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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사 -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로런트 듀보이스 지음, 박윤덕 옮김 / 삼천리 / 2014년 7월
평점 :
“아이티혁명”이라고 말하면 주변사람들은 으레 “IT"로 알아듣는다. IT시대, 여기저기 남발되는 ‘혁명’ 이란 단어,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티공화국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2004년은 아이티혁명 200주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몇 년 사이의 책들에서 몇 번 아이티혁명을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고, 작년에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읽으며 다시 아이티혁명에 대한 짧은 내용을 보았다.
사실 아이티혁명은 서구가 중심이 된 세계사에서 지워진 혁명이다. 아이티혁명은 프랑스혁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과 함께 자기 완결적인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3대 혁명만을 근대 혁명으로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p177~8」
아이티혁명은 서구 자본주의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멸, 아프리카 노예무역,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이 없었다면, 17C 과학혁명과 18C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아이티혁명이 위대한 보편혁명으로 기록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서구의 발전이 아메리카 식민지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눈물 위에 이루어졌다는 수치를 조용히 묻어두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단편적이지만 매혹적인 몇몇 글들을 통해 아이티혁명에 관해 알게 되었고, 이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2004년에 출판된 로런트 듀보이스의 『아이티혁명사』는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하고 1783년에 독립을 승인 받았지만, 1863년에야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다. 미국의 독립과 노예해방에는 80년의 격차를 둔 두 번의 전쟁이 있었다. 아이티는 1791년 노예 봉기 이후 지속된 투쟁 끝에 1804년에 마침내 노예해방과 식민지 독립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어떻게 노예제를 폐지하고 독립 공화국을 이루어 낸 것일까? 그것도 백인 이주민이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그야말로 맨손으로 서구 열강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아이티혁명사』는 이 흥미진진하고도 슬픈 역사를 한 편의 다큐드라마처럼 풀어내고 있다. 혁명사를 머릿속에 도표처럼 그려 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장황하고 복잡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혁명을 이끌어 낸 주체 세력들의 역학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혁명의 요체는 구질서를 파괴하는 것보다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히스파니올라는 서쪽으로는 아이티공화국, 동쪽으로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이 섬을 발견한 후 에스파뇰라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영어화 되어 히스파니올라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섬 전체를 아이티라고도 부르는데 이 명칭은 섬의 원주민들이 식민지 시대 이전에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종차별 없는 독립 공화국을 세운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들이 새로운 국가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의 명칭인 이 ‘아이티’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아이티혁명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이티라는 이름의 선택은 독립선언에 광범위한 역사적 의미를 불어넣었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의 유럽 제국사 전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새로운 나라는 공식적인 식민 활동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세기에서, 그 신성한 유권자들의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p462」
아이티 공화국이 세워지기 전에 이 섬에서 에스파냐가 차지한 지역은 산토도밍고, 프랑스가 차지한 지역은 생도맹그라고 불렸다. 같은 이름을 자기 나라 식으로 부른 것이다. 에스파냐가 먼저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나중에 서쪽 지방은 프랑스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산토도밍고는 현재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런 까닭으로 이 책에는 계속 생도맹그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인종이 복잡하게 얽힌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프랑스령 생도맹그의 정치적 대립은 한층 더 다층적이었다. 아이티혁명이 프랑스혁명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생도맹그에서 반란은 프랑스 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그리고 백인과 자유유색인 엘리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자치를 주장하던 백인 농장주들의 정치적 행동은 재산에 입각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유색인 지주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뒤이어 흑인노예들에게 해방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 하나의 돌파구를 제공했다. 그렇기에 제임스가 반란 노예들을 프랑스의 상퀼로트와 비견되는 ‘흑인 자코뱅’ 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p477」
아이티혁명의 주체는 아프리카계 노예였지만, 제일 먼저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은 식민지 농장주와 본국 사이에서였다. 본국은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식민지가 오로지 프랑스 본국을 위해서만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식민지 농장주들은 주변 여러 나라와 밀무역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론이 대두하면서 식민지 농장주들을 불안하게 했다.
