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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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가장 신에게 질문을 많이 했던 때가 있었다.

바로 내가 늦은 나이에 쌍둥이를 임신했을 떄와 엄마의 파킨슨병 확진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매번 신을 원망했다.

 

"왜 제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주셨나요?"

"아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쌍둥이를 주시지 도움 받을 구석도 없는 제게 하나도 아닌 둘을 주셨나요?"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엄마의 파킨슨병 소식을 들었을 때의 질문은 단 한 가지였다.

 

왜 하필 우리엄마인가?

 

더구나 요양보호사로 일하시면서 이 무서운 병을 두려워하는 엄마에게 왜 하필 이 병이 찾아왔단 말인가. 이게 평생 하나님을 믿으면서 헌신한 엄마의 믿음에 대한 대가란 말인가?

텔레비젼에서 7,80대 노인 연예인들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왜 엄마는 이제 50대에 이런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소설 『단 한 사람』 은 내가 힘들 때마다 신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했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질문하며 이유를 찾는 이야기.

물론 앞서 내가 말했듯 왜 내게 이런 아이들을 주셨느냐보다 더욱 심오하고 깊은 질문들이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장미수와 신일복 부부에게서 태어난 다섯 남매가 나온다.

 

일화, 월화, 금화 그리고 남녀쌍둥이 목화와 목수.

 

불행은 예고가 없이 찾아오듯, 이 가정에도 갑작스런 불행이 이들을 방문한다.

셋째 금화가 목화와 목수를 데리고 산에 가던 중 금화가 나무에 깔려 쓰러진 것.

어린 목화는 목수에게 어른들을 데리고 올 테니 언니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한다. 허겁지겁 어른들을 모시고 왔지만 이게 웬일인가. 금화 언니는 사라지고 멀쩡했던 목수가 나무에 깔려 쓰려져있다.

 

금화는 어떻게 된 것인가.

금화는 사라진 것일까?

금화는 죽은 것일까?

 

현장에 같이 있었던 목수는 이 사건을 끝내 기억하지 못하고 목화는 언니를 지키지 못했다며 자책한다. 십년이 지나도록 알 수 없는 금화의 실종. 누군가의 실종은 항상 불완전한 가정에 머물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 또 다른 운명이 찾아온다.

 

쌍둥이 목화에게 어느 날 꿈속에서 사람들이 죽는 꿈이 펼쳐진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사람을 구하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엉겹결에 단 한 사람을 구한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 목화는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할머니 임천자, 엄마 장미수 그리고 자기에게 걸쳐 이루어진 운명임을 알게 된다.

 

이 믿을 수 없는 운명 앞에 목화는 당연히 질문한다.

 

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운명이 자신에게 왔는가?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가?

그 단 한 사람이 악인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신은 있기는 한 것인가?

이 수많은 죽음과 생 속에서 죽음과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매번 반복되는 수많은 죽음 속에서 삶은 한없이 작아보이고 부질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자가 답을 찾는다고 했던가.

 

똑같은 운명에 체념한 할머니, 저항했던 엄마와 달리 끝까지 목적을 찾는 목화는 정반대에서 길을 찾는다. 바로 자신이 살린 단 한 사람을 통해서. 자신은 왜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냐 했지만 단 한 사람은 결코 작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세상의 수많은 질문과 분노와 좌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이야기한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불행 앞에 슬퍼하고 두려운 미래 앞에 두려워하기보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일에는 끝내 인정하지 못한 사라진 금화 언니의 마지막을 인정하는 것과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며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을 한없이 사랑하고 '오늘' 자신이 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구하면서 비로소 삶을 즐긴다.

생의 마지막은 언제 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마음껏 그리워하고 슬퍼하며 기뻐하기로 한다.

그걸 누릴 수 있는 자는 오직 영원한 '오늘' '지금'을 사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소설 『단 한 사람』 을 읽으며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떠올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올 터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 한순간에 사라지나

지나간 것 모두 소중하리니

 

속이고 슬퍼하고 우울함 속에서 우리가 참아내고 살아가야 하는 건 결국 모두가 사라진다는 것.

