는 사실이 귀신의 존재를 더 확고하게 해 준다. 오로지 화자의 눈에만 보이는 귀신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할 존재처럼 여겨진다. 자신이 목격한 귀신에 대한 확고한 화자의 신념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행동하는 집안 사람들의 행위를 가증스럽고 기괴하게 만든다. 특히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유령의 존재보다 더 섬뜩해 보인다.


반면 믿지 않는다면, 화자가 벌이는 모든 행동과 고군분투는 젊은 여자의 이상한 광기로 비쳐진다. 아이들에게로 향한 맹목적인 애정은 지나쳐보이고, 모든 간섭과 통제는 가정교사로는 월권으로 보인다. 흡사 주인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여자가 나아가 안주인의 지위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뒤틀린 인물의 심리는 유령 따위는 없다는 마일스 부인의 폭로와 겁에 질린 플로라의 모습에서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소설 속의 모든  오로지 화자의 심리 속에서만 벌어지며 그것을 외부 사건과 연결짓는 것도 오로지 화자 자신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서술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심리를 그 허점까지도 정확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치밀함에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 그것을 바라보는 층위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 되는가. 이를 오로지 한 인물의 심리를 통해서만 보여주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헨리 제임스의 소설적 기법이 얼마나 진일보한 것이었는지 알게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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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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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가르쳐주는 단 하나의 진실은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반복된다. 설령 그것이 오류의 역사라 할지라도 인간은 같은 오류를 계속 반복해왔다. 이 끊임없는 오류의 쳇바퀴를 지켜 보면서 인류의 진보나 변증법적 낙관론 같은 것을 기대하기에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누군가 저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우리네 삶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비춰질 것이다. 타자에 대한 담론은 역사 이래 계속 되어왔고 여전히 유효하다.


토니 모리슨이 <빌러비드>를 출간한 지 30년이 지났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시간으로부터 150년 이상이 지났다. 그러나 소설은 과거의 회환과 한탄으로 읽히지 않는다. 대신에 여전한 오늘의 삶을 이야기한다. 거대한 사회의 폭력에 무너져버린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 이런 주제를 대하는 작품 안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배여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공감을 잃게 된다. 주제의 건강성과 무관하게 공감의 강요는 어딘가 편파적으로 느껴져서일 것이다. 그러나 <빌러비드>는 처절하고 얄궂은 운명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려낸다. 과도한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독특한 기법과 함축적인 언어가 두드러진다. 작가는 사실적인 소재에 환상적인 기법을 가미했으며 실화에 기반한 서사이면서 시적으로 표현했다. 가령 구구절절한 흑인 박해의 역사를 '세상에 불운 따위는 없어. 흰둥이들이 있을 뿐이지' 같은 한 마디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식이다.


