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현재보다 과거가 더 알기 쉽다. 중·고등학교 과정만 거치면 중국의 전근대 역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중국은 어떤 나라인지, 특히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어떤 국가인지 파악하기란 매우 힘들다.

 

중국은 자유 시장 경제를 운용하고 있다. 이런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인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인가? 

시진핑의 강력한 일인 권력의 공고화는 서구 세계의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중국은 일인 독재 체제인가? 인민의 공화국인가? 

소련은 붕괴하고 북한은 세습 군주국이 되었다. 중국은 어떻게 체제 변화 없이 경제 성장을 이루고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었는가?

 

막연한 물음과 떠도는 풍문 사이에서 깨진 거울 조각들에 비춰진 중국은 기괴하고 일그러진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이 탄탄하고 학문적인 강의가 고마운 것은 진짜 중국을 볼 수 있는 자그마하지만 온전한 거울을 얻은 것 같기 때문이다.

 

 

 

 

 

5강에서 8강까지는 이 강좌의 제 2부로서, 엘리트 정치의 앞선 두 유형인 일인 지배 체제와 원로 지배 체제의 구체적 특징을 사례와 함께 분석한다.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열쇠는 집단 지도 체제인데, 이 체제에 대한 이해는 선행한 두 체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16강으로 구성된 이 강좌의 전반부는 후반부 강의를 위한 예비 공부인 셈이다.

 

 

 

 

 

 

5강. 마오쩌둥과  일인 지배 ① : 이론

 

 

 

 

중화(中華)의 세계에서 동이(東夷)로 살아온 우리에게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은 익숙하다.

 

 

 

 

 

중국 역사상 세계 경제 시장의 40%를 차지했던 당왕조(618~907)와 30% 이상을 차지했던 청왕조 (1616~1912)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 

 

 

 

  

 

 

 

청왕조 말기, 1840년 영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아편 전쟁은 중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중국의 근대는 1840년부터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이다. 중국인들은 이 시기를 '굴욕의 100년' 이라고 부른다. 중국 역사상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벗어난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을 파이처럼 나누어 가지며, '동아시아의 병자'라 조롱했다.

 

 

 

 

 

 

 

마오쩌둥은 이 '굴욕의 100년' 을 끝장 낸 지도자이다.  대장정을 이끌고, 국공 내전을 승리함으로써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마침내 노동자·농민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중국 인민들은 마오쩌둥을 공산당으로, 공산당을 마오쩌둥으로 생각했다.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권위는 법과 제도 따위와는 무관한 그 이름 자체, 그 카리스마에 있었다.

 

 

 

 

 

 

1949년 건국 당시에 이미 인민들에게는 마오쩌둥이 황제였고, 1956년 이후부터는 마오쩌둥 스스로에게도 자신은 사회주의 황제였다.

 

 

 

 

 

 

 

 

당헌에 규정된 집체 영도와 개인 숭배 금지를 무시하고, 마오쩌둥 1인 체제를 공식화 했다.  

 

 

 

 

 

추종자들이 발 빠르게 호응하고, 마오쩌둥은 공산당 위에 군림하는 황제로서 다른 혁명 지도자들과 군신 관계를 형성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극단적 숭배와 1인 지배는 1966년~1976년의 문화 대혁명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6. 마오쩌둥과 1인 지배 체제 ② : 사례

 

 

 

 

 

 

마오쩌둥의 일인 지배 체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1958년의 대약진 운동과 1966년 시작한 문화 대혁명이다. 두 사건은 워낙 유명해서 중국의 현대사에서 빼놓고 갈 수 없는 장면이다. 

 

이 강의에서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은 '5개년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 계획' 을 중심으로 이들 사건과 마오쩌둥의 일인 지배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 본다.

 

중국은 1953년 한국 전쟁 직후 시작한 1차 5개년 계획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2021년부터는 14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1차 5개년 계획은 큰 성공을 거두어 중국 역사의 황금기에 기여하였다.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부터 1956년 공산당 8차 당대회까지를 현대 중국의 황금기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마오쩌둥도 공산당 당헌에 기반하여 지도부 내의 협의를 통해 권력을 운용하였다. 

 

 

 

 

 

 

마오쩌둥의 권력 운용 방식의 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2차 5개년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이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공산당 및 노동당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15년 후에 소련이 미국의 경제를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낙인 찍고 있던 마오쩌둥은 이에 맞서 중국도 15년 후에 영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즉흥적인 발언을 한다.

 

 

 

 

 

마오쩌둥의 선언은 그대로 2차 5개년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 계획의 목표가 된다.  중국내의 경제 발전 상황이나 가용 자원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마오쩌둥의 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대약진 운동이다.

 

 

 

 

 

 

 

경제 발전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두 가지다.  농업 부문의 식량 생산량과 공업 부문의 철강 생산량이다.  건국 이후 분배했던 토지를 사실상 빼앗아 인민 공사 단위의 집단 영농을 실시했다. 인민공사는 1958년 설립된 중화 인민 공화국의 농촌 행정 경제의 기본 단위이다. 

 

집단 농장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저하시켰다. 목표량에 미치지 못하는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목표량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수취함에 따라 빈손이 된 농민들은 기아 상태로 내몰렸다.

 

 

 

 

 

 

 

 

 

 

철 생산을 위한 주먹구구식 제련 방식은 웃지도 못할 온갖 해프닝을 쏟아내며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약진 운동 기간 굶어 죽은 중국인은 3,500만 명에서 4,500만 명까지 추정되고 있다.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결과는 공산당 최고 지도부 내의 분열을 가져왔다. 대약진 운동이 중단되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주도한 경제 회복 운동이 추진되었다. 경제 원상 복구를 위해 집단 영농을 완화하고 생산 의욕을 고취하였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덩샤오핑의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다.

 

순조로운 경제 회복 운동을 우려의 눈으로 보고 있던 마오쩌둥은 2년 만에 이를 중단시키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주장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로 낙인찍고 대중 운동을 통해 수정주의 노선을 비판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결국 1966년의 문화 대혁명이라는 더욱 파괴적인 정신 운동의 단초가 된다.

 

 

 

 

 

 

 

3차 5개년 계획도 마오쩌둥 1인 지배의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63년부터 실시된 3차 5개년 계획의 초기 목표는 국민 생활 개선이었다. 그런데 1년 뒤 마오쩌둥은 이 목표를 전면 변경하여 미국의 핵 공격에 대비한 제3선 계획을 명령한다.

 

서쪽 해안가(1선)와 내륙의 공업 도시(2선)에 집중된 중화학 공업 단지를 내륙 산속의 지하에 건설하라는 것이다.  국민 경제를 위해 지출되어 할 예산이 핵 공격에 대비한 지하 공업 기지 건설에 투입되면서 막대한 자원이 낭비되었다.

 

 

 

 

 

 

1958년 무렵부터 공산당의 권력 기구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마오쩌둥의 참모 기구로 전락했다. 마오쩌둥은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황제로 국가 정책을 마음대로 좌우했지만, 아무도 잘못을 논의할 수 없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은 인민의 주권도 공화의 이상도 잃어 가는 듯했다. 

 

 

 

 

 

 

 

 

7. 덩샤오핑과 원로 지배   : 이론

 

 

 

 

 

 

 

중국의 정치 체제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원로 지배인 것 같다.  원로 지배 체제는 덩샤오핑 시대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덩샤오핑 1인 지배 체제가 아니라 8명의 원로들의 합의를 통한 집단 지배 형태이다.  1인 지배에서 집단 지도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정치 형태로 중국 역사의 특수성에 의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원로 지배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 권력 구조이다.  원로들로 구성된 비공식 정치와 법과 제도에 근거한 공식 정치이다.  실무는 공식 정치가 맡지만 최종 결정권은 원로에게 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 대혁명에 의해 숙청되었던 원로들이 복권되고, 1978년부터는 원로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혁명 원로들은 개인적 카리스마에 더불어 폭넓은 인적 관계망, 즉 꽌시를 통해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원로들도 초기에는 공식 직위를 차지했다. 이후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덩샤오핑이 혁명 원로들의 퇴진을 제안하면서, 기형적인 이중 지배 체제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퇴진을 거부하며 버티기에 들어 갔으나 각종 정치·경제적 특혜를 약속 받고 혁명 원로들은 공산당의 최고위직에서 물러났다.  단, 덩샤오핑만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으로 실권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왜 공식 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완전히 멈추었던 공식 기구와 국가 기관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과 같은 독재자가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 지도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중요 했다.  