우리가 미래만을 바라보니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어둡게 살아가는 것.

결국 푸시킨의 시와 최진영의 소설 소설의 『단 한 사람』 은 서로 닿아있다.

 

똑같은 운명 앞에 분노하고 저항한 삶을 살았던 엄마와 체념하듯 살았덨 할머니와 엄마는 현재를 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을 받아들인 신목화는 '단 한 사람'을 인해서 감사하며 오늘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슬퍼한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생각해본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질문을 했던 그 순간들에 대해서 답을 찾았는가?

나는 알고 있다. 답은 없다. 답은 살아지면서 아는 것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니까.

 

며칠 전 쌍둥이 아이 하나가 우리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쌍둥이가 아니라 한 명만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힘들었을 때 한참을 했던 질문과 상상들. 하지만 이제는 부질없는 질문인 걸 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오늘은 쌍둥이므로 그런 상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엄마의 병 또한 마찬가지다. 신이 왜 엄마에게 큰 병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까. 그 질문 또한 의미가 없다.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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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음 / 사이드웨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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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전두환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전두환의 대사가 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던 전두환. 그는 왜 끝까지 자신의 악행을 부인하는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는 그 점에 의문을 갖는다.

왜 그는 무릎 꿇지 않았는가.

왜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끝까지 부정하는가.

인간이라면 조금이라도 있을 일말의 죄책감이 왜 그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는가.

그 사실을 알기 위해 정아은 소설가는 전두환의 회고록, <전두환의 육성기록> 등을 비롯해 그 당시 활동했던 많은 이들의 기록들을 추적하며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한다.

 

전두환이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에 정아은 작가는 중요한 키워드를 제공한다.

그 중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정통성'이다.

정통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통성'의 뜻을 살펴보면 " 그 사회의 정치체제, 정치권력, 전통 등을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일반적 관념" 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치, 대통령의 정통성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의 체제에 맞게 국민들의 손에 선출된 사람이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보았다시피 전두환의 시작은 12.12. 쿠테타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한 사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그가 파괴한 정통성은 끝내 그를 그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업적이 물거품이 될 수 있기에 그는 자신의 죄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전두환에게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는' 가벼움'이다.

 

누군가는 '가벼움'이란 단어가 전두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아은 작가는 전두환의 특질이야말로 '가벼움'이라고 시종일관 강조한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어떤 가벼움을 장착했는가?

정아은 작가는 '광주'를 예로 든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를 죽이면 그 죽인 사람의 자녀, 혹은 부모들을 찾아가지 못한다.

그들의 원한이 무섭고 복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이 부메랑이 될까 무서워한다.

하지만 전두환은 어떤가.

전두환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때 한 지역을 차단한 채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사태 이후 광주를 4,5차례 방문해 '광주 시민들을 아낀다고 말하며 광주를 돕겠다고 말한다. 정상인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정아은 작가는 '가벼움'을 붙인다.


 

미자믹으로 정아은 작가는 전두환이 집권할 수 있었던 키워드로 '선을 지키지 않았던 시대 인물들'을 꼽는다.

먼저 정아은 작가는 자신의 권력 유지의 목적을 위해 전두환을 사면한 김대중 전대통령과 김영삼의 야당합당 역시 선을 지키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그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일방적인 사면은 국민들의 민심에 역행하는 조치였다.

