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조지핀 테이 지음, 권도희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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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 테이의 대표작을 이제야 읽었다. 사실 이전에 시도한 적이 있으나 영국 왕조에 대한 지식 부족(튜더왕조부터는 한결 수월한데... 요크인지 랭커스터인지 빨간 장미, 하얀 장미 다 저리가... 영국왕조 따위 알게 뭐냐......)과 가계도를 읽는 게 상당히 헷갈려서 초반부에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한 번 포기한 책은 이상하게 끝을 못 낸다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를 벗어나고자 다시 시도한 이번엔 -놀랍게도- 무리없이 끝까지 잘 읽었다.

 

주인공 그랜트 경위는 현재 부상으로 입원 중이다. 무료해하는 그에게 친분이 있는 여배우 마르타가 찾아와 사진을 몇 장 건네주는데 그 중에서 한 남자의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시작이다. 그랜트는 스스로가 나쁘지 않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형사의) 직업적인 것이든 타고난 것이든 범인犯人과 범인凡人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사진 속 남자는 그랜트가 들어온 이야기 속의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랜트는 주변인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냐 묻는다. 그랜트의 담당의사는 소아마비 환자로 보인다는 소견을 내놓았고 꼬마라는 간호사는 간이 좋지 않은 인상이라 했으며 수간호사는 그게 어떤 종류이든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하직원 경사에게 만약 이 사람이 법정에 선다면 어느 쪽에 설 것 같냐고 묻자 그는 판사석이라 말한다. 사실 그랜트 역시 맨 처음엔 그를 악명 높은 검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 속 남자는 조카들을 성에 가두고 죽였다고 알려진,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는 리처드 3세였다.

 

거동이 불편한 그랜트에게 리처드 3세는 현재 가장 큰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모든 사람들이 리처드 3세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나 그 중 과연 몇이나 사실일까. 다소 터무니없는 소문은 누구에 의해 어떤 식으로 조명되었나. 그랜트의 주변인들은 그의 부탁대로 교과서, 가장 유명한 역사책, 리처드 3세의 어머니에 대한 소설 등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나마 있는 자료들은 한 인물에서 대해서 면밀히 파악하기엔 너무나 적고 좁은 정보였고 결정적으로 토마스 모어가 쓴 글을 읽으며 리처드 3세는 간과하고 있던 신빙성의 문제에 대해 직면한다. 리처드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토마스 모어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가 죽은 해에도 겨우 8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모어가 쓴 글은 어쩌면 당시에 떠도는 소문을 엮어놓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으며 보다 결정적으로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 시대, 그러니까 튜더 왕조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객관성을 기대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심지어 홀린셰드의 <연대기>도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모어의 글을 바탕으로 썼다면. 그렇다면 과연 리처드 3세라는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란 어디에 있는가? 경찰로서 그랜트는 소문을 싫어했고 소문이 증거로 채택되는 상황을 제일 싫어했다. 그랜트는 화가 났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도 마르타가 해답을 주었다. 처음 리처드 3세의 사진을 건넸던 그녀는 이번에는 ‘진짜’ 사료를 찾기 위한 동조자 혹은 문자 그대로 발이 되어줄 사람을 찾았다. 브렌트 캐러딘. 브렌트는 자료를 찾고 그 자료를 토대로 그랜트와 브렌트는 의견을 나누어 리처드 3세에 대한 역사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내린 결론은....

 

 

라는 내용이다. 아주 독특하다. 500년이 넘은, 역사 속 실제 사건의 진실을 찾는 추리소설이라니. 그것도 (감히) 역사교과서와 토마스 모어에 대항하여. 게다가 그랜트는 내내 움직이지 못하니 말 그대로 ‘안락의자 탐정’에 딱 맞는 경우다. 왜 이제야 이 소설을 읽었을까 싶은 탄식과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를 느낄만큼 -앞부분만 잘 참으면, 계보에 질려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주 아주 재밌는 소설이다. 첫 느낌은 참신함과 도발적인 제안이었지만 읽는 내내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기록의 중요성이었다. 무려 500년 전 사건의 궤적을 더듬어 가려니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생애의 파편과 편린을 천천히 주울 수 있다는 자체가, 기록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라는 기록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때론 폭력적인가를 상기한다. 승자의 입장에서 쓰는 게 역사라지만 한 인간을 평가하는 과정에 있어서 역사, 그것도 승자가 쓴 역사만을 읽는 건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역사가들 역시 사람이기에 각자의 주관과 호오를 개입할 수도 있으며 각자의 역사관과 당대의 시대상,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 혹은 변명을 대변하는 역할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이른바- '위인'이라 믿었던 사람의 추함과 악함에 안 후에 느끼는 충격. 좀 더 뒤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왜 그렇게 적혀있는지를 알고 느낀 배신감. 자잘한 일화들이 거짓이거나 과장, 미화일수 있으며 누군가의 행위에서 선악이 아닌 득실을 발견할 때의 씁쓸함. 그럼 감정들을 떠올리며 이 책이 지적하는 바에 수긍하게 된다.

