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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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책은 무엇을 봐도 시원시원하다. 한 호흡의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직진이다. 7월에 나온 신간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도 그렇다. 제목에 살짝 겁먹었지만, 내가 아는 장하준을 믿고 책을 신청했다, 일단은 도서관에. 그리고 1부를 읽다가 알다딘에 주문했다. 책갈피에 꽂아야 할 표지종이가 너무 많아졌고, 아무래도 밑줄이 필요할 것 같고, 무엇보다 두고두고 찾아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는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교과서>이다. 말하자면 대중들이 알아야 할 경제학의 ABC이다. 그런데 대중이 “경제학은 왜 알아야 할까?” 장하준이 프롤로그로 던진 질문 역시 이것이다. 답은, 경제학자들 또는 권력자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다. 에필로그를 앞당겨 빌려오면, 장하준에게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경제학에는 정답이 없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아무리 시장에 간섭하면 큰일 난다고 떠들어도, 그것은 정답도 과학도 진실도 아니다.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주장에는 어떤 집단의 이익이 걸려있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p435」

 

흔한 패러디 중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가 있다. 1992년 미국대통령 선거 당시의 빌 클린턴 측의 유명한 구호인 “It's the economy, stupid!”의 다양한 변주 중 하나이다. 경제가 장땡이란 말이다. 경제가 핵심, 토대인 것은 맞다. 그런데 그 경제를 결정짓는 것은 정치이다. 지젝은 정치와 경제가 시차적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가 주요 영역이며 그곳에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며 우리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주문을 깨뜨려야만 한다. 그러나 개입은 경제학적인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시차적 관점』p627」

 

입만 열면 경제, 경제를 외치며 심지어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재난마저 ‘경제 살리기’를 이유로 재갈을 물리는 박근혜 정부를 보면 이 난해한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즉각 알 수 있다. 입으로는 서민경제인데 하는 짓은 부자경제다. 담뱃값, 주민세, 자동차세는 올리고 반대로 기업가가 자녀에게 사업을 승계할 때와 손자에게 1억 원 이하의 교육비를 대어줄 때 증여세는 내리겠다고 한다. 투기도 규제도 모두 풀었다. 기업이 부담할 세금도 줄였다. 경제가 살아나기는 할 텐데 서민경제가 아니라 부자경제가 만세를 부를 것이다. 서민경제는 이미 수난의 시대를 걷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결정의 근원은 우리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국민들에게 보내준 화답의 선물이다. 정치적 지지에 경제적 선물 보따리를 안긴 것이다. 둘은 뫼비우스의 띠 모양을 한 하나의 몸체이다. 우리가 원하는 경제는 정치적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전문가들은 곧잘 거짓말을 한다. 부자들이 잘 사는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 모든 것들이 서민경제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그들도 자신의 말이 거짓말인지 모르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예로 참여정부를 들 수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와 국가개입 정책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국가경제를 살리고 싶은데 신고전주의자들의 자유방임주의가 맞는지 그에 반하는 경제 정책들 일테면 케인즈주의 같은 것들이 올바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관료들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대통령은 결국 한미 FTA가 서민을 살릴 것이라 거짓말을 했다.

 

세계적인 사례로는 레이건 정부의 경제 정책이 있다. 레이건은 대처 수상과 함께 전 세계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이끈 핵심 인물이다.

 

「레이건 정부는 고소득자들에 대한 세율을 공격적으로 깎으면서 이 조치로 부자들이 투자 이익 중 더 많은 부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투자 의욕을 촉진해서 부의 창출을 독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이 부를 더 많이 축적하면 더 많이 소비할 것이고, 이로 인해 일자리가 더 늘어나 더 많은 사람들의 수입이 증가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것을 낙수 효과 이론 (trickle-down theory)이라고 부른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는 동시에 레이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고 최소 임금을 동결하면서, 그것이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이다. 왜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해 부자들은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이 논리는 공급 경제학 supply-side economics이라고 불리며 향후 30년 동안, 아니 그 이후까지도 미국 경제 정책의 기본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p96~7」

 

우리 서민들은 처마 밑의 낙숫물이라도 받아먹으려면 일단 부자들이 투자 할 마음이 생기도록 부자들의 배를 두둑이 불려주어야 한다는 소리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 소위 ‘초이노믹스’ 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최근, 그러고 보니 마침 오늘 그가 방한하는 것 같다, ‘피케티 때리기’ 라는 기사로 타임라인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제학 논쟁이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가 그 주인공인데, 참고로 그는 71년생으로 쟁쟁한 한국 경제전문가들이 보기에 아들 뻘 정도의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햇병아리의 책 한권을 두고 이례적으로 전경련 부설의 한국경제연구원이 아시아금융학회와 공동으로 세미나를 개최해서, 한국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둥 열렬히 ‘피케티 때리기’를 했다. 왜 아버지 뻘 되는 경제전문가들께서 그런 야만적인 일을 하셨을까? 경향신문 기사의하면, 나는 아직 『21세기 자본』을 읽지 않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읽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의 방대한 분량의 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료하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지면 자본 소유자인 최상위계층에 부가 집중되는 게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돈이 돈을 번다’는 의미다.”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수익율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는 것인데, 300여 년에 걸친 20여 개국의 방대한 자료를 모아 분석한 결과라고 한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최고 소득세율 인상과 글로벌 부유세”로, 말하자면 부자들에게 세금을 왕창 매기자는 것이다. 그러니 피케티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노인네들이 모여 거품을 물었다는 것이 소위 ‘71년생 아들뻘 학자’ 망언의 전말이다. ‘피케티 민증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 피케티: 저는 ‘21세기 자본론’에서 이러이러한 주장을... 한국 학계/재계: 민증까 피케티: ?!?!?! ” 라는 트윗으로 풍자되기도 했다.

