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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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리면 먼저 잊혀지는 것은 시간 그 다음은 공간과 인적 위치, 사람이라 한다. 가끔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거나 뭔가를 사러가서 그걸 잊고 다른 걸 사오거나 꼭 해야할 뭔가가 기억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농담처럼 치매인가봐, 하고 말하지만 그건 대개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 진심은 아닌 사람들의 가벼운 농일 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오늘과 내일을 혼동하고 오전과 오후가 구별되지 않고 그러다 자신이 서있는 곳을 잊고 부모를 형제를 자식을 잊고 딸과 동생을 헷갈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아버지가 암을 진단 받았다는 얘기를 할 때 친구도 말했다. 생각해보니 말야, 난 여태까지 엄마와 아빠가 언젠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 존재로서의 당위가 아니라 개별성으로서의 죽음. 그러나 엄마는 요새도 말씀하신다. 나는 이 날 이 때까지도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사실이 낯설다고. 내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았는데도. 나 역시 죽음을 고심할 나이인데도.

 

집 근처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있다. 교복을 입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과 나의 나이 차를 무심코 계산해본다. 저 아이들에게는 내가 몇 살로 보일까. 내가 저만할 때는 지금의 내 나이가 퍽 어른같았다. 실은 지금도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년 내후년의 나이는 비교적 인지하기 쉽지만 언젠가 내게도 60대, 70대가 올 거라는 사실은 요원해보인다. 마치 누군가 네가 뱃속에 있던 시절을 떠올려보라 말하기라도 하듯, 뿌연 막막함이 든다.

 

어릴 적엔 편식을 하는 어린이였다. 물론 지금도 못 먹는 음식, 못 먹진 않아도 안 먹는 음식이 있다. 여전히 비위가 약하고 음식에 대한 모험심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 변한 부분도 있다. 예전엔 꼬치전을 먹을 때 맛살로 파를 가려 먹었다면 지금은 파가 있어서 맛살을 먹을 수 있고, 상추를 먹으려면 고기가 있어야 했지만 이젠 상추와 마늘 없이 삼겹살을 못 먹을 것 같다는 것. 야채를 걸르긴 커녕 야채주스를 만들어 먹고 심지어 파프리카와 양파는 좋아한다. 먹지 않던 반찬에 절로 손이 가는 걸 보면 이게 나이를 먹으면서 입맛이 변하는 부분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두려움 때문도 있다.

 

새해가 넘어가는 첫날, 장염 증상이 보여 괴로웠다.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복통과 설사는 없는데 구토와 두통이 심했다. 이틀 동안 자다 깨다만 반복했고 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다치는 것 빼곤 크게 앓거나 입원을 한 적도 없고 감기나 몸살 정도만 경험할 뿐 소화불량에도 잘 걸리지 않는 평균 이상의 건강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고통에 대한 역치가 높은 편인지 참는게 그렇게까지 괴롭다고 여기는 편이 아니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빨리 낫게 해주세요, 농담이라도 아파서 학교 안 가면 좋겠다는 말 안 할게요. 앞으로 편식도 안 할게요. 아플 때는 늘 한가지 생각만 하게 된다. 다투지 않는 남동생을 바라거나 좋은 성적표를 바랄 수도 갖고 싶은 선물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냥 아프지 않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뭐든 하지 못해도 상관 없어진다. 아픔이 퍽 서러워진다. 그 다음엔 외로워진다. 아픔의 근원은 외로움이구나. 그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늘 잊는다. 쉽게 몸을 학대하고 방치한다.

 

아빠의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폴더별로 정리해드리다 우연히 사진을 봤다. 3년 전. 지금의 나와 똑같은데 신기하게도 훨씬 앳되어 보였다. 얼굴이 달라졌다거나 변했다거나 가시적으로 나이가 들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앳된 얼굴이 남의 것 같았다.

 

애니 레보비츠의 사진전에서 수잔 손택의 사진을 본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미는 마음이란 뭘까. 사진이라는 반영구적 영속성과 어긋나는 피사체의 점멸漸滅이라는 모순에 뒷걸음질 쳤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데미 무어의 만삭 사진도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유명한 잡지 사진도 아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름다운 시절도 아닌 무덤을 들어낸, 혹은 들어갈 자리로 보이는 구덩이 사진이였다. 제목은 <무제>. 그 사진의 작고 무방비함은, 방치되듯 전시된 모습은 -다른 사진들이 '삶'이라면- 마치 삶과 대비되는 죽음 같았다. 저 속에 눕는거구나. 정말 그 그림이 무덤가였을까. 그리 보였다. 축축한 흙의 기운과 묘지가 품은 체념, 특유의 무방비함까지 떠올랐다. 저기에 눕는거구나. 죽음의 다른 이름은 무제구나.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 그러나 그들은, 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멈출 수도 없고, 멈추려 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죽음 같았다. 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아래로, 저 아래로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와 필립 로스의『에브리맨』을 다시 읽다. 처음 읽었을 때도 굉장한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인상 깊다 여겼지만 지금 보니 그건 선 밖에서 바라본 감상에 가까웠다.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는 간결함과 들끓는 두려움과 절망과 대비되는 차가운 문장, 민감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훑는 태연한 시선이라는 그릇이 마음에 들었다면 이번에는 그릇 안에 담긴 내용이 보인다 아마 그건 스스로에게 점차 물결처럼 퍼지는 예감 혹은 본능적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나이 들고 있다, 는 인식이 처음으로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새삼.

 

지금보다 어릴 적엔 아파도 약을 잘 챙기지 않았고 건강 때문에 혹은 염려증 때문에 온갖 것들을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이해를 한다 그 두려움은. 나도 요샌 감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미리 약을 먹고 다친 상처를 방치하지 않고 소독을 한다. 낫겠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물을 묻혀서 상처를 키울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웬만하면 조심해서 빨리 낫는게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심한 멍이 들었을 때 붉은 빛이 푸른, 보라빛으로 변하다 노랗고 갈빛으로 바뀌는 걸 보며 순서대로 잘 빠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일주일이 넘자 차차 연해지는 걸 보며 재생능력에 감사했다. 방심하면 몇 잔이고 높아지는 카페인 양을 제한하고 커피를 내리려다 우유나 차로 바꾸는 경우가 있고 멍하니 앉아있을 때 무심코 손톱 끝을 매만지거나 손 여기저기를 꾹꾹 누른다. 특별히 보양식을 먹거나 약은 챙기진 않지만 -누가 먹으라 하지 않아도- 자기 전에 비타민 한 알을 입에 털어넣고 맛 없어도 브로콜리에 손을 댄다. 의식적으로 물을 많이 마시려 한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어 생기는 자연스러운 주름을 찬미했다면 요샌 그래도 하는 데까지 노력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 수술을 하고 싶다는게 아니라, 예전이라면 나이 들면 주름도 생기고 하는거지, 라면 지금은 나이 들어 주름은 생기지만 최대한 예쁘게 천천히 생기면 좋겠다고 속상해한다. 말하자면, 수단은 납득하기 어려워도 동기는, 목적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형이 건강을 잃기를 바라는 원한 가득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지는 못했다. 질투를 한다지만 그 정도까지 가지는 못했다. 형이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자신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의 건강, 그의 젊음을 되찾아줄 수 없었고, 그의 재능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격앙된 상태에서는 하위의 건강 때문에 자신이 건강을 망쳤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교양 있는 사람답게 불평등과 불행의 수수께끼를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지만. 옛날에 정신분석가가 급성 맹장염 증상을 질투의 증상이라고 그럴싸하게 진단했을 때, 그는 여전히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때 찾아오는 느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질투하는 사람에게서 평온, 나아가서 심지어 현실적인 태도까지 빼앗아가는 감정 상태를 발견했다 - 하위가 생물로서 부여 받은 것이 자기 것이기도 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위을 미워했으니까.

