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末에 EBS에서 방송한 <강유원의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을 몇일 전 '다시 보기'로 한번 빠르게 듣고, 어제와 오늘은 다시 한번 찬찬히 정리하면서 들었다. 강유원 선생의 긴 강의에 익숙해 있다가 이 짧은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아쉬움이 꽤 있었는데, 다시 한번 집중해서 들으니 전체 강의의 구성이 조금 눈에 들어오면서 하나의 주제로 잘 짜인 강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전체 10강 중 앞 부분 1,2강은 서문에 해당하고 3강에서 8강까지는 본문, 마지막 9강과 10강은 결문이라 할 수 있다. 

 

 

서문에서는 고전이란 무엇인가와 독자를 고전으로 이끄는 놀라움이라는 파토스에 대해 설명하고, 본문에서는 전환기의 시대상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들에 대한 한·두가지 독서 포인트를 제시해 주며, 결문에서는 고전들을 통해 나와 세계를 돌이켜 보기를 제안한다.

 

이 강의들을 하나로 꿰는 주제는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 인 것 같다.

 

 

 

1강 고전을 읽는 방법

 

 

고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강유원 자신만 해도 고전 시리즈를 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정의를 내려왔다.

 

 

 <인문고전강의. 2010>  

 

 

2010년 출간된 『인문고전강의』에서는 고전을 '스승'으로 표현했고, 2012년 『역사고전강의』에서는 '지혜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책"으로 정의했다.

 

 

 

<역사고전강의. 2012.> 

 

 

 

마지막 『문학고전강의』에서는 문학의 특성을 감안하여, '잘 만든 이야기'를 문학 고전으로 정의하였다.  

 

 

<문학고전강의. 2017> 

 

 

 

이번 강의에서는 "이야기 하는 존재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지고, 가장 재미있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읽었고, 가장 오랫동안 전해지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있다.  인간을 규정하는 다양한 , 'Homo OOO' 에 빗대어 인간을 '이야기 하는 존재'로 설명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 남은 이야기가 고전이란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는 방식은 단순하다. 공부를 하듯이 밑줄을 긋고, 주제를  찾고, 독후감을 쓰는 따위의 방법은 독서 교육의 병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저 재미 있게 읽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다시 재미있게 들려 줄 수 있으면 잘 읽은 것이다.

 

 

 

 

 

재미있다는 것은 이야기에 푹빠지는 것이고, 주인공에게 공감하여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고대 희랍에서 최고의 문학 장르로 인정 받았던 비극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연민- 공감할 수 있어야 좋은 이야기다.  비극이 한바탕 마음을 휘몰아치고 나면 그 끝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카타르시스이다. 강유원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개운해 진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전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려운 이야기로 인식되어 있다.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독해력이다. 한글로 씌어 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읽고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 훈련되지 않으면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이제스트판이 아니라 원전(완역본)으로 고전을 읽는 훈련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아주 천천히 때로는 놀이하듯 때로는 씹어 먹듯 1년에 한두 권 정도를 가지고 책 읽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수영도, 악기도 어릴 때 배워 놓아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  

 

 

 

 

2강 놀라움 (驚)의 파토스

 

 

 

 

 

 

놀라움이 앎의 시작이라는 말 자체가 놀라웠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놀란다. 호기심이 생기고, 그 궁금함을 풀어보려 답을 찾고, 그 속에서 가치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깨달을 때 기쁨을 느낀다.  철학함이란 알고자 하는 노력, 앎을 향한 욕망이다.

 

 

 

 

 

 

 

 

앎의 과정도 파토스이다. 희랍어로 Pathos는 고통, 경험을 뜻하는 단어(πάθος)에서 왔으며(위키피디아), 영어 passion의 어원으로 감정, 열정, 고난 등의 뜻을 갖는다. 열정이 있으니 열심히 하는데 그 겪음이 고통스럽다는 말로 나는 받아 들인다.  Pathos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의미는 '겪음, 경험'이다.

 

 

 

 

 <문학고전강의>

 

 

 

희랍의 널리 알려진 격언으로 'Pathei Mathos -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가 있다. 사실 이 격언은 대부분의 문학작품의 구조이기도 하다. 오뒷세우스도, 오이디푸스도, 어린왕자도 고난을 겪고 성장한다. 

 

또 Pathos는 연민이다.  같은 것을 함께 겪으면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연민을 뜻하는 영어 Compassion은 함께(com) 겪는(passion) 것이다. 함께 겪으며 나누어 가지게 된 고통을 함께 덜어 보려는 마음이 연민-자비-사랑이다.  Pieta는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느끼는 고통이자 사랑이다.  

 

함께 느끼는 것은 Sympathy다.  공동체가 함께 겪고 같은 것을 느낄 때 공감이 형성된다. 이 공감이 Sensus Communis(공통 감각) 즉 Common Sense(상식)이다. 올바른 상식이 올바른 공동체를 만드는 토대인 것이다.