 

피케티 논쟁은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라는 질문이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경연의 두려움은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파급력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콘크리트 지지층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부자감세와 서민증세 정책에 제동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한경연의 논리적 근거는 레이건의 낙수 효과 이론과 같다. "고율의 누진소득세와 자본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피케티의 처방은 피케티가 의도하는 것과는 반대로 기업가의 투자환경을 악화시켜 그 결과 고용과 분배구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늘 듣는 소리지만, 들을 때마다 협박받는 기분이다. 찍소리하면 떨어지는 물 한 방울도 못 먹을 줄 알라는 소리다.

 

장하준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가 필요한 것은 이때라고 한다. 경제학에는 매우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 어떤 이론도 ‘절대반지’가 될 수 없다. 다양한 이론들은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레이건이 신봉한 신고전주의만이 현대경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4장 <백화제방>에서 장하준은 아홉 가지 경제학파를 소개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학파부터 조금 생소한 행동주의 학파까지, 그 장단점을 설명하는데, 어느 것도 그 하나만으로 완벽하지 않다. 예를 들어 케인즈학파는 거시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한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반면 지나치게 단기적 변수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장기적 변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취약하다. 여기서 장하준은 ‘지적 다양성과 경제학의 이종 교배’를 주장한다. 어느 한 가지 이론만 맹신하지 말고, 칵테일을 만들듯 여러 가지 이론을 섞어서 최적의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여하튼 다 좋은데 그래서 그걸 왜 내가, 경제의 문외한인 내가 알아야 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의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경제학을 하는 다양한 접근법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최저 임금, 아웃소싱, 사회 복지, 먹거리의 안전성, 연금 등등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제 정책과 기업의 결정 뒤에는 어떤 경제학 이론이 있기 마련이다 - 그 결정에 영감을 제공하든지, 더 흔하게는 힘을 가진 자들이 어차피 하고 싶었던 행위를 정당화하든지 하면서 말이다.

다양한 경제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힘 있는 사람들이 “대안은 없다.” 라고 할 때(마가릿 대처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책을 실행하면서 말했듯)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일반 대중이 이런 문제에 관한 의식을 확실히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전문 경제학자들이 과학적 진리의 수호자를 자청하면서 지적인 으름장을 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p166」

 

기업에 세금을 많이 매기면 일자리 없어져! 라고 협박을 할 때, 일자리는 기업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부와 협동조합이 일자리 창출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와 논거를 가지고 설파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라 다그칠 수 있다. 적어도 부자 경제를 살리면서 서민경제 살리기라는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그 이론들을 따져보고 대안적 이론들과 비교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겨우 입문서 하나를 가지고 유창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학자라든가 전문가라든가 하는 권위에 위축되지 않고 따져볼 태도를 갖게 될 수는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1부, <경제학에 익숙해지기>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1장은 인생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경제학 이론들의 뻥에 대해서 저자가 바라보는 경제학이란 무엇인가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2장은 초기 자본주의에서부터 2014년의 자본주의까지, 자본주의의 변화 양태를 간단히 짚어준다. 자본주의는 300년 정도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이 변화해 왔다. 아담 스미스 시대와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달라졌고, 시장도 금융시스템도 변화했다. 고전주의학파의 낡은 이론으로 현대의 자본주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리고 아마 경제학의 이론들이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3장은 2장에 이어 자본주의의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여명기인 1550~1820년, 산업혁명기인 1820~1870년, 하이눈 시기인 1870년~1913년, 파란의 시기인 1914~1945년, 자본주의의 황금기 1945~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한 과도기인 1973~1979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흥망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1980년~현재까지의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다. 연도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전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사건들이 떠오른다. 4장은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아홉 가지의 경제학 학파들에 대한 설명이다. 5장은 경제 주체에 관한 내용이다. 신고전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의 주인공이 개인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장하준은 진짜 주인공은 조직 즉 기업, 정부, 노동조합, 국제기구 등의 큰 조직들이라고 말한다.

 

 

제목만 보고는 1부의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장하준의 책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읽기가 그다지 힘들지 않다. 경제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아니, 정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관심이 있어도, 1부는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2부는? 아직 읽지 않았다. 2부의 제목은 <경제학 사용하기>로 1부에서 경제에 익숙해졌다면, 2부에서는 진도를 한번 나가보겠다고 한다. 그러니 좀 더 어려울 수는 있겠다. 여하튼 총 일곱 장, 250 쪽 정도를 다 읽고 나면 뭐라고 말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임 : 아홉 개 학파에 대한  한 문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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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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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단속사회』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한병철의 『투명사회』때문이었다. 『투명사회』는 한병철의 명성 덕분인지, 책 자체의 가치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들리는 통에 읽기는 읽어야 할 책으로 세뇌되어 있었다.

