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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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으로 인정받은 작가 앤서니 새틴의 <노마드>는 스키타이인, 흉노, 페르시아인, 훈족, 아랍인, 몽골족, 오스만인, 아메리카 원주민 등 1만 2,000년에 걸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국과 역사를 만드어낸 유목민이라는 아웃사이더를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다.


'세계 인구 아마도 500만 명
유목민 인구 그 500만 명의 대부분
옛날 옛적에 우리 모두는 수렵채집인이었다. 인간이 수렵채집을 멈춘 것은 불과 1만 2,000년 전으로, 인간의 연표에서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p. 29)'

이야기는 1만 2,000년 전 튀르키예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로 시작한다. 기원전 9500년에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세웠다. 거주한 흔적이 없다는 점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사원으로 추정되는 괴베클리 테페를 세웠음을 뒷받침한다.

건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다가 힘을 아끼려고 점차 가축화와 식물 재배를 하며 그곳에 머물기 시작했을 것이다. 1만2,000년 전 괴베클리 테페에서 농업과 문화의 혁명이 시작됐다. 이런 변화의 계기는 이동하며 살았던 유목민이었음이 틀림없다.

유목민 유전자 이야기도 흥미롭다. 케냐 아리알 부족의 일부는 염소와 양을 치며 이동하며 살고, 다른 일부는 고지대에 정착해 작물을 재배하면 산다. 이들 부족의 5분의 1이 DRA4-7R이라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7R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이동하면 사는 데는 적응을 잘 한 반면 정착해 사는 데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 5명 가운데 1명은 ADHD를 앓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유목민으로 살아갔다면 오히려 우월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앤서니 새틴은 이동하며 사람들과 정착해가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한다. 초기에는 정착민과 유목민들이 수렵채집에서 농경과 목축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공존하며 협력한다. 유목의 형태가 복잡해지면서 이들이 세운 제국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지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유목민들의 시선은 자취를 감춘다.

1만여 년에 이르는 유목민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저자는 과학, 진보, 계몽주의를 거스르는 포악한 야만인, 미개인이라는 유목민을 가리키는 이미지는 사실과 다름을 발견한다. 정착민과 서로 협력했고, 다양성을 존중하기도 했다. 타 종교에 관대했으며 여러 문화를 포용했다. 심지어 양심의 자유, 자유로운 이동, 시장 개방으로 글로벌 교역망과 문화 융성의 발판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그럼 우리는 왜 유목민의 역사를 잘못 알고 있을까. 역사가 정착민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을 진보에 배치되고 정착민과 대립 관계로 보는 역사관이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비주류로 홀대받았던 유목민을 위한 인류학적 보고서요 역사서라 할 수 있다.


'현재
세계 인구 78억 명
도시 인구 56억 명
유목민 인구 4,000만 명 (p. 404)'

요즘 '디지털 노마드'란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유목민은 사라져 몇 명 남지 않았지만 디지털 환경 속에서는 유목민이 활개친다. 디지털 노마드 직업군도 떠오른다. 자연에 기대어 가볍게 살아가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콧 니어링과 같은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우리 몸속에도 DRA4-7R이라는 유목민 유전자 본능 있나 보다.

부모님의 일 때문에 12살 때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했다. 몇 번 이사를 했지만 그 동네에 살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이번엔 나의 (먹고사는) 일 때문에 서울 거여동으로 옮겨 독립했다. 결혼하기 전 서울 등촌동에 집을 마련해 이사했다. 아버님을 모시게 되면서 집을 키워 수원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이 크니 방이 더 필요해 남양주시에 와 살게 됐다.

내 고향엔 그곳에서 자라 지금까지 살고 있는 동네 친구들도 있다. 작은 아버님 두 분도 그곳에서 태어나 아직도 살고 계신다. 수렵 채집인이나 초원의 유목민만큼은 아니지만, 내 고향 친구나 작은 아버님들에 비하면 나는 일 때문에 생활환경 때문에 이동하면 삶을 꾸리는 유목민의 삶을 산 셈이다.

