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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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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 1조 1항이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다. 작곡가 윤민석의 CD는 지금도 차 안에서 가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노래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공화국이 뭘까, 민주공화국은 또 뭘까 잠깐 궁금해 하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민주는 대략 민이 주인이라는 글자 풀이라도 할 수 있지만, 공화국은 사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북한의 정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데, ‘민주공화국’과 별반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나 인민이나, 학자들이야 엄밀성을 따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눈에는 그게 그거, 국가의 구성원일 따름이고, 영어로 하면 둘 다 People 아닌가? 남북이 극과극의 체제라고 하지만, 요렇게 놓고 보면 둘 다 추구하는 이념이 같아 보인다. 그럼 이념 대립이란 뭐? 슬슬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질문은 순전히 내 생각은 아니다. 뭔들 온전히 내 사고라는 것이 있겠냐만, 책을 읽다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을 만난다. 영국의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라는 불온한 발언을 했고, 플라톤은 아예 민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 살던 우리에게 사실 우리의 실질적 소원은 통일 보다는 민주였다. 그런 민주주의, 절대 가치인 민주주의가 이런 모독을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갸우뚱했고, 점점 의심이 갔지만,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무엇 때문에 추문을 벗어나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이런 선거의 계절이 되면 더욱 궁금하다, 그 정체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여덟 명의 서구 사상가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이자 발제로서, 한 편당 2~30쪽 정도의 짧은 논문 여덟 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각각의 논문들은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에서부터 그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화, 민주주의적 제도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상이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책 자체의 통일된 시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된 개념도 없다.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하기 위해 대중에게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론 논쟁이 전공인 사상가들치고는 매우 쉽게 쓴 논문이고, 현실 민주주의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특별히 발제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을 찾아 요약해 보았다.

 

 

 

 

1.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관한 권두노트 , 조르조 아감벤 (철학·미학 교수)

 

① 민주주의 개념의 두 가지 성격

1) 구성 권력 : 공법 : 일반의지, 입법부

2) 구성된 권력 : 행정체계 : 통치, 행정부

② 서구 정치체계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묶임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정당화해주며, 서로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그 두 요소는 정치적-법적 합리성과 경제적-통치적 합리성, ‘구성형태’와 ‘통치형태’이다. p24

 

 

* 쉽게(거칠게) 말하면, 민주주의의 첫 째 의미는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자체이고, 둘 째 의미는 그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통치 형태 즉 행정 체계이다.

 

 

 

 

2. 민주주의라는 상징, 알랭 바디우 (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상징이란 무릇 상징체계에서 건드릴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p29

②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 두 가지 테제p33

1) 사실상 민주주의적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2) 민주주의적 주체는 자신이 누리는 향락의 견지에서만 구성된다.

③ 플라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세 가지 동기의 뒤얽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계의 부재, 순환에 굴복한 주체성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상징, 그리고 모두가 젊은이처럼 즐기라는 정언 명령. p37

④ 끝나지 않은 황혼의 순간에, 자본-의회주의가 그것에 부여한 뜻에서 고려된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그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p41

⑤ 민주주의란 단어의 본래 의미...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 p41

 

 

* 바디우는 말을 어렵게 하는 편인 듯;; 여튼 바디우는 자본주의 사회를 ‘무조음의 세계’ 즉 대의도 없고 진리도 없이 그저 욕망에 붙잡힌 사회라고 보는데.... 현실 민주주의가 자본-의회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적 인간은 욕망, 욕망의 대상, 그 대상으로부터 끌어내는 찰나의 향락에 묶여서 끝없이 순환하는 주체이며, 이 순환의 상징인 돈에 매달리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다른 모든 것은 비판할 수 있지만, 이 민주주의는 건드릴 수 없는 상징으로 신성시하고 있으므로, 결국 욕망과 욕망의 숭고한 대상인 돈이 신성시되는 사회이다. 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인 인민이 스스로 권력을 갖는 정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3. 영원한 스캔들 , 다니엘 벤 사이드 (철학교수)

 

 

* 사이드가 보기에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형태로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통치 체제가 아니라 그 체제를 구성하는 행위, 혹은 정치의 조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이드는 약간 랑시에르 쪽에 기운 듯한데 여하튼 이 둘의 대립을 기초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모순을 설명하고자 한다.

 

 

① 민주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급진적 비판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및 상품등가성과 순전히 동일하다고 보는 데 기초한다. 상품등가성에 따르면 모든 것은 값어치가 같고 등가적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대의라면, 그것은 먼저 그것의 형식을 담지 하는 일반 체계의 대의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선거민주주의는 그것이 먼저 자본주의, 오늘날 ‘시장경제’라고도 불리는 자본주의의 합의적 대의인 한에서 대의적 일뿐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원리의 부패이다. 맑스가 그런 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이행기적 독재밖에 없다고 봤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스는 그것을 포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다. 그 단어는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의와 부패 사이의 변증법적 궤변을 명확히 해준다.” 그러나 맑스에게 독재는 민주주의와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레닌에게도 ‘민주주의적 독재’는 모순 어법이 아니었다. p53~4

② '정의로운 질서‘와 정반대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국가 형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선 정치의 역설적 조건이다. 그 지점에서 모든 정당성이 궁극적인 정당성의 부재와 마주치고, 불평등주의적 우연성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평등주의적 우연성과 마주친다.” ... 그것은 “통치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다...그것은 정치에 대한 사유를 권력에 대한 사유에서 분리해내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전혀 아니라,,,,정치의 설립 자체이다.” p57~8

 

 

*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구성하는 권력이란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인민의 권력이 구성되어야만 한다. 구성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제도나 체제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루소는 이것을 위해 최초로 ‘사회계약’의 원칙을 도입했다.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합의된 권력은 정당하므로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정당한’ 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어떤 권위에도 기댈 수 없으므로, 태생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다. 제도화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당성은 보증될 수 없다는 것.

 

 

③ 민주주의의 실질적 모순은 사회계약의 아포리아에 기입되어 있다.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힘이 법〔권리〕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오직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되자마자 정당성의 토대 문제, 그리고 적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긴장의 문제가 제기된다. p61

④ 생-쥐스트는..... “제도를 통해서 개인의 영향력을 법이 지닌 힘과 불변하는 정의로 대체해야 한다. 그러면 혁명은 확고해 진다. ” 생-쥐스트도, 체 게바라도, 파트리스 루뭄바도,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 신비로운 민주주의적 등식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수수께끼를 남겼다. p66

⑤ ...위임과 대의는 피할 수 없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파업에서도 그렇고, 정당에서도 그렇다. 그 문제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꼭 껴안고서, 위임자가 수임자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권력의 전문화를 제한하는 대의방식을 찾는 것이 낫다. p71

⑥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성, 비확실성, 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은총, 기적, 계시, 회개, 용서라는 신학의 모든 소지품과 함께 말이다. 이렇듯 정치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겠다는 허망한 도주는 사실상 무능력을 영속화할 뿐이다. 원리의 무조건성과 실천의 조건성 사이의 모순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자처하는 대신, 정치는 그 모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모순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지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p79

⑦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는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하게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 p81

 

 

*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는 위임과 대의의 형식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임과 대의를 부정한다면 결국 신에 의존하거나 정치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은 민주주의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이게 하는 스캔들이다.