 

하나 더. 리처드 3세가 어쩌면 형보다 더 좋은 왕이었다는, 좋은 군주일 수도 있었다는 어떤 근거나 자료들을 전해 들으며 과연 지도자에게 필수불가결의 덕목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적으로 훌륭하되 사적으로 배제되는 점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마땅할까. 이 질문에 관한 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은 공과 사의 분리겠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진 않은 법이다. 게다가 사적인 부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공적인 능력에도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이런 질문에는 명확히 답하기가 곤란하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하지만 글쎄, 진리는 누구의 품에도 있지 않는 듯 하다. 역사 속 인물 뿐 아니라 우리 주변만 둘러봐도.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한다거나 한 인간을 오롯이 파악할 수 있다는 기만을, 믿기가 어렵다. 그 때마다『리어왕』의 구절 - 1막 4장.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Who is it that can tell who I am? - 중얼거리는 것으로 씁쓸한, 신중한 중도를 택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리처드 3세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더러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500년이 넘도록 오해받는 죽은 사람.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괴담에 등장하는 악당. 심지어 최근에 제대로 발굴되어 이장하기까지는 이름도 없는 땅에 묻혀 있었던 안타까운 왕. 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토마스 모어는 물론 당대의 사람들, 그리고 저자와 우리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 리처드 3세는 어떤 사람인가? 정말 그는 자신의 두 조카를 죽였을까? 어쩌면 작가조차 흐리게 하는 답변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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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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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전작을 다 읽었다. 새 책이 나오길 기다렸고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읽었지만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못했고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가끔씩 혼자 하는 오만으로 ‘나만 알고 싶은’, ‘숨겨두고 싶은’ 작가라고 하기엔 이미 그녀가 꽤 유명한 것 같고(그래서 기쁘고 그만큼 괜히 서운도 하다) 누군가에게 소개해주기 어려운 소재인 것 같아서도 있지만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키게 될까봐, 하는 생각이 컸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지러움과 끝난 후에 느꼈던 피로감 같은 것을 설명하게 되면, 왜 소설을 읽으면서 울렁울렁 어지러웠는지, 어떤 부분이 어떻게 나를 건드렸는지를 말하게 되면 그건 꼭... 나를 드러내는 일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일테면 그런 식이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이 했던 말처럼. 책값을 책정해서 내면 된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그러면 너무 내가 드러나잖아요.”라고 했던 혜원처럼. 그 순간의 난감함과 걱정처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어째서 이렇게 절망적인지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겁, 이 났던 것 같다.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만은 합니다.

 

생각해보면 삶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보기에 불편한 것을 못 본 척 해온 것으로. 광화문 광장 앞을 지날 때, 나는 늘 우릿한 죄책감을 느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중요한 이슈가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내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착하게 살아왔건만 왜 죄책감마저 내가 느껴야 하는 거냐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던 것도 같고.

 

