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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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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의 글은 거칠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글(원래는 강의)에서, 전문가의 ‘거침’은 오히려 미덕에 속한다. 간명한 만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서 최원이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을 보여주려 하면서, 이 ‘거침’은 이면의 문제를 드러낸다. 비판과 재비판이 꼬리를 무는 논쟁은 정치한 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단순화 시킨 논리는 의문을 일으키고, 성급한 비판은 섣부른 편견을 심어준다. 특히 비전문적인 우리 독자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 위험성이 적지 않다.

 

 

 

 

  최원은 먼저 알튀세르의 대표 테제인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간략히 소개한다. 이 테제의 내용은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는 것이다. 이 짧은 정의가 그토록 논쟁적인 이유는, 이것이 ‘주체’에 관한 관념을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명 테제가 당시 주체에 대한 논의에 강력한 개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음으로써 주체를 근본적으로 자율성이 아니라 타율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p212」

 

 

  말하자면 알튀세르 이후 주체는 자율성을 잃고, 타율적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주체는 “왜 주체는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잘못된 생각에 그토록 쉽게 설득 당하는가?” 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주체는 구성된 존재니까,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존적 자유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주체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주체에게 ‘저항’이나 ‘반역’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최원은 여기서 우회로를 선택한다. 알튀세르의 후계자인 발리바르, 랑시에르, 혹은 바디우를 통하지 않고, 최원 자신이 알튀세르의 비판자로 지목한 지젝을 경유하여, 알튀세르를 변론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를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 이 미로를 경유하다 보니,  글은 자칫 거칠어지기 쉽다.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 지젝은 알튀세르에 대한 볓볓 비판을 제출하는데, 그 핵심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완전한 방식으로 주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어떤 나머지 또는 잉여로서의 공백을 남기는 방식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인데, 이 공백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는 상상적 동일성의 주체와 구분되는) 진정한 주체이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나중에 주체가 저항하고 반역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주체는 사실 호명이 있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이 주체가 없다면 호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공백으로서의 주체는 호명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것의 궁극적 실패 원인을 이룬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주체 이전에 오는 (진정한) 주체가 있다’ 고 말입니다. p214」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지젝에게서 ‘진정한 주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나는 없지만, 그리고 ‘주체 이전의 주체’ 는 매우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용어지만 말이다.

  ‘주체 이전의 주체’에서 두 주체는 동일한 층위에 있지 않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지젝은 ‘주체 이전의 주체’ 가 아니라 ‘주체화 이전의 주체’(『까다로운 주체 p261)』 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일반 독자들은 ‘주체 이전의 주체’ 를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란 주체의 등 뒤에서 이 ‘나’를 조종하는 또 다른 실체로서의 주체가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주체는 ‘공백’ 이다. ‘공백으로서의 주체’ 라고 최원 자신이 언급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지젝이 주장하는 ‘공백’인 주체 혹은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무엇인가?

 

 

「라캉식으로 하자면,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어떤 새로운 주인기표와의 동일화로 반전되기 이전의 죽음 충동의 순수한 부정성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라캉의 요점은 주체가 우주의 바로 그 존재론적 구조 속에 그것의 구성적 공백으로서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라는 것이 존재의 바로 그 존재론적 구조를 지탱하는 행위의 우연성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존재의 온전한 질서 속에 구멍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존재의 바로 그 보편적 질서를 구성하는 우연적-과잉적 제스처다. 」(『까다로운 주체』,지젝, p261~2)

 

  어렵지만 최원의 말과 비교하며 조금 따라가 보자. ‘어떤 새로운 주인기표와의 동일화’ 란 알튀세르의 개념에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응답하는 것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젝의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호명의 합리성을 따져 주체로 하여금 부름에 응하도록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또 다른 실체가 아니다. 주체는 ‘순수한 부정성’ 이며 ‘공백’이고 ‘우연적’인 제스처 이다. 최원 역시 그런 의미로 지젝을 요약했겠지만, 일반 독자인 우리로서는 그 짧은 요약을 통해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즉 주체는 주체화의 제스처에 의해 메워지는 바로 그 틈새이다. 요컨대 알튀세르, 데리다, 바디우와 같은 상이한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그리고 부정적 방식으로 답변된) 물음 - ‘주체화의 제스처에 선행하는 그 틈새, 열림, 공백은 여전히 “주체”라 불릴 수 있는가?’ - 에 대한 라캉적 답변은 단호한 ‘그렇다!’이다. 주체는 존재론적 틈새인 동시에 보편자와 특수자 간의 단락에 의해 이 틈새의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화의 제스처이다. ‘주체성’은 이 환원불가능한 순환성에 대한 이름이며, 외부의 저항하는 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내속적인, 궁극적으로 바로 주체 그 자신인 장애물과 싸우는 권능에 대한 이름이다. 다시 말해, 틈새를 메우려는 주체의 바로 그 능력은 사후적으로 이 틈새를 지탱하며 생성한다.」 (『까다로운 주체』, 지젝,  p259)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는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바그너의 <파르시팔>에 나오는 대사다. 여기서는 ‘주체화 이전의 주체’를 비유하고 있다. 주체는 틈새 즉 상처인 동시에, 그 틈새를 메우는 즉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화의 제스처라는 것이다. 주체와 주체화는 서로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다. 내부에 상처가 있고, 그 후에 외부로부터 치유가 오는 것이 아니다. 상처가 치유이고, 치유가 상처이다.

 

  물론 최원의 글 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제목부터 '까다로운 주체' 다. 나와 자아와 주체를 애초에 구분할 생각도 없고, 구분되지도 않는 생활인들에게는 다 개 풀뜯어 먹는 소리처럼 들릴만한 이야기다. 그러니 이해를 위해 이 긴 인용문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냥 지젝이 말하는 이 ‘주체화 이전의 주체’가 최원이 지젝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체 이전의 주체’와 같은 것인지, 전혀 다른 것인지 , 척하고 감으로 느껴보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것과 최원의 것이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최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최원의 설명은 주체의 등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주체를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꼭두각시와 그것을 조종하는 난장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끝난다면 사실 그다지 불만스러울 것은 없다. 학자는 학자처럼 말하고, 대중은 대중처럼 이해하고, 그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로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건 좀 그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다.

