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하나 옮김 / 성림원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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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다툰 다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라며 후회하곤 한다. 속마음과 다른 말이나 행동이 나왔음을 뜻하는 속말이다. 흔히 일본 문화에 속마음을 이르는 혼네(本音), 드러내는 마음인 다테마에(建前),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들 한다. 일본 사람뿐일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싶다. 갈등은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은 주인공인 '나'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의 친구 'K'를 비롯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마음 변화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20대 초반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는 학생인 '나'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도쿄에서 가까운 가마쿠라 해수욕장에서였다. 선생님은 서양인과 함께 있었다. 선생님에게 끌린 나는 도쿄로 돌아와서도 선생님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선생님의 아내와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도쿄에서의 선생님은 해수욕장 만난 선생님의 첫인상과 뭔가 다르다. 일도 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갔다. 아내의 따르면 대학 졸업하기 전 친한 친구가 자살을 했는데 그때부터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왜 선생님의 친구가 왜 자살했는지 아내는 모르는 눈치다.

'"미움을 받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이는 세상을 싫어해요. 세상이라기보다 인간을 싫어하죠. 그러니 그 인간 중 하나인 나도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p. 55)'

선생님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듯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대학 졸업 후 고향을 찾은 나는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두툼한 편지를 받는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눈앞에 있지만 형에게 아버지를 부탁하고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도쿄로 향한다. 열차 안에서 선생님이 보낸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한다.

"... 틀에 찍어낸 듯한 악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평소엔 다 선한 사람들이에요. 적어도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갑자기 악인으로 돌변하니까 무서운 겁니다. 그러니 방심하면 안 돼요." (p. 86)'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편지를 읽어나가며 선생님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 같은 말을 했고 자신을 포함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됐는지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선생님은 부모님이 병들어 죽고 난 후 작은아버지를 의지하면 살았다. 하지만 믿었던 작은아버지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 선생님을 속인다. 이 일을 계기로 선생님은 절대 남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나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하숙집 아주머니와 장차 아내가 될 아주머니의 딸, 아가씨까지도 불순한 의도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친한 친구 'K'가 선생님이 사랑하는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털어놓자 불안해진 선생님은 아주머니에게 따님을 달라고 부탁한다. 이 사실을 안 K는 자살한다. 선생님은 K의 죽음을 통해 자신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진다. K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이 작은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는다. 마침내 선생님은 K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속죄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알 수 없는 마음에 휘둘리는 삶을 산다. 아내와 다툼도 속마음과 다른 어떤 마음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나는 내 마음을 믿을 수 없다. 그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나타난, 마음이 품고 있는 감정들, 망설임, 질투, 열등감, 고독, 동정, 연민, 후회, 죄책감 같은... 이 모든 것들이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돌변한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야기했듯이 세상엔 틀에 찍어낸 악인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란 동요가 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겨울에 마음은 하얗게 변할 것이다. 왜? 산도 들도 모두 하얀 눈으로 덮여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마음은 주변에 의해 변한다. 그러니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나 자신의 마음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모두 속마음과 드러내는 마음,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마음은 심하게 갈등할 것이고. 안타까운 건 그 마음조차 다른 사람에겐 알려도 숨겨야 할 딱 한사람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외부 어디서 비롯됐는지, 속마음인지 드러내는 마음인지...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

'나는 나의 과거를, 선악을 불문하고 타인에게 참고로 제공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내만은 예외로 해주십시오. 아내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싶습니다. 아내가 내 과거에 대해 간직한 기억을, 되도록 순백의 상태로 보존해 주고 싶은 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도 아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에게만 털어놓은 나의 비밀을, 가슴 깊이 묻어두기 바랍니다. (p.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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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베네 가족 여행은 이렇게 - 2025년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
이선영 지음 / 라플란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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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베네 가족 모두 심심해진 어느 날, 가족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항상 그렇듯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늦잠 자고 배를 놓치고... 첫날부터 계획은 어그러진다.

아이디어를 낸 끝에 풍선을 타고 가기로 한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어느새 그 동네와 친해진다. 가족이 함께 돌아다니기도 하고, 각자 놀아보기도 한다. 드디어 집에 가는 날...

"안녕 우리 집! 잘 있었어?"
"집에 오는 여행이 제일 좋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야 진정한 여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다. 그냥 방랑일 뿐... 그러니깐 결국 돌아올 곳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여행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셈이다.

