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에 관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고발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변론을 전개한다.  고발장이 제출되지는 않았지만 훨씬 심각하고 위협적인 '오래된 고발'에 대해 먼저 변론을 하고, 그 다음에 이 재판정에 서게 된 직접적인 고발에 대해 변론하겠다는 것이다. 


오래된 고발, 즉 악의적 소문이야말로 이 직접적 고발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아테나이인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비방하게 된 진짜 이유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공식 고발보다 오래된 고발에 대해 힘을 쏟아 변론한다. 1권 18a~24b가 오래된 고발에 대한 항변 내용이다. 



24b부터는 멜레토스를 비롯한 고발자들에 대한 직접적 항변이다.  소문 즉 유령같은 고발자들에 대한 항변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나온 멜레토스를 상대로 특유의 논박술을 펼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즉 변증술이 무엇인지 논박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모른다고 해도, 여기 나오는 멜레토스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어떤 스타일인지 조금은 눈치챌 수 있다. 


사실을 말하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뭔가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말장난에 빠졌다는 느낌을 뿌리 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들도 그런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비아냥거리고 때로는 대화를 중단하고 가버린다.  플라톤도 그런 것을 느꼈다는 것이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의 비방도 이와 관련이 없지는 않지 않을까?  <고르기아스>나 <국가>를 읽으면 논박 당하는 사람들의 격분이 생생히 느껴진다. 



<희랍철학 입문 4장 105~107>



거미줄에 걸려든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에 허우적 거리던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와 다른 점은 그때 그때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런 고약한 방법을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꼬치꼬치 캐묻는 방법 즉 '귀납적 논구'를 통해 합의된 하나의 의미 즉 '보편적 정의'를 규정했다는 것이 철학사에 남긴 소크라테스의 업적이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혹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말은 소통을 교란시키고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올바름'이라는 말에 각자 다른 함의를 갖고 있다면 공동체가 어떻게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목소리가 큰, 데마고그가 주장하는 올바름에 휩쓸리다 공동체의 위기를 맞게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기원전  5C 이후의 아테나이가 그러했다. 








소크라테스가 정식으로 고발된 내용은 두 가지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 믿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논박술로 멜레코스의 입을 막아버림으로써 이 고발의 내용을 간단히 처리한다. 소크라테스로서는 이 내용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가 고발된 진짜 이유는 오래된 고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기와 비방', 일종의 괘씸죄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소장에 근거해 오히려 멜레토스가 불의함을 밝힌다.  논박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아테나이에서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오직 소크라테스 뿐이고, 그것도 소크라테스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잘못은 훈계해야 하는 것이지 법정에 세우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11강은 23c~26c입니디ㅏ. 




12강. 나라가 믿는 신들에 대하여 





신에 관한 문제도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방식으로 마무리 한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에게 기소장의 의미를 분명히 하라고 추궁한다.  자신이 국가가 믿지 않는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문제인지, 아예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인지를 밝히라고 한다. 


"후자를, 즉 당신이 전적으로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26d)






여기서 멜레토스는 자기모순에 걸려 든다.  강유원 선생이 제시한 번역본에서 영들은 희랍의 신 즉 제우스나 아테나 등의 신을 가리키고, 영적인 것들은 정령, 신령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희랍 신화에서 정령은 신의 자식들로 묘사된다.  멜레토스도 신령들은 신들이거나 신들의 자식들이라고 인정한다. 


멜레토스의 고발장은 "소크라테스는 신들을 믿지 않지 않으면서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 (27a) 라 말하고 있다고 논박 당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얼렁뚱땅 고발장의 '새로운' 영적인 것들에서 '새로운'을 빼버린다. 멜레토스가 어리숙하게 소크라테스가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진짜 쟁점이 되어야 할 나라가 믿는 신과 새로운 신의 대립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사실, 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멜레토스의 고발장 내용처럼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 많은 항변이 필요하지 않으며, 이것들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에 대해 많은 미움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 있다는 게 진실이라는 건 잘 알아 두세요. 또 나를 잡을 게 바로 이겁니다. (진짜 나를 잡게 된다면 말입니다.) 멜레토스도 아뉘토스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비방과 시기입니다. 그것들이 분명 다른 많은 훌륭한 사람들도 잡았고, 또 내 생각에 앞으로도 계속 잡게 될 겁니다. 그 일이 내게서 멈추게 되지 않을까 무서울 일은 전혀 없습니다." (28a~28b)