 

 

 

 

 

 

 

내가 고전 읽기를 시작하면서 정리해 본 고전의 필요성이다.  공동체가 거대해지면서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은 간접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동으로 읽을 수 있는 Text야 말로 우리 시대에 공감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감을 통해 합의된 덕, 그 시대적 가치야말로 사회적 정의를 논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 덕(arete/virtue)이든 사회적 가치이든 간에  (다시 본 강의로 돌아와서..)  그 기준은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신념은 앎에 기반한다.  '신념'에 믿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미 특정한 앎을 지칭하는 듯 보이지만, 여기서 신념 체계를 가치 체계라고 바꾸어 생각해 보면 될 듯하다.

 

플라톤은 앎을 4가지 단계로 나누고, 지성으로 알아낸 제1원리를 최고의 진리로 삼았다.  제1원리에 대한 앎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적 앎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통해 이를 가리켜 보이려 했으나, 에로스의 사다리 위에서도 '갑자기' 라면 모를까,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 종류의 앎은 아니다.

 

'추론적 사고'는 현대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고, '믿음 또는 확신'은 인격 신이든 비인격 신이든 혹은 어떤 가치이든 간에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며, 언급할 가치도 없지만 의외로 많을 지도 모르는 상상, 망상이 있다.  

 

 

나의 신념은, 나의 가치관은 어떤 앎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한번쯤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삶의 방식은 신념의 체계에 뿌리박고 있다.  나의 신념 체계가 상상이나 엉뚱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내가 오늘 올바르다고 생각한 행동이 내일 가짜이거나 어릿광대 놀음이었음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고전이 놀라움(驚)의 파토스를 주는 것은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효율성이, 돈과 벌거벗은 생명이 최고의 가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킬레우스를 만나는 것은 놀라움이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삶을 노래하고, 공연하고, 그것도 모자라 포도주 병에, 희석용 동이에, 접시에 그려 놓고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했던 고대 아테나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더 큰 놀라움이다.

 

이 경이(驚異)가 자연의 섭리와 같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보게 하고, 그 뿌리에 놓인 신념의 체계를 반성하게 한다. 이 반성(Reflecction)이 철학의 출발점이다.

 

 

 

 

 

 

3강.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혼돈의 서막 

 

 

 

 

신념의 체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삶의 발판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혼돈의 시기에, 더 이상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위기의 순간이 닥쳐서야 비로소  수백 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의 체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것에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고, 새로운 토대는 아직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 절망의 시대에 등장하는 몸부림, 그 절실한  탐색이 전환기의 사상들이다. 경쟁하는 사상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하나의 신념의 체계로 통합되고 전환기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미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된다.

 

 

 

 

 

 

 

청동기 문명의 파괴와 함께 수백 년의 암흑 시대가 이어지던 고대 희랍 세계는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에게해 주변으로 수백 개의 폴리스가 생겨나 경쟁과 협력 속에 번성해 갔다. 기원전 5세기 초에 놀랍게도 大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며 에게해 세계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테나이가 해상 강국이 되어 밖으로는 주변 폴리스들을 규합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고, 안으로는 민주정을 활짝 피워냈다.

 

 

 

 

 

 

아테나이의 제국화를 보며 시기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폴리스들은 스파르테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고, 아테나이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과 전쟁을 시작했다.  고대 희랍 세계의 내전인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기원전 404년까지 27년간 이어졌다. 

 

 

 

 

 

 

 

전쟁은 평상시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야수같은 인간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생존과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배우고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했다. 전쟁은 그 자체가 '잔혹한 교사' 이다.

 

 

 

 

 

법은 구속력이 없었고, 정의는 경멸되고, 말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이 혼돈 속에  희랍 세계는 동반 몰락의 길을 갔다.  Polis 그 자체가 삶이었던 시민의 공동체는 사라졌고 탐욕에 가득찬 개인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은 명성과 부를 가져다 주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 전쟁에서 장군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추방도 당했던 아테나이 귀족 출신의 투퀴디데스는 <역사> 라는 전쟁 보고서를 썼는데, 마치 비극 드라마처럼 만들었다고 평가 받는다. 이 거대한 비극의 주인공은 아테나이다.

 

 

 

 

 

 

이 비극의 원인은 희랍 비극이 대개 그러하듯 휘브리스 Hybris, 즉 아테나이의 오만에 있다고 투퀴디데스는 분석한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너무나 큰 번영을 누리던 아테나이가 동맹국들을 압박하며 제국의 길로 들어 선 순간 이 비극은 예견되었다.  희랍인들은 휘브리스(오만)에 의해 하마르티아(잘못된 판단/무모함)를 저지르게 되고, 신의 네메시스(복수/응징)를 불러 온다고 생각하였다.

 

 

 

 

 

4강.  소크라테스의 변론 : 아테네의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와 정체의 급변을 겪으며 아테나이 시민의 심성은 거칠어졌다. 남부끄럽지 않은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아테나이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겪었던 소크라테스는 남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하는 아테나이의 잘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얼굴에 찬물을 퍼부었다.  남에게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문제라고 몰아세웠다. 강유원의 맛깔난 표현으로는, "남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문제인 줄 알아?" "어이, 젊은이, 너 자신을 알아야 할 텐데." 와 같이.