갑자기 그는 원시적으로, 본능적으로 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이 그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 말하길 인간은 스무 살이 넘기 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젊을 때는 젊음을 영광스러운 한편 수치스러워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매혹을 강하게 느끼거나 매혹을 느껴야만 한다고 믿음으로써 치기 혹은 만용 따위를 부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이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지 모르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천천히 나이 든다는 것의 실례實例를. 더 이상 100미터를 십 몇 초 안에 들어올 수 없을수도 있고 숨을 쉬지 않고 50미터의 수영장의 코트를 왕복할 수 없을지 모르고 더 많은 노력만이 예전과 같은 몸매를 얻는다는 것을 모른다. 쿵쾅거리는 헤드폰을 끼지 않아도 절로 청각은 손상되고 눈을 벌겋게 하고 특별히 스마트 기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언젠가 앞에 있는 것이 차차 흐려진다는 것을. 그래서 최대한 그것을 늦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에 젊다. 부자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가난에 대한 무지라면 젊음을 규정하는 것은 쇠퇴에 대한 무방비였다.

 

사실 가족 해체는 그의 전공이었다. 그는 세 명의 자식에게서 일관된 유년을 빼앗고 아버지로서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들을 지속적으로 보호해주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 자신은 그렇게 소중했던 아버지, 오로지 자신과 하위만의 것이었던 아버지, 그들 외에 다른 누구도 소유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서 다 받았으면서.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쇠락과 쇠약과 쇠퇴에서 오는 체념과 절망과 회한. 어쩌면 후자가 전자보다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 생각났다. 메멘토 모리와 바니타스를 뜻하는 회화들이 떠올랐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를 기억하며 바니타스를 되새기며 삶을 체념할 수도 있지만 때문에 유한한 삶에 경애를 바치며 열심히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사람의 삶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니러니.

 

처음엔 두렵지 않았고 그 다음은 두려워하지 말자 생각하고 나중엔 두려워도 숨기자 생각하다 마침내 두렵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누구나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연한 척 할 수는 없어도 의연할 수는 없는 것. 인정한다. 나는 나이를 먹는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실은 우리 모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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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1-3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저것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 잘 읽고 갑니다.

Shining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소망 이루시는 한해되세요. 짧은 연휴 즐겁고 의미있게 보내시구요.^^ 아..그리고 아프지 마세요.

Shining 2014-02-04 20:04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멘탈 붕괴 상태라;; 서재도 버려두고 이제야 읽었네요ㅠ 인사가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ㅠ
맥거핀님, 명절 잘 보내셨나요?^^ 좋은 일이 많은, 무엇보다 건강 건강한 한 해 되길 바랄게요 :)

낭만가롱 2016-11-30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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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 작가의 책을 두 권 이상 리뷰로 쓴 적이 거의 없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번 모두 구어체 리뷰군요. 흐음, 어쩌면 이 작가가 쓰는 글에 어떤 마력 같은 게 있는 걸까요. 침착하고 멋들어진 척 문어체로 꾸려가기보단 수다스럽고 솔직하게 구어체로 조잘대게 하는 것 말이죠. 구병모 작가의 『파과』입니다. 

 

주인공은 60대 여성, 일명 조각이라 불리는 킬러이지만 이 책은 (이른바) 장르소설이 아닙니다. 사건의 과정과 추이를 다루는 쪽이 장르소설이고 사건이 지나간 후 폐허를 다루는 것이 순문학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책은 확실히 순문학 쪽에 속한 소설입니다. 추측컨대, 킬러가 주인공인 까닭은 삶의 페이소스와 육체적 노쇠와 정신적 고갈 등을 한층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다만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꼼꼼히 따져보면 아쉬운 점이 있는 소설이긴 합니다. 인물에 밀착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 공사장 장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아드레날린이 날린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기왕지사 어쨌건 킬러가 주인공이니 피가 흩날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는 좀 더 조밀하게 축조된 싸움 장면이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작가가 특기 중 하나인 유려한 장문도 좋고 책의 전체적인 문제와는 다르게 -그 장면만- 빠르게 끊어서 치는 하드 보일드한 단문이어도 멋있을 것 같군요. 쿠엔틴 타란티노 <킬 빌1>의 눈이 내린 정원 장면이나 니콜라스 윈딩 레픈 <드라이브>의 엘리베이터 씬처럼, 지나칠 정도의 탐미주의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구병모 작가는 2008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이제 불과 등단 5년 차죠. 헌데 문장력이 상당히 좋고(장문과 복문을 구사하는데 달인이시죠) 고르는 어휘 또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적확합니다. 이건 작가로서 대단한 장점이며 『아가미』때 특히 이 점에 매우 흥분했었죠. 아름답고 섬세하고 과감한 강렬한 매력이 있는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국내에서 처음 봤으니까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구병모와 같은 작가들을 만날 때 저는 새삼 감탄합니다. 외국어로 이 말을 전한다면 그 어감과 색채가 한국말과 결코 같아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작가의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책의 별점을 네 개는 거뜬히 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작가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의 침강과 융기를 그려내는데 탁월합니다. 캐릭터의 이름과 성격은 도식적인데 반해 캐릭터 사이에 빚어지는 감정은 복잡하거든요. 『아가미』의 강하와 곤도 그랬었죠. 저는 강하가 곤에게 강하게 끌렸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였다는 말이 아니라(아니 꼭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겠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혐오와 환멸 같은 것 말이죠. 어떤 의미로든 강하는 곤을, 자신 스스로의 생각보다 사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각을 향한 투우의 마음도 강 선생과 그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조각의 마음 또한 한 가지로만은 설명할 수 없겠죠. 작가는 투우의 입을 빌려 먼저 이렇게 선수를 칩니다.

 

의지나 선택이라는 말은 왠지 거창한 계획의 일부라도 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어쩌다 보니, 였다. 그가 한 모든 일 가운데 필연적인 것은 많지 않았다. 짊어진 업을 또 다른 업으로 해소하듯이 꼭 이 일을 해야만 내가 살겠다는, 신열을 앓는 새끼무당 같은 절박한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고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을 제거하는 일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아비를 죽인 여자와 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는 보편적인 도덕심이 강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

 

투우가 조각에게 바랐던 것. 그것은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딱 잘라 이것은 그것이다, 라고 동인動因을 밝히거나 마음을 분류하는 것이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또 하나, 저는 조각이 강 선생을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은 섹슈얼 러브일지도 모르고 버리기로 택한 자식을 느끼는 듯한 감춰진 모성일수도 있고 평생을 고독하고 과묵하게 살아온 이가 느낀 이타적 감정에 대한 보답일수도 있죠.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으니까요.

 

 

몇 년 전 버스를 탔는데 어떤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던 누군가의 어떤 모습과 매우 흡사했거든요. 저 혼자만 시간을 거스르거나 그 친구에게 제가 몰랐던 혈육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얼굴, 보다도 체구와 자세, 특유의 청결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시절의' 그 친구와 거의 판박이더군요. 저는 그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 아이에게 한 눈에 반했다거나 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건 향수로 인한 통증 같은 게 아닐까요.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공간, 어떤 방식으로도 재현 불가능한, 심지어 당사자 그 자신도 잃어버린 모습. 타임머신이란 얼마나 절박하고 위험한 희망일까요.