여기에 자유유색인과 백인 식민지 농장주들의 대립도 가세했다. 자유유색인은 백인 식민지 농장주와 아프리카 흑인 여성 노예 사이의 혼혈들로서 백인 농장주는 혼혈 아들과 그 어머니를 해방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자유유색인은 농장주가 되기도 했지만, 군인으로 복무하며 식민지를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외부의 적과 더불어 내부의 위험한 적인 노예들에 맞서 생도맹그를 지켰다. 자유유색인의 기여도가 커지면서 이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도 높아져 백인 농장주들의 경계를 불러 일으켰다.
식민지 농장주들은 본국에 대해, 자유유색인들은 백인 농장주들에 대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본국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혁명은 각 세력의 요구에 불을 붙였고, 프랑스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식민지의 상황도 시시각각 변화해 갔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은 마침내 식민지 노예들에게도 인간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본격적인 노예반란과 노예해방전쟁을 촉발하였다. 생도맹그의 중첩된 대립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1790년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이 노예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며 노예제와 노예무역은 변함없다는 법령을 발표 했다. 자유유색인 문제는 모호함 속에 회피되었다가, 1791년에 양쪽 부모 모두가 자유인인 자유유색인들에게만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 소극적인 권리부여마저 백인 농장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백인들은 “자유유색인들의 목을 따고, 프랑스를 버리고, 영국인들을 불러들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1791년에는 마침내 노예들이 봉기했다. 1791년 8월 생도맹그의 노예반란은 아이티혁명의 공식적인 시작이었다. 노예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계몽사상과 평등주의 이념 자체라는 주장도 있고, 그 배후가 반혁명적인 백인 농장주들이라는 상반된 보고도 있지만, 『아이티혁명사』의 저자는 반란노예들 자신이야말로 반란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그러나 폭도에게는 그들만의 이데올로기, 그들만의 역사,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왕당파와 공화파 백인들의 활동이 반란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그 반란이 진행되는 데 기여했지만, 반란 노예들이야말로 반란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따른 노예들처럼) 선동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족쇄를 깨라고 선동한 자유의 수호신”에 의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식민지에 퍼진 자유에 관한 소문과 몇몇 백인들의 “경솔한” 발언에 노예들이 고무되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사랑과 억압자에 대한 증오” 말고 다른 “선동가”는 없었다.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과 노예제를 유지하는 정부에 맞서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수단, 심지어 폭력을 써서라도 자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가랑쿨롱은 썼다. 그들은 폭력적이긴 하지만 때로는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하는 혁명 과정에 뛰어들었고, 급변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면서 다양한 이념들에 의지했다. p169~170」
1792년 4월, 노예반란에 대응하여 프랑스 국민의회(정확히는 입법의회)는 자유유색인들에게 백인들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이제 식민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자유인과 노예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인 사이에는 어떠한 인종차별도 없을 것임을 선언했다. 국민의회는 권리를 획득한 이 새로운 시민을 통해 식민지를 지키려 하였다.
「이는 대단한 진전이었다. 아메리카 노예제 사회의 한복판에서 인종에 의거한 법적인 차별이 금지된 것이다. 이 법령은 생도맹그의 수많은 자유유색인들과 함께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의미 있는 정치권력을 가지게 될 것을 보장했다. 생도맹그의 노예 반란은 노예제를 구하기 위해서 인종 평등을 부여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역설적인 방식으로 정치의 지평을 확대했다. p208」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 자유유색인들은 선봉에 서서 노예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노예반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백인 농장주들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793년이 되자 노예반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생도맹그에서 제국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793년 1월, 급진 공화파가 주도한 국민공회가 루이16세를 처형하였다. 그러자 영국과 에스파냐가 포함된 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에스파냐는 생도맹그의 반란과 내부 분열을 이용해 생도맹그를 손쉽게 차지하려고 하였다. 에스파냐는 자유를 대가로 반란 노예를 모집했고, 영국은 먼저 백인 농장주들을 끌어들였다.
