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선생이 TV에 나온 것을 보았다. EBS의 클래스e라는 프로그램에서 약 30분씩, 10회에 걸쳐 고전 강의를 하였다. 본방은 몰랐고, 우연히 검색하다가 발견했는데, EBS가 재방을 유료로 만들어 놓았다. 10여 년 전부터 무료로 풀어 놓은 강유원 선생의 강의 파일을 감사히 들었기 때문에 두말없이 유료 결재를 하였다. 1달간 유효하다.

 

 

 

 

 

 

도서관에서 40주 강의를 할 때는 고전 1권으로 매주 2시간씩 4주 강의를 하였는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에 1권을 설명하고 있으니 내용의 깊이가 예전 강의에 미칠 수는 없다.

 

 

 

 

 

 

 

 

 

 

 

선택된 고전들은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 '위기의 시대'를 대표하는 책들이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새로운 시대가 희미하게 밝아 오는 시기,  옛 시대의 토대는 허물어졌지만 아직 새로운 시대의 초석이 자리잡지 못한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삶의 방법을 탐색했던 작품들이다.

 

전환기의 고전을 읽을 때 작품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시대의 모습이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는 왜 이런 작품이 나오게 되었는지,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은 8권의 작품들 개개에 관한 강의라기 보다는 시대적 맥락 속에 이 고전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하고, 서양의 역사 특히 서양의 사상사가 어떻게 흘러 왔는지를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이 강의는 한 강씩 듣기보다는 한꺼번에 듣는 것이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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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2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강유원박사님 고전시리즈를 좋아했는데, 한번 찾아서 보고 싶네요!ㅎ

말리 2020-12-23 15:48   좋아요 0 | URL
저도 강유원 선생님의 고전 강의 시리즈를 통해 책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예전에 다운 받았던 강의를 듣곤 합니다.

메모리부족 2020-12-22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틀동안 정주행!했습니다. 강추!

말리 2020-12-23 15:49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다시 한번 듣고 있습니다. 정리하면서 들으니 또 다른 윤곽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scott 2021-01-0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말리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런 고전 강의들으면서 책도 완독할수 있을것 같네요.^.^

말리 2021-01-10 11:43   좋아요 1 | URL
요즘은 좋은 강의가 많아서 행복하기도 하고 바쁘기도 합니다. ^^ EBS가 유료로 강의를 올려서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요. ㅎ
 

코로나19로 계획이 쓸모없어 지는 경우가 잦다. 서양 고전을 시대순으로 읽으려 했는데, 희랍 철학을 시작하자마자 중단하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는 문학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 같아서, 평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단테의 『신곡』을 읽기로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겨울의 재앙을 견디기에도 'Comedia' 같은 기쁜 소식이 낫지 싶다.

 

단테의 『신곡』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렵고 재미도 없었다. 너무 많은 인물들로 정신도 없었다. 올해 호메로스 강의를 들었는데, 거기서 강대진 선생이 『신곡』이 재미 없는 이유는 희랍 신화와 서사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성경』을 모르고는 읽기 어렵다고도 했다. 고전은 당대를 날카롭게 묘파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내포한다는데, 거기에 또 하나가 더 있는 것 같다. 고전은 이전의 고전 텍스트를 계승하고 있다. 지식 위에 새로운 지식이 쌓이듯, 고전의 형식은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고전의 내용은 되풀이하여 소재로, 주제로, 일화로 새로운 고전 속에 얼굴을 드러낸다. 그동안 읽은 책들이 두 번째 『신곡』 읽기에 보탬이 될런지 기대를 해본다.

 

 

 

인문학자라면 누구나 사랑한다고 해도 될만큼 자주 언급되는 『신곡』이라 본문 읽기에 들어가기 전에 좋은 강의를 듣고 정리하는 과제를 하기로 했다. '좋은' 강의는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도 또 하나의 과제다. 동영상 과잉의 시대라 전문가부터 동네 아저씨까지 영상이 참 다양하기도 하고, 교수라든가 학자라든가 하는 명칭을 달고 있어도 그 수준과 열성은 또 각양각색이라 소위 말빨에 넘어가지 않고 그 깊이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신곡』의 대표 번역으로는 민음사 판과 열린책들 판이 있다.  두 역자의 강의가 모두 인터넷에 올라 있어 이 강의들을 먼저 선택했다. 두 분 모두 이탈리아 문학이나 어학 전공이고, 원전 번역자이니 믿을 만했다. 이 정리글은 박상진 교수의 강의를 기본으로 김운찬 교수의 강의를 참고하여 쓴다.