 

 

 

 

 

 

 

 

 

얼굴에 똥물을 맞은 듯 분노한 아테나이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고 결국 사형을 선고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항변한 연설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서서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배심원들을 향해서 항변하지 않았다. 평소에 하던 대로 아테나이 시민들을 향해 언제나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을 뿐이다. 다만 늘 개인적으로 하던 이야기를 재판정에 모인 전 시민들을 향해 '대중 연설'로 했던 것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부끄러워 하라고 질타했다. 명예와 부를 위해서는 크토록 마음을 쓰면서 슬기로움과 진리 그리고 영혼이 훌륭해 지는 것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는 것이다. 

 

강유원 선생의 예가 참으로 적절한데,  집값 광풍의 시대에 최대한 끌어 모아 갭투자라도 하려는 사람에게, "갭투자 말고, 영혼에 마음을 쓰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인가? 당장 모든 인간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나도 그렇다. 형제 자매, 지인들과 절교를 마음먹지 않는 한 입밖에 꺼내기 힘든 말이다. 너도 나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소위 '투자' 로 한몫을 보지 않는 한 거지꼴을 면하기 어려운 약탈적 자본주의 시대에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 놓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의 체계를 고수하고 삶의 방식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배를 마셨다.

 

 

 

 

 

 

영혼을 돌보는 것은 쾌락을 반대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쾌락, hedone는 삶을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의 하나로 유행한 퀴레네 학파가 주장한 것이 쾌락주의이다.  개인의 정서적 즐거움을 삶의 가치로 삼는 철학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Polis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대두하면서 등장하는 신념의 체계로서, 이후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Polis 시대의 종말과 이어지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철학으로 계승된다.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역설한다.  영혼을 돌보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훌륭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인지 따져 묻고 또 묻는 일이다.

 

캐묻는 삶은 피곤하다. 부와 명성을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 행위를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고 올바른 행위인지 따져 묻는 것은 자학이라고 생각되기 십상이다. 부와 명성과 영혼이 함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도 영혼을 위해 가난과 비난을 선택한 셈이다.  거친 심성과 탐욕이 난무하는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질타는 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가끔 어떤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위력이 있다. 

 

 

 

 

 

 

5강. 『고백록』 : 영원한 제국 로마의 몰락

 

 

 

 

 

 

 

 

기원후 3세기가 되자 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도 혼란과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4세기부터 남하한 게르만족들이 로마 깊숙이 파고 들었고, 로마는 게르만 뿐만 아니라 훈족 등의 이민족에게 유린되어 갔다.

 

하지만 로마는 로마다. 로마의 식민지들은 Romanized 했다. 로마의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있어 최고의 가치는 희랍에서와 같이 명성과 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로마 식민지의 시민들은 명성과 부를 위해 로마로 모여들었고, 그 중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로마에서 명성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은 뛰어난 수사학을 구사하는 법률가가 되는 것이다. 로마에서 수사학자는 웅변가이자 법률가였다.  카르타고의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로마에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문득 이 젊은이에게 삶의 회의가 찾아 왔다.  '문득'의 순간이 어떻게 찾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명성과 부와 정욕과 방탕으로 가득찬 삶을 '문득' 뒤돌아 보았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깨달았다. Metanoia, 회심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성서를 읽었다. 

 

 

 

 

 

 

 

 

그는 로마의 주교가 되었으며, 초기 교부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삶의 참다운 의미를 신 안에서 찾고, 진리를 찾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신학이 아니라 고전의 관점에서, 즉 잘 만든 이야기로 읽는다면 "야망에 가득찬 젊은이가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문득 삶의 회의를 느끼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으로  볼 수 있다. 겪음을 통해서 지혜를 혹은 진리를 찾는다는 고전의 전형적 구성을 하고 있다.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을 진리 위에 정초하려던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돌보는, 끊임없이 캐묻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른다."를 되뇌었고, 아테나이의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논박으로 밝혀 내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뿐이었다.  진리를 모른 채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반성하고 캐묻는 삶은 끝없는 길 위의 영원한 나그네처럼 고달프고 신경질적이다. 

 

중세인들은 차라리 안정되고 평화로웠을 것 같다.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신에 대한 믿음은 '신념과 삶'의 진리성을 보증해 준다.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의 대 혼란 속에서도 천상의 국가는 영원할 것이니, 신의 품속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했을 것 같다.