 

 

4.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 웬디 브라운(정치학 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말이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세계종교로 부상했다. 정치권력과 정치문화의 특정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서구와 그 숭배자들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제단으로서,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의 십자군들을 빚어내고 정당화했던 신의 의도로서. p85

② 근대 이전의 공화제적 민주주의가 공통의 지배라는 가치 위에 세워졌고 평등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민주주의의 약속은 언제나 한결같이 자유였다. 대표나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극히 형식적인 의미 말고, 근대 민주주의가 평등을 내세운 적은 결코 없다. p95

③ 임마누엘 칸트, 루소, 존 스튜어트 밀이 그랬듯이, 근대성에서 자기-입법으로 이해된 자유는 인간 존재의 정수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욕망으로 간주된다. 사실 근대 서구의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 형태인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은 근대성이 낳은 선험적으로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주체이다. 바로 이런 주체의 형상이 민주주의에 문자 그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당성을 만들어줬고, 계속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주체가 지닌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얼굴은 근대 전체에 걸쳐 민주주의의 위계질서, 배제, 예속시키기 위한 폭력을 허용하고 영속화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하는데, 이는 설사 모든 인민을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제국주의적 꿈이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모양새를 띠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해준다. p96

④ 민주주의를 선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 조재들이 자기-입법을 원하며, 데모스에 의한 지배가 무책임하고 집중된 정치권력의 위험을 견제한다는 가정에 기초하는 것이다...그러나 오늘날 도스도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인간 존재가 “빵보다는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할 수있게 해주는 역사적 증거, 또는 철학적 가르침 같은 것이 있을까? ...만일 인류가 자유에 따른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면....플라톤은 제 자신의 정치적 실존에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히지 않는 사람들이... 루소는 타락한 인민이 공적인 삶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이 얼만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p100~102

 

 

* 웬디 브라운은 근현대의 민주주의를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결합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만들고 합의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가지지만, 이 자유로운 주체가 사실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라는 특정 주체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불평등할 뿐 아니라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진짜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프랑스 혁명이나 아이티 혁명 같은 것은 뭐란 말인가? 여하튼 이런 의문들을 잔뜩 제기한 후 웬디 브라운은 민주주의에 대해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통치 형태로서의 민주주의가 평등을 배제한 채 유사-자유에만 결합되어 있다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5. 유한하고 무한한 민주주의 , 장-뤽 낭시(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의 양가성은 정치를 구성하는 이원성이나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서부터 우리에 이르기까지 정치는 끊임없이 이중적인 성향을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공통의 실존에 관한 유일한 규칙,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실존의 의미 또는 진리의 전제. p109

② 철학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철학처럼 정치는 신의 현전이 끝나면서 나온 발명품이다, 로고스가 뮈토스(신화)의 실추 위에 세워졌듯이, 정치도 신-왕의 소멸 위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신정의 타자다. 이는 민주주의가 ‘주어진 권리’의 타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권리를 발명해야만 한다. p110

③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루소의 민주주의)는 토대가 없음을 자각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약점이다. 우리는 이 교착어법의 핵심에 있다. p111

④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난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근본적인 정당성의 자격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p112

⑤ “인간 본성 따위는 없다"는 단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다시 긍정하고 작동시킬 시기이다. 인간에게는 본성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온갖 자연적인 것은 지나치게 갖고 있는 주체의 특성 말고는 다른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다....정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초험적 원리에 토대를 둘 수 없으며, 인간 본성의 부재에 토대를 두거나 토대 자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 p116

⑥ 민주주의가 진짜 욕망하는 진짜 이름, 민주주의가 사실상 지난 150년간 자신의 지평으로서 발생시키고 젊어졌던 진짜 이름은 코뮤니즘이다. 이 이름은 모든 점에서 사회에 결핍되어 있던 공동체의 상징적 진리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p118

 

 

*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놀랍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는 더욱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낭시의 논문이 내게는 좀 감성적으로 읽혔지만, 여하튼 민주주의는 코뮤니즘,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진리에 관한 물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발명해나가야 하는 것이며,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인 것 같다.

 

 

6.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 랑시에르(철학 명예교수)

 

 

①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단어들에 대한 투쟁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가 맥락에 따라 다른 것들을 의미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p131

②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입니다. 만일 권력이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자들의 소관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자크 루소의 논변이기도 하지요. 가장 강한 자의 권력은 권리라고 서술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권리는 그냥 부과되면 그뿐이니까요. 달리 정당화할 필요가 없죠. 제 생각에 민주주의란 평등 전제이며, 우리의 것과 같은 과두적 체제조차도 바로 그 전제 위에서 스스로를 다소 정당화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비판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체에 이중으로 박아 넣은 평등의 쐐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치는 단순히 치안으로 변형되지 않을 수 있죠. p132~3

 

 

*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평등 전제’라는 정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평등은 목표가 아니라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 역시 전제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정당성을 따지고 자시고가 아니라, 평등한 인민주권은 모든 정치체의 전제여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여하튼 재미있는 것은 랑시에르가 한국을 방문한 모양이고 촛불집회를 보거나 들은 것 같은데, 이미 서구에서는 화석화된 민주주의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펙터클하게 상연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촛불집회란?

 

 

7. 민주주의를 팝니다. , 크리스틴 로스(비교문학 교수)

 

 

① 근대에 수용되어 온 민주주의란 투표, 다수의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 ‘최대 다수’의 법에 의한 지배로 이해된다. p149

② 유럽 헌법과 관련한 리스본 조약을 부결시킨 아일랜드의 투표 결과에 대해.. 프랑스와 EU 관리들은 재투표를 요구 ...샤르트르가 ‘바보들을 위한 덫’이라고 불렀던 대의민주주의의 선거조차도 박탈하려는 시도... 그러나 아일랜드의 투표가 보여주는 것은 이 선거라는 형식적 의례도 반-민주주의적 공격에 대한 방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③ 1869년경 프랑스의 정치계에는 각종 민주주의자들이 번성했는데 몇 가지만 열거해 봐도 ‘사회적 민주주의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자’ 등이 있었다.... 이 단어 자체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못했다. p152

④ 자네가 내게 말했지. 자네는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민주주의자라고. 이 말을 정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음모가들이 좋아하는 수법이지.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부르주아지도 아니고 민주주의자이다!”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경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들이라네....그 어떤 견해가 이런 깃발 아래에 똬리를 틀지 못하겠는가? 모든 이들이 저마다 민주주의자임을 자임하고 있지. 특히 귀족계층의 사람까지 말이야 p152

⑤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감행된 가장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비록 원래의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나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긴 했지만, 민주주의자라는 이 단어는 여전히 1789년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p153

⑥ 19세기가 시작될 때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던 바로 그 집단이 그 세기가 끝날 때쯤 그 용어를 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랭보의 시 속에서처럼, 민주주의는 문명화됐고 문명화되어가고 있는 서구에 필수적인 정신의 보충물이자 이상적인 무화과 나뭇잎이 됐을 뿐 아니라 문명화됐음을 알리는 깃발, 구호,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계급 살육의 역사가 개시됐음을 선언했다. 유럽에서 파리꼬뮌이 겪은 바로 그런 형태로, 그리고 식민지에서는 그 이상의 폭력적인 형태로. 2008년 국민투표 당시 아일랜드인들에게 쏟아진 위협과 비난의 언어에서 우리는 이 폭력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에 서구는 이 세계의 도덕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헤게모니는 전 세계에 걸쳐 진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p159~160

⑦ 만약 민주주의를 통치형태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단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단어를 전유해 온 적들에게 내줘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민주주의란 정치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헌정형태나 제도형태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민주주의는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냈다.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기, 최상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획이다. 랭보의 숱한 구호 중 하나인 사랑처럼, 민주주의는 공적 삶의 끊임없는 사유화에 맞서는 투쟁의 이름으로서 재창조되어야만 한다. p164

 

 

*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의되지 못한 채(혹은 의도적으로 정의하지 않은 채), 여러 정치 세력에 의해 이용당해 오다가,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문명화된 서구의 정신적 깃발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통치형태가 아니라 인민의 권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섣불리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는 투쟁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8.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 슬라보예 지젝 (이론정신분석학협회 대표)

 

 

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나 자유와 동일시할 수 있는 모든 특징(가령 노동조합, 보통선거, 무상 의무교육, 언론의 자유 등)은 19세기 내내 하층계급이 길고도 힘든 투쟁을 해 쟁취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다. p172

②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충격요법을 써서 민주주의에 투신하고 서둘러 자본주의를 향해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제적 파산선고였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칠레와 한국의 경로를 따라서 견제 받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통제했고 그에 따라 혼돈을 피했다. 요컨대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지배라는 괴상은 결합은 말도 안 되는 변칙이 아니라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p174~5

 

 

*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권위주의적이거나 비민주적일 때 오히려 더 빨리 발달했다는 것.