김영삼 또한 대통령에 대한 욕심으로 여당과 합당함으로 정권교체가 물거품이 되게 했으며 전두환을 심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전 대통령이 선을 지키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영화 《서울의 봄》에서 소신있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 수경관 이태신, 참모총장 정상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등까지 선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전두환의 만행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음에도 전두환의 꾀에 속아 잔치집 초대에 응하고 끝내 조직을 장악하지 못해 당해야 했던 그들이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최규하 대통령, 국방장관, 참모총장 및 조직 군인들, 전직 대통령 등 모두가 선을 지키지 않았기에 전두환은 끝내 단죄받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 당시에는 영화에서 보다시피 이미 군인 조직이 하나회에 장악된 상황이었다. 조직의 상하조직이 안 된 상황. 그리고 정아은 작가도 알다시피 그는 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실세였으며 정보라인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권한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두환을 제압하고 조직을 잘 관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의 특질을 '가벼움'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과연 이걸로 충분한가라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은 전두환 시대를 정통성의 결여에 중점을 두며 그가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펼쳤던 그의 정책등을 자세하게 파헤친다. 가령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보여주었던 88올림픽, 해외여행 자유화 등이 어떤 배경으로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아우러 그가 눈을 돌리기 위해 펼쳤던 감각적 자유가 어떻게 역사적인 1987년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 호황'의 전성기가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주며 우리가 전두환을 바로 알아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자세하게 말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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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너 1 베어타운 3부작 3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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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너 1》은 『오베라는 남자』을 쓴 프레드릭 베크만 작가의 연작 시리즈이다.

 

먼저 《위너 1》을 알기 위해서는 이 시리즈의 앞의 두 작품을 읽어야 한다.

 

아이스하키로 똘똘뭉친 쇠락해가는 변두리 지방 베어타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베어타운』

『베어타운』에서는 마을을 살릴 영웅으로 여겨지던 아이스하키 선수 케빈이 하키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하며 공동체가 분열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시리즈 『우리와 당신들』 에서는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베어타운 마을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함으로 서로 등지는 공동체의 또다른 위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완결판인 《위너》가 총 2권으로 3년간의 침묵 끝에 출간되었다.

 

《위너 1》은 전작에서 그려진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에서처럼 공동체의 갈등을 그린다.

 

첫번째 이야기 『베어타운』 에서는 에이스 선수 케빈의 성폭행이 기점이었고

『우리와 당신들』에서는 벤의 성정체성이 드러나며 갈등이 조장되었다면

마지막 이야기 《위너 1》 에서는 마을을 휩쓴 폭풍이 도화선이 되며 마을의 갈등을 불려온다.

앞의 두 이야기가 주로 베어타운 한 마을의 갈등이 중심이었다면

《위너 1》 에서는 베어타운과 베어타운의 이웃마을이자 경쟁 마을이기도 한 '헤드' 마을 간의 묵은 원한이 배경이다.

 

그건 폭풍에서 시작됐지.

 

먼저 나는 묻고 싶다.

 

인간은 자연재해와 같은 불행 앞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불행 앞에 돕고 살아가는 걸 꿈꾸지만 과연 그럴까?

프레드릭 베크만은 《위너 1》 에서 분명히 말한다. 불행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

불행 앞에서 인간은 더 악해지고 미워하고 증오한다. 특히 그 분열이 한쪽이 훨씬 우월하다면?

그렇다면 더욱 미워하기 쉽다. 왜 저들은 잘 나가는데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왜 저들은 평화로운데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억울해진다.

불행 앞에 자신의 처지는 확대경으로 커지게 되는 반면 타인의 불행은 축소경으로 작게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떤 불행들이 보이는가.

 

 

가장 크게는 베어타운과 헤드 마을의 갈등이다.

늘어나는 후원자금과 하키팀의 승리 기세로 승승장구하는 베어타운. vs 자금이 딸리고 하키 링크의 지붕이 붕괴되어도 고칠 생각도 안 할 만큼 소외된 헤드의 아이스하키팀.

 

가난한 집에서 탈출하여 외국으로 갔지만 주검이 되어 돌아온 누나,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는 상황에 대한 소년 마테오 vs 자신 빼고 모두 행복한 듯 보이는 마을 사람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질문해야 한다.

 

왜 이 사람들의 갈등은 1,2권에 이르기까지 봉합되지 않고 더 커지는가.

 


 

자신의 불행 앞에서 자책하며 타인을 미워하는 것 만큼 쉬운 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 자책하며 후회하는 것. 그건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래서 《위너 1》 에서는 원망하고 싶은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더욱 똘똘 뭉친다.