 

 

 

 

* 이 글은 강유원 선생의 글을 정리하고 있지만, 중간 중간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고, 그것이 분명이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어, 강유원 선생의 강의나 그 의도에 벗어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밝혀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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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 크리스마스 선물같은 알맹이가 꽉 들어찬 페이퍼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엄청난걸 준비하셨는지 감탄만 나올뿐이네요! 염치없지만 남은 강의부분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리 2020-12-26 12:41   좋아요 1 | URL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한 것뿐입니다. 직접 뵌 것은 딱 한 번뿐이지만 예전 강의 파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필요할 때 종종 듣고 있습니다. 목소리만으로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조금 쓸쓸하기도 합니다. 이번 강의는 아주 대중적으로,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힘을 빼셨지만, 뜯어 볼수록 원숙함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나머지를 정리하려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ㅎㅎ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

막시무스 2020-12-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늦었지만 해피 크리스마스 연휴되십시요!

내꿈다 2021-02-03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세하고 깊은 강의 정리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공부 시작합니다

말리 2021-02-05 13:04   좋아요 0 | URL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강유원 선생이 TV에 나온 것을 보았다. EBS의 클래스e라는 프로그램에서 약 30분씩, 10회에 걸쳐 고전 강의를 하였다. 본방은 몰랐고, 우연히 검색하다가 발견했는데, EBS가 재방을 유료로 만들어 놓았다. 10여 년 전부터 무료로 풀어 놓은 강유원 선생의 강의 파일을 감사히 들었기 때문에 두말없이 유료 결재를 하였다. 1달간 유효하다.

 

 

 

 

 

 

도서관에서 40주 강의를 할 때는 고전 1권으로 매주 2시간씩 4주 강의를 하였는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에 1권을 설명하고 있으니 내용의 깊이가 예전 강의에 미칠 수는 없다.

 

 

 

 

 

 

 

 

 

 

 

선택된 고전들은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 '위기의 시대'를 대표하는 책들이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새로운 시대가 희미하게 밝아 오는 시기,  옛 시대의 토대는 허물어졌지만 아직 새로운 시대의 초석이 자리잡지 못한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삶의 방법을 탐색했던 작품들이다.

 

전환기의 고전을 읽을 때 작품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시대의 모습이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는 왜 이런 작품이 나오게 되었는지,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은 8권의 작품들 개개에 관한 강의라기 보다는 시대적 맥락 속에 이 고전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하고, 서양의 역사 특히 서양의 사상사가 어떻게 흘러 왔는지를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이 강의는 한 강씩 듣기보다는 한꺼번에 듣는 것이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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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2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강유원박사님 고전시리즈를 좋아했는데, 한번 찾아서 보고 싶네요!ㅎ

말리 2020-12-23 15:48   좋아요 0 | URL
저도 강유원 선생님의 고전 강의 시리즈를 통해 책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예전에 다운 받았던 강의를 듣곤 합니다.

메모리부족 2020-12-22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틀동안 정주행!했습니다. 강추!

말리 2020-12-23 15:49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다시 한번 듣고 있습니다. 정리하면서 들으니 또 다른 윤곽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scott 2021-01-0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말리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런 고전 강의들으면서 책도 완독할수 있을것 같네요.^.^

말리 2021-01-10 11:43   좋아요 1 | URL
요즘은 좋은 강의가 많아서 행복하기도 하고 바쁘기도 합니다. ^^ EBS가 유료로 강의를 올려서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요. ㅎ
 

코로나19로 계획이 쓸모없어 지는 경우가 잦다. 서양 고전을 시대순으로 읽으려 했는데, 희랍 철학을 시작하자마자 중단하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는 문학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 같아서, 평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단테의 『신곡』을 읽기로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겨울의 재앙을 견디기에도 'Comedia' 같은 기쁜 소식이 낫지 싶다.

 

단테의 『신곡』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렵고 재미도 없었다. 너무 많은 인물들로 정신도 없었다. 올해 호메로스 강의를 들었는데, 거기서 강대진 선생이 『신곡』이 재미 없는 이유는 희랍 신화와 서사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성경』을 모르고는 읽기 어렵다고도 했다. 고전은 당대를 날카롭게 묘파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내포한다는데, 거기에 또 하나가 더 있는 것 같다. 고전은 이전의 고전 텍스트를 계승하고 있다. 지식 위에 새로운 지식이 쌓이듯, 고전의 형식은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고전의 내용은 되풀이하여 소재로, 주제로, 일화로 새로운 고전 속에 얼굴을 드러낸다. 그동안 읽은 책들이 두 번째 『신곡』 읽기에 보탬이 될런지 기대를 해본다.

 

 

 

인문학자라면 누구나 사랑한다고 해도 될만큼 자주 언급되는 『신곡』이라 본문 읽기에 들어가기 전에 좋은 강의를 듣고 정리하는 과제를 하기로 했다. '좋은' 강의는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도 또 하나의 과제다. 동영상 과잉의 시대라 전문가부터 동네 아저씨까지 영상이 참 다양하기도 하고, 교수라든가 학자라든가 하는 명칭을 달고 있어도 그 수준과 열성은 또 각양각색이라 소위 말빨에 넘어가지 않고 그 깊이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신곡』의 대표 번역으로는 민음사 판과 열린책들 판이 있다.  두 역자의 강의가 모두 인터넷에 올라 있어 이 강의들을 먼저 선택했다. 두 분 모두 이탈리아 문학이나 어학 전공이고, 원전 번역자이니 믿을 만했다. 이 정리글은 박상진 교수의 강의를 기본으로 김운찬 교수의 강의를 참고하여 쓴다.