 

저는 투우가 조각에게, 조각이 강 선생에게 애착했던 것은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향수나 회한, 추억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마땅합니다. 통렬하게 탄식하고 애끓듯 그리워해도 그 쪽이 낫죠. 돌아갈 수 없는 회한을 느끼는 사람 앞에 그 회한이 현재형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의 분노, 변질된 회한에 대한 배신감, 그러나 회한에게 인정받고 싶은 뜨거운 절망. 저는 투우가 조각에게 품은 마음이 그것과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조각에게선, 가질 수 없었던 한 시절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혹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어있던 삶의 방식을 실제로 조우했을 때의 애틋함 같은 걸 강 선생에게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방식 나름의 해석이지만 단순한 애호나 애증으로 정의하기엔 두 사람의 호오가 상당히 깊어서 결코 한 가지로 해독 가능한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나 펜로즈의 계단처럼 말이죠.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이중적인데다 자못 뻔뻔한 생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들은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객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평가하더니, 입을 싹 닫고 주관성의 편을 들어 좋은 혹은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하죠. 비판하는 데는 비교적 이론적 근거를 갖추길 선호하는데 반해 호의는 주관적인 요인을 끼워 맞추는 건 또 어떻습니까. 아니, 저만 그런 걸까요. 어쨌든 저는 종종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멋쩍고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전 페이퍼 댓글에서 그런 말을 썼습니다. 걸작은 의외로 쉽게 빠져나간다, 고요. 어떤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벽해서 때론 고결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압도적인 외경심. 그런데 이상하게 지나고 나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아, 그 영화 진짜 후덜덜해. 그 소설 인크레더블하게 멋져. 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 뿐 작품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닌거죠. 때문에 그들은 명예의 전당에 자리할 뿐 마음의 전당에는 착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나고 보면 기억이 나는 것들은 의외로 허술하거나 조악하거나 때론 우스꽝스러운 것들일 경우가 많더군요. 그릇에 실금이 생긴 것과 비슷하겠네요. 얇고 별 것 아닌 실금 사이. 음식이 담겼다 사라지면 실금 사이로 핏물이 들죠. 그리고 그 음식의 색은 빠지지 않아요, 그릇을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말이죠. 완벽하게 조응된 그릇 세트 중에서, 제 눈을 가장 사로잡는 건 바로 그 그릇이라는 점이 이상하고도 당연하죠. 

 

제 그릇 세트 중 실금이 간, 색을 머금은 그릇들은 제법 있지만 아마도 그들을 거기에 두는 것은 서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정서가 강한 책에 무척 약하더군요. 뇌과학, 천문학, 숲과 나무, 고래와 와인, 그림과 소설. 그 어떤 이야기이든 그 속에 강렬한 정서가 있는 책에 마음이 흔들려요. 그 서정은 환희나 절망, 체념과 환멸, 회환과 두려움, 등등 갖가지 것들이지만 어쨌든 그들이 비브라토를 만들어내니까요.

 

 

『파과』에서 느껴지는 강직한 애환, 들끓는 체념, 차가운 비애 같은 것이 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犯人조차 범인凡人으로 느끼게 하는 보편적인 쓸쓸함과 상처 같은 것 말이죠. 육체의 퇴화와 정신의 퇴색, 무뎌지는 감각과 느려지는 반응속도에 대한 본능적 공포,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 이대로 죽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라는 식의 자조. 그러나 그 모든 추를 누르는 삶에 대한 애착. 이 모든 뜨거운 파토스를 설명하는 것이 차갑고 서늘한 칼과 같은 문장이라뇨.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돌아오지 않는 것보단 이편이 더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날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네가 발로 치고 짖어대도 내가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도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구해 오라는 게 아니야. 그떄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너는 살아야 해. 만일 저 문이 열려 있지 않다면 너는 배고픔에 지쳐가다 결국 내 시체를 뜯어 먹기 시작할 거다. 그래도 나는 별로 상관없다. 그걸로 너한테 잠깐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하지만 언젠가는 시취가 밖으로 새어 나갈 테고, 배수관을 타고 벌레들이 기어 내려가 사람들이 뒤늦게 문을 따겠지. 그들이 너를 보면 안락사를 시킬 거란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인의 시체를 먹은 개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판단도 그렇고, 변질된 고기를 먹었으니 사람들에게 세균이나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염려...... 하지만 무엇보다...... 아무도 거기까지는 말 안 할테지만...... 네가 너무 늙어서 누구도 너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작가의 글에는 늘 이상한 서늘함이 있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나 풍자나 더 높이 있는 자가 느끼는 냉소나 환멸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구태여 설명하자면 애초에 그런 판에서 태어난 자란 어른아이로 자란 아이가 가진 본능적인 거부감, 더 멀리 다녀온 자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자가 보여주는 냉랭한 무감함 같은 것.

 

'파과'라는 제목에서 처음 떠오른 것은 파과破果가 아니라 과瓜를 파자破字한 파과破瓜였습니다. 8과 8을 더한 여자 나이 16세, 8과 8을 곱한 남자 나이 64세. 64세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가르키는 말.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곧 조각의 인생 같군요. 열 여섯에 입문한 조각은 예순 넷 즈음이 되어 그 곳에서 내려오죠. 과일이 물러지는 시기, 비로소 손톱이 더해지는 시기. 처음과 끝을 잇는, 스스로 문을 열고 닫는, 좋은 제목이라는 감상을 첨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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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8-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장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자신이 연 문은 자신이 닫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군더더기 없고 적당히 감상적인 마무리. 그리고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라는 문장. 그 문장이 나타난 곳이 투우가 눈을 감고 난 후라는 것, 알약 다음에 쉼표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라는 배열. 의례적인 단문을 대할 때도 작가가 문장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좋구요. 무엇보다, 슬프네요.

dreamout 2013-08-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병모에게 처음으로 관심이 생기네요.

Shining 2013-08-28 00:06   좋아요 0 | URL
전 이 작가가 쓰는 문장이나 어감, 복잡한 냉소가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어요(웃음).

2013-09-0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점에서 이 책 샀어요~. 다 읽고 이거 읽으려구요. 별 5개 주셨으니 실망은 없을 것 같습니다~.^^

Shining 2013-09-09 10:44   좋아요 0 | URL
히히. 저의 의견일 뿐인걸요 :^ <방주로 오세요> 읽고 꽤 실망했는데 이 작품은 <아가미>만큼 좋아요. 날씨가 좋아요 섬님. 어디론가 툭 산책을 가야할, 가을 날이군요 :)

아이리시스 2013-09-1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신간평가단에서 받은 책 읽고 Shining님 리뷰도 읽었을 때 이게 왜 좋지, 저는 그 작위성이 주는 날카로움에 베일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작가 별로야, 했는데 이 책도 작가도 Shining님이 좋아하니까 다시 관심? 읽을까? 말까? 뭐가 있나? 이런 생각이 전에 맥거핀님 리뷰 먼저 읽을 때는 안 들었었어요. ^^

Shining 2013-09-11 23:4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우린 은근히 좋아하는게 달라요, 그쵸? :) 저는 그래서 더 좋지만요. 전 이 작가가 구사하는, 혹은 앞으로도 하려고 노력하는 문장이 좋더라구요. 냉소나 자조 같은 정서도 끌리고. 다만 <방주로 오세요>가 워낙 별로였어서, 아직 베스트 작가군에는 좀.. 맥거핀님의 글은 차분하고 이지적인데 저는 무작정 막 좋아좋아좋아요, 하기 때문... 아닐까요?ㅎㅎ
 
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L, 너는 며칠 전 내게 가장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냐고 물었지. 너는 소설을 책을 곁에 두고 사는 편이 아니었고 때문에 일종의 추천을 받기 위해 물어본 것이 아님을 안다. 그 질문은 '요즘 너는 어떠냐'는 말의 다른 표현이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지금의 나를 대변할 것이라 너도 나도 확신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너는 물었고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가끔 숨기거나 바꾸거나 모른 체 했다. L, 너는 내가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부러 찾아 보지 않는 친구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그것에 대해 했던 거의 모든 말을 기억했다. 예를 들어볼까. 너는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읽지 않았어도 로맹 가리가 누구인지 그게 어떤 소설인지 왜 그 소설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너는 모두 기억했다. 나는 가끔 그런 너의 면들이 당혹스럽고 무섭기도 했다. 너와 나는 만난지 15년이 되어가지 않은가. 그런데 너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과 딱 한 번 밖에 말한 적 없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느냐. 때문에 지금 너는 존 하트의 신작을 읽었다는 내 대답에 함의를 짐작하려 하겠지. 너는 기억도 하고 이유도 알겠지. 『라스트 차일드』와 『몬스터콜스』가 유독 마음이 쿡 박혔던 까닭.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아이들, 싸우고 뒹굴고 진흙 속에 나동그라진 채 진실이라는 벽 앞에 무릎 꿇린 아이들, 깊은 눈동자에 깃든 절망과 고독, 분노와 허무 같은 것들이 얼마나 시리고 서럽게 다가왔는지 너는 이번에도 기억할 것이다.

