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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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아가미』이후 다시 구어체 리뷰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리 인사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날도 비가 내린 후였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군요. 이런 날에도 굳이 산행을 도전하거나 계곡으로 캠핑을 가서 119아저씨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불어난 물에 휩쓸려 하릴없이 죽음의 길로 떠내려가는 이들도 분명 생기겠지요. 사람 목숨은 참으로 질기고도 찰나라는 것을 이럴 때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로 깨닫게 되지요. 여기에도 질기고도 순간인 사람의 생사를 목격하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오늘 이야기할 글입니다.

김애란, 그렇습니다 여러분 김애란입니다. 저는 그녀를 말할 때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 얄미워. 아직 충분히 젊은 작가인데도(차라리 어리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나이였지요) 성량이 풍부하고 감정까지 풍부한 목소리를 내곤 했죠. 게다가 그 목소리 안에 담긴 것들은 깊으면서도 맑았죠. 놀랄 만큼 디테일하고 섬뜩하게 현재를 잘 포착해내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즐겁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죠. 그런데도 결코 가볍지도 비루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더랬죠. 뭐랄까, 김애란을 읽으면 ‘평론가들이 칭찬하는 글들은 어렵고 비(非)대중적이다’라는 은근한 편견을 -거의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죠. 젊은 작가 중에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김연수 작가와 함께 평단과 대중을 함께 만족시키는 젊은 작가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으더군요.  

저는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좋은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반듯하게 자란, 공부도 잘하고 생긴 것도 말끔한, 등굣길에는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어 강아지를 구할 것 같고(!) 아침부터 상쾌하게 농구를 하는가 하면 하굣길에 할머니 짐을 들어줄 것 같은 그런 소년 있잖습니까. 하물며 심지어 겸손하고 사교성도 좋은 뭐 그런 소년 말입니다.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캐릭터, 서브 남자주인공의 느낌말입니다. 도저히 수상한 구석이 없는 그래서 나와는 도무지 연관될 구석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부럽고 분하다가 그냥 이 정도로 우월해주시면 그저 허허허 하게 된 달까요. 저에겐 김애란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재밌고 꼼꼼하고 영민하고 매력 있고 문장력까지 좋은, 얄미운 작가. 그런데 6월, 드디어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습니다. 허나 큰 기대는 대부분 큰 실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냉정한 척 하며 기대를 조정하려 애썼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목이 의아합니다. 게다가 파스텔 톤의 여리디 여린 표지라니. 이래저래 지나치게 트렌디한 거 아냐? 거부감과 불안감이 모여 함께 술렁거립니다. 책장을 엽니다.

읽었노라, 느꼈노라, 쓰노라. 이것이 리뷰를 완성시키는 삼단계지요. 네, 씁니다 쓰려구요 리뷰.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괜히 얼토당토않게 쓰다가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처럼 얼룩덜룩해질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고여 있지 못하고 자꾸만 찰랑이다 못해 범람할 것처럼 덤벼드는데 연설문을 쓰듯 정갈하게 뽑아 낼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문어체 문장은 도대체가 나오지가 않았어요, 읽는 이가 얼마나 되던 어떤 생각을 쓰든 문어체 문장은 강단에 서서 말하는 기분이 들곤 했거든요. 하지만 친한 친구가 “너 그 작가 좋아하잖아. 이번 책은 어때?” 라고 물어보면 봇물 터지듯 -두서는 없어도-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았어요. 그게 이 리뷰가 문어체인 이유입니다. 네? 아, 그래요 실은 조악한 아이디어마저 똑 떨어진 것도 맞긴 합니다.

줄거리부터 간단히 설명할까요. 아주 간단한 시놉시스, 아니 트리트먼트로 요약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 한 문장이면 가능하죠, 작가 자신이 정의를 내렸더군요.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남들과 다른 속도로 부모가 된 두 남녀와 남들과 다른 속도로 시간을 스쳐가는 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17살에 부모가 되어버린 대수씨와 미라씨, 이제 17살이 된 두 사람의 보물 아름이의 이야기지요. 아름이는 조로증입니다, 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을 혼자서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성질 급한 우주선 티켓을 받아버린 아이이지요.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아름이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요, 같은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자신의 부모님에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우주선 속에서 아름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대수 씨와 미라 씨에게 바치는 헌정사. 갑자기 떠오른 것인데, 책의 초입에 아름이의 엄마가 출산의 장단점, 대수의 장단점을 쓰는 부분이 나옵니다. 가운데에 줄을 쫙 그어놓고 양쪽에 나열해보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리뷰를 써볼까 합니다. 줄은 없고 좌우로 나눌 수는 없지만 장단점부터 나열하고 결론짓는 방식 말입니다. 네, 아이디어가 떨어졌으니까요.

우선 이 책, 상당히 찡합니다. 보십시오, 얼음인간이 아닌 이상에야 제 설명만으로도 뭉클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 본 글들은 때론 위험하지만 대부분 흡족한 성적을 안겨줍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김원일의『마당 깊은 집』과 은희경의 『새의 선물』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유치하지만 진솔한 표현도, 의뭉스럽게 진실을 관통하는 것도 아이들의 시선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런데 하물며 희귀병에 걸린 아이라니요. 병에 걸린 아이들의 가장 안타까운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 조숙한 것이지요. 제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를 보면 어쩐지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이 당연지사인데, 아픈 아이들은 그보다도 더합니다. 많은 고난을 지나온, 그래서 이제 그것 또한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아주 겸허하고 단단한 노인보다도 더 굵직합니다. 쓸쓸하고 아연하고 그래서 사람을 송구스럽게 만듭니다. 이 책의 아름이도 그렇습니다. 집보다 병원이 익숙한 아이,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삶을 진행해온 아이, 누구도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고독하고 의연한 아이. 그런 아름이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짠한데 이 아이가 하는 말들은 더 뭉클합니다. 세상이 태평양처럼 느껴질 때 호랑이가 되어주겠다는 아이,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고 묻는 아이, 엄마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했기에 엄마의 사랑을 믿는다는 아이. 가끔은 정말이지 아이의 시선 같아서 화들짝 놀라게 하는가 하면 어쩔 때는 백겁의 세월을 살아온 것처럼 말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점을 맡고 있는 것이 조숙한 아름이의 시선만은 아닙니다. 작가는 본인의 장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특히 자연스러운 유머 구사와 눈부신 문장들은 발군이군요.

어릴 땐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각각의 이름은 맑고 가벼워 사물에 달싹 붙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배운 것을 처음인 양 물어댔다.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 가리키면, 식구들의 입에서 낯선 소리를 가진 활자가 툭툭 떨어졌다.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듯 내가 물어 무언가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건 뭐야?'라는 말이 좋았다. 그들이 일러주는 사물의 이름보다 좋았다.