 

 

③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p187~8

④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p191

⑤ 이 사실은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가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관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이 무엇이냐?”라는 점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한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결국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의 대표자들이 텅 빈 권력의 장소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p194

⑥ 차베스 정부는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차베스는 그들의 대통령이고, 그의 통치 아래에서 헤게모니를 쥔 세력은 그들이다. 비록 민주적 선거의 규칙을 존중하고는 있지만 차베스가 근본적으로 헌신하는 대상이자 자신의 정당성을 끌어내는 원천은 그런 규칙이 아니라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 민주적인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p194

⑦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란 선거로 집권한 급진 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따라야 한다. p195

 

 

* 어쩌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지젝이 다시 부활시키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은. 어쨌거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인민의 신적 폭력은 인민주권이란 원칙에서 정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독재라는 개념에 관한 것인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 이라고 했다. 처음에 차베스가 선택한 것은 대의민주제의 형식인 선거가 아니라 쿠데타였다. 실패 이후 전략을 바꾸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선거 공약은 ‘제헌의회 소집’ 이었다. 차베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베네수엘라의 지배 체계가 이미 미국과 자본가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어, 빈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그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다 결국 패배하고 대통령궁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전례를 보여주고 있다. 차베스는 제헌의회를 소집해 기존 헌법체계를 무효화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국회, 법원, 행정부는 모두 해산되고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와, 국회, 사법부가 구성되었다. 물론 차베스의 혁명 세력이 모든 국가 조직을 장악했고, 차베스는 빈민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혁명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차베스를 몰아내려는 쿠데타와 음모가 끊임없이 시도되었지만, 차베스를 지지하는 절대 다수의 빈민들은 이를 막아내는 든든한 보루가 되고 있다. 차베스의 권력은 곧 빈민들의 권력이고, 이것을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대적 형태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보면, 빈민의 권력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 원리에서 나온 정당한 권력이다. 문제는 이 인민의 권력이 대의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차베스에 대한 인민의 지지는 선거 형식과는 상관없는 포퓰리즘적 성격이 짙다. 차베스가 곧 인민의 일반의지를 직접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과잉’이 출현하기 쉽다. 그러나 이 전체주의적 과잉이 베네수엘라의 빈민, 즉 기존 사회 체계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 들의 편에 있는 것이라면, 민주적 형식이라는 것은 그다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차베스 권력의 정당성은 빈민들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에 있는 것이지 민주적 절차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젝의 급진적인 혹은 너무나 구식인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관해서 수용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의 원리라는 점에서 음미해 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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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
엘렌 호지슨 브라운 지음, 이재황 옮김 / 이른아침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2102년 3월 27일, 카페 소모임 선정 책 감상문입니다.  

 

 

경기 동부 는 내가 2년 정도 살았던 곳이다. 그 때가 마침, 2002년 대선을 즈음했던 때라 경기 동부는 나와도 관련이 있다. 노사모 경기 동부 회원이었고, 2002년 12월 19일 그 밤, 덕평 수련원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을 보았던 것이다. 그 열광의 밤에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감시! 감시!”를 외쳤다. “저를 흔들 사람은 많습니다...” 그때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새 시대의 첫 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로 순진하기만 했던 우리 지지자들은 이제 권력은 온전히 대통령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그 권력을 감시하기만 하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권력은 이미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그 때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예감했거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를 흔든 손이 그들뿐 이기야 했을까 만은.

  「달러」를 읽으며, 나는 맨 먼저 두 가지가 떠올랐다. 권력은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요즘 떠도는 ‘경기 동부’(물론 나의 경기동부와는 다른 경기동부이다;;) 괴물 설.

  작년에 「화폐 전쟁」을 읽었다. 놀라웠지만 사실 음모론의 냄새가 났다. 세계제국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 악마 같은 유대인 금융황제 ‘로스차일드’ ..... 진짜 미국의 적지 않은 대통령들이 그들에 대항하다 암살을 당한 것일까? 곧이곧대로 믿기엔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소설로 치부하기엔 세상 돌아가는 일이 하 수상하고. 어쨌든 음모론은 세상이 수상하거나 미쳐 날뛰는데도 똑 부러진 설명도 해결도 없을 때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음모론이 꼭 사실이 아니란 법이 있는 걸까?, 음모론의 형태 말고는 달리 그 엄청난 비밀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세상이 꽉 막혀있고 사람들이 그들의 약에 취해 있다면?

  몸통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진중권의 말이 맞는지, 이미 10년 전에 해체되었다는 NL측의 주장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 논쟁이 불거진 계기가 너무 찌질해서 한숨이 나온다. 성추행을 했으면 후보 사퇴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선거부정 했으면 그것도 후보사퇴 이외는 방법이 없다. 보수가 하면 성추행이고 진보가 하면 사소한 실수니 덮어야 한다면 강용석은 억울해서 분신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정희 보좌관의 선거법 위반은 최구식 비서관의 디도스 공격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데모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걸린 것이 아니다. 선거하겠다고 해놓고 그 선거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속이 터지는 건 진짜 지켜보는 국민들이다. 도대체 뭐 봐줄만한 일이라야 봐주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두 말 없이 정리해도 모자랄 판에 버팅기기까지 하니 결국 경기 동부니 괴물이니 소문이 떠돌지 않을 수가 없다. 엄하게 불붙는 경기 동부 논쟁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경기 동부 논쟁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따위 논쟁거리도 안 되는 웃기는 일에다 그런 논쟁씩이나 한다는 것이 어이없을 따름이다. 민노당 주사파는 음모라고 핏대만 올릴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음모론을 불 지피게 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걸 할 의사가 없다면 나는 오히려 음모론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이야기가 진짜 엄한 데로 샜다. 「달러」는 그럼 음모론이란 말인가? 「달러」의 내용은 「화폐 전쟁」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달러」는 음모론의 냄새가 좀 덜하고, 궁극적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민간 은행이 아니라 국가가 자국의 통화를 발행하고 유통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폐 전쟁」내용이 조금 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여하튼 「화폐 전쟁」은 읽으면서도 이걸 다 믿을 수 있을까 싶었다.

 

 

「달러」의 전체 내용은 미국의 통화발행권이 국가가 아니라 연방준비은행(FRB)이라는 민간 은행에 넘어가게 된 피의 역사와 그 결과 전 세계의 경제가 몇몇 민간 금융업자들의 손에 놀아나게 된 현실을 갖가지 자료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사실 전체 내용은 아닌데, 왜냐하면 삼일을 틈틈이 부지런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체 700쪽 중 400쪽 정도 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모임이 코앞이고, 이번 모임의 토론 분량이 1부까지이기 때문에 일단 전체 독서 감상문은 되지 못하지만, 생각나는 것들을 조금 적어 보기로 했다.

  책을 중간에 덮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다. 권력이 자본의 손에 넘어간 것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도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 거슬러 올라가면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을 때 이미 넘어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본의 손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이제 이 세계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삼성의 권력은 그저 로스차일드라는 거대 금융왕국이 흘린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은 수백 년 전에 이미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화폐란 무엇인가?” 혹은 “화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박하게 말해, “돈은 뭘까?” 이다. 우리는 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 놈의 돈을 빼고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법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산다. 그러니 돈은 늘 우리 머리에, 우리 가슴에, 우리 뼈에 사무쳐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달러」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돈이 뭔지 진짜 몰랐구나, 혹은 돈이 무기란 말이 무슨 말인지 진짜 진짜 몰랐구나.

  생각해보면 돈이란 단순하다. 거래를 위한 매개 도구일 뿐이다. 내가 파는 것도 물건이고, 내가 사는 것도 물건이다. 필요한 것은 물건이지 돈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돈을 몽땅 꺼내 쌓아놓고, 1년 동안 우주여행을 갔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고 하자. 무엇이 만들어져 있을까? 빌딩이? TV가? 돈 자체로는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무엇인가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그런데도 이 이상한 세계는 돈이 돈을 만든다. 이런 마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거기에 대한 하나의 답은 마르크스가 들려준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상품은 화폐다.

