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예수 -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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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 신앙이 아빠 덕분에 모태 신앙이 된 딸아이와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준비했지만 아직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차별 금지법'에 대해 의견을 나눴었다. 보수 기독교(우리 가족은 장로교 통합인 교회를 다니고 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와서인지 딸아이도 '차별 금지법'을 반대했다. 이 법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보수 기독교 주장과 결이 약간 다르지만 동성애가 죄란 입장이다. 만약 타고난 것이라면? 딸아이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좀 달리 생각해 볼 문제라고 답했다.

또 하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천지창조를 비롯한 구약성서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하는가였다. 딸아이는 사실로 나는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심판의 문제도 왜 사람을 죽이고 못된 짓을 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냥 놔두는지 딸아이는 불만이었다. 왜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어야 하는지 되물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 우리 편의나 일방적 상상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내 생각을 말했다.


'내가 '철학자'라는 표지를 사용하는 것은, (...) 예수의 가르침이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만 제한될 필요가 없고, 또한 제한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모든 생명'을 향한 사랑, 환대, 책임, 용서, 평등의 가르침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 332)'

<철학자 예수>는 왜 예수님을 철학자로 접근해야 하는지, 우리가 철학자로 만날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지,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 용서, 환대, 평등과 정의의 철학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21세기, 예수님이라며 무엇을 했을까를 전해준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p. 36)'
이 질문에 교회 목회자로부터 들어 예수님을 알게 됐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우리 가족에게 저자인 강남순 교수는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님을 알려준다.

교회에서 만난 익숙한 예수님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새롭게 성경을 번역해 인용한다. 예수님과 듣는 사람 사이의 위계를 없애기 위해 예수님의 말도 존댓말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종교적 범주를 벗어나도록 '신'이라고 했다. 성경 말투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일상 언어로 성경 구절을 번역했다.

그리고 철학자 예수를 만나는 여정에 주요 철학자 자크 데리다, 존 카푸토, 한나 아렌트의 말이 예수님의 말과 함께한다.


교회라는 제도에서 딸아이가 가진 의문들, 동성애, 창조과학,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선악을 제재하는 공의의 하나님 등에 대한 사유를 확장 가능케하는 책이다.

동성애는 모든 젠더와 성, 즉 시스젠더, 트랜스젠더, 간성의 사람들 모두 인간임을 인정하면 된다. 예수님이 사랑하고 실천한 대상은 모든 인간이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욕심을 그만 내려놓으면 된다. 그리고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됐어야 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억울하고 분해서 우리가 화풀이하려고 만들어낸 하나님의 표상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옳고 그름을 떠나 딸아이에게 이 책을 권해보려 한다. 판단은 딸아이의 몫이다. 또한 기독교라는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철학자 예수님의 삶이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당신의 길을 밝게 비춰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굳어진 종교적 교리에 갇힌 예수, 혐오와 차별에 호명되는 예수, 배제와 심판의 예수로부터 경계 없는 사랑, 타자에 대한 연민, 모든 사람을 평등하고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 대하고 구체적인 모든 종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개입하고 연대하는 그 예수로 구해내야 하는 것이 바로 21세기 '예수 구하기' 운동이며 철학이 되어야 한다. (p. 349)'


딸아이에게 천국도 내세보다는 지금 한 번뿐인 소중한 나의 삶에서 이뤄보자고 했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론 웃고 울고 슬프고 기쁘겠지만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삶을 추구하며 닮아가려는 삶, 그것이 아빠가 생각하는 천국이라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제시하는 '길, 진리, 생명'이란 결국 모든 생명이 서로 따스한 온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함께 살아감의 철학"이다. (p. 354,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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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10주년 한정 특별판, 양장)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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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p. 7, 첫 문장)'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하던 날 계엄군 총에 목숨을 잃은 중학교 3학년 동호라는 소년의 슬픈 이야기다.

정대는 문간채에 누나와 사글세로 사는 친구다. 시위대 사이에 끼어있던 열다섯 살 동호는 계엄군 총에 맞아 쓰러진 정대를 두고 달아난다. 정신을 차리고 죄책감에 친구를 찾아 나선 동호는 임시 안치소가 마련된 상무대를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시신 수습을 도우며 시민군에 참여한다. 계엄군이 도청 무력 진압에 돌입하던 날 형과 누나들이 동호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동호는 고집을 피우며 도청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그날 목숨을 잃는다.

