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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트위터는 지식인의 무덤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기가 자기를 파묻는 그런 무덤 말이다.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책에서 혹은 공적 활동에서 쌓아온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어쩌면 툭 튀어 나온 그 말들이 그가 쓴 책보다 더 그라는 인간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몇몇의 이름들은 그렇게 묻혔다.

 

 

황현산이라는 노학자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트위터에서다. 1945년생이니 트위터 입문 자체가 예사롭지는 않다. 특히 트위터의 사정을 잘 아는 주변인들에게는 무척 염려스러운 일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사실 트위터는 이전투구라는 말 그대로, 진흙탕 바닥이 아닌가. 몇몇 맨션들이 황현산의 트위터 입문과 우려를 전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그의 맨션들이 리트윗 되기 시작했다. 트위터에서는 보기 드문, 좋은 말들이었다. 그의 곧고 깨끗한 문장에 끌려 나도 팔로우를 했다.

 

“구두가 크십니다, 불판이 뜨거우십니다, 서비스업체 직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직원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어찌 되건 손님만 좋아하면, 나라가 어찌 되건 돈만 벌면, 결국 같은 생각이다.”

 

황현산이 일흔이 다 된, 불문학자이자, 비평가이며, 고려대 명예교수라는 것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만큼 그의 맨션 어디에도 일흔 먹은 노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문학공부 :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는 한국인에 대한 글을 쓰라는 숙제에서 초등학생이 ‘오빠와 나는 울었다’ 로 썼다. 오빠와 네가 한국을 대표하냐고 묻는 바보도 있다. 대표는 무슨 대표, 표본이라면 모를까. 시에서는 이런 표현을 뭉뚱그려 옛날에는 상징이라”

 

“했고, 오늘날에는 보통 환유라 한다. 부분으로 전체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서술로 거대하거나 복잡한 현상의 징후를 드러내는 장치.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은 은유가 아니라 환유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남매와 함께 울어야 아는 것이라서.”

 

“은유는 보통 자기에게는 확실하나 다른 사람은 아직 감지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한다. 환유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뭉크가 불안한 사람을 그릴 때 그 불안이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고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싫어한다.”

 

“은유는 의미를 내포한다. 환유에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좋은 환유는 사실상 아무것도 담지 않는다. 환유에서 의미에 해당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 환유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전체다. 그래서 환유를 읽기 위해서는 좋은 감각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런 맨션은 트위터로 읽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어떤 트위터러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서재: 서재는 감옥이다>는 네이버의 글을 링크놓았다. 읽다가 문득 공교롭게도 같은 불문학자였던 김현이 생각났다. 문학에 관해 무척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배도 고향도 전공도 비슷한데, 김현 선생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옛날에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가리켜서 소등에 붙은 등에라고 했죠. 소한테 붙어서 소로 하여금 잠 못 자게하고 소를 못살게 군다고 말했는데 문학의 기능이야말로 거의 이런 기능입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가, 내가 나태하지 않는가, 내가 행복한가, 또는 내가 행복한데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가. 늘 이렇게 따져 묻게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는데, 그 깊은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말은 또 다른 말로 하면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핥고 다시 그 상처를 바라본다는 말일 겁니다.”

 

김현은 어디선가 문학이란 우리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를 찾아보려고 김현 문학 전집 1권 『한국문학의 위상 / 문학 사회학』을 뒤적였는데, 같은 표현은 찾지 못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들은 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설책을 읽어서 무엇 하려느냐?”는 힐난을 실마리로 문학의 효용에 대해 풀어 놓은 부분을 찾았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p50」

 

문학이 어떻게 억압의 정체를 간파하게 만들고, 세계의 개조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일까? 김현은 이렇게 답한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다. p52」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마음이 평온해 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자꾸만 우리를 찝쩍인다. 편안한 잠을 방해하며 여기저기 긁적이고 뒤척이게 만든다. 배고픈 거지가 문턱에 앉아 있는데, 밥맛이 꿀맛일 수는 없다. 배고픈 거지는 우리 모두의 추문이자, 소등의 등에다.

