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단테의 <신곡> 강의가 있었다. 강사는 박상진 교수이다. 새해 벽두부터 <신곡>이 등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2021년은 단테 서거 700주년이다. 단테는 1265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년 라벤나에서 죽었다.  강의는 EBS나 플라톤 아카데미의 것과 비슷하지만, 자료 화면이 훨씬 깔끔하다.

 

 

 

 

 

 

 

 『신곡』을 읽는 어려움 중 하나는 지금 단테가 지옥의 어디에 와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길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앞부분 첫 번째 고리부터 네 번째 고리까지는 명확하게 서술 되는데, 그 이후부터는 정신을 집중하여 단서를 찾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 헷갈리기 십상다.

 

 

 

 

 

 

 

 

 

 

그래서 독서 스타디의 이번 과제는 각각의 고리가 몇 곡 몇 행에 언급되어 있는지, 그 고리에 있는 영혼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었다. 여덟 명이 과제를 수행했는데 조금씩 다른 답이 나왔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단어 혹은 구절을 열쇠로 삼았는가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온것 같다. 사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몇몇 지옥의 구조도 역시 각 고리의 명칭들이 조금씩 다르다. 

 

 

 

 

 

 

 

 

 

6곡

 

 

  

 

 

 

 

 

세 번째 고리는 '빌어먹을 탐욕이 내 영혼의 병이었소.(53)' 라는 구절에서 '탐욕'의 지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음사판을 번역한 박상진 교수는 이번 차이나는 클라스 강의에서 3구역을 '대식'이라고 설명했는데, 정작 책에는 대식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케르베로스와 치아코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케르베로스는 '굶주려 짖어 대던 개'이고, 치아코는 돼지라는 뜻이다.

 

치아코는 단테의 요청에 따라 피렌체에 불어닥칠 당쟁과 피바람을 예언한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세 번째 고리의 탐욕은 권력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죄인들은 머리가 셋 달린 케르베로스에 의해 찢어 발겨지는 고통을 당한다.

지옥의 영혼들은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데 이를 '콘트라파소'라고 한다. 바람에는 바람, 많이 먹으면 뜯어 먹히고, 돈에는 돈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도 불륜을 '바람'이라고 하는가?

 

 

 

 

 

 

 

 

 

7곡

 

 

 

 

 

 

 

7곡에는 네 번째 고리와 다섯 번째 고리가 나온다.  네 번째 고리는 재화에 관한 죄악이다. 이 고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온다. "왜 그렇게 모으기만 하지? 왜 쓰기만 하는 거야! (30)", "절제를 모르고 부를 유용한 자들(41~42)", "서로 반대되는 죄들(43)", "잘못 쓰고 잘못 가져(58)" 등의 구절이 이에 해당한다. '탐욕(48)'도 있지만 세 번째 고리의 탐욕과는 달리 재화에 대한 탐욕을 말한다. 인색이나 낭비라는 단어는 직접 사용되지 않지만, 재화에 대한 상반된 죄를 한마디로 나타내기에 적절하다. 

 

그런데 7곡에는 이들이 커다란 돈주머니를 굴리는 형벌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그림이 있다는 것은 어디엔가 단서가 있다는 뜻일 것 같은데, 모르니 답답하다.  책에 나오는 형벌은 두 무리가 고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서로 부딪히면 파도가 해안에 부서지듯 '서로 머리를 들이받으며 왈왈' 거리는 것이다.

 

여하튼 재미있는 것은 이 고리에 있는 대표적인 인간들이 교황과 추기경들이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의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7곡 후반부는 네 번째 고리에서 다섯 번째 고리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자 이제 더 불쌍한 고통으로 가보자 (97)" , "우리는 고리를 가로질러 다른 언덕으로 갔다.(100)", "잿빛의 죄로 가득 찬 늪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이름은 스틱스였다.(107~8)"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틱스는 희랍 신화에서는 다섯 개의 저승의 강 중 마지막 '증오의 강'이다. 이 다섯 개의 강을 모두 건너면 하데스로 들어가게 되는데, 단테는 이 강들을 곳곳에 따로 배치해 놓은 것 같다. 게다가 여기서는 스틱스 자체가 다섯 번째 고리로 보인다. 스틱스는 진흙의 늪이다. 이 늪에서 발가벗고 뒹굴고 있는 사람들은 증오에 가득 차 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자(116)'들의 지옥이다.

 

 

 

 

 

 

 

 

 

 

8곡

 

 

 <단테의 조각배, 들라크루아, 1822>

 

 

 

7곡 후반부에 이어 8곡도 다섯 번째 고리 스틱스를 묘사한다. 스틱스를 건너 디스라는 도시로 가는 도중 이 지옥에 빠진 영혼들을 만난다. 스틱스를 건네 주는 뱃사공은 플레기아스다.

 

진흙탕의 늪에서 불쑥 솟아 오른 영혼이 배를 향해 손을 뻗자 베르길리우스가 밀쳐 버린다. 단테를 추방시킨 정적이다. 스틱스의 죄인들은 서로를 물어 뜯고 난도질하는 벌을 받는데, 요즘 인기 높은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을 보면 딱 이 모습인 듯한 장면이 나온다.  소환된 악귀가 지옥에 떨어지면 진흙탕 속에서 수많은 죄인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와 좀비떼처럼 덮쳐 버린다.

 

디스의 입구에 도착했지만 '추방된 수천의 천사들이' 막아선다. 베르길리우스는 말로써 이 문을 열지 못한다.

 

 

 

 

 

 

 

 

 

9곡

 

 

<디스 성문을 여는 천사, 귀스타브 도레, 1832>

 

 

 

디스의 성벽은 지옥을 양분하는 경계이다.  디스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디스 자체가 여섯 번째 고리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보는 구조도도 있다.

 

 

 

 

 

 

배철현의 ‘21C 대한민국과 단테의 신곡’-인간의 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의도성’ - 매경이코노미 (mk.co.kr)

 

 

 

단테의 지옥은 죄의 경중에 따라 아홉개의 고리로 나뉘어 지는데, 그중에서 다섯 번째 고리와 여섯 번째 고리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구분해 주는 것이 디스의 성벽이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욕망에 빠져 죄를 짓기도 하지만, 이성적 판단 아래 의도적인 죄를 짓기도 한다. 단테는 이 의도성의 유무를 결정적인 차이로 보았다.  

 

사랑, 탐욕, 돈, 분노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죄는 단테에게 상대적으로 가볍다. 무절제 혹은 부절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금지를 넘어서는 사랑은 죄가 된다. 돈은 유용하지만 무절제한 탐닉은 죄다.  분노는 정의를 실현하는 용기가 되지만 폭주하는 분노는 죄이다. 욕망은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동인이지만 제어되지 않으면 인간을 집어 삼키는 죄가 된다. 절제하기 힘든 인간의 약점이 만들어 낸 죄는 단테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어두운 숲에서 시작된 단테의 순례는 지옥의 문을 지나고 아케론 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지옥의 첫 번째 고리로 내려가게 되고, 다섯 번째 고리까지는 큰 단절 없이 계속 내려 가게 된다. 그런데 다섯 번째 고리인 스틱스 강을 건너면 디스라는 도시의 성벽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도시는 인간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성벽은 성안과 성 밖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만들었다. 성안은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낸 문명의 세계이고 성 밖은 야만의 자연적 세계이다. 성벽과 도시는 인간 이성의 결정체이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상징이다.

 

디스의 성벽은 타락한 천사들이 지키고 있고, 성벽을 넘으면 여섯 번째 고리부터 아홉 번째 고리까지, 지옥 중의 지옥이 펼쳐진다.  스스로 선택한, 철저히 의도적인, 사악한 죄를 저지른 영혼들이 떨어져 쳐박히는 곳이다.

 

베르길리우스는 훌륭한 말로써 성문을 열지 못하고, 희랍-로마 신화의 괴수들이 순례자들을 위협한다.

 

 

 

 

 <디스 성문 앞에 선 천사, 윌리엄 블레이크>

 

 

 

 

두려워 하는 이들 앞에 '그분(80)'이 내려와 악한 영혼을 물리치고 디스의 문을 열어 준다. 그분이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림들은 천사로 표현하고 있다.

 

 

여섯 번째 고리의 죄인들은 뜨거운 불에 쇠처럼 달구어진 무덤들 속의 영혼이다.  여섯 번째 고리는 '그곳(106)', '무덤들(116)'로 표현된다. 불꽃에 고통당하는 영혼들은 '모든 이교도 분파의 두목들과 추종자들(127~8)' 이다.

