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
B. A. 패리스 지음, 박설영 옮김 / 모모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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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여름, 스릴러의 계절이 다가왔다. 

올 여름,  나의 Pick을 받은 스릴러 소설은 B.A 패리스의 스릴러 소설 『게스트』이다. 

B.A. 패리스를 국내에 처음 알린 소설 데뷔작 <비하인드 도어>는 사이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주인공의 사투를 그린 소설이었다. 다중인격을 가진 남편의 광기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를 보여주었던 데뷔작 《비하인드 도어》는 읽는 내내 그 광기에 소름이 돋았던 강렬한 작품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우리 집에 누군가 살고 있었다.


책 띠표지에 장식된 한 문장은 어떻게 이 책의 시작이 알리는가를 나타내는 단정적인 문장이다. 

그 집에 누군가 살고 있었다라는 문장. 누가 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나타낸다. 

하지만 속지 마시길. 이 한 문장은 가장 중요한 단서이면서 독자를 속이는 속임수이다. 


그렇다면 하나씩 추리해보자. 

여행에서 돌아 온 이들은 누구인가. 가브리엘과 아이리스 부부이다. 이 부부는 가브리엘의 휴직 후 휴가를 다녀왔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의사인 가브리엘이 딸 베스보다 한 살 아래인 찰리 잉그램의 사고를 목격하고 최후를 지켜본 여파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기 떄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의사다.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보았을 의사가 과연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도 죽음에 이렇게 우울증을 앓을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죽음에 대해 뭔가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 아이리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 그 비밀로 인해 가브리엘과 아이리스 사이 또한 뭔가 점점 틀어지고 있다. 


이들 부부 집에 누군가 살고 있는 건 누구일까?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전 나는 '누군가'가 베일에 감쳐졌다가 마지막 결말에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은 처음부터 시원하게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그 '누군가'는 가브리엘-아이리스 부부가 결혼 기념일 1주년 여행때 여행지에서 만났던 피에르와 로르 부부였다. 이들 부부는 그 때 신혼여행이었으며 첫 만남이후 잘 통해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서로 편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부부가 함께 왔어야 하는데 남편인 피에르는 안 오고 로르만 와 있었다. 

알고 보니 딩크 족인 이 부부가 피에르에게 숨겨 놓은 자식이 있었다는 것. 그에 충격받아 로르는 훌쩍 집을 떠나 가브리엘과 아이리스 부부의 집에 함께 거하게 된 것이다. 


좋은 말도 한 두 번 듣다보면 질리게 되듯 친한 관계 또한 선이 없으면 뒤틀리기 쉽다. 

아무리 손님으로 온 로르와 20년 가까이 친하게 지냈다고 해도 맨날 똑같은 원망을 되풀이하는 원망을 늘어놓으면 그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다. 그 순간 환영객은 불청객이 되어버린다. 

로르의 남편 피에르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피에르는 감감무소식이고 로르는 어느 새 이 부부에게 짐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게스트』 에는 많은 잿밥이 뿌려져 있다. 

먼저 가브리엘이 어린 찰리 잉그램의 죽음에서 말 하지 못했던 비밀이 무엇인가가 의문이다. 

로르의 남편 피에르는 왜 무책임하게 연락을 받지 않는가. 




『게스트』 소설에서는 시간이 전개되며 모든 인물들의 허물이 드러난다는 점이 속속 드러난다. 

즉 깨끗한 인물이 없다. 심지어 최근 알게 된 새로운 이웃 에스메와 휴, 그리고 조지프 또한 결함이 드러난다. 그들의 어둠이 드러나며 의심을 품는다. 


대체 깨끗한 사람이 있긴 한 걸까?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 비로소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어둠이 실제 범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은 끝까지 범인이 꽁꽁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진짜 범인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 소설의 반전은 다른 소설들처럼 범인의 정체가 아니다. 오히려 범인은 예측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강력한 한 방은 범행의 동기, 즉 원인의 시작점에 있다. 그 시작점에 놀라지 않는 독자가 없으리라 장담한다. 최근 보았던 스릴러 소설 중 가장 묵직한 한 방을 날린 소설이 있을까. 