 

 

  최원이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단연 지젝이다. 그런데 정작 구체적인 비판에 들어가서는 엉뚱하게도 이글턴과 돌라르를 끌어 온다. 그들이 한통속이기 때문에, 이글턴의 오류도 돌라르의 오류도 다 지젝의 오류가 된다는 식이다. 나는 이 둘에 대해, 지젝의 책을 통해 몇 번 이름을 들어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젝은 설령 아무리 한통속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이론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내 기억으로는 진짜로 없다. 물고 뜯지 않는 사람이 없구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티끌만한 차이, 유행하는 용어로 ‘극소차이’라 해도, 콕콕 짚어내어 비판하지 않고는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최원은 돌라르가 지젝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이글턴이 알튀세르 편에서 지젝 편으로 넘어 갔다는 이유로, 이 셋을 하나로 묶어 뒤섞어 버린다.

  최원의 이런 태도는 뭔가 ‘증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알튀세르의 주요 테제를 소개하는 짧고 대중적인 글에서, 너무나 과도하게 지젝에 집착하는 듯이 보인다. 알튀세르는 그냥 알튀세르의 이론만으로도 충분히 공부할 내용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 다시 지젝, 돌라르, 이글턴의 문제제기를 생각해 볼까요? 이들은 모두 알튀세르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호명당한 개인이 돌아서게 되는가? 이 사람이 돌아서기 위해서는 이미 이 사람이 모종의 주체여야 하지 않는가? 무의미한 의례를 통해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을 때, 이 무의미한 의례 자체에 동의하기 위해서라도 믿음 이전의 믿음이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알튀세르는 여기서, 그렇게 묻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체가 돌발하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개인이 마주침으로써 가능하며, 그리하여 그가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어지는데 그렇게 일단 이데올로기적 주체로 구성이 되면, 그는 자신의 동일성을 자신의 과거로 투영해 자신이 마치 항상 그러한 주체로 늘 존재해온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 앞선 주체, 믿음에 앞선 믿음, 이런 것들은 그 자체가 다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는 사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야기를 정리하면, 개인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마주침으로써 어떤 동일성을 부여받으면, 이 동일성을 과거를 향해서 투영함으로써 이 주체는 마치 자기가 언제나 이 동일한 주체로 살아온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영원한 주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p224~5」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은 이 지점에 있지 않다. 돌라르가 어떻게 ‘믿음 이전의 믿음’을 주장했는지 모르지만, 지젝은 ‘믿음 이전의 믿음’ 따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글턴이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에 대해 어떤 전제를 역설했는지 모르지만, 지젝의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그런 인지 능력과 이해 능력을 가진 합리적인 주체가 아니다. 믿음이든 이데올로기든 애초에 주체의 동의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몰상식하고 권위적인 명령이며 이해할 수 없는 외상이다.

 

 

  「 파스칼의 신앙에서 가장 전복적인 핵심은 바로 이러한 내밀한 신념과 외부적인 ‘기계’ 사이의 단락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관한 이론에서 알튀세르는 이 파스칼적인 ‘기계’의 현대적이고 정교화된 판본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엔 그나 그의 학파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과 이데올로기적인 호명 사이의 연관을 전혀 사유해 내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장치들은 어떻게 자신을 ‘내면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어떤 대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주체화의 상호 연계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의 인정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보았듯이 국가 장치들의 이 외부적인 ‘기계’는 그것이 오직 주체의 무의식적인 경제 속에서 외상적이고 몰상식한 명령으로서 체험되는 한에서만 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인 기계를 의미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인 체험으로 ‘내면화 시키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 관해서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스칼로부터 이러한 ‘내면화’는 구조적인 필연성에 의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거기엔 항상 무분별함과 외상적인 비합리성의 오점과 잔여물이 달라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잔여물은 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명령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법에 무조건적인 권위를 부과하는 것은 바로 이 몰상식한 외상의 통합되지 않은 잉여이다. 바꿔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벗어나 있다는 한에서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것, 의미 속의 쾌락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잉여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지젝, p85~86)

 

 

  지젝은 최원이 요약했 듯,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최원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젝은 알튀세르에게, 주체가 어떤 합리적 과정을 거쳐 호명에 응답하는지를 밝히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애초에 그 호명에 대해 합리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튀세르가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믿을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에 논쟁이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합리성과 믿음은 인과관계가 아니다. 법 역시 그렇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지킨다. 법은 철저히 합리적이거나 완전히 투명하지 않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법이 대답할 수 없는 지점이 출현한다. 예전에 아버지도 논리가 막히면 이렇게 소리 지르셨다. 아버지 말에다 어디 토를 달고!!

 

  지젝은 이런 비합리성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몰상식하고 권위적인 명령이야 말로 주체로 하여금 복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주체가 내면화시킬 수 없는 외상적 경험으로 남는다. ‘파스칼의 기계’를 통해 지젝은, 최원이 주장하듯 믿음 이전의 믿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면화라는 목적 자체가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원의 이런 주장은 돌라르에게 해당될지는 몰라도 지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돌라르는 여기서 두 가지 믿음을 알튀세르가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의례를 행함으로써 나중에 오는 이데올로기적 믿음뿐 아니라 개인이 이 무의미한 의례를 행하기로 애초에 동의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믿음이 있는데, 알튀세르는 바로 이 첫 번째 믿음을 이론화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믿음에 앞선 믿음, 주체에 앞선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p218"

 

 

 

 

