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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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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듀 데리다』, 9명 저자의 글을 순서 없이 읽었다. 첫 번째 글인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읽었는데, 그제야 나는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을 알게 되었다. 데리다 사망 직후, 싸가지 없는 일부 무리들이, 그것도 주로 영미 대중문화계의 무지한 것들이, 추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를 공격했고, 열 받은 인문학자들이 ‘아듀 데리다’란 제목의 시리즈 강연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책이 발간되었다는, 그런 사연이다. 강연은 런던 대학의 버벡 칼리지 인문학연구소 주최로, 2005년 5, 6월에 이루어졌다.

 

  안면이라도 익혀서 그랬는지, 먼저 읽고 리뷰를 쓴 네 명의 글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대체로 명확했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이해력에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명의 글은 너무 감성적이고, 은유적이고, 또 시적이기도 하고, 광기도 살짝 비치는 것도 같고, 하여튼 이성 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글들이다. 아마도 데리다의 글쓰기가 이랬던 것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데리다를 읽은 적이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래서 요약해 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들 5명의 이름을 거의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장 뤽 낭시 만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공동 저자로 스무 쪽 정도의 글을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 때도 조금 감성적이란 느낌이 있었는데(기억하는 건 아니고, 그 책의 발제로 쓴 글을 찾아보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듀 데리다』에 실린 글 제목이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여서 그런지, 그런 느낌을 좀 더 받았다.  어쨌든 책을 끝낸 기념으로 5명 저자의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대해서 간단히 메모해 놓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한 꼭지가 데리다를 다루고 있어서, 읽어 보았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이라서 그런지 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기에 간단히 정리해 덧붙이려고 한다. 이 강연은 진태원의 것이며 제목은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이다.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

 

  책이 발간된 배경과 9명 저자의 글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한다. 고유명사 즉 명명하기를 통해 그 시작과 마지막인 세례식과 추도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여정은 그 두 찬사 사이의 간격, 타자(언어, 의식, 아버지)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는 것과 타자에게 그 이름을 잘 지켜달라고 내놓는 것 사이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p16

 

 

장 뤽 낭시의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푸코 대 데리다 논쟁’이란 것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장 뤽 낭시는 이 논쟁의 쟁점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광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 논쟁은 데카르트를 읽는 방법과, ‘이성’과 ‘광기’가 전제하는 통상적인 구분을 해석하는 방법을 둘러싼 토론이다.

  “..푸코가 고전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제도 안에서 비이성이 배제된다는 점을 확인했다면, 데리다는 소위 이성의 주체라는 것이 그 혹은 그녀의 주관성 그 자체로 ‘광기’와 ‘이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서는 결정, 확인,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p38

  장 뤽 낭시는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데리다가 ‘주체를 없애려고 모의한 적이 없’ 으며, ‘주체 안에서 동일성과 차이(동일성과 그 자신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교차함을 확인했다’ 고 한다. 장 뤽 낭시가 데리다의 주체 개념을 언급하는 것은 물론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읽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데리다는 코기토를 ‘작별의 코기토’라고 불렀던 모양인데, 이것에 대해 장 뤽 낭시는 “존재와 사고의 오랜 일치 -이성과 어울리는 일치-는 존재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가버릴 때, 그것이 스스로와 접촉할 때 상실된다.” p55 고 설명한다.  고백하자면 카페인 가득 각성 상태에서 정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별의 코기토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이 상실과 연관된 주체의 광기에 대해 소화된 언어로 요약할 처지가 아니다. 체면치레로 인용문 하나만 남긴다.

  “ 자신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 흔적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다.(데리다,주체) 그는 자신이 흔적에 불과함을 발견하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는 스스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스스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즉 자신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것은 비록 그가 만질 수는 있지만 언제나 만질 수만 있을 뿐, 보거나 알지 못하고, 소유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소유하겠다는 의지를 품거나 그것이 야기하는 격정을 감수한다 해도 소유 할 수 없으며, 이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p48

  아마도 이것이 ‘작별의 코기토’이며 그래서 주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자크 데리다의 찬사에 부치는 소고>

 

  페미니즘 이야기도 나오고, 칸트의 ‘as if~' 뭐 이런 말도 많이 나오는데, 전반  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이름도 어렵다.