 

또한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확립되어야 했다. 외국인과 시장 주체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촉진하기 위해서는 구속력 있는 법과 규정이 필요했다.

 

 

 

 

 

 

 

 

혁명 원로들이 물러났지만 실권은 여전히 원로들에게 있었다.  원로들은 세 가지 장치를 통해 공식 정치를 좌우하였다.

 

 

   

 

 

  

 

첫째는 덩샤오핑을 통한 권력 행사이다. 덩샤오핑은 카리스마에 있어서도, 제도적 직위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일인자였다.  군은 당에 절대 복종해야 했지만, 당권과 군권이 분리된 상태에서 권력은 군권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당내 비밀 회의는 "덩사오핑 동지가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덩샤오핑에게 공식 정치를 통제하는 비토권을 줌과 동시에 집단 지도 하의 권력 마비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퇴진 원로들로 구성된 중앙 고문 위원회를 통한 방법이다. 중앙 고문 위원회는 합법적으로 정치국원들에게 정책을 제안하고 조언할 수 있었다.

 

 

 

 

 

 

 

 

셋째는 파벌을 통한 권력 행사이다. 공식 기구의 주요 직위에 혁명 원로들의 파벌을 임명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 원로의 양대 산맥은 개혁파의 덩샤오핑과 보수파의 천윈이다. 

 

 

 

 

 

 

덩샤오핑의 개혁파에는 후야오방,  자오쯔양,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등이 대표적이다.

 

 

 

 

 

 

 

천윈의 보수파에는 장쩌민과 리펑 등이 있다.

 

 

 

 

 

 

 

 8. 덩샤오핑과 원로 지배 ② : 사례

 

 

 

 

개혁·개방과 함께 시작된 원로 지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무수한 일화를 만들었다.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를 지키면서 시장 경제와 사적 소유를 도입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어떤 나라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혁명 원로들도 그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그 방향만은 뚜렷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들의 비공식 정치는 공식 정치를 좌우하며 실권을 행사하였고,  원로들이 독단으로 공산당 총서기를 갈아치우는 사태가 연달아 발생하였다.

 

 

 

 

 

 

 

후야오방은 1982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과 함께 덩샤오핑의 지휘 아래 개혁·개방을 실행하였다.

 

사무엘 헌팅턴이 '제 3의 민주화 물결'이라 부른 전 세계적인 민주화 운동이 1974년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남유럽을 휩쓸고, 라틴 아메리카로 건너 갔다가, 동아시아를 뒤흔든 것이 1986년 무렵이었다.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가 축출되고, 중국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6.10항쟁도 이 흐름 속에 있었다.

 

 

 

 

 

 

학생 시위에 대해 혁명 원로들은 무력 진압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대화로 풀기를 주장하자 원로 지배는 후야오방 퇴진을 결의했다. 후야오방의 퇴진에는 경제 정책을 둘러싼 자오쯔양과의 갈등과 원로들에 대한 불경죄 등도 영향을 미쳤다.

 

처음 원로들은 1987년 13차 당대회를 통해 후야오방을 명예롭게 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986년 말부터 1987년 초까지 중국 20여 개의 대학들이 격렬한 시위에 나서고 후야오방이 이를 진압하지 않자 혁명 원로들은 후야오방을 즉각 불명예 퇴진시켜 버렸다.

 

 

 

 

 

 

 

 

당헌에 의하면 정치국원 및 정치국 상무위원과 총서기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원로들의 후야오방 퇴진은 당헌을 무시하고 퇴진 시기와 방법까지 모든 것을 원로들의 비공식 회의로 결정해 버린 초법적 독단이었다. 절차상의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원로 지배 체제의 생생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 사건도 후야오방의 불명예 퇴진과 관련되어 있다.

 

천안문 사건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이에 대한 강제 진압을 통칭한다.

 

 

 

 

 

 

 

 

 

 

 

총서기에서는 쫓겨났지만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정치국 회의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학생들의 추모 물결이 거세게 일어 났다. 대학생들은 후야오방에게 커다란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학생들을 보호하려 하다 후야오방이 총서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안문의 추모 물결은 언론 자유와 부패 당정 간부 처벌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발전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원로 회의는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고, "학생 운동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동란이다."라고 선언한 원로 지배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을 자행했다. 

 

 

 

 

 

 

 

 

후야오방 퇴진 후 총서기로 선출되었던 자오쯔양이 이 과정에서 원로 지배에 의해 2년 만에 파면 당했다.  자오쯔양이 천안문 사건의 무력 진압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총서기로 당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것과 비밀 결의 누설 등의 사유로 원로 회의는 자오쯔양의 퇴진을 결의하고 후임자를 논의했다. 

 

 

 

 

 

 

정치국 상무위원도 아니었던 상하이 당서기 장쩌민이 갑자기 총서기로 부상한 것은 순전히 원로들의 결정이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그리고 장쩌민까지,  1978년부터 1992년 사이 14년 간의 원로 지배 시기에 공산당 총서기가 어떻게 선출되고 어떻게 쫓겨났는가를 보면 원로 지배 체제의 본 모습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로 지배 체제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고령의 원로들이 쇠진하고 하나 둘 사망하면서 1992년에는 공식 정치를 회복하고 집단 지도 체제가 확립되었다.

 

 

 

 

1강~ 8강은 이 강좌의 예비 공부에 해당한다.  강좌의 목적은 현재 중국의 정치 체제를 명확히 알고 세계 속의 중국, 수천 년 역사의 이웃으로서의 중국을 똑바로 이해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집단 지도 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과 사례는 9강~16강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6강과 8강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사례도 그러하지만, 사례를 통한 체제 이해는 직접 강의를 들어 봐야 그 생생함과 놀라움과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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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곡

 

 

 

다섯 번째 둘레에서 만난 스타티우스가 단테의 순례에 동행한다. 스타티우스는 이미 영혼이 정화되어 그 징표로 온 산을 진동시켰지만, 존경하는 베르길리우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섯 번째 둘레를 함께 오른다.

 

 

당신은 등불을 뒤로 들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현명하게 만드는,

어둠 속의 외로운 여행자셨지요. (67~69)

 

 

스타티우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연옥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덕분이다. 정작 기원전에 활동했던 베르길리우스는 세례를 받지 못해 지옥의 림보에 있지만, 그는 '등불을 뒤로 들어' 스타티우스에게 이성과 덕성의 빛을 밝혀 주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스승과 스승보다 더 뛰어난 제자 사이의 갈등이 많이 있었지만, 훌륭한 스승은 어둠 속을 앞서 걸으며 뒤를 밝히는 외로운 선지자이다. 

 

사실 단테의 『신곡』은 읽으면서 어쩔 수 없는 회의가 있다. 죽어서 우주의 먼지가 되고 싶은 나는 천국도 지옥도 연옥도 상관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세계의 창조주는 단테이고,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도 단테의 뜻대로 판결할 뿐이다. 지옥의 반은 13~14세기 단테의 반대 정파들이 차지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개인적 감정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신곡』은 신곡이군" 하는 것은 3행으로 압축된, 저 삶을 통찰하는 지혜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23곡

 

 

 

여섯 번째 둘레는 탐식의 죄를 갈증과 허기로 씻어내는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탐식은 글자 그대로 음식을 탐한 것이다. 많이 먹는 것도 죄냐?고 할 수 있는데, 중세에는 그랬다고 한다.

