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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단편 「겨울꿈」에서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F.스콧 피츠제럴드였다. 과연, 설사 같은 사람과 다시 연애를 한다 해도 절대 똑같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단순한 명제를 인정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지난 사랑을 탐하며 아파했던가.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린 후 방황하고 아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정의 깊이에 비례되는 상실감과 허무함, 그리고 두려움일까. 대부분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현실에 근거한 사실을 믿기 싫은 우리는 때때론 사랑을 시작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사랑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괴롭고 외로운 싸움이오, 다만 한 줌의 아름다움과 추억만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데. 대체 그 누가 사랑을 가장 쉽고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했던가. 아름답고 순수한 모리스를 바라보며 새삼 탄식에 젖게 된다.

 

『모리스』는 포스터의 작품 중 거의 제일 저평가 된 작품인데, 이 책을 둘러싼 가시적인 이슈들 - 동성애 소설이라는 꼬리표와 자전적 소재라는 자극점 등 - 만으로 바라보기엔 너무도 아까운 글이다. 『모리스』에는 포스터의 문체와 역량이 그대로 담겨 있다. 서사구조는 간단하고 내용은 명료하면서도 문장은 우아하고 냉철하다. 특히 어떤 선입견에 쌓여 읽기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정직하고 아름답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올해 읽은 최고의 연애소설 중 하나로 꼽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대체 모리스가 사랑을 갈구한 사람이 남성이라는 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 이야기는 한 남자가 사랑의 과정을 지나면서 어른이 되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며 동시에 애절한 연애소설일 뿐인데.

 

주인공 모리스는 다소 즉흥적인 면이 있지만 다정한 성품과 단정한 생김새, 어디를 보나 촉망받는 청년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클라이브는 예민하고 유약한 편으로 모리스와는 정반대에 가깝다. 학창시절에 만난 둘은 호의와 호감과 신뢰를 넘어선 무언가가 존재했다. 클라이브의 사랑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것과 닮아있다. 여성을 폄하하고 남성을 우상시하는 것, 아름다운 것을 흠모하는 것, 남성의 몸과 근육과 뼈를 지지하는 것, 그럼에도 플라토닉한 사랑의 지향까지도. 클라이브를 보면, 누군가 내게 동성애는 자기애의 연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모리스의 진솔함과 남자다움을 탐했지만 그에게 사랑을 던지지는 않았다. 모리스의 손길은 클라이브를 안정시켰으나 욕망에는 답해주지 못한다. 결국엔 모리스의 탐욕과 다정함을 경멸하게 된다. 그렇게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홀로 둔 채 스스로 안정된 구조와 보통의 삶이 주는 안위로 돌아온다.

 

자신이 더 많은 마음을 받은, 미련 없는 지나간 사랑은 (극단적인 언어지만 일종의)가해자에겐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긴 미련을 지니고 더 깊은 상처를 받은 피해자에게는 아픔으로 남는다. 클라이브는 아는 것도 많고 섬세했지만 유약한 남자였다. 심지어 지나간 애정을 우정 따위로 포장해서 모리스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구원하려드는, 차갑고 연약한 손을 뻗기도 한다. 그런 그의 앞에서 모리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무릎에 기대던 그 머리카락이 빠져나갔을 때, 자신의 손을 거절하는 그의 얼굴 앞에서, 모리스는 어떤 절망에 빠졌을까. 어쩌면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상우가 내뱉었던 대사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처연하게 말했을까.

 

그렇게 모리스는 클라이브에게서 사랑을 달콤함을 오만함을 다정함을 배웠고 그 깊이만큼 절망한다. 그런 모리스를 앞에 두고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둔탁한 아픔이 가슴께를 강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득한 눈빛과 안온한 공기와 순간적인 행복감. 그런데 그때의 찬란함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닐 때, 아름다웠던 그때의 너와 나는 이제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질 때 우리는 압도적으로 서글퍼진다. 그리고 애정의 깊이는 종종 무관심이 아닌 증오나 혼동의 깊이로 돌이켜지기도 한다.

 

지나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배움이 없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지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음란한 욕망, 두서없이 나누던 기나긴 대화들도 돌이키지 않으니.

 

작가의 냉담하고도 부드러운 말투 앞에서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이 책이 어째서 연애소설인지, 그리고 본질까지도. 어쩌면 이 책은 우리를 관통했던 어떤 순간을 기록하는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면서 접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키스의 부드러움, 사랑하는 이의 손의 감촉, 그때의 수줍음과 설렘, 희망의 시기를 지나 관계의 정착, 그리고 균열. 몰이해와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상처를 수습하고 다음 사랑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 그렇게 반복되는 사랑의 과정 말이다.

