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위하여 소설, 잇다 4
김말봉.박솔뫼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 여성 작가들의 주요 작품을 현대 여성 작가들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소설, 잇다' 시리즈 네 번째 <기도를 위하여>는 김말봉의 소설 세 편, 박솔뫼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 각각 한 편, 문학평론가 박서양의 해설을 담았다.

작가 김말봉은 소설을 왜 쓰냐는 질문에 '돈 벌려고 쓰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소설은 순수와 통속을 떠나 재밌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인 셈이다. 김말봉은 3.1운동으로 구금됐었고, 공창 폐지에 앞장서는 등 여성의 지위와 인권 보호에 앞장선 여성운동가였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장로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주로 여성으로 그들의 생활상과 욕망을 보여준다.

작가 박솔뫼의 작품 속 주요 화두는 산책과 배회라고 한다. 문어와 구어의 경계를 허문 것이 글의 특징이며, 삶이란 논리적이지 않으며 거칠고 불규칙한 것임을 그의 글에 담아낸다.


김말봉의 <망명녀>

여학교 시절 돈을 훔친 것이 들통 나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로 인해 명예와 직업을 한꺼번에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책임지게 된 순애는 기생이 된다. 기생 생활에 지쳐 미쳐가던 때 여학교 친구 윤숙이 찾아와 빚을 대신 갚아주고 순애를 데리고 나간다. 윤숙은 순애를 극진하게 보살피며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만 순애는 담배와 모르핀을 끊지 못한다. 어느 날 사회운동을 하는 윤숙의 애인 윤이 순애 앞에 나타났고 순애는 그를 사랑하면서 삶이 변한다.

'그러나 번개같이 무슨 생각이 내 마음에 지나갔습니다.
'이때이다. 이 기회이다. 나도 사람이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에 몸과 다리는 떨렸습니다. (p. 47)'

타락한 순애를 구원한 건, 순애가 목숨을 걸기로 한 건, 윤숙이 전해준 하나님이 아니라 윤과 함께 나타난 사회운동이었다. 사회운동 동지로서 사람으로서 인정받음이 순애를 구원했다.


김말봉의 <고행>

주인공 '나'는 기생이었던 미자를 첩으로 두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나는 아내에게 미자를 소개했고 미자를 딱하게 여긴 아내는 미자와 형제처럼 지낸다. 미자의 집에 남편이 있음을 눈치채고 아내가 미자의 집을 불쑥 방문한다. 벽장에 불편한 자세로 숨은 남편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다다르자 아내가 제발 집에 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본래부터 미신을 배척하고 신을 부인하던 터이라 어디다 빌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마 나를 사랑하시던 내 아버지의 혼백에게야... 나는 눈을 감고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관을 쓰고 지팡이를 끌고 나오는 아버지의 환영을 보자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이 자식, 이게 무슨 꼴이냐 꼴이..."
아버지의 호령이 귓가에 들립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빌기를 단념하고 살아 있는 내 아내를 향하여 맘속으로 빌고 빌었습니다. (pp. 76, 77)'

남편은 벽장 속에서 고개를 두 손으로 받치고 무릎을 꿇고 흡사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자세, 즉 고행하는 자세로 불륜이 초래한 고통 속의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기도한다. 마침내 아내가 미자의 집을 떠나자 '나'는 벽장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 신도, 아버지도 아닌 아내로 인해서...


김말봉의 <편지>

남편을 잃은 은희에게 인순이라는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도착한다. 보내 준 돈은 잘 받았다. 돈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 짐이 되는듯해 미안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죄를 짓는 것 같다. 폐렴으로 사망한 은희 남편은 완전무결했다. 그를 추억하며 살아가야 할 은희에게 편지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분하고 억울함에 은희는 인순을 확인하고자 돈을 보내며 집에 들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은희가 남편의 결백이 증명되었다는 의미에서 새삼스럽게 남편을 추모하여 우는 것은 아니었다. 은희는 갑자기 자기가 인간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슬퍼진 것이다. 이렇게까지 슬프고 부끄럽고 천박한 동물은 인간이란 것밖에 또 어디 있으랴 하고 생각한 까닭이다. (p. 104)'

은희가 본 박인순은 교복을 입은 남자였다. 죽음으로서 완성될 뻔한 흠 없는 남편의 사랑에 금이 갔다. 의심이 낭만적 사랑에 은희가 설자리를 치워버렸다. 수치와 슬픔이 찾아오자 완전무결한 사랑이라는 환상 속의 은희는 비로소 그 환상에서 벗어나 한 여성으로 돌아온다.