 

 

 

 

 

 

 

 

10곡

 

 

<관에서 일어나는 파리나타. 윌리엄 블레이크>

 

 

 

10곡은 관 속의 이교도들을 지나며 나누는 이야기다. 여섯 번째 고리의 이교도들은 에피쿠로스와 그 학파들 이외에는  13세기 후반 피렌체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교황에게 파문을 당했거나 종교 재판에서 이단으로 선고 받았거나 이단자들의 주장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졌다.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황권과 교권의 다툼이 치열해지던 시기의 종교재판과 파문이 진정 종교적이었을까 싶다. 무엇보다 교황과 추기경과 사제들을 지옥에 쳐박을 수 있는 단테와 그것이 용납되었던 시대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싶다. 중세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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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마지막에 남을 벽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을 읽어 보려고 성당에 다니려 했던 적도 있고, 몇 번이나 정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구약은 남의 나라, 그것도 좋게 봐주기 힘든 이스라엘의 역사일뿐이니 안 읽어도 된다고 위안도 해보았지만 늘 가슴 위의 돌이었다. 단테의 『신곡』 을 읽자니 더 답답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주원준 박사의 강의는 1년 전쯤 고대 근동에 관한 것을 인상 깊게 들었다. 미지의 신화적 세계 같이 느껴지던 고대 근동을 전공한 학자도 처음이었고, 차분한 말솜씨에 깊이 배어든 매력이 상당했다. 

 

 

 

 

 

이번에 EBS에 올라온 강의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고대 근동학의 맥락에서 구약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해 주는 <구약의 사람들> 이다.  전체 15강으로 기획되었고 오늘 현재 6강까지 업로드 되어 있다.

 

마침 1강에서 6강까지가 '창세기'여서, 오늘 간단히 정리하려고 한다. 

 

 

 

 

 

1강 아담과 하와

 

 

 

 

 

 

 

 

뉴턴의 사과, 파리스의 사과와 더불어 이브의 사과 이야기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알고 있게 된 그런 이야기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뉴턴의 사과도 허구고, 이브의 사과도 허구라고 한다. 창세기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만 되어 있고 어디에도 사과는 없다는 것이다.

 

 

 

 

 

 

 

 

 

늘 궁금했지만 하느님은 왜 금기를 눈 앞에 버젓이 보이게 하셨을까?  더구나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의 혐의도 받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고도 죽지 않았고 오히려 눈이 열려서 지혜로워 졌다. 진실은 뱀에 더 가깝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진실이 무엇이냐가 아니다. 눈이 열린 이후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행동에 그 핵심이 있다. 지혜를 얻은 최초의 인간은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  지혜가 행복이 아니라 수치이다.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희랍 철학과 비교해 보면 지혜에 대한 이 부정적 서술은 놀랍도록 특징적이다.  지혜를 얻은 인간은 낙원을 잃는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고된 노동과 출산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길은 막혀 있다. 커룹이 지키는 에덴 동산과 인간의 세상은 영구히 단절된다. 커룹은 이집트에서 희랍으로 넘어간 스핑크스와 그 형태가 닮았다.

 

 

 

 

 

 

 

 

 

히브리인들이 떠돌았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방은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변방의 작은 나라들이 다투는 지역이었다.  수메르 문명 이후 아카드-바빌로니아 - 아시리아 등으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문명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의 놀라운 문화를 꽃피웠던 이집트 문명 사이에 끼인 변방의 야만인들에 불과했다.

 

 

 

 

 

 

 

 

영웅과 괴수와 신이 만들어 내는 화려하고 거대한 서사들은 성벽을 쌓고 도시와 문명을 향유하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것이었다. 성 밖의 작은 떠돌이 무리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거칠고 냉혹했다.

 

 

 

 

 

 

 

히브리인들은 가혹한 인간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독특한 신화를 만들어 냈다. 성을 쌓은 거대 문명들이 화려하게 전시하는 반신반인의 인간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은 모두 동등한 피조물일 뿐이며, 그 누구에게도 신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인간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인의 자손이다.

 

 

 

 

 

 

 

히브리인의 냉소적 시선은 성 밖 야만인의 성 안 문명인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지혜'가 이루어 낸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기도 하다.   눈을 뜬 지혜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가?  전쟁과 정복과 화려한 신전과 높은 성벽으로 인간은 행복해졌는가?

 

 

고대 근동의 화려한 문명은 그들의 신화와 함께 오랜 세월 속에 사라지고 잊혀졌다. 그런데 가난한 백성들의 작은 이야기는 끈질기게 살아 남아 오늘 지구 상의 거의 모든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영웅과 파라오와 괴수와 성벽은 사라져도 가난한 사람들, 작은 가정들은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가 인간 보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웅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작은 인간들의 끈질긴 삶의 이야기다.

 

 

 

 

 

 

 

2강 카인과 아벨

 

 

 

 

 

 

카인은 농부고 아벨은 양치기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다. 왜 하느님은 카인을 외면한 것일까?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느님은 아무 말이 없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카인과 아벨이 살아야 할 세상은 이런 곳이다. 잘 사는 악인도 많고 고통받는 의인도 많은 지금의 세상은 이때 시작되었다. 수없이 하느님을 찾고 묻고 또 물어도 왜 16개월의 아기가 부모라는 인간의 손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 답하지 않는다.

 

 

 

 

 

 

 

악은 이렇게 찾아 온다.  부조리를 견딜 수 없을 때,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했을 때 악이 찾아 온다. 카인은 아벨을 죽여 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카인 이래 되풀이 되어 온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다. 사회 구조적인 위기 상황이 찾아 오면 '나의 아벨'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그랬고, 일본의 조선인 학살이 그랬다. 사실 1차, 2차 세계 대전이 모두 그랬다. 

 

 

 

 

 

 

 

 

희생양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손쉬운 희생양을 찾는다. 문제를 제대로 푸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 수 없다면 속이라도 풀자는 허약한 인간성을 노리는 사악한 인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옳게 행동하면' 극복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인은 무너졌다.

 

 

 

 

 

 

 

악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이 카인의 후예라면.  그런데 욥이 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도 끝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서 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 도와주고 이끌어 주고 충고해 주어야 한다.  '나의 아벨'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걸려 넘어지는 길이라고 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누구건 그는 성직자다. 무신론자이건 이교도이건 어른이건 아이이건 그가 성직자다.

 

그리고 우리 함께 스트레스 상황을 없애 나가야 한다. 그물을 쳐놓고, 함정을 파놓고 피해서 가라고 한다면, 그 그물이 세계를 뒤덮고, 그 함정이 모든 땅 아래 도사리고 있다면, 누구도 넘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카인의 낙인'은 징벌의 표식이 아니라 용서의 표상이다.  용서받은 '카인의 후예'와 여전히 '부조리한 세상'이 우리 삶의 조건이다.

 

 

 

 

 

 

 

3강 노아

 

 

 

 

 

 

 

홍수 신화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이야기다.  아트라하시스 이야기나 길가메쉬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와 놀랄만큼 비슷하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두 신화와 노아 이야기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이 차이점이야말로 히브리인 특유의 핵심적 가치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분노에 찬 신은 인간을 절멸시키려 한다. 홍수 이전의 세계는 사라진다. 홍수에서 살아 남은 인간은 노아와 그의 가족뿐이다. 메소포타미아 홍수 신화에서  노아는 아트라하시스와 우트나피쉬팀이다.

 

 

 

 

 

 

 

아트라하시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인물로  홍수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인간이다.  길가메쉬는 '지혜의 정수'를 본 자로, 이 서사시는 지혜의 문학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신적 지혜를 가진 자만이 죽음을 넘을 수 있다.

 

 

 

 

 

 

 

 

노아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다. 노아가 선택된 것은 그가 의롭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은 비슷한 이야기 구조에 전혀 다른 철학을 담았다. 노아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의로움, 올바름이다.

 

 

 

 

 

 

 

세상의 의로움을 따지는 것은 강자의 시선이 아니라 약자의 시선이다.  강자에게 올바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권>

 

 

 

 

기원전 5세기 말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제국 아테나이는 약소 중립국 멜로스를 쳐들어가 이렇게 위협했다.  정의 즉 잘잘못을 따지지 마라. 말로하는 정의가 통하는 것은 힘이 대등할 때뿐이다. 현실에서 정의는 강자는 원하는 것을 얻고 약자는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다.  멜로스인 의원들은 보편적인 선과 정의에 끝까지 매달리지만 결과는 모든 멜로스 시민의 죽음과 여자와 아이들의 노예화였다.  강자는 정의에 구애받지 않고 정의를 멋대로 규정한다.

 

 

 

 

 

 

보편적 정의에 기대를 거는 것은 약자이다. 사실 약자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지 않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달리 노아의 이야기는 지혜로운 강자가 아니라 의로운 약자가 살아 남음을 보여 줌으로써 히브리인들이 처한 조촐한 현실, 약한 떠돌이 무리의 현실에 희망을 불어 넣는다.  의로움이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비종교인으로서, '의로움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희랍 철학도 올바름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한다. 플라톤은 우주를 선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계서화했다. 그런데 올바름의 실천은 그 이전에 올바름에 대한 앎을 요구한다. 희랍 철학이 앎을 인간의 아레테로 꼽는 것은 앎이 삶을 이끌기 때문이다.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올바르게 살 수는 없다.

 

히브리인의 올바름, 의로움은 다만 믿음인가? 부조리한 세계로 인간을 추방한 신에 대한 믿음인가?

 

 

 

 

 

 

 

 

4강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유서 깊은 도시 우르에 살았다. 아브라함의 역사적 연대기는 모두 가설일 뿐이지만 도시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기원전 35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이 발생한 이래 세계는 문명과 야만으로 뚜렷이 양분되었다. 그 경계는 성벽이었다.