결국 그 고객님은 탈회를 끝내 못하고 전화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아요. 탕비실에서 호흡을 좀 진정하고 세수를 하는데 왠지 아이러니하더라고요. 악을 쓰고 옥을 하며 우리를 짓밟은 이들은 목적을 신속하게 달성했는데 정작 괜찮냐, 고 한마디라도 물어보고 돌아봐준 이는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분들을 더 잘 모시고 챙겨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된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텐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친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한다. 나는 늘 죄송한 사람 밖에 없어. 그게 내 일이야. 생글생글 웃는 낯이 예쁜 친구는 여전히 웃음을 잘 짓지만 그건, 그냥 그녀가 자다가도 할 수 있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 번씩 그녀는 만취한 상태로 전화를 건다. 울다가 웃고 그러다 조금 울먹이면서. 세상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렇게 묻는다. 내 의견 따윈 섞이지 않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원하던 게 어떤 쪽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모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어떤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였어, 아냐, 그런 말은 그냥 하는 말이야, 네가 어디가 어때서, 어디서 술 마시고 있어, 집에는 들어갈 수 있겠어, 내년에 빚이 좀 줄면 확 때려치고 여행이라도 가, 우리 다음 달에 가까운 데라도 놀러갈까. 어떤 때는 그 중에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때로는 모든 말이 나오거나 가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나도 다른 곳에 가 똑같이 하고 싶어진다고, 그 쪽 사람들이 뭘 꺼려하는지는 손바닥 보듯 훤하니 난 누구보다 체계적으로 진상을 떨 수 있다고 흐흐,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그녀에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않는,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택시를 탈 때도 항상 예의가 바른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왜 세상엔 이렇게 못된 사람이 많을까. 착하다는 말이 바보같다는 말처럼 사용되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멍청하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당신은 들리지 않아요? 아니면 들리지 않는 척할 뿐입니까?

 

몇 가지, 입버릇처럼 잠꼬대처럼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이 불확실하고 폭력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여러 형태의 죽음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한 말을 떠올리면, 다만 나는 지금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가 아는 것과 믿으려 했던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그 의미는 비록 다르지만 고칠 수 없기에 견뎌야 하는 삶을 단어를 애니 프루의 단편속에서 발췌했다. “부끄럼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라며 새삼스럽게 중얼거리지 않으며 대신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돈이 없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던 것 같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을 상기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는 최승자 시인의 뜨거운 절망을 되뇌인다.  

 

나만 잘 되길 바란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 되길 조금은 바랐다. 남들이 잘 안 되길 기대한 적도 맹세코 없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게 내가 아님을 안도하는 이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다 나은 환경을 가진듯한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주 조금 위안이 됐다며, 그것마저 나쁜 것일까.

 

