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서
일란 파페 지음, 백선 옮김, 이희수 감수 / 틈새책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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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주장은 명확하다. 시온주의는 식민주의고,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짓은 인종 청소라는 거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10가지 신화에 균열을 일으킨다. ‘강에서 바다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제 자리를 되찾고, 평화가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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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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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알게 된건 유시민 때문이다.
2022년인가? 자신이 그 해에 읽은 책 중에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관심 목록에는 넣어뒀지만 딱히 읽고 싶지는 않았다.
빨치산이라니, 생각만 해도 버거운 단어.

근데 내가 하는

독서 토론에 이 책이 채택되었다.
독토 핑계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시대가 변했구나'
이런 책을 수용하고,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세상이구나.
80년대 비해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여유가 생겼구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80년대가 90년대라면 나올 수가 있었을까?
그런 책을 쓸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그 당시에 이 책이 나왔다면
좌파든 우파든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거다.

우파는 빨갱이 책이라고 비난했을 거고,
좌파는 변절자 책이라고 비난했을 거다.

80년대에 이 책을 썼다면
결국은 태백산맥이나 남부군 되었을 거다.
근데 지금 세상은 그 만큼의 여유가 생긴 거다.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이 재미있게 읽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보다 몇 년 앞서긴 하지만 60년대에 태어났고,
사회주의 혁명노선이 지배했던 80년대 학생운동권이었던
유시민이라면 당연히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동체 의식을 가진 부모에게 냉소적인
개인주의적이고 씨니컬한 작가에게 공감이 갔다.

나는 이 책이 화해에 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와 우파가 싸웠던 시대에 대해,
농촌과 도시가 벌어졌던 전통에 대해,
아버지와 자식이 틀어졌던 가족에 대해.

빨치산의 딸로서 겪었을 숱한 고난과 노고를 속에 담아두고서
훈훈하고 먹먹한 인간애로 외피를 감싸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역량은 탁월하다.

마치 진한 사골 국물에 고기 만두를 넣어서 끓여진,
맛있는 만두국을 먹는 듯하다.
뜨겁고, 진하고, 계란까지 풀어져 있고, 파도 동동 떠있다.
국물은 진하고 만두는 고소하다.
근데, 그 만두 속 한 가운데는 빨간 매운 속이 살짝 들어가 있다.
빨갱이라는.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놓아준 순경이,
아버지의 부대에 합류하려고 할 때,
순경을 쫓아낸 아버지와
먼 훗날 다시 만나서 나눈 대화.
두 사람이 나눈 대화다

"왜 그랬능가요? 참말로 한 번 반동은 영원한 반동이라 그랬능가요?"
"질 줄 알았응게"
"예?"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 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오"
"은혜를 갚을라는 것은 신념이 아닝가요?"
"아니오. 그것은 신념이 아니오. 사람의 도리제. 그짝은 순겡을 그만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소. 글먼 된 것이오. 긍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자개 앞가림이나 함시로 잘 싸시오."

그렇다.
나는 가장 기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도리, '인간애'라고 생각한다. 이념이건 혁명이건 정치건 연애건 인간에 대한 애정이 시작이고 끝이다.

근데 사람의 도리나 인간애란 말은 너무 막연하다. 그래서 나는 그걸 약자에 대한 연민, 어려운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라고 한정 짓는다. 그게 알파고 오메가다. 그게 없이 지식이고 신념이고 종교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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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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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그리고 감동적이어서, 슬프면서도 따뜻해서.

재밌는 소설을 읽을 때는 다음 이야기를 빨리 알고 싶어서 후딱 후딱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두려움을 느낀다. 너무 빨리 다 읽을까봐.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리메이크 한 책이라고 한다. 20세기 말의 미국을 배경으로. 아버지 없이, 약쟁이 엄마 밑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비참하고 가혹한 현실 속에서 부딪히고, 망가지고, 좌절하고 그러면서도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나는 알아서 태어났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은 알아서 태어났다. 그리고 알아서 살아간다. 사람들의 악의와 음모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 속에서. 삶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읽는 내내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초강대국에 대해서, 그 안의 무식하고 난폭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들을 여럿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어린 주인공의 엄마가 거칠고 폭력적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이다. 새아빠가 된 남자는 어린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가정 폭력은 미국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는 것이다. 현실이 얼마나 더럽길래 맨날 단골 소재가 될까?