 

 

손바닥 정도의 판형에 겨우 100여 쪽에 불과한 『피로사회』는 2012년 출간하자마자 한병철이라는 재독 철학자를 단숨에 장하준과 같은 세계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은 이미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2011년 9월의 “Occupy Wall Street” 시위가 휩쓴 후였고, 우리 중산층들 역시 파산하고 있거나 언제 닥칠지 모를 몰락에 두려워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우리사회의 바닥에서 축축하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이미 피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나는 너무 늦게 왔다고 해야 할, 아마도 5~10년 전이었다면 우리 역시 중산층의 꿈속에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으니, 『피로사회』를 서점 한 귀퉁이에서 읽어 내리며, 여전히 ‘피로’를 말할 수 있는 독일사회가 부러웠다. 그럼에도 『피로사회』가 그렇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에 심히 공감했던 사람들과 서평을 지면에 싣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중산층에 속해 있었고 게다가 한병철이 독일사회에서 주목받는 지식인이라는 민족적 자부심이 한몫을 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류현진 경기를 보며 좋아하듯, 장하준이나 한병철을 읽으며 뿌듯해한다고, 빌어먹을 네셔널리즘 운운의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여하튼 『피로사회』는 한국사회와 살짝 빗나가 있으면서도, 또 한국사회의 어느 부분과는 정확하게 일치했던, 대중적 사회학이었다. 그런 면에서『투명사회』역시 비슷하다. SNS사회의 투명성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디지털 파놉티콘이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물론 우리사회에도 어쩌면 우리사회에서야말로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신뢰는커녕 기본적 투명성조차 이루지 못했다. 세월호에서도 총리인선에서도 GOP 총기사건에서도, 무엇하나 투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런 꼴을 보며 투명성보다 불투명 속에서의 신뢰를 선택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투명성에 대해 한병철이 부여한 온갖 부정적 의미들을 다 인정한다하더라도 우리가 ‘투명성’이란 단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병철이 독일사회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도 디지털 파놉티콘에 대한 사유를 그렇게 ‘투명성’이란 개념으로 풀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사회분석 자체로서는 『피로사회』보다는 『투명사회』가 우리사회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투명사회』와 『단속사회』를 묶어 떠올렸던 이유는 하나다. 두 책이 올해 3월에 거의 동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에서 두 책을 묶은 서평을 보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SNS 사회의 문제점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책을 엮어서 소개하거나 평하는 것에 별 문제는 없지만 내 생각으로 두 책은 그것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다. 『투명사회』는 SNS 사회 자체가 논의의 핵심이지만, 『단속사회』는 그렇지도 않다. 『단속사회』가 다루는 관계가 이것저것 많아서 꼭 무엇 하나를 짚을 수도 없다. 사실 단속사회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관계’ 이다. 이 시대의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며, 잃어버린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주장한다. SNS 상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회피, 차단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쉴 새 없이 접속”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사회 즉 “단속사회이다.

 

엄기호가 주로 주목하는 관계는 학교와 노동 현장 등에서의 그것이다. 각 장의 시작마다 ‘예문’처럼 들고 있는, 초등 교과서의 그것처럼 좀 촌스러운, ‘관계의 사례’는 거의 학생이거나 교사, 노동자들이다. 막상 이 예문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우만, 울리히 벡, 기든스 등의 사회학 이론들부터 철학, 경제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들이다. 그렇다고 구체적이거나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고, 학자들의 이름과 주요 개념어 혹은 알려진 문장을 인용하는 정도이다. 말하자면 ‘관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여러 권위 있는 이론을 통해 뒷받침하는 동시에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인 듯한데, 산만하다. 사실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어디서 들어본 것들 혹은 누구나 생각할만한 것들이다. 그것들에 유명한 사람들의 권위를 덧대었을 따름이다. 이 책은 정신을 집중하고 읽기에는 느슨하고, 대충 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차라리 1/3 정도로 줄이면 짜임새 있고 팽팽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흥미를 끌었던 내용은 교육에 관한 일화다. 수애라는 학생은 전형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제된 아이다. 수업시간 내내 잠자고 거울만 보는데 선생님들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 수애에게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그 답이 “노는 시간 10분을 위해서 수업시간 50분을 참는 법을 자기는 배웠다”였다. 우습게 들리지만, 여기에 근대 교육의 핵심이 숨어 있다.

「수애에게 학교는 교육기관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력 양성기관으로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수애가 말한 것처럼 “노는 시간 10분을 위해 수업 50분을 참는 힘”을 기르는 데에는 온전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벨트의 육체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해 50분 수업의 그 지루함을 참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전달에 실패했다고 하여 학교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은폐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결국 졸업장은 “이 종이를 받은 사람은 50분 지루함을 참고 10분 숨을 돌리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증하는 증명서다. p200」

교육과 노동의 근본 관계를 짚고 있는 이 서술은 대체로 류동민이라는 경제학자의 책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이미 칸트도 통찰하고 있던 것이다. 칸트의 교육론을 소개한 어떤 책에는(Kant and Education)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라 쓰였다.