「농장주들에게는 적의 편에 서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노예제를 구하는 대신 노예제 철폐를 위한 상황을 낳았다. 그들은 공화국의 배신자가 됨으로써 노예들이 프랑스의 시민이자 수호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농장주들은 고립무원의 공화국 감독관들이 새로운 동맹자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프랑스도 에스파냐처럼 반란 노예들을 이용했다. 1793년 2월 식민지 담당 장관은 송토나에게 프랑스를 위해서 싸우는 반란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p246」
식민지 감독관은 공화국을 지키는 흑인전사들에게 자유와 함께 프랑스 시민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약속했다. 마침내 1794년 국민공회가 공화국의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공식 폐지하고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피부색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비록 곧바로 훼손되고 공격당하긴 했지만 새로운 질서는 원칙적으로 비타협적인 평등을 토대로 삼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아이티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투생 루베르튀르는 처음 에스파냐를 위해서 싸우다, 1794년에 프랑스 공화국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루베르튀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이 획득한 자유를 보호하고 확정하는 과업을 떠맡았다. 흑인 노예 출신인 그는 우리의 자연스런 추론과는 다르게 해방 노예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적인 법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혹은 왜 그래야만했을까?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유는 쟁취하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베르튀르는 반란의 핵심에 있었고,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 자유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1794년에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원칙에 충실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프랑스 국민은 생도맹그가 지난 세기 동안 생산했던 상품들을 계속해서 대서양 건너로 보내 줄 때에만 노예해방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유는 달콤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여전히 달콤한 설탕이 필요했고, 설탕과 함께할 커피도 필요했다. 한 당대인의 설명에 따르면, 루베르튀르는 이런 금언을 남겼다. “흑인들의 자유는 농업의 번영을 통해서만 확고해질 수 있다.” p302~3」
프랑스에는 여전히 노예폐지 반대론자들이 많았고, 해방노예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이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강제적으로 농장에 머물러야하고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해방노예들은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농장 노동자들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목표가 노예제를 부활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항거하기도 했다. 루베르튀르의 역설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루베르튀르는 1800년 10월에도 노동규제를 강화하는 법령을 발표 했다. 이것이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그의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지만 그때까지 루베르튀르의 의지는 단호했다.
「1794년 이후 루베르튀르는 시종일관 해방노예들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행하면서, 노예해방을 수호하고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러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798년에 그가 선언한바, 식민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생도맹그 인민’의 책임이었다. 1801년에 그는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식민지 경제의 재건이 “특히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식민지의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던 그는 과거가 식민지를 꼼짝달싹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도맹그는 설탕과 커피 생산자로 성장해 왔고, 현행 대서양 경제에서 생도맹그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생도맹그는 오랫동안 식량 수입에 의존해 왔는데, 1790년대 말에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질질 끌면서 대외 교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생도맹그는 식민지의 전통적인 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해야 했다. 이는 단지 경제적 필요뿐 아니라, 루베르튀르가 알아챘듯이 정치적 생존의 문제였다. 생도맹그 인민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발언권을 가지려면, 오직 강력한 플랜테이션 경제에서만 가능한 경제적 자립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농장 너머의 미래를 내다보는 해방노예들의 열망을 억눌러야 했다. 그러나 1800년 10월 엄중한 법령으로 노동 규제를 강화하면서 그가 명확히 했듯이, 이는 루베르튀르가 지불해야 할 값비싼 대가였다. p370~1」
그런데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루베르튀르가 제안한 체제는 그가 맞서 싸웠던 구질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흡사했다. 그래서 예전의 농장주와 지주들은 노예제가 부활할 것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1801년 11월에 루베르튀르는 1800년 법령을 엄격히 실시하고 이를 감시하는 새로운 법령을 발표 했다. 이로써 루베르튀르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가 지배하는 식민지는 사회 계서제, 강제 노동, 폭력 진압에 기초한 사회가 되었다. 그 포고령은 진정한 자유가 플랜테이션 경제와 공존할 수 있는 중도 노선을 찾아내는 데 루베르튀르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가 되었다. 몇 달 뒤, 루베르튀르를 박살내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함대가 몰려왔을 때, 그는 생도맹그의 경작자와 도시 주민들은 물론이고 장병들 사이에서도 자기를 위해 기꺼이 싸울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루베르튀르의 체제를 노예제와 혼동한 프랑스 사람들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자유에 가한 많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해방노예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보다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88 」
물론 진짜로 어려운 것은 어둔 밤의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다. 당연하게도 해방노예들의 이상과 희망은 하늘높이 닿아있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경제적 자립 없이는 정치적 자유가 유지될 수 없었고, 왜곡된 플랜테이션 산업 구조에서 경제적 자립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다. 농장 노예에서 농장 노동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지 해방노예들은 그들을 예속했던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길은 진정 그것 뿐 이었을까? 모르겠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한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보면 대안을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루베르튀르는 1798년 영국을 몰아내고, 1800년 자유유색인이 일으킨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에스파냐령 산토도밍고까지 점령했다. 루베르튀르가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정복한 것이다. 루베르튀르의 눈부신 군사적 성공과 생도맹그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독재로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생도맹그에는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 프랑스를 장악한 나폴레옹이 식민지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하려 했기 때문이다.
