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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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덮었다.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눈물이 차 올랐다.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떠올랐고,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도 나는 돌아가신 두 분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후 돌아가실 때까지, 그 후 10년 뒤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십 수 년의 시간을 나는 왔다 갔다 하면서 부모님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에 죽음은 휴식이었고, 삶의 마무리였다. 마지막 기간의 처연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휴식을 주는 자비의 손길이었다. 나는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평안을 얻었고,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평화와 안식을 기원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서 계셨다. 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매일 부모님 집으로 출퇴근을 했다. 늙은 부모님을 돌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형도 나도 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포기했던 많은 것들에 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았다.

그러나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름 편안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매우 많이 힘들어했다. 특히, 죽기 며칠 간은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암울한 절망감 속에서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죽음은 나의 문제가 되었다. 나는 많은 순간들을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게 되었다. 미국의 현직 외과 의사가 지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힘든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그 힘들고 괴로웠던 죽음의 시간은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똑같다는 것을. 누군가 태어나는 것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했지만, 죽음 또한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난 내가 돈이 많았다면, 아니면 인맥이라도 많았다면, 아니면 의사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부모님을 좀 더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괜한 자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돈이 많은 사람도, 심지어 노인 전문 의사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이 고통스러웠고, 똑같이 무기력했다. 요양원에 수용되어 '휠체어에 묶인 채 긴장병 환자처럼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지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 과정에서 자유와 삶의 가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다. 삶이 죽음을 향해 무너져가는 그 시간 동안,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존엄을 지킬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좌절했고, 다시 다짐을 했다.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하자. 그러나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죽어가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책은 말한다. 현재 요양 체계의 문제점은 요양 시설이 당사자가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 운영된다는 점이라는 것을. 부모님의 안전에만 몰입해 있는 자식들에 맞춰진 운영을 하면서 당사자의 사생활과 자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와 목적이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우리는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늙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의학과 의학이 만들어 낸 기관들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 자체가 부재한다. 의학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현재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의학과 수용소같은 시설에 자율권을 넘겨야 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요양원 혹은 양로원에서 시들어 가다가 병원에서 죽어가는 길을 대체하는 방법이 늘고 있고, 그 기회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수백 만 명이다. '어시스티드 리빙' 아파트, ‘에덴 올터너티브’ 프로그램, '그린 하우스' 프로그램 등은 요양원을 혁신하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늙어서도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만들려는 새로운 개념이다 .

그래서 노인들을 그냥 안전하게만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생활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율성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가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선택의 범위를 넓혀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한다. 바로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문제에 이런 사고방식을 도입한 것이 바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떠오른 완화치료 분야다.

호스피스 케어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는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우선 순위가 다르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을 때 나는 호스피스 병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주로 종교 시설에서 운영하고, 들어가려면 몇 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만 주워듣고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가정 방문 호스피스 케어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좀 더 신경 써서 알아봤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질병과 죽음 앞에 무지하고 미숙하고 무성의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고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시행 착오를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많은 시간 동안 회한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 어느 날,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갑자기 울음을 쏟아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기어코 서럽게 울어대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리 신경 쓰고 조심했지만, 그래도 부족하고 무지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간병인만 옆에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 시신 앞에서 주저 앉고 말았다. 십 년의 시간을 옆에 있었는데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 옆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가족도 없이 혼자 떠난 어머니가 너무 안타까웠고, 너무 미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발하면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자주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그 힘들고 부끄러웠던 시간은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위로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요양보호사에게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웠고 슬펐다.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아무 것도 준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구나. 그러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외롭지 않았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인가 퍼뜩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를 돌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입장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머니가 어떤 마음인지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그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때도 나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을 할퀴었고, 부족했던 순간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때마다 나를 달래주고,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다. 그 부대낌이 삶이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함께 하는 것. 어머니도 나도 섭섭함과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공유했다.

그 시간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달래주었다. '그래도 나 열심히 했잖아. 기를 쓰고 했잖아. 이제 와서 자책할 필요는 없어'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았던 그 힘들고 우울했던 시간이 이제는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 되었다.