바네겜이라는 사람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했다는데, 근대교육이란 결국 굶어죽지 않기 위해 지겨워 죽을 위험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가만히 있으라” 이후, 자꾸 이런 글들이 눈에 뜨인다. 근대교육의 숨겨진 목표는 지금까지 너무나 잘 수행되어 왔고,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무시무시한 효력이 비극적으로 발동한 것이다. 아이들은 지시대로 가만히 있었고, 어른들을, 교육을 믿었단 이유로 희생당했다. 우리교육은 이중적으로 아이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다. 교육의 맨얼굴은 승자독식의 경쟁구도로 뻔뻔히 내몰고, 숨겨진 얼굴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며 아이들을 죽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사회” 류의 책이 꽤 된다. 피로사회를 비롯해 잉여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까지. 그 외에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일베의 사상 등 제목에 ‘사회’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를 분석한 책들이 여럿 있다. 사회학에 별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 구경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읽게 된 책들이다. 사회학이란 그다지 오래된 학문은 아니다. 몇 년 전에 사회학의 창시자쯤 된다는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읽었다. 출간 연대가 1897년이니, 사회학이 정립된 것이 19세기 말쯤 되는가 보다. 『자살론』은 엄청 재미없다. 유럽 각 지역의 자살률을 근거로 자살과 사회 구조의 관계를 분석하고, 자살을 그 유형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고 뭐 등등인데, 지금으로 보면 통계치도 엉성하고 근거도 박약하다. 그래도 사회학 역사에서는 엄청 중요한 책이란다.

 

사회학이란 학문을 모르니, 왜 사회학이 발생했는지 따위는 잘 모른다. 다만 대중적인 사회학 책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삶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능력과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별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반 없다. 아이들도 이제 열심히 공부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경제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간의 농담거리가 아니라 냉혹한 사실이다.

도대체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학이란 이런 것들에 대한 현재적 답이 아닌가 싶다. 소크라테스와 공자 이래 철학 역시 수 천 년을 우리 삶에 대해 질문해 왔다. 그러나 철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체는 무엇인가? 등등....

우리는 왜 고독한가? 라는 질문에, 철학은 먼저 인간이란 원래 개별적인 존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물론 이렇게 단순하지 않지만 그냥 쉽게 대비하자면;;) , 사회학은 신뢰가 깨어졌다든가, SNS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식의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학 대중서는 바로바로 읽어야 한다. 몇 년 혹은 몇 십 년만 지나면 벌써 시대에 동떨어진 낡은 사고가 되어버린다. 어떻게 보면 철지난 신문과도 비슷하다. 그런 반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우리가 지금 걸려들어 허우적대는 사회적 관계들, 구조들을 분석해줌으로써 현실적인 눈을 갖도록 안내한다. 내가 이런 책들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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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당동 플러스 25 같은 책을 읽고 나서 단속사회'라는 책을 읽으면 못 읽습니다.
단속사회는 몇몇 사례를 통해서 전체인 양 말하는데 그것은 사회 연구의 기본적 자세부터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말리 2014-07-0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책인데 읽을만한 책인가 봅니다. 단속사회는 사례연구에 집중한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사회학 이론의 개괄서로 포지션 한것 같지도 않고 어정쩡해 보입니다. 산만하고 지루한데도 전체 평점이 좋은걸 보니 또 제가 보지 못한 장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05 15:19   좋아요 0 | URL
오호, 사당동 25는 빈민 가족을 25년 동안 추적하며 기록한 책입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추적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록하는 자의 욕망도 함께 노출됩니다. 매우 탁월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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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lowing 61, followers 46. 내 트윗이다. 트윗을 한다기 보다는 가끔 들여다보는 수준이다. 언젠가, 멘션이 강처럼 흐른다 혹은 비처럼 내린다는 표현을 듣고는 얼마나 신기했던지. 내 멘션창은 항상 정지상태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공적 발언을 주로 하던 트친께서 어느 밤 느닷없이 사생활 생방을 시작하면, 벌컥 열어 제친 화장실에서 벗은 몸을 목격한 것처럼 부끄럽고 황망하다. 이런 내밀한 것까지 보아도 되는 건지, 몰래 훔쳐보는 느낌에 몹시 껄끄럽다. 감정에 겨운 트친께서 느낌표까지 남발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언팔을 해버린다. 『투명사회』의 저자 한병철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포르노다. 그 사람과 더 가깝고 더 친밀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 멀고 더 낯설어 진다. 공적 영역에서 쌓인 아우라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신뢰와 존경도 사라진다. 선생님도 똥을 누지만, 똥 누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투명사회』는 재미없다. 한병철의 전작 『피로사회』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선 읽기가 쉽지 않다. 100쪽도 거의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한 페이지 넘기기가 그리 녹록치 않다. 미주가 99개니, 한 페이지에 한 개꼴로 주석이 붙었다. 그만큼 문장이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압축 속에는 플라톤을 비롯하여 벤담, 헤겔, 니체, 라캉,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바디우, 아감벤 등 이름은 들어본 철학자들과 거기에 더해, 들어보지도 못한 숱한 사상가들이 도사리고 앉아있다. 한 문장을 통째로 이해하려면 철학자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투명사회』는 어렵다.

 

『투명사회』에 난무하는 현란한 사상들 중 딱 하나의 핵심어를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 헤겔의 ‘부정성’ 이다. 이 책에서 ‘투명성’은 이 단어가 가진 일반적 의미의 긍정성과는 정반대로 철저히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다. 이에 반하여 헤겔의 ‘부정성’은 그 자체가 최고의 긍정성을 의미한다.