 

 

내게 김현과 황현산을 이어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서재: 서재는 감옥이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엔 황현산이 뽑은 <내 인생의 책>도 있고 황현산이 직접 쓴 책도 소개되어 있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아폴리네르 등의 아득한 이름들을 보다가, 그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점찍었다. 도서관에는 그의 산문집뿐만 아니라 그가 번역한 벤야민의 책도 있었다. 제목도 길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제정기의 파리』. 두 권을 빌려와 만만한 산문집부터 잡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에세이를 좀 만만하게 보고 있다. 이를테면 책상에 앉아 집중해서 볼 책에는 넣지 않는다. 『밤이 선생이다』도 심심풀이 땅콩처럼, 물론 요즘 땅콩은 비행기의 항로도 바꾸지만, 휴식이 필요할 때 뒤적이기 좋겠다 싶었다. 더욱이 글 자체가 신문에 실었던 것들이니 연속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쳐 천천히 읽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글들은 마치 이문구의 『관촌수필』이나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같은 느낌을 준다. 어린 시절을 보낸 황현산의 섬마을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 서정적인 글들의 따뜻한 추억담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현실의 뒤엉킨 문제에 도달해 있다. 우리를 유혹했던 아련한 기억들은 기실 소등의 등에였고, 배고픈 거지에 관한 추문이었다. 그렇게 황현산은 과거와 현재를, 과거에 대한 몽상과 현실의 억압 사이에 놓인 거리를 드러낸다.

 

<과거도 착취 당한다>라는 첫 번째 글은 유신시대에 외국서적 구하기의 어려움을 코믹하게 풀어 놓는다. 서대문 국제우체국의 통관 업무를 담당하는 미스 아무개의 횡포와 시비(?)에 시달리다 못해 끝내 이성을 잃고 창구의 가로대를 뛰어넘은 사건은 부조리하면서도 우습다. 아니 너무 부조리해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에는 어느새 박정희를 존경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이런 학생들을 보며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의 충동을 다시 느낀다며 황현산은 이렇게 쓴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009년의 글이지만 또 오늘에 읽어야 할 글이다.

 

 

황현산의 글은 김현의 글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황현산의 글을 김현의 글만큼 아름답게 읽지는 못했다. 두 글 사이에는 나를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시킨 20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황현산의 글은 김현의 글보다 더 구수하고 더 온화하며 더 편안하다. 그럼에도 김현의 글 못지않게 날카롭고 적확하다. 황현산의 글을 보며 너무 일찍 가신 김현선생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다. 내가 김현을 생전에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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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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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언제 또 다시 읽을까 싶어, 독서회 책으로『댈러웨이 부인』이 정해진 김에『등대로』까지 읽었다. 울프의 글에 조금 익숙해 진 탓인지,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렇게 섬세한 의식의 흐름을 펼쳐내려면, 역시 작가 자신의 경험과 환경에 바탕해야 할 것이다.  귓결로 들은『자기만의 방』에 대한 선입견 탓에 울프가 대단한 페미니스트나 박해받은 여성이 아닌가 싶었지만, 울프는 요즘 식으로 하자면 상위 1%의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났다.

 

작가연보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혀있다.

 

1882년 

1월 25일 런던 출생.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영국 인명사전』을 편찬하고, 명망 있는 《콘힐 매거진》을 편집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였으며,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은 귀족 혈통의 뛰어난 미인이었음.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친분이 두텁고 교양이 높은 집안에서 성장함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모두 딱 이런 상류층의 50대 귀부인의 의식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1925년, 『등대로』가 1927년 출간 되었으니, 비록 미인이었던 엄마를 모델 삼았다 해도, 버지니아 울프 그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댈러웨이 부인과 램지 부인 모두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중받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그녀들 자신의 내면은 버지니아 울프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기력을 다해 무의미를 의미로, 균열을 평화로 바꾸어 나가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하나의 질문 앞에 그녀들은 망연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 그녀는 과연 답을 찾았던 걸까? 『등대로』에서 램지부인을 회상하던 릴리 (버지니아 울프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건 의자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 p328 」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열고, 램지 부인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걸까?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기적과 희열이 삶의 균열을 메워주고 심연과도 같은 저 무시무시한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도록? 그러나... 그녀는 일상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

 

 

추기:

이 예민한 여성도 무심코 어떤 독자들에게는 상처를 준다.

 

「실로 그녀는 모든 남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어쩌면 그들의 기사도 정신과 용기 때문에, 그들이 조약을 협상하고 인도를 통치하고 재정을 관리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리했다. p13 」

 

유럽의 독자들은 이런 문장에서 아무런 껄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등대로』의 1부 배경은 1909년이다.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를 자랑질하며 세계 각지로 총독을 보내고 있던 때, 인도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독립을 외치며 열사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성들의 존경을 받는 램지부인은 '인도를 통치하고' 라는 말을 아주 우아하고 무심하게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 그 섬약한 여인도 실로 그렇다. 그 짧은 말 속의 피와 눈물과 고통을 그녀는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백년쯤 뒤의 어느 3세계 독자에게 그것이 목구멍의 가시로 남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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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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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이었던 남자』만큼 제목이 이상한 책도 없다. ‘목요일의 남자’라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목요일의 아이』라는 책이 있었다. 중학생 때 읽으며 울던 기억이 난다.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수요일의 아이는 뭐였더라? 알라딘을 뒤져보니 책은 절판이고, 다행히 어느 분의 리뷰에 고스란히 노래(시?)가 남아있다.