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 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 하고 발음하면 '그것……' 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너비. 가끔은 그게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나는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중략)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중하고 산뜻하게 머무르면서도 초라하지 않습니다. 단어들이 서로와 서로를 이어 마치 은하수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이 젊은 작가는 정말이지 탁월하게 해내지 않습니까. 어떤 아포리즘 식으로 진실을 관통하면서도 허세나 허위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얕습니다. 언어를 오래 만져온 사람, 그렇기에 이제 그 말의 무게와 부피와 유연함까지 알고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역시 김애란이다,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문장력에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키죠.

그러면 이제 오른쪽으로 넘어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것은 역시 설득력 부족입니다. 개연성이 약하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멋진 옷을 샀습니다. 그리도 기다렸던 브랜드의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옷입니다. 벅찬 가슴으로 옷을 입어봤는데 과연 옷태가 납니다. 그런데 이런, 박음질이 맺음 되지 않은 부분을 발견했다면 어떻습니까. 반품 사유는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기분은 이미 상하죠, 뭔가 억울한 기분이나 괜히 찜찜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겠죠. 제가 이 책에 느낀 감상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크게 비판할 만한 점이 확연한 건 아닌데 꼼꼼하지가 않습니다. 몇 가지 것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완성해버렸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과장되게 붙이거나 삭제한 것과 같달까요. 특히 이서하의 등장과 그 반전의 의미를 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여운 아이를 조롱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무얼까요(저만 모르는 건가요). 게다가 엄마와 PD아저씨의 수상한 기류, 장씨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등은 역시 석연치 못합니다.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래서? 저는 우매한 독자일까요.

외람되지만 아마도 원인을 짐작해보면 장편소설에 미숙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애란은 노련한 작가이지만 뛰어난 단편소설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여태껏 단편만 써온 그녀는 단편의 호흡을 놀랄 만큼 정확히 꿰뚫고 있죠. 그런 그녀가 장편을 씁니다. 연재는 아니지만 역시 막바지에 가니 호흡이 부족했던 걸까요. 장편의 페이지가 너무 그득하게 느껴진 걸까요. 장편에서만 가능한 소재, 쓸 수 있는 문장 구사를 하게 된 것은 좋았으나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겠지요. 컷과 시퀀스는 좋은데 씬의 흐름이 좀 벅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막극만 쓰던 작가에게 불쑥 16부작을 요구했거나, 미니시리즈 쓰던 작가에게 대하드라마 대본을 쓰게 하면 이런 기분일까요.

그런데 말이죠 이건 뭐 팬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허, 다음에 좀 더 잘하시면 되요 하면서 폭 안아주기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말이죠, 김애란답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깊이였어요. 젊은 작가들은 잘 쓰지 않는 방식, 말투, 생각, 서사, 무엇보다 감정이나 사물의 겉이 아닌 내부를 바라보려는 깊이 있는 시선. 그러니까「노크하지 않는 집」의 서늘함과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의 날카로운 공감, 「칼자국」이 보여준 굵직하고 튼튼한 서사와 「침이 고인다」의 다정하지만 쓸쓸한 정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지나치게 말랑말랑합니다. 독자들을 울리기에, 공략하기에 이 얼마나 탁월한 소재입니까. 착하지만 불행한 가족과 남다른 가족애와 조숙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아이. 독자 깨나 울릴 수 있는 이야기.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기획소설인걸까요. 플롯은 클리셰 그 자체이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법’ 책에서나 볼 법한 요소들이 일진해있더군요. 읽고 나면 분명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에- 짠하고 뭉클하긴 한데 약간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 말하자면 (제가)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눈물 콧물 짜며 읽어놓고도- 쉬이 '좋은 소설'에 꼽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들이 잔인한 건 말이죠,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고 재현한다는 겁니다. 저는요 <병원24시>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웬만하면 보지 않습니다. 무섭거든요,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면서도 그들은 이해한다거나 연민한다고 믿는 제 자신이. 그 고통을 좀 더 슬프고 아프게 표현하려는 이들도 잔인하지만 결국 그것을 보면서 그 고통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나의 불행은 견딜만한 것이라고 자위하는 게 제일 잔혹한 거잖아요?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 타인의 불행을 발판삼아 내 자신에게 행복감을 고양시키는 것, 겨우 그 정도밖에 못할 거면서 마음껏 동정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않으면서) 연민하는 마음으로 됐다고 생각할- 제 자신이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그렇다고 모든 건강한 이들은 아프고 약해진 이들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그런 글들이 필요할 거예요. 세상에 모든 낮고 어두운 곳에 포진한 것들을 수면 위로 부드럽게 올릴 수 있는 것, 작가가 해야 할 어떤 '책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쩌면 그런 것일 테니까요. 문제는 시선이겠죠, 걸음이고 방향입니다. 작가가 '쓰고 싶어서' 썼다 하더라도 혹은 동정이나 이해, 연민, 짐작, 깨달음 등이 목적이지 않다 해도 역시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전시하고 있다는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네? 맞습니다, 인정할게요. 저는 김애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재현하고 전시할 수 있습니다, 연민하고 골몰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라면, 좋은 소설이라면, 아니, 김애란이라면.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재를 선택했다면 좀 더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러나 따뜻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밀어붙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애란이라면, 김애란이기에. 제목과 표지의 불안감을 씻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꽤 좋게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나 갖다가 장난 하냐(엥, 써놓고 보니 싸이의 '새'군요) 하시면서 짜증내시겠군요. 그러게요, 단점이라 생각하는 부분에 한참 열을 내며 페이지를 소비해놓고 다시 좋게 본다니 헷갈릴 만도 해요. 저도 사실 꽤 고심했어요, 우호냐 비판이냐 어느 쪽에 조금이라도 더 높게 들어야 하나. 그런데요, 제가 생각하는 '단점'은 결국 '김애란이니까'의 다른 말이더군요. 약한 맺음새를 지적한 첫 번째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김애란은 이러면 안 된다' 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작가였으면 이렇게 신랄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불편한 점으로 느껴진다, 정도겠죠. 혹 작가의 이름을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저는 이 글을 꽤 높게 평가했을 텐데, 김애란이라는 세 글자가 제 마음을 콕콕 쑤시네요. 등단 10년차이기에, 첫 장편소설이기에, 김애란이기에. 당신은 이러면 안 돼, 하면서 눈을 흘기게 되더라고요. 물론 작품 밖에 위치한 작가에 대한 기대나 작품 전반에 대한 분위기 등도 책을 평가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인작가와 중견작가는, 데뷔작과 십 년 후의 작품은 물론 다르겠죠, 때로는 달라야 마땅하고요. 하지만 역시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 섞인 듯 한 머쓱함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예, 그리고 팬심이라는 사심도 조금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별 수 없었어요. 그래요 이 책,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김애란다움'도 녹아있구요. 읽고 나서 뭉클했던 것, 타인에게 추천할 만큼이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문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랄까, 역시 그 녀석은 달랐어(그 녀석은 앞에 등장한 상큼한 엄친아입니다). 따라 하고 싶은 스톼일, 아니 문장이랄까요. 전요 정말 이런 문장, 한번쯤 구사해보고 싶어요.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저는 이 책을 우호적으로 말하려 합니다.  