 

그러나 모리스의 사랑은 단지 사랑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 시대상, 동성애에 대한 주의의 시선들, 가족과 집안과 사회적 직위 등 작가는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모리스를 시대 안으로 녹여낸다. 사랑이 지나간 것을 알아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리스를 때론 동정하면서도 줄곧 냉담하게 바라본다. 그에게 비로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을 때 그는 먼 곳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기 안의 두려움과 연약함과 둔함을 안고서 알렉을 선택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렇다. 그것이 모리스가 그를 찾아간 이유였다. 그것은 더는 읽지 않을 책을 덮어 두는 일이었으며, 그런 책은 곁에 두고 먼지만 쌓이게 하느니 그냥 덮어 버리는 편이 낫다. 그들의 과거의 책은 책장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기, 어둠과 죽어 가는 꽃들에 감싸인 여기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렉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새것과 옛것이 섞이는 고통을 겪을 수 없었다. 모든 타협은 속임수고 그러므로 위험하다. 이제 모든 걸 털어놓았으니 그는 자신을 키워 준 세계를 떠나야 했다.

 

모리스는 이제 자신의 사랑이 지나갔다는 것을 인정한다. 피츠제럴드의 말처럼 세상에 같은 사랑을 없다는 사실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과 결별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나 여태껏 그 책을 더 읽을 수도 덮을 수도 없었던 그가 이토록 의연해질 수 있다니. 마치 그것이 어떤 성장처럼 느껴졌다. 아, 여전히 소년에 불과했던 그가 사랑이 지나간 후 -혹은 새 사랑을 앞두고- 남자가 되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포스터는 모리스와 알렉이 떠난 후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기대치가 부담스러워 작용한 의도적인 희미함인지, 자기 자신도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희망을 담은 침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둘이 십자가를 진 채 걷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죄악이 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 처참한 일이 아닐까.

 

그 뒤에 남은 흔적이라곤 조그맣게 쌓인 달맞이꽃의 꽃잎뿐이었다. 꽃잎들은 꺼져 가는 모닥불처럼 땅 위에서 애처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죽을 때까지도 모리스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블루 룸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고사리 풀숲은 물결쳤다. 영원한 케임브리지 어딘가에서 친구는 온몸에 햇살을 입고 그에게 손짓하며 5월 학기의 소리와 향기를 떨치기 시작했다.

 

모리스의 뒷모습을 클라이브는 이렇게 회상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사랑의 과정의 알싸함을 떠올린다. 우리를 관통했던 그 순간들에 대한 기억과 피츠제럴드의 말을 상기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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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때때로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 다함께 토론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첨삭 지도를 받기도 한다. 그때부터 내 머리카락은 성할 날이 없었다. 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왜 이리 힘든지, 매일 쓰던 한국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웠는지, 기껏 머리를 짜내 쓴 표현들은 왜 이렇게도 비루한 것인지. 어떤 것들은 감성적이지만 알맹이가 없었고, 어떤 말들은 적확하지만 세련되지 못했다. 게다가 유난히 번역 투의 문장 혹은 일본식, 영어식 표현을 자주 쓰는 친구도 역시 지적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겁을 먹고 철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녀가 겪은 이야기, 느낌과 생각을 바탕으로 통번역에 대한 허심탄회한 일종의 고백록과 같은 책이었는데, 나는 줄곧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거나 키득거리거나 애처로워하며 읽었다. 그게 이 책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녀냐 추녀냐』.

 

정확히 말해서 이 책의 제목은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일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미녀와 추녀는 통역과 번역에 관한 것인데,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표현은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는 쪽은 부정한 미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설명이지만 표현으로선 그 가치가 미비한 쪽이 정숙한 추녀인 것이다. 다소 황당한 표현일 수 있지만 이보다 정확한 말이 있을까. 아, 그것은 내가 가장 고민한 -비록 내가 했던 일은 통역이나 번역이 아니었음에도- 것 중의 하나가 그것일진데. 비단 나 뿐 아니라 이미 번역 된 책을 읽으면서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유려하고 원색적인 언어의 마법을 부리지만 공허하게 와 닿는 글과 의미만 파악 될 뿐 회의록을 읽고 있는 듯한 글. 물론 가장 완벽한 것은 -아름답고도 깔끔한 문장인- 정숙한 미녀이겠지만 그 경지에 닿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마리 여사는 토로했고 나는 긍정했다.

