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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위하여 ㅣ 소설, 잇다 4
김말봉.박솔뫼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월
평점 :
근대 여성 작가들의 주요 작품을 현대 여성 작가들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소설, 잇다' 시리즈 네 번째 <기도를 위하여>는 김말봉의 소설 세 편, 박솔뫼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 각각 한 편, 문학평론가 박서양의 해설을 담았다.
작가 김말봉은 소설을 왜 쓰냐는 질문에 '돈 벌려고 쓰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소설은 순수와 통속을 떠나 재밌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인 셈이다. 김말봉은 3.1운동으로 구금됐었고, 공창 폐지에 앞장서는 등 여성의 지위와 인권 보호에 앞장선 여성운동가였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장로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주로 여성으로 그들의 생활상과 욕망을 보여준다.
작가 박솔뫼의 작품 속 주요 화두는 산책과 배회라고 한다. 문어와 구어의 경계를 허문 것이 글의 특징이며, 삶이란 논리적이지 않으며 거칠고 불규칙한 것임을 그의 글에 담아낸다.
김말봉의 <망명녀>
여학교 시절 돈을 훔친 것이 들통 나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로 인해 명예와 직업을 한꺼번에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책임지게 된 순애는 기생이 된다. 기생 생활에 지쳐 미쳐가던 때 여학교 친구 윤숙이 찾아와 빚을 대신 갚아주고 순애를 데리고 나간다. 윤숙은 순애를 극진하게 보살피며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만 순애는 담배와 모르핀을 끊지 못한다. 어느 날 사회운동을 하는 윤숙의 애인 윤이 순애 앞에 나타났고 순애는 그를 사랑하면서 삶이 변한다.
'그러나 번개같이 무슨 생각이 내 마음에 지나갔습니다.
'이때이다. 이 기회이다. 나도 사람이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에 몸과 다리는 떨렸습니다. (p. 47)'
타락한 순애를 구원한 건, 순애가 목숨을 걸기로 한 건, 윤숙이 전해준 하나님이 아니라 윤과 함께 나타난 사회운동이었다. 사회운동 동지로서 사람으로서 인정받음이 순애를 구원했다.
김말봉의 <고행>
주인공 '나'는 기생이었던 미자를 첩으로 두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나는 아내에게 미자를 소개했고 미자를 딱하게 여긴 아내는 미자와 형제처럼 지낸다. 미자의 집에 남편이 있음을 눈치채고 아내가 미자의 집을 불쑥 방문한다. 벽장에 불편한 자세로 숨은 남편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다다르자 아내가 제발 집에 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본래부터 미신을 배척하고 신을 부인하던 터이라 어디다 빌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마 나를 사랑하시던 내 아버지의 혼백에게야... 나는 눈을 감고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관을 쓰고 지팡이를 끌고 나오는 아버지의 환영을 보자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이 자식, 이게 무슨 꼴이냐 꼴이..."
아버지의 호령이 귓가에 들립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빌기를 단념하고 살아 있는 내 아내를 향하여 맘속으로 빌고 빌었습니다. (pp. 76, 77)'
남편은 벽장 속에서 고개를 두 손으로 받치고 무릎을 꿇고 흡사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자세, 즉 고행하는 자세로 불륜이 초래한 고통 속의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기도한다. 마침내 아내가 미자의 집을 떠나자 '나'는 벽장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 신도, 아버지도 아닌 아내로 인해서...
김말봉의 <편지>
남편을 잃은 은희에게 인순이라는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도착한다. 보내 준 돈은 잘 받았다. 돈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 짐이 되는듯해 미안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죄를 짓는 것 같다. 폐렴으로 사망한 은희 남편은 완전무결했다. 그를 추억하며 살아가야 할 은희에게 편지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분하고 억울함에 은희는 인순을 확인하고자 돈을 보내며 집에 들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은희가 남편의 결백이 증명되었다는 의미에서 새삼스럽게 남편을 추모하여 우는 것은 아니었다. 은희는 갑자기 자기가 인간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슬퍼진 것이다. 이렇게까지 슬프고 부끄럽고 천박한 동물은 인간이란 것밖에 또 어디 있으랴 하고 생각한 까닭이다. (p. 104)'
은희가 본 박인순은 교복을 입은 남자였다. 죽음으로서 완성될 뻔한 흠 없는 남편의 사랑에 금이 갔다. 의심이 낭만적 사랑에 은희가 설자리를 치워버렸다. 수치와 슬픔이 찾아오자 완전무결한 사랑이라는 환상 속의 은희는 비로소 그 환상에서 벗어나 한 여성으로 돌아온다.
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
김말봉의 <망명녀> 뒷이야기로 두 개의 축으로 이어간다. 죽은 순애와 윤숙 이야기, 또 하나는 화자 시점에서 부산을 걸으면 김말봉을 회상하는 형태의 소설이다.
'어떻게 건너왔소.
나를 이끈 것이 있습니다.
이끈 것이라 하면...
두 사람의 그러니까 언니의 사랑과 당신의 안타까움이 나를 이끌었습니다. (p. 121)'
죽은 순애는 사랑과 안타까움에 윤숙과 윤을 찾아오지만, 윤숙은 자신을 가방에 넣어 가달라는 순애를 두고 자신이 할 일, 여성들의 교육에 힘을 쓰고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다. 그리고 일 년 한 번 기도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산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도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고 윤숙은 생각했다. (p. 136)'
화자도 부산으로 떠난다. 김말봉이 태어난 곳, 그가 다니던 학교와 교회가 있는 부산으로. 김말봉이 걸었던 길에 맞춰 다른 시대의 박솔뫼도 걸어보는 것이다. 박솔뫼에게 익숙한 부산이지만 이번엔 다른 부산일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만나 걷게 될 부산이다.
'가보는 것 아무튼 계속 가보는 것 가보고 걸어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p. 133)'
여성들이여 힘들더라고, 장애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실망하더라도 자신을 구원으로 이끄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확신을 갖고 걸어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