  40도를 육박하는 여름 한낮에, 달랑 선풍기 한 대를 놓고, 후끈 달아 오른 컴퓨터 앞에서 이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 학자를 상대로 일반 독자가 무슨 겁 대가리 없는 짓인가 우습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뭔가 참기 힘든 억울함이 있다. 여러 번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리뷰를 읽는 분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지젝의 책을 웬만한 건 다 읽어 보았다고는 해도(국내 번역본 중에서 말이다, 이번 신간은 사놓기만 했다), 아마도 이해한 것 보다는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더 많을 것이다. 학계에서 벌어지는 그 복잡한 논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주체’라고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지젝이 어렵게 어렵게 말했지만, 최원이 지젝의 것으로 주장하는 ‘주체 이전의 주체’ 나 지젝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주체화 이전의 주체’가 사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답답한 것은 지젝이 비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비판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직접 본인의 입을 통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듯 보다 모를 듯이 더 큰 엄밀한 개념 논쟁을 두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일반 독자에게 휘~리릭 던져 버리는 그 태도 말이다. 논문도 아닌 대중 적인 글에서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지젝 없이도 알튀세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을까? 편견없이 상식적으로 알튀세르에 이르는 길, 그것이 대중 글(강좌)에서 우리 독자에 대한 제일 배려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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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3-2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 <40도를 육박하는 여름 한낮에, 달랑 선풍기 한 대를 놓고, 후끈 달아 오른 컴퓨터 앞에서 이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말리님의 쌩고생이 저에게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글2007로 옮겨서 출력하니 네 장이 나오네요 밑줄쳐가며 열심히 읽었습니다. 알튀세르 챕터 부분에 단풍잎처럼 말리님 글을 끼워놓았어요^^

프랑스현대철학을 이 책으로 처음 읽어보는 터라 이 책에서 알튀세르 챕터 읽을 때도 그저 참 재밌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는데 말리님 글 읽어보니 제가 아무래도 단순화된 설명 때문에 쉽게 재미를 느꼈던 거 같아요^^;;; 말리님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라는 책에도 관심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말리 2014-03-29 10:01   좋아요 0 | URL
아! 예전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제 제가 쓴 것도 다 잊어버렵습니다;; 겨울이 지나자 벌써 여름이 턱밑까지 온듯 공기가 텁텁하네요.< 처음읽는 독일현대 철학>도 출간되었던데, 전 언제 읽어야 하나 생각중입니다.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런 입문서나 요약강의 보다는 직접 원전을 읽어라고 하던데, 워낙 바탕이 없으니 이런 책도 쉽지가 않습니다. 올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수양님은 읽으셨나요? 함께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최원 2015-03-0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버틀러, 라클라우, 지젝)의 168-177을 보세요.
 

  책이 도착했다. 생각만큼 무겁지는 않다. 제목이 너무 가벼워서 그런가.. 말하기도 쓰기도 참 그렇다. "책 샀어. 뭔데? 헤겔 레스토랑이랑 라캉 카페 ;;"  번역도 일종의 창작이라면, 번역된 제목을 마땅히 존중해야 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원제목을 부르는 게 낫겠다. 이해를 위해서나, 책의 무게를 위해서나...

 

  목차를 펴는 순간 오자가 눈에 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목차에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지만, 기분이 상한다.

  1부 2장. 흰 글씨로 된 제목 :

 

     " 아무 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는 말로 읽어라"

 

 옮긴이의 이름도 처음 듣는다. 왜 하필 지젝 평생의 역작이라는 책을 지젝을 처음 번역하는(내가 가진 책 중에서는 그렇다) 영어영문학과 출신에게 맡겼을까? 그것도 헤겔에 관한 책을.  염려스럽지만,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번역했기를 바랄밖에 없다.

  책꽂이에 두니 마음은 뿌듯한데, 언제 다 읽을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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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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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독일과 그리스다. 칸트와 헤겔의 독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철학의 중심은 프랑스로 이동한 듯하다.

  이데올로기적 호명, 해체, 광기, 유목, 극소차이, 진리 사건 등 지면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용어들의 탄생지는 대다수가 프랑스다. 프랑스 철학을 모르고는 현대 철학뿐만 아니라 일반 인문학 책조차 읽기가 힘들 정도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 수록된 12명의 철학자들은 20C 유럽 지성계의 별들이다.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 대다수는 이미 죽었다. 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그 빛은 죽은 뒤에야  우리에게 도착했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빛날 것이다. 비록 루카치가 탄식했듯,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는 시대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겐 여전히 사유의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별빛이 필요하다.

 

 

 

 

장 폴 사르트르, 타자를 발견하다.

변광배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서양철학을 ‘윤리’ 교과서에서 조금 배웠다. 문과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과생인 우리는 줄긋기 정도로 배웠다. 플라톤-동굴의 비유, 니체-영원회귀 따위로, 그 때 사르트르를 배웠는지 기억에 없지만, 여하튼 내게 사르트르는 사르트르-계약결혼이나, 조금 귀동냥이 늘고 난 뒤에는 사르트르-실존주의, -앙가주망,- 68혁명의 스승 정도에 머물렀다. 이 글(혹은 강연)을 읽는 나의 기대 또한 실존주의였다.

  그러나 저자 변광배는 ‘타자’를 선택했다. 저자는 그 이유로, ‘타자’야 말로 20C 중후반의 인문학 담론을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겹도록 듣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나’에 대한 ‘타자’의 반격-대공습으로 요약할 수 있단다.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의 주체는 항상 ‘나’였던데 반해, 프랑스 현대철학은 ‘타자’를 무기로 반격에 나섰고, 그 대공습의 선두에 사르트르가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철학자였다. 코기토는, 나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의심 뒤에 살아남은 존재 증명의 증거이다. ‘나’의 존재는 코기토에 의해 증명된 것이다. 이런 이해가 너무 거칠겠지만, 일단 ‘나’는 그렇게 철학사에서 그 존재를 인증 받았다.

  그렇다면 ‘타자’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사르트르가 타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과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원본 텍스트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다.

 

  타자는 한마디로 ‘나를 바라보는 자’ 이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는 ‘힘’이다. 그런데 타자의 시선에 사로잡힌 나의 신체는 어떤 신체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너무너무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나는 절대로 그 여자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채로 그 여자의 시선을 무지막지하게 의식하며 살아간다.