 

그런데 통번역자의 고충은 아름답고도 명확한 표현에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귀여운 정도가 아닐까. 그들의 어려움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다. 주제나 용어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용어에 대한 함의까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 어떻게 통역할 것인지, 사투리나 독특한 말투는 어디까지 전할 것인지도 문제다. 게다가 그들은 늘 까다로운 두 명의 주인을 섬겨야 한다. 마리 여사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통역, 번역이라는 행위는 메시지의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두 사람의 주인에게 항상 신경 쓰며 두 주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절대로 나서지 않고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 더구나 그 운명은 두 사람의 주인에게 달렸으니, 생각해 보면 정말 가혹하고 불리한 일이 아닌가. 조금 더 학문적으로 표현을 하면 통번역은 메시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의존한다. (p.60)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둘을 철저하게 균형적으로 냉철하게 보필하면서도 양 쪽을 조율해야한다. 설상가상 두 명의 주인은 발신자와 수신자뿐만이 아니다. 우선 두 언어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사용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말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둘러싼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때때론 일반인과 전문인, 혹은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라는 두 세계를 통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통번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쪽의 전문가(혹은 그에 가깝게)가 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니 정말이지 이렇게 힘든 일도 없겠다 싶다.

 

게다가 시간은 없고, 그들의 입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다. 그들이 통역 부스에 앉아 있는 순간 그들은 숙련되고 재빠른 특수요원이어야 하며, 동시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고독함의 황야에 서 있는 것이 된다.

 

결국 통역, 번역은 기본적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일본어다운 일본어가 있는데, 그것을 러시아어 같은 일본어로 한 번 바꾸고, 다시 일본어 같은 러시아어로 바꾸기, 그리고 러시아어다운 러시아어로 바꾸는 네 단계가 있죠. 물론 제2,3단계는 통역사와 번역가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통역사는 이 과정을 순식간에 합니다 (p.65)

 

통역사는 통역하는 중에는 자신이 지금 기억 속에서 꺼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다. 사전이나 참고서, 전문 서적과 같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기억 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번역가처럼 기억의 부담을 외재적 기억 장치에 지울 수 없다. 자신의 기억력 이외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통역 중에 적는 노트테이킹과 미리 추측해서 작성한, 그것도 한 장의 종이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용어집 정도다. 태어난 이후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온 교양과 상식, 이전에 축적하거나 사전 준비를 하면서 허둥지둥 집어넣은 지식과 어휘 등,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을 순간적으로 꺼내서 사용해야 한다. (p.115)

 

무엇보다 어중간한 지식인이 아니면 통역 일은 하지 못한다. 모든 분야와 주제를 파헤쳐서 철저하게 규명하려고 하는 진짜 지식인과 달리, 오늘은 이 주제, 내일은 저 주제라며 나비처럼 학문과 전문 분야를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어중간함은 반드시 필요한지도 모른다. 언제나 완벽을 꿈꾸며 목표로 하면서 영원히 이루지 못하는, 항상 발전도상 상태인 신분이다. (p.340)

 

여기까지 읽다 보면 그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물론이거와 사실 약간의 애처로움까지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저 다리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조금 이상한 비유지만 청소 같은 것이다. 안하면 티가 나는데 하면 티도 안 나는 것. 없으면 아쉽지만 있을 땐 좀처럼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되는 사람. 그런데 그들의 능력과 순발력, 노력과 고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쯤에서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내가 이 책을 무조건 즐겁고 술술 읽었냐면 사실 그것은 아니다. 마리 여사가 경험을 토로하는 부분 -예를 들면 양어장 시설, 하수 시설, 프리마돈나의 인터뷰, 만국 가금 회의 등- 에선 웃음이 나면서도 나까지 머리가 아파 괜한 머리카락을 -또 다시!- 쥐어 잡기도 했다. 블랙박스와 인풋, 아웃풋까지 그림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일본어, 러시아어도 모자라 독일어와 중국어 얘기를 할 때는 기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굉장히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읽으려고 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그들의 일에 대한 경배이기도 했지만 사실 얼마만큼은 미안함과 보상심리이기도 했다.