자선으로 포장하면서 타인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답시고 자작극을 꾸미며 모함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위해서 타인을 공격하는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이건 우리 마을을 위해서야.

이건 저들이 먼저 시작했어.

이건 우리 때문이 아니야.

 

그래서 한 때 잘나가던 베어타운의 떠오르는 에이스 아맛 선수가 《위너 1》 에서 갑작스럽게 몰락되었던 계기 또한 동네 부량배 레브의 갈등을 부추기는 이간질 때문이었음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은 부족하다고만 할 테니까.

이건 저들의 경기, 저들의 판이고

너는 절대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없어.

너나 나 같은 사람은 우리만의 판을 만들어야 하는 거야.

 

너와 나,

우리와 저들,

이 갈등 앞에 한 명의 유망주가 무너지는 건 매우 빠르고 간단하다.

 

《위너 1》 에서는 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다음에 이어질 대망의 마무리 《위너 2》를 남겨놓은 채 .

갈등의 정점에 이른 마을 사람들. 이들의 분열은 과연 봉합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소설 속 가상마을 베어타운과 헤드 마을의 갈등을 보아야만 하는가?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봐야 한다.

 

왜? 이건 바로 우리의 이야기니까.

 

지금의 우리 사회는 더한 갈등을 달리고 있으니까.

 

보수와 진보,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반페미니즘 운동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들, 노키즈존, 노실버존, 장애인 차별철폐를 위해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향한 시선들...

 

지금의 이 모습이야말로 갈등의 최고조가 아닌가?

 

그러므로 베어타운의 갈등은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닌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도 이 상황 앞에서 쉽게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기 떄문이다.

 

갈등이 조성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해자가 될 리 없다고 쉽게 자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 시리즈 모두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프레드릭 베크만의 많은 전작들은 읽지 않더라도, 이 시리즈는 꼭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정리되는 내 책장에서 끝끝내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다.

 

"신이시여, 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을 만큼.

 

분열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꼭 생각해보고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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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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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작가의 SF 소설집 『화성과 나』는 암울한 미래를 전제로 한다.

지구의 상황은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지구의 미래는 점점 암울해진다.

디스토피아가 되어가고 있는 지구, 현실에 대한 피난처로 꿈꾸는 화성.

하지만 화성에서의 생활은 역시 만만치 않다.

절망하기 쉬운 미래, 과연 화성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화성과 나』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바쁘다. 아니 바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시작해야 한다. 공간을 짓고 행성을 관리도 해야 하며 기록도 해야 한다. 새로운 도시도 만들어야 하며 화성에서 먹을 수 있는 곡식도 만들어야 한다.

화성은 새롭게 시작하는 반면 지구의 상황은 점점 어두워진다.

<행성 탈출 속도>에서의 부산의 날씨는 이미 45를 넘나들고 폐허가 된다. <김조안과 함께하려면>에서는 기상학자인 '나'는 점점 멸망해가는 지구의 상황을 지켜본다.

화성에서는 지구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고 지구에서는 화성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하루하루의 삶이 힘든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런데 배명훈 저자는 다섯 편의 소설들에서 하나같이 말하는 게 있다.

바로 '회복력'이다.

 

화성인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뭘까요?

모험심? 호기심? 아니면 고집?

아니요, 의외로 회복력이에요.

무슨 일을 겪어도 화성인은 반드시 회복하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예요.

 

『화성과 나』의 모든 이야기를 '회복력'이 끌고 간다.

화성에서의 삶은 공기도 적고 불모지가 많기에 삶에 제약이 많다.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사고로 죽는 사람도 많고 모래 폭풍이 불면 아지트에 들어가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피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들은 화성인이다. 우리는 반드시 회복한다.

내가 없어도 다른 누군가가 대신 이어가며 회복해간다. <붉은 행성의 방식>에서의 이지요는 우주선 동지를 잃었지만 친구의 일을 이어받아 임무를 완성해간다. <나의 사랑 레드벨트>는 화성에서의 삶을 사랑하기에 엄청난 이익과 자신의 직업의 혜택을 포기하며 화성에서의 모습을 택한다.