  데카르트에게 주체는 항상 ‘나’이지만, 사르트르에게는 ‘나’도 주체고 ‘타자’도 주체다. 나와 타자는 시선을 통해 서로를 객체화시키며,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한마디로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 우위에 서려는 ‘갈등’ 관계이다.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지옥’인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 이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란 소설에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타자는 또한 내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협조자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이 소유는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p36"

  사르트르에게 ‘나’의 존재근거는 바로 이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 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 반드시 ‘타자’를 통해야 한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관계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관계, 실패하는 관계이다. 나와 타자는 상대를 객체화시키며, 서로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서로 주체가 되는 것이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설명이 없어 모르겠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의 응시에 상대를 가두려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무용한 수난’의 관계이다.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보부아르, 레비나스, 메를로-퐁티는 물론 라캉, 푸코, 들뢰즈, 리쾨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철학자들이 사르트르의 영향권 아래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처음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중 나와 타자의 관계는 대충 정리되었다. 그런데 타자의 존재 증명은 어떻게 되었나? 이 책 23쪽에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사르트르가 어떻게 충족시켰다는지 모르겠다. “사르트르는 이 조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타자는 나와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단언하게 됩니다. p23”  이어지는 두 쪽에 걸쳐 사르트르가 두 가지 예를 통해 ‘이 조건을 충족시킬 타자에 대한 정의’를 도출하고 있는데, 이것이 타자 존재 증명의 근거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타자’의 시선이니,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의해 당위적으로 전제된다고 보는 걸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사르트르를 시작으로 ‘타자’가 서양 철학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 꼬옥 기억하자!

 

 

 

 

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정지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란 책을 빌려 온 적이 있다. 웬만하면 끝까지 읽는 편인데, 몇 장 넘기다 그냥 반납했다. 현상학에 대해 감이라도 잡으려던 건데, 한글로 씌어 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했을 뿐이다. 여하튼 그 책은 네 명의 현상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들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이다. 그러니까 메를로-퐁티는 현상학 4인방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에 대한 이런 나의 체험을 감안한다면, 정지은이 안내하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일종의 반전이다. 메를로-퐁티는 보통의 철학자들처럼 머리를 싸매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생활인들이 그러듯이 몸으로 느끼고, 그 체험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따위는 콧방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먹고 자고 노는 내 몸과 살이 번연히 만져지는데, 그것이면 충분하지, 내 존재의 증거가 달리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식이다. 멜르로-퐁티는 체험과 분리된 본질은 없다고 한다.

 

  메를로-퐁티는 물론 콧방귀를 뀌지 않았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데카르트의 책을 얼굴 아래 깔고 있었다. 그는 평생 데카르트의 사유와 씨름했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한없이 까다로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그저 한 편의 글(강의)을 통해 본 느낌을 크로키처럼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이라 할 것 없이 그냥 체험이네, 뭐 그런. 어쩌면 저자 정지은의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데, 첫 페이지에 달린 ‘현상학’에 대한 주석에서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현상학이란...“우리가 커피 잔을 들었을 때 커피에서 풍기는 향기, 따뜻함 등과 같은 다양한 것을 지각, 감각하는데 이것들에서 철학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너무 간단해서 뭔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는 ‘현상’이라고 하면 그 이면에 무슨 ‘본질’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단순하게 말해, 현상이 곧 본질이지, 이면의 본질 같은 것은 따로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현상과 본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딱 일치하는 것일까? 현상이 세계의 전부인 것일까? 그렇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왜 그렇게 난해한 걸까? ... 이런 것들이 이 글을 매개로 내게 ‘현상’한 의문들이다.

 

  생각은 어지럽지만, 어쨌든 이 글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언급은 필요할 것 같다.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와 대립한다. 코기토의 주체는 ‘사유’의 주체이다. 이에 반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사유 이전에 오는 ‘육화된 주체’ 이다. 데카르트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고 말하는 반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나는 할 수 있다’ 고 말한다.

  메를로-퐁티는 동시대의 철학자 사르트르와도 대립한다. 대중적으로는 사르트르가 승리(?) 했지만, 포스트이론의 시대를 맞으면서 뒤늦게 메를로-퐁티의 가치가 주목되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주체’, ‘자유’ 개념에서 대립하는데, 저자의 글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무화하는 주체입니다.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무를 출현시킵니다. 이것은 세계를 계속 생성하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사르트르는 세계를 계속 없앱니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자신과 자신을 결정했던 세계를 무화시키면서, 자신의 존재를 ‘존재했었음’이라는 과거 속에 밀어 넣으면서, 그 자신이 사건이 됩니다. 즉 세계가 변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새롭게 변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주체가 우연적인 사건을 경험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반면에 메를로-퐁티의 주체에게 사건은 그 자신의 출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출현으로서 경험됩니다. p66 」

 

 

 

 

엠마뉘엘 레비나스, 향유에서 욕망으로

김상록

 

  약간 갸우뚱한 글이다. 전체적으로 레비나스를 하이데거와 비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에 대해 너무 편향적이지 않은가 싶다. 내가 읽은 하이데거라야, 물론 보잘 것 없다. “How to Read 하이데거” 한 권과 지젝의 몇몇 저서를 통한 눈동냥 약간이 전부이다. 그래서 편향된 건 저자가 아니라 나 일수도 있다. 레비나스에 대한 독서는 이 짧은 글이 전부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하이데거를 너무 단순화시켜 비판하고 있는 것 같아 억울(?)하다. 물론 단순 비교하면 하이데거는 가해자, 나쁜 놈들 무리에, 레비나스는 피해자, 희생자의 무리에 속한다. 저자는 두 사람의 이런 존재적 차이를 철학적 차이의 기초로 삼고 있다.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쁘고, 레비나스의 철학은 착하다고 설명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는 분분한 해석을 낳고 있지만, 일종의 추문이다. 여하튼 나치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편견을 낳은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이 글을 약간 요약해 놓는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지만 두 사람의 철학은 출발만 동일할 뿐 도착지는 완전히 반대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즉, 역사)의 자기 동일화 운동이 개별 존재자들을 노리개 삼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보고 이에 대하여 개별자를 지켜 내려고 하는 반면, 하이데거는 개별자들에게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존재의 운동에 영웅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에 내던져진 존재자에게 이 존재의 운명을 적극 인수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레비나스는 그런 운명을 강제하는 존재에 대해 존재자가 근본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체성의 이념을 거부하고, 존재자를 존재에 예속시키는 존재론적 차이를 역설하는 하이데거에 맞서,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를 독립시키고 개별 존재자의 주체성과 내면성을 옹호하는 존재론적 분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p95」