그런데 강유원 선생은 여기서 '나라가 믿는 신'과 '새로운 영적인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  소크라테스의 항변은 충분치 않을 뿐더러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강의를 들을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유원 선생이 살짝 오독 아니면 의도적으로 누락하는 부분이 있어 보였다.  가령 노새는 믿으면서 말과 나귀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예시는 영적인 것들은 믿으면서 그 영적인 것들의 부모가 되는 영 즉 신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 모순임을 밝히는 결정적 언급인데도, 우리가 숲속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낀다고 해서 거기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영적인 것은 영과 별개라고 설명한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만 읽고 있고, 그것도 다른 번역본으로 읽고 있고, 강유원 선생은 플라톤 대화편들을 두루 연구한 끝에 강의를 하고 있어서 내가 그 의미를 다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왜 유독 '다른 신'을 강조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1강에서 이 강독의 목적은 민주정을 탐색하는 데에 있다고 뚜렷하게 밝혔고, 소크라테스가 민주정을 비판하는 지점은 민주정이라는 제도와 그 법을 작동시키는 관습들이 타락했을 때 민주정 자체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믿는 신은 이 '관습'들의 핵심이므로, 아테나이 시민들과 신이 전통적으로 맺어온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고, 이를 위해 새로운 신적인 것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희랍 철학 입문>에서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언급한 부분이 있어 덧붙여 놓는다. 이 신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의 해석은 13강과 14강에서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희랍 철학 입문 5장 112~114>



<희랍 철학 입문 5장 112~115>



*12강은 26c~28b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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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자신에 대한 규정과 세 집단과의 대화




이 대화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이 이 부분이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을 얻게 된 경위, 그리고 이를 검증 혹은 논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에서 지혜롭다고 평판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무지를 확인하고,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카이레폰이라는 사람이 델피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라는 신탁을 받아 온 것이 이 모든 것의 발단이다.  소크라테스가 확신하는 단 하나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도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오랜 고뇌 끝에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검증해 보기로 하고, 지혜롭기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집단은 정치가들이다.  정치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다닌 끝에 소크라테스가 내린 결론은 그들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조용히 알아 낸 것이 아니라 이 정치인들을 아포리아로 몰고 가는 논박 끝에 그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대면하게 압박한다. 이 논박술을 엘렌코스라 한다. 





논박을 당한 사람들은 수치심에 분노한다. 그런데 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것이다.  아테나이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가 드러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만든 소크라테스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권한다.  사실은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생각했다 혹은 보였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배움의 시작이다.  따라서 화가 난다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테나이인들은 그 분노를 소크라테스에게 돌렸고 그것이 그를 법정에 세운 근본적 이유이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다시 <변론>으로 돌아가서,  소크라테스가 찾아간 두 번째 집단은 시인들이다. 당대 아테나이의 시인은 일종의 시민 교육을 담당한 선생이다.  그들 역시 정치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멋진 말을 많이 지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 논박술을 통해 드러났다. 






시인들은 자각적으로 시를 짓는 다기보다는 점쟁이가 신이 들려 예언을 하듯 그렇게 멋진 말들을 쏟아냈을 뿐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집단은 장인들이다.  기술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실용적 지식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이유로 자신이 다른 중대한 일들, 즉 정치적 일들에 대해서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들 역시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무지가 드러난다. 


아테나이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세 집단을 이렇게 하나 하나 깨고 다닌 소크라테스가 미움을 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것을 드러낸 소크라테스를 증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9강은 1권 20c~22e에 해당합니다. 