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

김말봉의 <망명녀> 뒷이야기로 두 개의 축으로 이어간다. 죽은 순애와 윤숙 이야기, 또 하나는 화자 시점에서 부산을 걸으면 김말봉을 회상하는 형태의 소설이다.

'어떻게 건너왔소.
나를 이끈 것이 있습니다.
이끈 것이라 하면...
두 사람의 그러니까 언니의 사랑과 당신의 안타까움이 나를 이끌었습니다. (p. 121)'

죽은 순애는 사랑과 안타까움에 윤숙과 윤을 찾아오지만, 윤숙은 자신을 가방에 넣어 가달라는 순애를 두고 자신이 할 일, 여성들의 교육에 힘을 쓰고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다. 그리고 일 년 한 번 기도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산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도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이기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고 윤숙은 생각했다. (p. 136)'

화자도 부산으로 떠난다. 김말봉이 태어난 곳, 그가 다니던 학교와 교회가 있는 부산으로. 김말봉이 걸었던 길에 맞춰 다른 시대의 박솔뫼도 걸어보는 것이다. 박솔뫼에게 익숙한 부산이지만 이번엔 다른 부산일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만나 걷게 될 부산이다.

'가보는 것 아무튼 계속 가보는 것 가보고 걸어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p. 133)'


여성들이여 힘들더라고, 장애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실망하더라도 자신을 구원으로 이끄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확신을 갖고 걸어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바레리뇽 고원 - 선함의 뿌리를 찾아서
매기 팩슨 지음,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히틀러나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대량학살에 관여한 것이 아니라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의 항변이다.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의 총책임자였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있어도 만세만 외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일제강점기에 그 누구보다 친일에 앞장섰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의 말이다. 자녀들에게 이런 유언도 했다. "앞으로 미국이 강대국이 될 거니, 너희들은 친미파가 되어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앞잡이였던 자들 또는 후손들은 이런 말로 스스로 합리화한다. "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같이 살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상황이 안 좋을 때 선하게 행동한 공동체가 있나? 나는 기억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저항한 사례를 조사했다. (p. 17)'

프랑스 중남부 자그마한 고원, 비바레리뇽 Vivarais-Lignon에 선한 공동체가 있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나치에게 쫓기는 낯선 수많은 난민을 수용했다. 이들을 집에 받아들인 주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늘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었고 나치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확실히 다니엘은 태어날 때부터 좋고 옳은 삶을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 끝나가면서 다니엘이 자기 자신, 그리고 참나무처럼 탄탄한 자기 삶의 조건과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음이 편지와 가족들의 회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할까? 어떤 사람이 될까? 결정을 내려야 했다. (p. 43)'

다니엘 트로크메, 비바레리뇽을 찾아온 난민의 어린이를 위한 보호소 '레 그리용'을 관리했고, 그 아이들은 무척이나 사랑했다.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아이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여전했다.

인류학자 매기 팩슨의 <비바레리뇽 고원>은 비바레리뇽 주민들이 보여준 환대와 사랑의 기록이다. 무엇이 목숨을 걸고 타인을 지키는 선함을 가능케 하는 것일까? 그 친절함의 뿌리를 탐구하기 위한 비바레리뇽 여정에서 저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려준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
아이히만은 나치와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완용은 힘센 일본에 아부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 비바레리뇽 주민들과 다니엘은 난민들을 보호해 그들의 목숨을 살려줬다.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한 모험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이히만과 이완용은 이들과 아주 다른 선택을 했다.