내게 여행은 가기 전에 귀찮다가, 가면 세상 즐겁다. 그리고 밤마다 집으로 돌아갈 날을 꼽는다. 즐길 날이 며칠 안 남아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집이 그리워서다.

어릴 때 우리 아이들도 여행 가면 상상하기를 즐겼을까? 딸아이는 먹는 것에만 관심 많아서... ㅋㅋ 가끔 여행 갔던 일은 물어보면 기억해 줬으면 했던 건 기억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 털어놓는다. 실망한 아내가 못내 아쉬워 한마디 한다.
"아니 그때.... 그걸 어떻게 기억 못 할 수가 있어? 전혀 기억이 안 나? 잘 생각해 봐~"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같이 동행한 친구 찬스로 출판사 대표이신 이선영 작가님이 직접 사인(글씨체에도 베베네 가족 느낌이...)해주신 그림책 <베베네 가족 여행은 이렇게>를 선물받았다.

미야화구와 365북스의 화구 지원으로 수채화로 작업한 그림책이라는 소개 글을 읽었다. 수채화만이 주는 감성이 아이들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아이들이 그림 속에서 맘껏 상상을 펼치길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그렇게 간절한 이유는 일찍이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렸던 상상이 제한된 디스토피아가 그 아이들이 커서 지내게 될 사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릴 때부터 묻자마자 획일적인 답을 알려주는 AI와 각종 디지털 기기의 발달이 주는 편함에 둘러싸여 생각할 틈을 갖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마 그림책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이선영 작가님 같은 분들이 여럿 있을 테니까... 그런 걱정은 제발 기우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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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 전장의 눈물, 운명의 날 역사 딥 다이브 1
김휘찬 지음 / 한언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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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전쟁을 시작하고, 부자는 무기를 대고, 가난한 사람은 자녀를 제공한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인들은 미소를 지으면 악수를 하고, 부자들은 생필품의 가격을 올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녀의 무덤을 찾아간다.'
- 세르비아 속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또 전쟁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의 참혹함은 인류가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은 살아있나...' 그리고 인간이란 부조리하고 허무한 존재라는 결론에도 이르게 됐다.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쟁사를 전해주는 김휘찬의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 전장의 눈물, 운명의 날>은 제2차 세계대전을 낳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로 확산 전개되는 과정을 각국의 승패와 운명을 갈라놓은 전장의 하이라이트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작전에는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타협과 갈등은 물론, 독선, 오해에서 비롯된 판단 오류 등 다양한 뒷이야기가 숨어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그 전날 독일 친위대 소속 특수부대가 폴란드 군복을 입고 위장해 가짜 선전포고문을 낭독한 일이 빌미가 됐다.

사막의 여우 롬멜은 계속되는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은 무시하고 후퇴 결정을 했다.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결행했던 공격 역시 리비아를 지키라는 정식 임무를 어긴 롬멜의 독단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 파기하고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 작전인 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전쟁을 시작했다. 4년간 벌어질 이 전쟁을 절멸 전쟁이라는 일컫는 이유는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생활권과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곳에 사는 열등한 슬라브 민족을 절멸한다는 프로파간다 때문이다.

'<전쟁론>의 저자이자 군사학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Carl von Clausewitz 가 말한 것처럼, 전쟁은 결국 정치의 연속이자 상대 방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무력 행위입니다. 따라서 '의지의 강요', 그것이 곧 전쟁의 목표가 되겠죠. (p. 110)'

사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에서 민슈타인은 예비로 남겨둔 제2친위기갑군단을 투입해 소련군을 돌파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기갑군단은 히틀러에게 이탈리아 방위 업무를 부여받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만슈타인은 조금만 더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히틀러의 생일 바로 다음 날인 1945년 4월 20일 소련군 포병부대는 베를린 시내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위중한데도 편집증적이고 신경질적인 히틀러는 여전히 혼자 망상에 사로잡혀있었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대들을 지도 위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계속해서 전쟁을 지휘하던 그가, 처음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습니다. "우린 전쟁에서 진 거야!" (p. 252)'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옥처럼 아름답게 깨져 흩어진다'는 뜻으로, 최후의 한 명까지 후퇴하지 않고 죽음으로 싸운다는 의미의 '옥쇄'명령을 민간인에게도 강요했다. 이런 격렬한 저항은 미군에게 '작은 섬에서도 이 모양인데, 본토에 상륙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걱정을 만들어주었다. 그런 생각은 '승리가 확실한 가운데 병사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있을까'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격렬한 저항이 없었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 보이'와 '팻맨'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 (p. 279)'

지금도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의 사람들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그런 처지에 있다.