 

문 앞에 배를 곯은 아이가 울고 있는데, 진수성찬이 목구멍으로 넘어갈까? 그래선 안되지만 오랫동안 인간은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TV를 켜면 연예인도 요리사도 외국인도, 한옥에서 캠핑카에서 식당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음식을 하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사이사이 중간 광고는 아프리카의 뼈만 남은 아이들의 쾡하고 슬픈 눈을 보여준다.  

 

많이 먹는 것도 죄일까? 옆에서 누군가 굶고 있다면.

 

 

 

 

 

 

24곡

 

 

은총의 빛을 받는 자에게는

축복이 내릴 것이니, 식욕이 저들의 가슴에

과도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의로운 일에 굶주리게 하기 때문이다. (151~154)

 

 

 

 

 

 

25곡 & 26곡

 

 

 

일곱 번째 둘레는 음욕의 죄인들이 불꽃 속에서 정죄하고 있다.

 

 

 

 

 

 

27곡

 

 

 

 

 

 

바보 같게도 지상낙원과 천국이 같은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상낙원은 말 그대로 지상에 있고, 천국은 하늘에 있다...

 

연옥산의 일곱 둘레 순례를 모두 마치고 단테 일행은 지상낙원에 들어온다. 베르길리우스가 밝힌 이성의 등불은 단테의 앞을 비추어 지옥에서 지상낙원까지 그를 인도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임무는 끝났다. 단테의 의지는 곧고 바르고 자유로워 졌다.

 

 

아들아! 너는 순간의 불과

영원의 불을 보았다. 이제 너는 내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세계에 온 것이다.

 

나의 지성과 기술로 널 여기까지 데려왔으나,

여기부터는 너의 기쁨이 너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좁은 길과 절벽은 저 멀리 아래에 있다.

 

너의 이마를 비춰 주는 태양을 보아라!

이곳 땅에서 씨앗도 없이 혼자서 솟아나는

풀잎과 꽃, 나무를 보아라!

 

날 너에게 가도록 눈물로 호소하던

저 아름다운 눈이 기쁨에 젖어 올 때까지

넌 여기 앉아 있거나 여기저기 거닐어도 좋다.

 

이젠 내 말이나 눈짓을 기다리지 마라!

너의 의지는 곧고 바르고 자유로우니

그 뜻대로 해야 할 것이다.

 

너의 머리에 왕관과 면류관을 씌운다."  (127~142)

 

 

 

스승은 자기가 오르지 못하는 곳으로 제자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다. 제자는 또 다른 스승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28곡

 

 

 

지상낙원은 싱싱한 초록으로 우거진 거룩한 숲이다. '어두운 숲'에서 지옥으로 내려 갔던 단테는 지구의 중심을 관통하여 연옥의 맨 꼭대기 '거룩한 숲'에 올랐다.

 

레테의 강과 에우노에의 강이 단테를 기다리고 있다.

 

 

항상 변함없이 흐르는 샘에서 발원하고,

그 샘은 두 갈래로 열려 흘러 나가는 만큼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다시 채워집니다.

 

이편의 물은 죄의 기억을 지우는 힘을

지닌 채 흐르고 저편의 물에서는

온갖 선행의 기억이 회복되니,

 

이쪽은 레테라 하고 저편은 에우노에라

합니다. 이쪽과 저쪽을 다

맛보지 않고서는 그 힘을 알 수 가 없으며,

 

어떤 것도 그 맛에 비길 수가 없지요.  (125~133)

 

 

 

 

 

 

 

29곡

 

 

 

 

 

지상낙원에 그리핀이 끄는 전차를 둘러싼 행렬이 나타난다.

 

 

 

 

 

 

30곡

 

 

 

 

 

 

천사들이 뿌린 꽃들의 구름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돌아 보지만 그는 어느새 홀로 사라졌다.

 

 

"단테여, 베르길리우스가 그대를 떠났다 해도

아직은 울지 말아요. 아직은 울지 말아요.

그대는 또 다른 칼 때문에 울어야 할 테니."  (55~57)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불렀다. 옮긴이 주12)에 따르면 『신곡』에서 유일하게 단테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행이다.

 

세례받지 못한 베르길리우스는 스승의 역할을 베아트리체에게 인계하고 떠났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내린 첫 번째 가르침은 질책이다.

 

 

그러나 토양이 경작되지 않고 버려지거나

나쁜 씨앗이 싹트게 되면, 토양이 기름지고 풍요로울수록

열매는 더 거칠고 사악하게 됩니다.  (118~120)

 

 

단테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베아트리체가 죽은 후 길을 잃고 헤매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에 들었다.  베아트리체는 심연으로 빠져든 단테를 호되게 꾸짖는다.

 

 

그대가 참회의 눈물로 쏟아지는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레테를 건너고 그 달콤한 물을 마신다면,

 

하느님의 최고 법은 깨질 것입니다.  (142~145)

 

 

참회 없이 은총은 없다. 지옥이 하느님의 정의라면, 죄에 대한 통절한 뉘우침 없이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죄 없는 용서를 말하는 자는 불의를 부추기는 자다. 

 

 

 

 

 

 

 

31곡

 

 

베아트리체의 질책은 한겨울 북풍처럼 매섭다.

 

  

그러나 죄의 고백이 죄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올 때 우리의 법정에서는

칼날이 숫돌에 거꾸로 갈리듯 죄가 가벼워집니다.

 

그대가 진정 죄를 부끄럽게

느끼고 언젠가 세이렌이 노래할 때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40~45)

 

 

 

단테는 죄에 대한 고통과 부끄러움의 무게로 기절한다.  통렬한 뉘우침이 있은 후에야 단테에게 레테의 강과 강물이 허락된다.

 

 

 

 

 

 

32곡

 

 

스타티우스와 단테는 하늘 나라로 나아가는 전차 행렬의 뒤를 따른다. 그리핀은 전차를 선악의 나무에 매어 두고 하늘로 오르고, 단테의 눈앞에 환각처럼 기독교 1300여 년의 역사가 펼쳐진다. 베아트리체는 돌아가서 본 것을 글로 쓰라고 명령한다.

 

 

 

 

 

 

33곡

 

 

레테의 강을 건너며 죄의 기억을 모두 지운 단테는 마지막으로 에우노에의 강물을 마시고 온갖 선행의 기억을 회복한다.

 

 

이 더없이 성스러운 물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새로 돋아난 잎사귀와 새로워진 나무로

다시 살아나고 순수해져서,

 

별들에게 올라갈 열망을 가다듬었다.  (142~145)

 

 

단테의 연옥 순례가 모두 끝났다. 이제 『천국』이 머리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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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본 분이다. <차이나는 도올>의 중국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중국 정치의 핵심을 알려 주었다.

 

 

 

 

 

 

EBS <클라스e> 에서는 16회에 걸쳐 <중국의 엘리트 정치>를 강의한다. 1강에서 4강까지가 엘리트 정치의 전반에 대한 설명이다. 총론에 해당하는 이 네 개의 강의를 묶어 정리해 둔다.

 

 

 

그런데 정리가 쉽지 않다. 중국의 정치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고, 용어도 생소할 뿐더러 뿌리 깊은 편견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정치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강의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듣는 수준에 그치다 보니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어우러지지도 않고 뚝뚝 끊기는 문장에 맥락도 없는 글이지만 자료 저장에 의의를 두고 올려 놓는다. 혹 읽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1강. 왜 엘리트 정치인가

 

 

 

 

 

 

현재 전 세계의 사회주의 국가는 쿠바, 베트남, 북한, 중국, 딱 4개국이다. 이 국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당-국가 (Party-State) 체제이다.

 

당-국가 체제란 "공산당과 국가 기관이 인적으로, 조직적으로 밀접히 결합해 있고, 실제 정치 과정에서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치 체제"이다. 

 

 

 

 

 

 

 

 

중국의 혁명 과정을 보면 공산당 → 인민 해방군 → 중화인민 공화국의 순서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공산당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그 다음으로 군대 그리고 국가의 순으로 권위를 갖게 된다.