비바레리뇽 고원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맞섰다. 올바른 일이 벌어지리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원을 그려 편을 가르지 않았다.

'아뇨, 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아뇨, 저는 독일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리를 따르는 대답을 내놓았다.
저는 유대인이 아니라 한 소년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연약한 유대인이 아니라 연약한 소년을, 보호가 필요한 소년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p. 293)'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
다니엘과 비바레리뇽 고원의 사람들은 사랑을 추구했고, 시도했고, 매 순간 실천했다. 그 사랑이 습관이 되도록. 하지만 아이히만과 이완용에게는 사랑이 없었다. 올바른 일에 대한 믿음은 더더욱 없었다.

'다니엘은 작은 귀뚜라미들을 사랑했다. 동료 수감자들을 사랑했다. 미치도록 사랑했고, 과도하게 사랑했다. 고원의 주민들은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문 뒤에 누가, 또는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했음에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상드린은 학생들을 사랑했다. 비록 그 사랑이 언젠가 한 학생이 입학해 다른 학생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일지라도. (p. 510)'

'악의 평범성'에 사랑이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 타인을 지키는 선함에는 사랑이 있었다. 모든 걸 바꾸어 놓기 때문에 사랑은 아름답고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다. 신성한 인간을 없다.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신성해진다. 다니엘 트로크메와 비바레리뇽 사람들처럼. 신성한 곳도 없다. 사랑의 행위가 모인 곳이 신성해진다. 비바레리뇽 고원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볼트와 너트, 세상을 만든 작지만 위대한 것들의 과학 - 현대사회를 떠받치는 7가지 발견과 발명 스토리
로마 아그라왈 지음, 우아영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달 전쯤 엄두도 내질 못할 일을 (무엇이든 고치고 교체해서 오래 사용하는 친환경 소비를 하는) 아주 오래된 절친의 도움을 받아 해봤다. 사용하는 노트북 뒤 덮개를 연 후 메모리 용량을 늘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냉각팬을 교체했다. 십자머리 나사 여러 개로 고정되어 있어 나사만 풀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쉬운데 어떻게 열어 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는지 그게 더 신기했다.

'나선형 나사산은 아주 작고 축을 짧게 만들 수 있다. 나사로 손목시계 부품이나 얇은 금속판 같은 작은 것을 고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시는 설치했다가 제거하기도 쉽다. 스크루드라이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p. 49)'

우리 주변의 물건 대부분은 서로 다른 재료나 부품들이 연결된 것들이다. 노트북의 뒤 덮개나 냉각팬처럼 말이다. 못이 그런 일을 한다. 그런데 못의 파생물인 나사가 없었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얇은 두께의 노트북은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나사 대신 접착제로 붙이면 되니까 만들수는 있었겠지만 십자드라이버를 사용해 쉽게 풀 수 없으니 부품 교체가 어려워 오래 사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못, 바퀴, 스프링, 자석, 렌즈, 끈, 펌프 내가 고른 이 일곱 가지 사물은 다양한 반복과 형태를 거쳤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경이로운 발명품이다. (p. 9)'

어린 시절 남다른 호기심에 물건을 분해하곤 했던 소녀 로마 아그라왈은 구조공학자가 됐다. 저자는 거대하고 복잡한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사물에 평생 매력을 느꼈고, 특히 일곱 가지 사물에 얽힌 이야기를 이 책에 펼쳐놓았다. 작은 사물들이 어떻게 발명됐는지, 그 사물들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저자가 들려주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놀랍고 흥미롭다.


'기어가 이토록 유용한 건 바퀴 2개(또는 그 이상)를 나란히 놓아 톱니가 맞물리게 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전 방향의 변경, 회전 속력의 변경, 기어 가장자리에 작용하는 힘의 변경 등이다. (p. 72)'

조지핀 코크런의 가족은 파티를 즐겼고 그때마다 소중한 가보 그릇들에 음식을 담아냈다. 일하는 사람들이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들을 깨면 속상했다. 공학자 가족들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낸 코크런은 바퀴에서 발전한 기어를 이용해 설거지 기계, 즉 식기세척기를 설계했다.