 

 

 

 https://www.ebs.co.kr/tv/show?prodId=101358&lectId=10406419

 

 

박상진 교수의 강의는 2015년 EBS 인문학 특강에서 <단테, 구원의 시인> 이란 제목으로 두 개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1강은 '단테는 누구인가?', 2강은 '『신곡』, 우리 시대의 구원'이다.  그외에도 플라톤 아카데미, 클래식 클라우드 등에서의 강의가 있다.

 

 

 

 

 https://youtu.be/OzlgrbwEa2U

 

 

 

김운찬 교수는 플라톤 아카데미 프로그램 중 지혜의 향연에서 2019년에 <이승의 삶을 위한 저승 여행> 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 (1265~1321)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다.  피렌체를 빼놓고 르네상스를 말할 수 없듯, 단테를 빼놓고 르네상스를 말할 수 없으며, 피렌체도 말할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며, 서구의 14세기에서 16세기에 해당한다.  호이징아는 1919년 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에서 " 단테의 시대에서, 중세는 잊혀지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였고, 근대는 외면하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와버린 미래였다."고 썼다.

 

 

 

 

 

단테를 르네상스의 대표자로 꼽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정착시킨 이탈리아어에 있다. 중세의 공용어는 라틴어였고, 모두 라틴어로 글을 썼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유럽에는 각 지역의 (토)속어가 문자로 정착되었다.  영어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에스파냐어는 세르반테스에 의해, 독일어는 루터에 의해 완벽한 형태의 문자로, 동시에 불후의 문학 작품으로 탄생했다. 쉬운 글자로 쓰인 책들이 널리 출판됨에 따라 대중에게도 지식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지식의 대중화는 세계의 변방에 있던 유럽을 세계의 중심국으로 부상하게 만든 토대가 되었다.

 

 

 

 

 

 

단테에 대한 평가는 르네상스인인 보티첼리, 미켈란젤로부터 현대의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찬탄으로 가득하다.  미켈란젤로는 "지구 위를 걸었던 사람 중, 단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단테의 영향은 문학, 회화, 음악, 언어학, 정치학, 대중문화까지 여전히 지대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단테와 신곡.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1465. 피렌체>

 

 

 

단테의 『신곡』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으로 지옥문을 지나 땅 속으로 내려가는 지옥이 보이고, 단테의 뒤쪽으로는 산처럼 보이는 연옥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으며, 이 모두를 감싸고 있는 원형의 하늘이 천국이다.  오른쪽의 도시는 단테가 태어나 사랑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다가 추방당한 현실의 피렌체이다.  『신곡』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지옥-연옥-천국으로의 순례라는 허구적 창작물임과 동시에 이 세상의 삶이 원인이 되어 인간이 가게될 미래의 현실로서의 저 세상 이야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단테는 스스로 이 책을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는 내용을 담은 이 거룩한 책" 이라고 썼다.

 

 

 

 

 

 

 

 

 

 

『신곡』의 원 제목은 위 사진의 표지에 적힌 그대로이다.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보카치오가 'Divina'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이후에 출판본부터는 대개 La Divina Comedia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한자권에서는 神曲이 되었다. 박상진 교수는 이 번역어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신곡을 '귀신의 노래'라고 풀이할 것 까지는 없지만, 원제의 Comedia라는 뜻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점에서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다.

 

 

 

 

 

 

 

 

 

 

Comedia는 무슨 뜻일까?  박상진 교수는 단테의 입을 빌려 『신곡』의 천국편을 인용하여 다만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는 내용을 담은 이 거룩한 책" 이라고만 설명한다. 김운찬 교수는 고상한 비극과 대비되는 의미의 대중적 희극이란 뜻이거나 혹은 행복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풀이한다.  단테가 천국에 들어가 신을 대면하는 결말이니 기쁜 소식임은 분명하다.

 

 

 

 

 

 

 

『신곡』 은 현재까지 발견된 필사본만 800여 종이고, 연구서나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평생을 대학에서 『신곡』 만 가르치는 교수도 많다고 하니, 여기서 이 책이 어떤 책이라고 요약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장 검색만 해봐도 읽을 만한 글들을 여럿 찾을 수 있다. 

 

 

[박상진의 문학으로 쓰는 이야기]단테처럼...어느 깊은 밤, 잠에서 깨어 당신의 이야기를 쓴다면 (sedaily.com)

 

 

중요한 것은 직접 읽는 것이다.  그 전에 책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승의 구조를 눈으로 익히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이 그려놓은 몇 가지 저승의 도해다.