내게도 DRA4-7R이라는 유전자가 있는 모양이다. 한편 직장은 한 곳에서 정년을 맞았으니 그 유전자가 날 완전히 지배하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유목민 삶의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경문제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인 요즘, 자연에 맞서지 않고 그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유목민은 누구였는지 그 깨달음 주는 앤서니 새틴의 <노마드>, 지금 꼭 필요한 책이어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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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투라 CULTURA 2024.6 - Vol.120
작가 편집부 지음 / 작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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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은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CULTURA> 6월 호 테마는 '재즈'다

재즈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눈에 띄는 건 유근택 목판 작품 <오직 한 사람>이다.
'작가는 그 나무파편들을 거칠게 모아 부조처럼 반입체의 얼굴 형상을 만든 후 그것을 다시 구멍 난 목판에 반전시켜 연결했다. (p. 15)'

얼굴이 무너져내린 것처럼 보인다. 미술평론가 강수미는 '자아를 박탈당한 익명적 인간의 상징'처럼 보인다고 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 켈시 만 감독과 마크 닐슨 프로듀서의 인터뷰도 실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를 중심으로 슬픔이, 버럭이, 소심이 등이 활약을 펼쳤다면 이번엔 불안이와 당황이, 부럽이, 따분이가 더해져 라일리의 감정이 더 복잡 미묘해졌다.

'<인사이드 아웃 2>의 많은 부분이 나와 남을 비교하는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게 제가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큰 이유이기도 해요. 이 나이대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시기예요. 그리고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죠. 그래서 저는 10대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하도록 연결되어 있는지 많이 공부했어요. (p. 37)'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에서 재즈가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노래와 기독교적인 찬송가, 그리고 유럽의 댄스 악단이 혼합된 블루스에서 발전되어 나왔다고 전한다.

''재즈'의 정의는 어렵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재즈는 배우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즈는 경험과 느낌이 함께 모여 재즈라는 음악이 아닌 하나의 문화를 만든다. (p. 82)' 재즈를 잘 모르지만 '재즈는 느끼는 것'이란 말이 맘에 든다.

나 같은 문외한도 재즈 하면 트럼펫 부는 루이 암스트롱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뒤에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 숨어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신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가 소년원에 수감됐다. 그곳에서 우연히 트럼펫을 접했고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세월을 재즈와 함께했다.

즉흥적인 연주에 탁월했다. 그리고 스캣 scat 창법을 통해 보컬의 표현 영역을 확장한 것은 그 어느 것보다 그의 큰 업적이다.

'"Jazz is everywhere"라는 말이 그렇듯이, 그것이 어디에나 있다면 우리는 그걸 통해 매 순간 연결의 실마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p. 70)'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 록 밴드 리드보컬로 활동하던 대학 시절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듣고 재즈의 길로 들어섰다. 스스로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웅산에게 재즈는 '좋은 친구'다. 그 이유는 재즈라는 친구가 70이 되었을 때까지도 곁에 있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김철수 재즈 피아니스트는 재즈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은 '평양냉면'이라면서 그 맛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가수로 쳇 베이커를 꼽았다. 하지만 음악 외의 그의 삶은 평온하고 담백한 맛의 평양냉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도, 이혼 그리고 헤로인, 코카인 등 다양한 약물에 중독됐고, 1988년 호텔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내가 들은 쳇 베이커의 음악은 평온 그 자체였다. 그의 죽음과 너무 대조적인...


아직 재즈를 잘 모른다. 그러니 즐길 수준도 못된다. 하지만 재즈 느낌을 적어보자면 감상적이다. 흥겹지만 아주 흥겹지는 않다. 무겁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한적하다가도 소란스러워진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소음 같기도 하다. 잡음 같아 음표가 여기저기 흩어진듯하지만 정돈돼 있고. 실패한 인생 같지만 딱히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겸연쩍다.