앨먼 스트로저는 캔자스주 엘도라도의 유일한 장의사였다. 어느 날 그곳에 다른 장의사가 나타나자 그의 수입은 급격하게 줄어들어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경쟁 장의사의 아내가 교환국에서 일했고 장의사를 찾는 전화를 자기 남편에게 연결한 것이 원인이었다. 스트로저는 자동교환기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1892년에 스트로저는 자동교환기 특허를 냈고 이로써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 교환원이 자석으로 대체되었다. (p. 153)'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초기 정착민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물을 대야 했다. 시소 모양 한쪽 끝에 양동이를 다른 쪽 끝에는 균형추가 달린 구조물을 생각해내어 강에서 물을 퍼올렸다.

'펌프라는 단어가 수많은 움직이는 부품이 들어간 상당히 정교한 기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액체나 기체를 운반하는 장치다. 줄 끝에 매단 양동이를 당기는 것과 같이 단순한 형태일 수도 있고, 휘발유를 연소시켜 차량에 동력을 공급하는 다중 피스톤 모터 구동식 엔진처럼 복잡한 형태일 수도 있다. (p. 239)'


이렇듯 발명은 필요에 의한 대응에서 나온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 응용해서 쓰이는 사례도 빈번하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던 평면으로 돌던 판이 수직으로 구르며 운송수단에 변신했고, 펌프도 우주라는 극한 환경에서 생존에 필수인 우주복의 중요한 부품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 작은 발명품은 인류에게 편리를 주는 한편 인간의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스프링의 과학이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되어서 손가락의 작은 힘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총이 그렇다.


만약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면 그때는 없고 지금은 있는 사물들을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싶다. 왜 그럴까? 작동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원리를 알아야 과거 시대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만들게 할 수 있다. 그런 작동원리를 소개하는 이 책을 읽고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또 하나, 원리를 안다면 오래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 친구가 고치고 교체해서 친환경 소비를 하듯이.

오래 사용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래야 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끈으로 만든 '옷을 오래 입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구의 환경 문제 때문인데 원단 생산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항공과 해상 운송의 배출량을 합친 것보다 많으며 매년 약 9200만 톤의 원단이 폐기되고 약 1조 5000억 리터의 물이 소비된다.

누구나 지구의 환경을 지키는 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 세상을 만든 작지만 위대한 것들의 과학 원리를 안다는 전제아래서. 작동원리를 알고 이용한다면 노트북의 나사처럼 작은 발명품이 지구의 환경 지킴이 역할까지 하게 된 시대가 됐다. 그러니 이 책을 꼭 읽어야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희랍인 조르바 (1964)>에서 사업이 쫄딱 망한 후, 앤서니 퀸과 주인공이 군무 데임베키코 춤을 추는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영화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크레타행 배를 탈 요량으로 찾아간 피레에프스 항구에서 나는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p. 7, 첫 문장)'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나'는 크레타 섬으로 가 갈탄 광산을 빌려 막노동자와 어울려 지내기로 맘먹는다. 항구의 카페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알렉시스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난다. 조르바에게 감독일을 맡기고 같이 지내면서 그의 지나온 일들을 듣게 된다.

조르바는 산투르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그냥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에 옮기는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억압이나 구속에서 벗어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위버멘쉬였다.

'그는 남자, 꽃 피는 나무, 심지어 찬물 한 잔을 보고도 이런 식으로 놀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한다. 모든 것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듯이 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p. 78)'

갈탄 광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르바는 케이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설치한다. 하지만 케이블 설치 후 테스트 첫날, 시설이 박살 나버리면서 '나'는 빈털터리가 돼버린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조르바와 함께 춤추고 해방감을 맛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오랜만에 기쁨을 느낀다.


조르바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조르바 자신만을 믿는다.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질서나 규범이 아닌 자신의 감각으로 모든 걸 결정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조르바의 삶을 이야기할 때 니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신과 천국, 지옥을 부정하고 같은 삶이 계속 반복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아모르파티(Amor Fati)다. 그리고 위버멘쉬. 가혹한 삶을 종교나 도덕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든 가치로 극복하며 삶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조르바가 사는 방식이다.