 

사실 내가 선뜻 대답 하기 어려웠던 건『아이언하우스』의 줄거리가 사실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를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일급 킬러, 범죄 조직, 조직의 탈퇴, 아름다운 여인과 도주라니.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내용의 헐리웃 영화만 해도 열 개는 찾아낼 수 있겠지. 더군다나 냉혹한 풍경에서 난데없이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시점이나 유달리 "자기야"를 남발하는 초반부 대사 때문에 맥이 풀렸다. 설렁설렁 읽어야겠군, 귓바퀴를 긁적거리며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공 마이클과 노인(오토 케이틀란)의 시선이 맞닿는 부분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좋은 것 아닌가. 이런 부분들 말야. 

 

하지만 노인은 굳이 그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과 결과, 선택과 대가.

 

노인 역시 그의 스승이었고, 그의 죽음을 통해 마이클은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에도 노인은 단 한 번도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천박함에 슬퍼했다. 잃어버린 여인들을 그리워했고, 딸이 없었던 걸 애석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껴안고 살았던 세계가 너무 좁았던 것에 한탄했다.

 

노인과 마이클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없었고 헛된 욕망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힘이란 음식과 거처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도수에 지나지 않았다. 혹독한 어린 시절이 남긴 교훈이었다. 

 

아아, 너의 표정이 떠오르는구나. 항상 너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구나. 대견하고 안쓰러운 표정. 안타깝다, 는 마음을 누군가 네 얼굴에 휙 끼얹어 놓은 듯한 표정. 누가 보더라도 씁쓸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정.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드는건가.

 

 L,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이클을 생각해면 이상하게 헐리웃 배우 마크 윌버그가 떠오른다. 고독하고 피곤하고 의지력이 강한 남자라면 응, 맞아, 맷 데이먼을 떠올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마크 윌버그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지? 마이클에 대한 키나 외모에 대한 어떤 묘사와도 관계없이 한 번에 떠올랐는데 막상 떠오른 이상 다른 인물은 생각이 나지 않더라(아비게일이란 인물은 줄리안 무어나 제시카 차스테인이 떠오르더군, 이것도 묘사와는 관계없이 말이야). L, 나는 늘 정서가 안정된 사람이 좋았다. 감성적인 사람이 좋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인내심과 집요함을 가진 아주 단단한 사람이 좋았지. 감성적인 사람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이 때론 지나치게 연약하고 섬세한 면으로 나타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C가 그랬지. C가 왜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나는 그 낙차를 한없이 바라보다 지치고 말았었지. C의 섬세한 문장이 좋았지만 그 문장을 나오게 한 마음들이 이따금 피곤해졌다. 그래, 나는 자신의 기분만으로 타인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의연한 사람을 좋아했지. 그렇게 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이 마이클이라는 남자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일류 스릴러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이고 그래서 꽤 도식적이지만 그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지. 강하고 생존본능이 강하고 스스로를 폄훼하지도 숭상하지도 않고 약자에게 약하고 어떤 원칙이라도 일단 수립한 후엔 무조건 지킨다, 침묵의 의미를 안다, 는 것 등등.  

 

(전략) 그리고 그 오랜 세월 내내 마이클은 노인에게 왜 그 힘든 길을 선택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인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사내라면 그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만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마이클은 노인의 팔을 똑바로 펴고 가슴에 구겨져 있던 담요를 가지런히 폈다. 그리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노인의 뺨에 키스하고, 다른 쪽 뺨에 또 키스했다. 마침내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침대 옆 테이블에서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집을 집어 들고, 오랫동안 서서 노인을 내려다봤다. “정말 제게 잘해주셨어요.” 마이클은 그 책을 가지고 나왔다.

 

거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분에선 약간 뭉클하기도 했다. 그리곤 다시 냉정한 어조로 돌아와 존 하트는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라고 -내가 뭐라고- 생각했지. 우선, 매력적인 주인공을 설정할 줄 알고 그 다음, 매력적인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해야 독자들이 그 캐릭터에 편에 설지 알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울리는 법을 알지. 웃음보다 눈물이 기쁨보다 고통이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니까. 나를 웃게 한 작가는 작품만이 작가의 이름만 기억나지만 나를 울린 작품은 작가, 제목, 그리고 문장까지 기억하니까. 사실 문장력도 꽤 좋았는데 덕분에 발췌 못하는 내가 쪽수를 일일이 적어뒀지. 잠깐, 그래 이 부분.

 

그것은 둘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거짓말이었다. 새벽의 손가락은 아직 하늘을 할퀴어 빨갛게 물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 내일은 오지 않았다.

 

줄리앙이 말한 게 분명했다. 말과 눈이란 잉크로 그 그림을 색칠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열어 보이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줬을 것이다. 줄리앙은 자신의 감정을 남과 나누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줄리앙의 힘은 타인의 선의, 어렸을 때 망가진 적이 없는 강하고 현면한 타인들의 선의를 믿는 데서 비롯됐다.

 

아직까지는 어떤 게 거짓말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플린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그 작은 거짓말들이 뭔가 더 큰 거짓말의 열쇠가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사람들은 -편의상 분류하길- 장르문학이라면 문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대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골조를 축조하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탁월한데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조율할 줄 알아야 하고 문장력 또한 기막히지. 스티븐 킹도 존 스칼지도 마이클 코넬리와 스콧 스미스, 로렌스 블록(얼마 전에 읽었던 그 끝내주는 제목, 응, 『아버지들의 죄』의 작가)도 그렇잖아. 존 하트의 문장력도 발군이더라.

 

하지만 작가의 문장에 비해 이 책의 만듦새는 아쉽다. 메인카피는 물론 앞, 뒷표지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거든. 반전을 언급하라는게 아니라 '사랑이야기'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불편했지(넓은 의미에선 사랑이겠지만). 존 하트가 다루는 이야기는 단지 한 여자와의 사랑만이 아니라 동생, 가정, 가족에 대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체된 가정, 지키지 못한, 지킬 수 없었던 가정과 또 하나의 가정을 위한 간절한 바람 같은 것. 때문에 이야기는 A로 시작해서 B,C,D로 흘러가는데 이 와중에도 A알파, 베타, 감마 이런 식으로 곁가지가 많이 생기는구나. 덕분에 산만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반전보다는- 그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고이지 않고 콸콸콸이든 졸졸졸이든 계속 어디론가 흘러가거든. 당연히 독자인 나는 그 위에 뗏목을 띄우고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으니. 나는 호수에서 강으로 바다로 점점 흘러든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독자가 다음 장을 넘길지를 아주 잘 아는, 서사 장악력이 좋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단 두 권만으로 이 작가가 '좋다'라고 생각했던 건 작가 스스로의 저변에 깔린 가치관 때문인 것 같다. 별 것 아닌 듯 써내려간 짧고 강력한 문장, 예를 들면

   

어떤 행동을 하건 결과가 따르고, 어떤 선택을 하건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노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점에 있어선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나쁜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수 있는지 처음 맛본 사람의 절망감.

 

세상은 잔인한 곳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실제 현실이 그런 것처럼 다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죽고, 부모들은 부모로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잔인한 행위라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우린 의심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어." 제섭이 말했다. "우릴 무너뜨리는 건 바로 진실이야."