작가는 시체로도 증언할 기회조차 없는 실종자, 죽은 정대에게 목소리를 내주어 실종자의 한을 풀어준다. 이어서 그날 동호와 같이 있었던 고등학생 누나 김은숙과 임선주, 대학생 형 김진수 그리고 동호의 어머니를 등장시켜 동호에 대한 회상과 그날 이후 이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삶을 얼마나 힘겹게 지탱해 가는지를 들려준다.


해병대에 입대해 1982년 10월 자대 배치받았을 때 제대 두 달을 앞둔 선임 기수가 있었다. 데모 기수라고 불렀는데 1980년 데모하다 잡혀 강제 입대당한 대학생들이었다. 훈련병 시절부터 어느 정도 고참이 될 때까지 이들은 구타와 함께 끔찍한 괴롬힘을 당했다.

'그때 나는 수유리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집에 돌아오면 대문 안쪽에 떨어져 있는 석간 ㄷ일보를 집어 들고, 좁고 긴 마당을 따라 걸으며 머리기사를 읽었다. 광주 무정부 상태 5일째. 사진 속의 검게 그을린 건물들. 이마에 흰 띠를 두른 남자들로 가득한 트럭, 집안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침통했다. 안돼, 오늘도 전화가 안돼. 대인시장통의 외가에 엄마는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 (p. 208)'

1980년 5월 '광주 무정부 상태'일 때 나는 재수생으로 서울 종합반 학원으로 다니며 입시 준비를 했다. 그러니깐 내가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해병대 데모 기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철역에서 전경들이 내 가방을 뺐어 거꾸로 쏟을 때 폭력이 두려워 그 수치를 참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쏟아진 것들을 가방에 주워 담았던 걸 보면 나에게 항쟁 주체로서의 모습은 없고 비겁함이 얼핏 보인다.


손석희 앵커는 2016년 5월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던 날,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한강이 천착해온 주제라며 <채식주의자>가 개인과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다룬 거라면 <소년이 온다>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폭력을 다룬 것이라고 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p. 17)'

광주 시민에게 폭력을 가한 세력을 국가라 할 수 있을까? 권력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권력을 지키려고 폭력을 휘두른 반란군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라면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이들에게 총을 쏠 수 없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p. 117)'

국가라면 두 손을 들고 내려오는 어린 학생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할 수 없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 133)'

국가라면 조금은 당당한 구석이 있었을 텐데, 겁에 질려 허세 떠는 모습뿐이다. 양심, 광주 시민들은 약했지만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양심은 무서웠다. 계엄군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팔십 만발(광주 사십만 시민의 두 배) 탄환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광주 시민의 양심을 보자 겁에 질려 총질만 해댔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p. 114)'

배고픔을 참지 못해 남은 카스텔라와 환타를 먹어도 되냐고 묻는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죽음 택했을까. 이데올로기도 뭣도 아닌 삐뚤어진 영화놀이로 두려움을 감추는 비겁한 당신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양심을 이 소년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 135)'

1980년 5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자살률이 11퍼센트라고 한다. 광주 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죽음과 싸우고 있다. 이들이 주고받는 말은 "죽지 마. 죽지 말아요."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p. 207)'

그 당시 광주에 있었던 군인이라면 이젠 진실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잘 살고 있다면 트라우마와 죽음에 맞서 아직도 싸우는 사람들과 비교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당신들 곁에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업어 병원 앞에 내려놓고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던데. 사람을 맞히기 싫어 하늘을 향해 총은 쏘고 시신 앞에서 군가를 부를 때 입을 다물고 있던 군인들도 있었다던데.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래야 하지 않은가. 편안해선 안되지 않는가? 깊숙이 감춰둔 양심을 꺼내야 하지 않을까?

끝내 양심을 버리고 국론 분열을 말하면서 이제 그만 광주는 잊고 미래로 가자고 말하는 부류에 서기로 했는가. 소년이 오고 있다. 당신에게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소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겠지만, 당신은 소년이 온다면 벌벌 떨 것이다. 언제까지 두려움을 감추고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릴 텐가.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술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쉽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 192)'

소년이 오면 소년이 좋아하는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고 꽃이 핀 곳으로 이젠 우리가 소년을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애도하며 장례도 치러야 하고. 언제까지 장례를 미뤄두며 작별하지 않을 텐가.