 

월요일의 아이는 이쁘고요,

화요일의 아이는 의젓 하구요,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많아,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

금요일의 아이는 사랑스럽고,

토요일의 아이는 고생이 많아,

일요일에 태어난 꼬마아이는 귀엽고, 명랑하고, 싹싹하지요..

 

 

하느님이 낳은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월요일에는 빛을

        화요일에는 하늘, 땅, 바다를

수요일에는 땅위의 푸른 식물을

목요일에는 해와 달을

금요일에는 물과 땅과 하늘의 동물을

토요일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일요일에는 쉬신 것 같다.

(기독신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창세기를 보니 대충 이렇게 나누면 될 것 같다. )

 

『목요일 이었던 남자』의 목요일은 길을 떠나는 아이가 아니고, 해와 달처럼 빛을 비추는 시인이다. “만일 사임도 자신을 볼 수 있었더라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 것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간사가 최초의 형태 없는 빛을 사랑하는 철학자를 나타낸다면, 사임은 그 빛을 특별한 형태로, 즉 태양과 달로 나누어 비추려 하는 시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때때로 무한성을 추구하지만, 시인은 항상 유한성을 추구한다. 그에게 위대한 순간은 빛이 아니라 태양과 달이 창조된 순간이었다. p202"

 

그런데 월요일에 창조한 빛은 무엇일까? 언뜻 태양과 달도 없이 어떻게 빛이 있나 싶었는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주일 것이란 생각이 드니, 그건 빅뱅의 빛이구나 싶다.(거듭 신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해석한다.) 여하튼 우연이지만, 길을 떠나는 목요일의 아이와 시인 목요일은 딱 어울린다. 사임이란 시인이 월요일이었다면!, 아... 이쁜 시인이라니! 그런데 이렇게 뒤죽박죽, 왔다갔다 리뷰를 쓰면 글이 산으로 갈 것 같은데, 사실 『목요일 이었던 남자』란 책이 이렇게 씌어있으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널을 뛴다. 아니 나만 그렇게 읽은 건가?

 

『목요일 이었던 남자』에는 일곱 명의 남자가 나온다. 짐작대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다. 그렇다고 일요일을 귀엽고 싹싹하고 명랑하다고 연상하면 곤란하다. 우연의 일치는 딱 목요일에만 해당한다. 모든 것에 해당한다면 우연이라 쓸 수가 없을 테니. 이 책의 원제는 『The Man Who Was Thursday』, 부제는 A Nightmare 악몽이다.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앨리스처럼 일곱 요일을 만나고 온 사임의 개꿈 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꿈은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성취’이다. 꿈에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꿈은 위장되어 있다. 꿈이 그렇게도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이유가 바로 위장이라는 꿈 작업 때문이다. 꿈은 응축과 전치라는 위장술로 무의식의 검열을 교묘히 피해간다. 응축과 전치는 언어의 은유와 환유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목요일 이었던 남자』에는 은유와 환유가 넘쳐난다. 꿈의 위장술이든 언어의 마술이든, 숨기고 바꾸는 작업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이게 뭐야!, 할 수 있는 책인 반면, 꿈의 핵심이 꿈 작업에 있고 언어의 묘미가 교묘히 드러내고 은근히 감추는 기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아주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 꿈이나 언어와는 별개로, 가장 훌륭한 위장술은 무엇일까? 가장 그럴듯하게 속이는 기술은 참말로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일곱 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낮에 정장을 차려입고 카페에 둘러앉아 큰 소리로 국왕 암살을 계획한다. 카페의 웨이터들도 손님들도 저 신사분들이 테러리스트라며 웃는다. <무정부주의 중앙의회>의 총재인 일요일에 대해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하는 충고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경구처럼 놀라웠고 영국 은행만큼이나 실용적이었지. 난 그분께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부터 저를 감출 수가 있을까요? 주교나 장교보다 더 존경받는 인물로 누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소. 그분은 헤아릴 길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소. ‘안전하게 감추길 바라는가? 자네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위장을 바라는가? 절대로 폭탄을 쓸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그런 위장?’ 난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갑자기 그분의 사자 같은 목소리가 ‘그럼, 무정부주의자로 위장하면 될 게 아닌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하고 온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소. ‘그렇게 하면 아무도 자네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분은 아무 말 없이 가버리셨소. 난 그분 말대로 했고, 이를 후회해 본 적이 없어. 난 여자들에게 밤낮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인 얘기를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여인들은 제 아기의 유모차를 내게 밀도록 했지.p32”

 

<무정부주의 중앙의회>의 반대편에는 <철학경찰>이 있다. 왜 철학경찰인가?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은 교육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도둑이나 중혼자 심지어는 살인자들 보다 더 위험하다. 후자들은 사회의 틀 자체는 존중하는 데 반해, 철학자들은 그 틀 자체를 부수려 하고 있다.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지성인의 음모,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정신이다.