  “상품은 얼핏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하여 보면 실제로는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에 차 있는 기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상품이 사용가치인 한에 있어서는, 그 속성들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든지 인간노동의 생산물로서 비로소 이러한 속성을 획득한다는 관점에서 보든지 간에, 상품에는 신비한 요소가 없다. 인간이 자기 활동에 의하여 자연요소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변경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발생하는 노동생산물의 이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상품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다만 상품형태가 인간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들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 노동물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하는데 있다.”

  상품이란 자기가 사용하려고 만든 물건은 아니다. 상품의 목적은 교환이다. 상품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라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사용을 목적으로 해서 만들어질 때, 그 물건에는 어떤 신비함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교환을 목적으로, 상품으로서 만들어질 때, 그것이 상품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될 때, 그것은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함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돈이 그저 물물 교환을 위한 매개의 수단일 뿐일 때, 돈은 그저 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 그 자체로 상품이 될 때, 돈은 한 순간에 한 국가를 파산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달러」가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마법을 획득한 달러가 어떻게 라틴아메리카를 무너뜨리고, 러시아를 집어삼키고, 아시아의 용들을 쓰러뜨리고, 그리고  미국을 휩쓸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그림자 정부, 금융 왕국, 민간 국제 은행 연합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이 막후의 거대한 지배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마르크스라면 달러의 이 가공할 파괴력과 그 실상은 인정하겠지만, 배후 조종설 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의한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할 것 같다.(잘은 모르지만;;)

  돈 자체가 최고의 상품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별반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이 시대를 ‘금융자본주의’ 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간단한 공식이 있다. C-M-C ; 이건 교환의 매개로서의 화폐다. 자본주의 이전의 거래 형태.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서 돈이 가운데에서 거래의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로 넘어오면 M-C-M′ ; 목적은 돈이다. 가운데 있는 상품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중간 생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사실 상품마저 필요가 없어진다. 바로 M-M′ 주식시장. 금융시장.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다. 돈 쌓아놓고 우주여행하고 돌아오면 잘해야 그 돈이 그 돈이고, 비바람에 날려 가면 종이 쪼가리 한 장 남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식부자 박경철이 가능할까? 그건 누군가의 돈이다. 주식시장은 국가가 거대한 하우스인 도박판이다. 돈이 돈을 불린 것이 아니라, 개미들의 피 눈물 나는 돈이 거대 투기꾼들이나 누군가 억세게 운 좋고 약삭빠른 사람들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문화강좌에서 들은 내용이고, 「달러」가 다루는 것은 화폐의 다른 측면이다.

 

  이제 별반 새로운 사실도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라운 것은, 미국의 달러는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방준비은행(FRB)이라는 곳에서 발행하는데, 이 은행은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든 결과적으로 민간 은행이다. 미국의 통화 정책은 실질적으로 국가가 아니라 민간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정부가 돈이 필요하면, 이 FRB에게 돈을 빌리고, 빌렸다는 증서를 발행해 주는데, 이것이 보통 말하는 국채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가 돈을 찍어낸 것이 아니라, 돈을 빌렸으니 당연히 정부는 FRB에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물론 세금으로. 우리는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은 돈을 자기들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도 그렇게 꽁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꽁으로 먹는 작자들이 있다, FRB.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버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않은가? 어떻게 미국 정부는 두 눈 뻔히 뜨고, 돈을 찍어내는 일을 민간에게 빼앗겼는지, 게다가 달러 한 장 찍어낼 때마다 국민 세금을 꼬박꼬박 FRB에게 뜯기고 있는지. 「달러」는 그 역사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인 혈통의 ‘로스차일드’ 금융 왕족이 있고, 그들의 미국 대리인으로 의심받는 J.P.모건, 록펠러 등등이 있고, 그들이 암살한 링컨, 케네디 등등 비운의 미국 대통령과 재무 담당자들이 있고, 금본위제가 있고, 브레턴우즈 협정이 있고, 그린백이라는 것이 있고 등등..... 재미있다. 그런데 화폐발행권이 민간에 있는 나라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많다고 한다. 영국을 비롯해서. (나중에 영국은  법적으로 국가가 이 권리를 가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화폐발행권은 국가에 있는 걸까? 나는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아마 그것이 한국은행 민영화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 화폐발행권은 단순히 발행권만이 아니라 화폐 유통에 관한 모든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이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와 같은 문제는 수시로 한국은행과 정부가 갈등을 빚는 부문이기도 하다. 물론 언론에서는 이것을 한국은행 민영화가 아니라 한국은행의 독립이라고 표현하는데, 독립이라는 말은 사실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는, 곧 시장에 그러니까 자본에 맡기라는 소리다. 「달러」의 저자는 이 독립, 이 민영화가 바로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장하준 교수가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번에 읽은 「아담의 오류」 저자는 경제학이 “사실이 아니라 신념과 믿음, 따라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다.” 라고 했다. 신학이든 과학이든 간에, 경제학은 워낙 복잡하고 미세하고 추상적이어서 나는 사실 이해하기가 어렵다. 「달러」에 나오는 경제 이론이 옳은 것인지, 어떤 입장에서 보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돈이라는 것이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하는지, 돈이 어떻게 변용되면 재앙이 되는 것인지에 관한 것만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이 저자가 주장하듯 화폐 발행과 유통에 관한 권한을 국가가 갖게 되면 해결될 문제인지,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해결되기 힘든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파생상품, 공매도 등 반 토막 났던 내 펀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들이 있다는 광고만 하고, 끝내려고 한다.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법학자란 점에서 학계에서 이 주장들이 얼마나 인정되고 있는지 살짝 의문이 가기는 하지만, 수상한 세계의 불길한 움직임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세인들의 이해 범위 안에서 돌아가는 때가 온다면, 어떤 것이 음모론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쉽게 가려질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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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오류 - 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
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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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년 3월 11일, 카페 소모임 책 감상문입니다.

 

 

나의 오류는 무척 상식적이었다. ‘아담’ 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덴동산의 그 벌거벗은 아담을 떠올리지, 단번에 아담 스미스를 떠올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말이다. 어쨌든 나는 약간 화가 났던 것 같다. 원죄만으로도 억울한데, 아담의 오류라니? ‘오류’란 꼼짝없이 아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인데, 사과 한 입 베어 먹은 죄 같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도 수 천 년 동안 닦달을 당하고 있는 판에, 털어 먼지 하나라도 나오는 날에는 또 무슨 죄를 얼마나 오랫동안 업보로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살짝 호기심이 당기긴 했다. 아담의 오류란 건 도대체 뭘까? 인류의 뭔가 치명적 오류가 드러났다는 것은, 원죄 운운하는 그 분만 아니면, 어쩌면 전화위복임이 분명할지도 모른다. 드디어 인류 보완 프로젝트가 가동될 수 있는 걸까? 유토피아가 더 이상 불가능의 땅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인가? 

  물론 한 입 베어 먹은 푸른 사과 안에 뉴튼인지 스미스인지의 사진이 박혀있는 책, 「아담의 오류」를 넘겨보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펼칠 상상력 따위는 없었겠지만, 여하튼 300페이지 정도 되는 「아담의 오류」에는 에덴이나 이브는 없었다. 그 대신 아담 스미스를 필두로 맬서스, 리카도, 마르크스, 파레토, 베블런, 케인즈, 하이에크, 슘페터 따위의, 들어본 듯은 한데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름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아담의 후예들이여! 세계의 99%를 고통에 빠뜨린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바로 아담의 원죄를 청산하지 못한 이 후예들의 작품이 아니던가! 물론 숨차게 나열한 저들 모두 가 아담의 후예라는 건 아니고, 아담의 반-후예들도 있다, 물론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우연이겠지만, 이번 달 우리 지역 도서관의 ‘목요 인문학’ 강좌는「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다. 인문학 책을 읽다보면 좋든 싫든 마르크스란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없고, 또 「자본론」의 명성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론이 어떤 책인데, 덥석 덤벼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웬만한 사람들도 자본론 1장 상품편인가 뭔가에서 다 꼬꾸라진다고들 하니까. 그런데도 다들 윗집 강아지 부르듯 맑스, 맑스하니까 , 나도 아~ 마~악스! 하게 된다,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그러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 마르크스 연구의 일인자인(그렇게 들은 것 같다..) 김수행 교수가 하는 그런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강의는 아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는 사실 우리 카페가 목표로 내세운 ‘일반인 저자’ 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공대 나와서 IT 업계에서 월급쟁이 5년을 하다가, 「자본론」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이 길로 나섰다는 것인데, 그 충격은 네오가 빨간약을 먹었을 때의 그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은 인문학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종 강연과 글쓰기를 한다고 하는데,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차베스, 미국과 맞장뜨다」,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공저), 「청춘에게 딴 짓을 권한다」, 「글쓰기 클리닉」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나는 소모임의 「아담의 오류」대신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3월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에 하는 강좌여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공짜이기도 하고 ㅎ.