 

 

 

 

 

 

 

 

중국 헌법에  '중국 공산당의 영도'가 중국 사회주의의 본질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공산당 당헌을 보면, 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중국 공산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 영도의 원칙' 이다.  

 

 

 

 

 

 

 

 

공산당 영도의 원칙은  혁명기 조직 원리인 민주 집중제와 관련이 있다.  민주 집중제는 레닌이 혁명을 위해 볼셰비키당에 적용했던 조직의 원리이다. 평등하고 자유롭고 치열한 토론이 보장되는 민주의 원칙과 한번 결정된 내용은 철의 규율로 집행하는 집중의 원칙이 결합된 것이다.  소수의 혁명 정당이 거대한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동지적 단결과 강인한 실행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혁명기에는 민주 원칙이 잘 지켜진 반면 국가 통치기에는 집중 원칙이 강조되었다.  구 소련뿐 아니라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두 권력 집중형 체제인 것은 민주 집중제에 기인한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권력 분산형 체제이다.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를 독재 국가로 인식하기 쉬운 이유도 민주집중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중국 공산당은 2019년 말 현재 약 9천2백만명의 당원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강력한 정치 조직이다.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선진분자여야 한다.  중국 각 분야의 상위 5~10%의 엘리트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인구의 약 6.6%로 구성된 공산당은 실질적으로 14억 전체 중국 인민을 통치할 능력이 있는가?  결론적으로 있다고 한다.  다섯 가지 통제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인사 통제이다.  중국의 국가 기관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중요한 직위는 공산당이 인사권을 행사한다.

 

둘째는 조직 통제이다.  공산당 밖의 주요 기관에도 '당조'라고 하는 공산당 지도 조직이 있다. 당조는 공산당의 정강 정책을 해당 조직에 실현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해당 조직의 인사권도 행사한다.

 

셋째는 사상 통제이다. 모든 중국 인민이 공산당의 영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이데올로기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교육과 언론, 문화·예술을 통제하며 반대 세력을 탄압한다.

 

넷째는 무력 통제이다. 군대와 각종 공권력 즉 공안, 검찰, 법원, 정보 기구 등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군대는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에 절대 복종한다.

 

 

 

 

 

 

 

 

 

 

다섯째는 경제 통제이다.  중국이 시장 경제를 도입했지만,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거대 규모의 국유 기업과 금융을 통해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조직표이다. 공산당원 약 9200만명 중에서 2,287명이 전국 대표 대회를, 전국 대표 대회 구성원 중 376명이 중앙 위원회를, 중앙 위원회 구성원 중 25명이 정치국을, 정치국 25명 중 7명이 정치국 상무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뽑힌 총서기가 당을 대표한다.  

 

 

 

 

 

 

 

 

현재 중국의 정치체를 집단 지도 체제라고 부르는데, 25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이 그 핵심이며, 여기에 은퇴한 원로 서너 명이 더해져 30명 정도가 중국의 엘리트 정치를 꾸려 가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일상적 통치 기구로서,  당 총서기와 주요 국가 기구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당과 국가가 인적·조직적으로 결합된 당-국가 체제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1강 종합

 

혁명기의 조직 원리인 민주 집중제가 국가 수립 이후에는 권력 집중형 체제로 이어지는데, 이때 권력은 당에 집중되므로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당-국가 체제를 공통의 특징으로 한다.

 

중국 공산당은 각계각층의 상위 5~10% 엘리트들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정치 결사체로서, 헌법에 명시된 중국 공산당 영도의 원칙에 따라 14억 중국 인민을 통치한다.

 

중국 공산당 핵심 조직인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일상적 통치기구로, 그 중 한 명이 총서기가 되어 공산당을 대표한다. 거의 대다수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국가 주요 기관의 대표로서 당과 국가를 인적·조직적으로 결합하는 당-국가 체제를 구현하고 있다.

 

 

 

 

 

 

 

 

 

 

2강. 엘리트 정치의 운영 원리

 

 

 

 

 

 

 

 

중국의 엘리트 정치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권력 운영으로 권력 기구를 구성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권력 승계, 셋째는 권력 공고화이다.

 

 

 

 

 

 

이어지는 강의들에서 자세한 내용이 나오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3강. 엘리트 정치의 유형

 

 

 

 

 

 

 

중국의 엘리트 정치를 위의 기준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인 지배 체제'와 '원로 지배 체제' 그리고 '집단 지배 체제'이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마오쩌둥의 시대는 일인 지배 체제.  그의 권위는 법과 제도가 아니라 개인적 카리스마에서 나온다. 당 위에 군림하며 다른 지도자들과 실질적 군신 관계에 있었던 그는 '黨上 皇帝'라고 불릴만 하다. 지금도 마오쩌둥은 중국인의 영원한  '마오 주석' 이다.

 

 

 

 

 

 

 

 

 

덩샤오핑의 시대는 원로 지배 체제.  중국에서만 유일무이하게 출현한 원로 지배 체제는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

 

 

 

 

 

 

 

 

문화 대혁명으로 숙청당했던 혁명 원로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후 모두 복권되었다. 복권 당시 70~80대 였던 원로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공식 정치를 맡겼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혁명 원로들이 장악했다.  인사권과 주요 국가 방침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비공식 정치를 실행했다. 

 

흔히 덩샤오핑 시대라고 하지만, 원로 지배 체제는 8대 원로들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었다. 8대 원로들 간에는 권력 관계가 평등했지만, 공식 기구의 지도자들과는 군신 관계를 이루며, 배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마오쩌둥과 대장정을 함께 했던 혁명 원로들이 법과 제도 밖의 막후 정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혁명 원로들이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 역사의 행운이 되었다. 

 

아무런 공식 직위도 없었던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와 소련 붕괴로 개혁 ·개방이 좌초될 위기에 빠진 1992년 89세의 나이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개방 정책을 일으켜 세웠다.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  덩샤오핑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집단 지도 체제이다. 권력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있고, 앞의 두 체제와는 달리 법과 제도에 따라 권력이 획득된다.

 

 

 

 

 

 

 

 

집단 지도이므로 권력은 내부에서 분점되고, 정책은 협의와 타협에 의해 결정된다.  지도자들 간의 관계는 평등하므로 1인 체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집단 지도 체제는 권력의 분점과 당내 민주를 특징으로 한다.

 

 

 

3강 종합

 

중국은 국가 수립 이후 1인 지배 체제 → 원로 지배 체제 → 집단 지도 체제로의 권력 변화를 겪었다. 

 

1인 지배 체제와 원로 지배 체제의 권력은 혁명기에 획득된 개인의 카리스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덩사오핑 시대 이후 수립된 집단 지도 체제는 법과 제도에 따라 권력이 선출 · 운용되므로써 중국의 권력 승계를 안정화 시켰다.

 

 

 

 

 

 

 

 

 

4강. 통치 엘리트는 누구인가?

 

 

 

 

 

 

 

 

 

개혁·개방 40년만에 중국은 1인당 국내 총생산 (GDP/人)이 약 50배 증가했다. 인구도 10억에서 14억으로 늘어났다.

 

중국 개혁·개방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의 비전과 리더쉽이 첫 손에 꼽히지만, 그 계획을 실행 가능하게 했던 것은 중간층 지도자인 '통치 엘리트'이다.

 

 

 

 

 

 

 

중국의 통치 엘리트는 공산당에 입당한 순서(黨齡)와 혁명 경험에 따라 세대별로 나눌 수 있다.

 

1세대는 혁명의 최고 지도자로들로, 1890년대 생들이다.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 수립 이후 1976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2세대는 1세대와 혁명을 같이한 야전 지도자들이다. 1900년대 생들로 문화 대혁명 때 마오쩌둥에게 숙청당했다가 이후 복권한 원로들이다. 개혁 · 개방을 주도했다.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원로 정치의 주역들이다.

 

1910년대 생들도 있지만 불운하게 낀 세대로 2.5 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2세대의 원로 정치에 의해 실권 없는 공식 직위를 가졌다가 사라졌다.

