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의 세계 - 세계 석학 7인에게 코로나 이후 인류의 미래를 묻다
안희경 지음, 제러미 리프킨 외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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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문가들이 저마다 지적하는 문제점이 다르지만 공통된 전망을 한다는 점, 당연한 말이지만 각자의 주전공과 출신에 따라 대답이 갈린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마찬가지로 같은 이유로 장하준 교수의 대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시의적절한 인터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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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 바로 지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클래식 클라우드 22
정여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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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를 소재로 한 에세이 느낌. 저자를 좋아한다면 위로와 격려가 될 것 같지만 학술적 해석이나 작품의 평론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 같다. 심지어 헤르만 헤세는 국내 번역된 작품도 헤세 관련 책도 많은지라 특별한 차별점이 없다는 점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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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21-07-05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쯤되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내가) 오해한 것 같다. 좋게 말해서 저자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는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편집부의 역할이 결여된 것 같다. (선정 작가가 아닌)저자에 따라 완성도와 방향성이 제멋대로라 시리즈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마늠 취합이 잘 안 된다. 몇몇 책은 취재비용과 섭외비가 아깝지 않을 만큼 열심히 쓴 티가 절로 나지만 몇몇 책은 이미 알고 있는 걸 답습하는 정도에 그치거나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는 감상문에 가까워서 매우 실망스럽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드문드문 읽어가는 중인데 이제는 시리즈 자체에 대한 기대감도 많이 떨어진터라 몇 권이나 더 보게 될지 모르겠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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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의 성격상 결론이나 일종의 해결법이 약한 점은 아쉽지만 고통에 대한 단계적이며 체계적인 분석이 인상적이다. 모든 고통이 다 같은 고통일 수 없다는 사실과 같은 고통이 같은 해법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고통은 근본적으로 동행할 수 없다는 인정과 고통과 피해를 가르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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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21-06-21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해자를 고통에 찬 사람으로만 재현하는 것은, 그가 피해자로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로만 보이게 한다. 이것은 그에게서 말도, 삶도 모두 박탈하는 폭력이다. 피해자는 고통받는 사람이기에 오로지 고통스러운 모습만 보여야 한다. 그에게는 고통 이외의 다른 일상이 없다. 아니, 고통 때문에 돌아갈 일상이 없는 존재이기에 그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밥도 맛있게 먹어서는 안 된다. 그는 누군가와 데이트를 해서도 안 되고 여행을 가서도 안 된다. 고통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해서도 안 된다. 고통을 받는 그는 화려한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에게는 일상이라는 삶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게 허용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이다. 세상이 붕괴된 죽은 자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가 지켜야 하는 ‘일관성‘이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피해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사람이고 그 일상의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다. 그런 데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은 고통을 당한 사람‘답게‘라는 가면이 벗기지는 순간 순식간에 그에 대한 조롱과 공격으로 전환된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민‘, ‘연대‘ 나˝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도 쉬웠다. 상업적으로 포장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쉬웠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고통을 사회에 알리고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 비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자신에 대한 윤리적 면피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고통을 겪는 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신이 고통에 차서 절규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들이 이런 시장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이야기했을 때 주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그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선 이러한 주목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야기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끌 있는 포맷이 만들어졌고 그 공식에 따라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복제되듯 생산되었다. 고통을 겪는 자 신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맞춰진 틀에 따라 이야기를 했을 때 훨씬 효과적이었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다. 이런 이야기들이 시장의 주목을 받으면서 경쟁이 격화되었고, 고통의 표현 강도도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고통을 파는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고통의 맥락이나 이유.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강도가 되었다. 더 강하게 몸부림쳐야 했고, 더 처절하게 울부짖어야 했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라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포르노처럼 자기를 드러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끌 수 없었다.