 

「긍정사회는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한다. 변증법의 바탕은 부정성에 있다. 그리하여 헤겔의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 등을 돌리지 않고, 부정적인 것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다. 부정성은 ‘정신의 생명’에 양분을 준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의 긴장을 촉발하며, 이로써 정신의 활력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 p20」

 

헤겔은 『정신 현상학』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길을 돌려 긍정적인 쪽으로 쏠림으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 때, 여기에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주체란 자기가 관여하는 범위 안에 있는 내용에 독자적인 존립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존재 일반을 지양하여 실체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외부에 맡겨 놓다시피 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p71~2」

 

정신이 힘을 발휘하고, 주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 를 할 때이다. 부정과 부정의 부정을 통해 자기의식은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정신이 나간 상태로 읽고 그 의미의 한 자락이라도 이해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어쨌든 헤겔 변증법의 핵심에는 부정성이 있고, 한병철은 투명사회가 몰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투명사회』가 예로 들고 있는 부정성은 가령 이런 것이다. 진리. 진리는 부정성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진리로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없는 참이 있을 수 없다. 그림자가 없는 빛이 없는 것처럼. 에로티시즘. 의미의 불명확함이 없는 것, 지시적인 명백성은 포르노다. 에로틱한 매력에는 알 수 없는, 신에게조차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 사랑의 부정성. 신뢰. 투명성이 신뢰를 만들지 않는다. 신뢰가 없는 곳에 투명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뢰는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낱낱이 까발려진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상대의 알지 못하는 부분, 그 부정성을 신뢰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한병철의 ‘부정성’이 헤겔의 ‘부정성’ 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겟지만, 저자는 이렇게 부정성을 투명성과 대립시킨다. 소제목으로 나열한 ‘긍정사회, 전시사회, 명백사회, 포르노사회, 가속사회,친밀사회,정보사회,폭로사회,통제사회’ 에 결핍된 것이 바로 부정성이다.

 

한병철에게 부정성의 반대는 ‘외설성’ 이다. 투명사회는 외설적이다. SNS는 모든 것을 노출한다. “배고파!” 도 “졸려..” 도 전시된다. 저자가 투명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정의하는 것도 이 포르노적 외설성 때문이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p102」

 

벤담의 파놉티콘은 합리주의가 극단적 방식으로 제도화된 사례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어떤 가치관의 결과일까? 포스트 정치, 포스트 진리, 포스트 이데올로기 등등의 ‘포스트- ’ 사회. 차라리 가치 자체가 없는 사회의 슬픈 귀착지가 아닐까? 진리는 없고 사실만 있는, 신뢰는 없고 정보만 가득한, 에로티시즘은 없고 포르노만 넘치는, 투명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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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6-1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정성이란 커피의 카페인 같은것. 투명사회가 추구하는 것은 카페인 없는 커피, 니코틴 없는 담배.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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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일베를 취재했다. 모자이크된 화면과 낯 뜨거운 자막들이 중간 중간 보였다.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을까 싶지만, 수 십 만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재미삼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중권은 <그것이 알고 싶다> 일베편을 조금 모자란 프로그램이라 평하면서, 속칭 ‘일부심’으로 통하는 일베의 자부심을 이렇게 규정했다. “‘자아’를 스스로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커뮤니티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며, “정확히 말하면 ‘자’부심을 가질 건덕지가 없는 아이들이 가상으로 만들어 느끼는 ‘타’부심”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이 일베를 대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불쌍한 애들이 관심 쫌 끌어 보려는 짓거리니, 가볍게 웃어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일베의 영향력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관심과 진지한 응대 방식이 일베에 영향력을 실어 준다고 진중권은 예전부터 주장했다. 그에게 일베는 한마디로, 무시해 버리면 자연히 사라질 불쌍한 집단이다. 그래서 진중권은 일베에 동정심을 표출한다. “거기에는 어떤 처절함이 있다. 일베 너무 미워하지 마라. 불쌍한 애들이다” 진중권은 가끔씩 일베를 불러들여 설전을 하며 놀아 주기도 했다. 진중권이 <그것이 알고 싶다>에 “일베의 공격성의 바탕에 깔린 열등의식을 정신분석으로 헤집어야 했다” 고 아쉬움을 표한 이유도 그들에게 적대감 보다는 동정심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정신분석적 접근을 했다면 과연 어떤 분석이 나왔을까?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은 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실제로 박가분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일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일베의 사상』은 한국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색이지만, 그 바탕에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이 깔려있는 것 같다. 박가분은 라깡이란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서문에 “일베는 본질적으로 진보와 좌파의 증상이다.” 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면서, 그의 이론이 정신분석적 틀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도 전이, 전치와 응축, 무의식, 은폐와 봉합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논증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분명히 적대 관계로 보이는 진보(혹은 좌파)와 일베가 실제로는 하나의 모태에서 태어난 쌍생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진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일베와 같은 증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주장하는 것에 있어 보인다.

 

일베는 본질적으로 좌파의 증상이다. 진보와 좌파의 존재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일베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베는 과거 촛불시위라는 정치적 이벤트가 개방한 공간 속에서 탄생했다. 그것이 보여준 급진성, 욕망의 정치, 자족적인 언설의 공간,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않는 윤리적 이상주의라는 바로 그 ‘촛불정신’은 오늘날 일베에 반전된 형태로 계승되었다. 일베에 대한 비판은 진보좌파가 스스로의 정치적 상상력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베를 도덕적이고 당위적으로 비판하기 이전에 그들을 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일베 유저들에게 바친다. p19

 