 

 

 

 

 

 

 

 

 

3세대는 1920년대 생으로 1949년 이후 발탁되어 소련 유학을 다녀온 엔지니어 출신 엘리트들이다.  1992년부터 개혁·개방을 주도하고 이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간 중국을 이끌었다.

 

 

 

 

 

 

 

 

1940년대 출생으로 문화 대혁명 이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일선에서 활동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발탁된 이공계 출신 기술관료들이다.  개혁 · 개방이 가져온 문제점들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 간 중국을 통치했다.

 

 

 

 

 

 

 

 

5세대는 건국 이후 출생한 1950년대 생들이다. 청소년기 때 문화 대혁명을 겪고 하방운동에 의해 농촌과 오지 등에서 중국의 어려운 현실을 직접 체험했던 세대들이다. 문화 대혁명 이후 대학을 졸업했다.  2012년부터 중국을 이끌고 있다.

 

 

1992년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10년마다  최고 지도자들이 교체된다.  중국의 고위 공직자들은 5년 임기 2회 연임이 법과 제도에 규정되어 있다.

 

2022년 새로운 총서기를 선출한다. 1960년대 생들이 6세대의 지도자로 부상할지가 최대의 관심사이다.

 

 

 

 

 

 

 

 

 

노동자 · 농민을 전면에 내세운 사회주의 국가에서 엘리트 통치가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통치 엘리트들은 자연스럽게 부상한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의도적으로 양성한 결과물이다.

 

개혁·개방 정책의 4대 방향은 시장화, 사유화, 개방화, 분권화이다. 목적은 경제를 활성화하여 중국 인민들을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이 과제를 맡을 것인가 였다.  혁명 세력들은 나이도 많았을 뿐 아니라 수행할 전문 지식도 없었다.  개혁·개방을 결정하고 주도한 것은 원로 정치 체제였지만, 그들은 동지였던 수많은 혁명 원로들을 모두 퇴출시켰다.  

 

평화로운 간부 교체를 위해 퇴출된 혁명 원로들에게는 정치·경제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중국의 태자당이다. 혁명 원로들의 자제들이 대거 당과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문화 대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과 혁명 동지들이 차지했던 자리가 말끔히 비워지자 이들 직위를 수행할 새로운 인물들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지도자 후보 양성 정책이 추진되었다. 

 

지도자 후보의 기준은 연소화, 지식화, 전문화, 혁명화였다. 1978년 당시 50대를 기본으로 하되 40대로 보충했다. 이들은 모두 대졸자였다. 당시 대졸자는 중국 인구의 1% 미만이었다.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가져야 했으며, 개혁·개방을 지지해야 했다.  문화 대혁명의 주도자나 수혜자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지도자 후보 양성 정책의 결과 1992년 14차 당대표 대회를 기준으로 중국은 기술 관료 시대를 맞게 되었다. 통치 엘리트들의 70% 이상이 기술관료였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이 이끈 원로 정치 체제가 기획하고 추진하였지만, 현장에서 이를 수행하고 공공히 다진 것은 정책적으로 양성된 수많은 기술 관료들이었다.

 

중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 뒤에는 기술 관료들 - 통치 엘리트가 있다.

 

 

 

 

 

 

 

 

2012년 18차 당대회 때 등장한 시진핑 시대는 인문사회형 지도자들이 이끌고 있다. 일반적인 국가는 인문사회형 80%와 기술관료 20%의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초고속의 경제 성장을 이룬 중국도 이제 일반적인 국가 스타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도 모두 엘리트들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청화대 박사 학위를, 리커창 총리는 베이징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외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석사 출신들이다.  엘리트 양성 정책은 엘리트 통치의 화수분으로 기능하고 있다.

 

 

 

 

4강 종합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전문 지식을 갖춘 새로운 인재를 필요로 했고, 엘리트 양성 정책이 실시되면서 수많은 기술 관료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정책이 위기를 극복하고 40년 간 지속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당-국가의 요직에 넓게 포진한 엘리트 전문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시대 이후 1992년부터는 원로 지배 체제가 종식되고 이들 기술 관료에 의한 집단 지배 체제가 확립되어 법과 제도에 따라 권력이 승계되는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현재 중국은 기술 관료에서 인문사회형 관료 시대로 바뀌고 있지만 공산당 영도의 원칙과 공산당의 엘리트적 성격이 유지되는 한 엘리트 정치는 중국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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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곡

 

 

 

 

 

 

너는 이제 연옥에 도착했다.

오르막길로 빙 둘러쳐진 비탈이 보이느냐?

거기 벌어진 틈이 바로 그곳의 문이다. (49~51)

 

 

 

겸손을 상징하는 갈대 띠를 두르고 가파른 절벽을 힘겹게 올랐던 단테의 눈 앞에 연옥의 문이 보인다. 사실은 성녀 루치아가 잠든 단테를 안아 올려 놓은 것이다.

 

문 앞에는 천사 문지기가 앉아 있고, 그 아래로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반들 반들 닦인 첫 번째 계단은 죄를 비추는 양심을, 거칠고 검붉은 두 번째 계단은 죄의 고백을, 벌겋게 이글거리는 느낌의 세 번째 계단은 형벌을 달게 받으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주11)

 

 

 

 

 

 

 

 

그러자 그는 칼 끝으로 내 이마에

일곱 개의 P자를 그었다.

"들어가거든 이 상처를 씻어 버려라!" (112~114)

 

 

천사가 단테의 이마에 그은 일곱 개의 P는 연옥의 산에서 씻어내야 하는 일곱 가지의 죄이다. P는 라틴어 Peccato, 죄를 의미한다.  기독교도가 아니어서 조심스럽지만, 단테의 P는 야훼가 카인에게 새겨준 표식을 떠오르게 한다.  이 표식은 추방의 낙인이 아니라 아무도 카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야훼의 보증이다.

둘 다 희망을 품고 있다.  

 

 

 

 

 

 

 

 

 

단테는 일곱 개의 산허리를 돌며 연옥의 산꼭대기로 올라야 한다. 하나씩 순례를 마칠 때마다 천사가 나타나 다음 길을 알려 주면, 이마의 P도 하나씩 사라진다.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지옥의 문과 달리, 연옥의 문은 희망과 함께 들어간다.

 

 

 

 

 

 

 

 

 

 

10곡

 

 

 

 

 

 

 

 

첫 번째 둘레에는 오만한 죄를 지은 영혼들이(100) 바위를 이고 구부린 채 걷고 있다.

 

 

 

 

 

 

 

 

 

 

11곡

 

 

 

오만의 죄를 지은 영혼들은 세상의 명성에 취했던 자들이다. 고대 희랍에서도 신들의 응징은 인간들의 오만, 휘브리스(Hubris)에 가장 가혹했다.

 

 

속세의 명성이란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길 저 길로 옮겨 다니다가

방향이 바뀌는 대로 이름도 바뀌게 되는 법이오. (100~102)

 

 

 

 

 

 

 

 

 

12곡

 

 

 

올림푸스의 신들과 겨루려다 징벌을 받은 희랍 신화 속 불행한 인간들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항한 구약 성경 속의 여러 인물들이 첫 번째 둘레에서 그 오만의 죄를 참회하고 있다. 

 

『신곡』을 읽다 보면 기독교 이외에는 아무런 사상도 없었을 것 같은 중세에 대한 통념이 깨어진다. 르네상스의 새벽이 밝아 오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서양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조화 혹은 투쟁의 역사라고 하더니, 이 방대한 서사시가 실증하고 있는 듯하다.

 

 

"네 이마 위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P자들이, 방금 하나 지워졌듯이,

앞으로 완전히 지워질 때

 

너의 발길은 선한 희망과 함께

더 가벼워질 것이다. 오르는 길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질 것이다." (121~126)

 

 

 

첫 번째 둘레의 순례가 끝나자 천사가 나타나 날개로 이마를 스치고, 다음 둘레로 오르는 계단을 알려 준다. 단테는 몸이 가벼워 짐을 느끼는데, P자 하나가 모르는 사이 지워졌다.