'마일즈 데이비스 Miles Davis는 말한다. "연주하는 그 음이 틀린 게 아니야 - 그다음에 오는 음이 그게 옳았냐 그르냐를 결정하는 거지." 또한 그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다만 우리들의 삶의 연주에서 실수 같은 일들이 생길 뿐이다. (​p. 84)'

마일즈 데이비스의 말에 고개가 끄덕이는 걸 보면 나도 재즈를 좀 즐겨볼 때가 됐나 보다. <쿨투라 CULTURA 2024. 6월 호> 고맙다. 재즈를 알려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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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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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는 작가정신이 근대 여성 작가의 작품을 백 년이 지난 현대 여성 작가가 재해석하는 '소설 잇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이자 일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에 능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첩의 딸'이라는 굴레로 극심한 '학대'를 받은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천부적인 재능에도 문단에서 추방당했지만 주체적 여성상을 끊임없이 고민한 작가다.

박민정이 김명순과 궤를 같이 한다는 생각은 이른 데뷔를 했다는 점에서 재능이 닮았고,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상과 스피커 잡을 기회가 좀처럼 없는 이들의 말을 작품에서 짚어냈기 때문이다.


김명순의 데뷔작 <의심의 소녀>에서 소녀 '범네'는 외할아버지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가는 곳마다 '꽃인가 의심할 만하게 몹시 어여뿐' 범네는 관심을 받지만, 이내 자살한 첩의 자식임이 드러나면 의심받는 소녀가 돼버려 불쌍한 아이가 된다. 그러면 다시 외할아버지와 그 마을을 떠난다.

'절기는 하추동夏秋冬 삼계三季가 지나면 반드시 양춘이 오건만-
불쌍한 어머니의 불쌍한 아해? (p. 27)'

김명순의 <돌아다볼 때>의 주인공 소련은 영문과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미 결혼한 젊은 이학자 효순의 강연을 듣고 좋은 감정을 품는다. 효순은 하웁트만의 <외로운 사람들>을 읽는 소련에게 그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면서 당시 사정에 따라 결혼해 처자식이 있는 자신이 가장 외로운 사람임 강조한다. 덧붙여 소련과 이상적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

'어떠한 노여운 말끝에든지 혹은 혼인 말끝에든지 반드시 "너희 어머니를 닮아서 그렇지, 그러기에 혈통이 있다는 것이야." 하고 불쾌한 말을 들리었다. (p. 47)'

이런 관계를 눈치챈 고모는 소련의 어머니가 첩이었고 그 피를 이어받았을까 걱정돼 서둘러 최병서와 결혼시킨다. 최병서는 소련을 학대하고 시어머니는 들볶아대지만 이를 참고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는 소련은 이상적 사랑을 꿈꾸며 이를 견뎌낸다.

김명순의 <외로운 사람들>은 하웁트만의 <외로운 사람들>을 당시 시대에 맞춰 번역한 작품이라고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설명한다. 최씨 가문의 네 남매 가운데 순희와 순철의 삶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신여성 순희는 정택의 결혼식을 앞두고 정택과 동경으로 도피 행각을 벌인다. 그곳에서 순희는 정택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동경으로 간지 두 달 만에 정택과 이별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순희의 동생 순철은 열네 살에 할머니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두 살 연상인 복순과 일찌감치 결혼한다. 여순으로 유학 간 순철은 청국의 왕녀 순영을 알게 되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사고로 혼자 남게 된 순영은 조선으로 와 학교를 다니면서 순철과 결혼을 원하지만 순철은 복순과 순영 둘을 두고 괴로워한다.

순희는 정택이 다른 여인을 만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움 속에 자살하고, 순철을 기다리다 지친 순영은 끝내 병이 깊어지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순철은 속으로 '내 상상이 맞았다. 하나 순희 누님은, 정택 씨를 사랑하기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은 연민이란다. 그러면 연민과 사랑의 다른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경계선이 있을까 없을까 의문이다. 의문이다' 하고 생각했다. (p. 218)'


박민정은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 '이 소설의 집요한 시선이야말로 온전히 애도되지도 의미화되지도 못하는 여성의 죽음이 얼마나 우리의 현실에 일상화되고 보편화되어 있는지 (p. 325, 박인성 문학평론가의 해설)'를 보여준다.