 

 

드루실라 코넬의 <데리다>

 

 지젝이 신종야만주의라고 표현한, 데리다의 죽음을 향해 영미 지식인들이 추잡 하게 드러낸, 야만성에 대해, 드루실라 코넬은 데리다가 용감하게 미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코넬이 <데리다>에 붙인 부제는 ‘미래라는 선물’ 이다. 데리다의 이 미래는 ‘도래할’ 미래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은 늘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시기상조란 행위를 지연시키는 핑계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야만적인 무지와는 달리, 데리다의 ‘시기상조’는 ‘일종의 만들어지는 중인 시기적절함’ 이다. 나의 근거 없는 편견과는 달리 데리다는 행위를 끝없이 미루는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지금 행동해야 한다’의 철학자이다.

  “데리다는 우리의 의무가 ‘진행중인 시기적절함’에 주의를 기울이기라고 아름답게 쓰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가상적이고, 금지된 상태이며, 미래에 수용될 가능성으로 충만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데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하고 있는 ‘소수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힘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날까지 여전히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듯이, 데리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그가 임종하는 순간에 절실하게 느낀 것은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이 강력한 요청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이 요청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p191~2

 

 

J. 힐리스 밀러의 <故 데리다>

 

  데리다의 <로빈슨 크루소> 읽기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문화연구 측면에서 접근하여, '프로테스탄트적인 자본주의 경제적 인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주류 학풍과는 달리, 데리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에 주목한다. “고독은 데리다가 <크루소>와 함께 읽는 작품인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의 기본적인 주제들 중 하나이다.” p252

  데리다의 사유는 고독한 크루소의 ‘발자국’에서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데,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p253. 하이데거에게도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 이다.

  데리다는 소설의 한 문장, 시 한 구절로 두 시간의 강연이나 한 권의 책을 엮는다. 데리다는 끝없이 이야기한다. 제 시간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왜? 죽음을 향한 존재가 제 시간에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故데리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는 오고야 말고 우리는 故데리다를 본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

진태원의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

 

  『아듀 데리다』를 읽은 기념으로, 때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데리다만 먼저 읽었다. 이 책은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가 시민을 상대로 연 강좌를 묶은 책이다. 아무래도 『아듀 데리다』보다는 쉽고 편안하다.

  진태원은 데리다의 사상 전반을 요약하는 모험 대신 그의 주요 개념 세 가지를 통해 데리다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해체, 차이, 유령 이다.

 

1. 해체

 

  데리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해체’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 만큼 많이 쓰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널리 쓰이면 쓰일수록 원래의 의미가 희석되고 왜곡된다고 한다. 해체는 그렇게 손상된 대표적인 개념이다.

 

  ‘해체’는 데리다가 처음 사용한 말이지만, 사실은 하이데거의 ‘데스트룩치온’ 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이 해체는 파괴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 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p313」

 

  해체는 단순히 대립항들을 뒤집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 내에서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틀 자체는 존속된다. 데리다의 해체란 말하자면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틀을 발명해 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라는 사례로 해체 작업을 보여주는데, 이걸 요약하기는 어렵고, 적절한 비유였는지 모르지만, 단순무식하게 노예-주인에 비유해 보았다.

   해체를 이렇게 볼수 있다면, 해체는 지젝이 분석하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 비슷한 것 같다. 기존의 대립항을 전복하는 것은 기존의 틀 내에서 그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 이 관계의 틀 자체를 해체하는 것. 지배-피지배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부정의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 삼항조가 아니다. 합은 없다. 두 번의 ‘반’에 의해 ‘정’은 그 틀 자체가 붕괴되는, 이중의 부정을 당한다. 물론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이렇다고 나는 읽었다.

 

  데리다의 해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p316」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인 동시에 텍스트의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p317」

  라캉의 용어 중에 ‘외밀한’ 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안이면서 동시에 밖인. 맹목점은 누빔점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쩌면 대상a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텍스트를 떠받치는 동시에 해체하는 지점이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도 같은 지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 맹목점은 반드시 ‘삐딱하게’ 보아야만 보일 것이고. 시차적 관점. 라캉과 지젝에 너무 딱 들어맞아서 좀 긴가민가 싶지만, 거칠게 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해체의 이런 성격을 따져보면 ‘해체’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진태원은 주장한다. ‘탈구축’이 더 적절하단다. 왜냐하면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 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2. 차연 또는 차이

 