 

와 같은 부분들. 『라스트 차일드』가 서사 그 자체, 아이의 태도만으로 사람을 망치로 탕탕 두드리는 것 같았다면 『라스트차일드』는 이렇게 무심하게 펼쳐진 적확한 표현들이 마치 스크류나사처럼 군데군데 사람을 구멍내는 것 같았다. L, 얼마 전 지친 얼굴로 너는 더 이상 공감이니 동감이라는 말을 믿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면서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 이해한다고 착각할 뻔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에게서 표정이 옮았다. 안쓰럽다, 는 물감이 내게도 수채화처럼 번졌다. 우리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짐작할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경험에 일반론이 있지 않은 것처럼, 삶에도 일정한 톤은 없었다, 고 말했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나도 모르게 생각해봤다. 우연처럼 불행하고 필연적으로 고독한 어린시절을 보냈을까. 어떻게 이렇게 절망과 좌절, 회의와 자책에 대해 짧고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강의 글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삶의 끝까지 내지른 사람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 피로, 애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가까스로 가지 하나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 그 사람이 다시 삶이라는 대지로 올라오려고 노력하는 듯한 처절함과 처연함 같은 것 말야. 존 하트의 문장 면면에는 서사에는 묘한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의 절대적으로 그러나 타의로 불행을 너무 일찍 배운 사람들의 강박, 강함과 약함이 와이퍼가 되어 이야기라는 유리를 닦아내고 있는 것처럼.

 

그래, 냉정히 말해 그에게도 분명 약점이 있다. 나로선 두 번째로 읽는 글이라지만 그는 매번 유사한 주제 -아버지의 부재, (다의적 의미에서) 남겨진 아이들- 를 쓰고 있다는 면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편이한 소재로 이야기를 갈무리 지으려는 모습 같은 것들이 걱정스럽긴 하다. 하지만 나로선 그가 자신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몹시 불행하고 부조리한 것을 가르쳐주는 어른이 존 하트라면 나는 그 뒤에 선 참관자일 수밖에. 진실이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반발할 수 있겠냔 말인다. 어떤 숭고함이나 존엄함이 아닌 그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이 있던, 그런 사람에게 달라붙은 껍질같은 체념에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L, 공정하게 바라보자면 역시 그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에겐 이야기를 축조하는 재주가 있고, 인물을 어떻게 창조해야하는지를 알며, 스릴과 서스펜스의 이완과 수축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의 본질을 정확히 아는 작가를 어떻게 좋은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단 말인가,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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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5-0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괴팍하고 난폭하게 이야기가 튀는 경향이 있어서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번이 두 번째, 존 하트가 세상을 보는 나아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냉혹함과 연민이 함께 있어 별 수 없이 마음이 동한다. 리뷰는 실제 L과 나눈 이야기의 일부. 요새 리뷰 쓸 때 친구들 덕 좀 본다.

아이리시스 2013-05-0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이 부럽네요, Shining님 그런 얘기도 매일 듣고! 사실 같이 읽고 말할 수 있으면 가장 좋긴 하겠지만 저는 안읽고도 읽은걸 다 얘기해주는 그런 관심사(독서취향) 다른 친구가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같은걸 읽자,읽어라,읽었으면좋겠다, 이러는 편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진짜좋은건 혼자만 알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주고 싶고, 이런 이기심 작가들에게 괜찮을까요?ㅎㅎ

존 하트도, 마이클 코넬리도 못 읽어봤지만 리뷰읽으니 좋네요, 좋아요!

Shining 2013-05-04 23:56   좋아요 0 | URL
하하. 아이님께도 얘기해드린 적 있잖아요? 좀 되긴 했지만 그 책이요 그 책. 원하신다면 다른 책도 해드릴 수 있슴돠_-b

네, 사실 그게 좋죠. 각자의 취향과 기호가 있고 겹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나누는 것. 그게 같은 것을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을 때도 많아요. 그런데 한편으론 거의 한번도 같은 것에 대해 얘기 해본적이 없어서, 그러니까 독서 토론회 같은 걸 나가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볼땐 있어요. L은 제가 한 얘기를 습자지처럼 빨아들여서 기억해요. 어떨땐 좀 무서울 정도로ㅎㅎ 그 엄청난 기억력 덕에 L은 책,영화 엄청 많이 읽고 보는 사람인 줄 안다네요 주변 사람들이(웃음).

전 언제나 그래요. 제일 좋은 건 나만 갖고 싶죠. 하하하. 근데 좋은 것 중 어떤 건 혼자 알고 싶고, 좋은 것 중 어떤 건 나누고 싶고. 약간 다른 것 같아요 :) 오늘 날씨 정말 좋아요, 주말 잘 보내고 있어요?

맥거핀 2013-05-0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하루키 소설 <어둠의 저편>에 보면 네가 한 일을 잊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너를 찾아낼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조직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어요. (소설의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점,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점, 뭐 그런 거는 조직, 범죄 그런 것을 다룬 책이나 영화에서 저를 가장 무섭게 만든 점이었습니다. 마피아는 잊지 않는다, 뭐 그런 것 말이죠.

하기는 뭐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기원에 있는 권선징악 같은 것도 결국은 행동에는 결과(대가)가 따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또 한편으로는 그 대가를 어떻게 치뤄낼 것인가, 주인공이 그 대가를 끝까지 잘 치러내도록 돕는 것도 소설가의 몫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구요.

Shining 2013-05-07 11: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 근데 그건 어떤 세계든, 자의든 타의든 한 세계에 속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그 세계(?)는 필연적인 폭력과 집요한 추적이 따른다는 것이 다를 뿐_-;

그렇군요. 코엔 형제의 영화도 떠오르고 미하엘 하네케도 생각이 나네요. 지금 읽고 있는 폴 오스터도. 행동엔 결과가 있고 선택엔 대가가 있다는 것, 을 말로도 행동으로도 잘 표현하는 것이 좋은 작가 혹은 감독의 몫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존 하트는 괜찮은 소설가에 속할지도요(웃음).

다크아이즈 2013-05-0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샤이닝님의 L을 질투합니다. ^^*
L처럼의 역할을 할 수도 없지만 어쩐지 그분이 마구 부럽습니다. 샤이닝에 L이라... 환상의 조합인데요.
전요, 님의 이 말에 확 꽂혔어요.

<감성적인 사람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이 때론 지나치게 연약하고 섬세한 면으로 나타나 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C의 섬세한 문장이 좋았지만 그 문장을 나오게 한 마음들이 이따금 피곤해졌다. 그래, 나는 자신의 기분만으로 타인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이런 경험이 있거든요. 섬세한 감각 때문에 타인을 피곤에 빠뜨리는 부류를 제가 못견뎌했던 아픔 같은 기억들. 자책하지만 결코 되돌아간다해도 견뎌낼 수 없었던 한 시절... 그렇다고 의연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건 고백하겠어요. 아무래도 저처럼 좀 덜떨어진 부류들에 애정이 좀 있는 듯...

오늘도 샤이닝님 신선한 자극 안고 물러납니다.^^*

Shining 2013-05-09 12:59   좋아요 0 | URL
칭찬쟁이 팜님! ^^ 팜님이 인용해주신 덕에 탈자(타인, 인데 타, 가 지워졌더라구요. 쿡쿡)를 찾아냈어요, 감사합니다(꾸벅).

개인적으론 외적 자아가 단단한 사람이 좋아요.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먼저인 사람, 밋밋하게 보이지만 가까워지면 내적 자아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겉이 더 단단한 사람이요. C의 섬세하고 예민하고 날선 부분을 좋아했는데,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고 강점이자 단점이 된다는 걸 알아내기도 했고요. 그런데 팜님, 덜 떨어지셨다니(웃음). 팜님처럼 날카로운 지성과 감성을 지니신 분께서_-*

저는 오늘도 팜님의 칭찬을 꼴깍 마시며 오후를 시작합니다 :)
 
브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리뷰는 전적으로 M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비 내리는 토요일 한적한 동네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예전에 M의 회사에서 있었던 사건(정말 사건이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작년이었나, M이 다니는 회사가 도둑을 맞았는데 보안 카메라에 확인한 바로는 얼마전에 퇴사한 직원이었단다. 책상과 서랍이 온통 엉망이었고 모 팀장님은 책까지 난도질 되어있어서 다들 겁을 먹었는데 다같이 보안카메라를 확인하면서 알았단다. 그 사람, 이란 걸. 그 사람, 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차렸다는 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암묵적 동의의 공기가 흘렀다고. 어떻게 알았냐고 서로 묻거든 어떤 대답을 할지도 알았다고. 걸음걸이 때문이다. 어쨌거나 같이 일했던 사이니까(길진 않았다고 들었다) 체격이나 분위기로 감지했을수도 있지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고. 발을 끈다거나 한쪽에 균형이 치우친, 뭐 그런 특이하거나 특별한 걸음걸이도 아니고 별 특징 없는 평범한 걸음걸이였는데도. 눈치를 챘단다. 