 

“우리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무법적인 현대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도둑이나 중혼자들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이에요.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죠. 인간의 근본적인 이상은 수용하는데, 단지 잘못을 추구할 뿐이니까요. 도둑들은 재산을 존중합니다. 그걸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할 뿐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재산을 증오해서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해요. 중혼자들은 결혼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의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중혼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결혼 자체를 경멸합니다. 또, 살인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신들 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생명의 더 큰 충만함을 맛보려는 것뿐이죠. 그런데 철학자들은 생명 그 자체를 증오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증오합니다.p55”

 

철학 경찰의 임무는 선제적이다. 범죄 단계뿐만 아니라 논쟁 단계에 있는 음모도 적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선제공격한 미국과 동일한 발상이지만 방법은 전혀 다르다.

 

“철학적인 경찰관이 하는 일은 보통 형사보다는 더 대담하면서도 민감하죠. 형사들은 대개 도둑을 잡으러 선술집을 덮치지만, 우리는 염세주의자들을 찾기 위해 예술가의 티 파티에 참석합니다. 형사들은 장부나 메모를 보고 범죄를 추적하지만, 우린 소네트가 적힌 책에서 범죄의 징후를 알아내지요. 사람들을 지적인 광신이나 범죄로 몰아가는, 끔찍한 사상의 뿌리를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p54”

 

1908년 체스터턴이 『목요일 이었던 남자』를 발간할 즈음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허무주의와 테러리즘의 시대였다. 까뮈의 『반항인』에 의하면, 1878년은 러시아 테러리즘이 탄생한 해이다.

 

「193명의 민중주의자들이 재판을 받은 그 이튿날인 1월 24일, 몹시 젊은 처녀 베라 자쑬리치가 페테르스부르그의 총독 트레포프 장군을 사살한다. 배심원들에 의해 석방되자, 그녀는 연이어 짜아르의 경찰로부터 탈출한다. 이 권총 한 방이 폭포처럼 뒤따를 탄압과 암살의 단초가 되고, 이후 탄압과 암살은 서로 응전하기를 그치지 않거니와, 우리는 오직 권태만이 거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같은 해에, ‘인민의지당’의 당원인 크라브친스키는 『죽음에는 죽음으로』라는 그의 소책자에서 테러를 원리로 확립시킨다. 원리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유럽에서는, 독일 황제와 이탈리아 국왕과 스페인 국왕이 암살의 희생이 된다. 1878년에 알렉산더 2세는 정치경찰을 창설함으로써 국가적 테러리즘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어낸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러시아와 서구에서, 19세기는 살인으로 점철된다. p186」

 

이어서 까뮈는 허무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허무주의는, 하나의 좌절된 종교 운동에 긴밀히 결부된 채, 그리하여 테러리즘으로 끝나고 있다. 전적인 부정의 세계에서, 폭탄과 권총으로써, 또한 교수대로 나아가는 용기로써, 그 젊은이들은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며 그들이 결여하고 있던 가치들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그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혹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이름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들을 시발로 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 - 사람들은 단지 그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좀더 어려운 습관을 가지게 된다.p187」

 

지고의 가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미래의 가치,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도래해야만 할 가치를 위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다.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재창조하기 위해 현재의 절대주의를 파괴했던 것이다.

 

체스터턴은 시대의 허무주의에 반하여 기독교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정부주의 중앙의회>가 천지창조의 일곱 요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가령 이런 문장을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이 남포등이 보이는가? 여기에 새겨진 십자가와 그 안의 불빛이 보이는가? 당신은 이것을 만들지 않았고, 불을 붙이지도 않았다. 당신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쇠에 무늬를 만들었고, 불의 전설을 보존하였지. 당신이 걷는 거리, 입고 있는 옷 모두가 이 남포등처럼 당신의 쓰레기 같은 철학을 부인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파괴만 할 수 있을 뿐. 당신은 인류를,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하지만 이 유구한 기독교의 남포등은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당신네 원숭이들의 제국은 절대 찾지 못할 그런 곳으로 갈 것이다! p171”