 

 

 

 

 

 

지옥과 연옥만 그려져 있지만 가장 깔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북반구는 땅이고 남반구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 지옥은 땅 아래로 내려가고, 연옥은 땅 위에서 시작하여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그런데 지옥은 북반구, 연옥은 남반구에 있으므로, 연옥은 사실 땅 위의 산이라기 보다는 물 위의 섬처럼 떠 있다.  지옥에서 연옥으로 가는 길은 지구 중심을 관통하여 나 있는 좁다란 통로이다.

 

 

 

 

 

북반구와 남반구를 뒤집어 보면 이렇게 그릴 수 있다. 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9개의 하늘이 천국이다. 

 

 

 

 

 

 

천국의 모습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그림이다.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우리는 맨 아래에 보이는 지옥으로 들어가 지구의 중심으로 고통스레 내려간 후에 좁은 길을 따라 위쪽으로 나있는 연옥의 산(섬?)에 도달하여 천국을 향해 죄를 씻으며 올라야 한다. 그리고 천국으로 날아 오르게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여인이 있다. 베아트리체이다. 단테를 천국으로 이끄는 길잡이는 3명이다. 공교롭게도 B로 시작하는 인물들로,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이다.

 

 

 

연인의 대명사,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이다. 단테가 9살과 18살 때, 딱 두 번 그것도 우연히 마주친 여인임에도 단테는 평생을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며 살았다. 베아트리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일찍 죽었고,  단테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고 살았지만, 단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베아트리체뿐이다. 하지만 둘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것 같다.

 

 

 

 

 

 

베아트리체는 실존했지만, 어쩌면 단테에게조차 환상의 여인이었을 것 같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준 환상은 구원이다. 구원의 여인으로서의 베아트리체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성스러움과 환상을 준다. 기쁜 소식인 'La Comedia' 에서는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구원으로 이끌며 happy ending이 된다.

 

베아트리체를 생물학적인 여성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땅과 하늘을 손잡게 해주는 구원의 매개체이다. 땅으로부터 날아 올라 영원한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그 무엇이 있다면 구원을 꿈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이 지상의 폴리스를 위해 이데아를 꿈꾸었듯이.

 

 

 

 

리스트 <단테 교향곡>

https://youtu.be/A7x-la2Ab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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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 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 포스팅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즐건 한주되십시요!

말리 2020-12-20 23:35   좋아요 1 | URL
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읽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들을 조금 더 찾아보고 관심을 조금 더 높여서 본문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다음주는 크리스마스네요. 조용한 성탄절이 되겠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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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구조는 입체적이다. 원환 구조인데, 이중의 원환이다. 1장과 27장이 만나고, 2장에서 7장까지의 대화는 다시 24장에서 이어져 26장에서 끝난다. 그 가운데인 8장부터 23장까지는 어린 왕자가 들려준 경험담이다.

 

1장과 27장은 서술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 현재이다. 전체적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서술자 는 비행기 조종사다. 나는 6년 전에 사하라 사막에서 만났던 어린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 먹는다. 그런데 1장은 어린 시절에 좌절된 서술자의 꿈과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외롭게 살아온 서술자 자신의 이야기다. 2장 첫 머리에 가서야 비행기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했고, 그날 밤 어린 왕자를 만났다고 하며, 서술의 시점이 6년 전 그날 밤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역행하며 흔히 말하는 플래시백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그리고 마지막 27장에서 서술자는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6년 전 자신의 별로 돌아간 어린왕자를 추억한다.

 

2장부터 26장까지는 6년 전의 그 아흐레 동안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2장에서 불쑥 나타난 어린왕자와 티격태격 갈등을 겪으며 나는 어린 왕자에 대해 조금씩 알아 나간다. 어린 왕자는 결코 속 시원히 설명하는 법은 없지만 대화 속에서 나는 퍼즐을 맞추듯 그의 삶을 그려나간다. 2장부터 7장까지는 그렇게 6년 전의 시점에서 나와 어린왕자가 현재 시제로 대화를 나눈다.

 

7장은 장면이 전환되는 분수령이자 나와 어린 왕자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목숨이 걸린 비행기 수리가 뜻대로 되지 않아 하루하루 초조해 가는데, 어린 왕자는 양이 장미를 먹느냐 안 먹느냐에 세계의 운명이 달린 것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린 왕자의 중요한 일과 나의 중요한 일이 부딪혀 폭발하고 어린 왕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 울음에 비행기를 수리하던 공구들을 던져 놓고 조그마한 어린 왕자를 품에 안고 흔들어 달랜다. 눈물의 나라, 그 신비함 속에 나는 어린 왕자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기 시작한다.