다시, 김애란입니다(이렇게 말하니 무슨 종교의 추종자 같지만; 『침이 고인다』띠지 문구를 인용한 거 아시죠?). 등단 10년차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며, 첫 장편소설입니다. 아직 쓰고 싶은 것도, 쓸 수 있는 시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좀 더 지켜볼 수밖에요. 그것도 팔짱 끼고 거만하게 앉아서 관찰하는 게 아니라 관심과 배려로 기다리고 기대할 수밖에 없겠지요.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앗, 빈곤한 아이디어 소굴 속에서 갑자기 이 리뷰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두근두근 김애란. 너무 뻔한가요? 아이디어라고 할 것도 없다고요? 에이 좀 봐주세요, 요즘 아이디어가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두근거린다는 말 빈말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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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4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4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저, 이 소설 다 읽고, 감상문 착실하게 쓰고, 그리고 이 글 읽었어요.
근데 저는 이 이야기가 잘 따라가져서 좋게 읽은 쪽이랍니다. 어찌 보면 말랑말랑하다고도, 독자의 기대에 영합이든 부응이든 하려는 소재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저도 <병원 24시> 이런 거 안 보는 쪽인데, shining님과 마찬가지 이유로, 어설프게 이해하고 연민하고 이런 거 싫어서요. (보면 결국 그럴 거, 그럴 수 밖에 없을 거, 뻔하니까요.) 근데 이 이야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비판받는 반전(?)까지 그냥 편하게 봤어요. 그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이라는 진실을 주목하면서 말이에요. 숨도 못 쉬고 다 읽어 버렸어요. 무척 잘 읽히데요~! ^^

영화평 같은 거 읽으면서도 느끼던 건데, 결국 책읽기든 영화읽기든 그 읽기의 체험은 굉장히 주관적이고 그 찰나에 어떻게 받아들였냐의 의미가 강한 거 같아요. 사후에 설명하는 거죠. 그 찰나의 인상, 의미화에 대해. 근데 이상한 건 다시 읽어도 결국 대부분은 똑같다는 거! 그게 사실 재밌는 점이에요...ㅎㅎ

Shining 2011-08-01 14: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녀의 여타 다른 글처럼 굉장히 술술 읽히죠. 찡하고 재밌고요. 그래서 저는 장단점과 결론을 구분지어서 쓸 수 밖에 없었어요. 장단점이니 하는 것도 결국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의지한 것일 뿐이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은 주관적인 거니까요(끄덕끄덕). 그래서 공감이라는 말을 동감이라는 말보다 보편적으로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비슷할 수는 있어도 같은 것은 아마 불가능할테니까요.

김애란이기에, 김애란이니까, 김애란이라면;;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길 원한 것도 결국 제 욕심인, 주관적인 감상이겠죠^^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아, 오늘은 목 상태가 양호하군요. 다행입니다. 오늘 쓴 리뷰는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하고 싶었거든요. 뭐랄까, 책을 읽은 후 영화를 본 후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정리하듯이 ‘쓰고’ 싶을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혹은 얼굴을 보며 만나 신나게 조근조근 '말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오늘은 강력하게 후자의 방법이 끌리는 것이죠, 아니 이 책이 그런 책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비록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는 아니어도 쇠구슬은 구르지 않도록 노력함을 약속하며, 시작하겠습니다.

어제는 물비린내가 다 가시지 않은 비의 끝자락 기운이 남아있는 날이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실내에 가만히 앉아 토록 톡 두둑 하는 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있는 것만큼 사람을 나른하고 기묘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요. 아아, 커피 한 잔이라도 함께 한다면 조금 더 운치 있는 그림이 완성 될 것도 같군요. 비 오는 날은 참 신기합니다. 소리의 파장은 멀리 가지 않지만 그 작은 파동을 벌충하듯 후각이 대단히 예민해지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물비린내 자욱한’이라고 제목을 붙이곤 합니다. ‘물비린내’라는 말을 종종 쓰고 그 말의 오묘한 어감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 냄새도 아니고 그냥 비린내도 아닌, 물비린내가 당최 무슨 말이냐고요? 글쎄요, 물 냄새인데 묘하게 비리고 그런데 때론 그립거나 아득하거나 불쾌해지는 그런 ‘감각’에 가까운 것인데 그것을 ‘물비린내’ 라는 말 외에 어떤 단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러면 -물론 동의하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물비린내는 의외로 다양하고 많은 곳에서 풍깁니다. 비 오는 날의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흙과 섞인 따끈한 진흙냄새, 물고기 특히 민물고기의 비늘의 냄새, 목욕탕과 페트병에 찌꺼기처럼 남은 냄새, 호수와 강가에서 나는 질척한 냄새 등. 정말 다양하죠. 재밌는 점은 도시에서 가장 쉽게 많은 양의 물을 목격할 수 있는 수영장에서는 그 냄새가 나지 않아요. 염소와 락스 냄새에 묻힌 덕분에 가장 청결한 장소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가장 인공적인 장소이겠지요. 이런, ‘물비린내’에 대해 설명하다보니 예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하지만 그리 쓸데없는 이야기만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는 마세요.