 

(자, 우리는 이 에피소드로 많은 이야기, 예컨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같은 이야기들을 더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뒷모습'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그래, 뒷모습이나 걸음걸이, 손동작이나 점의 위치 같은 게 더 큰 호소력을 가지지. 응, 지나고보면 전체적인 얼굴이나 몸보다는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것들이 기억나잖아. 라더니 M은 나, 그런 적이 있어, 라며 화제를 틀었다. 예전에 날씨가 엄청 좋은 날 C와 함께 길을 걷다가 C가 사진 찍게 거기 서봐, 라면서 카메라를 들이대더라구. 누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약간 긴장해서 걸었나봐. C가 막 웃으면서 너 왜 Y처럼 걷냐고 물었어. 그래서 나, 그러네, Y처럼 걸었구나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어떻게 걷는데? 저도 모르게 물었다(눈치 챘겠지만 Y는 나다). 나쁜 말은 아냐. 뭐라고 해야 하나. 선이 그어진 길을 걷는 것처럼 너, 일자로 걷거든. 난 약간 걸음이 팔자라서 걸음걸이에 은근 신경을 쓰거든. 너, 일자로 성큼성큼 걸으면서 이렇게 약간 팔을 흔들면서....그거 좋은 말 맞냐? 좋은 느낌인데 말로 하니까 이상하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그 때  며칠 전부터 머릿속 한 구석에 제쳐둔 리뷰에 대해 쓸 말이 생각이 났다(고맙네, 친구여). 그 책에 이런 글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김새가 다가 아니라네. 아우라라고 할지, 개성, 본질이 있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확신이 들더군. 패트릭이다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어. 외모 말고도 닮은 점이 많아도 말이지.”   

 

서론이 길었다. 조세핀 테이의 『브랫 패러의 비밀』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소설이다. 애시비 가문에 새로운 상속자가 탄생하기 불과 얼마 전 8년 전 죽은 -정확히는 자살로 추정한 실종- 상속자(사이먼)의 쌍둥이 형인 패트릭이 나타난다. 그는 이미 8년 전에 사라진데다 그 때는 소년이었고 이제는 막 성인이 되려던 찰나다. 사진도 없고 부모는 패트릭과 사이먼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니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가족 몇 명과 가까운 이웃들. 

 

보통의 '진짜와 가짜' 소설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그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인 척 하는 가짜인가, 가짜가 되버리는 진짜인가 등등. 조세핀 테이의 『브랫 패러의 비밀』은 뻔한 반전에 집착하지 않는다. 브랫이 패트릭이 아니라는 건 비밀조차 아니다. 보통의 작가라면 "그는 정말 패트릭인가 아닌가. 그가 패트릭이 아니라면 그가 나타난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일까. 어떻게 그는 이렇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가." 라는 구성을 꾀하겠지만 조세핀 테이는 "브랫은 패트릭이 아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무엇으로 그를 시험하고 무엇으로 의심할 것인가. 패트릭이 된 브랫의 삶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해 쓴다. 즉 무게 중심은 그가 가짜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 쪽이 아닌 무엇이 그를 진짜로 만드는지, 그는 어떻게 진짜가 되는지, 더 나아가 우리는 왜 그가 진짜이길 바라는지에 쏠려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은 집의 구조나 유년 시절의 추억으로 은근하게 브랫을 시험하는데 이 허들을 통과해가는 브랫의 몸짓에 독자는 온통 긴장을 하게 된다(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와 스릴이 꽤 재밌다).

 

브랫 패러가 패트릭이 아니란걸 알지만 글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브랫의 편에 서서 응원하게 된다. 그건 아마 브랫 패러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외모나 이미지도 그러하지만 특히 덤덤하지만 신랄한 말투, 신중하면서도 세심한 성격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그는 애초 일확천금을 노리고 혹은 나쁜 마음으로 애시비 가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물론 누군가를 사칭한다는 것은 분명 범죄행위임이 분명하나). 말에 대한 애정과 사이먼의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그러나 악한 면모들로 인해 브랫의 호감도는 상승한다. 그 중 소설을 가를만한 핵심 문장도 아닌데 묘하게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브랫도 사이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연민은 느끼지 않았다. 연민은 브랫이 자주 탐닉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자기 연민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도 쉽게 남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브랫은 연민을 자주 느끼지 않았다, 도 아니고 브랫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품어본 적이 거의 없다, 도 아니고 연민은 브랫이 자주 탐닉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라니. 즉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를 혹은 누군가를 함부로 가여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 헛된 동정이나 자기연민은 위선이나 이기심보다 훨씬 나쁜 감정이라 여기는 바, 나로선 브랫의 강인함과 배려심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 문장은 브랫의 성격도 나타내지만 작가의 문장력도 드러낸다. 좀 더 예전엔, 복잡하게 어렵게 말하는 방식이나 아포리즘식 글쓰기에 끌린 적이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믿을 때 발상해나는 맹종의 황홀경 같은 식. 지금은 점점 더 단순한 구조와 명확한 뜻을 가진 문장에 끌린다. 누구든 알 만한 단어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그러나 누구도 쉽게 쓰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를 들면 이런 식. 은근한 유머까지. 마음에 쏙 드는 문장들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런 붙임성 있고 솔직한 태도에 속아 넘어갔겠지만, 비어트리스 애시비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 두 개를 동시에 던져 정작 중요한 세 개째를 감추는 조카의 평소 버릇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식사 예절 때문에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앨릭 로딩이 그 때문에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대단히 엄격한 일급 유모를 제외하면 일급 고아원만큼 예의 바르게 음식을 먹도록 교육시키는 데가 없다. “맙소사. 언제 술 사고 잔돈이 생길 일이 있으면 자네가 자란 그 여인숙으로 보내야겠어. 자네가 웬 고상한 척하는 교외에서 자라지 않은 걸 감사하는 뜻에서. 고상한 척하는 버릇이란 게, 이게 영 없어지지 않거든. 다른 건 몰라도 팻 애시비가 잔을 들 때 새끼손가락을 드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야.”

   

이제 서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긴 서론이 살아남은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리플리』류의 콘텐츠를 접할 때마다(물론 리플리는 시대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능할 수 있었겠지만 그와 같은 인물을 모두 '리플리류'라고 명명할 때) 약간 의아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안다'고 느낄때는 A와 B 중 어떤 것을 고를 지 맞출 수 있는 것처럼 취향과 기호와 성격이 담긴, 매우 소소하고 미묘한 것인데. 어떤 만화에선가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지. 아마도 미래의 어딘가. 몸을 바꿔 짝사랑하던 사람 앞에 나타났지만 상대방은 처음부터 그를 알아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길 때 탁자를 두드리는 버릇, 더 정확히는 그 오묘한 리듬의 기시감 덕택에. 이렇게 누군가로 분한다는 것은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연기하는 것이다. 얼굴이나 몸이 아니라 성격에 접근하는 것, 스스로가 타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면이 아니라 숨기고자 하는 모습을 짐작하는 것, 다리를 떨거나 늘 시계를 오른쪽에 차거나 젓가락질을 독특하게 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것을 모방하는 것.