다만 아쉬운 건 그 한 방을 날리기까지 내용은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비하인드 도어》 보다는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점도 아쉬웠다. 하지만 소설의 반전은 B.A. 패리스의 이름값을 다시 증명해 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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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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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꿋꿋이 살아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결국 희망이라는 걸 보여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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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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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소설 《삶과 운명 1~3》 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 현대문학 시리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스딸린그라드 전투가 낯설어 역사를 찾아보았다. 이 스딸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과 독일의 전투로 독소 전쟁 중 가장 거대했던 전투 중 하나이자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말한다. 비록 소련이 이긴 전쟁이라고 하지만 소련군측 사상자가 100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피해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삶과 운명 1~3》 시리즈는 읽기가 쉽지 않다. 우선 이 소설의 가장 큰 방해물은 이 시리즈 소설의 시작이 이 시리즈의 출발점인 1권이 아닌 바실리 그로스만의 전편 소설을 읽었다고 전제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작품 역주에서 바실리 그로스만의 전편에 나온 배경이라는 설명이 나올 때마다 당황하게 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 미출간된 작품의 연장선이라니 이걸 어떻게 읽으란 소린가라는 당황점과 여러 인물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 않아 초반은 집중하기 어렵다. 


매순간 생명의 기로에 서 있는 전쟁을 통과하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자는 '시간의 의붓자식' 신세라고 말한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사람. 시대를 잘 타고 났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하필 전쟁 중에 태어나고 자라서 온갖 삶의 폭풍을 맞아야만 되는 시대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가장 힘든 것은 시간의 의붓자식 신세다. 

잘못된 시간을 사는 운명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시간은 자기가 낳은 이들만을, 

자기의 자식들, 자기의 영웅들, 자기의 일꾼들만을 사랑한다. 



《삶과 운명 1~3》 의 저자 바실리 그로스만은 2차 세계대전을 살아가는 이들의 운명을 시간의 의붓자세 신세라고 말한다. 의붓자식의 신세. 시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삶과 운명이 평탄할 리 없다. 고통스럽고 치열해야 한다. 홀로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의붓자식 신세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과 운명은 힘겹기만 하다. 


전쟁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날것으로 마주한다. 매순간이 생명의 기로에 서 있는 전쟁 현장에서 종군기자로 그 참상을 목격한 저자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표시할까? 


바실리 그로스만의 이 소설에서는 독일군이 운영하는 독일 수용소와 정치범으로 잡혀 동족인 소련 당국에 의해 운영되는 소련 정치수용소가 나온다. 독일 수용소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인만큼 유대인들의 수용소가 소개되고 소련 당국이 국민들을 수용하는 장치이다. 적군에 의해 고통받는 것과 같은 동족에게 고통받는 것. 어느 쪽이 더 치열할까? 


유대인 수용소 게토로 끌려간 빅토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보내는 그 당시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짐승 우리에서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어. 

그건 주위에 온통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야. 

게토에서는 말처럼 차도로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악의에 찬 시선도 없었기 때문이야. 




동일한 운명을 가진 게토 수용소의 유대인 사람들. 이들 모두는 언제 독일군에게 학살을 당할지 모르는 신세이다. 바깥에서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차별과 특권 등 온갖 불공평을 감당해야 했지만 이 수용소에서는 모두 똑같은 신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에서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말한다. 


반면 소련인이면서 소련 당국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린 수용소에 갇힌 아바르추끄는 동족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수용소에서 불평등을 한탄한다. 같은 죄수임에도 누군가는 줄을 잘 서 물건을 감춰도 처벌을 피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도 핍박을 받는다. 같은 동족이가 같은 수감인이면서 다른 이 불공평을 두며 이들은 한탄한다. 



인간의 본성이 모두가 절망 상태인 상황보다 같은 위치이지만 그 사이에서 느끼는 불공평이 인간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바실리 그로스만은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문학 현대소설 《삶과 운명 1~3》 에서 저자는 이 불행 앞에 직면한 인간의 본성을 '굴종'이라고 표현한다.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의 행렬에 굴종한 유대인들의 모습, 스탈린의 독재 앞에 아무런 소리하지 못하고 오직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온갖 수모를 순수히 감당하는 인간의 모습.. 

더욱 끔찍한 건 우리가 전쟁 속에서 인간이 아닌 비열한 짐승이 되기까지는 단 몇 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불행 속에 인간의 운명은 희망이 없는가? 