'나'의 동창생 세윤은 이혼한 후 직장을 다니면서 '나'와 JLTP 2급 시험공부를 하다가 시험을 앞두고 죽는다. 세윤이 남긴 브이로그를 보던 중 '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상에 등장하는 로사를 발견한다. 로사는 '나'의 학교 후배이자 세윤의 직장동료로 세윤에게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경고한 인물이다. '나'는 세윤의 죽음에 로사가 관여돼 있음을 직감하지만 증거는 없다.


박민정은 김명순의 작품에서 소외된 여성의 죽음을 읽었다. 김명순의 시대에는 첩의 딸이라는 이유로 신여성이라는 이유로 존재마저 부정당하고 자유로운 사랑마저 못 이루고 죽음에 이른 여성이 있었다. 그 죽음의 가해자는 당시 풍습에 따라 조혼을 통해 얻은 아내와 교육받고 아름다운 신여성 사이에서 자기 연민만을 강조하는 이기적인 남성이었다.

그렇다면 박민정 시대에 죽음에 이른 여성의 가해자는 누구일까? 여전한 가부장제? 남성우월에서 파생된 것들? 박민정이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 가해자로 지목하는 건, 남성과 여성 모두 즉 죽음은 이중의 소외다. 그리고

'선명한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선명한 가해자를 찾기는 힘들어지는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처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위기이기도 하다. (p. 327, 박인성 문학평론가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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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없던 감각 - 보는 법을 배운 소년, 듣는 법을 배운 소녀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수전 배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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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생각난다. 올리버 색스는 그 책에서 특정 신경이나 기능에 이상이 생겨 일상생활을 포기해야만 했던 환자들의 이야기 24편을 소개한다. 그 환자들이 겪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여겨 상상해 보았지만 그 세상의 문턱을 한치도 넘지 못했다.


시각이나 청각을 가져본 적이 없던 사람이 그 감각을 회복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감각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들도 회복 즉시 우리와 똑같이 보고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유아기부터 지각 기술로 터득해 발달시킨 것들이다.

'눈과 귀를 새롭게 얻는다 해도 그 소유자가 자신이 보고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그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보기'나 '듣기'로 이어지지 않는다. (p. 26)'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고, 손을 움직여 다른 각도에서 손을 인식하고, 머리를 좌우로 돌리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지를 파악하고, 옹알이를 하면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학습한다. 만지고, 사물을 떨어뜨려보고, 맞부딪히며 실험하고, 사물의 모양과 특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한 결과 얻은 감각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실험과 탐색을 하는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찾은 이들은 어떤 상황을 경험하게 될까? 우리들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세상 이야기를 수전 배리가 들려준다. 역시 이번에도 충격이었다.

이 책의 저자 수전 배리는 사시로 인해 세상을 평면으로만 보았다. 40대 중반이 돼서야 새로운 시훈련을 받고 입체시를 처음 경험했다. 3차원 세상을 처음 보는 순간 사물 사이의 공간이 있는 것이 놀라웠다.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았다고 한다.

'나는 리엄을 수술 5년 후인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처음 만났고, 조흐라는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받은 지 10년 후인 스물두 살 때 만났다. (...) 나는 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듣고 그들이 영위하는 일상의 작은 부분을 공유했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지각 세계를 재구축하고 재정렬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p. 29)'

수전 배리는 입체로 세상을 보게 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는 법을 배운 소년 리엄과 듣는 법을 배운 소녀 조흐라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며, 물리적, 사회적 세계에 맞추어 각자 지각 체계를 바꾸고 적응시킬 힘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쉰두 살에 각막 수술로 세상을 보게 된 SB는 처음엔 흥분과 호기심으로 즐거웠지만 수술을 받은 후 1년 반 동안 우울해지고 건강이 나빠져 사망했다. 어릴 때 청력을 잃은 비더만은 30년 후 인공와우를 이식받았다. 하지만 다시 소리를 경험하는 일은 그의 평정심을 잃게 만들었고 딱 죽고 싶은 기분을 들게 했다.

리엄과 조흐리는 어떻게 SB와 비더만이 겪은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비켜갈 수 있었을까?
'뭔가를 수월하게 하고 싶다면 먼저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p. 274)'

우리는 새로운 감각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원래 갖고 있던 범주에 묶으며 식별 작업을 쉽게 할 수 있지만 리엄과 조흐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얻는다는 건 이미 가지고 있던 지각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다. 하지만 리엄과 조흐리가 잘해낸 건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거의 지각의 운동선수가 돼서 선수가 훈련하듯이 보고 듣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의 헌신도 큰 역할을 했다.