정권 연장을 위해 정치인은 전쟁을 불사한다. 거대 방산업체는 있는 힘껏 전쟁을 부추긴다. 힘없는 국민들의 아이들은 전쟁에 동원돼 죽어나간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언젠간 끝날 것이다. 정치인들이 만나 악수하며 협정을 맺을 것이다. 전쟁 복구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될 것이고, 자식, 친구, 이웃을 잃은 전쟁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은 상처가 너무 쓰라린 나머지 신을 원망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서로 불신하게 될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무언가 배웠어야 함에도 인간은 그러기보다 또 전쟁을 시작하고 무기를 대고 자녀를 제공한다. 악수하고 물가는 올라가고 자녀의 무덤을 찾아 슬퍼할 것이고... 신에게 화풀이하고 세상이 부조리하다 원망하는 짓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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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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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내 속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환상 그 자체였다.

그때 내 옆에 앉은 발레를 전공하는 연인으로부터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프리마 발레리나 1인이 2역을 하며 푸에테 32회전을 아름답게 소화해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사귀는 여자와 발레 이야기를 하려면 쓰이는 용어와 웬만한 작품의 스토리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공부했다.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p. 26)'

나탈리아 레오노바, 그녀는 무용수 가운데 가장 희귀한 점프 능력을 타고난 점퍼였다. 예술가는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나타샤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천재였기 때문이다. 천재는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

나타샤는 전 세계 모든 발레학교 중 가장 섬세하고 우아하기로 정평이 난 상트페테스부르크 바가노바에 니나 베레지아와 합격한다. 그곳에서 소피아와 페료자를 만나 우정을 쌓으며 이들 넷에게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모스크바 국제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로 선정된 나타샤는 볼쇼이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 사샤, 볼쇼이 발레단의 남자 수석 무용수 드미트리를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샤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당수스 에투알, 최상위 수석 무용수 제안을 받고 사샤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나타샤는 <지젤> 공연을 앞두고 추락한다. 지젤이 젊은 귀족 알베르의 비밀을 알고 충격에 빠졌듯이 나타샤는 사샤와 드미트리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알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개선문 로터리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미끄러지는 무언가에 나타샤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두 개의 헤드라이트가 하나의 둥근 빛으로 합쳐지면서 도시 전체를 지우고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날개를 얻은 이카루스처럼 환히 웃으며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p. 464)'

사고로 은퇴한 지 2년 지나 나타샤는 다시 샹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정상에 있던 나타샤에게 상처를 줘 바닥으로 떨어뜨린 드미트리와 사샤가 있었다. 드미트리는 나타샤에게 지젤 역을 부탁하며 사샤와 함께, 사고로 못다 한 <지젤> 공연 마무리를 제안한다.

'"음. 첫째, 너를 보고 있으면 꼭 날 보는 것 같아. 두 번째 이유, 유감스럽게도 네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발레리나라서. 정당한 평판이지." 몸을 일으킨 그가 요새에 솟은 두 개의 탑처럼 길고 튼튼한 다리로 우뚝 선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아무에게도 절대 얘기하지 마. 나한테도 하지 말라고. 내일 런스루 리허설에서 보자." 이 말과 함께 드미트리는 홱 뒤돌아서 자리를 뜬다. (p. 490)'


한 인터뷰에서 김주혜 작가는 <밤새들의 도시>를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신은 나탈리아 레오노바에게 천재적인 점프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했다. 버티다가 결국 신에게 사랑을 내주고 <지젤> 앞에서 추락했다.

나타샤에게 아직 신이 준 점프라는 날개가 꺾이지 않고 남아있었다. 날갯짓에 안간힘을 써 새들처럼 그의 집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글쎄, 아마 저기가 집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세료자가 창문을 당겨서 닫으며 말했다.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주 강렬한 본능이지.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더 강렬한." (p. 515)'

<지젤>에 향한 사랑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지젤>과 함께 날아오르는 날갯짓에 쏟아부었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알리스 볼라트 프로프리스 Alis volat propriis (p. 518)' 자신의 날개로 날아올랐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그녀는 주어진 삶에 그녀의 '세계'를 창조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세계를...