이러한 굴종과 복종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점점 전쟁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저 좌절해야 하는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이 상황 속에서 빛을 본다. 



불행 속에서 굴종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본성적 갈망 또한 인간의 본성임을 강조한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굴종하는 사람들 속에서 바르샤바 게토, 소비보르 대규모 봉기, 히틀러 저항 운동, 베를린 봉기 등을 만들어냈고 역사를 이루어냈음을 강조한다. 그 갈망이 결국 지금의 자유를 만들어냈고 미래의 빛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시대의 의붓자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은 고달프다. 모든 생명이 고귀한 가치를 지녀야 하지만 전쟁 속에서 일부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모두가 무거운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 이 현실에는 과학자도, 소련 당국의 신임을 받던 당 서기도 별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 시대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던 한 명 한 명의 삶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일제 치하 또는 6.25 한국 전쟁의 불행 속에서 살아갔던 우리의 역사가 떠오른다. 우리의 역사가 유명한 독립군이나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 처럼 보여도 결국 이 시대를 묵묵히 이겨내며 살아간 평민들의 삶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이 《삶과 운명 1~3》 소설 또한 그 사람들을 그린다. 시간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꿋꿋이 살아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결국 희망이라는 걸 보여준 소설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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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될 것
최진영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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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에 대해서 회의론자이다. 

기후위기로 날로 늘어만가는 자연재해, AI로 점점 인간의 쓸모가 사라지는 듯한 현재,  좀처럼 끝나지 않는 전쟁, 인구감소 등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두 아이에게 밝은 미래를 보여주지 못할 것 같은 부채감을 느낀다. 아이들이 학교 시간에 배워 오는 환경 운동등을 불러주면 아이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기성세대의 교육에 남 몰래 한숨을 쉬곤 한다. 


긍정적인 뉴스는 갈수록 희박해지고 부정적인 뉴스만 넘쳐나는 이 때.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과연 미래를 꿈꿀 수 있는가? 


최진영 작가의 소설집 《쓰게 될 것》 에서도 미래가 그려진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 또한 미래의 모습을 낙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첫번째 표제작 <쓰게 될 것>에서는 전쟁으로  배급나간 엄마를 대신해서 홀로 집에서 숨죽이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썸머의 마술과학>에서 아빠는 투자 실패로 다툼이 늘어나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AI 시대는 원하는 유전자를 선택하며 원하는 모습을 디자인할 수 있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빼앗겨버린 시대의 모습이 그려진다. 기후 위기, AI, 전쟁 등.. 소설 속의 미래 모습은 나의 생각처럼 긍정적인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이 책에서 어른들의 모습을 주목한다.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현실이 곱게 보일리 없다. 


<쓰게 될 것>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직장을 잃고 배급을 위해 매일 긴 줄을 선다.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며 해결책 없는 답답한 상황을 호소한다. 그리고 으레 어른들이 말하는 말을 내뱉는다. 


"내 딸만 없었어도 나는 ……." 


현실이 더 지옥인 세상. 이 세상을 끝내고 싶지만 끝내지도 못한다. 어디 그 뿐이랴. 경제적인 이유로 맘껏 싸우고 싶지만 아이들이 볼까봐 카톡으로 싸우는 부모님의 모습. 원하는 모습만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나를 마주한다. 


미래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 

그 모습은 바로 내가 아니였을까? 


부정적인 시대를 그려가는 어른들의 모습은  체념형으로 비춰진다. 어쩔 수 없으니,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 하루 하루 버티어 갈 뿐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무기력만 몰고 올 뿐이다. 


꿈 꿀 수 없는 미래.. 


이 소설에서 희망을 그려내는 부분은 바로 이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어린 아이들이다. 


전쟁으로 이제 하나뿐인 혈육 엄마마저 잃지만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비록 홀로 전쟁 속을 살아가야 하는 신세이지만 그는 말한다. 신을 믿었던 할머니와 달리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신이 되어주며 자신을 살게 했다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현실이 앞으로도 반복되겠지만 그 부조리를 이해하면서도 끝내 싸우겠다고 말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경제적인 어려움과 기후 위기.. 