  차연은 디페랑스diffèrance의 우리말 번역이다. 디페랑스diffèrance는 차이diffèrence라는 단어에서 ‘e'를 ‘a'로 의도적으로 오기해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다. e든 a든 하여튼 이 단어의 어근인 diffèrer은 ‘다르다, 차이나다’ 란 의미와 동시에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 ‘차연’은 여기에 착안에 차이의 差와 지연의 延을 합쳐 만든 번역어다. 그런데 진태원은 ‘차연’이란 번역어에 이의를 제기한다. 번역어의 문제란 곧바로 디페랑스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태원의 설명과 관계없이 내 생각에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은 늘 우리에게 골칫거리로 보인다. 그것이 신조어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권에는 별 문제도 아니다. 서로 번역하지 않아도 불어나 독어 영어는 눈치로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에겐 끝도 없이 씨름할 일에다, 합의도 못보고, 번역자마다 다른 단어를 갖다 붙이고, 그 피해는 결국 일반인 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가타리가 과타리가 되는 것은 애교지만, 예지적·본체적·가상적이 모두 noumenal의 번역어라면, 이런 빌어먹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플라톤의 『공화국』정도는 눈치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국가』가 『정체』인 것은 그렇다 쳐도, ... 하여튼 나는 플라톤이 공화국도 쓰고, 국가도 쓴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 독자의 수준이다. 번역어의 엄격함만큼이나 대중성도 좀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번역어의 통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태원은 차연이라는 번역어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e를 a로 오기한 데리다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와 a의 발음은 둘 다 디페랑스다. 음성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오로지 문자로만 구별되게 만든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 음성이나 말에 대해 홀대받는 전통에 반대하며, 문자기록이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차으’ 라고 해야 되나? 경상도 사투리는 ‘ㅡ’와 ‘l'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에겐 어떤 번역어를 쓰든 그 의미를 온전히 번역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두 번째는 ‘기원의 탈구축’ 이라는 데리다의 의도인데, 내용이 어렵다.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여튼 ‘기원의 탈구축’이란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낳는다고 한다. 기원은 어떤 움직이지 않는 근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며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여하튼 어렵고, 진태원은 이런 점에서 ‘차연’은 지나치게 협소한 번역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다. 데리다는 e를 a로 오기함으로써, 서양 학계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일깨우고자 한다. 내게는 차연도 충분히 낯설긴 하지만, 이 낯설기와 데리다의 낯설기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우리에게는 해결방법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진태원은 차연의 대안으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가 주장한 차이差移를 지지한다. 差異에서 異를 移로 바꾼. 이것이 세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데, 한문을 가지고 와서 낯설게 하기, 새로운 합성어 운운하는 것이 글쎄 내게는 별로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보다 데리다의 개념으로 ‘해체’ 만큼이나 유명한 ‘차연’에 대해, 번역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데리다가 실제로 사용한 사례 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그런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차연이 혹은 차이가 뭐라는 건지 잘 감이 안 온다.

 

 

3. 유령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데리다의 책이 있다. ‘의’ 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을 짐작하겠지만,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마르크스라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마르크스에게 나타나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다. 데리다는 이 둘 다를 가리키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 p330” 이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운동’ 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억압과 착취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 곁을 배회하며 해방운동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 역시 자신의 유령에 시달린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도 물신숭배도 없는 세계를 믿었지만, 아무런 환영 없는, 유령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 곧 상품 이전의, 교환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 p335” 았다.

 

  그렇다면 유령은 사라져야 할까? 데리다는 여기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The time is out of joint" 는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순간, 그 틈새로 유령은 출현한다. 시간이 딱 맞물려 연속적으로 정확히 흐르는 세계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어떠한 전복, 어떠한 균열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근원적인 탈구의 시간, out of joint, 은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p336”이다.

  데리다의 이 out of joint는 벤야민의 통찰과 일맥상통 한다. 그런데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는 유사성 못지 않게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어떻게?  

  진태원은 이 질문을 궁금증으로 남기며 데리다 강의를 끝맺는다.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337"

강의  예고편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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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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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데리다의 이름을 너무 늦게 들었다. 누군가가 '어제 데리다가 죽었어.’라 했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에 새겼다. 그러나 너무 늦음은 그의 생물학적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상이 이미 한물갔다는 세간의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귀동냥 했던 일부 인문학자들 사이의 풍문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나는 데리다란 인물에 대해서 알려고도 해보지 않았다. 이미 알튀세르와 라캉,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그리고 지젝이 있었고, 이들의 반대편(?)에는 이진경 때문에 서둘러 무시할 수 없었던 들뢰즈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체’와 ‘차연’ 같은 말들은 무시로 들려왔다.