10강.  무지의 자각과 캐물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미움을 받고 있고, 그것이 상당한 위험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논박을 통해 신탁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실은, 여러분, 신이야말로 진짜 지혜로우며 이 신탁을 통해서 인간적인 지혜는 거의 혹은 아예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신은 소크라테스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내 이름은 그냥 덧붙여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를 본으로 삼으면서 말이죠. 마치 "인간들이여, 그대들 가운데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자기가 지혜와 관련해서 참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3a~23b) 


여기서 강유원 선생이 주목하는 것은 '인간적인 지혜'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자이다.  인간적인 지혜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는 모른다에서 출발하는 겸손한 자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신적인 지혜를 가졌다고 자만하는 것이고 그런자야말로 실로 무지하고 오만한 자이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말장난이 있다. 이 교묘한 말은 얼만 전 죽은 도널드 럼스펠드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냉전 이후 미국이 일으킨 재앙적인 전쟁을 이끌었던 강성 매파이다.  여하튼 그가 사용한 known known, known unknown, unknown unknown은 이후 널리 회자되었다.  우리말과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해 보면,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것, 모르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정신분석의 무의식을 빗대 보자면 unknown known까지 보탤 수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소크라테스의 인간적 지혜는 known unknown이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아테나이 유명인들은 unknown unknown이다.  철학자는 중간자이다.  무지한 인간과 완전한 앎을 가진 신 사이에 있다.  무지한 자(unknown unknown)는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다. 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신(known known)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미 지혜로우니까. 여기서 사랑은 에로스이고, 에로스는 갈망이다.  무지에 대한 지라는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적인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philo -sophia 를 하는 사람이다. 



"신들 가운데 아무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게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렇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어느 누구라도 지혜로운 자라면 지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지한 자들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기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거든요. 즉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향연. 204a>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한다.  무지에 대한 자각이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관습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게 하지만, 잠깐만 멈추어 되돌아 보면, 그리고 가만히 캐물어 보면 놀랍게도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놀라움, 세계가 낯설어 보이는 것이 반성하고 탐색하게 만드는 힘이다. 







신탁의 의미를 이해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사람들 또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테나이 민주정을 탐욕과 혼란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이 내린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평생을 신에 대한 이 봉사에 바침으로써 가난해 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미움과 비방을 받게 되었다.  아테나이인들의 대다수는 소크라테스의 캐물음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고 놀라기보다는 분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아테나이인들은 신에 대해 재물을 바치고 정해진 의례를 치름으로써 신 또한 당연한 대가로 은혜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신은 봉사의 대가로 그에게 가난을 주었다.  아테나이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가진 혐의 중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에는 상반된 신 개념에 대한 위기 의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거래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숭배와 은혜의 맞바꿈은 쾌락주의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다. 근대의 공리주의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종교를 거래가 아니라 봉사로 받아들인 것은 아테나이 사회에 만연한 쾌락주의(헤도니즘)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 10강은 23a~23c 입니다.  




추기 : 9강 및 10강과 관련 거스 리의 <희랍 철학 입문>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을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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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첫머리




강독은 7강부터 본문에 들어간다. 나는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으로 간행된 강철웅 번역본을 가지고 있어서 이 책으로 읽으며 강의를 들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세계 공통으로 스테파누스 쪽수를 많이 표기하기 때문에 번역본이 달라도 별 불편함은 없다. 요즘 나온 번역본들은 전공자들이 희랍어 원전으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든 읽는 데에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 




<국가. 서광사. 박종현 번역>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첫머리부터 매우 불온하다.  피고발인으로 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인 여러분!"을 부르며, 말을 시작한다. 현대의 재판 드라마라면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뒤를 돌아 '국민 여러분' 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관습을 깨고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이 호칭은 연구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논란을 던져 주었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은 소크라테스가 이 연설을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아테나이 시민 전체에게 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점이다.  읽어가다 보면 자신의 무죄에 대한 항변이 아니라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남기는 소크라테스의 유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설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대중 연설이기도 하지만 첫 대중 연설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사적으로만 대화를 해 왔기 때문이다. 