‘원숭이들의 제국’은 허무주의자들이 신봉한 다윈의 진화론을 빗댄 것 같다. 허무주의자들은 공리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체스터턴이 일방적으로 허무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 책은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떠나서, 『목요일 이었던 남자』는 추리소설로만 읽어도 아·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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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를 드디어 만났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체스터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탐정 포와르의 생김이 브라운 신부와 닮았다. 작달막하고 못생긴 얼굴. 그러고 보니 이 시기 영국은 세계적 탐정들이 여럿 활약했다. 홈즈, 브라운 신부, 포와르와 마플. 아서 코난 도일이 1859년생, 체스터튼 1874년생, 아가사 크리스티 1890년생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영국은 탐정소설의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 지금도 이 불후의 탐정들은 케이블 화면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쉽게도 브라운 신부를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명성에서 살짝 뒤처지는 모양이다.

 

북하우스의 <브라운신부 전집> 1권 후기에는 추리소설 장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있다. 이 장르는 에드가 엘런 포에 의해 확립되었다. 포는 1809년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브라운 신부의 많은 이야기가 포의 『도둑맞은 편지』의 테마를 천재적으로 변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포와 체스터턴 사이에는 코난 도일이 있다. 그리고 코난도일의 뒤에는 디킨스가 있다. 디킨스는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대가’라 한다. 체스터튼은 디킨스에 관한 유명한 비평집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 복잡한 이름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19세기에 태어난 이 대가들, 1809년 포를 필두로, 1812년 디킨스, 1859년 코난 도일, 1874년 체스터튼, 1890년 아가사 크리스티에 의해 추리소설이란 장르가 탄생·발전했으며,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의 명성은 견고하다.

 

 

         

 

그런데 내가 체스터튼을 알게 된 것은 철학책을 통해서다. 지젝이 가끔씩 언급하는 체스터튼은 매우 흥미로웠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1부 3장은 체스터튼의 <부러진 검의 의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어디에 숨길까? 숲속에 숨기겠지. 그렇지만,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결백 p422)

 

시체를 숨기려면 어떻게 할까? 나뭇잎을 숨기기 위해 숲을 만들듯이, 시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시체의 산을 만들면 된다. <부러진 검의 의미>의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한 짓이 바로 그것이다.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악마적 행위에 대해 체스터튼은 이렇게 말한다.

 

  “아서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내가 이미 말했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이었네. 모든 이들의 성서를 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해하게 될지 답답하구먼. 출판업자는 오자를 찾기 위해 성서를 읽고, 모르몬교도들은 성서에서 일부다처제의 근거를 찾아낸다네. 또 그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 역시 그들만의 성서를 읽고는 사람에게 손도 발도 없다는 부분을 찾아내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인도에서 자란 영국인으로 개신교 신자였네.... 물론, 그는 신약보다 구약 성서를 더 자주 읽었지.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육욕, 전제, 그리고 반역을 바로 구약 성서에서 찾아낸 거라네. 나는 그가 정직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건 아니네.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것을 찬양하는 정직한 사람을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는 뜨겁고 비밀스러운 열대의 나라에 정부情婦를 두고 증인을 고문하며,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할 거네. 내가 알고 있는 신학대로라면, 그에게 그것이 어떤 신이냐고 물어봐야 할 거네.” (결백 p435)

 

아서 클레어 장군의 악행은 신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전국사찰을 돌아다니며 악마를 쫒는 우리나라의 기독 광신교도를 본다면, 체스터튼은 그들이 성경에서 무엇을 찾아냈다고 했을까.

 

“우리는 20세기의 윤리-정치적 파국에 대한 책임을, 도구적 이성에 의해 ‘플라톤부터 나토(? 게토가 아닐까..)’까지 직선적으로 이어져 온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전체에 묻는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49~50)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악마가 된 것처럼, 서구 형이상학의 도구적 이성이 세상을 읽는 방식이 20세기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체스터튼과 하이데거가 동일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인데, 지젝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튼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일한 논리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파시즘의 선구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나치 사례들을 서구 형이상학이라는 시체들의 산속에 감추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50)

 

클레어가 시체를 감추기 위해 시체의 산을 만든 것과 같이,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나치 참여를 면죄받기 위해 서구 이성 전체를 나치의 복무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지젝은 여기서 체스터튼의 또 다른 책을 가지고 온다. 『목요일이었던 사나이』에서 체스터튼은 철학경찰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한다.