 

  『아듀 데리다』는 어쩌면 데리다의 논쟁적 적대자들이 나와 같은 머저리에 보내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를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9명의 명단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지젝을 발견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저자 9명 중 이들 4명은 내가 한두 권이라도 그의 책을 읽어 보았던 철학자들일 뿐 아니라, 내가 알기로 데리다와 어느 정도 대립하는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라는 표제의 글에서, 1969년 이후 최근까지 데리다와 거리를 두어 왔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0년대라는, ‘사상사에 있어서 각별했던 순간에 대한 집단 서명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데리다를 꼽으며, 자신은 데리다에 대해 마땅히 ‘철학적 경의’를 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철학적 경의란 ‘차이를 나타내는 경의이며, 그 차이에 합당한 무게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실린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지젝의 글은 바디우가 의도한 ‘철학적 경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글은 먼저 데리다식 개념의 사상사적 지위나 의의를 설명한다. 네 명의 저자들이 주목하는 데리다 사상의 측면은 모두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철학과 가장 인접한 데리다의 개념에 주목하는데, 그 친밀성을 통해 역으로 그들 자신과 데리다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데리다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지만 또한 데리다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철학적 경의’ 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네 편의 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편에서도 아마 이런 경의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 들 네 명만으로도 이미 내 기억과 사고는 뒤엉켜 쑥대밭이 되었다. 물론 이 네 명이 어떤 개념을 다루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메모에 불과하겠지만, 이것이라도 먼저 정리해 두지 않고는 나머지 글들을 읽기가 실로 벅차다. 번거롭지만, 할 수 없이 두 편의 글로 나누어 리뷰를 쓰기로 한다. 물론 리뷰2는 쓰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 데리다에 대한 이 사상가들의 독해를 제대로 읽어내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알랭 바디우의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바디우가 주목하는 개념은 ‘비실존의 기입’ 이다. 데리다의 이 작업을 바디우식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비실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영도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무無’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비실존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의 원존재를 위해 싸우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라고. 이것이야 말로 혁명의 정의이다. 즉 비실존이 자신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다수적 원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세계, 즉 세계의 초월성을 변화시켜야 한다. P83」

  실존과 초월적 관계에 있는 원존재는, 세계 내에 출현할 때 다수의 형태로 실존한다. 그런데 실존의 정도는 그것의 강렬함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실존들 중에서 가장 미약한 실존, 가능한 최소한의 실존을 ‘비실존’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 집합의 부분집합들 중 공집합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집합도 집합이다. 비실존도 실존이다. 그것의 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 비실존을 강력한 정치적 실존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말 부분을 당겨와 썼지만, 사실 인용문이 데리다 자신의 이론인지, 바디우식 해석인지 잘은 모르겠다. 내겐 바디우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비실존의 기입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원존재와 실존의 형이상학적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며, 그것은 사라지는 소실점으로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라짐’을 보여주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래서 데리다의 글쓰기는 모호하며, ‘하얀 잉크’로 쓰는 글이다.

「데리다는 분류된 사항을 해제한다. 한마디로 데리다는 용기 있는 평화주의자를 요청하는 운동에 몰두한 것이다. 그가 용감했다는 것은 이미 구축된 분류를 수용하거나 그에 적응하는 것을 피하려면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구성된 대립체계 너머를 탐색하는 것은 대체로 평화와 사색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스듬한 태도를 고집하는 것, 즉 형이상학에 뿌리를 둔 단정적 구분을 거부하는 것은 항상 결정의 법칙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격동의 시대인 지금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1968년에서 1976년에 이르는 ‘공산주의 시기’에 데리다가 진리의 바깥에 머문 것은 이 때문이다. P80」

  데리다는 한마디로 끝없이 ‘미끄러진다’. 원존재에서 비실존으로, 비실존에서 원존재로. 데리다의 논리는 긍정과 부정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바디우는 여기서 데리다를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서두에서 바디우는 1969년 이후 데리다와 거리를 두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아는 한, 바디우는 ‘진리 사건’의 철학자이다. 바디우는 불가능한 것을 명명하기를 주장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으나, 아마 눈치로 보건대 데리다는 어떤 사건도 진리로 기입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에 대한 ‘용감한 평화주의자’ 란 명명은 바디우와 데리다 사이의 차이를 바디우가 암묵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아마도 현대 사상사 혹은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해 기초 지식 정도는 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출간되었을 것이다. 내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독자라 씁쓸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제에 이런 리뷰를 쓰는 ‘용감함’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는 것이 씁쓸하다. 말인즉 이 리뷰가 받아야 할 것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다. 데리다의 말과 바디우의 말, 그리고 내 생각까지, 뒤엉켜 뒤죽박죽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보편의 구축과 해체>

 

  발리바르는 보편의 철학자로 알려진 헤겔의,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의 Ⅰ장(?) 제목이 “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 이다. 이 개념을 발리바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감각적 확신이라는 관념을 요약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단독성과 보편성이 순수한 지시작용의 격으로 간주될 경우 상호 구분하기 어렵다는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논의에 대면하게 하는지 돌아보았다. p122」

  나는 『정신현상학』을 보았다. 차마 읽었다고 할 수는 없고, 모든 페이지를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있다. 물론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의식의 수수께끼 같은 여행이라고 할까. 하여튼 발리바르의 말은, 단독성과 보편성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대립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인 듯하다.