 

책은 단 한명의 작가에서부터, 그 (혹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부터 나왔다고 믿는 순진한 때가 있었다. 생각의 나무가 한 사람의 머리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고, 이 책이 탈고되기까지 그 어떤 것도 -작가의 퇴고를 제외하고- 더해지거나 빠지지 않았다고 믿었던 시기. 그때 내가 선망했던 것은 작가 그 자신이었고, 폄하했던 것은 번역자와 편집자였다. 그리고 우연히 베스트셀러의 탄생과정에 대한 책을 읽고 편집자의 능력과 행동반경(?)에 대해 경의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톡톡한 수혜를 누려왔음에도 번역자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 사실상 등한시했다.

 

한때 일본문학에 빠졌었다. 어딘가 찰나적이고 무연한 시선과 독특한 내용, 차갑고 부드러운 문체에 반했었던 것이라. 그때는 문장 하나를 두고두고 곱씹는 것이 내 버릇이요, 즐거움이요, 탐욕이자 간식이었다. 그 유려한 문장들을 앞에 두고서야 문득 이 글을 이렇게 완성시켜준 번역자에게 -무례하지만 처음으로- 감사했다. 번역이란 작가에게 기생한 하나의 편린이 아니었다. 외국어를 못하는 이들에게도 외국의 문학을 전하는 고마운 사람, 두 가지 언어와 그 문화에 익숙한 능력자, 단순히 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문체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쥐어 싸맬 친절한 연금술사, 어떤 의미에선 (외국의) 작가 그 자신보다 더 감사해야 할 사람. 그때부터는 번역자의 이름도 꼭 챙겨보고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게다가 존경하는 번역자들도 생겼으니 이제는 정말로 팬이 다 되었다. 어쩌면 번역가의 고충에 대한 이해와 고마움, 그리고 무시했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일까. 때론 난해하고 남의 것 같기만 한 이 책도 진지하고 즐겁게 읽은 이유가.

 

여담이지만 이 책을 번역했을 분을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났다. 번역가의 책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있었을까, 이 안에 쓰인 텍스트에 가장 먼저 제일 많이 공감한 사람이었겠지, 번역가를 번역하는 것이 즐겁고도 막막한 일이었겠지. 이제는 책을 읽기 전에 세 명에게 감사를 한다. 우선 고독 속에서 창작을 한 작가, 그 작가를 키워낸 편집자, 그리고 그 글을 완성시킨 번역자. 이 글을 읽고 나서 새삼 한 권의 책을 둘러싼 이들에게 감사와 존경심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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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먼저 작가의 이력을 읽는다.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은 질량감이 있지만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찬찬히 읽어가기 시작한다. 책을 넘기며 문득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데스의 책이 생각난다. 그 때 느꼈던 묵직한 피로감과 알 수 없는 부채감, 파르르 떨었던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그런' 책들이 있다. 생의 무게를 어깨에 가득 짊어본 적이 있는 자,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는 자, 견고하고 묵직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글. 그저 소설로만 넘기기엔 묵직하고 막막한 활자의 냄새.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도 '그런' 책이었다.

 

주인공은 레오폴트 아우베르크. 『숨그네』는 이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소년 레오의 시점으로 그려진 수용소의 모습과 그 안의 삶이다. 우리가 여태껏 만나온 영화와 글 속에서 그렇듯 『숨그네』에 묘사된 수용소의 모습 역시 인간 이하의 것이라 생각 될 만큼 처참하다. 그리고 절대 고독과 공포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차라리 생에 대한 복수에 가깝다.

 

헤르타 뮐러는 수용소 안에 갇힌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노동, 생의 방식에 대해서 고요하고도 처연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사물에 대해서도 독특하고 묵직한 언어들로 그 존재 자체를 설명한다. 『숨그네』는 절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문장은 뚝뚝 끊어지고 내용은 괴롭고 단어는 낯설다. 죽음의 향기와도 같은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기도 하고, 시원한 방 안에서 읽고 있는 현재의 삶 때문에 더욱 서글퍼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이 책을 두고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품이라고 말했다. 아아, 어쩌면 그것마저 사치가 아닐까. 날 것 그대로의 생의 진실을 목도하는 자들, 누군가와 분배할 수 없는 공포와 본능적인 욕구만 남은 자들의 언어를 미술품을 감상하듯 말하는 것은. 극도의 곤궁이나 허기짐을 겪지 않은 -'바깥'에만 머물러 본- 자들의 교만한 말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편으론 '예술품'이라는 말 자체에 공감하게 된다. 이 문단들을 보라.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입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것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눈을 제 안경처럼 덧쓰고, 심장삽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석탄은 흐릿하게 보인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눈을 올려 뜨면 저 위로 조용한 여름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꿰여 하늘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p.97)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한다. 배는 부르지 않지만 적어도 음식 곁에 머문다. 만성적으로 굶는 사람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단어가 있다. 드물게 쓰는 단어와 지속적으로 쓰는 단어가 있다. 각자 제일 맛있어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 카푸스타처럼 명아주 역시 먹는 단어에 들지 못한다. 먹는 단어는 실제로 먹는 것 혹은 먹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78)