  첫 강의의 소감은 따뜻한 숭늉을 마신 그런 느낌이다.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강렬하지는 않지만 뭔가 은은한 맛이 있는...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조심하는 그런 까탈스럽고 예민한 학자도 아니고, 머리에 든 것을 쏟아내기에 숨 가쁜 그런 폭압적 스타일도 아니고, 간결하고 쉽고 그렇지만 울림이 있는...그런 느낌이어서 나는 좋았다. 경제학에 얼마나 해박한 지식이 있는지, 「자본론」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경제학을 전공할 것도 아닌데 큰 틀에서 오류가 없다면, 너무 단순화했다고 해서 걱정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나는 「아담의 오류」가 다루고 있는 대결하는 두 그룹 중 한 쪽 편의 이론을 도서관 강좌를 통해 배우는 셈이다. (이걸로 모임 불참에 대한 변명을 ;;)

 

 

 「아담의 오류」로 돌아와서... 발제를 하거나 독후감이라도 쓰고 싶지만, 史라는 것의 특성상 참 난감하다. (나는 모임에 빠지는 대신 on을 통해 발제하고 함께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 던컨 폴리가 해 놓은 작업이 사실 하나의 발제라고 할 수 있다. 1776년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이래로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제학계를 주름잡았던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주장과 주의를 요약해서 내 놓은 책이 바로 「아담의 오류」일 텐데 뭘 또 발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경제학에 무슨 조예가 있어, 나는 고전파 이론이 맞다고 생각해 또는 그래도 마르크스의 분석이 더 타당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좀 남겨 두고 싶기는 하다. 적어도 제목 「아담의 오류」라는 것이 뭘 말하는지 정도라도. (그런데 쓰다보니 예상외로 긴 글이 되었다;;)

 

 

 

  사실 ‘아담 스미스의 오류’가 무엇인지는 책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특히 p10~12에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저자는 경제학이 수학이나 물리처럼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사변적인 철학 혹은 신학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아담의 오류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그의 시장 방임주의적 주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경제적 삶의 공간과 윤리나 세계관에 의해 작동하는 그 밖의 나머지 사회적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사고 자체에 있다고 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경제학이, 가장 흥미롭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보면,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인 과학이 아니라 사변적인 철학 담론이라고 생각하며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책에 “경제 신학에 관한 안내서”라는 부제를 붙였다. 나는 이와 관련된 논거들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관점으로 “아담 스미스의 오류”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아담 스미스의 저작이 지닌 가장 중요한 측면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경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논의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 신념과 믿음, 따라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다.』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빌 클린턴이 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지만 이 슬로건으로 빌 클린턴이 대선이라는 정치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또한 역으로 경제란 사실 정치 철학 혹은 정치적 믿음과도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란 말과 그것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의 법칙이란 주장을 했지만 (사실 요즘 좌파들은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경제의 영역에서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발전의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더 타당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적인 본문 내용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세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p 27~8) 아담 스미스나 그 이후 아담의 후예들이 전제로 삼는 법칙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주장이다. 일단 공급이 있으면 수요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수요 부족에 의한 공급 과잉은 없고 따라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론으로, 이 법칙에 근거해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심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냐고? 아담 스미스 시대에 분업과 노동 생산성의 증가로 당연히 실업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스미스는 “세의 법칙”에 의거해 전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노동의 초과 공급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실업자는 결국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실업자는 사실상 ‘자발적 실업자’라는 것인데, 상황이 변했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돈 많이 주는 곳만 고집하니까 실업상태에 있다는, 요즘도 자주 듣는 그런 주장의 오래된 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업이라는 이 심각한 문제가 전 세계의 자본주의를 뒤흔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도대체 “세의 법칙”이라는 것이 여전히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하는 인간들의 금과옥조인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언제쯤 이 세계적 실업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유럽에서의 청년 실업 문제는 벌써 수 십년 이래 악화되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어쨌건 아담 스미스하면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잠깐이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스미스는 타인들에게는 해로울 수도 있는 냉혹한 이기심의 추구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도덕적 선으로 변형된다는 독창적인 주장을 통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철학적 ·도덕적으로 옹호한 이로 알려져 있다. 이 주장이 타당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의 역사가 얼마나 간단하겠는가! 스미스는 자신의 자본주의적 기획에 대한 찬양에 걸맞은 논리적 기반을 엄밀하게 구축하지 않은 채, 그것에 일반적 선의와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고기집 주인이나 제빵사의 선한 의지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유명한 이야기는 스미스의 주장의 좋은 사례다. 이런 주장의 명백성과 현실성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사회가 작동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진정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기심의 추구가 긍정적인 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적대적인 시장 관계가 분업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우리의 저녁 식사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의 사적 소유관계가 수반하는 분배적 불평등과 도덕적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스미스는 상품 가치에 대한 지대의 의존성과 구성 가치론을 조화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주장을 제기하는 데에 실패했다. 』p 64~5

  나는 가끔 중국의 경제체제가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공부를 하면 그래도 좀 알게 되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니면 뭔가 싶기도 하다가, 국가 자본주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잘 모르겠지만, 궁금하기는 한데, 또 알아보려고 선뜻 공부하게 되지는 않는다. 누가 좀 알기 쉽게 말해주면 좋겠다. 분업과 생산력의 향상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도 옹호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국가의 계획이나 혹은 윤리적 태도를 지닌 공동체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발전 가능한 것인지, 그에 관한 하나의 답을 중국에서 찾을 수 있을 런지가 궁금하다. 물론 북유럽의 사민주의나 심지어는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역사적인 사례가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여하튼 중국이 참 궁금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맬서스다. 맬서스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정도의 기억만 있는데, 이 주장의 배경이 그렇게 냉혹한 것인지는 정말 몰랐다. 구빈법에 대한 멜서스의 비판은 이렇다.

 『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곤을 장려(혹은 심지어 빈곤을 만들어 내기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구빈법은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그의 관점에서 식량 공급은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춰서 더 많은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맬서스는 구빈법이 출생률을 상승시키고, 균형적인 실질임금을 낮추며, 영아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79

  이런 비인간적인 주장이 통하는 것은 200여 년 전이기 때문이지 하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미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연방복지 정책을 비판하면서, 복지가 실제로 빈곤을 만들어 내거나 최소한 빈곤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고 한다.(p79) 맬서스의 입장에서는 비인간적이라는 말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인간 개개인에 대한 연민은 없지만 인류 전체에 대해서만은 성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꼬아 보다가도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눈을 돌리면 어떤 면에서는 나는 요즘 맬서스에 동의 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고령화 사회니, 저 출산이니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출산 장려 운동을 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청년 빈곤 문제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의 등장은 이 시대의 비극이지만, 관점에 따라 적극적 의미로 전환될 수도 있다.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3포’를 넘어 ‘삶포’가 되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이 빈부격차의 시대에, 기껏해야 실업자로 노동예비군으로 상품 소비자로서의 권리만이 허락되는 이 사회에, 무엇하러 또 똑 같은 운명의 노예를 길러내어 바친다는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출산을 거부하고 더 이상 아무런 노동자도 소비자도 재생산해 내지 않을 때, 이 사회가 어떻게 굴러갈지 나는 참으로 궁금하다. 노예 없이 주인들만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도 궁금하고, 자본가들이 전자동 시스템으로 만들어 내는 그 훌륭한 상품들을 구매해 줄 소비자가 없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전 세계의 99%가 일제히 출산을 포기할 때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상상은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절멸이다. ‘바틀비적 태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푸른바다님이 쪽글 과제로 내주신 진중권의 <아이콘>에도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바틀비다.