  발리바르는 여기에 방브니스트의 ‘인칭 대명사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온다. 장 클로드 밀네는 방브니스트의 논의가 곧바로 헤겔의 감각적 확신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는데, 발리바르가 이를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 다음으로, 데리다가 방브니스트의 핵심 논제를 (전복적으로) 취했다고 보고, 결론적으로 데리다와 헤겔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방브니스트, 장 클로드 밀너, 발리바르를 우회하여 헤겔과 데리다가 만난 것이다. 그 교차점이 바로 ‘감각적 확신’ 이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요약 보다는 전체 글에 대한 꼼꼼한 독해가 필요할 것이다.

  발리바르가 해체와 보편을 연관 짓는 방식은 흥미롭다. 발리바르는 해체를 보편의 파괴가 아니라 보편의 재출현을 위한 작업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해체가 파괴가 아니라는 것, 즉 형이상학적 보편적 범주들을 궁극적으로 극복하거나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해체란 그러한 범주들이 재현되지 못하도록 억압한 것들과 관련된 내적 긴장 및 한계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잉여, 대체보충, 지연의 형태로 재현해서 다시 출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p137」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주체는 타자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돌려받는다.” 는 라캉의 명언에 대한 전혀 다른 데리다식 독법이다.

  「데리다는 ‘편지가 수취인에게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 주장한다. 만약 그것이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사건에 대해 열린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오히려 그것은 절대로 수취인에게 도달해서도, 또는 대답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실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어질 수도 있다는 점, 바로 실패하거나, 심지어 실패할 것이 틀림없다는 점, 그래서 특히 질문이나 호출에 대한 완벽하고도 적절한 대답은 실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적 이중성에 대한 또 다른 유명한 해체적 독법을 되풀이한다면 대답은 무한히 지연되고, ‘연기되며’, 차연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인칭들 간의 대화적 대칭에 주의를 집중하는 대신 ‘산종되어’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닿을 수 없는 곳에 남아 상실될 위기에 처한다. p131」

  라캉에게 편지의 최종 수신인은 발신자 자신이다. 그래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 발리바르의 데리다식 독법이 이 점을 포함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라캉에 있어서도 편지의 표면적 수신인으로 가정된 타자는 항상 그 메시지를 읽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이 둘을 비교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발리바르에게 질문할 주제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고, 누군가 이 의문에 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유효한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 랑시에르지만, 천만 다행히도 이 글은 매우 명료하여 비교적 쉽게 읽힌다.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1990년대 들어 점점 더 데리다 사고의 전방에 등장하게 된 한 가지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이 질문을 데리다에 대한 추모글로 삼은 이유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구조’에 대한 데리다의 탐구와 랑시에르 자신의 ‘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개념 사이의 공통분모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에 대한 질문이다. 아르케란 철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만, 국어사전에는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근본원리’ 로 정의되어 있다. 민주주의란 말하자면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여섯 가지 지배의 자격을 열거했지만,  ‘제비뽑기’라는 일곱 번째 원칙을 추가하면서 폭탄을 던졌다. ‘제비뽑기’에 의한 지배,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주인이나 귀족, 강자, 철인, 부모, 나이 등, 어떤 자격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다. 즉 일체의 아르케도 없는, ‘자격 없는 자격’, 역설적 체제인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아르케의 결여는 ‘바람직한’ 자격들, 즉 적절한 아르케를 보여주는 자격들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실로 바람직한 자격들 말이다. 그것들은 정확히 무엇에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p174」

  「신성한 목동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추가로 존재하는 자격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지배받기보다는 지배할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자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미이다. ‘데모스의 힘’이란 어떤 아르케도 그 힘을 행사할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다. 민주주의란 명확하게 규정된 일련의 제도들도, 특정 집단의 힘도 아니다. 그것은 보충적이고 근거를 구성하는 힘으로, 모든 기성 제도들과 어느 특정 집단 사람들의 힘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그 정당성을 박탈하기도 하는 힘이다. p165」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기도 하고, 정확히 동일한 이름으로 같은 사람에게서 권력을 빼앗기도 한다. 고정된 아르케란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이렇게 ‘근거를 구성하는 힘과 파괴하는 힘이 일치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의 자동 면역’ 이라는 개념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랑시에르는 주장한다.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데리다의 한계는 ‘타자성’ 이다.