 

  존재,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 어려운 개념이지만 눈치로 때려잡아, 존재자는 우리 개개인들이고 존재는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어떤 것, 자연의 운행, 역사의 흐름 따위다. 존재자들에 관한 것은 존재적 층위에,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은 존재론적 층위에 있는데, 이 두 층위의 차이가 존재론적 차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주체성을 거부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하이데거의 실존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본래적 삶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분리는 존재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놀랍게도 타자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유대인으로서 2차 대전 당시 포로가 되었던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의 재앙 속에서 타자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한 사랑을 발견한다.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망은 자기 본존 충동이 아니라 자기를 초탈하여 타자로 나아가려는 충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생명력의 구조를 레비나스는 ‘타자를-위한-일자’라고 규정합니다. 무한 타자에 대한 욕망, 타인의 잘못까지도 내 책임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이 바로 무의식의 구조인 것입니다. 무한 책임의 대속적 희생은 존재와 의식의 공모 아래 제정된 법과 규칙을 위반하고 초과하는 사태인 것입니다. p115」

 

  레비나스는, 우리 각자에게는 예수와 같은 대속적 희생의 정신과 메시아적 자아가 잠재해 있다고 하는데, 이 살뜰한 착취의 구조를 가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겠다.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김성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네 번째 철학자인 블랑쇼는 ‘철학하다’를 ‘사유하다’와 구분하면서, ‘철학’이 아니라 ‘사유’를 주장한다.

  블랑쇼는 “생각하다 혹은 사유하다라는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발제를 맡았다고 치자. 열심히 읽고 밑줄 치고 요약하고 발제문까지 떡하니 만들어서 완벽하게 읽어내려 갔다. 이런 것은 ‘사유하기’ 가 아니다. 사유는 발제가 끝난 후 시작된다. 질문이 쏟아지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흥분해서 마구 떠든다.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블랑쇼에 따르면 이런 것이 사유하기다.

 

 그렇다면 왜 블랑쇼는 이렇게 논리적이지도 않고 중구난방 같은 ‘사유하기’를 우위에 두는 걸까? 중요한 것은 철학하기의 논리정연함이 아니라, ‘무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의 관계는 질문의 연속이다. 어떤 정답을 배우고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 이어지는 또 다른 질문과  대답을 통해, 끝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다.

  「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의 연속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그 물음의 연속은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 생각의 결과와 목적과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 결과, 목적, 정답이 있다면, 그 결과는 끝이 아닌 무한한 시작으로서의 결과이며, 목적은 이 무한한 시작의 여정이 그 목적이며, 정답은 그 무한한 여정을 통하여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답일 것입니다. p130」

 

  이 글의 저자는 블랑쇼에 대해 기억해야 할 최소한의 지침으로, 블량쇼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하고, 부정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그의 사유와 글을 시작한다는 점을 꼽고 있다. 헤겔 변증법의 일반 법칙으로 알려진, 정-반-합 개념을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면서, 블랑쇼의 사유가 헤겔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모르겠지만,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만은 한마디 하고 싶다.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에는 <변증법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학자들 사이에 매우 논쟁적인 용어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많이 해석되고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상식인 것처럼 알고 있는, 소위 “정-반-합”이란 도식은 헤겔 자신이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비록 변증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정립-반정립-종합’의 도식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칸트에 의해 다시 발견된 “삼분법적 형식”을 칭찬하여 그것을 “학의 개념”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이 아니라 칸트의 범주표의 삼분법적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이율배반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긴 했지만, 헤겔은 결코 정립과 반정립을 개진하는 칸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헤겔』p214 」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입문서 혹은 대중 강좌에서 모든 철학자들에 대해 엄밀한 정확성을 추구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 철학자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의 그것에 비교하고, 그 강점을 주장할 때는 최소한 일반적 오해는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글의 저자는 여전히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의 도식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개념이 논쟁적이라면, 반대 주장에 대해서도 부연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호의 모험가, 롤랑 바르트

김진영

 

  롤랑 바르트는 주변부 철학자다. 폐결핵 때문에, 엘리트 과정을 밟아 프랑스 지식인계의 중심부에 진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동성애 파트너인 푸코를 통해 62살의 나이에 비로소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바르트는 그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3년 뒤 사망했다.

  바르트는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할머니, 이모라는 세 명의 여자들 속에서 자랐다. 바르트에게 어머니, 여자는 사유의 본질이다. 바르트 사유의 특질은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움’은 여자의 본질이다.

  바르트의 성정체성 역시 그의 ‘부드러운’ 사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동성애적인 성애는 이성애와는 달리 성 이외의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무목적인’ 성애이다. 이성애는 공동체의 목적, 생산력 등과 관련되어 폭력성을 수반하지만, 동성애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다.