제가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어제가 바로 이 책을 읽기에 최적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햇빛 맑은 날이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든, 황사바람이든 뭐든 부는 날이라도 책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감탄할 문장과 의아한 단점과 흡인력과 묘사는 변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책의 내용과 외부 상황 그리고 마음의 문제가 딱딱 맞아 떨어졌을 때 느끼는 그 쾌감의 배가는 여러분도 잘 아시죠. 그런 면에서 어제는 ‘마침맞은’ 날이 아닐 수 없던 거라지요. 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물기 젖은 날씨와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 캬, 듣기만 해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오오, 나는 왜 하필 맞게 오늘 이 책을 읽어서 하필이면 나를 이렇게 흥분시키는가. 우산을 한쪽 손에 꿰차고 중얼거리며 걸어오자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이가 힐끗 저를 쳐다보더니 조금 떨어져 걷는 게 아니겠습니까. 머리에 꽃만 안 꽂았을 뿐, 역시 비 오는 날에는 독특한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돋보이는군.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저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책이거든요. 그 이유가 단순히 아가미가 달린 소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허허, 그렇게 일차적인 이유이자 감각은 아니에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생의 밑바닥을 더듬거리는 처절하고 강렬한 아귀의 손바닥과 그 손바닥을 만졌을 때 느끼는 까슬까슬함과 호숫가의 밑바닥을 바라보던 때 느끼는 깊이 없는 아득함과 떨림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감각들이 반딱반딱 빛을 내며 말캉하며 축축하고 벼린 물비린내를 피어오르게 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엄청나게 많고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 책은 사실 뭐가 좋다 나쁘다 괜찮다 아쉽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동물이에요, 생물입니다. 피부이며 감촉이며 기관이에요. 우리가 신체 기관을 두고 “나는 장이 좋고 위는 좀 싫어. 폐는 모양이 흉측한데 맹장은 참 예쁘게 생겼더라. 이걸 언젠가 떼어낼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를 이렇게 흥분하게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 리뷰를 쓰는 이유이자 여러분에 대한 최선의 예의일 테니까요.

최근에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독특한 문장을 가진 것은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였습니다. 독특했습니다, 정말 독특해요. 개성이라는 말 외에 표현이 불가할 만큼 독특하고 낯설었답니다. 근래에 읽은 책 뿐 아니라 한국 소설 아니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문장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 『아가미』의 문장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장문(長文)과 복문(複文)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건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일수도 있습니다. 잘 쓰면 리드미컬하고 완성도 높은 문장이 되지만 잘못하면 주술구조가 엉망이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산만한 문장이 되지요. 문장이 길면, 그것도 복문이 계속 이어진다면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모호해지거나 형용사나 보어가 난무하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저도 타인에게 퇴고를 받을 때 많이 지적당한 부분이라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단문(短文)을 구사하든 피나는 노력을 하든. 하지만 말처럼 쉽게 ‘노력만으로’ 쉬이 되는 일이 아닌지라 대부분 단문으로 바꾸는 쪽을 택하지요. 왜 그렇잖습니까.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은 말을 짧게 함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동시에 강렬해 보이려는 전략을 택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등단이 그리 오래지 않은 작가가 문장이 이 정도로 길다는 건 작가의 기본 역량이 상당히 뛰어나거나 굉장히 세밀하게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점만으로도 합격점을 주었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글의 관건은 단순히 장문(長文)과 복문(複文) 사용이 매끄럽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길이가 길고 주술구조가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리듬과 감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저의 부족한 말솜씨로는 설명이 안 되니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데칼코마니처럼 한 쌍을 이룬 두 개의 상처는 각각 기다란 호를 그리고 있었으며 조각칼로 길을 낸 것처럼 오목하게 패어 보였다. 조금 어긋나게 덮은 뚜껑 같은 상처 사이로 한 올의 실만큼 드러난 진홍빛 살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처럼 일정한 리듬을 갖고 천천히 달싹거리다 잦아들었다. 이윽고 뚜껑이 잘 닫힌 모양이 되어 속살도 가지런히 덮이자 그 자리는 그저 붉은 금이 가 있는 정도로 보였다. (중략) 뚝뚝 듣는 물기를 뒤집어쓴 상처가 다시금 꽃잎이 열리듯, 콩껍질이 갈라지듯 살며시 벌어졌다. 석류 열매처럼 드러난 속살이 두근거리는 모습은 명백히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결코 아물어가는 상처가 억지로 쑤셔진 게 아니라, 희박한 산소를 찾아 호흡하려는 태곳적 기관의 발현이자 몸부림이었다.

정말이지 곤도 그런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살랑이는 물풀에 걸려 가동거리는 자디잔 은빛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가 얼마나 가냘픈지, 바위 뒤 그늘진 곳에 누군가가 산란해놓은 구슬 같은 젖빛 알 무더기는 얼마나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굴절된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지, 물고기들의 비늘은 얼마나 영롱한 색깔이며 만지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지, 또 어떤 물고기는 만져보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워며 점착성마저 있어서 손대는 순간 그대로 빨려들어 하나가 될 것만 같은지,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는 물고기들과 자신의 서로의 살 한 번 닿기만 하면 얼마나 오묘한 직감으로 영력 내지는 신앙에 가까운 몸짓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아, 죽이지 않습니까(아이고, 이런 문장을 읽고 이런 속된 표현을 쓰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만 이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비룡의 음식을 평가하는 심사위원단의 입속에서 벌어진 향연이 이런 것일까요. 아삭한 오이의 식감이 제대로 베여있고 밥알은 저들끼리 톡톡톡 튀어 오르며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고 입 안에서 도미가 춤추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써놓고 보니 저는 대체 무슨 요리를 생각하며 비유한 것일까요, 오이로 만 도미초밥정도 될까요). 특히 이녕이 설명하는 마약의 여진(餘塵)과 환각의 표현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작가가 꼭 약을 해 본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라니까요. <레퀴엠>을 보고 대런 아로노프스키를 의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아, 하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이런 식이라면 범죄사건을 다루는 영화나 책의 작가나 감독은 모두 연쇄살인범, 방화범, 강간범이며 법정소설을 쓰는 존 그리샴은 변호사이게요. 아, 존 그리샴은 전직 변호사였던가요, 흠. 어쨌든 이 책의 묘사는 그 정도로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할머니의 자개장을 만졌을 때의 그 껄끄러움과 매끄러움, 펄떡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손댔을 때 펄쩍하던 그 꼬리의 유연함. 그런 것들을 퍼뜩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마치 제 살을 만지는 듯 생경한 촉각이 남아있습니다.