 

 

 

“철학 경찰의 임무는 (....) 통상적인 형사의 작업보다 훨씬 대담하면서도 미묘하다. 보통 형사는 도둑놈들을 잡기 위해 선술집에 가고 염세주의자들을 탐문하러 예술가들의 모임을 기웃거린다. 보통 형사는 숙박부나 일기장을 뒤져서 이미 발생한 범죄를 찾아낸다. 우리는 소네트 모음집을 뒤져서 앞으로 발생할 범죄를 찾아낸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성적 광기와 지적 범죄로 이끌 끔찍한 사유의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The Man Who Was Thursday p44~5, 각주 인용)

 

철학책을 뒤져서 앞으로 발생할 범죄를 찾아낸다는 이 기발한 생각은 그러나 별반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지젝은 이 상상적 ‘철학경찰’은 이미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유명한 철학자들 자신이 그들의 철학경찰이다.

 

「칼 포퍼나 아도르노, 그리고 레비나스 같은 사상가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에 의해 정치적인 범죄는 ‘전체주의’로 언명되고, 철학적인 범죄는 ‘총체성’ 이라는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 ’철학경찰‘은 총체성이라는 철학 개념으로부터 정치적 전체주의를 향하는 직접적인 경로를 전제하면서 플라톤의 대화록이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어떻게 정치적 범죄가 발생할 지 밝혀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보통의 정치경찰은 혁명가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비밀결사조직을 들이닥치지만 철학경찰은 총체성의 지지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철학 심포지엄에 간다. 통상적인 반-테러리스트 경찰은 빌딩이나 교량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꾸미는 자들을 발본색원 하지만 철학경찰은 우리 사회의 종교와 도덕적인 토대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한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51~2 」

 

여기 지목된 철학자들에게는 지독한 조롱일 수 있겠지만,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 총체성 따위는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라며 치를 떠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체스터튼의 철학경찰들 못지않게, 총체성의 철학을 뿌리 뽑기 위해 투쟁한다. 내가 보기에 지젝은 자신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쪽이다. ‘모든 이들의 성서’ 란 없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틀 없이 실재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음.....

체스터튼의 추리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샛길로 너무 깊이 빠졌다. 여하튼 체스터튼은 단순 추리소설이 아니라, 혹은 단순 추리소설 안에서, 여러 가지 사유를 촉발한다. 사건의 전개나 문제의 해결방식은 코난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와 비슷하지만, 체스터튼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건의 내용이 아니다. 사건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주로 사유의 체계나 세계의 구성방식에 기인한다. <부러진 검의 의미>에서 본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가 뽑은 체스터튼의 가장 뛰어난 5편의 작품에는 이런 경향성이 짙게 드러난다. <벼랑 위의 세 기병> 은 너무나 충성심이 강한 두 명의 부하 때문에 일을 실패하게 된 장군의 이야기다. 무조건적 충성심이 일을 그르친 이유가 된 것이다.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전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할 때 가장 자주 사용했던 무기가 바로 ‘준법투쟁’ 이다. 철도 운행지침에 글자 그대로 딱 맞추어 운행하면, 서울의 지하철은 한순간 마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상으로 느끼는 지하철은 사실 비정상이다. 콩나물시루, 과속, 정차시간 단축 따위의 비정상적 시스템이야말로 서울 시민의 정상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얼마 전의 광역버스 입석 금지가 야기한 출근 대란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에서 입석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하지만, 그 정상적 시스템은 출퇴근을 마비시키는 비정상적 상황을 불러왔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이 보여주는 것은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체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체계에 대한 절대적 추종이라는 역설이다. 체계에 뚫린 틈이야말로 체계를 유지시키는 숨구멍이다. 구멍 한 점 없는 풍선은 터진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은 또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충성스러운 부하는 동료애를 저버린 적도, 자신의 군주를 속이고 그 권위에 도전한 적도,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을 죽인 적도 수없이 많았는데, 단지 자신의 직속상관에게는 언제나 복종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로크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뿐이었다. 아이히만의 머릿속에 의무만이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충성심만이 있었다. 두 악마 모두에게 없었던 것은, 사유이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는 보르헤스가 꼽은 5편 중 가장 재미있다. ‘재미’라는 두루뭉실한 말은 똑 부러진 설명을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어떤 사기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난파된 아들을 15년간 찾고 있는 엄마에게 이 사기꾼은 그 아들과 전혀 닮지 않은 남자를 아들이라고 속이는 데에 성공한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도 완전히 똑같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기꾼은 거꾸로, 누가 봐도 다르다고 할 사람을 선택한다. 이렇게 달라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사기를 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방식은 상식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의 체스터튼도 상식의 편견을 이용한다. 절대로 동일성이 존재할 수 없는 곳에 동일성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신식 금권주의 정치가’,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가 깔려 있다.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가능하면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니, 무엇이 재미있는지 설명하기가 더 힘들다. 그런데 어찌 보면 여기 한, 두 대목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 종업원은 몇 초간 신사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식탁에 앉은 모든 신사들의 얼굴에는 깊은 모욕감이 드러났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시대의 산물이었다. 즉, 그것은 부자와 가난뱅이 사이의 무시무시한 간극과 새로운 시대의 박애주의가 결합된 것이었다. 진정한 정통 귀족이라면 그 종업원에게 뭐라도 집어던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빈병부터 던지다가 마지막엔 돈이라도 집어던졌을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라면 동지애를 드러내며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러나 이곳에 모인 신식 금권주의 정치가들은 가난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자기들 근처에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들이 노예이건 친구이건 간에. 그 하인들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불쾌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한편, 자비를 베풀만한 일이 생기는 것도 꺼려했다. 그들은 그게 무슨 일이든지 간에, 이 일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원했다. p73 」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부유하고, 먹고 살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냉혹하고 천박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하느님이나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마당에, 도둑과 부랑자들만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p80」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추리소설에 이런 표현이 허용될지 모르겠지만, 발랄하다. 베니스의 샤일록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음모도 탐욕도 없지만, 이스라엘 가우는 성공한 샤일록이다. 피한방울 없이 그는 성공한다. 이 단편에서 내가 읽은 체스터튼의 메시지는 이렇다. 살인사건의 현장에 남겨진 몇몇 단서들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코담배와 다이아몬드, 초와 분해된 시계 태업장치.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즉석에서 이 단서들을 조합하여 서너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가짜 이론으로도 우주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글렌가일 성에 들어맞을 거짓 추론들을 열 개도 넘게 만들어낼 수 있듯이. p105” 우리는 각자의 가짜 이론으로 저마다의 우주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있다.