 

  바르트의 부드러운 사유가 기호학에 접목하여 어떤 독창적인 논리를 이끌어 냈는지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도 별반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궁금하면 찾아봐야겠지만, 그럴 여력까지는 없다. 너무 더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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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3일에 쓴 글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정치체에 대한 권리>의 리뷰 글을 쓰려다, 중간에 그만 둔 글인 것 같습니다. 나름의 문제 제기 비슷한 것이라 옮겨 둡니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가끔, 내 나이가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십 대 때는 ‘나이 서른에 우린 무얼 하고 있을까?’를 부르고, 삼십 대 때는 어서 ‘불혹’의 안정이 찾아오길 바랐지만, 오십에도 ‘지천명’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무렵 어떤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기쁨의 감정은 아직도 내 몸 속에 남아 있다. 아, 이 나이에도 배울 것이 있고,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은 참으로 강렬했다. 그 나이에 아마 나는 죽고 싶었고, 세상에서 더 배울 것도, 기쁨을 느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싶다.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지금도 책을 읽고 있으며, 기쁨도 그리고 간혹 행복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다. 평균 수명 구십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때까지 살아야 할 일이 암담하지만, 도서관의 서가 구석구석을 뒤지며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뭔가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구십 수명을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끼어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

 

  대학교 때, 지금의 ‘도를 아십니까?’처럼, 혼자 캠퍼스를 걷고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따라 붙는 선교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주창하는 것이 ‘영생’ 이었다. 나는 종교 자체 보다 그 영생이라는 말에 질겁해서 종종걸음으로 내빼곤 했는데, 영생이라니.. 영원히 죽지 못하는 고통 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때도 그리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의학과 뇌 과학이 결합해서 언젠가는 인간이 죽지 않고, 장기들을 갈아 끼우며 영원히 살게 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 때 인간들은 진짜 행복할까, 나는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일흔 정도까지만,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다 죽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다지 명료하진 않지만 읽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정신만은 놓지 않고 살다 가고 싶다.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며 산소 호흡기를 수년씩 끼워 두는 행동이 나는 전혀 존엄한 인간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들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없다는 종합병원을 보면, 차라리 돈의 존엄성이라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정작 멀쩡하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는 병원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다는 건지, 종교 계열의 병원들이 존엄사를 두고 벌이는 논쟁을 보면 그 위선을 스스로 어떻게 합리화하는지가 궁금하다.

 

  지금 내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다. 살아갈수록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은데, 잠깐 넋을 놓으면 또 세상만사 모두 그렇고 그렇지 하는 상태로 돌아가고 마니, 어떻게 해서든 넋을 붙들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공자를 전공하는 지인에게 不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다 잊어버리고 내가 했던 생각만 남아있다. 마흔은 의심이 없거나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라, 세상일이 이제 와서 의심스럽거나 세상일에 이제와 흔들릴까봐 덜컥 겁이 나서, 똥고집이라도 부리며 그 두려움을 감추어야 하는 나이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의심이 없다는 것은 질문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꼰대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불안을 감추며 굳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으니 슬프다. 그렇다고 어떻게 나이를 먹지 않고 또 기성세대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누가 뭐래도 이십대는 이십대고 사십대는 사십대일 수밖에 없다. 그걸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소통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 ‘국가’가 있다. 말이 곰곰이지 가끔 어떤 계기로 그것들을 떠올리면 짧은 생각을 굴리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빌려다 읽는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 환율이다. 똑 같은 물건이 어떻게 국경만 넘으면 갑자기 비싸지기도 하고, 또 턱없이 싸지기도 하는지 참 신기했다. 세계 여행기들이 넘쳐나면서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하루 종일 먹고 잘 수 있는 가난한 나라 이야기를 읽노라면 왠지 불편했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달을 일해서 모은 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도 살기 어렵다는 말과 똑 같은 것이다. 일년 내내 선배들에게 빈대 붙어 아낀 점심값까지 탈탈 털어서 유럽에 가서 홀라당 날리고 오는 후배 동료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똑 같이 일 년을 일해서 모은 돈이 왜 어떤 나라에 가면 일 년 밥값이 되고도 남는데, 다른 나라에 가면 열흘 밥값도 안 되는지, 이런 것이 부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재밌는 것 중에는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들이 있다. 바다에 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헤엄쳐 다니던 고등어가 우리나라 쪽에서 잡히든, 잠깐 놀다가 중국 쪽으로 가서 잡히든 그 고등어가 그 고등어 일텐데도, 마트에 떡하니 팻말을 달고 있으면 중국산이냐 국산이냐에 따라 가격이 화악 달라진다. 중국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을 침범해서 싹쓸이 해 간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은데 그러면 그 배들이 잡아간 갈치는 국산 갈치일까, 중국산 갈치일까? 아, 별 것이 다 신기하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다. 가격이라는 것이 원래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는 것들로 정해지는 거지, 그 물건 자체의 고유한 가치(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와는 암 상관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 하며 역증을 내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고 요상한 것을.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음식점에 가면 차라리 조선족 아줌마들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아줌마들이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아줌마들과 똑 같은 일을 하고도 더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 아줌마들은 심지어는 우리나라 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는데 말이다, 물론 약간의 북한식 억양이 섞여 있긴 하지만. 만약 경상도 억양이나 전라도 억양이 있다고 급여를 차별했다면 ‘나꼼수’가 나서야 할 일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것 때문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들에 우리나라 노동력 보다 더 싸게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체류가 가능한 이들이다. 아마 예전에 독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그 차별은 외국인 노동자의 태생적 조건이므로 적법하고 정당한 것인가? 고용주는 우리나라 노동자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관계없이 똑 같은 노동의 산물을 얻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주민등록증의 유무에 따라 그의 노동의 가치를 차별받는 것을 마땅하게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래서 국가란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안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딜레마에 놓인다. 그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도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처럼 정규 사원임을 입증하는 사원증을 가진 노동자만이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군말 없이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부당하다면 왜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은 정당한 것인가? 역시 국가인가? 어째서 국가란 틀에 놓이면 이 모든 불합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마는 것일까?

 

국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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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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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듀 데리다』, 9명 저자의 글을 순서 없이 읽었다. 첫 번째 글인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읽었는데, 그제야 나는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을 알게 되었다. 데리다 사망 직후, 싸가지 없는 일부 무리들이, 그것도 주로 영미 대중문화계의 무지한 것들이, 추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를 공격했고, 열 받은 인문학자들이 ‘아듀 데리다’란 제목의 시리즈 강연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책이 발간되었다는, 그런 사연이다. 강연은 런던 대학의 버벡 칼리지 인문학연구소 주최로, 2005년 5, 6월에 이루어졌다.