<내게 없던 감각>를 통해서 내가 문턱도 넘지 못했던 세계를 얼핏이나마 볼 수 있었다. 당연시했던 감각 세계의 경이로움 또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적응력으로 나만의 감각 정보와 세계를 만들어가는지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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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어원 사전 - 이 세계를 열 배로 즐기는 법
덩컨 매든 지음, 고정아 옮김, 레비슨 우드 서문 / 윌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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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예전에는 한국이라고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202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며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이라고 목청껏 외칠 때부터였지 싶다. 한국은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약자이고 '한민족의 나라'라는 산문적인 뜻이 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외국인은 우리나라를 Korea라도 부른다. 처음에는 Corea라는 표기로 영어에 등장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K가 쓰이기 시작했다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학자들이 주장한다. 열등한 식민지가 올림픽 등에서 영어 알파벳 순서에서 앞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와 같이 여전히 Corea, 즉 'C'를 쓰는 나라들도 있긴 하다.

Korea는 외국인 붙인 타칭명exonym이고, 대한민국은 그 나라 사람들이 쓰는 자칭명endonym이다. 이를테면 Japan, Germany는 타칭명, 니뽄, Deutschland는 자칭명이다.


우루과이강에서 따온 '우루과이'에 대한 어원에 대한 설은 한 가지가 아니다. 토착 과라니어에서 의미를 찾으면 '새들의 강'을 뜻하고, 우루과이 강과 그 지류의 토착 민물인 왕달팽이 이름에서 왔다는 설도 내세울 만하다.

'콰우테말란은 나와틀어로 나무가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p. 38)' 나와틀어가 혀에 붙지 않았던 콩키스타도르들은 편하게 '과테말라'라고 불렀다. 이름에 걸맞게 과테말라는 수목이 울창한 정도가 아니다. 무시무시하게 나무를 베어내고 있는데도 국토의 3분의 1이 울창한 삼림으로 덮여 있다.

'교활한 바이킹은 이 화산섬의 푸른 해변에 도착하자 다른 개척자들이 눈독을 들일 것을 경계해서 이곳을 '아이슬란드 Iceland', 즉 '얼음 나라'라고 이름 지었다. (p. 99)'
이 섬엔 관심을 끄고 매력적인 그린란드 Greenland로 가란 뜻이었겠지만 얼음은 아이슬란드보다 그린란드가 훨씬 더 많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냥 재밌는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Liberia'는 짐작했겠지만 자유를 뜻하는 라틴어 liber에서 온 나라 이름이다. 라이베리아에는 12세기부터 다양한 부족이 살았다. 그런데 미국이 식민지인 이곳에 미국 해방 노예들을 위한 정착지로 삼으면서 이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2만 명에도 못 미치는 흑인 해방 노예들이 라이베리아 권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토착민을 노예로 삼아 미국에서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토착민에게 가했다. 해방 노예들은 자유를 얻어 이곳에 왔지만 정작 토착민들은 '자유 Liberty'를 잃었다.


<여행자의 어원사전>은 6개 대륙, 65개 나라를 여행한 저자 덩컨 매든이 나라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다.

앞서 소개한 몇 가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 이름에는 '오래전에 사라진 문화, 민족 이동, 종교, 언어, 갈등, 정복, 지형, 지도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떤 이름은 단순하게 침략자의 이름을 따거나 주요 지형에서 오기도 한다. (p. 10)'

또한 마르코 폴로가 모가디슈 항구로 착각해 붙인 마다가스카르섬처럼 오해와 착각으로 나라 이름이 지어지기도 하고, 역사, 수호신, 과거에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는 민족의 이야기를 나라 이름에 담고 있기도 하다.


마침 여행할 나라가 있다면 이 책에 그 나라가 있는지 찾아보자. 그 나라 이름의 어원을 알면 여행하는 즐거움이 더해질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나라가 새롭고 친숙하게 여겨질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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