 

 

<허쉬 박사의 결투>가 주는 교훈은 한가지다.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히 틀리게 말하려면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만이 철저하게 모든 것을 틀릴 수 있다. 우연한 거짓말에는 한두가지 사실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반대되는 것을 찾았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네가 찾아갈 집에 대해 적어두었다고 해보세. 녹색 문에 파란색 블라인드가 달려 있고, 앞뜰은 있지만 뒤뜰은 없고, 개는 있지만 고양이는 없는, 커피는 마시지만 차는 마시지 않는 집이라고. 자네가 만약 이런 집을 찾지 못한다면 자네는 그 내용이 모조리 가짜로 꾸며낸 거라고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자네가 만약 파란 색 문에 녹색 블라인드가 달리고, 뒤뜰은 있지만 앞뜰은 없으며, 고양이들은 흔하지만 개는 보이는 즉시 총으로 쏴버리며, 차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커피는 금지된 집을 찾는다면, 자네는 바로 그 집을 찾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 p179"

 

 

이상하게도, 보르헤스가 이 단편집의 제목으로 뽑은 <아폴로의 눈>은 그다지 특징적이지 않았다.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추리소설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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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발님의 <단서의 괴로움>에 댓글을 달다가 문득 든 생각. 아니 예전부터 가끔 그런 생각했다. 도서관에는 너무 쓸데없는 책들이 많다. 대충 골라온 책의 절반은 대개 실패다.  한줄한줄 꼼꼼이 읽기에는 차마 봐주기 힘든 문장,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저자의 관점, 너무 난해해 독해불능인 내용, 국어 자체가 장애물인 번역문, 말은 많은데 내용은 없는 빈문장 등등. 이럴때 나는 진짜 읽을만한 책들로 꽉 찬 도서관을 꿈꾼다.

 

가령 이런 것.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8월 들어 읽기 시작한 보르헤스가 의외로 재미있다. 처음에는 눈붙이기도 힘들었는데, 조금 익숙해지니 조금씩 맛이 느껴진다. 도서관을 뒤지다 오늘 찾은 『바벨의 도서관작품 해제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라고 되어 있는데, 사기다. 보르헤스가 29명의 저자를 선정해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이란 시리즈를 편집한 것 같은데, 각 작품의 서문같은 것을 모아서 만든 책처럼 보인다. 유령 책인지 자세한 내용은 없고 , 29명의 작품에 대해서, 작가소개 - 누가 썼는지 알수 없는 요약문 - 보르헤스가 직접 쓴 소개글의 순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요약문은 보르헤스가 직접 쓴 소개글을 반정도로 줄여 놓은 것이다. 이런 것도 책이라고 팔까 싶었는데, 알라딘에 검색해 보니 29권의 책에 걍 구색으로 한권을 끼어넣어 30권짜리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을 완성한 것 같다. 뭐 부록정도. 여하튼 목차를 보니 29명 중 내가 읽은 작가는 6명이다. 주로 19세기 작가들인데, 20% 정도밖에 모른다니, 내 독서편력도 참 일천하다 싶다. 틈틈이 한권씩 읽어볼 생각이다. 일단 보르헤스가 고르고 고른 책일테니, 나의 이해력이 딸려 못읽을 수는 있겠지만, 책이 엉망이라 내팽겨칠 위험은 없을 것 같다. 뭐 명성의 권위에 대한 이 무조건적 복종이 살짝 부끄럽지만, 기꺼이 감수한다.