 

8장에서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작은 별에서 꽃과 만나는 장면이 그려진다. 아마도 어린 왕자가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기 수년 전의 시점일 것이다. 1인칭 서술자인 는 사라진다. ‘의 시점이 몇 군데 보이긴 하지만, 8장부터 23장까지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대개 서술된다. 9장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고 10장부터 15장까지 여섯 개의 작은 행성을 거쳐 16장에서야 지구에 도착한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기 딱 1년 전에 지구에 왔고, 16장에서 23장까지 다양한 겪음과 깨달음을 통해 성장한다.

 

24장은 다시 7장과 이어진다. 다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돌아와 비행기 조종사는 어린 왕자와 대화를 계속해 나간다. 7장이 내가 사막에 불시착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는데, 어린 왕자의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며칠이 지나 24장은 여드레째 되는 날이다. 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셨고 비행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24장에서 26장까지는 나와 어린 왕자의 이별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되돌아가기 위해 사하라 사막에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동화처럼 철새에 매달려 왔던 때와는 달리 뱀이라는 공포와 충격을 통해 현실적으로 돌아갔다. 동화 속의 어린 왕자는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성숙한 현실의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27장은 1장과 짝을 이룬다. 1장이 프롤로그라면 27장은 에필로그다. 서술자 나는 어린 왕자를 떠나보낸 지 6년이나 지나서야 슬픔을 진정시키고 그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1장은 고전이 대개 그렇듯 이 이야기의 주제를 담고 있다. 여섯 살적 나는 보아 뱀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전혀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을 품속에 간직한 채 외롭게 살아가며 어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 책의 주제 중 하나는 여우가 가르쳐 준 지혜이다.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장이 여섯 살 적 나로 시작하는 것은 이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 하나의 주제는 근대인을 표상하는 외로움이다. 78억의 인구가 어깨를 부딪치며 복닥복닥 살아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은 78억 개의 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집체일 뿐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 세계를 겪으며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역자 황현산 선생은 해설에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며..” 라고 썼다.

 

비행기 조종사가 불시착한 사막은 물리적인 사막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이다. 비행기 조종사는 일주일 분의 물만 가진 채 사막에 불시착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장사꾼은 물 대신 목이 마르지 않게 하는 알약을 판다. 사람들은 사막에 살고 있으면서도 진정 필요한 것은 버리고, 무엇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아끼려고 한다. 사실 이 세계가 사막인지 바다인지도 모른 채 욕망을 쫓으면 산다. 어린 왕자와 비행기 조종사가 마지막에 함께 마신 것이 사막의 우물물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샘물을 마시고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비행 조종사는 비행기를 고쳐 자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사랑이다.

 

1장의 보아뱀은 어린 왕자의 노랑뱀과 대응을 이룬다. 뱀은 어린 시절 비행기 조종사를 눈뜨게 해주었다. 뱀의 무엇인가가 여섯 살의 그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고,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성경에서 뱀은 지혜와 결부되어 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처음 만난 대상도 뱀이다. 노랑 뱀은 한두 마디 말에도 핵심을 이해했고, 긴 말없이 어린 왕자에게 가야할 길을 가리켰다. 어린 왕자는 뱀의 독이라는 충격을 통해 자신의 별로 되돌아간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길들인 장미꽃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책임은 말랑말랑한 사랑의 마음이나 아련한 그리움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며 사랑이다. 보아뱀도 노랑 뱀도 충격으로 깨달음과 결단을 촉구한다.

 

1장은 여섯 살 적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누구였을까? 죽음이 눈앞에 닥친 사막의 차가운 새벽녘에 홀연히 나타난 어린 왕자는 비몽사몽간에 만난 여섯 살 적의 어린비행기 조종사였을 것 같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어린내가 어린 왕자와 같은 겪음과 지혜를 얻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내가, 지금의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라는 비행기 조종사의 안타까움과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1943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발표된 이 책은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세계에 대한 우화와 반성 그리고 위로일 것이다.

 

마지막 27장에서 서술자 나, 비행기 조종사는 6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6’이라는 숫자는 1장의 여섯 살 적 어린나로 돌아간 듯한 비행 조종사를 연상케 한다. 별들을 다투어 소유하려던 사업가들이 만든 사막은 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그 별들에서 수억 개의 방울소리와 수억 개의 웃음소리를 듣는 내 안의 어린 왕자는 우물을 품은 아름다운 사막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생텍쥐페리는

어느 날 아프리카의 사막을 여행하게 되면 이곳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이 풍경을 자세히 보아 두라. 그리고 이곳을 지나가게 되거든 제발 서두르지 말고 바로 별 아래서 잠시 기다리라! 그때 한 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오면, 그 애가 웃고, 그 애의 머리가 금발이면, 물어도 그 애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 애가 누구인지 여러분은 잘 알리라. 그때는 친절을 베풀어 달라. 이다지도 슬퍼하는 나를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이내 편지를 보내 달라. 그 애가 돌아왔노라고…….”