<크리톤>에는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크리톤이 탈옥을 재촉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자네가 굳이 법정에 출두해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인데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나, 재판이 이상하게 흘러가버린 것이나, 이 일이 결국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끝난 것이 우리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비겁해서 벌어진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네. 우리가 조금만 더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얼마든지 자네 목숨을 구하고, 자네는 스스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우리나 자네나 그렇게 하지 못했네." (1권 45e~46a) 


소크라테스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다. 재판정에 나오지 않아도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지 않을 수도 있었고, 크리톤의 권유대로 탈옥도 가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굳이 재판정에 나와서 굳이 도발적인 호칭과 자신이 즐겨 쓰던 논박술로 아테나이인들을 질타하고 기꺼이 사형을 받아들였다. 


강유원 선생이 꼽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를 움직이는 장치, 기구, 제도들 즉 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의 법이 아니라 이 법들의 이면에서 법들을 작동케 하는 관습에 문제를 제기했다.  법이 올바르게 작동하려며 훌륭한 관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의 현란한 수사학은 시민들을 설득하고 선동하는데 능란했지만 진실은 도외시 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 자신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대비시켜 아테나이인들을 일깨우려 하였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선 까닭은 자신의 유무죄에 대한 법리를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 재판정을 도덕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려 했다. 그가 하려 했던 말은 '부끄러운 줄 알라!'  속되게 말하면  '쪽팔린 줄 알라!' 였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곳의 말투'에 능한 사람은 소피스트이다.  소피스트들은 연설문을  써주고 이를 설득력 있게 말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돈을 벌었다.  데마고그에 휩쓸리는 아테나이의 민주정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말빨에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그리고 그 자신 소피스트라 분류되던 소크라테스가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를  '설득력'과 '거짓말' 에 능한 사람들로 규정하고 자신은 '생소함'과 '진실함'으로 이에 맞서겠다는 대립 구도를 만든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거짓과 진실이라는 도덕적 가치야말로 아테나이 민주정을 이끄는 기준이 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설득과 선동은 덕, 즉 아레테가 아니다.  올바름과 올바름에 대한 앎이 인간의 아레테이다.  


"말투가 어떤 방식인지는 문제 삼지 말고 (혹시 더 형편없을 수도 있고 더 괜찮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저 내가 정의로운 말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만 살펴보고 그것에만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재판관의 덕이고, 연설가의 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권 18a)



* <변론>은  1권 17a부터 42a까지고,  7강은 1권 17a~18a에 해당한다






 8강. 고발인들이 말한 것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색다르게 시작된다.  자신에 대한 고발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오래된 고발이고, 또 하나는 이 법정에 제출된 고발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오래된 고발에 대해 항변한다.  더 많은 내용으로 더 널리, 뿌리 깊게 퍼진 이 오래된 고발이 아테나이인들에게 선입견을 심어 주었고 이 법정의 고발도 이 선입견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실체 없는 유령과 같은 이 고발은 거짓 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짜 뉴스, 그것들을 퍼뜨리는 유투버들이 소크라테스의 고발인들이다.  오래도록 질기게 구석구석 퍼져 나간 이 소문은 소크라테스를 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 찍는다.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사회에서 신을 믿지 않는 자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위력이 남아 있는  빨갱이 프레임과 같은 것이다.  


소문은 논리적이지 않아도 쉽사리 믿긴다. 논리적이지 않아서 파급력이 큰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소문들 중 하늘과 지하의 운운은  당대의 자연철학자를 비난하는 말이고,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으로 만드는 운운은 소피스트에 대한 비난이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자연철학자를 비판하며 탐구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 사회로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다.  자연철학자는 소피스트가 아니며, 소피스트는 자연철학자가 아니다. 영역이 다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나이인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대상을 모두 투영시켜 놓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악의 덩어리다.  


소크라테스는 데마고그의 흑색 선전이 난무하는 민주정은 그 자체가 민주정 최대의 위협이라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고발장을 검토하는 것으로  논증하기 시작한다. 