물론 박가분의 분석은 진중권이 말하는 의미의 정신분석과는 달라 보인다. 진중권은 아마 진보의 쌍생아로서의 일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진중권은 일베 유저들을 단순히 열등감을 가진 사회부적응아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가분은 혐오적 언사와 욕설이 난무하는 ‘일일 베스트 저장소’에 몇 달을 죽치고 앉아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일베를 통해 진보의 일그러진 얼굴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일까? 박가분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비방과 악의에 가득 찬 일베식 글쓰기 방식의 원조는 강준만과, 진중권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논객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객다운 글쓰기란 공격적이고 우상 파괴적인 스타일로, 감성과 논리 그리고 정치적/학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뒤섞어가며, 상대의 허점을 명쾌하게 논파하는 글쓰기를 의미했다. p77」

 

일베는 팩트 제일주의를 지향한다. 이때의 팩트는 맥락이 제거된 거두절미식 팩트이다. 귀신같은 신상 털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떤 단어를 썼는지 단박에 찾아내어 너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 식이다. 그런데 이런 공격방식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진보 논객들이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다. 우리에게 풍자적 통쾌함을 주었던 쥐박이, 닭그네, 좃선, 똥아, 딴나라당 등이나 노알라, 핵대중, 박원숭, 씹선비 따위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을 보면 상대를 ‘파시스트’, ‘소아병자’, ‘토론의 규칙을 모르는’ 수준 이하의 인간이라 부르며 비아냥거리고 모욕하는 방식을 즐겼다. 일베는 도를 지나치고 있지만, 진보논객들의 방식을 이어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또한 일베는 평등을 추구한다. 어떤 성역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존댓말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베에서는 누구나 ‘병신’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혐오할 수 있고 혐오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진보가 주창한 평등의 원리가 뒤틀린 채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베와 진보의 쌍생성은 형식적 측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2002년 촛불정국과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뚜렷한 이념이나 가치에 기반 한 것이 아니라 기성 정치에 대한 반동정서, 혐오와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인터넷의 정치적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것은 진보나 좌파라기보다는 오히려 내셔럴리즘과 결합한 반한나라당 정서에 더 가까웠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혐오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거대 보수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수구꼴통’, 친일독재 정당쯤으로 인식되고 비난당했다. 그리고 오늘날 인터넷 문화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어떤 명확한 가치나 이념보다는 무언가에 대한 혐오와 안티정서가 사람들을 결속시켰다. p98 」

 

현재의 일베를 움직이는 힘 역시 환멸과 혐오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둘 다 긍정적인 가치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좌파적 꿈의 부재와 우파적 비전의 실종은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적 국가를 열망하게 만든다. 더불어 이상적 국가를 단번에 실현해 줄 위대한 지도자를 갈망하게 한다. 2002년의 노사모를 홍위병으로, 현재의 일베를 파시스트로 경계하는 시각은 그것이 좌파든 우파든 이런 위험성을 일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의 정치적 풍경은 2002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감정적인 전이 대상이 옮겨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바라는 정상국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줄 국가란 (미국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 당당하게 말을 하는 대한민국이다. 그 반대급부로 (과거에 딴나라당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면) 지금은 ‘노완용’, ‘핵대중’ ‘촛불좀비’가 유행하고 있다. 정상국가의 실현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한 안티정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을 관통하는 문화적/정치적 코드이다. 국가와 인터넷과의 이러한 상상적 관계(정상국가에 대한 열망)는 인터넷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

 

2002년 진보와 네티즌들은 자신의 상상을 실현해 줄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노무현이란 현실 정치인에게 투사한 상상적 국가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고, 당연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실현할 수 없었다. 현실이 아니라 상상에 의해 구성된 지지 세력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전향자들이 속출했다. 일본의 평론가 요시모토 다카아키에 따르면 전향은 현실과 유리된 사상에 집착한 것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는 전향이란 자신의 사상적 논리가 지닌 모순이 현실에 비춰 선명하게 드러날 때,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상적 논리로 단순히 ‘갈아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촛불이 전향하여 일베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촛불의 사상이 일베의 사상으로 굴절된 것 이면에는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대중의 열망이 현실정치에서 좌절된 사정이 있다. 자신의 이상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역으로 그러한 이상을 과격하게 조롱하고 비웃는 것이다. 일베 유저들은 촛불시위 이후에야 나타날 수 있는 유형의 군중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촛불시위의 쌍생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시위에서 제기된 문제와 쟁점들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일베와 같은 존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234」

 

'촛불시위에서 제기된 문제와 쟁점들’은 경험상 단순하다. 상식과 원칙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는 아무것도 담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사실 텅 비어 있었다. 그 텅 빈 이름에 어떤 내용을 채워 넣을 것인지 사고하지도 토론하지도 투쟁하지도 않았다. 그 이름이, 강력한 지도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 믿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무현은 스스로 ‘강력함’을 거부함으로써, 독재자의 길은 피했지만,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영웅적 지도자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이, 가치관의 공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반대, 반동정서만으로 열정을 소진해야 하고, 상상적 국가를 그리며 적과의 키배틀에 나서야 한다. 넷 상의 이 적들만 섬멸되면 마침내 상상적 국가가 현실에 세워질 것이라는 환영 속에서 말이다.

 

박가분의 대안은 무엇일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의해 촉발된 촛불시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위는 애초에 좌파와 우파 모두 재전유하는 데 실패한 대중의 정념(사회 경제적 불안, 공포, 분노) 에 기초해 있었다.” 그것은 비단 2008년뿐 아니라 2002년의 촛불과 지금의 일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념을 촉발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를 극단으로 갈라놓고 있는 빈부 격차의 심화이다. 촛불시위나 원칙과 상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 경제적 적대가 있는 것이다. 일베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적당히 봉합하고 있는 이 적대를 비틀린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상을 다 바꾼 듯 요란 떨던 너희는 살만하냐? 우리는 다 같이 병맛이다.