라고 이 책을 끝낸다.

 

나에게도 그 애가 찾아올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어린 왕자도 집을 떠나 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목이 말라 죽기 전에 그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은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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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10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한 리뷰입니다! 어렴풋했던 어린왕자의 감동이 생생해지는 느낌이네요!ㅎ 감사합니다!

말리 2020-12-10 20:50   좋아요 1 | URL
고전 읽기를 함께하는 분들과 과제를 했어요.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모임이 중단되었거든요. 말 대신 글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요. 오늘까지 과제 제출인데 모두들 어려워 하고, 저도 급하게 과제를 쓴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내용보다는 구성에 대해 썼는데, 칭찬받을 만큼 정교하진 못합니다. 그래도 격려해 주셔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

scott 2021-01-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에 어린왕자에 새로운 해석
또다른 감동이네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말리 2021-01-10 11: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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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ia를 '변명'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변론'이라고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일반적이지만, 언젠가부터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적절하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 책은 '변명'을 옹호하는 철학과 교수 강철웅의 2020년 번역판이다.

 

 

 

변명(辨明)은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 또는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힘' 을 의미한다.  변론(辯論)은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짐' 또는 '소송 당사자나 변호인이 법정에서 주장하거나 진술함. 혹은 그런 주장이나 진술'을 뜻한다.  두 단어 모두 '옳고 그름을 따지고 사리를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같은 말이다. 

 

 

 

 

 

 

<미주7>

 

 

 

학술적 논쟁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겠지만, 문제는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에 있는 것 같다. 변명은 잘못에 대한 인정이라는 통념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배치되고, 변론은 말을 잘한다는 느낌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덕(德)이라고 말한다.

 

 

 

 

<미주7>

 

 

 

변명과 변론의 '변'은 한자가 다르긴 하다. 변명은 '분별할 辨', 변론은 '말잘할 辯'이 쓰인다.  변명이 되었건 변론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가리고' 무엇의 '사리를 밝혔'는가 이다. 

 

 

 

 

 

 <작품안내>

 

 

 

고전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책은 내용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작품의 구성도 눈여겨 보려고 노력한다. 고전은 첫 문장이나 서사(序詞)에 주제가 축약되어 있다.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 선생은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책의 전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그 분노가 해소되는 것으로 끝난다.  호메로스는 이 철없는 영웅의 분노를 따라가며 한 인간의 성장과 트로이 전쟁의 전말과 인간세계는 물론 신의 세계까지 모두 담아낸다.

 

 

 

 

 

<17a 주>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은 '모른다'로 시작해서 '모른다'로 끝난다.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너 자신을 알라' 이다. (물론 이 명언의 출처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이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비틀어 써먹었다.)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때, 진짜 아무것도 몰라도 단 하나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든 '모른다'에는 이 앎이 내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거나, 아예 그 대상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지혜롭다고 소문난 시민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소위 논박술을 구사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끝까지 몰고가 실토하게 만든 단 하나의 진실도 바로 '나는 모른다' 이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 에는 생략된 것이 있는데, '무지' 이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이 '너'에는 소크라테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인간이 알아야만 될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무지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소명이자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자신의 봉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는 거의 없다. 수많은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논박당하여 어쩔수 없이 승복했다 하더라도 가슴속에는 불타는 증오가 이글거릴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의 분노와 적개심이 생명의 위협이 됨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때문에 칠순의 나이에 재판정에 불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소명과 봉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피고 진술 즉 항변(apologia) 자체를 일종의 논박으로 바꾸고, 배심원에 대한 호소를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마지막 유언으로 삼아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지를 역설한다.

 

 

 

 

<해설>

 

 

왜 '나는 모른다' 에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앎의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신은 앎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에 무지한 자는 앎을 갈망하지 않는다.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소크라테스적 맥락에 접목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라면 앎을 욕망한다.  앎에 대한 욕망은 無知에 대한 知에서 시작되니, 인간이라면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는 신이 아니라 한갓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신의 경고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경구의 숨은 뜻을 멋지게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한계에서 벗어나 신적 앎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인간은 동물과 신의 중간자이다.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신을 향할 수는 있다.  육체의 불로와 영생이 신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의 앎이 신적인 것이다. 앎을 추구한 인간의 학문이  philo-sopia로 불린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는 중간자인, 인간의 운명을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42a 주>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세 번의 연설을 한다. 첫 번째는 유무죄에 관련된 항변 연설이다. 배심원으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유죄를 결정한다. 둘째 연설은 형량 제안 연설이다.  원고가 형량을 제안하면, 피고는 대안 형량을 제시한다. 배심원들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테나이 시민들에 대한 훈계와도 같은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연설은 원고가 제안한 사형이 채택되게 만든다. 재판이 끝난 후 행정 절차를 밟는 잠깐의 빈 시간 동안 소크라테스는 사형 투표자와 무죄 투표자에게 각각 마지막 연설을 한다.