* 8강은 18a~20c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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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소크라테스와 텍스트의 배경과 설정



강유원 선생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사상가들의 이상적 영웅'이다.  사상가란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시대의 과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사상가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시대의 과제와 씨름한다.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전쟁 이후의 혼란이 거듭되는 난세였다. 민주정이라는 아테나이의 체제가 이 혼란을 악덕으로 이끌었다.  민주정 자체가 그 원인이 아니라 민주정을 이용해 자신과 당파의 이익에 몰두하는 세력들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해외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무기를 만드는 장인들, 오늘날로 하면 군수업자들이 전쟁을 부추겼다. 불행히도 전쟁에 경제적 이해 관계를 가진 이 사람들이 아테나이 민주정의 핵심 세력이었으며 페리클레스의 지지자들이었다. 


민주정이란 어떤 사람, 어떤 집단의 의견이 다수의 것으로 확인되면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는 체제이다.  하지만 다수의 결정이 언제나 올바른 것도 아니고, 다수의 의견을 지지하는 것이 선한 것도 아니다.  다수가 눈앞의 이득에 열광할 때 올바름은 헌신짝이 되고,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다. 






아테나이는 그렇게 제국이 되었고, 그렇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시켈리아 원정은 27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아테나이의 제해권을 바탕으로 해상제국을 건설하여 부와 영광을 누리겠다는 집단들이 해상제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행한 원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전쟁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이 집단들이 시민들을 선동하여 민주정을 훼손하고 파괴한다고 진단했다.  소크라테스는 법을 벗어난 인민 재판식 정책 결정을 단호히 거부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나이의 패배로 끝난 후 스파르테에 의해 수립된 30인 참주정과 뒤이은 민주정의 회복 등은 탄압과 보복을 되풀이하며 아테나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다. 


소크라테스가 정면으로 대면한 시대의 문제는 바로 이 혼란이었고, 그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선동 정치로 얼룩져 버린 민주정이었다.  





5강. 소크라테스의 여러 모습들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들처럼 자연철학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이점은 뚜렷했다. 소피스트들이 어떻게 하면 나의 말로 남들을 잘 설득해서 이득을 취할까를 탐구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올바르게 살 수 있을까를 탐구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를 민주정의 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민주정의 적으로 몰아 처형하려 했고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처형을 선택함으로써 소피스트들의 외형적 목적을 달성시켜 주었지만 바로 그것으로써 민주정의 적이 소피스트임을 입증했다. 






민주정은 양날의 칼이다.  민주정을 최고의 정체로 만들어 주는 이 원칙들이 민주정을 파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정의 꽃인 isegoria, 즉 자유롭게 말할 권리는 누구나 선동을 쉽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질 될 수 있다.  이 능력으로 이익을 꾀하는 demagogue는 민주정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데마고그는 소피스트였다. 


"그자는 군중들의 갈채와 자신의 어리석고 방종한 혀에 의존했는데, 청중에게 재앙을 안겨 줄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어요."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에는 소피스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민들이 소피스트의 혀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부와 명성 따위의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체의 시민은 선동가와 선동 정치에 대한 경계를 시민의 의무로 명심할 때만 대중 독재에 휩쓸리지 않고 민주정을 유지할 수 있다. 








5강의 제목이 설명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의 여러 모습들은 대강 위의 표와 같은 것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허구의 작품이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크세노폰의 작품도 있기 때문에 당대 소크라테스의 사실적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 추론할 수 있다. 






6강. <소크라테스의 변론> 의 전체 구조



플라톤의 대화편은 크게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눌 수 있다.   30여 편의 (위작 논란이 있는 작품들도 있다.)  대화편이 있으며,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른 분류 기준을 갖고 있긴 하지만 대략 아래 순서와 같다.  







   강유원 선생의 강의는 박종현 번역의 서광사 출판본인데 이 네 작품을 묶어 '소크라테스 최후의 날들' 이라고 한다.  


<에우티프론>은 안 읽어 봐서 모르겠는데,  재판정에서의 <변론> 이후 <크리톤>은 친구가 탈옥을 권유하러 와서 나누는 대화이고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자리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역, 해설 



변론, apologia는 고발, kategoria에 대한 변론이다. 아테나이의 재판은 원고와 피고가 직접 연설을 하여 공방을 벌이고, 재판의 성격에 따라 200명 혹은 500명의 배심원들이 평결을 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원고의 연설은 언급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크라테스의 연설로만 구성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재판 절차에 따라 세 번으로 나뉘어져 있다. 