비록 헬멧을 쓰고 다녀야 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점이 남는다.

지구는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이 위기 속에서 지구의 삶은 종말만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그냥 가만히 마지막을 생각하며 슬퍼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김조안과 함께하려면>에서 말해준다.

헤어진 옛애인 김조안. 그녀는 홀로 화성으로 떠나고 기상학자인 '나'는 매일 화면에서 지구와 화성의 모습을 관찰한다. 빈번해지는 자연재해, 매일 들려오는 어두운 소식. 지구의 모습을 본다는 건 고통이다. 마침내 가장 적극적이던 기상학자마저 죽고 말고 정말 이게 끝이구나 하는 절망감이 팽배한 이 때 김조안이 지구에 돌아온다.

멸망해가는 지구와 함께 하기 위해. 아니 꺼져 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김조안이 돌아왔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화성에서의 업적을 버리고 다시 돌아온다.


<행성 탈출 속도>에서도 누군가는 지구의 지긋지긋한 삶이 싫어 화성으로 도망치듯 오고 누군가는 화성에서 지구로 건너온다. 자신들만의 지옥에서 탈출한 그들, 함께 하고 싶지만 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존재한다. 함께 할 수 없음에 절망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기를 택한다.


모든 인물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고민한다. 화성은 모든 게 다르기에. 화성은 모든 게 쉽지 않기에.

하지만 이들은 '절망' 대신 '회복'을 선택한다. 화성에서 간장 게장이 안 될 걸 알지만 시도라도 해 고 자신의 약점이 들통나면 자신의 직업을 빼앗길 걸 감수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는 걸 택한다. 곧 헤어져야 할 것을 알기에 헤어지느니 순간이라도 사랑하는 걸 선택한다.


왜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순간이라도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가?

포기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것 만으로도 이기고 있기 떄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를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희망을 말한다.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네 번째 소설 <행성봉쇄령>이다.

지구에서의 미사일 폭격 위험 앞에서도 사랑하기로 택한 나나와 정우연처럼

비록 화성과 지구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어도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기로 하는 채라와 나처럼

멸망해가는 지구를 위해 화성에서 지구로 돌아온 김조안처럼 끝까지 모든 인물들은 삶을 선택한다.

좌절하지 않고 회복을 선택하며 삶을 이어간다.

 

무슨 일을 겪어도 화성인은 반드시 회복하거든요.

 

맞다.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좌절하지 않는 한 우리는 회복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제 유엔에서 내년의 지구 온도가 3도 가까이 상승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지구는 이대로 끝인 건가라는 생각에 암울해지고 오염수로 우울한 이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화성과 나』 소설은 내게 분명히 말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고. 그래도 이대로 끝장이라고 좌절하지 말자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또 다른 미래가 만들어질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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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거짓말
라일리 세이거 지음, 남명성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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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마지막 거짓말』은 처음 접하는 작가 라일리 세이거의 작품이다.

유명한 작가라면 작품 이름이라도 알 텐데 처음 접하는 작가의 이름에 인터넷 서점을 뒤적이지만 작년 출간된 <락 에브리 도어> 이후에 두번째로 소개된 작가이다. 하지만 아마존 서점에서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이미 10편 가까이 추리소설을 써 온 유명한 작가이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설레임과 궁금함을 품고 책을 읽어나간다.

먼저 제목 『마지막 거짓말』 을 생각해본다.

이 추리소설은 제목부터가 분명한 힌트를 준다. 주인공이 한 거짓말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고 그 거짓말이 밝혀지는지 그 과정을 캐내는 부분이 핵심이라는 걸 알게 해 준다. 과연 이 소설에서는 어떤 거짓말이 있는걸까 먼저 궁금증을 자아낸다.

책의 첫 도입부는 강렬하다.

 

시작은 이렇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 속, 숲을 에워싸는 미드나이트 호수,

그 숲 속에 자리잡은 나이팅게일 캠프는 대재벌 그룹 해리스 화이트 집안이 운영하는 캠프이다.