 

  

 

 

 

 

 

 

성 안은 화려함과 풍요가 넘치는 문명의 세계였고, 성 밖은 거친 야생의 세계였다. 성의 중심부는 신전이 차지했고, 그들의 삶은 늘 '신과 함께' 였다. 신과 함께 사는 삶은 성 밖의 야만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르의 아브라함에게 어느날 하느님이 말했다. 성 밖으로 나가라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우르 밖으로 불러 내어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은 성 밖의 사람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신 야훼는 성 밖의 신이었다.  창세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의 4대는 유랑하는 작은 가정의 이야기이며, 이들과 함께 하는 작은 신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영웅도 없고 위대한 정복도 없고 으리으리한 왕궁도 없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가족의 이야기,  지지고 볶고 미워하며 사랑하는 사연 많은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떠돌이들의 시선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위대한 제국의 영웅들이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도 오래 오래  살아남았다.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나 비슷 비슷한 인류 보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5강 이사악과 야곱 

 

 

 

 

4대의 가족 이야기는 할아버지들을 중심으로 보아아도 재미있고, 할머니들을 엮어서 보아도 재미있다. 작은 가정에서는 할아버지들 못지 않게 할머니도 중요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신화와 역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창세기에는 상세하게 들어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장자 상속과는 달리 창세기에는 장자 배척 사상이 들어 있다.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은 장자가 아니다. 주원준 박사는 창세기의 '작은 것들의 시선'이란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유목민들 사회에서는 곧잘 있는 풍습이라고 알고 있다.

 

그보다 재미있는 것은 노아편에서 '의로움'을 강조한 것과 달리 이 4대의 가정사는 다소 의롭지 못한 편법과 속임수가 많다는 것이다. 동생이 형을 속이고 장인이 사위를 속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속여도 그쯤은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간다.

 

 

 

 

 

 

6강 요셉

 

 

 

 

 

요셉은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인물이다. 요셉이 죽으며 창세기가 끝나고, 모세가 등장하는 탈출기로 이어진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는데, 동생 축에 속하는 요셉이 아버지의 편애를 믿고 형들에게 까불다가 죽을 뻔하고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가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세기는 연대를 측정하기가 어렵지만 가장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은 요셉이 이집트에 정착한 이야기다. 기원전 1600년 경을 전후해서 청동기 문명 사회는 대격변을 겪는다.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에 의하면 유목민이 대대적으로 남하하면서 유라시아 문명 사회의 서쪽 끝인 유럽부터 동쪽 끝인 중국까지 문명의 파괴와 지배 세력의 교체가 일어난다. 유럽은 크레타 문명이 파괴되고 미케네 문명이 시작되었고,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 무너지고 아리아인에 의한 갠지즈강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으며, 중국은 상나라가 등장했다.

 

 

 

 

 

 

 

문명의 뿌리가 깊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도 유목민의 침략과 지배를 겪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회복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카시트인의 지배를 받는 카시트 바빌로니아 시기가 있었고, 이집트는 힉소스 통치기가 있었다.

 

 

 

 

 

 

 

 

이 혼란한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있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의 유랑인들이 대거 이집트로 유입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주원준 박사는 힉소스 자체가 별도의 민족이 아니라 시리아-필리스티아 혼종 민족을 가리킨다고 한다.

 

 

 

 

 

 

힉소스의 지배가 끝나고도 이집트로의 이민은 지속되었는데, 척박한 시리아-필리스티아에 비해 이집트는 너무도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간 사람들을 '하피루'라고 불렀다. 부랑아, 강도떼, 쫓겨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 명칭에서 '히브리'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요셉은 아마도 이때 이집트로 들어가서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나 추정한다. 갖은 고생 끝에 타국에서 출세한 요셉은 기근으로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들어온 형제들을 만나고 이런 저런 사연 끝에 모든 가족을 이집트에 정착시킨다. 한 가정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쫓겨나 타향살이 하던 동생이 집안의 희망이 되었다는 해피 앤딩의 스토리로 창세기가 마무리 된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성공한 비결 중 하나는 완전히 이집트에 동화된 것이다. 실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를 통치했지만 훌륭한 문화에 감복해 철저히 이집트화 했다. 이집트인들 보다 더 이집트 문화를 받아 들이려 애썼다고 한다. 마치 중국에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황허를 차지한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고 철저히 한화 정책을 폈던 것과 비슷하다.  모세가 겪었던 이집트와 요셉의 이집트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주원준 박사가 부탁하는 요셉 읽기는 이민자의 시선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혹은 창세기의 시선으로 이민자를 다시 보라는 것이다.  험한 노동 현장에서 궂은 일을 하는 많은 이민자들과  체류자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요셉이다.  그들 가정의 희망이다. 우리가 불과 수십 년 전 미국에, 독일에 보냈던 언니와 오빠들처럼 그들도 그들 나라를 일으키는 역군이자 가정의 등대로 와 있다. 그 큰 꿈과 희망이 비인간적 차별 아래 질식되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 보자는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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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1-10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tv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걸 방금 확인했습니다! 언제나 좋은 강의와 좋은 글 감사드려요! 오늘 맥주는 이 강의와 함께 할래요!ㅎ

말리 2021-01-11 16:29   좋아요 1 | URL
일요일 밤 강의와 함께 평안하셨나요? 굉장히 인기가 많은 강의인가 봐요. 아직 반도 올라오지 않았는데 조회수가 많습니다. 클라스e 들을 만한 강의가 많아서 마음이 바쁩니다. ㅎㅎ

무료로 볼 수 있다니, 유료 기한이 끝나면 이용해 보겠습니가. 감사합니다. ^^

막시무스 2021-01-11 16:32   좋아요 0 | URL
어제 4강 아브라함까지 봤어요!ㅎ 성서를 인문학적 해석으로 접근하니 정말 다양하게 생각해 볼 거리가 많다는걸 느꼈어요! 오늘 저녁에도 몇편 정주행하려구요! 참 좋은 강사이고 좋은 강의입니다! 즐건 저녁시간 되십시요!ㅎ

말리 2021-01-11 16:52   좋아요 0 | URL
넵.
먼먼 이국의 땅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가족 이야기로 평안한 하루 마무리 하시기를 ^^

scott 2021-01-10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포스팅은 강의 들으면서 옆에 놓고 봐야 할것 같네요 말리님 감사^*^

말리 2021-01-11 16:30   좋아요 0 | URL
강의만 들으시면 충분할 것입니다. 강사님이 귀에 착착 들어 오도록 강의를 하십니다. ^^
 
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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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동안의 배경 공부를 마치고 『신곡』 본문 읽기를 시작한다. 서사시의 계보를 이었으므로, 읽기보다 낭송이라고 해야 좋을 것 같다. 독서 모임에서도 매주 『신곡』의 기본 과제는 직접 낭송한 파일을 올리는 것이다. 

 

사전 두 주 간의 과제로는 박상진 교수의 강의를 요약하는 것과 『신곡』이 미친 다양한 영향들 중 하나를 선정하여 정리하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와 <피에타의 상>,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 로뎅의 <지옥문>,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 등 예술 작품뿐 아니라 조용필의 <슬픈 베아트리체>, 영화 <신과 함께> 등의 대중 문화까지 다양한 과제들이 올라와서 『신곡』 을 친근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도 워낙 명성이 자자한 『신곡』이라 걱정이 앞선다. 마르크스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욕심내지 않고 한 주에 다섯 곡 정도씩 읽으며, 수없이 많은 등장 인물에 대해 조금씩 알아보려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노동자들이 읽기를 바라며, 이 어려운 책을 포기하지 않도록  불어판 서문에 이 유명해질 경구를 부적처럼 써넣었다고 한다. 고병권의 강의에서>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는 단테의 순례 여정에 따라 「Inferno」 「Purgatorio」「Paradiso」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마다 33곡으로 되어 있어 총 99곡인데, 서문에 해당하는 노래를 지옥편 1곡에 삽입함에 따라 지옥편은 34곡이 되어 총 100곡으로 완성되었다. 

 

 

 

 

 

 

민음사판 번역본은 3권으로 분책되어 있다. 당연히 지옥편부터 읽는다.  줄거리 보다는 읽으면서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이나, 조금 상세히 알아두고 싶은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한다. 독서 스타디의 기본 과제 중 하나이다.

 

 

 

 

 

 

 

 

 

 

 <귀스타브 도레. 신곡>

1곡

 

 

 

 

1곡은 『신곡』의 서문에 해당한다.  단테가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서 두려움에 떠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1곡은 너무도 유명하다.  인생의 한가운데, 즉 절정에서 자기를 돌아본 그 순간, 그곳이 천국이 아니라 어두운 숲이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놀라움이다. 

 

자부심과 권력(금력)과 사랑이 있는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믿는다. 단테는 이 낙원을 '잠에 취해' 잘못 들어선 길이라 한탄한다. 잠은 이성의 잠이다. 깨어나 이성의 눈으로 바라본 낙원은 오만(사자)과 탐욕(표범)과 음욕(암늑대)이 우글거리는 어두운 숲이다.  단테를 둘러싼 이 짐승들은 '자기 길을 올바로 걷도록 이끄는 별'로 오르는 길을 막고 있다. 별은 태양이며, 하느님의 은총이자, 하느님이다.