 

 

"아니,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나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연설을 끝맺는다. 신이 아닌 인간은 삶이 좋은지 죽음이 좋은지 모른다. 아테나이라는 덩치 크고 굼뜬 말(馬)의 등에가 되기로 결심한 소크라테스는 전 생애를 '나는 모른다' 를 위해 살았고, 그의 사형을 선고한 재판정에서의 연설 또한 '나는 모릅니다'로 시작해 '그 누구에도 분명치 않습니다.' (누구도 모른다)로 끝낸다.

 

 

 

『변명』은 고전의 전형적 구조인 ring composition이며, 이 원환 구성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거의 유일한 핵심인, 無知의 知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른다.'는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다. 앎이 최고의 덕인 진정한 인간이 되겠다는 존엄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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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대개 文史哲로 구성되어 있다. 우연인지 기획인지 모르겠지만 문사철의 조합 순서는 희랍 문화가 전성한 순서이기도 하다. 기원전 8C에서 기원전 5C 사이에는 문학,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역사, 기원전 4세기에는 철학이 꽃피었다. 서양 고전 읽기는 희랍 고전에서 출발하고, 희랍 고전은 문학 - 역사 - 철학의 순서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반인에게 희랍의 역사는 적잖이 버겁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를 읽어야 할텐데 , 번역본으로 800~900쪽에 이른다. 분량보다 둘 다 특정한 전쟁을 상세히 다루고 있고, 지중해 세계의 복잡한 역학관계와 이합집산을 파고들어야 하니 여간 머리가 아프지 않다. 숲 출판사의 천병희 선생 번역판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를 읽고 있는데, 등장하는 폴리스와 그들의 식민시만 해도 구분하기가 벅차다. 총 8권 중 4권까지 읽었는데, 전쟁을 독려하는 연설이나 동맹과 화해 등을 위한 사절단의 연설 등, 어느 폴리스를 막론하고 기본으로 구사하는 그 화려하면서도 논리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연설이 아니었다면 계속 읽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우리 고전 읽기 모임은 서사시와 비극 다음으로 역사를 건너뛰고 철학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언뜻 듣기에는 이상할 지도 모르겠다. 역사보다 철학이 더 어렵다는 것은 통념이 아닌가. 칸트나 헤겔을 생각하면 물론 그렇다. 하지만 플라톤은 조금 다르다. 철학의 양대 산맥이라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르고 철학을 말할 수도 없지만, 이들의  철학은 완전히 접근 불가는 아니다. 특히 플라톤은 더 그렇다. 일단 문학의 형식을 빌고 있기 때문에 플라톤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읽는다면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이 참 많고, 너무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주인공 때문에 짜증이 날 수도 있고, 누구 말이 맞는지도 아리송해서 다 읽고 난 뒤에도 좀 찜찜한 느낌이 남을 수는 있다. 하지만 누가 옳은지를 작가가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내가 다시 추론하고 판단해 볼 수 있으니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희랍 철학 읽기의 계획은 대충 이렇다.  시대적 배경을 조금 알아보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을 아주 조금만 공부한 다음 바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다.  책은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이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소크라테스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일 것 같다.   『향연』은 훌륭한 문학 작품인 동시에 플라톤의 '형상론'을 배워 볼 수 있는 철학 텍스트이다. 두 책 모두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해줄 뿐 아니라 철학함의 태도에 대한 실천적 모델이기도 하다.  물론 『국가』를 빼놓고 플라톤을 읽었다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클 수밖에 없지만, 철학 초보자들에게 『국가』가 당장은 무리임에도 틀림이 없다.  아쉽지만 일단 『국가』는 강좌를 통해 개략적인 이해를 하는 것으로 대신 하려 한다. 다행히 플라톤에 대한 공신력 있는 강의는 대부분 『국가』를 주제로 하고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독서는 '꼼꼼히 읽기' , 한때 close reading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여튼 한 줄 한 줄 다 같이 읽으며 가능한 범위 안에서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