 

 

 

 https://www.ebs.co.kr/tv/show?prodId=101358&lectId=10406419

 

 

박상진 교수의 강의는 2015년 EBS 인문학 특강에서 <단테, 구원의 시인> 이란 제목으로 두 개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1강은 '단테는 누구인가?', 2강은 '『신곡』, 우리 시대의 구원'이다.  그외에도 플라톤 아카데미, 클래식 클라우드 등에서의 강의가 있다.

 

 

 

 

 https://youtu.be/OzlgrbwEa2U

 

 

 

김운찬 교수는 플라톤 아카데미 프로그램 중 지혜의 향연에서 2019년에 <이승의 삶을 위한 저승 여행> 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 (1265~1321)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다.  피렌체를 빼놓고 르네상스를 말할 수 없듯, 단테를 빼놓고 르네상스를 말할 수 없으며, 피렌체도 말할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며, 서구의 14세기에서 16세기에 해당한다.  호이징아는 1919년 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에서 " 단테의 시대에서, 중세는 잊혀지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였고, 근대는 외면하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와버린 미래였다."고 썼다.

 

 

 

 

 

단테를 르네상스의 대표자로 꼽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정착시킨 이탈리아어에 있다. 중세의 공용어는 라틴어였고, 모두 라틴어로 글을 썼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유럽에는 각 지역의 (토)속어가 문자로 정착되었다.  영어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에스파냐어는 세르반테스에 의해, 독일어는 루터에 의해 완벽한 형태의 문자로, 동시에 불후의 문학 작품으로 탄생했다. 쉬운 글자로 쓰인 책들이 널리 출판됨에 따라 대중에게도 지식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지식의 대중화는 세계의 변방에 있던 유럽을 세계의 중심국으로 부상하게 만든 토대가 되었다.

 

 

 

 

 

 

단테에 대한 평가는 르네상스인인 보티첼리, 미켈란젤로부터 현대의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찬탄으로 가득하다.  미켈란젤로는 "지구 위를 걸었던 사람 중, 단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단테의 영향은 문학, 회화, 음악, 언어학, 정치학, 대중문화까지 여전히 지대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단테와 신곡.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1465. 피렌체>

 

 

 

단테의 『신곡』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으로 지옥문을 지나 땅 속으로 내려가는 지옥이 보이고, 단테의 뒤쪽으로는 산처럼 보이는 연옥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으며, 이 모두를 감싸고 있는 원형의 하늘이 천국이다.  오른쪽의 도시는 단테가 태어나 사랑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다가 추방당한 현실의 피렌체이다.  『신곡』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지옥-연옥-천국으로의 순례라는 허구적 창작물임과 동시에 이 세상의 삶이 원인이 되어 인간이 가게될 미래의 현실로서의 저 세상 이야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단테는 스스로 이 책을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는 내용을 담은 이 거룩한 책" 이라고 썼다.

 

 

 

 

 

 

 

 

 

 

『신곡』의 원 제목은 위 사진의 표지에 적힌 그대로이다.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보카치오가 'Divina'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이후에 출판본부터는 대개 La Divina Comedia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한자권에서는 神曲이 되었다. 박상진 교수는 이 번역어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신곡을 '귀신의 노래'라고 풀이할 것 까지는 없지만, 원제의 Comedia라는 뜻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점에서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다.

 

 

 

 

 

 

 

 

 

 

Comedia는 무슨 뜻일까?  박상진 교수는 단테의 입을 빌려 『신곡』의 천국편을 인용하여 다만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는 내용을 담은 이 거룩한 책" 이라고만 설명한다. 김운찬 교수는 고상한 비극과 대비되는 의미의 대중적 희극이란 뜻이거나 혹은 행복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풀이한다.  단테가 천국에 들어가 신을 대면하는 결말이니 기쁜 소식임은 분명하다.

 

 

 

 

 

 

 

『신곡』 은 현재까지 발견된 필사본만 800여 종이고, 연구서나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평생을 대학에서 『신곡』 만 가르치는 교수도 많다고 하니, 여기서 이 책이 어떤 책이라고 요약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장 검색만 해봐도 읽을 만한 글들을 여럿 찾을 수 있다. 

 

 

[박상진의 문학으로 쓰는 이야기]단테처럼...어느 깊은 밤, 잠에서 깨어 당신의 이야기를 쓴다면 (sedaily.com)

 

 

중요한 것은 직접 읽는 것이다.  그 전에 책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승의 구조를 눈으로 익히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이 그려놓은 몇 가지 저승의 도해다.

 

 

 

 

 

 

지옥과 연옥만 그려져 있지만 가장 깔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북반구는 땅이고 남반구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 지옥은 땅 아래로 내려가고, 연옥은 땅 위에서 시작하여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그런데 지옥은 북반구, 연옥은 남반구에 있으므로, 연옥은 사실 땅 위의 산이라기 보다는 물 위의 섬처럼 떠 있다.  지옥에서 연옥으로 가는 길은 지구 중심을 관통하여 나 있는 좁다란 통로이다.