재판은 두 차례 진행되는데, 1차는 유무죄 재판이고, 2차는 형량 재판이다. 소크라테스는 1차 재판에서 1차 연설을 하고 유죄가 확정되자, 2차 재판에서 2차 연설을 한다. 마지막으로 사형이 결정되자 재판 절차에는 없지만 3차로 최후 연설을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은 장엄한 비극과 같다.  변론이 아니라 준엄한 질책이며 피맺힌 절규다.  어쩌면 유언이 더 적절할 듯도 하다. 


강유원 선생은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표현한다. 


자기를 고발한 재판을 받음으로써 자기가 살고 있는 체제의 민주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사람.  


민주정의 문제를 드러내는 최선의 기회로, 민주정에 의해 기소된 자신의 재판을 증명의 기회로 삼고 죽어 버린 사람.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 아테나이 민주정의 문제를 고발했고, 그 고발은 2500년을 건너 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의 소피스트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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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읽던 고전을 잠시 중단하고 있었다. 모임 제한으로 카페에서 만나기도 힘든데다, 플라톤을 읽기로 한 터여서 과제만으로는 진행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강유원 선생의 고전 강독을 발견했다. EBS 클래스e의 곁가지(?) 프로그램으로 고전 강독이 있고, 거기에 20강으로 된 <소크라테스의 변론> 강독이 올라와 있었다. 고전 읽기를 다시 시작하라는 계시구나 싶을 만큼 반가웠다. 안그래도 플라톤 대화편 중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을 읽기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변론 : 강유원의 소크라테스 변론 강독 / 강유원 (ebs.co.kr)








일정을 짜서 강의를 들으며 정리하고, 줌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강의를 정리하면서 좀 더 생각해 볼 것들도 과제로 제출하기로 했다. 










1강.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는 까닭




저 멀리 발칸 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2500년 전에 있었던 재판 하나를, 그때 쓰여진 글을, 오늘 이 땅의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를 탐색해 보는 데서 강의는 시작된다. 







가장 보편적인 답은 플라톤주의가 서양 철학과 종교, 사상에 미친 거대한 영향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문학이란 것에 조금이나마 호기심을 가져 보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이란 뜻이다.  


플라톤주의에 관한 간략한 정리는 작년에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기 위해 써 둔 글에 있다.  [알라딘서재]희랍 철학을 읽기 전에 (aladin.co.kr)




그렇다면 30여 편의 대화편들 중 유독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고민했던 당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드러내는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바로 민주정, 민주주의라는 데에 이 대화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 삶의 틀을 이루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고대 희랍의 아테네에 있고, 그 민주정의 전성기이자 그 민주정의 문제점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시공간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살았고, 사형을 선고 받았던 아테나이였으며, 이 갈등과 혼란을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걷고 있는 탐욕과 무지, 선동과 분열은 아테나이의 민주정과 너무도 유사하다.  소크라테스는 목숨과 맞바꾸어서라도 아테나이인들에게 인간이 가야할 길을 역설하고자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철학자의 혹은 사상가의 에이도스(형상)로 남았다. 


강유원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강독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2강. 고전 텍스트를 읽는 방법 (1)



전체 20강의 강독 중 1강에서 6강까지는 서론에 해당하고, 7강부터 18강까지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는 본론이고, 19강과 20강은 결론이라 구분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2강은 고전 일반을 읽는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강유원 선생의 말로 옮기면 1강은 '왜 읽는가'라면 2강과 3강은 '어떻게 읽는가' 이다.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구조적 형식이다. 나는 여전히 형식보다는 내용을 본다. 사실 형식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설명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 정도이지, 아! 진짜 멋진 형식미를 가졌구나 하는 식의 독해 능력은 없다. 


강유원 선생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단테의 <신곡>을 예로 서사시의 형식을 설명한다.  <일리아스>의 원환 구조와 <신곡>의 경이로운 각운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부분이다.  