권태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권태가 작정하고 내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권태는 그저 가끔 내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할 뿐이다. (p. 232)

 

나를 목표로 하는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복귀. 복귀라는 단어는 원래 의미는 제거된 채 마치 수용소로서의 복귀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 같다. 내게 복귀가 실현되고 나면 그 말은 쓸모가 없어진다. 회상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손상이란 말도 내가 복귀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 경험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이 쓸모없는 단어들을 접하면 나는 원래보다 더 멍청한 척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만날 때마다 이전보다 강해졌다. (p.259)

 

문장의 감정은 무뚝뚝하고 농담(濃淡)은 일정하다. 설명은 독특하지만 의미는 적확하다. 세상에는 간단하게 쓰이고 쉽게 읽히는 글도 있지만, 헤르타 뮐러의 글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물 위로 돌을 던져 잔잔히 파동이 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언어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생활이나 삶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경험을 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글, '쓰고 싶어서'가 아닌 '써야만 했기에' 쓴 글. 수용소의 삶이란 절망스러울 정도로 한결같다. 춥고 가난하고 헐벗고 냉혹하다. 그런데도 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담백한 언어로 표현해낸 수수하지만 단아한 도자기 같다. 그렇기에 그 안에 담긴 정수는 더더욱 아프고, 언어는 더욱 더 유려해진다.

 

『숨그네』의 독특한 점은 -아름다운 언어를 제외하고- 레오가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의 삶까지 조명한다는 것에 있다. 대부분의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귀향한 후의 삶에 대해서 잘 다루지 않는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려는 일종의 열린 결말일수도 있고, 귀향까지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숨그네』에는 돌아온 레오가 자신의 삶에 녹아드는 과정 또한 표현되어 있다. 레오는 자신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을까. 할머니가 해준 말을 늘 상기했던 것은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회한이 혼합된 마음이 아니었을까. 씻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 겪지 않은 자들과는 나눌 수 없고, 겪은 자들과는 나누기 싫은 백일몽 같은 삶이라니. 레오는 귀향 후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가족들에 대한 부담, 차라리 그곳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모를 절망감을 안고 살지 않았을까. 역사의 대부분이 그렇듯 죽은 자들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더 아프지 않은가.

 

귀향 후의 삶을 그린 것과 단 한 켠의 위무라는 의미에서일까, 문득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갇혀 있는 감옥 안에서 체스 판을 떠올린 것. 그 안에서 가상의 수많은 체스 경기를 대전하는 것. 그것으로 수감된 생활을 '죽음으로 도피'하려던 것은 애써 이겨낸 것. 그때 그에게 체스는 단순히 64칸의 놀이가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한 일종의 도피이자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숨그네』에 등장하는 하얀 손수건이 그러하듯이.

 

시원한 곳에서 음료를 마시며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로선 책의 깊이를 아마 이해하는 것도, 감당하기도 힘들 것이다. 다만 마음 속 어딘가에서 싹트는 생경한 아픔이 느껴졌다. 삶이란 아픈 것이구나. 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구나. 그렇기에 언어는 아름다운 것일까. 두서없고 근거 없는 감상들이 흘러나온다.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고개를 돌린 바깥에는 슬퍼질 만큼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 이 책은 처연한 죽음의 그림자로 빚은 예술의 낱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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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2010-08-0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문학동네 편집부의 고우리입니다.
이번에 제작하는 소책자 <헤르타 뮐러 스페셜북>에 독자님의 리뷰 일부를 게재하고 싶어 사용 허가 요청 드립니다. ^^ 보시는 대로 답글 또는 메일kupsch@naver.com로 허락 여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용하려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의 무게를 어깨에 가득 짊어본 적이 있는 자,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는 자, 견고하고 묵직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글.


고맙습니다.


문학동네 2010-08-0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행 일정이 급해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책 나오면 한 부씩 보내드리겠습니다. 메일로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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