  「이 자동면역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우선 민주주의에 내재한 무제한의 자기 비판역량으로, 이는 반민주주의적 선전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것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사용하여 반민주주의적 투쟁을 일삼는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권리를 제한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양쪽 모두 민주주의는 동일성 혹은 자아의 검증되지 않은 힘에 여전히 매달린다.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은 타자성이며, 이는 외부에서 올 수밖에 없다. p165~6」

  「내가 제기하는 이의는 간단하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정치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그 자체의 타자성, 즉 자기 자신 안에 이질성의 원칙을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가 바로 이 원칙이다. p166」

  랑시에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이미 그 타자성을 내재하고 있는 역설적인 힘이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올 때 실제 사라지는 것은 ‘실천적 민주주의’다. 데리다의 논리에서 정치는 소멸한다.

  데리다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 구체적 내용은 꼼꼼한 독해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요약의 범위를 넘어선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서만 어떤 대상이 파악되고 있다면, 그 대상 즉 데리다는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데리다 자신은 이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펼 기회조차 없으니, 데리다의 온전한 저서를 통해 그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

 

  지젝은 데리다의 ‘차연’과 자신의 ‘시차’ 개념 사이의 친연성을 통해 데리다를 추모하고자 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극소 차이’를 의미하며, 이것은 실증적이고 실체적인 속성에 근거한 차이가 아니다.

  지젝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차적 관점』은 철학적 시차, 과학적 시차, 정치적 시차에 관한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의 ‘서주’에서 이미 지젝은 『시차적 관점』의 많은 지면이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한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시차는 동일한 X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관점으로 구성된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두 관점들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비대칭성, 극소의 반성적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우리가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었던 공백을 채운다. (『시차적 관점』p 63)」

  시차적 관점은 하나의 불변하는 대상이 있고, 그에 대해 두 개 이상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균형 잡힌 중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진중권이 『이매진』에서 ‘촛불은 왼쪽에서도 깜박거리고, 오른쪽에서도 깜박거린다’ 란 소제목으로 소개한 지젝의 시차적 관점은 이런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지젝이 시차적 관점의 시각적 사례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루빈의 꽃병’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두 개의 얼굴을 보거나, 하나의 꽃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시차에 따라 오로지 꽃병이거나, 오로지 얼굴일 뿐이다. 지젝 이론의 근간인 헤겔을 통해 표현한 시차란 이런 것이다.

  「오히려 헤겔이라면 이렇게 표현했겠지만, 주체와 대상은 내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며’, 그 결과 주체의 관점에서 발생한 ‘인식론적’ 변화는 언제나 대상 그 자체의 ‘존재론적’ 변화를 반영한다. p227」

  시차란 관점의 주관적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상 자체의 속성을 실체적으로 변화시킨다.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의 운명이 그 명시적 사례를 제공한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30년간 독재 권력을 휘둘러 왔으나, 한순간에 쫓겨났다. 이집트 민중이 더 이상 그를 대통령으로 바라보지 않는, 관점의 변환을 가져왔을 때 그는 순식간에 힘없는 노인이 되었다. 왕은 그 실체적 속성 때문에 왕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불러주기 때문에 왕인 것이다. 인식론적 변화가 존재론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들에서 읽은 지젝의 개념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지젝은 자기 복제로 유명한 작가이다. 여기 이 짧은 글에서도 이미 다른 책에 쓰였던 내용들이 적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한 문단을 통째로 ‘복사’ 해서 ‘붙여 넣기’ 한 부분도 있다.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쓰는 작가라는 지젝의 명성에는 이런 ‘비법’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적 게으름으로 비난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광고문구 맨 앞에는 지젝이 등장한다. “지젝과 랑시에르, 바디우가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 지젝의 인기가 그만큼 높은 것이겠지만, 지젝에 대한 반감 역시 그 인기에 못지않다. 그것은 헤겔이나 라캉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오로지 지젝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지젝을 통해 본격적인 ‘철학 읽기’에 돌입한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시차적 관점 역시 한없이 삐딱할 것이다. 언젠가 지젝을 오독하지 않고 읽어내게 되었을 때, 그 때가 오면 나는 지젝을 비판하는 책읽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넘어야 할 산은 최근에 번역된 지젝 평생의 역작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이다. 한 사상가의 역작에 붙인 제목치고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출판사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Less Than Nothing :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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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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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잡설

 

  지젝을 읽으면서 가졌던 질문 하나. 까뮈의 냄새가 나는 걸? 지인은 웃어 넘겼어. 실존주의는 폐기된 이론이라고. 실존주의? 물론 나는 모르지. 대학 때, 우연히 <시지프의 신화>를 읽었고, 까뮈를 찾아 헌책방까지 돌아다녔고, <반항인>은 내가 읽은 최초의 철학서쯤 되나? 까뮈의 소설들은 영 취미가 아니었지만, <시지프의 신화>와 <이방인>은 지금도 갖고 있지. 말하자면 까뮈는 내 철학적 인식의 기원?