 

 

 

 

 

북반구와 남반구를 뒤집어 보면 이렇게 그릴 수 있다. 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9개의 하늘이 천국이다. 

 

 

 

 

 

 

천국의 모습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그림이다.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우리는 맨 아래에 보이는 지옥으로 들어가 지구의 중심으로 고통스레 내려간 후에 좁은 길을 따라 위쪽으로 나있는 연옥의 산(섬?)에 도달하여 천국을 향해 죄를 씻으며 올라야 한다. 그리고 천국으로 날아 오르게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여인이 있다. 베아트리체이다. 단테를 천국으로 이끄는 길잡이는 3명이다. 공교롭게도 B로 시작하는 인물들로,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이다.

 

 

 

연인의 대명사,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이다. 단테가 9살과 18살 때, 딱 두 번 그것도 우연히 마주친 여인임에도 단테는 평생을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며 살았다. 베아트리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일찍 죽었고,  단테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고 살았지만, 단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베아트리체뿐이다. 하지만 둘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것 같다.

 

 

 

 

 

 

베아트리체는 실존했지만, 어쩌면 단테에게조차 환상의 여인이었을 것 같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준 환상은 구원이다. 구원의 여인으로서의 베아트리체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성스러움과 환상을 준다. 기쁜 소식인 'La Comedia' 에서는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구원으로 이끌며 happy ending이 된다.

 

베아트리체를 생물학적인 여성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땅과 하늘을 손잡게 해주는 구원의 매개체이다. 땅으로부터 날아 올라 영원한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그 무엇이 있다면 구원을 꿈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이 지상의 폴리스를 위해 이데아를 꿈꾸었듯이.

 

 

 

 

리스트 <단테 교향곡>

https://youtu.be/A7x-la2Ab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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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 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 포스팅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즐건 한주되십시요!

말리 2020-12-20 23:35   좋아요 1 | URL
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읽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들을 조금 더 찾아보고 관심을 조금 더 높여서 본문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다음주는 크리스마스네요. 조용한 성탄절이 되겠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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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구조는 입체적이다. 원환 구조인데, 이중의 원환이다. 1장과 27장이 만나고, 2장에서 7장까지의 대화는 다시 24장에서 이어져 26장에서 끝난다. 그 가운데인 8장부터 23장까지는 어린 왕자가 들려준 경험담이다.

 

1장과 27장은 서술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 현재이다. 전체적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서술자 는 비행기 조종사다. 나는 6년 전에 사하라 사막에서 만났던 어린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 먹는다. 그런데 1장은 어린 시절에 좌절된 서술자의 꿈과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외롭게 살아온 서술자 자신의 이야기다. 2장 첫 머리에 가서야 비행기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했고, 그날 밤 어린 왕자를 만났다고 하며, 서술의 시점이 6년 전 그날 밤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역행하며 흔히 말하는 플래시백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그리고 마지막 27장에서 서술자는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6년 전 자신의 별로 돌아간 어린왕자를 추억한다.

 

2장부터 26장까지는 6년 전의 그 아흐레 동안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2장에서 불쑥 나타난 어린왕자와 티격태격 갈등을 겪으며 나는 어린 왕자에 대해 조금씩 알아 나간다. 어린 왕자는 결코 속 시원히 설명하는 법은 없지만 대화 속에서 나는 퍼즐을 맞추듯 그의 삶을 그려나간다. 2장부터 7장까지는 그렇게 6년 전의 시점에서 나와 어린왕자가 현재 시제로 대화를 나눈다.

 

7장은 장면이 전환되는 분수령이자 나와 어린 왕자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목숨이 걸린 비행기 수리가 뜻대로 되지 않아 하루하루 초조해 가는데, 어린 왕자는 양이 장미를 먹느냐 안 먹느냐에 세계의 운명이 달린 것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린 왕자의 중요한 일과 나의 중요한 일이 부딪혀 폭발하고 어린 왕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 울음에 비행기를 수리하던 공구들을 던져 놓고 조그마한 어린 왕자를 품에 안고 흔들어 달랜다. 눈물의 나라, 그 신비함 속에 나는 어린 왕자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기 시작한다.

 

8장에서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작은 별에서 꽃과 만나는 장면이 그려진다. 아마도 어린 왕자가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기 수년 전의 시점일 것이다. 1인칭 서술자인 는 사라진다. ‘의 시점이 몇 군데 보이긴 하지만, 8장부터 23장까지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대개 서술된다. 9장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고 10장부터 15장까지 여섯 개의 작은 행성을 거쳐 16장에서야 지구에 도착한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기 딱 1년 전에 지구에 왔고, 16장에서 23장까지 다양한 겪음과 깨달음을 통해 성장한다.

