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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2년 2월
평점 :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덮었다.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눈물이 차 올랐다.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떠올랐고,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도 나는 돌아가신 두 분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후 돌아가실 때까지, 그 후 10년 뒤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십 수 년의 시간을 나는 왔다 갔다 하면서 부모님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에 죽음은 휴식이었고, 삶의 마무리였다. 마지막 기간의 처연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휴식을 주는 자비의 손길이었다. 나는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평안을 얻었고,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평화와 안식을 기원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서 계셨다. 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매일 부모님 집으로 출퇴근을 했다. 늙은 부모님을 돌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형도 나도 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포기했던 많은 것들에 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았다.
그러나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름 편안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매우 많이 힘들어했다. 특히, 죽기 며칠 간은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암울한 절망감 속에서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죽음은 나의 문제가 되었다. 나는 많은 순간들을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게 되었다. 미국의 현직 외과 의사가 지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힘든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그 힘들고 괴로웠던 죽음의 시간은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똑같다는 것을. 누군가 태어나는 것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했지만, 죽음 또한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난 내가 돈이 많았다면, 아니면 인맥이라도 많았다면, 아니면 의사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부모님을 좀 더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괜한 자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돈이 많은 사람도, 심지어 노인 전문 의사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이 고통스러웠고, 똑같이 무기력했다. 요양원에 수용되어 '휠체어에 묶인 채 긴장병 환자처럼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지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 과정에서 자유와 삶의 가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다. 삶이 죽음을 향해 무너져가는 그 시간 동안,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존엄을 지킬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좌절했고, 다시 다짐을 했다.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하자. 그러나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죽어가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책은 말한다. 현재 요양 체계의 문제점은 요양 시설이 당사자가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 운영된다는 점이라는 것을. 부모님의 안전에만 몰입해 있는 자식들에 맞춰진 운영을 하면서 당사자의 사생활과 자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와 목적이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우리는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늙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의학과 의학이 만들어 낸 기관들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 자체가 부재한다. 의학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현재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의학과 수용소같은 시설에 자율권을 넘겨야 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요양원 혹은 양로원에서 시들어 가다가 병원에서 죽어가는 길을 대체하는 방법이 늘고 있고, 그 기회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수백 만 명이다. '어시스티드 리빙' 아파트, ‘에덴 올터너티브’ 프로그램, '그린 하우스' 프로그램 등은 요양원을 혁신하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늙어서도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만들려는 새로운 개념이다 .
그래서 노인들을 그냥 안전하게만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생활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율성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가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선택의 범위를 넓혀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한다. 바로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문제에 이런 사고방식을 도입한 것이 바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떠오른 완화치료 분야다.
호스피스 케어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는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우선 순위가 다르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을 때 나는 호스피스 병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주로 종교 시설에서 운영하고, 들어가려면 몇 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만 주워듣고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가정 방문 호스피스 케어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좀 더 신경 써서 알아봤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질병과 죽음 앞에 무지하고 미숙하고 무성의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고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시행 착오를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많은 시간 동안 회한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 어느 날,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갑자기 울음을 쏟아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기어코 서럽게 울어대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리 신경 쓰고 조심했지만, 그래도 부족하고 무지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간병인만 옆에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 시신 앞에서 주저 앉고 말았다. 십 년의 시간을 옆에 있었는데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 옆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가족도 없이 혼자 떠난 어머니가 너무 안타까웠고, 너무 미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발하면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자주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그 힘들고 부끄러웠던 시간은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위로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요양보호사에게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웠고 슬펐다.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아무 것도 준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구나. 그러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외롭지 않았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인가 퍼뜩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를 돌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입장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머니가 어떤 마음인지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그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때도 나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을 할퀴었고, 부족했던 순간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때마다 나를 달래주고,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다. 그 부대낌이 삶이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함께 하는 것. 어머니도 나도 섭섭함과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공유했다.
그 시간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달래주었다. '그래도 나 열심히 했잖아. 기를 쓰고 했잖아. 이제 와서 자책할 필요는 없어'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았던 그 힘들고 우울했던 시간이 이제는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 되었다.
책은 죽음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실 그 이야기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삶의 의미를 가져가고, 어떻게 내 삶의 자유를 지키고, 어떻게 삶의 존엄성을 지켜갈 것 인지에 관한 질문과 고민이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기억을 떠올렸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막상 그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미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마다 나는 다짐해왔다. '이깟 삶에 무슨 미련 따위가 남았을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하자.'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깟 삶, 미련 없이 떠날 게 아니라 이 삶, 여한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만 다짐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죽는 순간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내 삶의 주인은 나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고민하고 걱정할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