그동안 낯설었던 발레 작품과 발레 용어를 읽다 보니 이십 대 막바지에 만났던 그녀가 떠올랐다. 희미했던 그녀가 다시 뚜렷해졌다. 그쪽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주말마다 마산에서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올라왔었다. 마침내 발레로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녀의 석사논문은 '발목 부상에 관한...' 것으로 기억한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그녀는 '예술과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대로 사랑도 포기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예술과의 사랑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슬펐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을 텐테. 높이 날아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신의 그녀에게 점프 능력을 주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예술가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힘겨웠을까?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 어쩌면 천재에게만 주어진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천재가 아닌 우리는 예술 간의 사랑이 아닌 그냥 사랑만 했어야 했다. <밤새들의 도시>,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발레 용어들이 날 다시 아릿하게 했다. 발레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시절, 발레만큼이나 환상적이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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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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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노선을 따라가는 버스에 앉아 생각한다. 이 버스가 바닷가로, 숲속으로, 고즈넉한 들판으로 날 데려다주기를. 하지만 내가 그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 한, 내가 생각한 그곳, 그곳에 절대 갈 수 없다.


<너무 늦은 시간>
공무원 카헐은 약혼자 사빈이 왜 자신과 파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약혼반지를 찾는 기뻐해야 하는 날이긴 하지만, 추가 비용이 있다는 말에 주인이 호구로 여기는 것 같아 화를 냈고, 사빈이 구사하는 영어가 이상할 때 지적하곤 했다. 사빈이 짐을 들일 때도 사빈의 물건이 많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아이랜드 남자들이 여자를 "씹년"이라고 부르는 걸 이상하게 여겨 그냥 아일랜드 관습이라고 설명했다. 사빈이 식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어줄 때도 그러려니 가만히 있었다.

'"당신, 여성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여성혐오자라는 거야?"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캐보면." 카헐이 말했다.
"뭐?"
"파보면'이 아니라 '캐보면'이라고." 그가 말했다.
"봤지?" 그녀가 말했다. "이것도 결국 똑같잖아? 당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요만큼도 봐주질 못하는 거야." ( p. 39)'

카헐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빈을 생각하며 말한다. "씹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하인리히 뵐은 죽으면서 자신의 집을 작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남겼다. 뵐 하우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주인공은 음식을 먹고 글을 쓰려고 하는 데, 독문학 교수라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뵐 하우스를 둘러보고 싶다는 그는 여주인공이 대접한 케이크도 먹고 대화를 나눈 다음 나가다가 한 마디 한다.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건데, 그런데 당신은 작가라면서 하인리히 뵐의 집에서 케이크나 만들고 있군요."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뭐라고요?"
"하인리히 뵐의 집에 와서 케이크나 만들고 옷도 안 입고 수영이나 한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매년 찾아오는데, 항상 똑같아요. 대낮에 잠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집이나 가고!" (p. 76)'


<남극>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며칠 동안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떠난 여자는 감옥을 개조한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끌리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당신한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남자가 말했다. "보살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 " (p. 92)'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남극을 경험한다. 침대에 묶인 채 어릴 때 생각했던 지옥, 반쯤 얼어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지옥을, 그곳에서 영원을 생각한다.


관계가 빠개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무리 친밀한 약혼녀일지라도 "씹년"이라며 여자를 혐오하거나 심지어 그녀에게 주는 건 뭐든지 아깝다고 생각하면 그 친하고 가까운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관계는 엉망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할 걸 상대방이 갖고 있다는 질투에 눈이 멀어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면 낯선 관계는 시작하지도 못한 채 깨져버린다.

아이들과 남편 뒤치다꺼리만 하는 부인이라면 어떤 한 남자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그런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꿈이 영원한 지옥이 되어 관계가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p. 7)'

옮긴이 허진은 10년씩의 차이를 두고 발표한 세 단편을 다양한 남녀 관계를 보여준 작품으로 묶는다. 남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는 한쪽 시각에서 보면 터무니없다. 내가 볼 때 혐오인데 다른 쪽은 그냥 관습일 뿐이다. 오만무례한 행동이 분명한데 한쪽에선 여성작가가 하도 한심해서 하는 충고다. 지금 현실이 행복하지만 또 다른 현실을 엿보려는 객기를 부려본 것뿐인데 그쪽에서는 자신이 꿈꾸던 현실로 끌어다가 묶어 놓는다.

한 쪽이 사라지거나 아님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갈 것이고 나는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지 걸어가면 된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냥 버스에 앉아 있기로 마음을 정하고 내가 평소에 알던 곳이지만 그 목적지로 가면 된다. 한 발은 버스에 걸치고 한 발은 버스 밖으로 내미는 건?... 그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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