책은 죽음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실 그 이야기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삶의 의미를 가져가고, 어떻게 내 삶의 자유를 지키고, 어떻게 삶의 존엄성을 지켜갈 것 인지에 관한 질문과 고민이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기억을 떠올렸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막상 그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미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마다 나는 다짐해왔다. '이깟 삶에 무슨 미련 따위가 남았을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하자.'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깟 삶, 미련 없이 떠날 게 아니라 이 삶, 여한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만 다짐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죽는 순간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내 삶의 주인은 나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고민하고 걱정할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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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
톰 행크스 지음, 홍지로 옮김 / 리드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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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도서관에 가면 일단 신간 코너부터 들른다. 그 중에서도 영미 소설 코너를 제일 먼저 들른다. 아, 반납할 도서가 있을 경우에는 일단 반납부터 한다. 그 다음에 영미 소설 신간들을 흩어본다. 눈에 띄는 책이 없을 경우에는 인문이나 과학 분야의 신간들을 흩어본다. 만화가게에서도 그러지만 도서관에서도 동냥 나선 거지 마냥 '뭐 없나'하고 게걸스럽게 책을 흩어본다. 아마 뷔페에서 넓은 접시 하나 들고 눈을 반짝이며 샐러드 코너를 갔다가, 초밥 코너를 들렀다가, 고기 코너를 살폈다가, 후식 코너를 배회하는 모양과 비슷할 거다.

그날은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일단 책이 두꺼웠다. 난 소설의 경우 두꺼운 책을 선호한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경우 소설이 두껍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받쳐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풍성하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기 위함인데, 책이 얇으면 이야기가 너무 일찍 끝나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두꺼운 소설이 재미있으면 그 즐거움을 그만큼 오래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얇은 책에는 손이 잘 안 가고, 두꺼운 소설에 먼저 눈이 가는데 그 책은 두꺼웠다. 그 다음에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이름이었다. '톰 행크스'

톰 행크스? 그 톰 행크스인가? 책을 빼서 작가 소개를 보았다. 맞다. 그 톰 행크스 맞다. '필라델피아', '포레스트 검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빅', '다빈치 코드',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유명한 영화배우 톰 행크스 맞다. 그가 소설도 쓰다니? 게다가 이런 두꺼운 소설을? 소개글을 더 읽어보니 이번이 처음 소설이 아니다. 그 동안도 그는 글을 써왔다. 이 책은 그의 첫 장편소설일 뿐이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최정상의 헐리우드 영화 배우가 장편소설이라니? 그 솜씨는 어떨까? 호기심에 책을 빌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꽤 훌륭한 소설가다. 그의 연기 실력 만큼이나 그의 글 솜씨도 뛰어나다. 그의 영화 만큼이나 그의 소설도 재미있다. 잘 깎여진 밤톨 같은 그의 머리 모양처럼 이 소설도 깔끔하고 산뜻했다. 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은 그가 출연했던 헐리우드 영화를 봤던 느낌과 비슷했다. 군더더기 없는 산뜻한 구성,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깔끔한 화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 살짝 터치만 하고 깊어지기 전에 멈추는 감정선,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정형화된 캐릭터,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투성.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꽤 재미있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그의 글 솜씨다. 그의 연기력 만큼이나 그의 글 솜씨도 빼어나다. 글 못쓰는 작가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영화배우인 그의 글 솜씨는 놀랍다. 왠만한 작가들 뺨친다. 영화배우가 아니라 작가라는 명함을 내밀어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이다.

'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는 영화에 관한 소설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로 담았다. 마블의 어벤져스처럼 히어로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전반적인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만큼 등장 인물도 다양하다. 만화 캐릭터의 모델인 참전군인, 참전군인의 조카이면서 원작자인 만화가, 만화를 보고 영화를 구성하는 정상급 감독, 호텔 직원으로 있다가 감독에게 발탁되어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제작자, 그리고 수 많은 스태프들.