작년에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들은 강의를 토대로 정리도 했었다.  <오뒷세이아>의 구조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연구자들은 문학 최초의  flash back 기법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이 도표들에 대한 나름의 설명은 예전에 썼던 글들에 있다.  [알라딘서재]오뒷세이아 읽기 마지막 준비 (aladin.co.kr)  [알라딘서재]오뒷세이아 2 : 작품 구조 및 초반부 (aladin.co.kr) 











<어린왕자>를 가지고도 구조를 한번 따져 보았는데 ring composition을 뚜렷하게 찾을 수 있었고, 더불어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쓰이는 액자 소설의 형식도 나타났다.  여기에 관련된 글도 링크해 둔다.  [알라딘서재]원환 구조와 1장 (aladin.co.kr)








형식미가 경이로울 정도라는 <신곡>에 관해서는 아쉽게도 우리말 번역번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신곡>을 제대로 읽어 내기는 영영 글렀다.  그래서 그런지,  여태까지 읽은 고전들 중에서 가장 힘든 작품을 꼽으라면 내게는 단연 <신곡>임이 틀림없다.  나름 노력도 해보고 정리해서 글도 올려 놓았으나 여전히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강유원 선생이 하나 더 꼽은 텍스트는 <성경>이다.  <일리아스>와 <신곡>은 고전의 형식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은 고전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사례로 삼고 있다.  처음 듣는 방법론이지만 '성서 읽기의 네 겹 방법론' 이라고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읽는 방식이 오늘날의 과학적· 상식적 사고와 충돌하는 것처럼 고전을 읽을 때도 우의적 의미와 도덕적 실천, 신적 지향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커피는 쓴맛과 단맛과 신맛과 말하기 힘든 오묘한 맛을 모두 감추고 있지만 똑같은 커피에서 어떤 맛을 느끼는가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달려있다. 





3강 고전 텍스트를 읽는 방법 (2)




3강은 고전 텍스트들 중에서도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철학서이지만 그 형식은 희랍 문학에 가깝다. 몇몇 인물들이 특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특정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주인공은 주로 소크라테스이고 대화 상대의 이름이 그 대화편의 제목인 경우가 많다. 


이때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우연적인 배경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들 역시 당대 아테나이의 시대 상황에서 뚜렷한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고대 희랍에 대한 자세한 배경 지식이 없이는 알아 내기 힘들다.  플라톤을 읽을 때 이끌어 주는 선생님이 절실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독서의 선생이 되어 줄 또 하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겪었던 참혹한 내전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책에 대해서도 앞에 링크한 글에 조금 정리해 두었다.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 꽤 있는 책이기도 했다.  내전 상황에서 주고 받는 연설들이 얼마나 멋지든지 깜빡 넘어갈 뻔 하기도 했다.  [알라딘서재]희랍 철학을 읽기 전에 (aladin.co.kr)  하지만 그 연설들 이면에서 똑바로 보아야 할 것은 부와 명성을 좇는 추악한 탐욕이 어떻게 공동체를 망가뜨리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3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은 이러저러한 배경 지식이라기 보다는 대화를 전달하는 형식, 액자 소설의 형식 그 자체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과 나눈 대화를 현재 시제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과거에 있었던 대화를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형식으로 서술한다.  이때 전달하는 사람은 단순한 캐리어가 아니다.  대화의 내용 그대로를 암기하여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기가 이해한 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재평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전해주기 마련이다. 즉 이 전달의 형식, 액자 소설의 형식은 그 자체가 철학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철학적 사유가 바로 이렇게 돌이켜 보고, 곱씹어 보고, 정리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도 그렇다.  6년 전에 있었던 어린왕자와의 만남을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달하는 서술자는 그 만남을 6년 동안 돌이키고 곱씹고 그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 낸 끝에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6년은 철학적 사유의 시간이다.  서술자를 만난 어린왕자도 그렇다.  자신의 작은 별을 떠나 이웃 별들을 여행하고, 지구에 도착해 1년 간 지구라는 세계를 겪고 난 이후에야 어린왕자는 사막에서 만난 서술자에게 자신의 별과 두고 온 꽃과 뱀과 여우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린왕자>는 이중의 액자 구조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말할 준비가 되었다는, 철학적 반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힘이 있는 이야기일수록 사유의 속이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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