'"안 해본 게 없지. 손발을 쓰는 일이든, 머리를 쓰는 일이든 다. 직업을 정하는 것 자체가 인생에 한계를 두는 걸세!" (p. 18)'

직업을 정해두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했다는 등등... 나는 조르바보다는 주인공인 '나'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처럼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자유로움도 좋지만 개인의 행복만을 우선시하는 삶과 나는 거리가 좀 멀다.

'"... '젊은이, 나는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저는 지금 당장 죽을 것처럼 사는뎁쇼' 둘 중에 누가 옳은가, 보스?"
그가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 없지?"
나는 침묵을 지켰다. 두 갈래 길이 똑같이 가파르고 험준할지라도 도착지는 같을 수 있다. 죽음을 부인하는 것, 그리고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 둘 다 결국 똑같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p. 54)'

죽음을 앞에 둔다면 결국 어떤 삶이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조르바의 죽음을 대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 당당함 만큼은... 나의 죽음 매뉴얼로 삼고 싶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거칠게 밀쳐내고 침대에서 훌쩍 내려와 창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창틀을 잡고 먼 산을 내다보며 눈을 크게 뜬 채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말처럼 조용히 울었지요. 손톱으로 창틀을 그러쥐고 선 자세로 그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pp. 440, 4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착하지 않은 기억은 찬란하게 쌓였다 시, 흐르다 54
강병욱 외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편집>

'사랑은 고정되지 않는
사랑은 언제나 위태로운
사랑은 도전이자
사랑은 매 순간의 (p. 60)'

편안한 사랑이 있을까? 싶다. 놓칠 것 같고, 사라질 것 같고, 상처 날 것 같고... 그래서 사랑이 언제나 위태롭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사랑을 매 순간의 도전이라는 표현에도 끄덕이고...


<너를 사랑하는 순간>

'사랑하는 너의 두 눈을 통해
내가 가야 할 길 위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너를 사랑하는 순간
나를 사랑하는 순간
너를 통해 나를 사랑하는 이 순간 (p. 61)'

사랑하는 이가 있어야 비로소 날 사랑할 수 있다는 거지? 사랑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니 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그렇다는 거지?


<첫사랑>

'하얀 행복으로 채색된
세상 속
너와 마주한
뜨거운 겨울
나의 첫 심장
나의 첫 사랑 (p. 64)

이제 나이 들어 사랑이 메말랐을 법도 한데... 그런데... 첫사랑 생각이 스치듯 지나가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아직도... 그래 첫사랑, 그래서 첫 심장.


<사랑한다 너를>

'내가 짊어진 사랑이라는 무게만큼
안갯속 수많은 물방울 수만큼
마음이 숨기며
사랑한다. (p. 58)'

내가 짊어진 사랑이란 것도 결국은 내가 쌓아놓은 것이리라. 쌓아놓은 무게만큼 널 사랑하려고 준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랑한다 너를. 그러나... 그러다가... 헤어지면 내가 쌓아놓은 만큼의 사랑의 무게에 짓눌려 일어서는 데 한참 걸린다는걸... 사랑할 땐 그 무게를 모른다. 헤어지고 나서야 그 무게를 체감한다.


김초혜 시집 <사랑굿>을 읽고 또 읽고 하던 때가 있었다. 사랑을 삭이는데 너무 힘들어 사랑 굿판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었다.

사랑엔 완성이 없다는 걸, 그땐 몰랐다. 애초에 우린 미완성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약속했었다. 헤어짐이 없다면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걸, 사랑 때문에... 사랑을 굿판에서 춤추며 빌듯 신앙이라 여겼기에 잠시 잊었을 뿐이었다.

김은진 사랑 연대기를 이어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보려 한다. 그때의 사랑을 마주하고자 한다. 나머지 시를 아껴 읽듯이 그때의 사랑을 하나하나 꺼내 보려 한다. 다시 심장을 때리고 힘껏 눌러 쿵쾅거리는 그 심장을 느껴보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