 

이때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단테를 저 하늘의 별로 이끌어 가는 길잡이이자, 스승이다. 하지만 곧바로 오르는 길은 없다. "다른 길로 가야한다."  영혼들을 지나 가야 하는데, 그 영혼들은 각각 고통받는, 희망을 안고 참고 견디는, 축복받은 영혼들이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영혼들이다.

 

  

 

 

 

 

 

 

 

 

 

2곡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의 여정에 나서기로 했으나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변명을 하는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너의 영혼은 겁을 먹었구나.

 

인간은 언제나 그 겁 때문에 머뭇거리고

제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짐승처럼

명예로운 일에서 멀어지게 된다. (44~48)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베아트리체가 자신을 찾아와 부탁한 말을 들려 준다.

 

 

하늘에 계신 친절하신 여인께서

 

당신이 만날 자에게 닥친 난관을 슬퍼하셔서

엄격한 하늘의 법을 어기셨답니다.

 

그분은 루치아를 불러 말씀하셨지요.

-너를 믿고 따르는 자가 너를 찾으니

이제 너에게 그를 맡긴다.-

 

잔인함의 적이신 루치아는

내가 옛날의 라헬과 함께 있는

곳으로 찾아와 말했어요.

 

-베아트리체여! 하느님의 진실한 찬미여!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저 천박한 곳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세요.

 

그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바다조차 감당하지 못할 죄악의 강물에서

죽음이 그를 집어삼키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세상에는 스스로를 도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준비된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복된 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내려왔어요.  (94~112)

 

 

단테의 구원은  '하늘에 계신  친절하신 여인' 즉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루치아를 매개로 베아트리체에게 내려와 베르길리우스에게 이어진 결과이다. 단테에게는 세 명의 구원의 여인이 있는 셈이다.

 

 

 

 

<성녀 루치아. 크리벨리. 1476>

 

 

 

루치아는 4세기 초 로마제국 말기에 순교한 시칠리아 귀족 가문의 여성이다.  동정녀로 살기로 서언했는데,  정혼자가 고발하여 온갖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고문 중 눈알을 뽑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림에는 주로 뽑힌 눈알을 성물로 들고 있다. 시력장애인들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다.

 

눈알은 루치아란 이름과 밀접하다. Lucia는 라틴어 Lux(빛)에서 유래했다.  눈알을 든 루치아는 교회와 세상의 빛을 보호한다.

 

 

루치아는 나폴리의 수호 성인이다. 이탈리아 민요 <산타 루치아>의 루치아가 바로성녀 루치아다. 산타는 영어의 saint, 루치아는 lucy다.  나폴리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떠날 때 산타 루치아에게 부드러운 바람과 잔잔한 바다를 기원한 노래이다. 우리나라 가사도 있지만, 이탈리아 가사를 번역한 것을 보면 기원의 의미가 더 명확히 보인다.  https://youtu.be/8CiXj-Q4eVw

 

 

 

 

 

 

 

 

 

 

 

 

 

 

 3곡

 

 

 

 

 

로댕의 <지옥의 문>이 하도 유명해서 『신곡』에 '지옥의 문'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어느 문'이라고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3곡은 이 '어느 문' 꼭대기에 쓰인 '어두운 글자들'로 시작한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나의 창조주는 정의로 움직이시어

전능한 힘과 한량없는 지혜,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드셨다.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1~9)

 

지옥의 문은 앞에 선 영혼들에게 '모든 희망을 버려라.'고 무시무시하게 명령하는데, 정작 지옥의 문은 창조주의 정의에 따라 전능과 전지와 사랑으로 만들어 졌다. 정의와 사랑이 만든 지옥에도 희망은 불가능한가?

 

 

 

 <최후의 심판 중 '죄인을 나르는 카론' 미켈란젤로. 1537. 시스티나 성당>

[배철현의 ‘21C 대한민국과 단테의 신곡’] 지옥의 문법은 ‘인과응보’ 당신은 추종자? - 매경이코노미 (mk.co.kr)

 

 

 

'어느 문'을 지나면 '아케론의 슬픈 강'이 나온다. 아케론은 희랍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강 중 하나이다.  대동강이 님과 나를 가르듯, 이승과 저승은 강이 가른다. 하데스로 내려가는 영혼은 다섯 개의 강을 거친다.  희랍 신화가 다양하게 변형되어 전승되므로 저승의 강도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다섯 개인 것 같다.

 

다섯 개의 강을 통과하며 영혼은 이승의 삶을 말끔히 씻어내고 저승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다. 첫 번째가 아케론 강이다. 슬픔의 강이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건너는 강일까?  두 번째 강은 코키토스이다. 탄식의 강이다. 강물에 비치는 자신의 과거를 한탄하며 건너는 강이라고 한다. 세 번째 강은 (피리)플레게톤이다. 불의 강으로 불린다.  슬픔과 회한을 불로 태우고 깨끗이 정화된 영혼을 갖는다. 네 번째가 망각의 강인 레테이다. 이승의 모든 기억을 씻어 버린다. 마지막이 스틱스, 증오의 강이다. 스틱스는 희랍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신들이 맹세를 할 때는 늘 스틱스 강에 두고 한다. 이 맹세는 신들도 풀지 못한다. 아킬레우스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어머니 테티스 여신이 발목을 잡고 거꾸로 담근 강이기도 하다.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398> 레테와 로테 : 괴테 그리고 롯데 : 국제신문 (kookje.co.kr)

 

 

 

'우리가 아케론의 슬픈 강가에서(78)' 에서, 왜 아케론을 '슬픈 강' 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그런데 '하느님의 분노 아래 죽는 자들은(122)'  '온 세상에서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단다.(123)'는 희랍 신화와 다르다. 희랍 신화에서는 죽은 사람은 모두 다섯 개의 저승의 강을 거쳐 하데스로 내려간다. 단테는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만 아케론의 강으로 불러 모은다.  불행한 영혼들은 지옥의 문을 지나 아케론의 강을 건넌 다음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 앞에서 자신의 지옥을 배정 받는다.

 

 

 

 

아케론은 실제로 그리스에 있는 강이다. 어두운 협곡을 따라 흐르며 곳곳에서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데스로 이어지는 강으로 여겨졌다. 강 기슭에는 고인들을 위한 신탁소가 있다.

 

아케론의 강은 반드시 뱃사공 아론의 작은 배로만 건널 수 있다. 희랍인들이 죽은 사람의 입에 금화 한 닢을 넣어 주는 까닭은 카론에게 주어야 할 뱃삯 때문이다.

 

 

 

 

 

 

 

 

 

 

 

 <파르나수스. 일부. 라파엘로. 로마 바티칸 박물관>

4곡

 

 

 

지옥은 아홉 개의 고리로 되어 있다.  아래로 내려갈 수록 더 사악한 영혼들이 더 크게 고통받고 있다. 첫 번째 고리는 죄도 구원도 없는 림보, Limbo이다.  고대 희랍과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이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떨어진 곳이다.

 

 

 

 

최연욱 작가님 미친스터디 후기- 104. 상징..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Limbo는 '경계' '접촉부'를 뜻하는 게르만어에서 유래했다. 중세에 발생한 개념으로 조상들의 림보와 어린이들의 림보가 있다. 조상들의 림보에는 예수 이전의 구약의 성자들이 있고, 어린이들의 림보에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있다. 원죄를 씻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테는 구약의 성자들을 천국으로 보내 준다. 예수님이 내려와서 축복해 주었다는 것이다. 단테는 또 림보에 희랍과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을 배치한다. 특히 시인들을 칭송하며 단테 자신을 위대한 시인의 계보에 끼워 넣는다.  

 

 

 <단테와 그리스 로마 시인들. 귀스타브 도레. 1857>

 

 

희랍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세 명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그리고 네로 황제 시대의 루카누스에 이어 스스로를 여섯 번째 시인으로 만든다.  그의 야심은 성공하여 현대인은 호메로스 - 베르길리우스 - 단테로 이어지는 계보를 만들어 3대 시인으로 부른다.

 

 

 

 

놀라운 점은 Limbo에 이교도인 살라딘과 아베로에스가 있다는 것이다. 살라딘은 3차 십자군 전쟁의 이슬람 영웅이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종교 전쟁이다.  기독교 스콜라 철학을 완벽하게 문학화했다는 『신곡』에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살라딘이 Limbo에서 사랑받고 있는 것은 놀랍다.  아베로에스(이븐 루슈드)는 이슬람의 종교 철학자이다. 희랍의 플라톤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정통했다.

 

Limbo에는 '어두운 반구를 환히 비추는 빛' 이 있다. 지옥은 캄캄한 어둠이다. 그런데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이 있으니 지성(이성)의 빛이다. 단테는 이성의 빛을 뿜어내는 '위대한 영혼'들을 회고하며 이렇게 노래한다. "그때 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120)" 우리가 만나고 싶은 위대한 영혼들이 Limbo에 있다면 지옥의 첫 번째 고리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단테의 Limbo는 지옥이라기보다는 이성의 빛이 환히 밝히는 지옥의 입구에 마련된 별도의 정원이다.