 

24장은 다시 7장과 이어진다. 다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돌아와 비행기 조종사는 어린 왕자와 대화를 계속해 나간다. 7장이 내가 사막에 불시착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는데, 어린 왕자의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며칠이 지나 24장은 여드레째 되는 날이다. 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셨고 비행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24장에서 26장까지는 나와 어린 왕자의 이별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되돌아가기 위해 사하라 사막에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동화처럼 철새에 매달려 왔던 때와는 달리 뱀이라는 공포와 충격을 통해 현실적으로 돌아갔다. 동화 속의 어린 왕자는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성숙한 현실의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27장은 1장과 짝을 이룬다. 1장이 프롤로그라면 27장은 에필로그다. 서술자 나는 어린 왕자를 떠나보낸 지 6년이나 지나서야 슬픔을 진정시키고 그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1장은 고전이 대개 그렇듯 이 이야기의 주제를 담고 있다. 여섯 살적 나는 보아 뱀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전혀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을 품속에 간직한 채 외롭게 살아가며 어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 책의 주제 중 하나는 여우가 가르쳐 준 지혜이다.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장이 여섯 살 적 나로 시작하는 것은 이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 하나의 주제는 근대인을 표상하는 외로움이다. 78억의 인구가 어깨를 부딪치며 복닥복닥 살아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은 78억 개의 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집체일 뿐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 세계를 겪으며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역자 황현산 선생은 해설에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며..” 라고 썼다.

 

비행기 조종사가 불시착한 사막은 물리적인 사막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이다. 비행기 조종사는 일주일 분의 물만 가진 채 사막에 불시착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장사꾼은 물 대신 목이 마르지 않게 하는 알약을 판다. 사람들은 사막에 살고 있으면서도 진정 필요한 것은 버리고, 무엇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아끼려고 한다. 사실 이 세계가 사막인지 바다인지도 모른 채 욕망을 쫓으면 산다. 어린 왕자와 비행기 조종사가 마지막에 함께 마신 것이 사막의 우물물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샘물을 마시고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비행 조종사는 비행기를 고쳐 자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사랑이다.

 

1장의 보아뱀은 어린 왕자의 노랑뱀과 대응을 이룬다. 뱀은 어린 시절 비행기 조종사를 눈뜨게 해주었다. 뱀의 무엇인가가 여섯 살의 그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고,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성경에서 뱀은 지혜와 결부되어 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처음 만난 대상도 뱀이다. 노랑 뱀은 한두 마디 말에도 핵심을 이해했고, 긴 말없이 어린 왕자에게 가야할 길을 가리켰다. 어린 왕자는 뱀의 독이라는 충격을 통해 자신의 별로 되돌아간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길들인 장미꽃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책임은 말랑말랑한 사랑의 마음이나 아련한 그리움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며 사랑이다. 보아뱀도 노랑 뱀도 충격으로 깨달음과 결단을 촉구한다.

 

1장은 여섯 살 적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누구였을까? 죽음이 눈앞에 닥친 사막의 차가운 새벽녘에 홀연히 나타난 어린 왕자는 비몽사몽간에 만난 여섯 살 적의 어린비행기 조종사였을 것 같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어린내가 어린 왕자와 같은 겪음과 지혜를 얻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내가, 지금의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라는 비행기 조종사의 안타까움과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1943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발표된 이 책은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세계에 대한 우화와 반성 그리고 위로일 것이다.

 

마지막 27장에서 서술자 나, 비행기 조종사는 6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6’이라는 숫자는 1장의 여섯 살 적 어린나로 돌아간 듯한 비행 조종사를 연상케 한다. 별들을 다투어 소유하려던 사업가들이 만든 사막은 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그 별들에서 수억 개의 방울소리와 수억 개의 웃음소리를 듣는 내 안의 어린 왕자는 우물을 품은 아름다운 사막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생텍쥐페리는

어느 날 아프리카의 사막을 여행하게 되면 이곳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이 풍경을 자세히 보아 두라. 그리고 이곳을 지나가게 되거든 제발 서두르지 말고 바로 별 아래서 잠시 기다리라! 그때 한 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오면, 그 애가 웃고, 그 애의 머리가 금발이면, 물어도 그 애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 애가 누구인지 여러분은 잘 알리라. 그때는 친절을 베풀어 달라. 이다지도 슬퍼하는 나를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이내 편지를 보내 달라. 그 애가 돌아왔노라고…….”

라고 이 책을 끝낸다.

 

나에게도 그 애가 찾아올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어린 왕자도 집을 떠나 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목이 말라 죽기 전에 그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은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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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10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한 리뷰입니다! 어렴풋했던 어린왕자의 감동이 생생해지는 느낌이네요!ㅎ 감사합니다!