  부조리한 세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 굴러 떨어지는 바위, 고통 속의 쾌락. “시지프의 말없는 모든 기쁨이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한다.” 달라지는 건 없지. 바위는 어김없이 떨어져. 그래도 모든 것이 달라져. 바위를 떠맡고, 신을 운명에서 추방하자, 바위와 함께 운명은 오로지 나의 것이 되고, 고통은 삶의 생생한 기쁨이 되는 거야.

 

  실존주의는 왜 구박받는 걸까? 나도 모르지. 샤르트르를 읽은 적은 없어. 그래도 까뮈가 나는 좋아.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 첫 문장에 홀려버린 이래로 지금까지. 지젝에게 끌렸던 것도, 라캉에 이른 것도 아마 그래서일 거야. 닮았어, 뭔가. 구조에 갇혔지, 인간은. 언어에, 상징계에. 그래도 주체는 도약 할 수 있어. 믿음의 도약. 환상을 가로질러 심연과 마주하고. 인과의 매듭이 풀리는 한 순간, 사건이 일어나. 사건? 여기서 바디우 등장!

  바디우는 참 어려워. 몇 편의 글, 책 한권 정도지만. 더럽게 어렵더군. 그런데 오늘 본 바디우는 너무 너무 친절하고 쉬운 바디우였어.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바디우와 루디네스코가 일테면 라캉을 두고 잡담을 한 거지. 100쪽 정도, 얇고 읽기 쉽고. 루디네스코는 라캉 전기를 쓴 정신분석가야. 엄마가 라캉의 동료였대. 어릴 때 라캉을 아저씨, 아저씨하고 불렀던 운 좋은 여자지. 덕분에 남들은 모르는 라캉의 시시콜콜 변덕스런 뒷얘기도 많이 알고. 이 여자가 쓴 라캉 전기는 두꺼워. 재미있다기 보다는 라캉, 이 웃기는 자식!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뭐 그런 면이 있는 책이야. 라캉이 생겨먹은 모습이 궁금하다면 추천. 하지만 라캉을 간명하게 알고 쉽다면 차라리 이 얇은 책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이 더 낫겠어. 루디네스코는 라캉을 “계몽적인 보수주의자”로, 바디우는 일종의 혁명가로 보고 있거든. 이 둘의 수다에서 라캉의 양면이 드러나지.  

  나는 바디우 편! 왜냐고? 오늘의 수확!! 내가 어떻게 지젝에게서 결과적으로 라캉에게서 까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지 바디우가 시원하게 설명해 주고 있거든. 턱도 없이 실존주의를 갖다 붙인다고 구박받았던 그 서러움을 바디우씨께서 위로해 주셨다 뭐 그런 거지. 그럼 잡설은 이만, 끝.

 

 

2.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바디우가 라캉을 자기 철학의 토대로 삼는 이유는 라캉적 “주체” 위치의 고유성 때문이다. 바디우는 라캉이 “현상학과 구조주의가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 p61”의 힘든 길을 걸었다고 표현한다.

  「 라캉의 이론적 저작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움직임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체 문제에 대해 아주 독특한 하나의 입장을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저는 다른 젊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앞서 말했듯, 저는 확신에 찬 사르트르주의자였어요. 그런데 알튀세르의 영향도 있었고, 사르트르가 대표하던 현상학과 단절할 때가 온 겁니다. 어째서 그런 피할 수 없는 단절이 있었을까요? p24」

  이어서 바디우는 “현상학은 주체의 사유를 의식 철학으로 몰아갔”다고 비판하면서, 이 때문에 주체는 의식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이해와 혼동되어 버렸다고 한다. 즉 주체란 반성적 자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지성계는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혁명적 해방의 사유p25”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미 모든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모욕을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p25”, 라캉은 이것의 세 가지 중요한 예를 들고 있다. 첫째는 우주론적 차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 둘째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윈의 진화론;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심리학적 차원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자아는 주체의 주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디우는 “반성적이고. 실존적인, 현상학적 주체 모델에서 빠져나올 필요가p25” 있었던 것이다. 바로 “구조주의”가 그 탈출구였다.