1802년 프랑스 군대가 생도맹그에 상륙했다. 보나파르트 정부는 생도맹그 원정을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인 야만주의에 맞서는 서양 문명인들의 십자군”으로 규정했다. 생도맹그의 아프리카 흑인들은 이제까지 다양한 세력과 연대와 대립을 거듭하며 투쟁했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오직 노예제 폐지와 자유였다. 자치권을 획득하려 했지만 식민지로서의 생도맹그에 대한 저항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낯선 땅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고전을 거듭했지만, 1802년에 투생 루베르튀르를 항복시켰다. 이 항복이 프랑스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전염병이 창궐할 시기까지의 위장 항복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프랑스군의 계략에 넘어간 루베르튀르는 항복 조건과는 달리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803년 59세의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의 어느 감옥에서 뇌졸중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아이티공화국 독립의 아버지로 길이 남은 투생 루베르튀르지만 정작 자신은 아이티의 독립을 보지 못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억압했던 이율배반적 통치로 해방노예들의 불신을 초래하기도 했다.
루베르튀르에게 승리한 프랑스는 생도맹그의 흑인들이 고대하던대로 더 무서운 적을 만났다. 열병의 계절이 시작되자 그 섬에 적응되지 않은 프랑스 병사들 대다수가 황열병으로 쓰러졌다. 예를 들어 1803년 중반에 도착한 폴란드 연대는 열흘 만에 절반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여기에 때를 기다리고 있던 생도맹그 흑인들이 가세했다. 생도맹그 흑인노예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노예제 부활 법령이었다. 나폴레옹은 노예제 부활의 의도를 숨기려 교묘히 작업하고 모호한 수사를 썼지만 해방노예들에게 그 의미는 명백했다. 전쟁은 점점 잔인해졌고 양쪽 모두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1803년 11월,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생도맹그 흑인들의 승리였다. 그해 12월에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독립전쟁을 최후의 승리로 이끈 데살린은 원주민의 명칭을 복원하여 이 땅을 아이티라고 이름 붙였다. ‘아이티’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끌려오기 전의 이름을 되찾음으로서, 이 땅에서의 아메리카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상징이 되었다.
아이티 독립혁명은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티 공화국의 역사는 독립과 함께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이후 200년의 역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미 예견하고 고심했듯,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속에 아이티 경제는 무너졌다.
1825년에 아이티 정부는 외교․경제 관계 수립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노예해방과 독립에 의해 농장주들이 상실한 것을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역사에 혁명을 성공시킨 대가로 그들이 패배시킨 구세력에게 배상금을 지불한 사례가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티는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 은행에 돈을 빌려야 했고, 그것이 20세기까지 아이티 경제와 정치의 발목을 잡았다.
왜 프랑스는 이렇게 가혹하게 아이티를 짓밟았을까? 프랑스뿐 아니라 주변 열강들이 모두 그랬다. 아이티의 독립이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2004년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p178~9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아이티공화국의 현대사가 비록 빈곤과 독재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제국주의 ‘백인국가’들이 바랐던 대로 아이티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이티혁명사』의 저자 듀보이스는 아이티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이티혁명의 충격은 엄청났다. 역사상 성공한 흑인 혁명의 유일한 사례로서, 아이티혁명은 18~19세기의 정치적․철학적․문학적 흐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이티혁명은 온갖 피부색을 띤 모든 사람이 자유와 시민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써 영원토록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 폐지의 핵심적 부분이었고, 따라서 인권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초를 닦은,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티혁명의 후예들이고, 또한 우리는 이 조상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