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때론 책 제목만 보고 그 내용을 짐작했다가 허거덩 하게 될 때가 있다. 작년에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무슨 심리학 비스무리한 책인줄 알았다가(까치 책방의 표지디자인도 한 몫 했다. 아.. 까치책방~!!!!) 뒷통수 맞았었고, 이번에 이 책이 그랬다.
마치 담 넘어 사는 사람들을 관찰했다가 쓰는 이야기 같다고 어느 평론가가 그랬다던데. 동의한다. 이야기는 마치 담하나 넘어서 사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이야기 같다. 그리고 그속에서 나도 살고 있다.
1. 나는 일찍 집에서 독립을 한 편이였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불안하지 않은 큰 딸로 보았다. 크게 속썩이거나 실망시켜 본적이 별로 없었고, 대학을 가라고 했을때도 부모님께서 진학을 원하는 대로 아무말 하지 않고 갔다.(이 부분에서 나는 우리집의 기대치가 크지 않았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무엇을 딱히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고, 집에서 떨어진 곳에 직장을 잡게 됐을 때도 부모님께 의논이 아닌 통보식의 대화를 나누고 결정을 내렸다. 엄마말을 빌리자면 알아서 커준 딸이였다. 그래서 밑에 있는 두 동생이 가끔 부모님 속을 들었다 놨다 할때마다 엄마는 니가 이야기 좀 해보라는 말씀을 하곤 하셨다.
부모님은 수드하에게 라훌과 얘기를 좀 해보라고 하면서 지금은 산책을 나갔으니 좀 이따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하지만 수드하는 며칠 동안 전화를 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마음이 상한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다. 부모님도 그랬다. 아직도 그녀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야속했다. (179P)
그래.. 그런 기분이였다. 어느 늦은밤 남동생과 진로문제로 통화를 하면서 오르막을 오르던 순간.. 느낀 그 기분은.
"못해요" 수드하가 의자를 밀어 일어서며 말했다. 만지작거리고 있던 티스푼을 바닥에 던졌고, 티스푼은 카펫이 깔린 식당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이제 저도 걔한테 얘기 못해요. 내가 걔를 바꿀 수는 없어요. 이 집의 문제를 내가 계속 해결할 순 없다고요." 이렇게 말하고 방금 자기 동생이 한 것처럼 식당을 확 나가버렸다. (188P)
그리고 언젠가 나도 "이제 저도 걔한테 이야기 못해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책에서 처럼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남동생에게 이미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이였다.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땐 그것이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거기서 벗어난 후로 나는 더 부담스러워졌다. 가족도 비슷하다. 타인이고 싶을 때가 있지만 막상 그들을 멀리 하고 나면 나는 더 불안해진다.
2. 아빠와 나는 함께 이야기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부모와 자식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듯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 바닥에는 너무 일찍 돌아가신 엄마 덕분에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가는 이유였던 긴 시간이 깔려 있지만. ) 그 관계가 싫은것은 아니만 가끔 우리는 아버지와 딸로서의 가진 추억이 너무 적다는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때문인지 지금 계신 엄마와 재혼 후에 여동생이 생겼을 때 아빠는 아빠로서의 역활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셨다.
아카시가 아버지와 처음 같이 자던 밤, 루마는 아카시가 잠이 들었나 보려고 아래층에 내려갔었다. 방문 밑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고, <초록색 달걀과 햄>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이불 속에 누워, 베개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책을 가운데 놓고는 아버지가 읽으면 아카시가 책장을 넘기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책의 내용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로선 평생 처음 하는 일이였다. 그는 떠듬떠듬, 문장마다 멈추어각며 읽었는데, 말할 때와는 달리 책 일는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고조되었다. 그래도 애쓰는 게 고마웠고, 문 앞에서 서서 책 읽는 소리를 듣던 루마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노크를 하고 아버지에게 아카시 잘 시간이 지났다고, 불을 꺼야 잔다고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만두고 2층으로 올라가려 몸을 돌리는순간, 잠시였지만 자기 아들이 부러웠다. (62P)
아빠도 생전 처음 하시는 일들을 하기 시작하셨고, 그것이 어색하시겠지만 최선을 다하시려고 노력하셨다. 게다가 최근에는 막내 여동생과 엄마의 엄청난 잔소리와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들을 들으시면서도 고수하시던 담배를 손주가 생기면 뽀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단박에 끊어버리셨다. 오!!!! 손주는 아직 계획도 없는데 말이다.
3. 엄마의 감정이 보여지는 일, 혹은 훔쳐보는 것이 늘 유쾌한 것 만은 아니다.
다음날 쓰레기통엔 프라납 삼촌이 그동안 재떨이로 쓰던 찻잔이 산산조각 나서 버려져 있었다. 그 뒤 엄마의 손에는 반창고가 세 군데 붙어 있었다.(90P)
쓰레기통에 버려진 찻잔이나 손가락에 붙은 반창고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엄마의 감정을 훔쳐 본 적이 있었다. <달과 육펜스>라는 책 앞에 쓰여 있던 몇 줄의 러브레터였다. 그리고 그 책은 두 사람 사이를 몇 번 오갔는지 단정한 엄마의 글씨체와 흐르는 듯한 글씨체가 몇번 반복 되어 있었다. 좀 더 힘차고 정갈한 아빠의 글씨체는 절대 아니였다. 세로줄로 되어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책을 나는 쓰레기통으로 쑤셔 박았고, 그 이후 <달과 육펜스>는 내게 마치 금서같은 것이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따지듯이 이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당시 엄마는 이미 내곁에도, 세상에도 없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엄마와 느긋하게 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것 같지만 뭐... 지금도 변함없이 엄마는 세상에도 내 곁에도 없다. (쓸대없는 이야기- 달과 육펜스는 여전히 내게 금서이고, 기회가 된다면 누군가가 읽어주는 목소리로 이 책의 내용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4. 가족사진 밑에 내가 쓴 코멘터리는 이렇다. <때론 잘못된 선택임을 알면서도 그길로 가고 싶을때, 모든걸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 그래도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게 해 주는 사람들. 내 마음속 깊은 심해의 유일한 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