 (몇 년 전에 읽은 <시차적 관점>의 인상을 기억하면서 아래 내용을 썼으나, 막쪽글을 위해 다시 <시차적 관점>의 몇몇 부분들을 읽으면서, 내가 여전히 바틀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진중권의 글은 무언가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진중권의 표현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아래부분의 글은 쓰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읽을 분들은 모두 읽은 이후 이므로 삭제하지 않고, 내 사고의 오류의 흔적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글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지젝의 바틀비가 무엇인지 참으로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의 문장들은 사실 단순히  <시차적 관점> 뿐만 아니라 지젝의 다른 책들에 대한 기억이 얽혀서 나온 것들이어서, 내 나름대로 종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불완전한 기억과 독서 당시의 표면적 인상에 의지했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그리 믿을만한 것은 될 수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나중에라도 다시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를 부탁드린다. : 3.15에 덧붙임)

바틀비적 태도란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의 태도다. 비폭력 저항과 유사한 것도 같은데, 사실 그것 보다 더 수동적인 형태로 보인다. 진중권이 자신의 글에도 소개했듯,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 갑자기 ‘ I prefer not to~’라고 말하며, 일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사무실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거기서 먹고 자면서 그냥 버틴다. 참다못한 변호사가 사무실을 옮기고 난 후, 바뀐 주인에 의해 바틀비는 사무실을 쫓겨나 방랑하게 된다. 방랑죄로 감옥에 들어간 바틀비는 감옥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음식을 거부하고 끝내 굶어 죽는다. 진중권은 삶의 포기라는 이 소극적 저항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꼬는데,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 바틀비적 태도를 대단히 강력한 저항의 형태, 심지어는 이 시대의 유일한 저항의 형태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 나도 사실은 바틀비가 뭐 그렇게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런 주장이나 설득도 없이 혼자서 하는 저런 저항이, 자기 자신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전체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바틀비의 ‘ I prefer not to~’란 적어도 진중권이 희화화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따위의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 혹은 ‘참여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중권의 글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바틀비적 태도에 대한 그 자신의 몰이해를 드러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진중권 자신이 들뢰즈, 아감벤, 네그리, 지젝이 ‘바틀비’를 이론화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결론에 가서는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따위의 ‘참여의 거부’로서 바틀비적 태도를 왜곡해 버린다.

  바틀비적 태도는 목숨을 거는 것이다. 자기를 소멸시키면서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주춧돌 하나를 조용히 빼냈을 때 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빼기의 형태가 바틀비적 태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촛불 시위대의 진압 경찰이라면 ‘나는 진압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이고, 사교육 현장의 선생이라면 ‘나는 가르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고, 그리고 ‘나는 대기업에 취업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고, ‘결혼을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이고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과 그리고 후세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나는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따위의 자기 합리화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어쨌든 세계의 모든 청년 실업자들이 동시에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란 태도를 견지한다고 상상해 보자. 2~30년 후에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불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3포 세대의 연애, 결혼, 출산 포기 선언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부정어, not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 I would not prefer to~'를 ’I prefer not to~'로 전환시키는 것,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하기를 선호하지 않습니다.’에서 ‘나는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로. 극복할 수 없는 빈곤과 실업에 의해 수동적으로 떠맡게 된 ‘3포’, 그 비극적 부정성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긍정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불가능성, 부정성을 가능성으로, 부정의 부정으로 바꾸어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냥 ‘아무것도 안’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님’의 차이, 극소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일시에 세계는 정지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 폭삭 무너질 수도 있다.

  하나의 멋진 상상, 혹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자기 절멸’은 인간 본성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하는 것일 테니, 윤리적이든 뭐 어떤 측면이든 하여튼, 뭔가 당당히 주장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통쾌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3장 마르크스 부분을 읽다보면, 뜻하지 않게 멜서스와 비슷한 생각을 만나게 된다. 물론 전혀 다른 목적에서긴 하지만, 방법적으로는 참 유사한 면이 있다.

  『 마르크스는 진정한 정치투쟁은 노동계급이 경제를 관리하는 책임감 있고, 신뢰할 만한 행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노동계급의 개혁 지향적인 정치와 싸우는 것 역시 진정한 정치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양면적 정치의 토대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여러 조건들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던 이들에 대해, 자본주의의 점증하는 모순으로 말미암아 장기적으로는 부적절함이 입증될 개혁주의자들에 불과하다고 끊임없이 혹평했다. 이는 결국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운전석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노동계급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것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p173~4

  다시 진중권의 이매진으로 돌아가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바틀비에 관한 진중권의 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 있다.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가 바로 그것이다. 진중권은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와 함께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를 바틀비적 태도의 예시로 들면서 싸잡아 ‘참여 거부’ 행위로 폄훼한다. 그런데 사민주의에 대한 좌파적 반대가 단순히 정치 행위에 대한 참여 거부와 동일시 될 수 있을까? 아마, 당신이 좌파라면 펄펄 뛰고도 남을 모욕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에는 그런 오해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아닌 개혁에는 분명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은 아무 때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으라는 걸까? 사실 바틀비적 태도에 대한 열광에는 좌파의 어떤 딜레마가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을 개선시킬 그 어떤 행위도 혁명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능동적인 행위 보다는 바틀비적 수동성, 빼기의 행위만이 가장 혁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빼기는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옴이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빼기를 의미할 것이다. 체계를 붕괴시키는 빼기, 이를테면 ‘나는 주식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모든 개미들이 일시에 주식에서 빠져 나온다면 주식으로 먹고 사는 부자들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 본 적이 거의 없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무작정 헤치고 들어가는 무모함도, 용감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쓸 때면 자주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잘 모르는 길이고 사방이 얽힌 길이라, 자칫하면 꼬꾸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이 뻗치는 대로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터무니없는 비약을 하기도 하고, 무슨 소린지 나도 의심스러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일관성도 없고, 마무리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름 있는 필자도 아니고 논객도 아니니 책임도 없다는 똥배짱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심이 쪼금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독후감 삼아 써 본 글인데, 실타래를 풀려다 오히려 엉클어 놓은 것 같다. 오늘은 엉킨 실타래지만 언젠간 또 어떤 문제를 살살 풀어 낼 실마리가 되 줄지 알 수 없는 일이라 뒤죽박죽 써놓은 글이라도 일단 띄워 본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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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 을 반쯤 읽고 나서야, 나는 살짝 안도의 웃음을 웃었다.

  얼마 전 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와 일종의 거래를 했다. 후마니타스는 책 한 권을 공짜로 보내주고, 나는 글을 한 편 써서 보내주는 것이다. 번역하자면, 내가 후마니타스의 판촉행사 중 하나인 서평단 모집에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뽑혔다는 말이다.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공짜 책 한권에 좋아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스를 열고 책을 손에 들자, 책의 무게 보다 채무의 무게가 먼저 전해졌다. ‘써야한다.’ 미끼만 떼먹고 도망가기엔 얼굴의 두께가 미치지 못하고, 읽을 만한 서평을 쓰기엔 능력이 닿지 않는다. 이토록 자명한 사실을 왜 나는 모르는 척 했는지 모르겠지만, 책은 도착했고, 글은 쓰여야 했다.

  책을 조금 읽어보자, 어쩌면 나는 서평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첫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8년)에서부터 최근의 저서인 『멈춰라, 생각하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일관하여 주장해 온 ‘적대의 전치(轉置, displacement)’에 관한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끔찍하게도 일본의 넷우익이 절멸을 외치는 ‘재일코리안’은 나치들이 가스실에 몰아넣은 ‘유대인’ 의 형상과 너무나 똑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서둘러 희미한 기억을 쫒아 지젝의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지젝이 ‘유대인’이라고 한 것을 ‘재일코리안’이라고 바꾸어 읽고,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웃었다, 살짝. 이건 서평이 아니라 공식에 대입하는 문제 풀이야.