소설은 노예의 삶에서 탈출해 자유를 얻은 흑인 여인 세서의 삶을 추적한다. 노예로서의 비참하고 굴욕적인 삶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노예로서 세서의 삶은 당시 다른 노예들의 참담한 삶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인간으로서 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분명한 자식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지만 그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그 시대 노예들의 일반적인 삶이었다. 게다가 세서는 집단 탈출 계획에서 유일하게 발각되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당시의 노예로서는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조차도 노예로서의 삶은 죽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은 자유로운 삶을 알게된 이후에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세서는 그 운명의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인성과 모성을 모두 내던진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이 마침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세서는 노예제도의 피해자이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로서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에 놓인다. 피해자로서의 최소한 동정조차 얻지 못한 채 고립되어 죽음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 과거의 망령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빌러비드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여자는 세서의 죄의식과 회한의 현신이다. 빌러비드를 통해 세서는 기나긴 속죄의 의식을 치르지만 '짙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것은 모든 것을 내던진 파멸적인 사랑으로 치닫는다. 과거의 삶은 현재의 삶을 잠식하고 미래의 희망마저 빼앗아 버렸다. 작가는 이 기구한 운명을 놓고 사회 구조적 모순을 파고 들거나 개인 성격의 결함을 탓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실화에 기반한 비극적 운명이 특수한 인물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도처에 존재하는 삶의 모습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소설은 흑인이자 여성 노예로서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담론은 확장될 수 있다. 세서와 빌러비드의 기묘한 관계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외적 갈등이 아니라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유령을 가지고 산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회한의 망령이므로 결국에는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유령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또한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과거의 망령은 개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과거의 유령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트라우마인 동시에 미국의 오랜 치부의 역사가 현현된 망령이기도 하다. 이민자의 나라'이자 인류 박해에 관한한 뼈아픈 오류를 경험한 미국이 지금 새로운 박해의 역사를 쓰려고 하고 있다. 더 이상 소수가 아니지만 여전히 소수자로 머물러 있는 타자에 대한 담론이 왜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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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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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선 소설가의 스테레오타입을 내던진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이를테면 '비주류 작가'의 소설과 삶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비주류이기는 커녕 일본 작가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을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당연히 비판도 많았지만, 그 결과는? 그의 열렬한 독자이든 아니든 그가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무라카미의 소설 쓰기는 제도화된 문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는 대중성에서도 작품성에서도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는 소설을 쓰고 읽는데 있어서 개인의 영감과 꾸준함, 치열함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는 기성의 순수문학에 걸맞지 않는다는 세간의 평에도, 이쿠타가와상을 받지 못한 작가라는 한계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했다. 오히려 일본 순문학계의 외면은 그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하루키를 국제적 작가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런 독자적인 행보는 우리의 문학계 현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기성 문단이 요구하는 적절한 기준에 맞는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역으로 이 책은 우리가 제도 문학 속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검수된 작품만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치열하게 쓰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인데,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들이 많다는 말이 되겠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 소설이 재미있는가? 대부분이 '소설에 따라서'라고 하겠지만,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외국의 장편소설들에 비해 우리 소설은 그저 한국어의 아름다운 문체와 유려한 쓰임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볼 것이 없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다가 멈춘 뒤에 다시 손이 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스토리텔러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너무 없다. 적어도 문학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작품들이나 어떤 이유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소설만 보면 그렇다. 소설이 스토리텔링이 전부가 아니고 일종의 언어 예술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역시 스토리텔링에 있다. 한국 소설에는 이것이 너무 철저하게 빈약하다. 장편소설이라고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대개가 단편의 장면들을 확장해서 장황하게 늘려놓았다는 느낌이 들 뿐, 단편에 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하고 쓸 거리가 한정되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문학을 좌지우지하는 제도 어느 한 구석에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무언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독자의 손에 닿기 전에 그 무언가에 의해 엄중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독자가 볼 수 있는 글은 한정되어 있다. 그 '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작가들은 재미있는 글 같은 것은 애초에 쓸 생각을 않는다. 독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만을 수용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소설은 '재미없는 것' 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독서 인구가 낮다고 한탄하는 말이 많이 들린다. 다른 국가와 독서량을 비교해 놓은 수치에서 우리나라는 항상 꼴찌다. 국민의 문화적 수준을 탓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세상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는 대체로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제도 문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인터넷 공간을 떠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즐거워한다. 이야기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이야기만 있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통로는 무언가로 꽉 막혀버렸다. 독서 인구 수치에 대해서 독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간단히 말해 재미가 없으니 안 읽는 것이다. 독자 이전에 그 생산의 매커니즘에 문제가 없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고 잘 쓴 소설은 평론보다 독자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독자는 재미있는 소설을 향유할 기회를 일정부분 박탈당하고 있으니 읽을 소설을 고르는 안목도 역시 무뎌졌다. 그래서 '수상작'이거나 '베스트셀러' 따위의 문구에 현혹되어 그것이 훌륭한 소설인냥 받아들이게 된다. 훌륭해 보이지 않고 간혹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 교양의 일천함이나 수준 낮음 탓이지 책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준을 제멋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쿠타가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이라는 말에 훌륭한 책이라고 판단하고는 책을 집어든다.


문학이란 창의적인 영역이다. 작가는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등단이라는 예술발전을 저해하는 기형적인 제도가 있어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는 깊숙이 감추어 놓아야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신춘문예나 이런 저런 문학상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틀이 있고 그에 맞지 않으면 비난받고 '정식'으로 작가가 될 기회가 차단된다.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직업에 모범답안이 있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가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 문학은 영원히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기성 제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해 냈다.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답답한 제도 문단을 해외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는 너무나 견고한 기성 체계의 틀을 깨고 자신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없거나, 지나치게 외면당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 지망생들의 서재 서랍 속에는 수많은 놀라운 이야기가 먼지가 소복히 앉은 채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독자의 평가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창작할 자유도 향유할 자유도 제도라는 틀 속에 갇혀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하루키처럼 치열함과 확신으로 가득찬 외골수가 어디선가 튀어 나오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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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에 대한 논평.
    from 별처럼님의 서재 2017-03-18 17:26 
    한 블로거의 서평에서 전재.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의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