  「구조주의는 현상학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구조주의의 깃발 아래 모인 잡다한 사유들은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어요. 바로 전통적 주체 이해에 대항하는 반란에 모두 동참한다는 점입니다. 구조주의의 성좌는, 알튀세르의 유명한 표현을 따른다면 “이론적 반인본주의”, 혹은 푸코를 인용한다면 “인간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p26」

  전통철학에서 주체 개념이란 “자기의식을 동반하는 개인 individual, 말 그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성” 을 가리킨다고 옮긴이 주해는 설명한다. 그런데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주체는 환상이거나, 구조가 만들어내는 효과에 불과하다며 주체 개념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현상학(혹은 실존주의)과 구조주의 사이에서 라캉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라캉은 일단 현상학자들과 단절한다. “모든 경험의 중심으로서의 반성적 주체p27” 라는 개념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비반성적 구조”에 달려 있고, “개인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의식철학 대신 무의식의 과학을 선택한다. 그러나 라캉은 “이 주체라는 범주만큼은 지키고 p27" 싶어 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임상경험의 핵심에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캉은 “구조주의자들의 맹공 속에서 주체를 구해낸p27"다.

 

  라캉에게 그리고 바디우에게 이 반쪼가리 ‘주체’는 왜 이렇게 중요할까? 여기저기 읽은 책을 떠올려 본다면, 구조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not-all이다. 인과 사슬에 완벽하게 닫힌 세계라면, 주체의 자리는 없다. 자유도 없다. 그러나 상징계는 구멍을 중심으로 구조화되고, 이 구멍은 은폐되지만 메꾸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W(hole)이다. 이 구멍, 틈이 순간적으로 열릴 때, 주체는 출현한다. 바디우의 사건이 발생한다.

  「제 작업은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저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를 온당히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죠. p40 」

  바디우는 라캉의 “자신의 욕망에 타협하지 말라” 는 주장을 주체의 윤리적 행위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라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대담자인 루디네스코는 이에 반대하면서 라캉을 “계몽적 보수주의자”로 부른다. 라캉은 평생 정치적 행위에 참여한 적이 없으며, “인간 다수성의 어두운 마법”을 경계했다고 한다. 라캉 자신이 어쨌든 바디우는 그의 사상에서 해방 정치의 싹을 본다.

  「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라캉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저의 방식이죠. 해방이, ‘법’을 비틀고 거기에서 예외를 만드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해방은 어떤 국지적 형상 속에서, 어떤 예외 속에서, 정해진 질서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 속에서 돌발하는 겁니다.p52」

 

  라캉의 학문 속에서 그 제자들이 바라보는 지점은 제 각각이다.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고 배반한다. 모호하고 다의적인 이론을 가진 라캉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라캉을 계승할 것인지, 어떤 라캉의 제자를 따를 것인지에 따라, 바디우의 라캉 해석은 적절할 수도 부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바디우의 라캉은 누구인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해석에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근본적인 차원에서 반대하는 루디네스코의 반론에 비추면 조금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오랜 만에 보는 쉽고 간명한 라캉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라캉과 실존주의의 관련성이 입증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너무도 반가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반복되지만, 현상학과 구조주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라캉과 그 결과로서의 윤리적 주체에 대한, 바디우의 종합적 설명을 덧붙인다. 복습용 ^^

 

  「1950~60년대의 전환기에 철학계는 쇠퇴하던 현상학(사르트르, 메를로퐁티)과 한창 도약하는 구조주의(레비스트로스,알튀세르,푸코 외 다수) 사이의 갈등이 팽배하던 상황이었죠. 그런 데 이 두 경향 사이에서 라캉은 이론적으로 아주 독특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임상 경험에 의해 식견이 생기고 과학적 확실성의 모델에 의해 인도되어, 주체적 경험을 결정하는 체계로서 무의식 개념을 혁신했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부 다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현상학의 핵심을 이루던 주체 개념 -특히 주체를 의식과 자유의 이론에 결부시키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견지하려 했습니다. 라캉은 힘든 길을 걸었죠. 구조주의와 현상학이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를 말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 된 무의식이 주체의 구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조주의의 유산을 끌어모아 재주조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윤리적 성격의 자유로운 위험을 떠안을 가능성을 단언함으로써 주체의 개념을 그 모든 급진성에 재구성하죠. 라캉의 주요한 세미나들 중 하나가 ‘정신분석의 윤리’ 라고 명명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윤리적 차원은 주체 자신이 자기 욕망의 구조를 단언하고 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라캉의 유명한 표현을 고쳐 말한다면, 명령은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인데, 라캉은 이 표현이 대체로 ‘자신의 의무를 행하라’는 의미라고 말하곤 했죠.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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