책 내용 발췌.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노승영.박산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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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 번역은 있을지 몰라도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겠구나, (여느 직업이든 그렇지만) 상당히 복합적인 고충이 있는 직업이구나 싶다. 그럼에도 각자가 느끼는 직업적 고취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며 현실적인 충고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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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21-06-21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일컫는 영어 단어 ‘트랜슬레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트란슬라티오’인데, 이 단어는 ‘건너서’를 뜻하는 ‘트란스’와 ‘트란스페레’의 과거분사형이다. 그렇다면 ‘트랜슬레이션’은 ‘건너편으로 나르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무엇을 무엇의 건너편으로 나른다는 것일까? 언어의 장벽이라는 강 저편과 이편에 각각 저자와 독자가 있다. 나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가이니까 강 저편은 (저자가 있는) ‘영어의 땅’이고 강 이편은 (독자가 있는) ‘한국어의 땅’이다. 독자가 저자와 대면하는지, 텍스트와 대면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독서를 (저자와 독자가 나누는)일종의 대화로 보기로 한다. 번역가는 사공이다. 그의 임무는 저자와 독자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사공은 한국어 땅의 독자를 영어 땅에 데려가 저자를 만나게 해야 할까, 영어 땅의 저자를 한국어 땅에 데려와 독자를 만나게 해야 할까?

첫째,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경우, 독자는 낯선 땅에 발을 디딘다. 풍경도 풍습도 물건도 낯설기만 하다. 독자는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저자를 우러러본다. 저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고 싶다. 저자의 말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다. 저자가 바라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고 싶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 타이다. 낯선 진실이 있고, 나는 이방이다.

둘째,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오는 경우. 저자는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을 밟는다. 저자는 자신의 말이 지독한 사투리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평소처럼 말하면 독자는 저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저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을 다듬고 독자에게 친숙한 예를 든다. 자신의 땅이기에 독자는 주눅 들지 않는다. 나를 이해시키라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당신 책임이라고 말한다. 입증의 책임은 저자에게 있다.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데려가는’ 번역을 직역, ‘데려오는’번역을 의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는 손님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손님은 자신을 건너편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고 어떤 손님은 건너편 사람을 데려와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사공은 배를 한 번만 몰 수 있기에(저작권 때문에), 손님들의 제각각 요구를 하나로 모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마치 손님이 한 명인 것처럼. 이 가상의 손님을 ‘독자’라 한다.

그런가 하면 나루터에 배를 대고 한쪽 땅에서 둘을 대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 한가운데 나룻배 위에서 상봉시키는 방법도 있다. 사공은 그때그때 솜씨를 발휘하여 배를 이쪽으로 몰았다가 저쪽으로 몰았다가 한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배가 어느 나루터에 닿는지에만 관심을 쏟는다. 하지만 초짜 사공이 영어 땅으로 향하면, 독자를 엉뚱한 나루터에 내려주기 십상이다. 물길도 모르고 저자가 어디서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배를 젓는다. 이를 일컬어 ‘영혼 없는 직역’이라 한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문장을 썼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영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를 짝짓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게으른 사공이 한국어 땅으로 향하면, 배를 나루터 아닌 곳에 대충 접안하기 쉽다. 이를 일컬어 ‘얼렁뚱땅 의역’이라 한다. 문장 구조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서 대충 감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럴듯하지만 원문과 대조하면 터무니없는 오역도 곧잘 발견된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번역 논쟁은 영혼 없는 직역과 얼렁뚱땅 의역의 사이버 논쟁인 경우가 많다. 부디 경험 많고 부지런한 사공을 만나시길.


책 속 한 문단을 소개한다. 다소 길지만 번역의 핵심을 관통하는 글 같다.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 - 미술품을 치료하는 보존과학의 세계
김은진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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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보다 복원가에 대해 널리 알려진 지금도 그들이 하는 일은 정확히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게 친절히 알려주는 작업 진행서.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이 얽혀있어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난감함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다만 화학처리나 원리에 대한 설명은 내 머리론 이해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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