술과 약에 찌들고 총질이나 해대면서 강한 남자 행세하는 놈들이, 어린 아이와 약한 부인에게 폭력을 휘둘러 대는 장면들을 보면 욕이 튀어 나온다.
'이 새끼들아,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
왜 감당도 못할 결혼에 그리 목을 맬까? 남자나 여자나?

관료적이면서도 인색한 아동 보호 제도, 사람들을 질병과 고통으로 내모는 건강 보험 제도,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약물 중독, 현실을 잊으려는 듯한 스포츠 영웅주의 등 미국의 많은 모순들. 부자에겐 천국이고, 빈자에겐 지옥같다,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하던 엄마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으면서, 어린 주인공이 거칠고 험악하고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그저 비극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엔 악인도 많지만 선한 사람들도 많다. 어린 주인공의 삶은 하루 하루가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지만, 본질적으로 주인공은 낙관적이다. 주인공은 안에 '무슨 일에도 녹지 않을 무슨 금속 같은 게' 있다. 그것은 사랑 아니면 용기일 것 같다. 아니면 둘 다거나.

책 전체에 걸쳐서 애정과 따뜻함이 배어있다. 현대의 다크하고 음울한 작품들과 다르게, 주인공의 잔인하고 가혹한 삶 속에서도 힘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음울한 현실에 절망하기 보다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주인공인 어린 소년에게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소년의 용기가 나를 위로한다.

결국 가혹하고 사악한 현실에서도 의지와 힘을 잃지 않게 만들어 주는 건 삶과 사람에 대한 낙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낙관은 용기에서 나오는 거고. 개같은 현실을 알면서도, 굽히지 않고 부딪히고 싸워나가려는 용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흉칙함 대신 따뜻함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 아직 끝이 아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 과정일 뿐이다.

내가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건 내가 겁장이라서 그런 거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겁장이. 용기 있는 사람이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싸워 가려고 할 때, 겁장이는 패배가 두려워 미리 포기 속으로 도망가 있는 거다. .

19세기 찰스 디킨스 소설을 현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서 그럴까? 현대 소설이면서 옛날 소설 같았다. 19세기의 여유랄까 아니면 어눌함? 덜 잔인하고, 덜 사악하고, 덜 파괴적이었다. 그 모든 악을 다루면서도, 그 모든 악의 빈틈과 희망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 '올리버 트위스트'나 '소공녀' 같은 어린이용 소설책을 읽으며 느꼈던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내가 약간은 순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약간은 외로와지는 것 같기도 했고. 순수함은 외로움을 동반하는 걸까?

상도 많이 받았는데 궁금한 건 '여성 소설상'이다. 상 이름을 봐서는 여성성이나 여성 문제에 대한 상일 것 같은데, 난 특별히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젠더적 관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건 내가 남성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 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이 들어 집중력이 떨어진 나를 몰입시켜 주는 소설. 나에게 감동을 주는 소설. 나를 약간은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소설. 소설의 힘. 이야기의 힘.

이 책을 다 읽었으니 이제 또 다른 재밌는 소설을 찾아야겠다. 소설은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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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섹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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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 재미있는 소설이 나에게 주는 행복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회의적이고 염세적이었던 내가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은 첫사랑에 빠졌을 때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사랑의 혼돈과 열병에 비틀거리고 허우적거리던 나날 속에서도, 사랑이 안겨주는 순간 순간의 벅찬 감동과 평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벼락 맞듯이 인생의 아름다움에 전율했다.


그 후로도 허무하고 우울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은 사랑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그녀를 마주하고 커피를 마시던 어느 순간, 그녀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가던 어느 순간, 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어느 순간 나를 찾아온 평안과 평화속에서 나는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소설이 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이 전해주는 따뜻하고 유쾌하고 편안한 충만감에 가슴이 뻐끈해지고 마음이 들썩거리면, 잠시 책을 덮고 그 즐거움과 행복감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에게는 그 설렘이 소설의 힘이었다. 무슨 쟝르니, 형식이니, 주제니, 의미니, 메시지니, 교훈이니를 다 떠나서. 나를 몰입시키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


이 책 미들섹스를 읽으면서 또 다시 이야기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무슨 특별하고 자극적인 사건이나 장치나 구성이나 비틀기가 없이도, 이야기 자체가 안겨주는 즐거움과 행복감.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재미있는 소설을 좋아했는지 기억이 되살아난다.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설렘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떻게 얘기를 풀어가야 할까? 소설 미들섹스의 재미에 대해서? 이 반짝이고, 진솔하고, 따뜻하고, 세심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현대적이고, 도회적이고, 포용적인 소설에 대해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포용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연한 낙관주의에 대해서. 독자를 물들이는 따뜻함과 여유로움과 관대함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담고서 반짝반짝 빛나는 재미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이럴 때면 나를 관념에 가둬 놓는 말과 글의 한계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미들섹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두 번 태어났다. 처음엔 여자아이로, ...그리고 ... 한 응급실에서 남자아이로"

사용자가 올린 이미지


칼리오페라는 여자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칼이라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그(또는 그녀)에게  '5알파환원효소 결핍증'이라는 단초를 제공하게 될 조부모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리스의 조부모가 미국으로 이민 오고,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중에 칼리오페가 있고.