'114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p. 69)'

초록이 가득한 오월이 오면 하루쯤은 다른 색깔을 떠올려야 한다. 하루쯤은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선 안된다. 1980년 오월 문명의 도시에서 핏빛 저항이 있을 때 재수 종합반 학원을 다니며 항쟁의 주체로 나서지 못했으니 오월이 올 때마다 하루만큼은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돌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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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중독 - 실패 혐오 시대의 마음
롤란드 파울센 지음, 배명자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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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으로 식생활과 주거환경 그리고 건강관리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중세의 왕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고 한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아폴로 11호에 탑재한 컴퓨터보다 700배나 더 큰 메모리와 10만 배 더 좋은 성능을 갖춘 기계다.

그런데 왜 걱정과 불안은 늘어갈까? <걱정 중독>은 걱정과 불안이 어떻게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됐는지를 파헤치는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떻게 미래, 원인과 결과, 위험과 재앙,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좇는다. (p. 14)'


사냥과 채집으로 먹을 것을 얻어 소비하는 공동체에게 과거와 미래는 그들의 자아상과 세계관에 미미한 영향을 미친다. 최근까지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온 산족의 경우,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부모와 조상이 누구인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내다보는 미래도 불과 며칠에 불과하다. 오로지 '지금'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미래를 대비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그들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농업으로 지연된 소비가 가능해지면서 미래는 걱정거리가 됐다. 통제할 수 없는 날씨나 병충해를 대비하려면 지금보다는 미래에 주의를 더 기울여야 했다. 내년에 가뭄이 들면 어떡하지? 불안하다. 지금 발생하지 않았지만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가뭄을 상상하니 걱정이 생긴다.

'만약에... 이면, 어떡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생각이다. 인지 연구에서는 이것을 반사실적 사고라고 부른다. (p. 76)'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와 마찬가지로 후회에서 비롯되는 '만약에 ...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의 결과 역시 지금 벌어진 사실이 아닌 '반사실적 사고'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걱정을 하며 살게 됐을까? 인류는 역사의 95퍼센트에 달하는 약 20만 년 동안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지 않고 잘 살았다. 먼 훗날을 내다보지 않았다. 시간관념은 인류에게 미래를 선물했다. 미래의 지평선을 끝없이 확장하는 상상력으로 미래 비전을 지어내어 걱정거리를 찾아냈다.

현대인에게 신비한 건 없다.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지식이 인류에게 있으니 걱정거리는 더 는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무실 밖으로 나길 일도 큰 걱정이다. 세상은 또 얼마나 위험해졌나. 머릿속도 복잡하다. 생각하며 생각할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만 든다. 게다가 남들이 나를 비정상으로 보는 것 같아 그것도 걱정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걱정 스위치를 끄려고 노력한다. 그럴수록 걱정거리가 더 머릿속에 가득해진다. 불안에서 벗어날수록 불안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걱정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걱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미래는 어차피 불확실하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가만히 앉아 비현실이 가득한 걱정을 그만두고 일어나서 행동해야 한다. 모든 힘은 행동에서 나온다.

'행동한다는 것은 재앙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재앙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위험을 감수하든 회피하든, 재앙이 일어날 위험은 그대로다. 하지만 모든 재앙이 미래의 일은 아니다. (p. 401, 402)'


뉴욕의 건설노동자 가운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모호크 인디언 부족은 유난히 고소공포증이 없는 줄 알았다. 모호크 족은 높은 곳에서 불안해하지 않았다. 마치 땅에서 걷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좁은 들보 위를 걸어 다녔다. 모호크 족이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를 생각하며 몸이 굳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뭘까?

'"하루에 서너 번씩은 거의 떨어질 뻔합니다." 인터뷰에서 한 모호크 족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해요. 나중에 누군가가 '아까 네가 아래로 떨어지는 줄 알았어'라고 말하면, 그제야 그 일이 떠오릅니다." (p.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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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로봇 와일드 로봇 1
피터 브라운 지음, 엄혜숙 옮김 / 거북이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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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처음 만난 로봇은 아마 <우주소년 아톰>이었지 싶다. 그다음 중학생이 되었을 때 등장한 로봇은 잘 보지는 않았지만 <마징가 Z>, <로보트 태권브이>다. 이 로봇 모두는 지구를 위해 인간을 위해 악당을 무찌르는 활약을 했다.