생각합니다. 이 아이에게 남아있는 것이 퇴화기관인 아가미가 아니라 날개였다면 어떨까요. 프랑수와 오종의 영화에 나오는 아기처럼. 그랬다면 그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람 안에 존재하는 우물, 강, 호수 등의 표현은 늘 어둡고 낮고 더러운 곳의 이미지니까요. 죽기 위해 강으로 간다는 사람은 봤어도 죽으려고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곤이 떠도는 곳이 쓰레기가 버려지고 토사물이 흘러들어가고 물건을 잃어버리고 수초가 춤을 추는 지저분하고 질척한 강이 아니라 하늘로 붕 날아갈 수 있었다면 아이의 인생이 달라졌을까요.  날개는 상승의 이미지이고 아가미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퇴화의 흔적인가요. 그의 날개를 우연히 본 사람은 그를 숭배하게 되며 그렇게 본의 아닌 빛의 세계에 살게 될까요.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은 있어도 물고기맨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인걸까요. 생각해봅니다. 곤과 강하(江下), 해류(海流). 큰 물고기와 강의 하류, 물의 흐름. 이 상징적인 이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강하는 강의 하류로 떠내려갈 운명이고 해류는 강의 움직임에 휩쓸려 곤이라는 물고기를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녕은 이녕(泥濘)이라는 한자를 가졌을까요.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미신이라는 이야기를 곤이 했던가요. 작가는 그 미신을 의심하는 것일까요 믿는 것일까요.

물론 이 책에도 의아한 부분은 있습니다. 우선, 책의 페이지가 짧은데에 반해 곤에게 할애되는 부분이 너무 적습니다. 이 아이의 특별함은 조금 더 오래 비추어도 좋습니다. 매일 보는 석양이 지겨울 만도 하는데 우리는 매번 새삼스레 넋을 잃듯. 이 아이를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싶었는데, 구성이 견고하지 못해 아이가 외곽으로 밀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곤의 아가미에 대한 일말의 설명이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년의 아가미가 자라나는 시점과 뭍으로 건져진 후의 이야기 등에 대해 지나치게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가 갸우뚱해봅니다. 하지만 이건 아까 말했다시피 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독자가 ‘난 이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갖는 불평일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기에 이 아이의 특수함을 특이함을 특별함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군요. 때문에 전체적인 구성면이 아쉽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하듯 단점이나 약점이 있다해도, 그것을 덮고도 남는 장점이나 강점이 있다면 문제 없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영어듣기평가나 수질평가가 아니니까요. 장점과 단점은 동그라미, 엑스의 숫자나 테트리스처럼 합산점수가 아닌 무게에 달려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제 기준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종결짓습니다. 저는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다른 언어들을 배척하는 ‘최고’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로써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와 같은 한글을 배웠으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을 만나면 부끄럽고 부럽고 화가 납니다. 아니, 그들도 결국 나와 같은 40개의 자모음으로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문장은 이토록 아름답고 무연한데 내 것은 이렇게나 조야하다니. 그렇게 혼자 투덜이 스머프처럼 중얼대다가 결국 그저 감사하고 아름답다고 탄복하고 맙니다. 제가 어쩌겠습니까,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두고.

참 이상하지요, 저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어쩐지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걸 두고 왜 슬픈 감정이 수반되는지, 아름답다는 감정과 감각은 대체 왜 사람을 서럽게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비애의 감각까지 모두 합쳐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더 아름다워지는 건가 생각합니다. 『아가미』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단단하고 유연한 언어의 골격도 언어 안에 담긴 강렬하고 모순된 감정까지도. 고와서 눈물 나고 아름다워서 슬퍼지는, 그런 감각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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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미시마 유키오를 만난 것은 『금각사』에서였다. (블로그에 어느 포스트에도 썼던 것 같지만) 이 글을 읽고 실로 오랜만에 두려움과 피로함에 눈가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더랬다. 선 밖의 것을 거부하는 듯한 광기, 금속성의 날선 감촉, 질린다 싶을 정도의 탐미주의, 헐떡이는 욕망과 무섭도록 유려한 문장. 그의 집요함과 음험함에 감탄스러웠고, 생경한 문장에 감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 그 뒤로 『비틀거리는 여인』과 『가면의 고백』등을 읽었지만 -정작 『금각사』와 함께 그의 대표작인『우국』은 아직 읽지 못했다- 이 남자를, 이 작가를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는 여전히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책, 『파도소리』만은 다르다. 얇은 문고본으로 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책은 겉모양만큼이나 소박하고 예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용도, 필치도 읽기 쉽고 시원스럽고 소담한 풍경과 무엇보다도 사랑스럽다. 『파도소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책 중 -어쩌면 유일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다.

『파도소리』의 스토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작고 소박한 마을, 그 마을 유지의 아름다운 딸 하쓰에와 우직하고 과묵하고 성실한 소년 신지의 사랑 이야기. 몇몇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결국에 두 사람의 사랑이 축복을 받는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애초에 작가가 ‘다프니스와 클로에’로부터 착상을 했다고 하니,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엔딩을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견 뻔하고 단순한 이 이야기를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전략)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좋아질 거야. 침묵해도 언제나 바른 것이 승리하게 마련이지. 테리 영감은 바보가 아냐. 그 양반이 바른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야스오는 내버려둬라. 바른 것이 강한 것이야.”

“신지의 어머니도 생활이 편치 않다고 들었는데, 뭐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드려도 좋은 일이고, 얘기는 차츰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야. (중략) 남자는 기력이야. 기력만 있으면 그만이야. 이 우타 섬의 남자가 되어서 그게 없으면 못써. 집안과 재력은 둘째 문제야. 그렇지 않은가, 등대장 부인. 신지는 기력을 갖고 있는 남자야,”

 

첫째는 작가가 묘사하는, 우타 섬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에 대한 감탄. 작고 폐쇄적이고 그만큼 정치적인(웃음) 이 마을은, 마치 화폐나 경제개념이 없었을 듯한 아주 옛적, 그러니까 묘하게 도태와 순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바다에 대한 외경심과 경애로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순응하며 이겨나가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기상과 자신의 몸을 믿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되 그것을 최고치로 끌어가기 위한 정직함과 모험심 또한. 해가 뜨면 일찍 일어나 물가로 나가고, 해가 지면 신의 터전(바다)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다. 등대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의 몸 하나로 기상과 이상(異常)을 감지할 수 있고, 자연이 준 것을 먹고 품고 기르며 산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줄 알 것이라는 선장의 단언과 재산이나 집안보다 기력이 먼저라고 호탕하게 말하는 하쓰에의 아버지(이래뵈도 그는 이 섬의 최고 지주다). 나는 선량하면서도 단순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명했다. 특히 그것은 남자주인공인 신지에 이르러 절정을 달한다. 햇빛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새하얗고 고른 치열, 진돗개나 시바견을 떠올리게 하는 까맣고 정직한 눈. 소년다운 부끄러움과 장남다운 의젓함과 풋사랑을 하는 설렘과 바다사람 특유의 우직함과 성실함. 신지에게는 농을 치는 재치와 세련됨이나 유들함 같은 것은 없지만 대신에 자신의 가족을 아낄 줄 알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려는 용기가 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만 그것에 설레하며, 유창한 화술은 없지만 진심을 고하는 선량함과 정직함이 있다. 마치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 진정한 태고(太古)적을 떠오르게 하는 무연함과 선함이 존재하는 맑은 소년이다.