지역과 이름을 모두 익명으로 처리하고 이 일의 개요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을 때 네티즌의 반응이 한결같았다는 점은, 아주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나 사람들 인식이 실로 이 정도 수준인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그 글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캡처본을 갖고 있으니 증명할 수 있는데, 내가 글 속에서 그녀를 문제 삼는 태도는 가능한 한 자중하고 그저 ‘이웃 아이를 돕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를 요지로 하여 아이 가진 엄마들의 관심과 응원을 촉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스크롤이 조금만 길어지면 앞뒤 잘라먹고 훑어 먹기 일쑤인 자잘한 오독에다 얼굴 모르는 상대를 향한 흥미 본위의 악의가 중첩되어서는, 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고 치면 그 중 여든 개가 나더러 오지랖을 넘어선 편집증이 의심되니 정신과에 가보라는 내용이었고, 열 개는 바카라 전략이나 노예 두 명 상시 대기 운운하는 스팸 광고였으며, 당신의 의도만큼은 존중한다는 중도 입장에 하나 마나 한 소리나 나머지 열 개였다, 그러니까 80명의 얼굴 모르는 이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게 보이는 것과 거의 같은 반응을 나타냈다. 당신 자식이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을 애써 파고드는 저의는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아이가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이런 사람들이 길러내는 아이가, 훗날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아이로 자라난다는 걸 그들은, 당신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콧망울을 괜히 잡아쥐며 눈을 끔뻑거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 청승 좀 그만 떨라는 말, 너만 사는게 힘든 줄 아냐며 나는 더 죽겠다며 내뱉는 말, 네 일도 아닌데 현실로 돌아오라는 말, 말, 말, 말. 그게 도끼인지 칼인지 아니면 청산가리인지도 모르고 내뿜는 말들. 그런 말들이 떠도는 공간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늘, ...늘 돌아섰다.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 아닐까요? 속으로 웅얼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너무 튀고 싶지 않다는 근거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하는 비겁합으로, 누군가 나설 거라는 조악한 변명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은게 뭐지, 죄책감을 느끼고 안 느끼고의 차이일 뿐 아닌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키티 제노비스가 죽어갈 때, 나는 창문을 열고 소리 치거나 망설임없이 수화기를 들어 신고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했겠지, 어쩌면 그냥 가벼운 싸움일지도 몰라, 저 사람이 나중에 나를 해코지 하면 어쩌지, 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내가 그것을 ‘해내야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불편함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기어코 모른 척 했던 비겁함과 비열함에 대한 수치와 절망에 대한 해부. 나는 단지 좀 더 잘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할 수 있는만큼은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건지 내가 세상을 거부하는건지 아님 원래 삶이란 세상과의 반목으로 살아가는건지, 한낮의 땡볕 속을 걷는듯한 아찔함. 비겁한 날들에 대한 구질구질한 변명과 그 변명이 가려주지 못하는 민낯의 수치. 저 사면초가의 상황을, 저렇게 온몸이 벌개질 정도의 수치를 느낄만한 상황과, 저렇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의 시절에 대한 이해. 그러니까, 내가 이 모든 거지같은 상황을 ‘공감하거나’ 혹은 ‘이해할 것 같은’ 서글픔. 삶의 밑바닥을 더듬거려본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조.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씩 나란 사람을, 나의 역사를, 감추려 했던 마음 속 깊은 초조와 푸른 절망을 누군가에게 까발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목마저 따가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보통 이 같은 상황에서라면 방사능과 부식성 물질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에 공감하고 정부의 명령을 받은 군경이 출동하여 겉으론 멀쩡해보이나 어떤 종류의 희귀 질환자 내지는 돌연변이가 되었을지 알 수 없는 피난민들의 진입을 막았을 테고, 실제로 3년 전에 그들이 했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 G는 국가의 중심이었고 G가 곧 국가였으며 국가가 G였다. 정부에서는 G시민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돌볼 필요가 있었고 G에서 일차로 피신한 정부 조직과 주요 인사들은 그들을 지지해줄 기반이 필요했다.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O의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아는,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사건 중 무엇을 대입해도 성립이 가능한 문장들 앞에 서서 아아, 이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닫는다. 혼자만의 일도 아니고 개인적인 무언가도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벽을 타고 오르는 하이였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도 동정심이 많다는 이유로 순진하다고 혹은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는 양선이며 빼꼼 무언가가 내다보는 듯한 틈새로 기어코 발을 들여놓는 미온이며 제도권 안에서 얌전하게 살아가던 니은이자 길을 잃은 택시 속 여자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든 그녀들이었고 동시에 그녀들이 나의 친구이자 누이이자 선배이며 어쩌면 어머니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렇다고 하여 갑작스레 없던 용기가 샘처럼 솟거나 어설픈 희망을 가지진 않는다.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절망한다. 다만 연약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작은 연민을 횃대 삼아 어둠의 터널을 더듬더듬 짚어갈 뿐이다. 터널을 걸어가며 작게 속삭인다. 그것이 부디 우리 모두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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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9-0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어제 읽었는데, 댓글이 조금 늦네요. 저는 작가가 이런 소설들을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불행이 전시되는 사회, 때로는 그것은 쾌감이 되거나 유희가 되거나, 그보다 나쁘지는 않아도 안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그 타인의 불행을 보고 있는 제가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그런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는 거 말입니다. 단지 안도에 그친다고 해도 그 안도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걸까..소설이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이유로 타인의 불행과 재난을 보는 것일까.

저는 양선의 이야기와 그 마지막 소설 카드사 상담원의 이야기가 가장 좋았어요.

Shining 2015-09-03 14:54   좋아요 0 | URL
저도 카드사 상담원 이야기 좋았구요, 그 외 중에선 이창이 기억에 남네요.

몇 번 애정을 표현한 적 있지만 저는 꽤 잘 맞는 작가같아요. 뭐랄까, 저를 스쳐가거나 살짝 할퀴고 간 흔적들을 남이 써놓은 걸 보는 느낌이에요. 정서랄까 사고의 편린이랄까 아무튼 꼭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 무척 흔들리게 되고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왠지 무섭기도 해요. 그래서 아마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좋아하는 작가라고 밝히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본문에 썼다시피 나를 드러내는 일이 될까봐 괜히 머쓱해지거든요.