<와일드 로봇>은 그림책 작가로 널리 알려진 피터 브라운이 어린이 독자를 겨냥해 쓴 소설이다. 작가는 늘 로봇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악당이 나타나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면 어린 나도 아톰이 나타나길 간절히 기대했다. 매력 넘치는 로봇은 흥미진진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야생의 삶에도 늘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어린 나도 나지막한 뒷동산에서 하루 종일 놀곤 했다. 나무에 올라가고, 개미도 관찰하고 가끔 멀리서 여우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한 로봇과 야생은 피터 브라운이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로봇이 자연에 버려진다면 그 환경에 잘 적응할까?' 또 '자연은 로봇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로줌 유닛 500개를 실은 화물선에 폭풍우에 침몰했다. 야생의 섬에 로줌 유닛 7134, 로즈(작가는 롯봇에게 여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만이 살아남았다. 폭풍을 견디고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로즈는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동물들과 친해지기 시작한다.

'로즈는 생존 본능을 느꼈다. 그 본능은 위험에서 벗어나게끔 컴퓨터 뇌에 설정되어 있었다. (p.23)'

어느 날 로즈는 절벽을 타고 내려오다가 미끄러지면서 기러기 둥지와 같이 떨어진다. 로즈는 가족을 잃은 기러기 알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를 키우며 엄마 역할을 한다.

로즈는 거칠고 황량한 곳을 정원으로 바꾸고, 아픈 동물을 도와 치료하기도 하고, 밧줄과 바퀴를 만들어 동물 친구들을 돕기도 한다.

'로즈는 자신이 야생성이 강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동물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로즈는 여우와 함께 짖고, 새들과 함께 노래하고, 뱀과 함께 쉭쉭거렸다. 오소리와 함께 뛰놀고, 도마뱀과 함께 일광욕하고, 사슴과 함께 숲을 뛰어다녔다. 그해 봄, 로즈는 정말이지 야생 동물 같았다. ( p. 215)'


<와일드 로봇>으로 로봇을 처음 대하는 아이들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로즈가 내가 어릴 적 만난 로봇들처럼 싸우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봇을 정의의 사도로 알고 자란 나는 어른이 돼서도 로봇을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요즘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로봇과 같이 살아가야지라는 생각보다 '저 터미네이터 같은 놈들... 지능이 장난 아니던데 날 해코지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이 앞선다.

이야기꾼 피터 브라운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로봇이야기의 주인공 로즈는 야생을 없애거나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오히려 야생이 되기로 한다. 교감한다. 가족애를 동물들에게 선물한다.

아톰이 아닌 로즈를 로봇으로 처음 만난 아이들은 로봇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까? 로봇은 무엇에 관심이 있을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기계보다 인간인 자기를 더 많이 닮았다고 여길 수도 있고, 철이 전하는 차가움보다 따스함을 느낄지도 모르겠고, 나처럼 경계하기 보다 함께 지낼 대상이란 생각해 먼저 들 수도 있다.

나의 생각과 아이들이 가질 생각 중에 어떤 것이 옳을까? 아예 이런 질문, 즉 옳고 그름이란 잣대를 로봇에 들이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로봇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미래일지도...

'"여러분은 제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러니 모두 함께 모여 자연과 우리의 삶을 축하해요!" (p.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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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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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은 이십칠 년 전, 즉 작가가 이십 대 막바지일 때 쓴 스무 살 주인공 이경의 가족 이야기다. 어떤 소설을 쓸까 고민하던 중 조경란 작가가 문학적 주제로 삼은 건 '가족'이었다. 이 소설 덕분에 작가는 고단하고 불안했던 이십 대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가족이라는 주제는 제 문학의 시작이었고, 그 출발의 책이 바로 <움직임>입니다. (p. 7, 개정판 작가의 말)'


주인공 신이경('나')은 스무 살이 됐을 때 엄마를 잃었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나'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새로운 가족에게 간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은 할아버지, 여섯 살 많은 이모, 열두 살 많은 삼촌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목욕탕집 일 층으로 여섯 가구가 한 개의 공중 화장실을 이용한다.

'나에게 새 가족이 생겼다. 밥상을 차려놓고 식구들을 기다린다. 상 위에는 네 벌의 수저가 놓여 있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아침이면 혼자 어두운 방 안에 남겨진다. (p. 13, 첫 문장)'

이모는 키가 몹시 작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 주름은 엄마를 빼닮았다. 하루 종일 농협에서 돈을 세고, 퇴근 후 집에서 새벽녘까지 공부한다. '지긋지긋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모는 '나'를 부를 때 이경아, 라고 부르지 않고 꼭 성까지 붙여 신이경이라고 부른다.