 

배철현의 ‘21C 대한민국과 단테의 신곡’ 영웅·현자들은 지옥 가면 별도 ‘정원’서 거주 - 매경이코노미 (mk.co.kr)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앵그르. 1819>

 

5곡

 

 

 

두 번째 고리부터 본격 지옥이 시작된다. 들어서는 입구에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가 무서운 모습으로 서서 사람들의 죄를 조사하고 판단하여, 죄에 따라 각자의 지옥으로 내려 보낸다.  

 

두 번째 고리부터 아홉 번째 고리까지 점점 극악해지는 죄의 고리가 있고, 지옥은 깔대기처럼 좁아진다. 그 두 번째 고리가 '이성을 욕망의 멍에로 씌어 속박시킨 자들(38~39)'이 떨어진, 애욕의 고리다.

 

지옥에 떨어질만큼 용서받지 못한 죄이지만 단테는 한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바라본다. 유부녀 베아트리체를 여전히 사랑한 단테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것일까.

 

클레오파트라와 헬레네도 애욕의 죄로 고통받고 있다. 헬레네는 희랍 작품에서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수많은 아카이오이족의 남편과 아버지를 전쟁터로 앗아간 나쁜년으로도, 여전히 존경받는 희랍 최고의 미녀 스파르테의 왕비로도 묘사된다. 헬레네가 있으니 파리스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킬레우스가 있다.  아킬레우스는 『일리아스』의 최고 영웅이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아킬레스 건'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는데, 단테는 그의 죽음이 적국 트로이의 공주를 사랑한 댓가였다고 보고 이 지옥에 보냈나 보다.  4권 림보에 있는 트로이 영웅 헥토르와 아이네아스와 비교하면 아킬레우스의 지옥은 다분히 로마적인 편견 때문인가라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었고, 트로이가 함락당한 후 아이네아스는 탈출하여 긴 유랑 끝에 로마에 정착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의하면 아이네아스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형제의 선조가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워터하우스. 1913>

 

 

트리스탄도 애욕의 죄로 지옥의 두 번째 고리에 있다. (67행)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잘 알려진 그 트리스탄이다. 트리스탄은 중세 기사 문학의 비극적 주인공이다.  아일랜드의 전설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작품으로 노래되어 왔는데 13세기에 가장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졌다.

 

트리스탄은 삼촌인 마크왕의 궁정에서 훌륭한 기사로 성장한다. 마크왕이 자신의 정혼자인 이졸데를 데려오기 위해 트리스탄을 아일랜드로 보낸다. 이졸데와 함께 마크왕의 궁정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실수로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졸데는 마크왕과 결혼했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밀회를 이어나가고, 결국 발각되고 만다. 그후 ...  단테가 애욕의 고리로 데려올 만한 애절한 사연이 이어진다.

 

1865년 바그너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했다. 당시 바그너의 상황은 트리스탄과 비슷했고, 그 때문에 바그너는 곤경에 처해있으면서도 이 작품을 완성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영혼. 아리 쉐퍼. 1855>

 

 

 

단테가 직접 만난 연인은 프란체스카와 파올로(116)이다.  13세기 로마에 있었던 비극적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프란체스카는 라벤나 영주의 딸로 남편과 정략 결혼을 했는데, 시동생인 파올로와 사랑에 빠졌다. 간통의 현장을 남편에게 들킨 두 연인은 그 자리에서 함께 죽임을 당했다. 지옥에 떨어져서도 함께 붙어서 고통받는 연인에게 단테는 묻는다.

 

"말해 보시오. 한숨짓는 달콤한 욕망으로 살던

그 시절에 어떻게 사랑이

당신의 숨은 열정을 알려 주었단 말이오?(118~120)"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로세티. 1855>

 

 

 

프란체스카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오로지 두 연인의 사랑만이 마법처럼 다가오던 그 순간을 한 장의 그림처럼 묘사한다.

 

어느날 우리는 한가롭게

랜슬롯의 사랑 얘기를 읽었어요.

우리뿐이었어요.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읽어 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여러 번 눈을 마주쳤어요.

얼굴도 여러 번 붉혔지요.

그러다 단 한순간이 우리를 엄습했어요.

 

사랑에 빠진 그 연인이 오랫동안 기다린 입술에

입 맞추는 대목을 읽었을 때.

그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내게

 

입을 맞추었지요. 그리고 나를 결코 떠날 수 없게 되었지요.

그 책을 쓴 자는 갈레오토였어요.

우리는 그날 더 이상 읽지 못했어요. (127~138)

 

책이 손에서 떨어지고 연인은 운명이 시작되었음을 안다.  보르헤스는 『칠일밤』에서 단테의 『신곡』을 이렇게 말한다.

 

"현대 소설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서 오백이나 육백 페이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단테에게는 한순간으로 족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작중 인물은 영원히 규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중심 순간을 찾습니다. 나는 여러 단편 소설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하고자 했고, 중세 때 단테가 발견한 방법 때문에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단지 짧은 3행 연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원합니다. 그들은 한 단어나 하나의 행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래의 일부이지만, 그 일부는 영원합니다. 그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고, 기억과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다시 새로워집니다. p29"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랜슬롯이 입맞추는 대목을 읽던 그 순간 온몸을 떨며 입을 맞추었을 때, 그 순간이 그들 삶의 전부이고, 그들 이야기의 전부이다. 『신곡』에 이렇게 많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것은 단테가 그 한순간으로 모든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내게는 '장가 가던 첫날 밤에 달 보고 울던 갑돌이'가 그렇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은 그 한순간에 응축되어 있다.  목에 칼을 차고도 수청을 들지 못하겠다고 날카롭게 응수할 때, 그 순간이 춘향의 전부를 말해 준다. 삶에는 그런 한순간이 필요하다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 순간이 없는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랜슬롯의 사랑 이야기는 중세 기사 문학의 전설적 영웅 <아서왕 이야기>의 일부이다.  아서왕의 가장 충직한 기사인 랜슬롯이 아서왕의 왕비인 기네비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비극이다.

 

랜슬롯과 프란체스카, 트리스탄 모두 중세에 유행했던 사랑 이야기로 단테는 "그들이 불쌍해, 죽어 가는 사람처럼 정신을 잃고 시체가 쓰러지듯 지옥의 바닥에 무너져 버렸다. (141~2)" 라고 할만큼 깊이 공감했다.  '불쌍해'라고 번역한 단어가 '피에타'라고 한다. 피에타는 동정, 연민, 자비이자 성모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후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혼을 울리고 영감을 자극했던 이 이야기들은 오페라, 연극, 영화, 회화, 소설 등으로 끊이없이 되살아 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지옥인가?

 

 

차이코프스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https://youtu.be/CIW4myGhE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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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1-0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북플 이웃님의 글에서 단테의 신곡을 몇번 만나네요!ㅎ 올해 저도 신곡에 한번 도전할까하는 마음이 모락모락 일어납니다! 좋은글로 잘 배웠습니다!ㅎ

말리 2021-01-04 13:13   좋아요 1 | URL
신곡은 많은 다른 작품들로 이어주는 다리 같기도 합니다. 이번에 그림도 많이 보고 클래식도 많이 듣습니다. 독서 멤버가 올려주신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입니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https://youtu.be/CIW4myGhEd8
 

6강. 신곡 : 중세의 끝

 

 

 

단테는 르네상스인이다. 르네상스를 중세의 末로 본다면 단테는 중세인이고,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면 최초의 근대인으로 추겨진다.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근대를 이어 주는 가교이며, 시대의 전환기다.  중세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근대인의 주체적 태도가 공존하는 『신곡』은 르네상스적 특징을 보여 준다.

 

 

 

 

<박상진 강의>

 

 

『신곡』의 원제목은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이다. 그냥 'The Comedy'라고만 해도 통용된다.  강유원 선생은 이 제목을 '기쁜 소식'으로 해석한다.  Comedia는 다양한 뜻으로 풀이되어 왔는데, 희랍 전통 속에서의 Tragodia, 비극과는 다르다는 의미임은 분명하다.

 

신념의 체계가 흔들리는 전환기에 들려온 '기쁨의 노래'는 당대에도 구원의 노래였고, 수백 년을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의 노래로 즐겨 불린다.

 

 

 

 

 

 

기쁨의 노래는 '어두운 숲속'에서 시작된다. 인생의 한중간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굴러 떨어졌을 때에도, 구원은 가능한가? 노래 안의 단테는 스승의 손을 잡고 지옥과 연옥을 통과하여 천국에 오르고, 노래 밖의 단테는 『신곡』을 노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40대~50대까지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장년에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에도 '단테의 삶'과 '기쁨의 노래'는 어두운 숲 너머에서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강유원 선생은 그렇다고 말한다. 

 

"저는 끝났답니다."

"아니요. 단테라는 사람을 보세요."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와  지옥의 고통과 연옥의 정죄를 겪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는 단테의 순례는 Pathei Mathos의 희랍적 구성과 닮았다.  고전은 계속하여 고전을 계승한다. 특히 『신곡』은 고전을 모르면 거의 읽기 어려울 만큼 고전을 반복하고 변주한다.