 

 

 

 

1. 파시즘의 귀환? 

 

 

  <거리로 나온 넷우익>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회원들을 추적한 논픽션이다.(p8)” 재특회가 말하는 재일특권은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것을 빼앗아 누리고 있다는 특권인데,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상실감과 분노이고, 그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다.

  「 “지금 많은 일본인이 빈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꽤 많아요. 매년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일코리안은 외국 국적이면서도 우선적으로 생활보호 지원금을 받고는 일본에 대해 비판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곤을 이유로 재일코리안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특권을 향유하면서 차별 반대 운동이나 전쟁범죄 추궁 같은 사실무근의 반일 활동을 하는 재일코리안이야말로 일본의 적이 아닙니까?”(p57~8)..... 젊은이들이 직장이 없는 것도, 생활보호 지원금이 끊긴 것도, 재일코리안과 같은 외국 국적 주민이 복지나 고용정책에 무임승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뿐이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p60)」

  일본의 재특회는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니다. 이미 20C 초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파시즘이 그랬고, 다시 돌아온 유럽의 네오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현실은 단순한데, 원인은 복잡하다. 혹은 원인은 멀리 있고, 해결할 방법은 없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는 것 보다는 보이는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비록 그것으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현실이 달라 보이기는 하고, 어두운 삶이 갑자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2. 전치된 계급투쟁

 

 

  「“우리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특권에 대한 비판이고, 엘리트 비판입니다.” “원래 좌익은 사회의 엘리트잖아요. 예전의 전공투 운동도 사실은 엘리트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다들 특권계급이었잖아요. 차별이다 뭐다, 우리한테 따지는 노동조합도 다 엘리트에요. 그렇게 잘사는 사람들이 없어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엘리트들이 재일코리안을 비호해 온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일특권 문제에 경각심이 없는 거고요.” 여기서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비주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엘리트라고 규정함으로써 특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p60~61)」

  나도 재특회의 입에서 나온 ‘계급투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지젝에 의하면 계급투쟁이 맞기는 하다, 전치된 형식으로서의.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순수한 우파 인종주의처럼 보이는 그런 요소들조차 사실은 전치된 노동계급의 항의 형태인지 주시해야 한다. 물론 고용위기를 야기하는 외국 노동자들의 유입을 중단하라는 요구에는 인종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공산권 국가들로부터 흘러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과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주노동력의 유입은 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억제하기 위한 자본주의 전략 중 일부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부시가 노동조합의 압력에 굴복한 민주당보다 멕시코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합법화에 더 열심이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은 한물 간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부터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신비화시키는 것에 대칭적으로 “아이 씻은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듯이,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은 은폐하고 그것을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에 대한 단순한 주장은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1~2」

  일본의 재일코리안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식민지인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책임이 없다. 이 책에 의하면 오히려 그런 역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여하튼 이들의 위기의식은 재일코리안 뿐 아니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국인 등의 외국 이주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외국 이주민들 문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 수도 2011년에 이미 130만명이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정확한 수치는 찾기 힘든 것 같다. 불법 체류자 수가 상당할 테니)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하는 노동현장에서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곧바로 임금 하락과 일자리 경쟁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분노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자리를 뺏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로 향한다. 계급투쟁이 전치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은 진정한 적인 자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이 적대의 신비화이다.

  재특회가 ‘특권’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재일코리안과 일본의 엘리트 및 좌파를 연결 짓는 단순함은 우습지만, 엘리트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우리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물론 일베다. 솔직히 나는 일베를 잘 모른다. 게시판에 들어가 본적도 없고 그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 본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이 재특회와 비슷할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그들은 아마도 ‘루저’일 것이다.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의 저급함을 보면 그들의 학력 인증 소동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조금 현학적인 용어를 들이댄다면, 아마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재특회와 같이 엘리트를 미워하고 좌파를 증오한다. 그리고 관용(똘레랑스) 따위의 정치적 올바름(PC)을 조롱한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이야말로 반-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지젝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다문화주의에 의해 은폐되어 버리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특회나 인종주의자들의 ‘관용’에 대한 조롱은 엘리트 좌파가 은폐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자신들도 모른 채 폭로 하고 있는 셈이다. ‘관용 따위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물론 그런 다음 그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돌진한다. 돌격! 재일코리안. 돌격! 종북이.

 

 

3. 좌파적 꿈의 부재

 

 

  「“어쩐지 학력이 높고, 어쩐지 월급이 많고, 어쩐지 보호받고 있다, 가해자들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재특회 회원 대부분이 이런 가해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처지라는 사실인지도 모릅니다.”p344 ....이들 가해자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안정된 직장을 독점하고, 누군가가 지켜 주고, 발언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대변해 주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도 듣기 좋은 인권이나 복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뿐이다. 약자의 편인 척하면서 자신들은 편한 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유함까지도 독점하고 있다. 위선자이며 약탈자이다.p345...“그런 불만과 불안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게 재특회라고 생각해요.” p345」

  재특회라는 단어만 없다면, 이건 우리 사회가 소위 강남좌파에게 가지는 반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좌파가 진짜 좌파인가를 떠나서, 좌파는 왜 이렇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답하자면, 좌파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훈은 분명하다.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이 좌파적 꿈의 부재라는 공백을 채우고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4」

  우리나라 역시 좌파는 파산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우리가 본 것은 비전도, 능력도, 도덕도 상실한 추악하고 무능한 좌파였다.

  「“...지금 좌익의 어디에 매력이 있습니까? 반쯤 체제화된 좌익보다 아나키한 매력으로 가득 찬 우익이 젊은이들의 위험한 욕구에 훨씬 부응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장래의 전망을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자극으로 가득 찬 운동이 재미있죠. 뭐, 일본인의 지적 수준이 가장 낮은 시기에 인터넷을 매개로 우익만 성장한 것은 불행입니다만.”p348...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 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 현상’이 생긴 것이다.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이 변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p348」

  「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찾으려는 것은 일본인인 자신을 지켜 주는 강한 ‘일본’이다. 원래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흡수하는 기능을 해온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좌익이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p346~7」

  재특회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를 증언한다. 발터 벤야민의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p148) 문제는 재특회가 아니라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 현 사회에 대한 불만을 누가 어떻게 조직하는가 하는 점이다.

 

 

4. 포퓰리즘의 긍정적 기능 :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

 

 

  재특회의 활동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보통 포퓰리즘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위험하고 파괴적이고 무질서하다. 그런데 기존의 체계, 기존의 법질서 아래에서는 절대로 ‘잘 안 풀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정답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쳐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깨버리려는 이들의 욕구가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계몽된 자유주의-테크노크라트 엘리트에게 포퓰리즘은 고유하게 원-파시즘적인 것으로, 정치적 이성의 붕괴이자 맹목적인 유토피아적 열정의 분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폭동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5」

  국가라든가, 국익이라는 말만 나와도 파시즘 운운하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적인 열광은 언제나 광적인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심형래의 디워 논쟁을 거치며, 그런 의심은 더욱 공고해 졌다.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의 분출은 그렇게 나쁜 것인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기억해 보자. 플로리다에서의 부정 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는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취지로 부시를 차기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가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 ... 플로리다의 예는 그럼에도 민주주의 안에 계속 ‘대타자’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복종해야 하는 선거 규칙이라는 절차적 ‘대타자’ 말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이 중지시키는 것이 바로 규칙에 대한 그 무조건적 의지, 바로 ‘대타자’이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언제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이유이다. 만약 선거가 조작되었다면 ‘인민의 의지’가 강제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경고. 그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압력의 위협 말이다. 심지어 선거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가 존중되더라도 선거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이라는 것, 선거는 그 실체적인 가치가 다른 데 있는 정치적 과정을 공고히 해 줄 뿐이라는 태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8」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엘 고어를 승복하게 만든 민주적 절차, 민주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중지시키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있다.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평등주의의 논리.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안이 (형식적)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통과되었을 때, 그것을 중지 시킨 것은 국민들이 법 절차를 넘어 요구한 무조건적인 민주주의였다. 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때 가장 널리 불리고 가장 소리 높여 외쳐진 구호는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였다. 이것은 헌법이라는 법질서에 등록된 제1원칙이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법질서 위에 있다. 어떤 법적 질서나 제도라도 국민의 뜻에 반하게 되는 경우, 그 질서와 제도는 즉각적으로 중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포퓰리즘의 긍정적 차원은 민주주의적 규칙들에 대한 잠정적인 중지에 있다. 민주주의는 - 오늘날의 일반적 의미에서- 무엇보다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민주주의의 최소 정의는 적대가 논쟁적 게임으로 흡수되는 것을 보증하는 어떤 형식적 규칙들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7」