 

 

 

 

 

 

 

 

 

13곡

 

 

 

두 번째 둘레는 질투의 죄(38)를 정화하는 곳이다. 조금 잔인하게도 이 영혼들의 눈썹은 모두 철사로 꿰매져 있어 앞을 보지 못하고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4곡

 

 

 

"나의 피는 언제나 질투로 부글부글 끓었소.(82)"라고 말하는 귀도 델 두카가 단테의 요청에 따라 긴 이야기를 한다.  정쟁에 휘말렸던 두카는 13세기 이탈리아의 끝없는 혼란과 투쟁을 개탄한다.

 

 

자 토스카나 사람이여, 이제 그만 가 보시오!

나는 이제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울고 싶소.

우리 얘기가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오. (124~126)

 

 

이탈리아의 13세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21세기의 대한민국 독자가 읽기에 지치도록 되풀이 되는 이탈리아의 정쟁은 사실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 다만 해방 이후 우리 정치사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신곡』 같은 작품에 묘사되어 있다면, 지금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지옥이나 연옥에서 벌을 받고 있다면, 그 재미는 상상이 간다. 전두환이 주데카에서 꽁꽁 얼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당대의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런 쾌감에 이 서사시에 열광했을 지도 모르겠다.

 

 

 

 

 

 

 

 

 

15곡

 

 

 

"자비를 베푸는 자들은 복되도다."와 "질투를 이긴 자여,

즐거워 하라!"라는 노랫소리가 뒤에서 울려왔다. (38~39)

 

 

둘째 둘레의 순례가 끝나고 세째 둘레로 오르는 계단을 천사가 알려 준다. 이마의 P도 하나 더 지워졌다.

 

 

 

 

 

 

 

 

 

16곡

 

 

 

세 번째 둘레에는 분노의 죄(24)를 지은 영혼들이 먹구름 같은 연기에 휩싸여 걷고 있다.  단테는 보이지 않는 영혼에게 세상이 사악해진 원인을 묻는다. 영혼의 답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섭리의 문제가 담겨 있다.

 

 

"형제여 세상은 눈이 멀었소.

당신이 살던 세상은 분명 눈이 멀었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떤 예정된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모든 원인을 하늘에 돌리려고 하오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의 자유의지는

없어질 것이며, 선에 대한 기쁨도

악에 대한 슬픔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오.

 

하늘이 사람들의 행동을 주관하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오. 모두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하는

 

스스로의 빛을 지니고 있소. 자유의지는,

처음에는 하늘과의 갈등으로 상처를 입고 약해졌지만,

잘 키우기만 하면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소.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오.

사람들의 마음을 창조한 더 고귀한 성품에 속해 있지요.

하늘도 이것을 넘어서서 통제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도

원인은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오!

이제 그 점을 잘 설명해 주겠소." (65~87)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은 자명해 보이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책임이 없고, 책임이 없다면 윤리가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라고 천진하게 물어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 때, 그 모든 것에 인간의 악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일 수가 있는가? 라고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봄직도 하다.

 

 

기원전에도 이런 고민이 있었다.  『오뒷세이아』 에서 제우스는 이렇게 한탄한다.  "아아, 인간들은 걸핏하면 신들을 탓하곤 하지요. / 그들은 재앙이 우리에게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못된 짓으로 정해진 몫 이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오. (1권 32~34)"

 

 

슬쩍 피해간 느낌이 든다. 신들이 운명을 정하지만 완벽한 그물을 짜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들린다. 그물코 사이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드나들 만하다는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신의 탓으로 인정하는 신은 없다. 아니 인간 사회는 없다. 인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는 어떤 규율도 법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물론 읽어 본적도 없고 읽어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귓결에 들은 바로는 스콜라 철학이 죽도록 씨름한 주제가 이성과 신앙의 조화이다.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증명했다고도 믿었으니 그 사유가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아퀴나스가 끝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성 앞에서 펜을 꺾으면서 스콜라 철학은 종말을 맞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콜라 철학은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이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가 없음을 확신하며 이성의 빛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근대의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찾았을까. 인간의 자유의지에 족쇄를 채우고 나선 것은 근대의 과학이다. 뉴턴이 완성한 17세기 과학적 사유의 성과는 "하나의 질서 잡힌 닫힌 우주" 즉 cosmos 이다.  자연이 인과 법칙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다. 이 법칙에는 신의 법칙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칸트는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 양쪽 모두를 구해내기 위해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나누었다. 이론 이성은 과학을, 실천 이성은 윤리학을 구하는 빛이 되었다.

 

현대는 어떨까?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또 다른 시험에 든 듯하다. 뇌과학에 대한 대중 강연을 들으면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선택이 사실은 호르몬의 분비에 의한 사후적 선택이라는 등의 알송달송한 말들을 한다.

 

공지능 시대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한층 어렵게 만든다. 입력한 대로 출력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빅 데이터로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AI 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주체가 될까. 신과 인간 사이의 자유의지 문제는 인간과 AI 사이의 자유의지 문제로 치환될 지도 모르겠다. AI 시대가 썩 반갑지도 않고,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힘들고, 아는 것도 없지만,  많은 영화들이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를 보면 머리가 복잡해 진다.

 

 

 

 

 

 

 

 

 

 

17곡

 

 

 

 

네 번째 둘레에는 태만의 죄를 지은 영혼들이 부리나케 달리고 있다.  선을 사랑했으나 태만하여 이행하지 못한 영혼들이다.  여기서 베르길리우스는 두 가지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자연적인 사랑은 그르치는 일이 없지만

이성적인 사랑은 나쁜 목적을 지니거나

넘치거나 모자라서 잘못되는 경우가 있지.

 

사랑이 첫째의 선을 똑바로 향하고

둘째의 선을 스스로 조절하면

사악한 쾌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악으로 기울거나

넘치거나 모자라게 선을 추구할 때

피조물은 창조주의 일을 거스르게 된다.

 

사랑이란 사람들 안에 자리하는

모든 덕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94~105)

 

 

 

 

 

 

 

 

 

 

 

18곡

 

 

 

 

단테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을 구분하는 법을 묻는다. 베르길리우스는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답한다. 여기서 이성의 빛에 대한 단테의 사유가 베르길리우스의 입을 빌려 펼쳐진다. 

 

 

 

"나는 이성이 보는 만큼만

설명할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신앙의 문제니,

베아트리체를 기다려라.

 

인간의 실체적 형상은 물질과 떨어져 있으나

동시에 물질과 결합되어 있기도 하며,

자체 내에 이성적 능력을 함유한다.

 

이는 그대로는 파악되지 않고 오직

나무의 생명이 푸른 잎으로 증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작동과 효과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성의 근본 규칙이

어디서 오는지, 원초적 욕구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하며,

 

마치 꿀벌이 꿀을 만드는 본능을 갖고 있듯이

사람들도 그런 규칙과 욕구를 안에 지니고 있을 뿐.

그 근본적인 의지는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의지들은 이 근본적인 의지에 부합하고,

사람들은 충고하는 이성의 타고난 능력을 지녔으니

합의를 나오게 하는 문턱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좋고 나쁜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본 원리다.

 

이성의 깊이를 실증한 사람들은 이러한

타고난 자유를 알았기에

세상에 윤리를 남겼다. 이제

 

사람 안에 타오르는 사랑은 모두

필요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자.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지탱할 힘을 아직 지니고 있으니,

 

이러한 고귀한 힘을 베아트리체는

지유의지라고 알고 있을 터이니, 그분이

너에게 이런 말을 하거든 잘 명심하여라!" (46~75)

 

 

 

 

 

<아테나 학당 中. 라파엘로>

 

 

 

 

형상과 질료(물질)가  하나로 합쳐져서만 드러난다고 하는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Usia 개념과 비슷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형상은 이데아의 세계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대하고 눈앞의 사물에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일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스콜라 철학은 12세기에 새롭게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완성된다. 잘은 모르지만 『신곡』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그리고 단테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이 드러나는 듯하다.