우리는 보통 성을 남성과 여성 2가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성은 2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성 또는 간성에 대한 이야기는 의외로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한국 근현대 문학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심지어 무협지에서도 간성이나 양성의 존재는 이미 다루어져 왔다. 어지자지니 남녀추니니 하는 좋지않은 어감의 단어들이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영화로도 있었던 사방지는 그 실제의 인물이다.


이 책의 주인공 칼레오페가 바로 간성(間性) 또는 인터섹스(intersex)다. 그러나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그 사람들을 이형(異形)의 변질된 존재로 취급하면서, 성적인 흥미거리로 대상화 시키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신체가(또는 정신이) 약간 다르고, 쉽지 않은 고민과 혼란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전에 인터섹스를 소재로 한 'IS,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이라는 일본 만화를 잠깐 본 적이 있다. 그 만화의 간성에 대한 진지하고 포용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답답해서 잠깐 보다 말았다.


그러나 이 책 미들섹스는 자연스럽고, 따뜻하고, 위트 넘친다. 사춘기를 맞이하는(하물며 염색체는 남자인) 10대 소녀의 불안하고 오묘하고 복잡한 감성을 섬세하면서도 따뜻하게 잘 그리고 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소녀의 성장과 감성으로 나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큰 차이를 뛰어넘는 동감과 공감으로 나를 껴안는다.


섹스나 젠더를 떠나서 그 아리아리하고, 어질어질하고, 휘청휘청하고, 비틀비틀하고, 두근두근하고, 블랑블랑하고, 화끈화끈하는 모든 사춘기 공통의 서투름 속으로 나를 끌어안는다 . 이 소설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 작가가 사춘기를 맞이하는 소녀의 불안과 변덕과 기대와 희망과 혼란을 어찌 그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남자인 내가 너무 몰라서 남자 작가의 제 멋대로의 상상에 속아 넘어 간 것일까?


책은 1,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에서는 좀 지루하기도 하다. 책의 진짜 재미는 주인공 칼리오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2권에서부터 그 빛을 발한다. 인상적인 구절들을 핸폰 카메라로 찍다가 나중에는 포기했다. 예리하게 번뜩이며 나를 자극하는 구절 구절들이 너무 많았다.


책의 후반부에 칼리오페가 칼이 되어 가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는, 생뚱맞게도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라는 범죄 소설의 샌프란시스코가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아침마다 두터운 안개가 깔린다....안개가 도시를 덮은 건지 도시가 안개 위를 표류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었다. ... 안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대가 되자 안개는 비트족의 머리 위에 카푸치노 거품처럼 남실거렸다. 1960년대 안개는 물파이프에서 오르는 마리화나 연기처럼 히피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칼 스태퍼니데스가 도착한 1970넌대에는 안개가 공원의 새 친구들과 나를 숨겨주었다' (미들섹스)


[샌프란시스코는 모든 사람의 도시라고들 말한다. 이곳 주민들만의 도시가 아니라 이곳에 여행을 왔다가 이곳과 사랑에 빠진 모든 방문객들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만 위의 도시, 태평양 해안의 여왕, 빛의 도시, 서해안의 보석. 이곳은 또한 현기증의 도시, 욕망의 도시, 저속한 마력의 도시이기도 하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다음 세상의 매력을 모두 지니고 있는 즐거운 도시임이 틀림없다"]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책의 내용에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두 책의 분위기가 유사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살짝 몽환적이고, 약간 혼미하고, 조금은 거품같은 이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어쩌면 이 비현실적인 몽롱함이 날카로운 현실을 감싸주고 품어주는 따뜻함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책은 그저 나만의 취향을 저격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모든 장점들에 위트까지 갖춘 이 소설의 재미가 그저 나만의 재미일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으로 보이는 제목이나 소재와는 다르게, 특별한 사건이나 연출 없이 담담하고 잔잔한 이야기가 보여주는 그 힘은 그저 나에게만 작용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지혜롭고 위트있게 번뜩이는 문장들은 그저 내 취향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의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궁금해졌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작가의 힘을 그의 다른 책에서도 느낄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이 따뜻하고, 포용적이고, 위트 있고, 감성적인 작가가 다른 책에서도 여전히 반짝거릴 지 궁금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소설의 힘을 느꼈다. 소설이 갖고 있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다시 느꼈다. 그 동안 소설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이제 다시 가까워지고 싶다. 그 이야기의 힘을 또 다시 느끼고 싶다. 그리고 또 다시 설레고 싶다. 뻐근하고 뿌듯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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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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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문만 읽고 본문을 읽는 건 나중으로 미뤄둔 책들이 몇 권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 역사학 교수인 '슐로모 산드'가 지은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이라는 책이다. 원서가 출간된 건 2008년이라고 하는데, 국내 번역본은 2022년에 나왔다.