말리 2020-12-10 20:50   좋아요 1 | URL
고전 읽기를 함께하는 분들과 과제를 했어요.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모임이 중단되었거든요. 말 대신 글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요. 오늘까지 과제 제출인데 모두들 어려워 하고, 저도 급하게 과제를 쓴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내용보다는 구성에 대해 썼는데, 칭찬받을 만큼 정교하진 못합니다. 그래도 격려해 주셔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

scott 2021-01-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에 어린왕자에 새로운 해석
또다른 감동이네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말리 2021-01-10 11: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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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ia를 '변명'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변론'이라고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일반적이지만, 언젠가부터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적절하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 책은 '변명'을 옹호하는 철학과 교수 강철웅의 2020년 번역판이다.

 

 

 

변명(辨明)은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 또는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힘' 을 의미한다.  변론(辯論)은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짐' 또는 '소송 당사자나 변호인이 법정에서 주장하거나 진술함. 혹은 그런 주장이나 진술'을 뜻한다.  두 단어 모두 '옳고 그름을 따지고 사리를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같은 말이다. 

 

 

 

 

 

 

<미주7>

 

 

 

학술적 논쟁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겠지만, 문제는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에 있는 것 같다. 변명은 잘못에 대한 인정이라는 통념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배치되고, 변론은 말을 잘한다는 느낌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덕(德)이라고 말한다.

 

 

 

 

<미주7>

 

 

 

변명과 변론의 '변'은 한자가 다르긴 하다. 변명은 '분별할 辨', 변론은 '말잘할 辯'이 쓰인다.  변명이 되었건 변론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가리고' 무엇의 '사리를 밝혔'는가 이다. 

 

 

 

 

 

 <작품안내>

 

 

 

고전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책은 내용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작품의 구성도 눈여겨 보려고 노력한다. 고전은 첫 문장이나 서사(序詞)에 주제가 축약되어 있다.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 선생은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책의 전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그 분노가 해소되는 것으로 끝난다.  호메로스는 이 철없는 영웅의 분노를 따라가며 한 인간의 성장과 트로이 전쟁의 전말과 인간세계는 물론 신의 세계까지 모두 담아낸다.

 

 

 

 

 

<17a 주>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은 '모른다'로 시작해서 '모른다'로 끝난다.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너 자신을 알라' 이다. (물론 이 명언의 출처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이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비틀어 써먹었다.)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때, 진짜 아무것도 몰라도 단 하나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든 '모른다'에는 이 앎이 내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거나, 아예 그 대상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지혜롭다고 소문난 시민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소위 논박술을 구사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끝까지 몰고가 실토하게 만든 단 하나의 진실도 바로 '나는 모른다' 이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 에는 생략된 것이 있는데, '무지' 이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이 '너'에는 소크라테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인간이 알아야만 될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무지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소명이자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자신의 봉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는 거의 없다. 수많은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논박당하여 어쩔수 없이 승복했다 하더라도 가슴속에는 불타는 증오가 이글거릴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의 분노와 적개심이 생명의 위협이 됨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때문에 칠순의 나이에 재판정에 불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소명과 봉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피고 진술 즉 항변(apologia) 자체를 일종의 논박으로 바꾸고, 배심원에 대한 호소를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마지막 유언으로 삼아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지를 역설한다.

 

 

 

 

<해설>

 

 

왜 '나는 모른다' 에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앎의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신은 앎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에 무지한 자는 앎을 갈망하지 않는다.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소크라테스적 맥락에 접목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라면 앎을 욕망한다.  앎에 대한 욕망은 無知에 대한 知에서 시작되니, 인간이라면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는 신이 아니라 한갓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신의 경고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경구의 숨은 뜻을 멋지게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한계에서 벗어나 신적 앎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인간은 동물과 신의 중간자이다.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신을 향할 수는 있다.  육체의 불로와 영생이 신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의 앎이 신적인 것이다. 앎을 추구한 인간의 학문이  philo-sopia로 불린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는 중간자인, 인간의 운명을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42a 주>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세 번의 연설을 한다. 첫 번째는 유무죄에 관련된 항변 연설이다. 배심원으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유죄를 결정한다. 둘째 연설은 형량 제안 연설이다.  원고가 형량을 제안하면, 피고는 대안 형량을 제시한다. 배심원들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테나이 시민들에 대한 훈계와도 같은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연설은 원고가 제안한 사형이 채택되게 만든다. 재판이 끝난 후 행정 절차를 밟는 잠깐의 빈 시간 동안 소크라테스는 사형 투표자와 무죄 투표자에게 각각 마지막 연설을 한다.

 

 

"아니,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나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연설을 끝맺는다. 신이 아닌 인간은 삶이 좋은지 죽음이 좋은지 모른다. 아테나이라는 덩치 크고 굼뜬 말(馬)의 등에가 되기로 결심한 소크라테스는 전 생애를 '나는 모른다' 를 위해 살았고, 그의 사형을 선고한 재판정에서의 연설 또한 '나는 모릅니다'로 시작해 '그 누구에도 분명치 않습니다.' (누구도 모른다)로 끝낸다.

 

 

 

『변명』은 고전의 전형적 구조인 ring composition이며, 이 원환 구성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거의 유일한 핵심인, 無知의 知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른다.'는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다. 앎이 최고의 덕인 진정한 인간이 되겠다는 존엄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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