 

https://youtu.be/cf75J4GhuhY

https://youtu.be/zSSQ8YI7v8U

 

 

 

 

1. 시대적 배경

 

 

 

 

청동기 문명이 끝나고 철기 시대로 이행하면서 희랍 세계는 300~400년 동안의 암흑기를 거쳤다. 도리에이스족으로 대표되는 침입자에 저항하며 작은 규모의 정치 공동체가 에게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암전 이후 갑자기 환한 불빛이 쏟아지듯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폴리스 시대는 눈부신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에게해의 세계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원전 5세기 초, 거대 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치며 고대 희랍 세계는 절정을 맞이한다. 승리의 주역 아테나이는 희랍의 맹주로 부상하고, 안으로는 민주정을 밖으로는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인류가 깜짝 놀랄만한 성숙된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스 지도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테나이 제국의 팽창은 희랍 폴리스 세계에 내분을 일으키고, 결국 양분된 희랍 세계는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27년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게 된다.

 

 

 

 

 

전쟁은 '난폭한 교사'로,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  아테나이가 자랑했던 민주정은 순식간에 탐욕에 사로잡힌 시민과 그들을 부추겨 권력을 탈취하려는 야심가들의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한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아테나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클레온은 전형적인 민중 선동가였다.

 

 

 

 

 

말은 믿을 것이 못되고, 정의보다는 사적 이익이, 정당한 판결보다는 보복이, 법보다는 폭력이 난무했다.  

 

 

 

 

 

 

희랍 세계 전체가 타락했다. 이렇게 27년이 지나자 전쟁은 끝났지만 폴리스는 더 이상 폴리스가 아니었다.  폴리스는 정치 형태일 뿐 아니라 시민들의 공동체였고, 시민의 목소리였고, 시민의 자부심이자, 시민의 삶 그 자체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희랍 폴리스 시대는 급속히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가 아니었다 해도 폴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패배한 아테나이는 파괴를 가까스로 면했지만, 30인 참주정과 민주정의 부활을 겪으며 공포와 복수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년을 채 못간 참주정을 이끈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외당숙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민주정 옹호자들의 보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증은 이 때문이다.  플라톤이 민주정을 참주정 다음으로 나쁜 정체로 생각했던 것도 민주정이 몰고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상과 폴리스의 붕괴를 뼈져리게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소크라테스

 

 

기원전 470(469)년에 태어나 기원전 399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말은 '너 자신을 알라'로 회자되지만, 이 경구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것으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맥락을 덧붙여 즐겨 사용했던 말일 뿐이다. 델포이 신전의 아폴론은 너 자신이 '인간'임을 알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너 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한다며 돌아다녔다.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

 

 

 

소크라테스가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훌륭한 격언을 공손히 전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가 기진맥진하여 두 손을 들때까지 몰아 붙이는 방식으로 상대의 자복을 받아냄으로써 그들의 무지를 입증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무지를 깨달은 시민들 중 열에 아홉은 분노와 적개심에 이를 갈았을 것이고, 한 명쯤은 소크라테스의 추종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기술을 변증술이라고 한다.  변증술은 논박술과 산파술로 구성되어 있다. 논박술은 꼬치꼬치 캐묻는 대화법인데, 상대를 몰아 붙이는 소피스트적인 현란한 기교이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소피스트' 였다.

 

 

 

 

 

소크라테스가 무너뜨리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믿고 있던 상식과 전통 즉 에토스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신화, 서사시, 비극 등의 작품을 통해 지혜를 얻고 이를 진리라 생각했다. 또한 경험적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순투성이다. 희랍의 신들은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서로 반대 의견을 내세우며 싸우기 일쑤이고, 아테나이인들은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올바름과 동맹국들에게 요구하는 올바름을 정반대로 규정하면서도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경험이나 관습이 서로 모순됨을 보여줌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한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즉 귀납적인 논구를 통해 보편적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삶의 기준을 에토스에서 로고스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동료 시민들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아고라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던 이들에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끝까지 몰아 붙이는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끓어 오르는 적개심에 기름을 끼얹는 행위였다.  설득보다는 분노를 자아내는 논박술이 소크라테스의 목적에 적절한 대화법인지를 물어 볼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런 고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완전히 합의되지 못한 점들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권의 책도 저술한 적이 없고 오직 아고라를 돌아 다니며 사람들을 붙들고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말이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 의해 특히 플라톤에 의해 전해지는 것들 뿐이다.