상쾌한 아침, 은은한 햇빛, 하지만 함께 생활하던 룸메이트 세 명이 사라졌다.

숲 속을 뒤졌지만 종적도 없이 사라진 세 명의 소녀들. 그녀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후, 15년이 지나고 화가가 된 에마 데이비스.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그녀의 작품에 사라진 세 명이 숨겨져 있다는 건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다.

어느 날, 에마의 전시회에 나이팅게일 캠프 소유주였던 프래니로부터 나이팅게일 캠프 선생으로 와 달라는 청을 받게 된다. 함께 했던 룸메이트가 사라진 곳.

에마는 과연 15년이 지난 그 곳에서 룸메이트가 사라진 그 곳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마지막 거짓말』은 세 명의 룸메이트가 사라진 15년 전과 그 이후 15년 이후 성인이 된 현재를 번갈아가며 사건이 진행된다.

15년 전,

부유한 자녀들만이 방학동안에 가서 신청할 수 있는 캠프. 그 곳에 간다는 건 선택받은 집안 자녀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선택받지 못한 평민 자녀들에게는 '부자년'들이 즐겨 가는 캠프일 뿐인 선망과 질투의 장소. 그 곳에서 주인공 에마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유산으로 질투의 장소인 '나이팅게일' 캠프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늦게 도착해서 언니들과 한 방을 사용해야 하는 에마의 룸메이트는 비비언, 내털리, 앨리슨 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 센 척하는 에마. 그녀는 이 세 명 중 제일 기가 센 비비언을 따라하기에 바쁘다. 사랑하는 언니 캐서린을 잃고 난 이후그 사랑을 에마에게 보이는 비비언. 비비언은 에마에게 말한다. "내가 너의 언니가 되어 줄게."



이 네 명이 즐겨하는 게임이 있다.

바로 "두 진실 한 거짓말" 게임.

세 가지의 이야기 중 어느 게 거짓인지 말하는 게임.

이 게임은 이들에게 시시하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눈 감고도 맞히는 게임.

그러면서 왜 비비언은 자꾸 이 게임을 하자고 하는 걸까?

『마지막 거짓말』 을 읽어나가면서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반전은 두 가지이다.

나는 이 주인공 에마 데이비스를 신뢰할 수 있는가??

먼저 소설 초반부에 에마는 자신이 부모님에게 말한 첫번째 거짓말을 고백한다.

한밤중에 홍두깨처럼 나이팅게일 캠프에 가게 되었지만 부자들이 가는 캠프에 가게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는 걸 숨기는 에마. 그녀는 이것이 바로 첫번째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이 고백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아... 이 주인공은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겠구나.

이 주인공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겠구나. 쉽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사건의 진실은 갈수록 선명하게 다가오기보다 더 미궁에 빠뜨린다.


 주인공 에마가 캐고 있는 사건의 진실이 맞는 걸까?

아니면 에마는 자신의 거짓말을 덮기 위한 진실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일까?

책 후반부에 이르러서까지 이 진실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작가는 후반부까지 진실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두 번째. 바로 실종된 세 명의 소녀와 에마가 함께 한 '두 진실 한 거짓말' 게임이다.

서로 쉽다고 생각했던 게임들.

하지만 너무 자주 하는 만큼 거짓말 또한 늘어난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이 맞다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읽어나가며 의문을 준다.

과연 서로가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있나?


에마의 거짓말,

두 진실 한 거짓말 게임 속의 거짓말,

이 거짓말 속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거짓말..


이 거짓말들이 진실을 가로막는다.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끝까지 범인을 맞추기 힘들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지막 거짓말』 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반전은 정말 정말 모두를 기함하게 하며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뛰어남을 알게 한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소설.

그러기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거짓말 속에서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소설. 진실이 드러나면 또 누군가의 거짓말이 드러나기에 사건은 끝까지 미궁에 있는 소설이다.


진심으로 놀라운 작가의 작품을 만났다.

자신이 거짓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 작품 속에서는 엄두도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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