국내 책이 출간된 직후에 제목에 흥미를 느껴서 서문을 읽어봤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서문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유대인은 혈통에 기반한 민족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종교에 기반한 민족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꼭 유대인의 혈통 얘기가 아니더라도, 막연히 의심하던 내용들을 책의 서문에서 접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근데, 책이 670쪽이나 되었고, 쉽고 편하게 읽기에는 내용이 세밀하고 깊었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서문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 한민족 또한 만들어진 '단일 민족'은 아닐까 잠시 의심하기도 했지만, 내가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나중에 읽을 책으로 미뤄두고, 세월만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책들을 구경하다가 '유대인, 발명된 신화'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만들어진 유대인'과 비슷한 관점의 책이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1980년 후반 이후 이스라엘과 서구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이스라엘 고대사 및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연구 성과에 바탕을 뒀고, 그 중에는 '만들어진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다.


한겨레 신문 국제부 선임 기자 '정의길'이 지었는데, 그는 한글판이 아니라 원서를 읽은 것 같다. 한국어 제목도 다르게 표시되어 있고, 결정적으로 그가 글들을 쓴 것은 '만들어진 유대인'의 한국어 판이 나오기 전인 2020년에서 2021년, 주간지 '한겨레 21'에서다. 그는 '만들어진 유대인'을 포함한 여러 학문적 서적들을 바탕으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압제에 관한, 이해하기 쉽고 잘 정리된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교과서와 미디어와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 '유대인'이 아닌 다른 모습의 유대인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책을 만날 때 나는 즐겁다. 스포츠 뿐만이 아니라 책에 있어서도, 설득력과 스토리를 갖춘 도전자는 관객을 흥분시킨다. 그 치열한 시합을 사람들에게 떠들고 싶게 만든다.


즐겁게 읽기 시작한 책을 분노에 빠져 끝냈다. 유대인들을 탄압한 서구인들에 화가 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는 이스라엘에 치가 떨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을 볼 때 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스라엘이 그 극악한 범죄를 배웠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유대인 차별의 역사가 내 생각보다 더 깊고, 더 강하고, 더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가 아니라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괴물을 키운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금에 와서 가장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문명 국가 행세를 할 때면, 그 뻔뻔함과 위선에 욕이 나오기도 한다. 그들의 부와 민주주의는 유대인 말고도 아프리카와 중남미와 아시아의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 부를 빼앗아서 이룬 문명 아니던가? 그리고 그 자본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때로 평화는 정의보다 급하다.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참상 앞에서 누가 옳고 그르니를 따지는 게 뭐가 급하겠는가? 그보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멈추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누가 그걸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책임져야 할 열강들은 자기들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감옥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불과 8시간 전 뉴스에서 이스라엘이 'UN 학교'를 공습해서 다수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최소 39명을 죽였다고 나온다. 말려야 할 미국의 폭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학살의 끝은 어디일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 죽이면 끝날까? 이란과 시아파 세력들마저 다 죽여야 끝날까? 차별과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처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라는 괴물을 키워내고 있다. '베르세르크'와 다르게 인과율의 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파멸해야 끝날 것인가?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자원은 줄어들고, 인구는 늘어나고, 욕망은 깊어지고, 경쟁은 거세지고,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혐오는 깊어가고, 자연은 파괴된다. 인류의 지식은 계속 쌓여가지만, 인간의 지혜와 이성은 오히려 오그라드는 것 같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인류 문명이 멸망으로 달리는 것 같다.


예로부터 노인들은 '세상이 말세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의 암울한 걱정도 내가 늙어가면서 하는 부질없는 넋두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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