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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도저히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장면일수록 더욱 더 정면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눈을 돌린다면, 고개를 돌린다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외면'을 숙주로 더욱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렁크를 비롯해 이 소설집에 나온 모든 이야기가
마치 'SOS24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세상에 저런 일이 있나 혹은 있을 수 있나, 하게 반문하게 하는 이야기들.
그런데 알고 보면 진짜 있는 이야기들.
장밋빛 발톱_앞부분에 '에어컨'이라는 소제목을 단 짧은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잘못 배달되온 에어컨을 미인계를 이용하여 팔아먹는 어느 부부. 그리고 뒤에 단편 제목의 이이야가 나온다. 옥탑방에 사는 남자가 매일 훔쳐보게 되는 다른 옥탑방에 사는 여자의 장밋빛 발톱. 나는 뒤의 이야기를 앞의 이야기에 대한 환상으로 읽었다. 도난당한 에어컨이라며 떼어가버린 후, 에어컨 호스가 통과한 벽은 봉인이 된다. 뜨거운 여름, 옥탑방에 봉인된 백수가 아지랑이 하나를 본 것 같은 느낌의 소설이다.
웰컵 베이비와 웰컴 마미_모두 환영받지 못한 만남이다. 여인숙에 영아를 유기한 어린 부부,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며칠씩 먹을 것만 남겨두고 방에 가둬두는 여자, 아이를 갖기 위해 흥신소를 찾는 여자. 이들에게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두 번째 여자는 약간 느끼긴 하지만 결국 아이를 버리고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한다. 아이는 사체로 발견되지만 자기 탓이 아니라고 발악한다. 여인숙에 영아를 유기한 어린 부부는 그 말투에서부터 '다시 임신만 시켜봐, 씨발님'같은 욕설과 존대가 공존하는 이상한 화법을 구사한다. 그들이 낳은 아기는 공교롭게도 눈이 없다. 아이를 갖기 위해 흥신소를 찾는 여자는 흥신소 사람들에 의해 살인자가 된다. 흥신소 사람들이 아이를 가져다주기 위해 생모를 살해하기 때문이다.
매일 기다려_늙은 노숙자가 어린 소녀를 친손녀처럼 챙기다 결국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가진 것 모두를 읽는다는 이야기. 저토록 바보스러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노인의 이야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씁쓸했던 것은 노인을 갈취하고 절망하게 하는 한 떼의 소년소녀가 앞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리라는 것이었다.
조대리의 트렁크_오랜만에 만난,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는 동창. 아주 쉽게 말문을 틀 수 있는 관계 중에 이만한 관계도 없을 것이다. 과거를 공유했다는 친밀감은 있되 과거의 실망스런 나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리기사와 손님으로 만난 소설 속 등장인물이 그런 관계다. 그러나 밀폐된 차 안에서 이들의 대화는 공포와 친밀감을 함께 전개시킨다. 차주와 자살과 트렁크 안에 있던 그의 노모. 동창인 줄 알았던 차주는 동창이 아니고. 하룻밤 악몽 같은 소설이지만 이 안에는 어떤 '위로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
로망의 법칙_지형 환상통이라는 병이 등장한다. 없지만, 내 몸에서 사라졌지만 통증을 느끼는 병. '없기' 때문에 고칠 수 없는 불치병. 기러기 아빠로 자식과 아내를 미국에 보낸 의사. 그는 열심히 돈을 벌지만 유학비로 모든 돈을 송금한다. 의사라는 지위와 그에 수반되는 경제적 풍요로움은 그에게 전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는 이혼까지 요구한다. 그가 행복을 위해 애썼던 모든 현실이 불행의 원인이 되버린 것이다. 만약 아내와 아이를 미국에 보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형 환상통이 갖고 있는 모순만큼이나 그의 불행은 행복에 대한 발로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역시 모순일 수밖에 없다.
루시의 연인_야한 소설을 인터넷에 기고하는 젊은 남자. 그는 군대에서 다리 신경이 끊기는 사고로 불구가 되고 방 안에 자위 인형과 함께 매일을 살아간다. 그의 유일한 외출은 동네 책 대여점에 갈 때뿐이다. 그러나 대여점 주인은 동네 사람들의 돈을 가지고 달아나 버리고 남자는 외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리고 대여점 주인에게 돈을 빌려준 역시 불구인 여자를 아내를 맞이한다. 현실의 냉정함을 목격한 남자가 그토록 거부했던 자신과 똑같은 장애인 여자를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사랑의 후방낙법, 굿바이 투 로맨스_동성애는 아니지만 두 여자의 우정을 넘어선 어떤 관계가 돋보이는 작품들. 거기에는 역시 '연민'이 도사리고 있다. 열심히 하지만 실패한 유도 선수와 그의 훈련 파트너, 집착이 강한 남자에게 감금당해 사는 남자의 두 연인. 다른 소설들이 독자에게 위로를 바라고 있다면, 이 소설들은 인물은 소설 속 인물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이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느낌이다. 양파여서 들여다봤는데 양파가 아니라 수포들의 집합체인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고 그래서 너무 낯선, 뜨악한 느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세계가 이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