 

진짜와 가짜를 다루는 대부분의 소설들은 '진짜 혹은 가짜'에만 집착해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과한다. 다른 누군가를 완벽하게 복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누구나 저마다의 본질과 개성을 갖고 있고 그 본질과 개성은 시간과 기억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인데. 때문에 소설 속 가짜(라고 불리는 이)가 다른 인물들을 천연덕스럽게 속여 넘기는 이야기들은 영 시시하다. 너무 깜빡 속아넘어가는 거, 쉽게 믿는 거, 캐릭터와 독자를 모두 합쳐 바보 취급하다니. 『브랫 패러의 비밀』속 가장 생생한 목소리는 작가의 것이다. 맙소사. 또 속아? 애초에 누군가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해. 나라면 처음부터 패를 내놓겠어. 진짜와 가짜 여부는 맥거핀이 되겠지. 진짜냐 가짜냐 화살표를 가르키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당신이 내 소설을 내 캐릭터를 사랑하게 만들어주지. 공상이 취미인 탓에 이런 식의 작가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사라진 시체, 밀실 살인, 철벽의 알리바이, 12명의 공범 등이 없어도 조세핀 테이의 소설은 충분히 특별하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뛰어난 캐릭터 조형, 든든한 문장력. 오직 그녀만이 쓸 수 있는 그녀만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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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7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8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4-17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 이 리뷰가 좋은 건 당연한 거고.
저는 님 리뷰에서 이런 결론을 얻습니다.
글 잘 쓰려면 제대로 된 책과 잘 쓰는 리뷰를 읽어라.
빛나는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과,
그걸 갈무리해내는 님의 잘 쓴 리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작가들은 어떻게 제 안에서 자유자제로 발현시키는 걸까요?
님도 마찬가지. 흐흐~~

Shining 2013-04-18 11:17   좋아요 0 | URL
팜님, 저 지금 막막 어지러운데요ㅇ_ㅇ 팜님이 비행기를 과하게 태워주신 것 같아요ㅎㅎ
저야 조세핀 테이의 글에 숟가락, 젓가락, 물잔까지 몽땅 올린 것 뿐인걸요 :^

2013-04-18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4-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g님, 바빠요? (암요, 바쁜게 좋죠!)
조세핀 테이,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이 심심해서 이 작가 별로 재미없네, 했었는데,
<진리는 시간의 딸>보니까 역사와 뒤섞인 게 괜찮다고 생각했고,
<브랫 패러의 비밀> 좋다고들 하니까,
이것도 기억해뒀다가 읽어야겠어요.

되게 드라마네요, 저 첫문단 사연 말이에요.
웬만한 빌딩 사무실에는 cctv가 있잖아요, 그런데 으흥, 간도 크다..
걸음걸이만 보면 누구나 안다니!

질문1. 혈액형이 뭐예요?
질문2. 하이스미스, <리플리> 읽어봤어요?
질문3. 생각 안납니다..

Shining 2013-04-27 16:20   좋아요 0 | URL
프랜차이즈 저택사건은 사실 기발한 발상에 비해 완벽히 재밌거나 잘 쓴 책이란 생각은 안했는데 이 책은 재밌고 좋고 흥미로웠어요! 하하, 사심 가득이긴 하지만요ㅎㅎ

좀 무섭죠 많이. 세상살이란게 정말 예측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물며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는 그 익숙한 착각이란..

1. 저요? A형이요(그래서 소심한가보다!라는 말 안 하시기!!ㅋㅋ)
2. 네, 좀 전에. 근데 기억하는 건 사실 소설보다 두 편의 영화죠.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 리플리를 먼저 봤지만요.
3. 뭡니꽈? 어서 3번 질문을 주세요ㅋㅋㅋ
 
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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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아직 네가 '아이'라 불렸을 때, 너는 질문지를 앞에 두고 망설인다. 질문의 끝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혹은 누구냐는 물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너는 그 안에 무얼 써넣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남들이 무엇을 쓸지는 알았다. 따라 쓰려 해보았으나 거기 멈춰선 채 너는 한참을 망설이고 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가족을 쓸 것이었다. 그들이 가족을 정말로 제일 소중히 여기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쨌든 그들이 그렇게 썼다는 것이 중요했다. 너는 물론 가족을 사랑한다. 가족도 너를 사랑하며 그들은 네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은 다르지 않던가. 소중히 해야하는 것과 소중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가족사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너는 가족 사진을 지갑에 넣은 적이 없다. 어차피 꺼내보지 않을 것을 아는데 부러 갖고 다닐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했던가. 아니면 마음에 드는 적당한 사진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니, 너는 한 번도 지갑에 어떤 사진도 넣은 적이 없다. 열일곱 소녀처럼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넣지도 않았고 스무살 계집애처럼 애인의 사진을 넣지도 않았다. 네 지갑은 어딘가 황량했고 휴대폰 사진 폴더 또한 다르지 않았다. 너는 사진을 믿지 않았다.

 

아니면 사진을 불편해했다. 너는 사진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다. 또는 사진은 너를 증명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라고. 너는 사진을 싫어했다. 열 두살 아이처럼 네가 네 생각에서만큼 예쁘지 않다는 것에 실망해서도 아니고 열 다섯 아이처럼 얼굴에 뭔가 묻지 않았을까 표정이 이상하지는 않을까 과민해서도 아니고 열아홉 졸업사진처럼 억지웃음을 짓고 어울지지 않은 어설픈 화장을 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너는 사진을 믿지 않았다. 연예인들의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너는 믿었다. 너는 네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너를 바라보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너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네가 아는 숫자보다 항상 많다는 것에 늘 놀랐다. 너는 '남이 보고 있는 나'를 꾸미는 사진이 불편했고 사진과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그런 네게 사진이 없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족사진 마저도.

 

아니 네게도 가족사진이 있었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때 한 번씩 찍은 사진. 그 속에 찍힌 다른 가족들의 얼굴은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라 너는 멈칫한다. 그렇다면 그들도 여기에 박힌 내 얼굴이 익숙한 것인가. 너는 정말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너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자 웃으세요, 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얼굴일 것이다. 경직된 밝은 표정, 건조한 웃는 얼굴. 너는 갖고 다니거나 액자를 만드는 대신 편지가 담긴 상자 속에 던져뒀다. 아마 지금도 거기 어디 있을 것이라 너는 생각했다.

 

   

붉은 낙엽이 떨어진 마당위에 솟은 저택.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빛의 제국>을 떠올린다. 명백한 부조리를 드러내는 그 그림과 이 표지는 결코 닮지 않았지만 유사한 감정을 일으켰다. 지층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 비슷한 불온함이라는 느낌. 너는 때때로 자신이 픽션 속에서 사는 것으로 혼동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살인이 이토록 가볍고 쉽게 하나 건너 하나에 그것도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묵인하기가 힘겨웠다. 너는 더 이상 웬만한 소식에 놀라거나 얼굴을 찌뿌리지 않았고 가끔은 네 자신의 무덤덤에 가벼운 혐오감을 느낀다. 이건 실종사건, 그것도 소설에서의 사건이다. 그러나 너는 이따금 가볍게 입술을 깨물거나 혀를 찬다.  

 

나는 다른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가능성을 부정할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부모들이 자식의 결백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하지만 갑자기 레오가 몸을 돌려, "키이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넨 깨어 있었는가?" 라고 내게 물었을 때,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는 부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심의 냉혹한 물결들 되돌리기 위해서는 무슨 말, 무슨 짓이라도 할 용의가 있는 부모 말이다.

 

지나친 확신은 언제나 지나친 부정에 대한 반증. 그것이 부모라면, 부모가 자식을 결백하게 여긴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결코 의심해선 안 되기에 감히 확신한다고 너는 생각한다. 한 소녀가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소녀와 함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아들. 그 아들은 자신에게 크거나 작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에릭 무어)는 -어떤 의미에서든- 아들을 불신하지만 아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위하며 확신하는 척 믿는다. 불신은 작고 가녀린 불꽃의 씨앗. 허나 씨앗이 작고 여리다 하여 그 생명력이 약하다거나 가지가 적거나 줄기가 튼튼하지 않은 법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생각보다 자신의 아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혹은 이제야 깨닫는 척 한다. 누군가를 잘 모른다는 것.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렇게 중대한 상황에서? 그것도 내 아들을? 그는 절망한다. 그러나 본디 가족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자신은 이미 실패한 첫 번째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던가.