 

 

 

 

 

 

 

 

19곡

 

 

 

 

다섯 번째 둘레에는 탐욕의 죄를 지은 영혼들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

 

 

 

탐욕은 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망쳐 버렸고

사랑 없는 삶은 헛된 것이었소. (121~122)

 

 

 

 

 

 

 

 

 

20곡

 

 

 

 

 

 

 

 

 

프랑스의 카페 왕조를 개창한 위그 카페가 유럽의 탐욕스러운 군주들을 개탄한다. 

 

 

늙어 빠진 탐욕의 암늑대여, 너 하느님의 심판을 받길! (10)

 

 

 

<지옥편> 1곡의 검은 숲속에서 단테를 막아 선 세 마리의 짐승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처음으로 나오는 부분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와 EBS 강의의 자료 화면이 다르다. 같은 강사의 강의여서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20곡 10행에 의하면 암늑대는 음욕이 아니고 탐욕의 상징이다.

 

 

 

 

 

 

 

 

21곡

 

 

 

 

다섯 번째 둘레에서 순례자는 베르길리우스를 흠모하는 로마의 시인 스타티우스를 만난다.  스타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를 "나의 어머니, 내 문학의 유모" 라고 찬양한다.

 

스타티우스는 죄를 모두 씻어내고 영혼이 깨끗해 졌는데, 이때 온산이 진동한다.

 

 

 

이 산의 진동은 어떤 영혼이 깨끗해졌음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세우거나

단번에 위로 올라갈 때 생깁니다.

 

오직 올라가려는 의지만이 영혼의 정화를 증명하며,

정화된 영혼은 자기 자리를 바꿀 정도로

자유로워진 의지를 갖게 되는 거지요.  (5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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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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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은 지옥편과 연옥편 그리고 천국편까지 각각 33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짜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은 모두 9곡부터 시작한다. 33과 9는 딱 보아도 3의 배수이다. 누구는 단테가 '3'이라는 숫자를 엄청 좋아한다고 말하고, 누구는 단테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3'을 신성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9곡 이후의 본격적인 이야기보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이 더 흥미롭다.

 

 

 

 

 

 

 

 

 

 

 

『신곡』의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그린 지도들은 대부분 이런 모양이다. 북반구는 땅, 남반구는 물이고, 북반구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아래로 지옥이 지구의 중심까지 깔대기 모양으로 뻗어 있다. 남반구도 원래 땅이었는데, 하늘에서 루키페르가 추방될 때 남반구를 향해 머리부터 처박혔고, 그 충격으로 땅들이 북반구로 이동하면서 남반구는 연옥의 산만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가 되었다. 단테는 루키페르와는 반대로 지옥이 있는 북반구에서 연옥이 있는 남반구로 순례를 한다.

 

 

 

 

 

 <헤리퍼드 마파 문디. 1300년 경 지도. 영국>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단테는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중세의 세계 지도는 라틴어로 'Mappa Mundi'인데, 지도의 모양을 본 따 T-O 지도라고 부른다. 

 

 

 

 

 

 <EBSi 민병권의 세계지리 퍼펙트 가이드>

 

 

 

 

세계를 일종의 원반으로 인식했고, 원반을 바다가 둘러싼 모양으로 그렸다. 위쪽이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고, 원반은 가운데 T자 형태의 강들(&지중해)에 의해 삼분되어 있다. 위쪽의 동쪽은 아시아, 아래쪽인 서쪽은 유럽과 아프리카이다. 따라서 태양은 에덴 동산이 있는 위쪽에서 떠서 지중해 너머 아래쪽으로 지는 것이다.  지중해의 가장 바깥인 지브롤터 해협은 이 세계의 끝이다.

 

만일 단테가 당대의 관념대로 TO 지도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했다면 연옥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 아래로 아래로 항해하여 도달할 수 있다. 지옥편에서 오디세우스는 이 금지된 곳을 너머 불타는 열정으로 나아가다 연옥의 산을 눈앞에 두고 파멸한다.

 

 

 

 

 

 

 

 

그렇다면 후대에 『신곡』의 세계를 이미지화한 많은 그림들이 세계를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동서남북으로 그린 것이 맞는 걸까?

 

 

지옥편 34곡에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베르길리우스가 아침과 저녁의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직도 넌 자신이 지구의 중심 저편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구나. 거기서 나는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흉측한 벌레의 털을 붙잡고 있었지.

 

내가 밑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는 네가 그곳에 있었지만,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넌 이미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모이는 지점을 지나친 것이었어.

 

우리는 이제 거대한 마른 땅으로 덮인 곳의 

맞은편 반구 바로 아래에 와 있다.

그 중심부에서 죄 없이 태어나서

 

죄 없이 산 분께서 희생하셨지.

너는 지금 주데카의 맞은편 얼굴을 이루는

좁은 공간에 발을 딛고 있다.

 

여기는 아침이지만 저쪽은 저녁이야.

털로 우리에게 사다리를 놓아 준 이놈은

처음처럼 그대로 처박혀 있단다.

 

그놈이 하늘에서 떨어진 곳이 바로 여기다.

이전에 이곳으로 우뚝 솟아 있던 땅은

그자가 무서워 바다의 너울을 쓰고

 

우리의 반구로 옮겨 왔지. 그리고 이쪽에

보이는 땅도 그자를 피하려고

이곳에 동굴을 남기고 솟구쳐 오른 것일 게다. "

 

<지옥편 34곡 106~126>

 

 

 

번역문이라 원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번역본에서는 '반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단테가 지구를 '구'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력'도 알고 있었다. 지구 중심부에 루키페르가 있고, 루키페르를 사다리 삼아 반대편으로 나왔다는 것도 '구'를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다.

 

문제는 "여기는 아침이지만 저쪽은 저녁이야" 이다. 위의 지도처럼 위쪽을 북반구(Emisperio Boreale), 아래쪽을 남반구(Emisperio Australe)로 표기하면 북(지옥)에서 남(연옥)으로의 이동은 위도의 이동이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베르길리우스가 말한 대로 "여기는 아침이지만 저쪽은 저녁이야"가 되려면 여기는 서쪽(연옥)이지만 저기는 동쪽(지옥)이기 때문에  자오선이 바뀐 것이고 따라서 태양이 순간적으로 이동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때 시차를 겪는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단테는 세계를 어떤 모양으로 인식했던 것일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유행했던 시기이니 희랍의 자연과학적 성과 역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일까?  얕은 상식으로 짜맞추어 보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

 

 

 

*추기 : 검색을 하다 보니, 중세에 이미 대지를 구형이라고 생각했다는 글들이 있다. 얼마만큼 신뢰성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TO지도가 형이상학적 지도인 반면 그 시대에도 구형에 대한 자연과학적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 지도 세계관 - 마파 문디 Mapp..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과학과 종교, 적인가 동지인가> | 연합뉴스 (yna.co.kr)

 

 

 

 

 

 

 

1곡

 

 

 

 

이제 나는 인간 영혼이 정화되고

천국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 두 번째 왕국을 노래하려 한다. (4~6)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만 있다고 한다. 연옥은 12세기 후반에 등장한 중세 최고의 '발명품' 이다.  왜 중세의 황금기에 연옥이 필요해 졌을까?

 

 

 

 

 

 

 

 

 

 

9~11세기에 걸친 노르만의 이동이 끝난 이후 중세 봉건제가 정착되고, 장원이 발달하고,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중세는 어둠에서 빠져나와 눈부신 황금기를 맞게 된다.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시기가 바로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고중세, High Middle  Age이다.

 

 

 

 

 

 

 

 

 

12세기에 유행한 빛의 건축 고딕 성당들과,

 

 

 

 

 

 

 

 

지금까지도 그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대학들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여 발전시킨 스콜라 철학 등 '중세의 위대한 유산'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원거리 무역과 금융업 등으로 부를 쌓은 신흥 상공업자가 있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힘들다. 특히 이자 대부업과 같은 금융업자는 단연코 지옥행이다.