 

 

 

 

 

가장 일반적인 구분 방식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데 거의 소크라테스 자신의 사상에 가까운 반면, 중기 이후의 대화편들은 젊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다가 마지막에는 소크라테스가 사라지는데, 점차 플라톤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것임이 분명한 명제 하나는 덕은 곧 앎(지식)이라는 것이다. 덕(arete)은 탁월함인데, 기능적 탁월함과 더불어 도덕적 탁월함을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희랍 철학은 탁월함을 발휘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물은 나름의 탁월함을 가지는데,  인간의 탁월함은 바로 앎이다. 앎은 행복한 삶의 토대이다.  신적 앎에 이르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의 무지부터 깨달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것이고, 플라톤은 진정한 앎은 영혼이 이데아를 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자체 안에서 그 앎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3. 플라톤

 

 

 <세상의 모든 철학>

 

 

 

기원전 427년 전통적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플라톤은 기원전 347년에 죽었다. 귀족 출신답게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과두정과 민주정의 혼란을 겪고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정 아테나이의 동료 시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엘리트 교육에 헌신했다.  원형 극장의 비극 공연 등에 의한 대중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국가』에서 보여준 이상적인 철인 통치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에 직접 나섰던 것일까?

 

 

 

 

 

 

 

 

 

 

 

 

 

 

 

 

 

 

플라톤을 통해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고 싶든, 그리스 문화를 통해 플라톤에 친근히 접근하고 싶든, 최근에 출간된 이 책이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암 학당이 기획하고 운영한 <크로스토크 고전인문학 강좌>의 일부를 정리하여 출간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이름이 있어 특히 반가웠다.

 

이 책에 의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dialogos는 "logos를 주고 받는 것" 이란 의미이다. 등장 인물들이 대화하는 극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을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저술가인 동시에 천재적인 극작가"로 평하는 학자도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총 36편인데 위작 논란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30편으로 추정된다. 대화편의 제목은 대개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상대의 이름이다. 저술 연대가 명확하지 않고, 흔히 나누는 초기, 중기, 후기 작품으로의 분류도 학자들간 이견이 여전하다.

 

 

 

 <세상의 모든 철학>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형상론이다.  세계는 영원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와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현상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경험적으로 보고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의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영혼으로 보고 누스로 인식할 수 있는 형상들의 세계, 즉 이데아가 진짜 세계이다.  현상의 세계에 사는 인간이 형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로고스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 박종현 해설>

 

 

 

소크라테스가 논박술을 통해 경험과 관습의 모순을 드러냈던 이유는 현상의 세계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귀납적 논구의 과정을 거치면 보편적 정의, logos에 이를 수 있다.  logos는 다양한 뜻을 가진다. 말, 논리, 이성, 보편 정의된 개념 등이다.

 

대상에 대한 개념은 대상의 형상을 보여준다.  경험적 올바름은 수없이 많지만, 올바름 그 자체를 구현하지는 못한다. 어딘가 부족한 면들이 있다. 그러나 올바름이라는 개념은 올바름 그 자체를 정의해 준다. 대상에 대한 보편적 정의(logos)를 통해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형상을 인식할 수 있다.

 

 

 

 

 

 

 

이데아는 이 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플라톤도 알았다.  『국가』에서 올바름을 정의(定義)하기 위해 이상 국가를 수립하는 긴 작업을 수행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말을 순순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본(本. paradeigma)처럼 하늘에 바쳐져 있다.

 

 

 

 

 <국가. 박종현 해설>

 

 

 

 

 

 

 

 

 

 

 

 

 

 

 

本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다르다. 누구든 그것을 보고 그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그것을 따라 걷는다. 우리는 올바름의 logos를  本으로 삼아 올바름 그 자체의 개념에 가깝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앎은 경험이 아니라 보편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 보편 개념이 우리를 형상들이 있는 이데아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아테나이를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자의 세계를 저 너머 이데아의 세계로 이끄는 길(道)이라고 플라톤은 말하고 있다.

 

 

 

 

 

 

 

플라톤의 형상론은 계서적이다. 모든 대상은 각각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모든 대상은 개념 정의되어 있다.  이 형상들은 하나의 질서 아래 위계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체계의 정점에는 '좋음 agathon의 형상' 이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돈을 벌든, 교육을 하든, 정치를 하든, 예술을 하든, 봉사를 하든, 궁긍적으로는 잘 살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다시 말해 좋음을 향해 있는 것이다. 좋음의 형상이  삶의 본(本)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먼저 좋음 그 자체의 형상을 인식할 수 있는 '좋음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플라톤이 형상들이 모여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만든 것은 여기 현상계를 버리고 저기 이데아의 세계로 날아 오르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 현상계의 삶이 누구에게나 '좋음' 일 수 있도록 저기 이데아의 형상들을 本 삼아 살아 가자고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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