소설은 영화 제작의 단계 단계 마다 그 중심 인물을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톰 행크스는 그 등장 인물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부여했다. 등장하는 한 명 한 명의 삶이 아기자기하게 생동감이 있다. 빠져들만 하면 중심 인물이 전환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흐름이 깨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여럿의 인물 각각에게 자신만의 삶을 부여하는 건 대단한 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기 이야기를 탄탄하게 굳히면서도 하나의 긴 흐름 속에 녹아들어 있다. 마치 모듈을 조립해서 만들어지는 완성품을 연상시켰다. 내 뇌피셜이지만 톰 행크스가 꽤 오랜 기간 공을 들여서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런 대배우가, 일생을 영화에 바쳐서 살아온 노배우가 글까지 이렇게 잘 쓰다니. 글 쓸 시간이나 있었나? 역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재능이다. 톰 행크스는 배우로서도 작가로서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재능을 꽃 피우는 제일 마지막 열쇠인 '노력'이라는 재능까지 그는 갖추고 있다. 경제학자이면서 록커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요 네스뵈'마저 생각났다. 질투가 났다.

배우의 소설이라는 호기심에서 읽었지만 다 읽은 후에는 그는 내게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호기심이 남는다.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들 만큼이나 '웰메이드' 작품이다. 완성도, 연출력, 스토리 텔링등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2% 부족하다.

재미있고 훈훈하고 따뜻한 소설이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없다. 감동이 부족하다. 대중 소설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욕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통속 소설에서도 감동은 있다. 정신을 때리거나, 가슴을 후벼 파거나, 온 몸을 뒤흔드는 감동은 아닐지라도 촉촉히 젖어드는 감동은 있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열정이라고 할까 아니면 혼이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작가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쉽다.

그의 글 솜씨에 치열한 주제 의식까지 더해진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그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배우로서도 왕성히 활동하는 그에게 그런 글을 쓸 시간이나 있을까? 검색해보니 톰 행크스는 56년 생이라고 한다. 하릴없이 뒤로 빼며 늙은이 행세나 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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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AI 강의 2025 - 인공지능의 출현부터 일상으로의 침투까지 우리와 미래를 함께할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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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쓰여진 이 책은 2023년 발행된 '박태웅의 AI 강의'의 개정증보판이다. 저자가 개정증보판을 1년 만에 내게 된 이유는 'AI 분야는 한 달에 몇 년 치 시간이 흐르는 느낌'때문이다.

한 달이 몇 년 치라는 저자의 말이 나는 크게 와 닿는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바둑 경기에 승리하면서 전 세계가 AI에 열광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열광에 대해 '비판적인' 걱정과 관심을 가지고 인공지능에 대해 알아보았다. 여러 AI 관련 책을 읽었고, 밴드에 그 리뷰도 많이 올렸다. 물론, 그래봤자 일반인 상식 수준의 AI 이해도였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버겁다. 내 동체 시력으로는 AI의 변화와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제는 그만 AI를 쫓던 눈을 내리 깔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심지어 AI 강의인 이 책도 그 빠른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책의 작가 서문은 2024년 9월에 쓰였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 전에 쓰여졌다는 얘기일텐데, 중국의 DeepSeek-V3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건 2024년 12월이다. 당연히 딥시크가 불러온 충격과 변화는 담겨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대에 뒤쳐진 책일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AI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장점은 다양성과 포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인간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과 고민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고 균형잡힌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AI의 원칙을 쫓고 있다.

알파고의 출현 이래 AI에 대한 열광이 나는 늘 불편했다. 수 많은 AI 전문가들이 AI의 기술과 능력과 효용과 미래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인간 삶과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민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 많은 인문학자들의 AI가 불러올 인간과 미래의 변화에 대한 전망은 AI 기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환상으로 보였다. 빅테크 기업들의 과다한 선전과 선동이 휩쓸고 있었다.