첫 번째가 우타 섬 사람들의 성향과 신지의 매력이었다면, 두 번째는 작가가 묘사하는 풍광의 담대함과 섬세함이다. 귓가를 스치는 듯한 파도소리와 해변가 특유의 물비린내, 소년이 바라보던 햇살의 찬란함과 일출과 일몰이 다르게 느껴지는 해의 농도. 산지가 두려워하던 그러나 끝내 그 안에 몸을 담근 자신을 알게 했던 그 날의 파도의 거친 소음과 태동. 배 위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물가에서 마음에 담던 바다와의 간극 등.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드럽고도 매끄러운 시선이 이 작은 문고본을 등대의 미명처럼 밝혀준다.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과 애정의 무게만큼이나 자연과 그 안쪽을 들여다본 글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신지는 둥근 창문으로 태풍이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쾌청한 푸른 하늘과 아열대의 태양이 내리비치는 붉은 민둥산의 풍광,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신지는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그 하얀 배에 대해 느끼던 미지의 그늘을 떨쳐버릴 수 있어다. 그러나 미지보다 더 마음을 붙잡은 것은 늦여름 저녁에 긴 연기를 뿜으며 멀어져가던 흰 화물선의 형태였다. 신지는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던 그 무거운 구명줄을 손바닥에 되새겨보았다. 일찍이 멀리서 바라보던 그 ‘미지’를 단 한 번 손바닥으로 만져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언제나 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지는 어린애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이미 저녁놀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 동쪽 바다를 향해 다섯 손가락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들여다보았다.

 

물론 문장 역시 여전히 아름답다. 파랗고 시원스러운 풍경에 어울린 미시마 유키오의 유려한 문체는 그 어느 바다의 쾌청함과 인간의 청아함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희망이 도리어 괴로움이 되어버리는 사랑의 불가사의가 그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지는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쳤다. 거대한 괴물은 조금씩 무릎을 꿇고 물러가며 길을 열었다. 단단한 암반이 착암기에 뚤려가듯이. 

신지는 시계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시계가 필요 없다. 대신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시간을 본능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다. 예컨대 별이 이동한다. 그 별의 이동을 정밀하게 측정하지 않아도 밤하늘의 커다란 궁륭이 순환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자연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주 작은 단서라 할지라도 그는 그 단서로부터 자연의 정확한 질서를 읽어낼 수 있었다.

『파도소리』는 담소한 풍경과 선량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식의 <다프니스와 클로에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마르크 샤갈 <다프니스와 클로에>연작 중 / 윌리엄 터너 <바다의 어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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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열린책들 세계문학 2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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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기소하며

- 2월 18일, 기소된 베르테르의 사랑에 대한 취조 기록- 

 

이게 누구요. 사랑과 우정 사이 혹은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타이틀을 만드신 장본인이 아니십니까. 오늘도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을 입고 참석해주셨군요. 지나치게 명시도가 뛰어난 부담스러운 차림이 아닌가 싶지만 그 당시에는 패션 리더였나보오(이런, 그러나 나는 따라하고 싶지 않은 패션이군). 그런데 당신이 어째서 기소된 지 아시오? 이런, 죄목도 말해주지 않고 모셔오다니. 우리가 실수를 범했구려. 네? 아닙니다, 그런 죄목이 아니요. 당신을 따라 죽은 이들에 대한 죄라니,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제들 멋대로 따라서 죽은걸. 사실 당신도 억울할 거 아니오. 당신이 종용한 것도 아니며 서두에 친절하게 베르테르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명시까지 했잖소. 아 그렇다고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지는 마시오. 어디까지나 베르테르 현상에 대한 당신의 곤혹만 수긍했을 뿐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니. 그렇다면 당신의 죄목이 무엇이냐고? 진정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기만이오, 기만. 알베르트와 로테, 그리고 베르테르 당신 자신을 향한 기만.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치인 것 같군요. 하긴 여태껏 당신의 순정을 향한 찬사와 동정의 말만 들어온 당신으로선 그렇겠구려. 이제부터 우리가 당신을 어째서 기소했는지를 말해주겠소. 아아, 물론 당신을 위한 변명(변호?)의 시간도 드릴테니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오늘만 참고인을 비롯해 세 명을 만나느라 기다리게 한 것은 사과합니다만 어쩔 수 없었소. 경로 우대 차원으로 그분들부터 만나야했으니. 아 누구냐고요? 어디 보자, 당신 앞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부부가 있었소. 이 젊은이들은 만난 지 사흘이 채 안 돼 속전속결로 사랑을 완성했다더군요, 그래놓고 이제는 역시 원수의 집안이라느니 우리 집이 더 잘 사네, 너희 집은 품위가 없네 예쁜 건 다 화장발이었다는 둥 성질머리 급한 다혈질 남자라는 둥 허구헌날 싸우기 일쑤죠. 지상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것 같네만, 그들을 보면 충동적 사랑의 대가란 그런 것인가 생각해본다오. 그 뿐인 줄 아시오 햄릿 역시 마찬가지요, 창백한 얼굴의 이 덴마크 왕자님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만 읊고 있지요. 나 참, 이미 죽은 지 몇 백년은 된 양반이 말이오. 그러니 내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오. 아, 애먼 이야기가 길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혹시 몇 년 전 <페이퍼>라는 잡지에 실렸던 황경신 에디터의 글을 읽어보셨소? 당신이 그렇게 가고 난 후, 알베르트와 로테가 얼마나 괴로웠던지 쓰여 있었소. 그들은 온갖 추문에 시달렸고 그 내용은 당신도 짐작할 수 있을테니 말하지 않으리라. 알베르트와 로테는 서로의 이마에 쓰인 주홍글씨를 읽었소. 그들은 서로를 볼 때마다 당신이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오히려 생생히 느꼈소. 그렇소,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의 한 부분처럼 말이오. 서로를 은근히 의심했고 불안해했으며 불편해했소. 당신은 그들이 행복해지길 원했을지 모르나 실상 그들은 끔찍하게 불행해진거요. 서로를 보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떠나서는 살 수도 없었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절망이자 유일한 동조자가 되었으니. 나는 충격을 받았소. 사실 나 역시 당신의 비극적인 사랑에 꽤나 감명했다오. 우리끼리의 얘기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큼 순결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소. 그러니 나는 당신의 찬가를 충분히 이해했소. 그런데 그 <페이퍼>에 쓰인 글을 읽고 나서 생각했소.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연 당신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최고의 불행한 자일까? 죽어버린 이들보다 살아남은 자들이 훨씬 더 끔찍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 아니오. 오랜 시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는데 최근 읽은 심리학책에서 한 문장을 보고 깨달았소.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살한 것이오. 당신은 알베르트와 로테를 불행하게 했고, 자신을 기만했소. 