 

 

 

 

 

 

 

 

신곡』은 배움의 서사시다. 단테에게는 스승이 있다. 단테는 스승의 손을 잡고 천국에 오른다.  독일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시초로, 괴테, 헤르만 헤세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단테가 지옥에서 천국에 오르기까지 그 여정을 이끌어 주는 스승은 베르길리우스 → 베아트리체 → 베르나르두스다.  왜 단테에게는 스승이 필요했을까?

 

 

 

 

 

 

희랍의 서사시는 '무사' 여신으로 시작한다. 무사 여신이 노래하거나 들려준 이야기를 시인이 옮겨 주는 형식이다. 노래의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무사 여신이다.

 

 

 

 

 

 

 

 

신곡』에서는 단테가 직접 노래한다. 신곡』에서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근대적 요소가 '나'라는 주체이다.  중세에 진리의 주체는 신이다.  근대에 와서야 데카르트에 의해 생각하는 '나', Cogito가 진리 인식의 주체로 등장한다.

 

중세인 단테는 근대적 주체의 싹을 보여주지만 근대인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승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잇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단테는 무사 여신을 대신할 권위 있는 스승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7강.  『방법서설』 : 17세기의 위기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라 불리지만, 근본적으로는 위기의 시대였다.  17세기 초반에 시작된 30년 전쟁과 함께 중세는 완전히 무너지고, 17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근대가 펼쳐지는 전환기이다.

 

 

 

 

 

 

 

30년 전쟁은 기독교라는 신념의 체계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삶의 방식을 혼돈으로 몰아 넣었다.  진리 그 자체이던 신은 의혹 속에 냉대받고, 새로운 그 무엇도 진리의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아무것에도 의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삶을 단단하게 뿌리 내릴  '확실한 그 무엇' 을 간절하게 모색했다.  이때 근대의 첫 번째 철학자가 등장했다.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았다. 신도, 스승도 없이 혼자 난롯가에 앉아 오랜 의심 끝에 '나'를 발견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지만 마지막 단 하나, '의심하고 있는 나'는 그 모든 의심에도 살아 남았다. 생각의 대상은 모두 의심스러웠지만, '생각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했다.

 

 

 

 

 

 

 

 

근대 철학의 탄생을 선언하는 "Cogito, ergo sum'은 이렇게 새로운 신념의 체계에 첫 번째 주춧돌을 놓았다.

 

 

 

 

 

 

데카르트는 중세 철학의 스승이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발로 밟고,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기하학과 광학 등의 과학적 방법론이었다.  『방법서설』로 불리는 이 책의 원제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 이다. 

 

 

 

 

 

 

 

 

데카르트 이후 스피노자, 뉴턴으로 이어지며 17세기는 과학 혁명의 시대로 불리게 되고, 과학이 진리를 보증하는 신념의 체계로 부상했다. 플라톤이 앎의 단계에서 세 번째로 분류했던 추론적 사고가 진리를 추구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근대는 우리가 사는 현대와 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동일하다. 우리는 의심없이 과학을 최고의 진리로 인식한다. 'modern'은 근대인 동시에 현대이다.

 

 

 

 

 

 

 

데카르트가 찾은 Cogito는 세상을 확연히 이분화했다. 세상의 중심에는 '나'가 있고, 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타자'이다. 여기서 '나'는 사유의 주체로서의 나, 즉 '사유하는 나'이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한다.

 

사유(res cogitans)와 연장(res extensa)으로 이분화된 세계에서 그 중심은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 res cogitans' 이며,  그밖의 모든 것들은 나에 의해 존재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나와 타자의 분리,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근대인을 행복하게 했는지, 불행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물음들이 있지만, 이 분리가 근대인의 특성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도 '신'이 필요했다.  이 세계가 모두 내 의식의 산물이라면 환상이거나 망상에 불과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내 사유의 진리성, 내 인식의 확실성을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 개념상 완전하고 진실하므로, 신이 존재하는 한 내가 올바른 방법으로 인식한 세계가 진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에도 신은 데카르트에 의해 비록 주체는 아니지만 보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부여 받았다.

 

 

 

 

 

 

 

8강 『모비 딕』 : 신을 떠난 인간의 분투

 

 

 

 

 

 

 

허먼 멜빌(1819~1891)은 1851년에 『모비 딕』을 출간했다. 1776년 독립 전쟁 이후 미국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인디언의 피눈물로 점철된 서부 개척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을 거쳐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광대해 졌다. 1861~1865의 남북 전쟁을 끝내고 활기찬 재건시대를 맞으며 쇠락해 가던 유럽을 대신할 새로운 제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총과 돈과 욕망이 뒤엉킨 활력 속에  『모비 딕』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모비 딕은 축자적으로는 '거대한 놈' 이다. Dick은 속어로 남성의 성기를 가리킨다. 성경의 「욥기」의 구조가 그대로 큰 얼개가 되는 이 작품에서 흰 고래, 모비 딕은 '욥의 고래' 다.  「욥기」에서 신이 그 무시무시함을 자랑하는 리바이어던이다.  강유원은 신이라고도 한다.

 

 

 

 

 

 

 

『모비 딕』 41장 소제목도 '모비 딕' 인데 멜빌이 직접 묘사한 모비 딕은  '모든 악'의 응집이다.

 

 

 

 

 <모비 딕. 41장>

 

 

 

하지만 다른 선원들에게 모비 딕은 불가해한 존재다. 

 

 

 

 <모비 딕. 41>

 

 

 

 『모비 딕』을 읽고 나서도 사실 가장 궁금한 것은 모비 딕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엄청나고 무시무시한데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숭고한 어떤 것.   

 

 

 

 

<문학고전강의>

 

 

 

 

정리하면 모비 딕은 불가사의한 힘인데, 그것은 신이자 또한 악이다.  근대가 절정에 이른 동시에 파국의 조짐을 보이던 19세기, 신은 어떻게 해서 악이 되어 나타난 것일까?  혹은 왜 아직도 인간은 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까?  이 난해한 질문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에이해브는 이교도다. 불가사의한 힘에 돌진하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인간이다.  

 

 

 

 

 

 

 

에이해브는 욥의 고래에 작살을 찔러 넣는 순간, '가장 높은 물마루에 이른 파도' 의 순간에 영원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모비 딕과 에이해브 선장의 파국적 종말은 난파선의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에 의해 전해진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 준 것일까?  에이해브는 광기에 가득찬 신념과 무모한 삶의 방식으로 피쿼드호를 산산조각 내었지만,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힘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맞섰다.

 

'신을 떠난 인간'에게 구원은 없는가? 

'신을 떠난 인간'은 구원을 거부하는가?

 

 

 

 

 

 

 

 

3강부터 8강까지 여섯 권의 고전은 서양의 고대에서 근대까지 시대순으로 배치되었다.  전환기의 혼란 속에 바뀌어 가는 신념의 체계와 변화하는 삶의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들을, 이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따라가면, 서구의 역사와 사상사를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9강과 10강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시대와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낸  성찰과 고난의 긴 여정을 마쳤다면, 이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여행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설 때에 끝난다.  강의하는 강유원과 그 모습이 비춰진 거울 속의 강유원은 행위하는 나와 그 행위를 반성하는 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적으로 잡아주는 이 화면은  '반성 - Reflection'의  중요성을 말없이 강조하는 듯하다.

 

 

 

 

 

 

 

 

9강. 『오이디푸스 왕』 : 나는 누구인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 1864>

 

 

소포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중 『오이디푸스 왕』은 희랍 비극의 백미다. 너무나 유명해 강연자는 줄거리를 이야기 하기도 뭣하고 하지 않기도 뭣할 것이다.

 

 

 

 

 

 

 

 

희랍에 전승되어 오던 테바이 전쟁에 관한 신화(?)를 비극 드라마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사건의 순서와 창작 순서는 다르다. 어느 대목을 공연해도 희랍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숲. 해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를 구하고 왕이 된다. 스핑크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질문을 던졌다. 오이디푸스, 발이 부은자는 발을 잘 아는 자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에 절망한 스핑크스는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스핑크스는 정말 죽었을까? 오이디푸스는 정말 발을 잘 아는 자였을까?

 

  

 

 

 

 

테바이에 역병이 돌자 가장 지혜로운 자, 오이디푸스 왕은 또 한번 테바이를 구하겠다고 자신하며, 역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도시를 오염시킨 살인자를 추적한다.  긴박한 추적은 불길한 예감으로 범인을 향해 가는데, 예정된 운명은 쫓는 자가 쫓기는 자임을 드러낸다.

 

 

 

  <오이디푸스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숲. 해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수수께끼는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 3대를 뒤섞을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얼굴과 사자의 몸과 독수리의 몸을 한 스핑크스라는 재앙이기도 하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의 거울상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하고 비극의 운명을 완수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운명의 여신의 베틀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가?  오늘도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밤을 지새우게 한다.

 

 

 

 

 

 

 

 

 

 

10강. 『욥기』 : 세계에 올바름은 있는가?