이른바 'AI 판사'. 사법 개혁에 대해서도, AI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답답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에 대한 염원은 나도 똑같이 갖고 있지만, 최소한 현재의 AI는 그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현대 AI의 원리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다면 내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공 지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AI는 인간이 만든 문물을 학습한 후, 인간의 피드백으로 조정되고 강화된 지능이다. 그래서 AI는 인간의 논리와 지혜 뿐만 아니라 편견과 혐오와 망상까지 가지게 된다. 인공지능은 누가 어떻게 훈련 시키느냐에 따라 히틀러가 될 수도 있고, 스탈린이 될 수도 있고, 간디가 될 수도 있고, 세종대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겠지만.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말은 큰 울림을 갖는다. '우리는 지금 아마도 산업혁명 이래 가장 큰 인류적 사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AI 리터러시가 아주 긴요합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대응책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AI의 기술적 원리와 AI의 효능 뿐만 아니라 그 위험과 그에 대한 규제와 대책까지 다루고 있다.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크로퍼드'의 'AI 지도책'이 AI의 본질에 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고 있는, AI에 관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책은 내용이 어렵거나 원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데 반해, 박태웅의 책은 좀 더 쉽고 현실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AI에 관한 기술적인 원리도 쉽게 다루고 있다.


박태웅의 책 2023년 판은 '알라딘'에서 2024년 인공지능 분야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2025 개정증보판은 2023년 판에 비해 두 배로 두꺼워졌다. '지금 AI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어떤 흐름들이 있는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현한 규제, 위험에 대한 대처, 입법 노력들'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다.

책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히 소개하겠다.

1강.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물결
AI는 다음과 같이 진화하고 있다.
1. 운영 체제로서의 인공 지능 : 모든 소프트웨어가 AI와 연동하게 된다.
2. 맥락 인터페이스 : 정확한 키워드를 입력하지 않아도 인공지능은 맥락을 이해하여 답을 준다.
3. 파트너로서의 인공 지능 :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 일상적인 파트너로서의 기능을 한다.
4. 멀티 모달 : 텍스트 뿐만 아니라 이미지, 음성, 동영상 등 여러 방식의 정보를 처리한다.
5. AI 에이전트 :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도) 한 대의 PC나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는 AI.
6. 인간형 로봇 : 인공 지능이 '몸'을 가짐으로써 텍스트에 제한되지 않는 물리적 세계 모델을 갖게 된다.

2.강. 모두를 놀라게 만든 거대언어모델, LLM의 등장
챗 GPT는 3천 억 개의 토큰과 5조 개의 문서를 학습했다. 이런 인공 지능을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라고 부른다. 챗 GPT는 이런 방대한 데이터로 학습한 후 인간의 피드백을 통한 강화학습을 한다(RLHF).

이는 챗 GPT가 개발, 법률, 언론, 주식 등 잠재된 패턴이 있는 분야에서 위력적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챗 GPT는 예측 모델을 사용하기 때문에 '할루시네이션', 즉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는 챗 GPT의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다. 또한 챗 GPT는 교묘한 요구를 입력하는 프롬프트 인젝션 공격에 취약하다.

3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 질 수 있을까?
고품질의 학습 데이터 사용과 양자화와 지식 증류를 통한 인공 지능 소형화의 흐름이 거세다. PC나 스마트폰 같은 개인용 기기에 탑재되면서 에이전트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4강. 열려버린 파도라의 상자
AI 기술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혜택과 함께 기존 불평등의 심화, 조작 및 허위 정보 유보, 통제력 상실로 인한 인류 멸종 가능성 등 심각한 위험도 가져다 주고 있다.

인간은 AI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 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기술에 대한 감독은 거의 전무하다.

5강.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어떻게 구축할까?
인공지능의 윤리와 관련한 핵심 원칙은 프라이버시, 책임성, 안전과 보안,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공정성과 차별 금지, 인간의 기술 통제, 직업적 책임, 인간 가치 증진이라는 8가지 주제가 꼽힌다.

2020년 로마 교황청은 인공 지능 윤리를 요청하는 성명을 내 놓는다. 유럽연합은 '5년 간의 토론' 끝에 2024년 인공지능법을 발효시킨다. 미국은 2022년 '알고리즘 책무법안'을 발의한다. (이 리뷰를 쓰면서 검색을 해봤는데, 2025년 5월 29일 현재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202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최첨단 인공지능 모델의 안전과 보안에 대한 법안인 SB 1047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다.(검색해보니 이 법안은 주의회를 통과했지만,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선출되지 않은 슈퍼 엘리트들이 거대 인공 지능을 독점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데이터로, 어떻게 학습을 시키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인공 지능의 개발 뿐만 아니라 그 사상까지 독점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국가적 규제와 규범의 확립이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이유다.