 

 

결국 고발은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의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파괴할 수 없다. 아니, 의심만으로도 파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까지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전혀 몰랐다. 아주 미세한 의심의 냄새가 어둠을 몰아오고 점점 더 위협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겠다는 욕구 하나에 당신을 고정시키고, 얼마나 끈질기게 당신을 앞으로 몰아붙이는지 말이다.

 

그는 아들을 의심한다. 그러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킨다. 유일한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아내조차 어쩐지 이상하다. 하지만 아내마저 잃은 채 그는 이 싸움을 끝낼 자신이 없어 다시 침묵한다. 형을 바라본다. 과거로 회귀한다. 총명하고 사랑스러웠던 고작 일곱 해 밖에 살지 못했던 여동생, 고압적이고 허세 넘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조용히 시들어가던 어머니, 늘 모자르고 한심했던 형, 가장 많이 배웠고 가장 냉정하던 그러나 지금 제 가족을 믿지 못하는 자신. 사라진 소녀는 이제 계기에 불과하다. 그런 일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대로 내 삶을 잘 유지했을 거야, 라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언제고 변질될 수 있는 삶이기도 하다는 말이라고. 너는 다소간 냉정하게 판단한다.

 

당시에 나는 그 희망은 정당화될 수 없는 환상이고, 그리 오래 버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인생의 절반은 부정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서조차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체 하기로 결정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이라 불리는 것으로 걸어간다. 껍질을 천천히 벗겨내 하나하나 들어갈 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는다. 소녀의 실종은 아들의 인생을 바꿨고 가족의 향방을 바꿨고 에릭을 에릭의 두 개의 가족 모두를 끝끝내 절단냈다.

 

 

그게 사실일 수 있을까? 나는 의아했다. 내가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사실일 수 있을까? 혹은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워렌에 대해선 어떤가? 함께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형 역시 본질적으로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난 당신이 어떻게 어느 누구라도 속속들이 안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예컨대 너와 네 남동생. 너는 그와 퍽 사이가 좋지만 친하진 않았다. 너는 시간관념이 투철했고 예민하다못해 냉철했지만 동생은 즉홍적이었고 두루뭉술하다 못해 때론 흐리멍텅했다. 너는 동생의 교우관계에 관여하지 않았고 동생은 너의 취미에 관심이 없었다. 너는 동생의 안목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동생은 너의 취향에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너는 동생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했고 피를 나눴고 한 부모 아래 자랐지만 강과 호수 정도로 달랐던 셈이다.

 

너는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너는 늘 가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얼마간 그것을 알았다. 너는 그들이 너를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너도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없었다. 아버지의 약점과 어머니의 단점, 형제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인지하는 것이 그렇게나 잘못일까. 약점이라면 모른 척 할 수 있고 결코 손대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단점이라면 무조건 덮어둬야 하고 볼 수 없어야 하는가. 사랑과 믿음의 강도가 늘 같지 않음을,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비열해지거나 비겁해질 수 있음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야 하는가. 당신은 나를 몰라, 그러나 나도 당신들을 모르지. 가족이라고 가족이기에 어떻게 다르겠어. 너는 가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너는 가끔 믿기지 않게 순진했다. 

 

 

마치 우연한 이중노출에 의해 한 사진의 색깔이 다른 사진으로 번지는 것처럼, 한 가족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다른 가족을 물들이는지를 묘사하고 싶다. 너는 그 과정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만, 지금은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비에 흠뻑 젖은 우산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했으면 그 일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 너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혹은 적어도 생명이 계속 이어져 균형을 찾고, 추락한 자만이 아는 지고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 일을 바꿀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네 머릿속의 바퀴들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너는 그 바퀴들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그 바퀴들이 견인력을 가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사전 경고도 없이 바퀴들이 견인력을 갖게 되고, 너는 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계속 진행하는 것뿐임을, 정확히 네가 중단했던 곳에서 시작하는 것뿐임을 이해한다.

 

이 소설이 갖는 강점이 유려한 문장에 있었다면 최대점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것이다. 에릭은 아버지로서 아들을 의심하고 아내를 의심했다. 아들로서 형을 의심하고 어머니를 의심했으며 아버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은 사라진 소녀의 실종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고 그저 외롭고 방황하는 어린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아내의 외도, 형의 부정(不正), 아버지의 계획과 어머니의 절망에 대해서는 단서만 언급된다. 어쩌면 모두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 몇몇 것은 사실이고 몇몇은 아닐지도, 어떤 것은 밝혀지고 어떤 것은 숨겨졌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이란 없다고 너는 생각한다. 관건은 의심과 믿음의 팽팽한 줄 어딘가에 위치한다. 에릭이 의심한 것이 타인이었다면 그는 어떤 결과에서든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줄은 헐겁거나 느슨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에릭은 완벽한 가족을 꿈꿨고 믿음에 대한 완전함을 꿈꿨다. 그가 의심한 것이 가족이었기에 그는 무너진다. 붉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공허한 저택 속에서.

 

이제 너는 생각한다. 에릭은 불행의 신의 시험에 든 가엾은 운 없는 자일 뿐이라고. 가족은 의심할 수도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 거라고. 누군가를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것이 가족이라도, 때로는 가족이기에.

 

가족 사진은 종종 거짓말을 한다. 너는, 가족을 모른다.

 

 

 

 

 

 

덧) 제목이며 방식이 정이현 씨의 소설과 겹쳐지는 것은 우연. 쓰면서 떠올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소설은 읽지 않은데다 이 소설에 또 다른 전개에도 '너는'의 방식이 등장해, 거기에 비춰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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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2-2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혹시 결말을 읽을지 몰라 뒷부분은 흘리듯 읽고 생각했는데요. 제 지갑에는 얼마 전에 엄마와 아빠 사진을 넣어뒀어요. 뭐랄까, 그들이 꼭 지갑에 있어야하는 건 아니지만 엄마랑 아빠가 소리소문없이 날 떠날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넣긴 넣었어요. 애인사진은 지갑 같은 거에 한 번도 넣은 적 없는데. 그건 누굴 보여주려고 넣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지갑안에는 돈과 카드만 있으면 되죠. 돈이 있어야 되고, 카드한도가 높아야 하고, 통장에 입금된 돈이 많아야 하죠. 푸핫. 저 돈 한 개도 없어요ㅠㅠ

<붉은 낙엽>은 의미심장하면서 애처로운 분위기예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쏟아지니까 당시 책을 고를 때 선택받아야 비로소 읽힌다는 단점을 갖는 장르의 것이지만. 사진하니까 말인데요, 문득 날아가버린 시절들이요, 그러니까 사진 없이 날아간 시절들을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장 오 년 전만 해도 (지금과 비교하면) 저렇게 예뻤는데 저 예쁜 날들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오 년 후에 알았다고 해도 오 년 전으로 돌아가서 오 년 전의 저를 보고올 수 없다는 것이 평소에 관심두지 않던 사진의 의미를 되새겨 주었어요. 사진을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는데 특별히 과장해 만들어둘 필요도 없다고 여겨서 돈드는 웨딩사진 같은 거 대신 멀리 아주 멀리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이 돈들여 그것을 마련해두는 이유도 어쩌면 있지 않을까 하고 그젯밤에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생각했지? (갑자기 반말..)

Shining 2013-03-01 13: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고로 지갑엔 돈과 카드와 신분증만 있으면 돼요ㅎㅎ 뭐랄까, 특이한 소재도 특별한 방식도 아닌데 잔해처럼 가라앉는 앙금이 있는 소설 같아요. 특별히 나쁘지도 않고 각별히 못된 짓을 한 적도 없는데 어느 순간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는 것, 그런데 그것이 작은 계기로 촉발된 의심이라는 것, 만약 나였어도 아들을 의심했을 거라는 것. 그래서 가엾게 느껴져요, 주인공이.

전, 결혼사진 같은 건 자고로 먹고 살기 편해야 두고두고 꺼내보는거야. 라고 생각하는...ㅋㅋ 사실 사진이, 추억이 그렇잖아요. 그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 갖는 향수라고 생각하거든요. 전 제 존재를 증명하는 건 제 자신이면 충분합니다.....(뭐래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