 

 

 

 

 

신과 사탄이 내기를 하고 욥은 까닭 없는 고통을 당한다. 신은 게임을 하는데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

 

 

 

 

 

욥은 알지 못하나 다만 복종할 뿐이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어떤 아이는 일생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올바름으로 살려다 떨어져 죽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사악함 그 자체로 칭송 받는다.  신은 무엇을 하는가?

 

 

 

 

 

신은 호통을 친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없는데, 티끌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이 감히 사리를 따져 묻는다고 불같이 화를 낸다. 신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전지전능하신 신은 왜 답하지 않고 탓하시는 것일까? 탓하면서 답하지 않는 것일까?

 

 

 

 

 

따지고 따져도 알 수 없는 것들로 고통받을 때, "세계에 올바름은 있는가?" 라고 신에게 따져 묻고 싶을 때, 강유원 선생은 조언한다. 그럴 때는 아무 것도 탓하지 말고, 아무도 탓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자. 발버둥치면 오히려 빠져든다.  세상에는 불투명함이 있다. 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사랑하자. 세상에는 올바름이 있고,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훨씬 많으며 결국엔 다 잘될 것이라 믿는 것이  『욥기』의 메시지이다.

 

 

 

 

 

 

 

내가 누구인지도, 세상에 올바름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의 끝이 사랑이라면 조금 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이 앎에 대한 philia 이자 eros라면, 삶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해서 그리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앎이 삶이고, 앎과 삶은 사랑으로 고양된다.  

 

 

 

 

* 이 글은 강유원 선생의 글을 정리하고 있지만, 중간 중간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고, 그것이 분명이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어, 강유원 선생의 강의나 그 의도에 벗어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밝혀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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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을 글 잘 보았습니다! 고전의 끝이 사랑이라서 참 좋아요! 말리님 덕분에 이렇게 고전에 한발자국 다가서네요! 오늘은 어느덧 번개같이 흘러가버린 크리스마스연휴의 끝이네요. 남은시간 편안히 보내시고 즐거운 한주되십시요!

말리 2020-12-27 22:22   좋아요 1 | URL
전 어쩐지 약간의 쓸쓸함도 있었는데요. 아마도 세월에 따른 강유원 선생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10여 년 전 녹음 파일은 진짜 힘이 넘치고 혈기가 끓어 오르는 전투적 열정을 느끼게 하거든요. 걸리면 다 죽어, 뭐 이런 느낌까지. ㅎㅎ.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 수록, 삶을 겪을수록 누그러지고, 포용적으로 변해가시는 것 같아요. 원래 크리스천이니 가지고 계신 생각이기도 할 것 같고요.

내꿈다 2021-02-0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잘 정리된 텍스트 감사합니다

말리 2021-02-05 13:05   좋아요 0 | URL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0년 末에 EBS에서 방송한 <강유원의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을 몇일 전 '다시 보기'로 한번 빠르게 듣고, 어제와 오늘은 다시 한번 찬찬히 정리하면서 들었다. 강유원 선생의 긴 강의에 익숙해 있다가 이 짧은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아쉬움이 꽤 있었는데, 다시 한번 집중해서 들으니 전체 강의의 구성이 조금 눈에 들어오면서 하나의 주제로 잘 짜인 강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전체 10강 중 앞 부분 1,2강은 서문에 해당하고 3강에서 8강까지는 본문, 마지막 9강과 10강은 결문이라 할 수 있다. 

 

 

서문에서는 고전이란 무엇인가와 독자를 고전으로 이끄는 놀라움이라는 파토스에 대해 설명하고, 본문에서는 전환기의 시대상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들에 대한 한·두가지 독서 포인트를 제시해 주며, 결문에서는 고전들을 통해 나와 세계를 돌이켜 보기를 제안한다.

 

이 강의들을 하나로 꿰는 주제는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 인 것 같다.

 

 

 

1강 고전을 읽는 방법

 

 

고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강유원 자신만 해도 고전 시리즈를 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정의를 내려왔다.

 

 

 <인문고전강의. 2010>  

 

 

2010년 출간된 『인문고전강의』에서는 고전을 '스승'으로 표현했고, 2012년 『역사고전강의』에서는 '지혜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책"으로 정의했다.

 

 

 

<역사고전강의. 2012.> 

 

 

 

마지막 『문학고전강의』에서는 문학의 특성을 감안하여, '잘 만든 이야기'를 문학 고전으로 정의하였다.  

 

 

<문학고전강의. 2017> 

 

 

 

이번 강의에서는 "이야기 하는 존재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지고, 가장 재미있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읽었고, 가장 오랫동안 전해지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있다.  인간을 규정하는 다양한 , 'Homo OOO' 에 빗대어 인간을 '이야기 하는 존재'로 설명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 남은 이야기가 고전이란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는 방식은 단순하다. 공부를 하듯이 밑줄을 긋고, 주제를  찾고, 독후감을 쓰는 따위의 방법은 독서 교육의 병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저 재미 있게 읽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다시 재미있게 들려 줄 수 있으면 잘 읽은 것이다.

 

 

 

 

 

재미있다는 것은 이야기에 푹빠지는 것이고, 주인공에게 공감하여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고대 희랍에서 최고의 문학 장르로 인정 받았던 비극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연민- 공감할 수 있어야 좋은 이야기다.  비극이 한바탕 마음을 휘몰아치고 나면 그 끝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카타르시스이다. 강유원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개운해 진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전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려운 이야기로 인식되어 있다.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독해력이다. 한글로 씌어 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읽고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 훈련되지 않으면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이제스트판이 아니라 원전(완역본)으로 고전을 읽는 훈련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아주 천천히 때로는 놀이하듯 때로는 씹어 먹듯 1년에 한두 권 정도를 가지고 책 읽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수영도, 악기도 어릴 때 배워 놓아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  

 

 

 

 

2강 놀라움 (驚)의 파토스

 

 

 

 

 

 

놀라움이 앎의 시작이라는 말 자체가 놀라웠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놀란다. 호기심이 생기고, 그 궁금함을 풀어보려 답을 찾고, 그 속에서 가치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깨달을 때 기쁨을 느낀다.  철학함이란 알고자 하는 노력, 앎을 향한 욕망이다.

 

 

 

 

 

 

 

 

앎의 과정도 파토스이다. 희랍어로 Pathos는 고통, 경험을 뜻하는 단어(πάθος)에서 왔으며(위키피디아), 영어 passion의 어원으로 감정, 열정, 고난 등의 뜻을 갖는다. 열정이 있으니 열심히 하는데 그 겪음이 고통스럽다는 말로 나는 받아 들인다.  Pathos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의미는 '겪음, 경험'이다.

 

 

 

 

 <문학고전강의>

 

 

 

희랍의 널리 알려진 격언으로 'Pathei Mathos -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가 있다. 사실 이 격언은 대부분의 문학작품의 구조이기도 하다. 오뒷세우스도, 오이디푸스도, 어린왕자도 고난을 겪고 성장한다. 

 

또 Pathos는 연민이다.  같은 것을 함께 겪으면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연민을 뜻하는 영어 Compassion은 함께(com) 겪는(passion) 것이다. 함께 겪으며 나누어 가지게 된 고통을 함께 덜어 보려는 마음이 연민-자비-사랑이다.  Pieta는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느끼는 고통이자 사랑이다.  

 

함께 느끼는 것은 Sympathy다.  공동체가 함께 겪고 같은 것을 느낄 때 공감이 형성된다. 이 공감이 Sensus Communis(공통 감각) 즉 Common Sense(상식)이다. 올바른 상식이 올바른 공동체를 만드는 토대인 것이다.

 

 

 

 

 

 

 

내가 고전 읽기를 시작하면서 정리해 본 고전의 필요성이다.  공동체가 거대해지면서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은 간접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동으로 읽을 수 있는 Text야 말로 우리 시대에 공감 능력을 키우는 훌륭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감을 통해 합의된 덕, 그 시대적 가치야말로 사회적 정의를 논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 덕(arete/virtue)이든 사회적 가치이든 간에  (다시 본 강의로 돌아와서..)  그 기준은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신념은 앎에 기반한다.  '신념'에 믿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미 특정한 앎을 지칭하는 듯 보이지만, 여기서 신념 체계를 가치 체계라고 바꾸어 생각해 보면 될 듯하다.

 

플라톤은 앎을 4가지 단계로 나누고, 지성으로 알아낸 제1원리를 최고의 진리로 삼았다.  제1원리에 대한 앎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적 앎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통해 이를 가리켜 보이려 했으나, 에로스의 사다리 위에서도 '갑자기' 라면 모를까,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 종류의 앎은 아니다.

 

'추론적 사고'는 현대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고, '믿음 또는 확신'은 인격 신이든 비인격 신이든 혹은 어떤 가치이든 간에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며, 언급할 가치도 없지만 의외로 많을 지도 모르는 상상, 망상이 있다.  