삼촌은 늑막염에 걸렸고 등허리께 손가락만 한 물혹이 달려있다. 그래서 매일 한 움큼씩 알약을 털어 넣는다. '나'는 삼촌과 말을 섞은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삼촌과 함께 시멘트보다 모래를 더 많이 섞은 벽돌을 만든다. 이 벽돌로 지은 집이 금방 무너지리란 걸 둘도 안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엇갈려 들어와 집에서 마주칠 일이 없다.

외가 쪽 사람들은 말이 없는 편이다.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 같다. 모두들 식성도 제각각이다.

'아무도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누구의 배 속도 빌리지 않고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 이곳에서는 시간도 늘 완류로만 흐르고 있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38)'

삼촌에게 삼촌보다 두 살 더 많은 여자가 있다. 삼 층 안마시술소 안내원으로 삼촌을 비롯해 외가 식구들은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앞 방 남자는 우편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천애고아이거나 버려진 사람으로 '나'처럼 타지 사람임이 분명하다. 같은 처리란 생각에 '나'는 그 남자에게 관심이 많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쉰여덟 살(2023년)에 작고한 김미현 평론가는 이 소설의 작품 해설에서 불행은 우성優性이고 행복은 열성劣性이라고 말한다. 불행은 마치 혈액형처럼 유전된다. 그런 이유로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진다. 반면 행복은 노력해야만 하고 돌연변이같이 돌발적인 사고로만 발생한다.

'행복은 행복과 만나야만 행복이 되고, 불행은 행복을 만나도 불행이 된다. 그것이 우성인 불행의 운명이다. (p. 108, 작품 해설)'

하나 남은 엄마라는 가족을 잃어 불행한 '나'는 새로운 가족에 합류한다. 그 가족이 행복해도 불행이 행복을 만나 불행한 법인데, 불행하게도 그 가족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서로 무관심한 불행한 가족이다. 주인공 '나'도 외가 식구들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외가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불러주는 이모마저 '나'가 남이라도 되는 듯 성까지 붙여 이름을 부른다.

게다가 이 가족을 보호해야 할 할아버지와 삼촌이란 벽은 그들이 모래를 많이 섞어 쉽게 부서지도록 만든 불량 벽돌로 쌓은 벽과 같다. 단단하지 못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나'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앞 방 남자는 이모와 함께 떠나버렸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나'와 외가 식구들이 달가워하지 않던 삼촌의 여자는 삼촌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 삼촌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삼촌의 여자는 서로 이름을 불러주는 가족이 된다.

'내 이름은 신이경이에요. 나는 이모처럼 진저리 치는 시늉을 하며 뇌까린다. (...) 아가씬 내 이름 알고 있어요? (...)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안마시술소 안내원이나 아니면 이모가 불렀던 것처럼 그 여자, 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삼촌은 그녀를 어떻게 부를까. 내 이름은 양미순이에요, 양미순. 그녀가 후르륵 제 이름을 알려준다. (p. 101)'

불행이 우성이라서 지긋지긋해서 가족을 거부하고 떠나면 가족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불행한 곳에 남거나 찾아 들어온 사람이 가족이 된다. 머물러 있는 듯해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족을 떠난 할아버지와 이모가 남긴 넓어진 공간에 '나'의 조카와 삼촌의 여자가 들어섰다.

새로운 가족은 이전의 가족과 다르다. 이제 서로 이름을 알고, 삼촌의 여자는 이모에게 부르듯 '나'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이모처럼 어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삼촌의 여자 뱃속에 있는 아기, 어쩌면 그 아기의 발가락은 할아버지나 삼촌의 뭉툭한 발가락이 아니라 그녀의 하얗고 기름기름한 발가락을 닮을 수도 있다. 불행한 피가 조금은 희석되어 돌연변이 행복이 가족에게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그 아이가 가지고 태어날지도 모른다.

'가족을 버리거나 떠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가족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한계가 있다. (p. 121, 작품 해설)'

불행한 가족이란 이유로 그 가족을 없애버려야 할까? 그 집에 더 이상 행복이 없으니 모두 떠나버려야 할까? 아니, 그곳에 남아 행복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불행이 우성이라서 지레 겁먹고 좌절해하거나 떠나서는 안된다. 불행의 벽 틈을 헤집어 행복의 빛이 스며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끊임없이 움직여 불행과 행복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집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도망 쳐봤자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단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가려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는 곳, 그곳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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