 

「일베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치적 동질성과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표출될 수 없었던 사회적인 갈등과 적대들이 특유의 ‘혐오 문화’라는 전치되고 응축된 형식으로 표출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베의 혐오 문화는 합의지반이 존재하지 않는 실재의 정치적 적대에 뿌리내리고 있다. 일베는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 일상에서 남성과 여성이 겪는 성적 갈등 등 진보나 좌파들이 직면하길 꺼려하거나 혹은 적절한 방식으로 동원하지 못했던 적대의 에너지를 자양분으로 삼는 존재이다.p123 」

 

박가분은 여기서 ‘사회’ 공동체를 제안한다. 개인이 국가에 불가능한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함께 현실화할 수 있는 사회 공동체를 조직하여 국가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국가를 변화시키지 않고서 어떤 정치적 이상을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장소이다. 하지만 현실의 국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로부터 자립한 ‘사회’가 필요하다. 굳이 국가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타인과 소통하고 또한 그것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국가에 대한 상상을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싸우는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상을 유기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사회 없이 이상을 국가에 의해 곧바로 실현시키려는 기획에 그동안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국가를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p241~2」

 

갑자기(?) 등장한 ‘사회’가 조금 뜬금없이 들리기도 한다. 사회란 학생회라든가 노동조합, 협동조합, 지역사회의 자치조직 등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사회 조직들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튼튼히 뿌리내리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조직도 조직이려니와 국가를 향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커다란 정치적 비전이 이들 조직에 선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양한 자치 활동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공유된 정치적 비전이 전무하다. 좌파의 꿈의 부재가 대중의 정념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들끓는 정념이 극우적 이상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좌파의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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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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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저자의 트윗을 팔로우하게 되었다. 출판하자마자 입대한다는 애절한(?) 사연에, 하루에도 몇 번을 ‘사라~ 사라~’ 외치는 통에, 모른 채 할 수 없어 『잉여사회』를 주문했다. 물론 저자는 나를 전혀 모르고, 나도 대강 읽는 트윗 글을 제외하면 그를 모른다. 그런데 트윗은 참 묘하다. 막상 팔로우 당하는 사람은 상대의 존재도 모르는데, 팔로우 하는 입장에서는 막 아는 사람 같고 이럴 때 책이라도 한 권 사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특히 공적인 트윗과 사적인 트윗을 마구 섞는 사람의 경우, 그 사생활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일방적인, 감정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트윗에 익숙해지기가 아직도 쉽지는 않다. 여하튼 『잉여사회』표지 날개에 붙은 사진은 절로 ‘어머;;’ 가 튀어나오게 했다. 생각보다 통통하고 예상외로 단정하고.. 뭐 그런 모습이 트윗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게다가 1984년생이라니, 입대한단 말이 새삼 짠하게 느껴졌다. ...부디 건강하게 복무하시길 바란다.

 

 

 

  한윤형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올라가는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라는 표현을 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다.

  이 루저들이 최태섭이 말하는 ‘잉여’ 이다. 그러나 최태섭의 잉여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싸우지도 못했기에 루저도 아니다”. 루저라고 불릴 자격마저 박탈당한 이들 잉여, 그들은 누구이며 도대체 어떻게 출현했을까?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잉여에 대한 어떤 정의보다 마음에 날아 와 꽂히는 것은 바로 수 십, 수 백 통을 되풀이 써야했을 ‘자기 소개서’ 다. 무수히 거절당한 자기 소개서 속에 긴장해서 웃고 있는 그 얼굴들이 바로 우리 시대 잉여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잉여들을 가장 먼저 예언한 책은 『88만원 세대』이다. 한윤형은 이 책을 ‘묵시록’ 이라 표현했고, 최태섭은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래는 없다는 묵시록의 예언대로, 잉여사회는 도래했다. 짧은 인생을 아무리 들추어 곱씹고 곱씹어 작성해 본 들 대다수의 자기 소개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 암울한 사회가 온 것이다.

 

 

 

 

  『잉여사회』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는 조금 다른 형식의 글이다. 한윤형의 책이 수필에 가깝다면, 최태섭의 책은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대중화된 사회과학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다지 딱딱하지 않고 잘 읽히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책에서 라캉과 지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최태섭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로운 빈곤> 이라는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지만, 곳곳에서 라캉과 지젝의 용어가 보인다. 사실 ‘잉여’라는 말 자체도 그 영향권에 있다고 우긴다면 우길 수 있다.