 

보르헤스의 이른바 '바벨의 도서관' 처럼, 이런 신뢰도 빵빵한 도서관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여기 소도시에도 작은 도서관이 생각보다 참 많다. 그런데 책들은 다 비슷비슷하다. 숫자만 늘리는 도서관도 주민접근성을 위해 물론 필요하겠지만, 믿을만한 사람들이 직접 '컬렉션'한 작은 도서관들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가령 김현 도서관. 평론가 김현이 추천한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이 있으면 나는 아마 묻지마 대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명에 도서관 하나씩의 책을 채우기에는 아마도 벅찰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도서관에, 예를 들어 <소설가들의 도서관> 하나에 박경리 도서관, 이청준 도서관, 한강 도서관...식으로 각 작가들이 가려뽑은 책들로만 가득찬 미니 도서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면 진짜 멋지지 않을까. <철학자들의 도서관>, <예술가들의 도서관>, <정치가들의 도서관>, <과학자들의 도서관>....

 

물론 요즘에 이런식의 도서 소개들은 많다. 여기 알라딘에서도 자주 본다. 대표적 알라디너는 아마 로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로자의 글이 아쉽다. 글솜씨가 별로여서가 아니라, 너무 기계적인 글들을, 너무 의무적으로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방문자수도 공감수도 엄청나지만, 그 기대에 값하는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책을 소개하며 그가 직접 완독하고 정성스럽게 쓴 글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책 제목과 책 소개글을  훑어보고, 앞으로 읽으려고 혹은 모아놓으려고 쓴 글들이 많다. 그래서 처음엔 올라올 때마다 보았는데, 요즘은 거의 읽지 않는다. 얻을 정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글이 업인 분이라, 시간들여 잘 쓴 글을 블로그에 노출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쉽기는 아쉽다.  <이동진의 빨간책방>도 그런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책에 대한 본격 토론에 앞서, 이동진의 내가 고른책인지 뭔가 하는 코너가 있다.  책 소개 코너인데, 이것도 읽은 책보다는 읽지 않은 신간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출판사 책 소개글 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내용이다. 결국 광고 아닌 광고다. 어떤 행위도 상업성이 배제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만 소개해 주면 안되는 걸까? 물리적으로 매주 그럴 수 없다면, 독자들의 글을 받아 누구누구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장서가 '藏'書 라는 것을 나도 처음 알았다. 숨길 장, 藏을 쓰는 장서는 '책을 간직해 둠 또는 그 책' 이란 뜻이다. 숨길 장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간직한다는 것이 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꽂이가 휘어져 내릴 정도로 간직하는 책들은 아마도 그만큼 귀중하고 가치있는 책들일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의 깊이와 사유의 지도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알라딘 서재란 그 장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며, 한 사람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리뷰란 자신만의 소중한 장서를 글쓰기를 통해 공공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의 물리적 도서관을 가질수는 없다해도, 나의 도서관을 보여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나의 도서관이 부디 찾으시는 분들의 걸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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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야 책이 흔한 물건이 되었지 옛날만 해도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에 가까웠잖습니까. 또한 책은 기득권 세력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고요. 위험한 게 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귀중하게 보관하다, 라는 뜻이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차별화된 도서관.. 정말 매력있겠습니다.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바라지만,,,, 현재로서는 그냥 동네마다 도서관 하나씩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도서관 보급이 아마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습니다. 동사무소가 동네마다 있듯이 도서관도 동사무소처럼 하나씩 있어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양질의 도서는 도서관이 구매함으로써 국가 지원 형태가 되어야 하고요... 이명박과 박근혜 보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은 그나마 책은 읽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퍼득 듭니다.

말리 2014-08-2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이 사대강에 퍼부은 돈을 도서관 짓는데 사용했으면 우리나라는 도서 천국이 되었겠죠 ㅎ. 유치원 짓는데 썻으면 온나라 아이들이 공립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고. 이명박은 토목을 해도 하필 강을 팠는지, 땅파고 지을 것이 엄청 있었는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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