6강.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2023년 인공지능 법안을 발의했다. (검색해보니 2024년 12월 국회를 통과했고, 2026년 1월 22일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25쪽에 불과한 법안의 태반은 인공지능 개발 지원에 할당되어 있고 인공 지능의 위험에 대해 다루는 건 적다.

한국 정부의 인공 지능 법안은 '공론화'의 과정이 빠져 있다. 이는 과거 '공인 인증서'처럼 보안을 강화한다면서 보안을 해치는 정책을 떠오르게 한다. 인공 지능 같이 중요한 일을 한 줌도 안되는 IT 분야 슈퍼 엘리트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다. 다양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시민 사회와 이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처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 자료들은 아직도 hwp 아니면 pdf 포맷이다. 이는 표준 포맷이 아니어서 컴퓨터가 처리하지 못한다. 컴퓨터에게는 없는 데이터나 마찬가지다. 또한 정부와 사법부의 데이터 공개는 매우 미흡하다. 한국에서 범용 AI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다.

세계 최고의 후발 추격국이었던 대한민국은 미친 듯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 잡고 엄청난 속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빠뜨리고 건너뛴 것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원천 기술'과 '기초 과학'이다. 원천 기술은 탄탄한 기초 과학에서 나오고, 기초 과학은 아주 긴 호흡으로만 자라난다.

정부의 지원은 유행처럼 주제를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자를 육성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무원들은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법, 전문가들과 함께 집단 지성을 일궈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부가 과학 기술 정책의 호흡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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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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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온 유럽인들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축출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으로 불리는 정착 식민주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은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종결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만 천만 명이 넘었었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침략 전쟁이 끝난 후 겨우 수십 만 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진출하여,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아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을 정착 식민주의라고 부른다. 정착 식민지는 필연적으로 원주민들에 대한 축출과 학살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북아메리카에서 보여진 정착 식민주의는 19세기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알제리 등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20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에 의한 정착 식민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미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신대륙'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시온주의 식민주의자들은 토착민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주인없는 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침략 전쟁은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과 같은 모습으로, 즉 축출과 학살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침략 전쟁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은 팔레스타인 사람 '라시드 할리디'가 지은 책이다. 나는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전부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는 얘기만 들어왔다.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시오니즘은 식민주의고, 시오니스트는 식민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나라는 축출과 학살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있다. 그들의 풍요로운 부와 다채로운 문화는 제 3세계 민중들의 피와 절규를 기반으로 이룬 것들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의 자유롭고 관용적인 민주주의는 그들의 피보다는 우리들, 제 3세계 민중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강에서 바다까지(From the River to the Sea)', 팔레스타인의 본래 영토인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기원하는 이들의 구호라고 한다. 강에서 바다까지 평화와 정의가 복원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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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옮김, 김선형 / 코너스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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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때 데미안을 읽고 이번에, 수 십년 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데미안을 읽은 것은 국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이야기꾼이었던 것 같다. 가끔 소설책 내용을 이야기로 풀어줬는데, 선생님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데미안도 그랬다.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있던 세계 문학 전집에서데미안을 찾아 읽었다. 직접 읽은 데미안은 너무 재미없었다. 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건 카인의 표식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아프락사스'가 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인의 표식도 잊어버렸다. 아프락사스 단어만 머리 속에 남았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은 달랐다. 재미있었다. 소설의 중반 이후에는 다시 이해하기 어려워졌지만 중반까지는 재미있었다. 내 얘기 같았다. 중학교때라도 이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청춘의 방황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일까?

