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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평점 :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p. 43, 첫 문장)'
세계 문학 작품에서도 유명한 이 소설의 첫 문장인 'Call me Ishmael'을 우리말로 가장 잘 옮긴 문장으로 꼽힌다. 옮긴이는 문학적으로 번역하고 싶어 궁리 끝에 얻어낸 문장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 이슈메일의 성격이나 역할을 이 한 문장에 모두 담아냈다.
이슈매일은 구약성서 등장인물인 이스마엘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의 몸에서 태어났다. 사라가 이삭을 낳자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변방의 세계, 광야로 추방당한다. 유산을 물려받는 장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닌 추방 당한 자로서 소설 속 이슈매일의 시선은 주류에 속하지 않은 제3자 적 입장이다. 이슈매일은 모비 딕과 에이해브의 대결을 밖에서 지켜본다
에이해브 역시 구약성서 열왕기 상, 하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영어식 이름이다. 아합은 바알신을 섬기는 이방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후 선지자를 핍박하고 살해하는 등 여호와를 노하게 한 악한 왕이었다. 선원들의 생명보다 개인적인 복수심에 몰두하는 악의에 찬 에이해브의 캐릭터와 겹친다.
'이런 이슈메일의 본질을 도망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에이해브 선장의 본질은 공격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p. 767)'
모비 딕은 악을 상징할까 아니면 선을 상징할까?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한 쪽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복수해야 할 악이다.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극복해야 할 또는 극복하기 어려운 운명이기도 하다. 반드시 맞서야 할 시스템이나 체제로 치환도 가능하다. 그리고 스타벅의 입장에 선다면 모비 딕은 정복 대상이 아닌 화합하고 조화롭게 지내야 할 자연일 뿐이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복수라니!" 스타벅이 외쳤다. "그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이에요!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원한을 품다니, 천벌을 받게 될 겁니다." (p. 251)'
소설의 형식 면에서 실험적 요소가 가득하다. 대서사시라 할 수 있는데, 대화문 자체가 연극적이고 일상적인 말투와 다른 화법을 보인다고 옮긴이도 말한다. 기존 소설적 언어에서 많이 엇나가 허먼 멜빌만의 장르를 개척한 듯하다. 그런 난해함 때문에 초판이 열두 권밖에 팔리지 않았나?
문학적 표현과 향유고래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장면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제49장 하이에나, 제111장 태평양을 읽어보며 허먼 멜빌과 옮긴이 김석희 작가의 매력에 빠져보시길...
'그렇게 '피쿼드'호의 옆구리에 피를 뚝뚝 흘리며 매달려 있는 고래의 머리는 유디트의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거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처럼 보였다. (p. 437)'
소설 <모비 딕>은 1951년 작품으로 줄거리만 놓고 보면 단순하다. 무한히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향유고래 모비 딕에게 한 쪽을 다리를 잃은 선장 에이해브가 모비 딕을 끝까지 쫓아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우리 삶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래학 책에 버금갈 정도의 자세한 묘사가 필요하다. 수많은 갈등, 앞을 가로막아 넘어서야만 했던 역경도 있었고, 피쿼드호 함께 승선한 여러 인종의 선원이 있듯이 내 삶 주변에도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 여럿과 함께 있다. 내가 살던 집, 직장, 학교, 했던 일 등등 이 모두를 세세히 묘사한다면 몇 백 페이지의 종이가 필요할까? <모비 딕>을 읽으며 내가 가진 생각이다.
'<모비 딕>은 청년·장년·노년에 이렇게 세 번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새로 읽을 때마다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p. 804)'
<모비 딕>을 세 번 읽듯이 자신의 삶도 가끔 돌아보길... 그때마다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내 인생도 소설 <모비 딕>만큼이나 존경받는,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인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