 

  안면이라도 익혀서 그랬는지, 먼저 읽고 리뷰를 쓴 네 명의 글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대체로 명확했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이해력에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명의 글은 너무 감성적이고, 은유적이고, 또 시적이기도 하고, 광기도 살짝 비치는 것도 같고, 하여튼 이성 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글들이다. 아마도 데리다의 글쓰기가 이랬던 것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데리다를 읽은 적이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래서 요약해 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들 5명의 이름을 거의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장 뤽 낭시 만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공동 저자로 스무 쪽 정도의 글을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 때도 조금 감성적이란 느낌이 있었는데(기억하는 건 아니고, 그 책의 발제로 쓴 글을 찾아보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듀 데리다』에 실린 글 제목이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여서 그런지, 그런 느낌을 좀 더 받았다.  어쨌든 책을 끝낸 기념으로 5명 저자의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대해서 간단히 메모해 놓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한 꼭지가 데리다를 다루고 있어서, 읽어 보았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이라서 그런지 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기에 간단히 정리해 덧붙이려고 한다. 이 강연은 진태원의 것이며 제목은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이다.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

 

  책이 발간된 배경과 9명 저자의 글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한다. 고유명사 즉 명명하기를 통해 그 시작과 마지막인 세례식과 추도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여정은 그 두 찬사 사이의 간격, 타자(언어, 의식, 아버지)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는 것과 타자에게 그 이름을 잘 지켜달라고 내놓는 것 사이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p16

 

 

장 뤽 낭시의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푸코 대 데리다 논쟁’이란 것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장 뤽 낭시는 이 논쟁의 쟁점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광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 논쟁은 데카르트를 읽는 방법과, ‘이성’과 ‘광기’가 전제하는 통상적인 구분을 해석하는 방법을 둘러싼 토론이다.

  “..푸코가 고전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제도 안에서 비이성이 배제된다는 점을 확인했다면, 데리다는 소위 이성의 주체라는 것이 그 혹은 그녀의 주관성 그 자체로 ‘광기’와 ‘이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서는 결정, 확인,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p38

  장 뤽 낭시는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데리다가 ‘주체를 없애려고 모의한 적이 없’ 으며, ‘주체 안에서 동일성과 차이(동일성과 그 자신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교차함을 확인했다’ 고 한다. 장 뤽 낭시가 데리다의 주체 개념을 언급하는 것은 물론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읽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데리다는 코기토를 ‘작별의 코기토’라고 불렀던 모양인데, 이것에 대해 장 뤽 낭시는 “존재와 사고의 오랜 일치 -이성과 어울리는 일치-는 존재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가버릴 때, 그것이 스스로와 접촉할 때 상실된다.” p55 고 설명한다.  고백하자면 카페인 가득 각성 상태에서 정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별의 코기토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이 상실과 연관된 주체의 광기에 대해 소화된 언어로 요약할 처지가 아니다. 체면치레로 인용문 하나만 남긴다.

  “ 자신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 흔적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다.(데리다,주체) 그는 자신이 흔적에 불과함을 발견하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는 스스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스스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즉 자신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것은 비록 그가 만질 수는 있지만 언제나 만질 수만 있을 뿐, 보거나 알지 못하고, 소유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소유하겠다는 의지를 품거나 그것이 야기하는 격정을 감수한다 해도 소유 할 수 없으며, 이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p48

  아마도 이것이 ‘작별의 코기토’이며 그래서 주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자크 데리다의 찬사에 부치는 소고>

 

  페미니즘 이야기도 나오고, 칸트의 ‘as if~' 뭐 이런 말도 많이 나오는데, 전반  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이름도 어렵다.

 

 

드루실라 코넬의 <데리다>

 

 지젝이 신종야만주의라고 표현한, 데리다의 죽음을 향해 영미 지식인들이 추잡 하게 드러낸, 야만성에 대해, 드루실라 코넬은 데리다가 용감하게 미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코넬이 <데리다>에 붙인 부제는 ‘미래라는 선물’ 이다. 데리다의 이 미래는 ‘도래할’ 미래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은 늘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시기상조란 행위를 지연시키는 핑계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야만적인 무지와는 달리, 데리다의 ‘시기상조’는 ‘일종의 만들어지는 중인 시기적절함’ 이다. 나의 근거 없는 편견과는 달리 데리다는 행위를 끝없이 미루는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지금 행동해야 한다’의 철학자이다.

  “데리다는 우리의 의무가 ‘진행중인 시기적절함’에 주의를 기울이기라고 아름답게 쓰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가상적이고, 금지된 상태이며, 미래에 수용될 가능성으로 충만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데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하고 있는 ‘소수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힘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날까지 여전히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듯이, 데리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그가 임종하는 순간에 절실하게 느낀 것은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이 강력한 요청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이 요청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p191~2

 

 

J. 힐리스 밀러의 <故 데리다>

 

  데리다의 <로빈슨 크루소> 읽기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문화연구 측면에서 접근하여, '프로테스탄트적인 자본주의 경제적 인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주류 학풍과는 달리, 데리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에 주목한다. “고독은 데리다가 <크루소>와 함께 읽는 작품인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의 기본적인 주제들 중 하나이다.” p252

  데리다의 사유는 고독한 크루소의 ‘발자국’에서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데,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p253. 하이데거에게도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 이다.

  데리다는 소설의 한 문장, 시 한 구절로 두 시간의 강연이나 한 권의 책을 엮는다. 데리다는 끝없이 이야기한다. 제 시간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왜? 죽음을 향한 존재가 제 시간에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故데리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는 오고야 말고 우리는 故데리다를 본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

진태원의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

 

  『아듀 데리다』를 읽은 기념으로, 때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데리다만 먼저 읽었다. 이 책은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가 시민을 상대로 연 강좌를 묶은 책이다. 아무래도 『아듀 데리다』보다는 쉽고 편안하다.

  진태원은 데리다의 사상 전반을 요약하는 모험 대신 그의 주요 개념 세 가지를 통해 데리다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해체, 차이, 유령 이다.