  규칙들에 얽매인 민주주의를 중지시키고, 새로운 규칙을 위한 정치적 논의를 촉발시키는 것이 포퓰리즘의 긍정적 의미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에는 반드시 인민people의 폭발적 분노, 열광적 지지, 광적인 헌신이 뒷받침 된다. 그것만이 오로지 인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운 십만의 촛불 행렬이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5. 포퓰리즘의 이론적 옳지 않음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우리가 채택해야 할 올바른 운동의 형식인가? 지젝은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재특회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재일코리안’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더군요. 한편에서는 조선인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고 욕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그런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받고 있는 일본인은 정말로 한심한 거죠. 그런데 그런 모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 역시 한때는 재특회의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공격하기 좋은 목표를 찾은 데 신이 났는지도 모르죠. 재일조선인은 불쌍한 약자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얽매여 왔던 우리에겐 터부를 깨는 쾌감이 있었어요. 비뚤어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저 자신도 터부를 깨뜨림으로써 세상의 권위나 권력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198」

  「그들이 가진 분노의 메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치관이 혼돈스러운 시대에 아이덴티티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겁니다. 사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질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간신히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죠. p346」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에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유도 알지 못한다. 혼돈 속에서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해 준 것은 또렷하게 제시된 적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구성적인 ‘신비화’가 있다. 그것의 기본 제스처는 상황의 복잡성과 대면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 그것을 유사-구체적인 ‘적’의 형상과의 분명한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에 기반한 현상, 무력함의 승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3~4」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위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23~4」

 

 

6. 앎에 대한 거절

 

  우리는 사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행위자’의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위험한 사례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나꼼수가 우리에게 심어준 환영이 그것이다. 가카만 물러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환영은 달콤한 허상이었으나 우리는 열광했다. 나꼼수의 성공비결은 포퓰리즘의 물신주의적 특성을 완벽하게 활용한 것에 있다. 상황의 복잡성을 가지 쳐내고, 가카라는 분명한 적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닥치고’ 가카에게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우울한 현실의 내재적, 구조적 문제는 은폐되고, 모든 원인은 가카라는 특수한 개인의 탐욕과 무지에 돌려졌다. 그러나 비록 나꼼수와 문재인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해결방법이 요원한 원인을 파헤치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적에게 떠맡기는 편리함을 선택했다. 우리 행동의 바탕은 바로 이 ‘앎에 대한 거절’ 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포퓰리스트들에게 사실 혹은 진실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일코리안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다는 사실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NLL포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 같은 것은 그들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신주의란 사고의 역작용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권리를 탈취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적인 것이 아니라, 재일코리안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모두 일본인의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인식이 그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재특회와 함께 토론해 보고 싶었다는 재일코리안이 막상 그들의 시위를 눈앞에 대하자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는 고백은 당연하다. 만약 재특회 회원이 이 재일코리안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는 이 재일코리안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총코는 죽어버렷!”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빌 것이다. 어떻게? 일상의 선량한 이웃 유대인을 둔 반유대주의자의 이야기가 이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이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의 선량함과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간극에 당황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추론에 이렇게 대답한다.

  「 그의 대답은 이러한 간극, 이러한 어긋남 자체를 반유태주의를 위한 논증으로 돌리는 것이리라.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느냐? 그들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겉모습의 가면 뒤에 그것을 숨기고 있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이중성이야말로 유태인의 근본적인 습성이다.” 바로 이렇게 처음 보기에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사실도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위한 논증으로서 기능할 때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p95<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7. 반동적 행위와 능동적 행위

 

  그렇다면 적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허상이라는 것인가? 적과의 투쟁, 계급투쟁과 같은 대의에의 헌신은 언제나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뜻인가?

  「미친 주장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히틀러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 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감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히틀러의 매혹에 반대해야 한다. 물론 그는 사악한 인간이고 수백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정적인 용기를 가지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추구한 것을 실행한 인간이라는 매혹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매혹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매혹이 틀렸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실제로 사태를 변화시킬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행위는 아무런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반동 행위이고, 그가 상연한 거대한 혁명의 스펙터클은 자본주의 질서가 지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뿐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31~2」

  여기에 반동적 행위(리-액션, 수동적)와 진정한 행위(액션, 능동적)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포퓰리즘적 폭력의 선동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속고 있는 군중의 분노를 (재)촉발하기 위해 그들은 자살을 범죄로 곡해한다. 즉 그들은 일종의 자살인 파국(내재적인 적대의 결과)을 외부의 범인이 일으킨 것처럼 단서를 조작한다. 이것이 진정한 급진적-해방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가 다른 이유이다. 이 상황에 꼭 맞는 니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해방적인 정치는 능동적, 즉 자기 비전을 강제하는 반면에 포퓰리즘 정치는 근본적으로 반동적,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반작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55」

  재특회는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외부의 침입자가 일으킨 범죄로 바꾸어 버린다. 이들은 스스로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능동적으로 행위 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을 구조화하고 있는 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볼 지혜도, 파괴할 용기도 없다.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외부의 희생양, 재일코리안이다.

  「회원들 중에는 세상의 모순을 풀 열쇠를 모두 재일코리안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치도, 경제도, 재일코리안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도 한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재특회야말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p356」

  적대는 존재한다. 적은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사회 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사회는 처음부터 조화롭지 않았고, 언제나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일자리는 재일코리안에 의해 탈취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작동 논리에 의해 언제나 항상 부족한 상태를 유지하게 구성된 것이다. 이 적대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는, 재일코리안을 수 만 번 절멸시킨다고 해도 결코 재특회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

 

 

8. 재특회의 토양 : 주변화는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찌질한 인간들, 사회의 루저, 쓰레기들은 무시하거나 주변화하면 자연히 고사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방송이나 과도한 관심이 이들을 키운다고 비판한다.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 역시 ‘사쿠라’라는 보수 위성 방송국이 스타로 키워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하나의 스타 상품이다. 상품이 성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시장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들어난 사건이 후지TV 반대 시위다. 6천명 이상의 일반 시민이 참가했다는 후지TV 반대 시위는 이 방송국이 한류 드라마를 많이 방송한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잘 생각해보면 방송국이 외국방송을 필요 이상으로 방영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대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이상하다. p314」

  「김치찌개가 인기 랭킹 1위로 소개된 것이 어째서 편향인가? 그런 하찮은 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에 떠다니는 희미한 ‘반한국’, ‘반북한’의 목소리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뿐이 아닌가? p314」

  「나는 거기서 재특회의 배경을 본 것 같았다. 후지 TV 반대 시위 참가자들은 돌출된 언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착점은 재특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재특회처럼 과격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낳고 있는 것은 이렇게 세련된 사람들의 어딘가 우울한 분노다. 재특회의 배후에 일반 시민이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p314」

  이 배후에 있는 일반시민들의 ‘우울한 분노’는 언제라도 요원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다. 재특회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특수한 불씨일 뿐이다. 줄지어 서 있는 일반 시민들이 ‘앎에 대해 거부’하고, 재특회가 내던진 재일코리안이라는 적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할 때 파시즘의 광풍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한 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위험이 일본보다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동지를 원하는 사람, 도피처를 원하는 사람, 돌아갈 장소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재특회는 유인하듯이 불러들인다. p356」

  진중권 같은 지식인이 일베 현상을 루저나 주변화 시켜야 할 쓰레기로 조롱하며 유희하고 있는 동안,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일반시민’을 ‘유인하듯이 불러들이’며 사회를 위험하게 움직이는 자들은 바로 이들 재특회나 일베,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혹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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