 

전통 토지 귀족들과 권력을 다툴 만큼 성장했던 신흥 상공업자들은 부자지만 천국에 가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인문 고전 강의>

 

 

 

 

 

 

 

 

 

연옥은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 꾸준히 그 가능성이 탐색되어 왔지만 사회·경제· 종교적 변화를 바탕으로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사이에 대중화 되며 사실상 '탄생' 했다.  

 

 

 

 

 

 

 

연옥은 가능성과 희망의 중간 지대다.  죄를 씻어낼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연옥은 사면이 가능한 가벼운 죄뿐만 아니라 고백하고 뉘우쳤으나 참회할 시간이 없었던 죄를 씻는 곳이다.  

 

 

 

 

 

 

 

 

 

연옥은 공간적 의미와 동시에 시간적 의미를 갖는다. 연옥의 영혼들은 가능한 빨리 죄를 씻고 천국에 오르려 한다.  천국과 지옥은 무시간의 영원이지만, 연옥은 잠깐 머무르는 시간성을 갖고 있다.

 

 

 

 

 

 

 

정죄의 시간을 단축해 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 즉 대도이다. 피렌체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들의 르네상스 문화에는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한 성당 건립과 예배당의 제단화 등이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연옥에 있는 친지들의 죄를 빨리 씻어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인문 고전 강의>

 

 

 

 

대도의 정점은 아마도 16세기 교황청의 면벌부 판매일 것이다. 면벌부를 정조준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연옥을 그저 지어낸 제 3의 거처일 뿐이라 격렬히 비판하였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기도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개신교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않지요?^^;;)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sootax.co.kr)>

 

 

 

 

 

막 대중화되던 연옥을 널리 퍼뜨린 것은 단연 단테의 『신곡』이다. 막연한 이미지로 유포되던 연옥을 가장 숭고하고 가장 고귀하게 표현함으로써, 구원을 갈망하는 중세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단테가 의도한 대로 Comedia, 기쁜 소식이 된 것이다.

 

 

 

 

 

 

 

 

 

 

 

 

 

부와 천국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든 연옥은 서구 기독교 세계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정신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2곡

 

 

 

하늘의 뱃사공은 고물에 서 있었는데,

몸에 축복이 새겨져 있는 듯 보였다.

수백의 영혼들이 배 안에 앉아 있었다. (43~45)

 

 

 

단테는 지옥을 관통하여 연옥에 왔지만,  죽은자들의 영혼들은 모두 천사가 인도하는 배를 타고 연옥의 해안에 당도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편 34곡에서 좁은 틈새를 통해 지상으로 나오며, 연옥편 1곡에서는 연옥의 입구를 지키는 한 노인을 만나 그의 지시대로 해안가로 내려와 겸손을 상징하는 갈대를 꺾어 단테의 허리에 띠를 맨다.

 

이렇게 해안가에서 단테는 다른 영혼들과 함께 연옥의 순례를 시작한다.

 

 

 

 

 

 

 

 

 

3곡

 

 

 

성스러운 교회를 능멸하다 죽은 사람은

삶의 끝에서 회개한다고 해도

오만하게 보내 시간의 삼십 배를

 

이 절벽 밖에서 떠돌며 머물러야 하오.  (136~139)

 

 

 

연옥은 바다 한가운데에 불쑥 솟은 산의 형상이다. 연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순례자는 산기슭으로 향한다. 가파르게 서 있는 절벽들 밖에는 연옥으로 오르지 못하는 영혼들이 떠돌고 있다.

 

 

 

 

 

 

 

4곡

 

 

 

험준한 벼랑들이 양쪽에서 우리를 죄었고

아래의 바닥은 우리의 손과 발을 모두 원했다. (32~33)

 

 

 

 <연옥의 해안가에서 가파르게 솟아 있는 절벽을 연상시키는 이탈리아 친퀘 테레>

 

 

 

 

절벽을 힘겹게 기어오르다 보니 바위 뒤 그늘 속에 숨어 게으름을 피우는 영혼들이 있다. 절벽이 얼마나 힘겨운지 4곡에서 8곡까지가 절벽을 오르며 겪는 일들이다.

 

4곡에는 태양의 위치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태양이 왼쪽에서 빛나고 있었다."  연옥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뜰 무렵이었으므로 말하는 시점은 오전이다. 북반구에서 동쪽은 오른쪽인 반면, 남반구에서 동쪽은 왼쪽이다. 연옥이 남반구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근거로 사람들은 연옥을 남반구로 그린 것일까?  

 

 

 

 

 

 

 

 

 

5곡

 

 

 

나에 대한 당신의 너그러움이 파노에 전해져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여

내 죄가 곧 씻기도록 해 주시오. (70~72)

 

 

절벽을 기어오르던 영혼들이 단테에게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보고 떼를 지어 몰려온다.  단테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때, 자신들의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하여 대도를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5곡에 이어 6곡 초반에 걸쳐 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간곡히 부탁한다.

 

 

 

 

 

 

 

연옥이 대중에게 미친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기도보다 더 효과가 크다고 믿어졌던 면벌부가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도 알 만하다. 루터가 면벌부 판매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면벌부를 기쁘게 샀다고 하는 강의도 들은 적이 있다. 돈이 땡그랑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천국이 열린다면 누가 돈을 아끼겠는가.

 

 

 

 

 

 

 

6곡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빛이신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선가 분명 기도가

하늘의 율법을 꺾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쉼 없이 제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것은 저들의 쓸데없는 망상이 아닌지요? 혹시

제가 선생님 말씀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지요?"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맞다. 그러나

건전한 정신으로 잘 생각해 보면

저들의 희망도 헛된 것이 아니란다.

 

여기에 체류하는 자가 채워야 할 것을

사랑의 불이 어느 순간 완성시켜 준다고 해서

심판의 꼭대기가 구부러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내가 바로 그 점을 확실히 했는데,

죄는 기도로 씻을 수 없단다.

기도가 하느님께 닿지 않기 때문이야. (28~42)

 

 

연옥과 구원에 대한 논란을 드러낸 걸까? 연옥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거부하기 이전에도 여러 이단 종파들에 의해 부인되었다.  가톨릭이 연옥을 공식화한 이유 중에는 이단에 대한 탄압도 있다고 한다. 단테 시대는 연옥이 막 대중화 되기 시작할 무렵이라 다양한 의견이 있었을 것이다. 옮긴이 주에도 '논쟁을 일으키는 대목'이란 설명이 있다.

 

 

 

 

아, 비천한 이탈리아여, 고통스러운 곳이여,

사공도 없이 폭풍우에 휩쓸린 배여,

부패와 싸움으로 젖은 곳이여, (76~78)

 

 

지옥에서도 늘 현실 정치를 비판했 듯이, 단테는 연옥에서도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염려한다. 『신곡』이 사후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사후 세계를 빌려 현실의 이탈리아를 반성하고 있다는 평은 서사시 곳곳에서 입증된다.

 

 

 

 

 

 

7곡

 

 

 

밤의 어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우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이 어둠이 우리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55~57)

 

 

연옥은 빛과 함께 올라야 한다. 밤이 되면 영혼들은 한 발자국도 넘어 갈 수 없다. 어둠이 의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휴식 속에 노래를 부르는 영혼들을 보여주며 단테는 이탈리아와 독일 등 당대 유럽의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8곡

 

 

 

소르델로가 말했다. "저 두 천사는 이 계곡에 있는

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려고 마리아의 품에서

왔지요. 뱀이 곧 올 테니 보게 될 겁니다." (37~39)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그 뱀이다. 밤에 의지가 약해지는 것은 뱀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허약한 인간들의 의지를 지켜주기 위해 천국에서 천사 둘이 내려와 불침번을 선다.

 

 

 

 

 

 

 

1곡에서 8곡까지는 연옥의 문에 도달하기 위해 해안가에서 산기슭으로 향하여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긴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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