 

1. 해체

 

  데리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해체’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 만큼 많이 쓰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널리 쓰이면 쓰일수록 원래의 의미가 희석되고 왜곡된다고 한다. 해체는 그렇게 손상된 대표적인 개념이다.

 

  ‘해체’는 데리다가 처음 사용한 말이지만, 사실은 하이데거의 ‘데스트룩치온’ 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이 해체는 파괴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 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p313」

 

  해체는 단순히 대립항들을 뒤집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 내에서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틀 자체는 존속된다. 데리다의 해체란 말하자면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틀을 발명해 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라는 사례로 해체 작업을 보여주는데, 이걸 요약하기는 어렵고, 적절한 비유였는지 모르지만, 단순무식하게 노예-주인에 비유해 보았다.

   해체를 이렇게 볼수 있다면, 해체는 지젝이 분석하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 비슷한 것 같다. 기존의 대립항을 전복하는 것은 기존의 틀 내에서 그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 이 관계의 틀 자체를 해체하는 것. 지배-피지배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부정의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 삼항조가 아니다. 합은 없다. 두 번의 ‘반’에 의해 ‘정’은 그 틀 자체가 붕괴되는, 이중의 부정을 당한다. 물론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이렇다고 나는 읽었다.

 

  데리다의 해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p316」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인 동시에 텍스트의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p317」

  라캉의 용어 중에 ‘외밀한’ 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안이면서 동시에 밖인. 맹목점은 누빔점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쩌면 대상a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텍스트를 떠받치는 동시에 해체하는 지점이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도 같은 지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 맹목점은 반드시 ‘삐딱하게’ 보아야만 보일 것이고. 시차적 관점. 라캉과 지젝에 너무 딱 들어맞아서 좀 긴가민가 싶지만, 거칠게 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해체의 이런 성격을 따져보면 ‘해체’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진태원은 주장한다. ‘탈구축’이 더 적절하단다. 왜냐하면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 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2. 차연 또는 차이

 

  차연은 디페랑스diffèrance의 우리말 번역이다. 디페랑스diffèrance는 차이diffèrence라는 단어에서 ‘e'를 ‘a'로 의도적으로 오기해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다. e든 a든 하여튼 이 단어의 어근인 diffèrer은 ‘다르다, 차이나다’ 란 의미와 동시에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 ‘차연’은 여기에 착안에 차이의 差와 지연의 延을 합쳐 만든 번역어다. 그런데 진태원은 ‘차연’이란 번역어에 이의를 제기한다. 번역어의 문제란 곧바로 디페랑스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태원의 설명과 관계없이 내 생각에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은 늘 우리에게 골칫거리로 보인다. 그것이 신조어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권에는 별 문제도 아니다. 서로 번역하지 않아도 불어나 독어 영어는 눈치로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에겐 끝도 없이 씨름할 일에다, 합의도 못보고, 번역자마다 다른 단어를 갖다 붙이고, 그 피해는 결국 일반인 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가타리가 과타리가 되는 것은 애교지만, 예지적·본체적·가상적이 모두 noumenal의 번역어라면, 이런 빌어먹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플라톤의 『공화국』정도는 눈치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국가』가 『정체』인 것은 그렇다 쳐도, ... 하여튼 나는 플라톤이 공화국도 쓰고, 국가도 쓴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 독자의 수준이다. 번역어의 엄격함만큼이나 대중성도 좀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번역어의 통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태원은 차연이라는 번역어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e를 a로 오기한 데리다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와 a의 발음은 둘 다 디페랑스다. 음성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오로지 문자로만 구별되게 만든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 음성이나 말에 대해 홀대받는 전통에 반대하며, 문자기록이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차으’ 라고 해야 되나? 경상도 사투리는 ‘ㅡ’와 ‘l'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에겐 어떤 번역어를 쓰든 그 의미를 온전히 번역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두 번째는 ‘기원의 탈구축’ 이라는 데리다의 의도인데, 내용이 어렵다.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여튼 ‘기원의 탈구축’이란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낳는다고 한다. 기원은 어떤 움직이지 않는 근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며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여하튼 어렵고, 진태원은 이런 점에서 ‘차연’은 지나치게 협소한 번역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다. 데리다는 e를 a로 오기함으로써, 서양 학계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일깨우고자 한다. 내게는 차연도 충분히 낯설긴 하지만, 이 낯설기와 데리다의 낯설기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우리에게는 해결방법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진태원은 차연의 대안으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가 주장한 차이差移를 지지한다. 差異에서 異를 移로 바꾼. 이것이 세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데, 한문을 가지고 와서 낯설게 하기, 새로운 합성어 운운하는 것이 글쎄 내게는 별로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보다 데리다의 개념으로 ‘해체’ 만큼이나 유명한 ‘차연’에 대해, 번역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데리다가 실제로 사용한 사례 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그런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차연이 혹은 차이가 뭐라는 건지 잘 감이 안 온다.

 

 

3. 유령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데리다의 책이 있다. ‘의’ 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을 짐작하겠지만,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마르크스라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마르크스에게 나타나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다. 데리다는 이 둘 다를 가리키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 p330” 이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운동’ 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억압과 착취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 곁을 배회하며 해방운동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 역시 자신의 유령에 시달린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도 물신숭배도 없는 세계를 믿었지만, 아무런 환영 없는, 유령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 곧 상품 이전의, 교환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 p335” 았다.

 

  그렇다면 유령은 사라져야 할까? 데리다는 여기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The time is out of joint" 는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순간, 그 틈새로 유령은 출현한다. 시간이 딱 맞물려 연속적으로 정확히 흐르는 세계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어떠한 전복, 어떠한 균열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근원적인 탈구의 시간, out of joint, 은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p336”이다.

  데리다의 이 out of joint는 벤야민의 통찰과 일맥상통 한다. 그런데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는 유사성 못지 않게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어떻게?  

  진태원은 이 질문을 궁금증으로 남기며 데리다 강의를 끝맺는다.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337"

강의  예고편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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