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삶의 가장 큰 화두는 엄마와의 여행이다. 여행은 무조건 혼자 떠나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이해받지 못하던 그간의 습성이 최근들어 바뀌기 시작한 것도 엄마와의 여행 이후이다. 여행에서 동행자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들은 고독한 여정에서 외로움을 상쇄시켜 주는 대신 자유를 어느 정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면 배려하는대로, 안하면 안하는대로 힘들다. 민폐와 양보 사이의 어디쯤에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찾아야 하는 마음의 부담을 항상 져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담에서 벗어날 때, 동행자는 여행의 특별한 손님이 된다. 긴 여행을 함께한다는 것은 하루 중 24시간을 온전히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 세 끼 밥을 함께 먹고 같은 곳에 가고, 같은 것을 본다. 부모, 형제, 배우자라고 해도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함께 지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여행지의 하루를 함께하는 일은 일상의 며칠을 더한 것보다 더한 밀도로 감지될 수밖에 없다. 여행을 함께한다는 것은 때로는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나고 나면 밥상 머리에서도 티비 앞에서도 무수한 할 이야기들이 생긴다. 단 며칠의 여행도 그러한데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의 여행에서 동행자는 평생을 풀어내도 다 하지 못할 이야기 보따리를 공유한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태원준의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는 두 가지 점에서 다시 없을 여행기다. 첫째는 아들이 엄마와 함께 떠난 여행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 여행이 300여일에 걸친 세계 일주라는 점이다. 엄마가 동행인이 아니더라도 세계일주의 경험은 그 자체로 버라이어티한 이야깃거리를 남길 수밖에 없고, 세계일주가 아니더라도 장성한 아들과 환갑 어머니와의 교감 자체는 특별한 귀감이 될 것인데, 이 책은 이 두 가지 흔하지 않은 상황을 모두 아우르는 유니크함을 지녔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의 동기에서부터 여정, 여행 방식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특별하다. 여타의 여행기에서 얻는 것이 공감과 대리만족이라면 여기서는 동경과 교훈까지도 얻을 수 있다.
자녀를 데리고 가는 여행이나, 친구 동료 연인 등이 함께 떠나는 여행과 달리 부모를 모시고 가는 여행에서는 더 많은 자유를 담보해야 한다. 낯선 장소에서는 대체로 부모 자식 사이의 보호와 의존의 관계가 역전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여행의 모든 기준을 엄마에게 맞추어 놓고 그 자신은 충실한 가이드를 자처한다. 그러나 책이 진행될수록 엄마는 수동적인 관광객이 아닌 스스로 여행을 즐기는 적극적인 자유여행자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아들이 여행의 보호자가 아닌 동반자가 된 것이다. 작가는 이 특별한 여행의 주인공으로 엄마를 초대했다고 하지만, 엄마는 스스로가 여행의 주인공이 된다. 이제 아들은 엄마가 집에 가자고 할까봐가 아니라, 집에 가기 싫다고 할까봐 걱정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사이좋은 모자의 여행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00여 일을 여행하는 동안 아들은 슈퍼맨 노릇을 하는 것에 지쳐가고, 엄마는 그런 아들을 배려하느라 마음에 담아 둔 말을 하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 여행의 동행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오는 갈등이 여행 100일만에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부자는 이 위기의 해결책을 여행 안에서 찾는다. 이들이 여행의 휴식기로 선택한 날들은 어찌보면 가장 여행다운 순간으로 보인다. 얽매이는 일 없이 자신에 집중하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시간 말이다. 당연히 모자는 이 시간 동안 새로운 여행을 위한 에너지를 듬뿍 담아 간다.
모자의 세계 여행기라는 것이 이 책의 독특함이라고 한다면, 자유여행자의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체험담은 보통의 여행에세이에서 기대되는 생생한 여행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작가는 여행 도중 호텔 호객꾼의 어이없는 수법에 걸려들거나 야간 버스에서 아이폰을 도난당하는 등 알려질대로 알려진 뻔한 사기에 당하고 만 황당한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또한 열악한 야간 열차나 털털거리는 버스 이동,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 투숙 체험 등을 통해 장기 여행자의 긴축 재정에 대한 생생한 현장을 보고하는가 하면, 여행지의 웅장한 유적과 아름다운 경관에 넋을 빼앗기는 모습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들 여행은 계획한대로만 진행되지도 않는다. 리장, 치앙마이, 자카르타에서 휴식을 위해 여정을 잠시 멈추는가 하면, 쏭크란 물축제를 맞기 위해 캄보디아에서 하루만에 짐을 싸 방콕으로 향하기도 하면서 여행이 지니는 예측불가능성의 매력을 끝없이 설파한다.
어머니의 환갑과 은퇴 기념, 그리고 위로를 겸해 떠난 여행은 엄마에게 '자기 자신'을 되찾아 주는 여행이 된다.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의 기쁨을 환갑이 지나서야 다시 알게된 엄마의 성장기이자, 효의 실천에 대한 조금은 무모하고 대담한 아들의 모험담이다. 대단한 효의 본보기는 많이 있지만 자식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보다 큰 효의 실천은 없을 것이다. 부모를 내 삶으로 초대하는 일, 그것의 즐거움을 이 책은 쉴새 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