 

  「잉여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 혹은 체계가 만들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작동할 때 잉여가 발생한다. 잉여는 전체가 설명하거나 포괄하지 못하는 비-전체이고, 체계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불쑥 등장하는 우발성이다. p79」

  「잉여는 그것이 전체나 체계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릴 때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가 체계와 전체에게 제공하는 곤란함이란 그것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p80」

  「잉여는 팔수도 없고,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며, 소비자로도 부적절한 어떤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는 숨을 쉬고 먹는 입은 있으되 말하는 입은 없다. 이들은 결핍 그 자체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구멍이다. p85」

 

  체계 혹은 세계는 비-전체( not-all) 라는 라캉의 정의는 그의 유명한 명제 ‘대타자는 없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비-전체는 다른 말로 W(hole)이라고도 하는데 이 구멍, 바로 이 잉여 때문에 체계는 전체가 될 수 없다. 잉여의 존재는 곧 체계의 불가능성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hole 없이 Whole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구멍 없이는 체계가 작동할 수 없다. 불가능성의 조건이 곧 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오드라덱’까지 등장하면 도저히 라캉과 지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잉여는 과잉이며 결핍이다. 남아도는 것이 잉여다. 사회에 남아도는 인간이 잉여인간이다. 그런데 잉여인간은 그 자체로 결핍된 인간이다. 사회 안에 그의 자리는 결핍되어 있다. 그럼에도 잉여는 사회라는 체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잉여를 만들어 낸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1997년 우리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만들어 낸 체계이다.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지만, 구조조정 없는 신자유주의란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잉여를 만들어내는 구조인 것이다.

  쓰 레기통에 넘쳐나는 자기소개서는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노력이 잉여를 진정한 잉여로 만든다. 결핍이 잉여의 ‘필요조건’ 이라면,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지만 그 만큼 슬프기도 한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 은 잉여의 ‘충분조건’ 이 된다.

 

 

 

 1부가 잉여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작업이었다면, 2부는 우리 시대 잉여의 생생한 모습을 소묘한 보고서다.

  최태섭에 의하면, 결핍과 과잉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 잉여들의 존재론적 위상은 좀비와 유령이다. IT 시대에 좀비와 유령이 대거 출몰하는 공간은 당연히 인터넷 세상이다. 디시인사이드부터 일베까지 잉여들의 활약상은 종횡무진이다. 잉여들은 딱히 어떤 편도 아니다. 자신들을 거절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잉여들의 아햏햏한 병맛은 예기치 않게 날카로운 세태 풍자가 되기도 하고, 약자를 향한 집단 폭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튈지 알 수 없는 무정형한 이질성의 이면에는 잉여들이 느끼는 공동의 감각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그것이 거칠고 패륜적인 욕설과 기행이든, 혹은 장난스레 외치는 잉여 선언이든, 혹은 잉여적인 것에 대한 기이한 열광이든 이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잉여성은 우리들의 발밑에서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불안한 흔들림과의 연관 속에 존재한다. 그 흔들림은 우리를 병맛 넘치고 잉여로운 ‘ㅋㅋㅋ'의 연대로 이끌기도 하지만, 끝 모를 적대의 최전선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p172」

 

  불안은 잉여시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키르케고르가 이미 불안을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은 ‘자유에의 현기증’이며,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젝 역시 키르케고르의 불안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어쨌거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에는 긍정성이 있다. 그 불안의 심연을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잉여들의 불안은 어떨까? 언뜻 보면 잉여들의 불안에는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여기에 자유니 구원이니 하는 단어들은 망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키르케고르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 했다. “자신의 자유의 심연 때문에 어지러울 때 정신은 어떤 유한한 긍정성 속에서 지지기반을 찾으며 자유를 포기한다.<시차적 관점 p182>”

 

  잉여들 역시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인터넷 세상이라는 안전한 지지기반을 찾아 불안을 외면한다. 그리고 적의 형상을 만들어 내 불안과 불만을 해소한다.

 

  「불안과 불만을 계속 유지한 채로 이어지는 교착상태와 신경쇠약은 그 해법으로 파시즘과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누군가 이 긴장을 해소해준다면, 눈에 보이는 확고한 적의 피로 우리들의 손을 씻게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외 상태’를 선언할 주권자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한 적도 없는 독재에 대한 향수는 ‘무언가가 앞으로 맹렬하게 나가고 있다’라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나가기는커녕 멈춰 있고, 오히려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제자리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다. p249 」

 

  유럽의 신나치주의, 일본의 재특회, 우리의 일베는 이렇게 탄생한 잉여이다. 이들이 내뱉는 과격한 언사, 폭력적인 행동, 위험한 사고는 그러나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다. 지젝은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히틀러가 나쁜 것은 그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용기가 없었다. 독일 자본주의가 처한 곤경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독일인들은 퇴폐적인 부르주아 질서로부터 깨어나길 원했지만,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꿈을 만들어 냈다.

 

 

 

  잉여사회를 돌파할 해답은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저자 최태섭 역시 두루뭉술한 희망을 던져 놓을 뿐이다. 살아남아, 그 속에서 성장하고, 연대하자?

그렇다고 누구처럼 ‘짱돌을 던지고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뻔뻔하게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 소개서의 스펙을 채우기도 바쁜 잉여들에게는 그저 웃기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계산은 이미 나왔다. 죽어라 쏟아 부어도 1% 혹은 10% 정도만이 잉여를 벗어날 수 있다. 체계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최태섭이 결어로 삼은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 에 일말의 현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넘치는 잉여력이 체계를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발밑을 흔드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온몸을 맡기는 용기가 필요할 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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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3-09-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글을 읽고 저자 최태섭을 팔로잉하려고 했는데 이미 입대했다면 뭥미?? ㅋㅋ

말리 2013-09-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어제까지 트윗에 출몰했는데, 아직 들어갔다는 멘션들이 없는 걸 보면... 붜 이 달에 가긴 간답디다. MRI에 내시경까지 샅샅이 훑어도 아픈데도 없다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