내가 심리학책에서 읽은 그 글귀가 무엇인지 궁금하시오?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그가 말하길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이 아니라 복수심 때문에 자살을 감행한다고 말했소. 알고 있소. 당신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목적으로 죽은 것은 아닐 거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악질이거나 바보는 아니라는 걸 믿고 싶소. 하지만 이것 보시오. 당신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종결로서 당신의 사랑에 서약서를 찍었소. 헌데 당신의 피의 대가를 보시오. 정말로 당신의 사랑의 행위에 복수심이나 음험한 마음들이 없었다고 지금도 자부할 수 있소? 로테에게는 죄책감을, 알베르트에게는 괴로움을 안긴 것은 당신이오. 당신은 자신의 사랑에 감동했고 그것을 위해 순교를 하는 것처럼 굴었소. 당신은 자기 사랑의 괴로움에 구원받았소. 그렇지않소?

때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네. 내가 이렇듯 외곬으로, 이렇듯 진심으로 간절히 그녀만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도 되는 것인지! 나는 오로지 그녀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또 오로지 그녀 말고는 가진 것도 없는데!

나는 그녀의 까만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네! 그런데 이보게, 알베르트가 스스로 바란 만큼 행복해하는 것 같지 않아서 화가 치민다네. 내가 만일......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나는 원래 말줄임표를 좋아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네. 그리고 말줄임표로도 내 뜻이 충분히 그리고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네. 

보시오. 당신이 9월 3일과 10월 10일에 쓴 글이오. 오로지 두 부부가 '순수하게' 행복하길 원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당신은 선량하게 순정하는 척 굴면서 내심 균열과 파멸을 기다렸소. 거짓말 마시오, 혹 그렇다 해도 이건 당신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오. 상대를 빼앗아 갖고 싶다는 마음 또한 사랑에 포함되는 게 아니겠소. 이보게, 사람들은 무심한 현재를 참아내기보다는 차라리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나간 불운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자네 말이 백번 맞네. 라는 5월 4일의 일기처럼 당신은 당신은 그녀를 원했고 그녀를 원하는 자신을 사랑했소. 알베르트의 무지와 무심함을 비웃고 로테를 우상화시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미화시켰소. 알겠소? 우리의 생각은 이러하오. 당신은 그들을 위한다는, 혹은 자신의 절망감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알베르트와 로테, 그리고 당신까지 세 사람을 불행하게 했소.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 죄악감과 절망에서 그들을 구해줄 생각따윈 당신에게 없었던 거요. 당신은 순정의 이름을 욕보인 지독한 이기주의자일 뿐이오. 게다가 그 총은 그 부부의 것이 아니오. 지문과 총기주인, 게다가 동기라니. 그들은 백프로 용의자로...... 미안하오, 잠시 시대를 착각했소. 실은 와 길 그리썸 반장의 광팬이라 가끔씩 사고가 이렇게 돌아간다오.

아니 뭐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로테가 은근히 어장관리를 했다고 생각하는거요. 허허, 그래, 실은 나 역시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소. 사람은 호의에는 민감하지만 애정에는 둔하다고들 하는데, 당신의 태도를 보고 모를 여인이 어딨겠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애정은 모르는 척 본인이 편할 때만 받아들이지 않소. 그러니까 로테도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야, 하지만 너를 잃고 싶지 않아.”라는 소리를 늘어놓는 벨라같은 여인의 -늘 게슴츠레한 눈빛을 한 <트와일라잇>시리즈의 여주인공인데, 어장관리 기술의 종결자라오- 원조였을지도 모르오. 좀 더 솔직히 말해달라고? 음, 벨라 아니 로테도 알베르트도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오. 물론 불안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총을 빌려준 것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그들 역시 충분히 벌 혹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오, 게다가 그 방아쇠를 당긴 건 결국 당신 자신 아니겠소. 그러니 이렇게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설사 그녀가 어장관리의 원조였다 해도, 알베르트가 속으로는 당신을 심하게 질투하고 못마땅해 했다손 쳐도 그들은 당신이 사랑하고 아낀 사람이었소. 과거의 여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라오.

소중한 벗이여,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을 때, 삶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 행복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혼란이 덜어진다네.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오로지 겨울이 다가온다는 생각만을 하는 사람들 말일세. 

그렇소.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했소. 작은 일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로테의 소박함과 동생들을 챙기는 마리아와 같은 순결함에 당신이 반한 것은 이해하오. 당신은 그 때 너무 멀고 긴 요단강을 건넌 것이오. 물론 잘 알고 있소. 사랑이란 늘 급작스럽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허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스스로를 바쳐 결국 타인을 사랑할 권리조차 스스로에게 주지 않은 당신에게 나는 동의할 수가 없소. 어쩌면 괴테 씨가 아직 어렸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오. 어릴 때는 대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비극적인 사랑, 부조리한 괴로움 등에 매혹을 느끼며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는 하니까. 

아아, 그렇게 낙담하지 마시오. 나 역시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과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당대에 대한 회의와 불안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한다오. 그런데 순수한 불멸의 사랑이라는 피의 서약을 건넨 당신의 사랑방식은 공감하기 어렵소. 그녀를 사랑했다면 당신은 견뎌냈어야 했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리고 시간의 마법을 기다리고 다른 이를 사랑하려 노력했어야 하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격과 사랑받을 권리조차 하나의 총알에 맡겨버렸소. 그래놓고 알베르트와 로테, 독자들과 당신 스스로까지 기만하며 혼자서만 피해자인척 구는 비겁함이 매우 언짢소. 사랑이란 실상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혹 이제는 당신도 동의하오?

아, 당신도 자살을 굳이 원한 건 아니라고. 하긴, 그렇군요. 그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양반에게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시오. 사후 출판에 대한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어렵겠지만 손해배상이나 자살 방조죄는 인정될지도 모르오. 그 양반 인세로 번 돈 모두 내놓아야겠군요, 듣자하니 파우스트 박사에게도 패소했다던데. 쯧쯧. 아무튼 나는 우리가 승소할 것을 확신하오. 그러니 여전히 억울함이 남아있다면 항소 하시오. 나는 그 말밖에 해줄수가 없구려. 조심히 들어가시오, 베르테르 양반. 만나서 영광이었소.