 

 

나의 신념은, 나의 가치관은 어떤 앎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한번쯤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삶의 방식은 신념의 체계에 뿌리박고 있다.  나의 신념 체계가 상상이나 엉뚱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내가 오늘 올바르다고 생각한 행동이 내일 가짜이거나 어릿광대 놀음이었음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고전이 놀라움(驚)의 파토스를 주는 것은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효율성이, 돈과 벌거벗은 생명이 최고의 가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킬레우스를 만나는 것은 놀라움이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삶을 노래하고, 공연하고, 그것도 모자라 포도주 병에, 희석용 동이에, 접시에 그려 놓고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했던 고대 아테나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더 큰 놀라움이다.

 

이 경이(驚異)가 자연의 섭리와 같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보게 하고, 그 뿌리에 놓인 신념의 체계를 반성하게 한다. 이 반성(Reflecction)이 철학의 출발점이다.

 

 

 

 

 

 

3강.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혼돈의 서막 

 

 

 

 

신념의 체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삶의 발판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혼돈의 시기에, 더 이상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위기의 순간이 닥쳐서야 비로소  수백 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의 체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것에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고, 새로운 토대는 아직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 절망의 시대에 등장하는 몸부림, 그 절실한  탐색이 전환기의 사상들이다. 경쟁하는 사상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하나의 신념의 체계로 통합되고 전환기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미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된다.

 

 

 

 

 

 

 

청동기 문명의 파괴와 함께 수백 년의 암흑 시대가 이어지던 고대 희랍 세계는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에게해 주변으로 수백 개의 폴리스가 생겨나 경쟁과 협력 속에 번성해 갔다. 기원전 5세기 초에 놀랍게도 大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며 에게해 세계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테나이가 해상 강국이 되어 밖으로는 주변 폴리스들을 규합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고, 안으로는 민주정을 활짝 피워냈다.

 

 

 

 

 

 

아테나이의 제국화를 보며 시기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폴리스들은 스파르테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고, 아테나이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과 전쟁을 시작했다.  고대 희랍 세계의 내전인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기원전 404년까지 27년간 이어졌다. 

 

 

 

 

 

 

 

전쟁은 평상시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야수같은 인간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생존과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배우고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했다. 전쟁은 그 자체가 '잔혹한 교사' 이다.

 

 

 

 

 

법은 구속력이 없었고, 정의는 경멸되고, 말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이 혼돈 속에  희랍 세계는 동반 몰락의 길을 갔다.  Polis 그 자체가 삶이었던 시민의 공동체는 사라졌고 탐욕에 가득찬 개인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은 명성과 부를 가져다 주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 전쟁에서 장군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추방도 당했던 아테나이 귀족 출신의 투퀴디데스는 <역사> 라는 전쟁 보고서를 썼는데, 마치 비극 드라마처럼 만들었다고 평가 받는다. 이 거대한 비극의 주인공은 아테나이다.

 

 

 

 

 

 

이 비극의 원인은 희랍 비극이 대개 그러하듯 휘브리스 Hybris, 즉 아테나이의 오만에 있다고 투퀴디데스는 분석한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너무나 큰 번영을 누리던 아테나이가 동맹국들을 압박하며 제국의 길로 들어 선 순간 이 비극은 예견되었다.  희랍인들은 휘브리스(오만)에 의해 하마르티아(잘못된 판단/무모함)를 저지르게 되고, 신의 네메시스(복수/응징)를 불러 온다고 생각하였다.

 

 

 

 

 

4강.  소크라테스의 변론 : 아테네의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와 정체의 급변을 겪으며 아테나이 시민의 심성은 거칠어졌다. 남부끄럽지 않은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아테나이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겪었던 소크라테스는 남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하는 아테나이의 잘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얼굴에 찬물을 퍼부었다.  남에게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문제라고 몰아세웠다. 강유원의 맛깔난 표현으로는, "남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문제인 줄 알아?" "어이, 젊은이, 너 자신을 알아야 할 텐데." 와 같이.

 

 

 

 

 

 

 

 

 

얼굴에 똥물을 맞은 듯 분노한 아테나이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고 결국 사형을 선고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항변한 연설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서서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배심원들을 향해서 항변하지 않았다. 평소에 하던 대로 아테나이 시민들을 향해 언제나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을 뿐이다. 다만 늘 개인적으로 하던 이야기를 재판정에 모인 전 시민들을 향해 '대중 연설'로 했던 것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부끄러워 하라고 질타했다. 명예와 부를 위해서는 크토록 마음을 쓰면서 슬기로움과 진리 그리고 영혼이 훌륭해 지는 것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는 것이다. 

 

강유원 선생의 예가 참으로 적절한데,  집값 광풍의 시대에 최대한 끌어 모아 갭투자라도 하려는 사람에게, "갭투자 말고, 영혼에 마음을 쓰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인가? 당장 모든 인간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나도 그렇다. 형제 자매, 지인들과 절교를 마음먹지 않는 한 입밖에 꺼내기 힘든 말이다. 너도 나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소위 '투자' 로 한몫을 보지 않는 한 거지꼴을 면하기 어려운 약탈적 자본주의 시대에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 놓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의 체계를 고수하고 삶의 방식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배를 마셨다.

 

 

 

 

 

 

영혼을 돌보는 것은 쾌락을 반대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쾌락, hedone는 삶을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의 하나로 유행한 퀴레네 학파가 주장한 것이 쾌락주의이다.  개인의 정서적 즐거움을 삶의 가치로 삼는 철학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Polis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대두하면서 등장하는 신념의 체계로서, 이후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Polis 시대의 종말과 이어지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철학으로 계승된다.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역설한다.  영혼을 돌보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훌륭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인지 따져 묻고 또 묻는 일이다.

 

캐묻는 삶은 피곤하다. 부와 명성을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 행위를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고 올바른 행위인지 따져 묻는 것은 자학이라고 생각되기 십상이다. 부와 명성과 영혼이 함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도 영혼을 위해 가난과 비난을 선택한 셈이다.  거친 심성과 탐욕이 난무하는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질타는 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가끔 어떤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위력이 있다. 

 

 

 

 

 

 

5강. 『고백록』 : 영원한 제국 로마의 몰락

 

 

 

 

 

 

 

 

기원후 3세기가 되자 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도 혼란과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4세기부터 남하한 게르만족들이 로마 깊숙이 파고 들었고, 로마는 게르만 뿐만 아니라 훈족 등의 이민족에게 유린되어 갔다.

 

하지만 로마는 로마다. 로마의 식민지들은 Romanized 했다. 로마의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있어 최고의 가치는 희랍에서와 같이 명성과 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로마 식민지의 시민들은 명성과 부를 위해 로마로 모여들었고, 그 중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로마에서 명성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은 뛰어난 수사학을 구사하는 법률가가 되는 것이다. 로마에서 수사학자는 웅변가이자 법률가였다.  카르타고의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로마에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문득 이 젊은이에게 삶의 회의가 찾아 왔다.  '문득'의 순간이 어떻게 찾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명성과 부와 정욕과 방탕으로 가득찬 삶을 '문득' 뒤돌아 보았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깨달았다. Metanoia, 회심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성서를 읽었다. 

 

 

 

 

 

 

 

 

그는 로마의 주교가 되었으며, 초기 교부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삶의 참다운 의미를 신 안에서 찾고, 진리를 찾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신학이 아니라 고전의 관점에서, 즉 잘 만든 이야기로 읽는다면 "야망에 가득찬 젊은이가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문득 삶의 회의를 느끼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으로  볼 수 있다. 겪음을 통해서 지혜를 혹은 진리를 찾는다는 고전의 전형적 구성을 하고 있다.

 

 

 

 

 

'신념의 체계와 삶의 방식'을 진리 위에 정초하려던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돌보는, 끊임없이 캐묻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른다."를 되뇌었고, 아테나이의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논박으로 밝혀 내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뿐이었다.  진리를 모른 채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반성하고 캐묻는 삶은 끝없는 길 위의 영원한 나그네처럼 고달프고 신경질적이다. 

 

중세인들은 차라리 안정되고 평화로웠을 것 같다.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신에 대한 믿음은 '신념과 삶'의 진리성을 보증해 준다.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의 대 혼란 속에서도 천상의 국가는 영원할 것이니, 신의 품속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했을 것 같다.

 

 

 

 

* 이 글은 강유원 선생의 글을 정리하고 있지만, 중간 중간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고, 그것이 분명이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어, 강유원 선생의 강의나 그 의도에 벗어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밝혀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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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 크리스마스 선물같은 알맹이가 꽉 들어찬 페이퍼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엄청난걸 준비하셨는지 감탄만 나올뿐이네요! 염치없지만 남은 강의부분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리 2020-12-26 12:41   좋아요 1 | URL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한 것뿐입니다. 직접 뵌 것은 딱 한 번뿐이지만 예전 강의 파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필요할 때 종종 듣고 있습니다. 목소리만으로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조금 쓸쓸하기도 합니다. 이번 강의는 아주 대중적으로,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힘을 빼셨지만, 뜯어 볼수록 원숙함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나머지를 정리하려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ㅎㅎ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

막시무스 2020-12-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늦었지만 해피 크리스마스 연휴되십시요!

내꿈다 2021-02-03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세하고 깊은 강의 정리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공부 시작합니다

말리 2021-02-05 13:04   좋아요 0 | URL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