자신들이 이 위기를 만들어낸 당사자가 아님에도 피해를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봄과 여름 (썸머), 

봄은 현실을 직시하며 부모님을 원망하지만 여름은 학교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해가는 데 주력한다. 


동생 여름의 작은 실천들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봄에게 동생은 말한다. 


언니 말 들으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소용이 없어. 

배운 대로 하는 건데 눈치를 봐야 해.


마지막 단편 <홈 스위트 홈>에서도 가장 강력한 삶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도 다름 아닌 암 말기 환자 주인공이다. 자신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찾고 수리하며 새로운 삶을 상상해간다. 엄마와 반려인 어진은 재발할지 몰라 두려워하지만 주인공은 오히려 땅에 떨어진 물품들을 주으며 옛 주인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걸 상상한다. 다시 아플 수도 있고 병원에 실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걸 꿈꾼다. 


소설집 《쓰게 될 것》은 결국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해준다. 


나는 질문한다. 


"이러한 시대에 희망이 있는가?" 


그 질문에 이 책은 명확한 해답을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고 꿈을 꿀 때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소설은 비록 퇴직 후 투자 실패로 손해를 보았지만 바리스타로 새롭게 삶의 후반전을 시작하는 아빠가 나오고 성공한 어른의 모습은 아니지만 자신답게 삶의 마지막을 마무리한 성인 유진이 나온다.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의 행위가 조그마할지라도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도와가는 사람들이 신이 되었듯 나와 우리의 행위가 이 암울한 미래에 신이 되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내가 완벽한 미래를 만들어주지 못하지만 내 행위가 조금이나마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해 주기 위해서 다시 용기를 내어본다.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살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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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다가 책마을 사람들에 김원영 변호사이자 무용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김원영 변호사가 누군가?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자 변호사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및 김초엽 소설가와 함께 <사이보그가 되다>를 쓴 저자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그 때만 해도 변호사가 본업이었는데 신문 지면에는 무용수라고 그를 소개한다.

휠체어로 생활하는 김원영 무용수가 춤을 추기 시작하며 가지는 고민과 경험을 함께 풀어낸 책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 소개가 되어 있다.












마침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그의 책을 구매해서 반가운 마음에 기사를 읽었다.



장애인으로서 무용을 시작하면서 춤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한다.

"좋은 춤"

"잘 추는 춤"

이 두가지가 비슷하지 않을까?

잘 추는 춤이 좋은 춤이 아닐까?

하지만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한다.

잘 추는 춤은 말 그대로 잘 추는 춤이다. 아름답다고 규정한 특정한 몸, 기술이 들어간 춤이 잘 추는 춤일 것이다.

좋은 춤은 시대의 가치관, 분명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선명한 춤이라고 말한다.

가치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며칠 전에 읽은 황석희 번역가의 책 『번역 : 황석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황석희 번역가는 책에서 '좋은 번역' 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의미를 털어놓는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은 번역'이란 어색함이 없는 문장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옮겨 쓴 문장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글.

마치 원작가가 그대로 썼다고 느껴질만큼 번역자느 뒤에서 꽁꽁 숨겨져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황석희 번역가는 의외의 반론을 제기한다.


진정 훌륭한 번역은

번역문에서 인간적인 흠결이 보일 정도로

번역자의 인성이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원문을 바꾸라는 게 아니다.

다만 기계적인 번역 떄문에 번역가 자체의 인성과 특성마저 묻혀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번역가의 '연륜'과 '인성'을 느낄 수 있어야 좋은 번역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잘 번역한 글은 될 수 있지만 좋은 번역은 될 수 없다는 점.

잘 하는 것과 좋은 것.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

잘 하는 춤과 번역만 집중하다보면 좋은 춤과 번역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좋은 춤을 추려고 하고 좋은 번역을 하다 보면 잘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 아닐까?


하지만 황석희 번역가와 김원영 무용수가 말하는 글을 읽으며 나는 '잘 쓰는' 글이 아닌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좋은 글이란 김원영 무용수의 말대로 '나의 가치관과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글'일 것이다.

좋은 글이란 황석희 번역가의 말대로 '나의 연륜과 인성이 배어 있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 쓰는 글이 아닌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걸 목표로 한다.

잘 쓰는 글보다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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