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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망각과 기억은 그것을 잇는 '탐색'이라는 장치로 인하여 서사에 힘을 실어준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다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조우하게 된다. 마들렌의 맛에 대한 기억은 마르셀에게 콩브레에서의 평화롭던 어린 시절을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 <맛>에서의 그 '맛'은 간단하게 마르셀의 마들렌과 같은 기억을 매개하는 맛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르셀의 마들렌'이 잊어버린 것만 같았던 기억을 회상해내는 단초가 되는 것에 비해 이 소설의 주인공 '나'의 '마들렌'은 그 형체가 희미하다. 오히려 그는 역으로 그 자신의 마들렌을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나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찾는 맛은 기억 혹은 추억으로 환기된다. 그의 삶에 있어 '단 하나의 진리'인 그 맛은 그것과 함께했던 순간에 의해 규정지어진다. 할머니의 구운 정어리, 마르트 이모의 토마토, 일본인 요리사가 직접 떠주던 회, 데트레르 삼촌의 새우 요리, 해수욕을 마친 뒤 먹었던 모로코 빵, 애완견 레트에게서 풍기는 브리오슈의 냄새, 미국에서 먹은 버터 토스트, 정부 마르케의 소르베 아이스크림에 이르기까지 기억은 맛을 떠올리고 그 맛은 또 다른 기억을 더듬는다. 주인공이 이 기억의 끝없는 연상작용을 통해 결국에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슈케트를 지목했던 것은 성찬과 같이 계속되는 음식의 화려한 향연이 그 본질을 감추고 있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러한 메타포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 주인공의 직업이 요리 평론가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식탁을 지배하는 군주이자 주인인 '나'는 일평생 훌륭한 요리를 화려한 수사 속에 가둬두는 일에 몰두해 왔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요리 비평가라는 자부심을 역설하는 '나'의 부르짖음과는 달리 그의 말로를 지켜보는 주변인물들-딸, 아들, 손녀, 아내, 정부, 조카 등-의 시선에는 경멸과 조소가 가득하다. 그것은 음식을 해부하고 뒤집고 비틀어냄으로써 인류의 원초적인 기쁨을 조롱하던 늙은이에 대한 가차 없는 증오다. 죽음을 48시간 앞두고 있는 성공한 평론가가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던 '단 하나의 진리'가 그의 인생 전체의 결핍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들의 시선과 '나'의 경험의 연상이 이끌어내는 소설의 말미에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슈케트가 자리한다. 이 흔한 프랑스 과자는 우리가 방과후 허름한 분식집에서 사먹던 값싼 떡볶이 한 접시와 같은 맛이리라. 슈케트에 대한 갈구는 음식 평론가로서의 일평생 동안 오로지 맛을 분해하고 분석하며 참맛을 외면해 왔던 주인공이 삶 속에 순수하게 녹아들었던 음식의 맛으로 회귀하는 순간이자 원초적 기쁨을 회복하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오감은 인지하지 않고도 느끼는 즉물적인 것이므로 누구나 그것에 접근하기가 쉬운 법이지만, 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단 하나의 '맛'을 탐색하는 것이 전부인 이 소설은 어떤 잃어버린 사람이나 사물을 찾는 과정을 그린 책에 비해 언어에 훨씬 공을 들인다. 작가의 출세작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나타나는 절묘한 사유와 언어의 향연은 이미 전작인 이 소설에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화려한 수사에 봉인해버린 참된 맛의 기억을 찾아가는 한 노인의 이야기지만, 그 메시지와는 별개로 소설 자체는 오히려 화려한 수사의 덕을 보고 있다. 미각은 때로는 시각으로 때로는 후각으로, 또 때로는 청각으로까지 전이된다. 다양한 감각의 이미지화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의 효과는 침이 고이게 하는 사실성이 아닌 추상적 사유로 귀결된다. 음식의 맛을 삶에 묻어있는 추억과 그것에 관한 철학적 사유로 되살려낸 문장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