이번에 읽으면서 나를 가장 사로잡은 부분은 방황하는 싱클레어였다. 밝고 허락된 세계의 평온과 축복에 안주하지 못하고, 어둡고 불온한 세계의 원초적 충동과 갈망을 추구하는 삶. 겉으로는 타락한 삶을 유쾌하고 행복하게 실컷 만끽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그랬다. 내 20대, 30대가 그랬다. 방탕하고 흐트러지고 파괴적인 삶을 살았다. 순간 순간의 말초적인 즐거움은 누렸어도, 속으로는 늘 외롭고 갈증났고 괴로웠다. 싱클레어처럼 "사랑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과 이룰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보다 더 상처받기 쉽고 수줍음 많은 사람은 없었다." 어쪄면 40대, 50대에도 계속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싱클레어의 방황하고 자학하는 심정은 바로 내 얘기였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나는 술집에 앉아 큰소리치며 별나고 짖궂은 방식으로 세상과 싸웠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내 나름의 저항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망가져갔다. 만일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 없다면,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더 좋은 자리, 더 나은 일도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거라곤 망가지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한 손해는 세상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방황과 갈등을 끝내듯이, 나도 매번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방황과 갈등을 끝냈다. 싱클레어처럼 나에게도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었다." 나 또한 "경계선이 아니라 그저 다른 종류의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싱클레어와 내가 다른 것은 그 이후다. 싱클레어는 그 이후 에바 부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데미안을 보고, 에바 부인을 본다. 그리고 그 합일을 통해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제자리였다. 베아트리체를 놓치면 나는 다시 원래의 허무와 혼란과 갈망의 세계로 돌아갔다. 다시 베아트리체를 만날때까지. 에바 부인을 보면 그 문턱에서 나는 주저 앉고 괴로워하다가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싱클레어는 새로운 신을 찾고, 굳건한 신념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나에게 새로운 신은 필요 없다. 신은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존재이다. 싱클레어의 신념은 나에게는 맹목으로 보이고, 싱클레어가 추구하는 초월적인 존재에서 나는 독재자를 느낀다.

왜 이렇게 달라질까? 그건 아마도 내가 표식이 없기 때문일 거다. 나는 카인의 표식을 지닌 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카인의 표식을 지닌 싱클레어와 같은 시선과 같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불온하고 위험한 느낌을 받았다. 후반부의 싱클레어에게서 절대주의와 파시즘의 맹아(萌芽)를 느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헤르만 헤세를 검색해 보았다. 그는 나치와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였던 모양이다. 내가 책에서 느낀 불안과는 다르게.

책을 한 번 더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냥 관두기로 마음 먹었다. 언제가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내 생각을 갖고 내 삶을 살면 되지, 굳이 헤르만 헤세의 생각과 삶을 쫓을 필요는 없으니까.

최근 '채식주의자', '단순한 열정' 그리고 '데미안'까지 이른바 '순문학' 소설을 연이어서 읽었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 소설들.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문학을 싫어했는지, 그리고 다시 문학에 재미를 느끼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재미를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이 책들에서 내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단면들 또는 내 모습의 일부들. 자신을 찾아가는 일'은 여전히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나는 문학이 싫었을 거다. 힘들고 어렵게 간신히 읽은 책에서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럽고, 유치하고, 탐욕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어찌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을까? 부끄럽고 고통스러웠겠지. 당연히 문학을 외면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나는 다르다. 찌질하고 추한 나 자신의 단면을 보거나 일부를 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버틸 수 있는 맷집이 생겼다. 비겁하고 비루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체념을 가질 만큼 오래 살아왔다.

게다가 문학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은 깨진 거울이나 굴절된 조각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과 비슷하다. 파편화된 조각의 내 모습이나 굴절된 조각의 내 모습은 나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쪼개지고 굴절된 내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약간의 어긋남은 나를 몽환적으로 꾸며준다.

그래서 문학은 멋진 신세계다.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머리를 박으면 만나게 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알몸의 나 대신, 문학이라는 패션으로 치장한 자신을 보여 주니까. 문학은 추함을 예술로 포장해주니까. 이렇게 나이 먹어서 나는 이제 문학이라는 패션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좀 더 즐기고 싶다.

자, 이제 '데미안'을 읽은 나의 소회는 일단 여기에서 끝내겠다. 헤르만 헤세는 나의 알을 깨지 못했고, 나는 아프락사스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에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있다. 비록 퇴색되고 금이 갔을 망정.

그러나 괜찮다. 산다는 것은 퇴색되고 금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언제든 '재생'의 가능성이 있다. 재생이 없다 한들 그건 그거대로 괜찮다. 그게 삶이니까. 초월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의 의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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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2025-11-08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라는 자아의 패션, 멋진 통찰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