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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고전을 읽어드립니다 -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민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3년 5월
평점 :
필독서라는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으니 그걸로 퉁쳐도 되지 않을까? 아님 요약본을 읽어볼까? 누군가 써놓은 후기로 대신할까? 아는 척은 해야겠고... 어렵기도 하지만 분량이 만만찮은, '누구나 다 알지만 정작 읽은 이는 없는' 고전을 대할 때마다 겪는 갈등이다.
읽으면야 읽겠지만 페이지만 넘길 뿐 국어시간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뭘 얘기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썼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고, 등장하는 인물의 관계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고, 이름은 낯설어 외우기도 힘들다. 누구였더라? 찾아보다가 시간만 가고, 이야기가 끊겨 짜증 나고... 고전 읽기가 힘든 이유다.
<서민의 고전을 읽어드립니다>는 기생충 학자로 알려진 서민 교수의 고전문학 감상문이다. 서민 방식의 고전 읽기다. <제어 에어>, <부활>, <돈키호테>, <파우스트>, <안나 카레니나>, <죄와 벌>, <백년의 고독>, <페스트>, <농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신곡>, <아들과 연인>, <호밀밭의 파수꾼> 범접하기 어려운 내로라하는 고전 13개를 선별했다.
'여타 고전 해설서와 달리 여러분이 알게 될 새로운 진리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고전은 역시 힘들어요'라고 징징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징징거림이 고전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나만 어려운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p. 10)'
자칫 고전만큼이나 어려운 문학 전문가들의 해석이 딸린 감상문과 달리, 술술 읽히고 재미 요소가 있어서 고전? 이참에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이 책 최고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어디 가서 아는 척할 수 있는 대목들을 각 작품마다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포인트도 아니고 엉뚱한 면도 있어 약간의 차별화로 주목받기도 가능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카튜사가 네흘류도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잘못된 사과였다고 말한다. 사과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시기를 놓쳤고, 피해자 관점에서 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과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 요 대목을 대화에서 이렇게 활용해 볼 수 있다.
"<부활>에서 말이지, 레홀류도프가 카튜사에 제대로 사과했다면 어땠을까?"
<제인 에어>에서는 '선택'을, <돈키호테>에서는 돈키호테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파우스트>에서는 '너무 나대지 말자'라고,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자기 일의 중요성'... 등등은 잘난 척할 때 유용한 아이템이다.
솔직함도 서민 교수 감상문의 재미 포인트다.
<안나 카레니나>의 등장인물들은 이름도 긴 데다가 별칭도 있고, 게다가 마구 섞어 놓아 어지러웠다고 평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주인공에게 집중하지 않고 곁다리로 빠지는, 조시마 장로의 일대기, 콜랴 크라소트킨이라는 소년의 이야기 등 때문에 책이 두꺼워졌다고 원망한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같은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해 헷갈리는 걸 빼놓으면 재미도 있고, 야한 장면도 제법 있어 강력히 추천한다고 한다. 반면 D. H. 로런스의 <아들과 연인>은 '외설 시비로 삭제되었던 상당 분량을 복원...' 이란 문구에 혹해 사서 읽었지만 변죽만 올렸지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며 낚시였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신곡>에 대한 평이 압권이다. 마치 전화번호부를 정독하는 느낌이었다고 혹평한다. 낯선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각주를 찾아보자니 너무 어이없었고
'이런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어서, 단테가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알 필요가 전혀 없을 만한 인물들이다. 단테와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사람, 단테의 친구. 당시 통치자 등등 정말 많은 사람이 나오니, 내가 괜히 전화번호부 읽는 느낌이다'라고 얘기한 게 아니다. (p. 216, 217)'
모든 문장에 비유와 은유까지 가득해 읽는 내내 심심이 피폐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읽으면 포기하기 쉬우니 여러 명이 같이 읽을 것을 권한다.
고전을 읽으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저자의 답은 이렇다. 우선 뿌듯하다. 워낙 완독한 사람이 드무니 그 자체로 권력이 되기도 하고. 어려운 걸 해냈으니 인내심, 자신감도 생긴다. 그리고 읽다 보면 재미를 느낀다.
김영하 작가는 산문집 <읽다>에서 고전은 당대의 진부함과 정반대에 서서 싸워야만 했던 책으로 고전의 가치를 인정했다. 쭉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었으니 베스트셀러가 되어 살아남았을 터이고.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것만으로 힘들게라도 고전을 읽어야 만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서민 교수가 언급한 이득을 덤으로 얻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