  

 

* <열린책들> 카페와 알라딘에 동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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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1-10-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만 지금 몇 번째인지 ㅋㅋㅋ
너무 재밌어요. 결국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랑한 것이군요. 그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은 없긴 하죠 ㅎㅎ

Shining 2011-10-24 23:06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읽었을 땐 비극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처럼 느껴졌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_- 하게 되더군요ㅋ 전 베르테르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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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끼리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주제가 흘러 흘러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모든 장애가 다 불운한 것이지만, 볼 수 없는 것과 걸을 수 없는 것이 가장 비극적인 일 같아.”라고 어느 친구가 말하자 다들 침묵했다.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 불운을 빗겨간 것에 대한 감사, 암묵적인 동의에 대한 침묵이었다. 어느 누구도 청각이나 목소리 등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에 시각이라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미(美)란 그토록 치명적인 것일까.

스스로의 기준에 비춰 다소 결과론적인 면에 입각해 말하자면, 미인(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미인'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인 표현이다)은 세 부류가 있다. 하나, 스스로가 미인임을 모르는 사람과 둘, 스스로가 미인임을 알고 그것을 내보이려는 사람. 셋, 스스로가 미인임을 알지만 그것을 불편해하는 사람.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미인을 대하고 있다, 고 가장 뚜렷하게 느낄까? 첫 번째는 미인이 되기에는 감수성과 예리함이 부족하다. 때문에 미인으로 태어났어도 결국 그것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 우리가 ‘흔히 보는 예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법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끝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사실 세 번째가 진짜 미인이라 생각한다. 자신과 누군가의 외모를 자각할 수 있을만큼 예민하고 영민하지만, 그것을 무기라고 혹은 그저 그런 예쁨에 가두기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 그들은 외모가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거나, 자신의 외모를 감추거나, 무시하는 체 하며 살아간다(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가장 빼어난 외모인데도 우리는 두 번째의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결벽성에 오히려 감탄하며 그 외모를 흠모하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장황한 미인설이 아니다. 미인이란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타인에게 감흥을 준다는 것이다. 이목구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해야할까. 미인(美人)이란 결국 사회가 만든 아름다움의 틀이고 정형이며 보이는 것의 정점이다. 예쁘게 태어났지만 그 외모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뜯어보면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닌데 뭔가 해사한 느낌이 드는 오묘한 아우라를 내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해낼 수 있고, 자신의 매력과 장점과 당당함을 믿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결국 미인이란, 일차적으로 태어나고 결과적으로 자라난다.   

생뚱맞게도 이렇게 미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책,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파우스트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파괴력, 그 감미롭고 치명적이고 치열한 아름다움의 감옥에 대해 멍하니 생각했다. 두 번째는 이 책이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콜린 퍼스에 벤 반스라고? 난 이 영화 반댈세 라며 혼자서 투덜거렸다. 헨리 경이 되기에 콜린 퍼스는 너무 곧고 착하고 정형화 된 이미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꾸며내지 않은, 그러나 세련된 멋이 행동에 자연스레 배여 있고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한편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 남자를 상상했다. 제레미 아이언스나 게리 올드만이나 랄프 파인즈 같은. 그리고 도리언은 『베네치아의 죽음』이 영화화 됐을 때처럼 중성적이면서도 백치미와 모험성을 갖춘 완전히 새로운 신인을 찾아내길 바랬다. 물론 벤 반스 역시 반듯한 미남이긴 하지만 이미 '캐스피언 왕자'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다 <토탈 이클립스>적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명 영화가 실패할 거라 (본의 아닌)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로 읽었을 때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리언이 과연 미남이었을까? 단순히 추악함, 저열함, 미욱함만이 그를 파멸로 끌어간 것일까?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예컨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에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소녀가 ‘평범하게 예쁜’ 아이가 아니라 눈에 띄는 얼굴을 가졌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목구비의 수려함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성의 확보, 그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 자신감 있되 자만심은 아닌, 스스로를 믿는 강함. 아마도 그런 것이 이 소녀를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도리언은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의 외모를 자만했고, 세월을 두려워했다. 그는 시간에 녹아드는 아름다움의 숙성을 자신하지 못했고, 그것을 거슬러 가려고 했다. 어쩌면 그가 받은 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한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은 상처를 준다."고 말했지만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고 했다. 상반되는 이 두 말이 나는 모두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형벌이란 실상 얼마나 황홀하고 가혹한 것이던가. 언젠가 말씀하셨죠. 슬픈 것 앞에서는 끄덕 없지만 아름다움만은, 오로지 아름다움 앞에서는 눈물이 차오른다고. 라고 도리언 그레이도 토로하지 않는가.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때로 아름다움의 무게보다 가혹하다.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무기로 한 채 과욕과 애착으로 광기를 드러내며 파멸을 내놓으라 명한다. 바로 이 청년에게 닥친 일들처럼 말이다. 이렇게『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특히 헨리 경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킨다) 미(美)를 담보로 한 채 저지른 부정과 추함과 자멸의 끝을 목격하게 한다. 열렬한 탐미파였던 오스카 와일드의 이러한 반추는 일견 스스로에 대한 자위(自慰)나 조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 라고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근본적으로 이 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유미주의자의 비참한 최후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덕성의 결여와 외모에 대한 경외심, 한 청년의 잘못된 선택과 몰락 등으로 종결짓기에 이 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의미들이 좀 더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책을 세 번째 읽으니 이제는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띈다. 경험이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과거와 똑같은 것이 될 거라는 점 뿐이다. 라는 말 또한 과연 그러한가? 오스카 와일드는 실상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 혹은 스스로 빛을 발할 길을 몰랐던 도리언 그레이가 정말로 미남이었을까? 아니, 정말로 미남으로 나이들 수 있었을까? 그의 추한 본성과 인성이 얼굴에 아로새겨지며 미추(美醜)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혹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비록 미남으로 태어났지만 미남으로 늙어갔을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이 텍스트와는 약간 다른 이유로). 나의 '미인설'에 대입하자면, 그는 어떤 이유로든 실패한 미남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의아함과 미련을 지닌 궁금증이 꼬리를 늘어트리며 끌려오는 것이 느껴지지만 나의 의문에 대해 오스카 와일드는 대답이 없다. 다만 무척이나 아름답고 명료하며 동시에 쓸쓸한 서문(김훈의 것 외에 이토록 인상적인 서문 또한 오랜만이다)으로 그가 스스로에 대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행하고 있다고 불현듯 느낄 뿐이었다. 
 

 * <열린책들>카페와 알라딘에 동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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