말씀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말이지만, 저는 이게 과연 타인의 일인가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지금 내가 혹은 또 다른 내가 겪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창동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그녀가 겪는 고통은 분명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 그 정도의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라는 뉘앙스요. 미묘하게 다르지만 저는 꼭 제 고통처럼 느껴져서 이 불행과 재난이 헐떡거리게 아프더라구요. 어쩌면 바로 그게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는 까닭이자 타인의 것에서 안도와 공포를 느끼게 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2015-09-05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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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리면 먼저 잊혀지는 것은 시간 그 다음은 공간과 인적 위치, 사람이라 한다. 가끔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거나 뭔가를 사러가서 그걸 잊고 다른 걸 사오거나 꼭 해야할 뭔가가 기억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농담처럼 치매인가봐, 하고 말하지만 그건 대개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 진심은 아닌 사람들의 가벼운 농일 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오늘과 내일을 혼동하고 오전과 오후가 구별되지 않고 그러다 자신이 서있는 곳을 잊고 부모를 형제를 자식을 잊고 딸과 동생을 헷갈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아버지가 암을 진단 받았다는 얘기를 할 때 친구도 말했다. 생각해보니 말야, 난 여태까지 엄마와 아빠가 언젠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 존재로서의 당위가 아니라 개별성으로서의 죽음. 그러나 엄마는 요새도 말씀하신다. 나는 이 날 이 때까지도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사실이 낯설다고. 내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았는데도. 나 역시 죽음을 고심할 나이인데도.

 

집 근처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있다. 교복을 입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과 나의 나이 차를 무심코 계산해본다. 저 아이들에게는 내가 몇 살로 보일까. 내가 저만할 때는 지금의 내 나이가 퍽 어른같았다. 실은 지금도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년 내후년의 나이는 비교적 인지하기 쉽지만 언젠가 내게도 60대, 70대가 올 거라는 사실은 요원해보인다. 마치 누군가 네가 뱃속에 있던 시절을 떠올려보라 말하기라도 하듯, 뿌연 막막함이 든다.

 

어릴 적엔 편식을 하는 어린이였다. 물론 지금도 못 먹는 음식, 못 먹진 않아도 안 먹는 음식이 있다. 여전히 비위가 약하고 음식에 대한 모험심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 변한 부분도 있다. 예전엔 꼬치전을 먹을 때 맛살로 파를 가려 먹었다면 지금은 파가 있어서 맛살을 먹을 수 있고, 상추를 먹으려면 고기가 있어야 했지만 이젠 상추와 마늘 없이 삼겹살을 못 먹을 것 같다는 것. 야채를 걸르긴 커녕 야채주스를 만들어 먹고 심지어 파프리카와 양파는 좋아한다. 먹지 않던 반찬에 절로 손이 가는 걸 보면 이게 나이를 먹으면서 입맛이 변하는 부분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두려움 때문도 있다.

 

새해가 넘어가는 첫날, 장염 증상이 보여 괴로웠다.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복통과 설사는 없는데 구토와 두통이 심했다. 이틀 동안 자다 깨다만 반복했고 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다치는 것 빼곤 크게 앓거나 입원을 한 적도 없고 감기나 몸살 정도만 경험할 뿐 소화불량에도 잘 걸리지 않는 평균 이상의 건강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고통에 대한 역치가 높은 편인지 참는게 그렇게까지 괴롭다고 여기는 편이 아니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빨리 낫게 해주세요, 농담이라도 아파서 학교 안 가면 좋겠다는 말 안 할게요. 앞으로 편식도 안 할게요. 아플 때는 늘 한가지 생각만 하게 된다. 다투지 않는 남동생을 바라거나 좋은 성적표를 바랄 수도 갖고 싶은 선물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냥 아프지 않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뭐든 하지 못해도 상관 없어진다. 아픔이 퍽 서러워진다. 그 다음엔 외로워진다. 아픔의 근원은 외로움이구나. 그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늘 잊는다. 쉽게 몸을 학대하고 방치한다.

 

아빠의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폴더별로 정리해드리다 우연히 사진을 봤다. 3년 전. 지금의 나와 똑같은데 신기하게도 훨씬 앳되어 보였다. 얼굴이 달라졌다거나 변했다거나 가시적으로 나이가 들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앳된 얼굴이 남의 것 같았다.

 

애니 레보비츠의 사진전에서 수잔 손택의 사진을 본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미는 마음이란 뭘까. 사진이라는 반영구적 영속성과 어긋나는 피사체의 점멸漸滅이라는 모순에 뒷걸음질 쳤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데미 무어의 만삭 사진도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유명한 잡지 사진도 아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름다운 시절도 아닌 무덤을 들어낸, 혹은 들어갈 자리로 보이는 구덩이 사진이였다. 제목은 <무제>. 그 사진의 작고 무방비함은, 방치되듯 전시된 모습은 -다른 사진들이 '삶'이라면- 마치 삶과 대비되는 죽음 같았다. 저 속에 눕는거구나. 정말 그 그림이 무덤가였을까. 그리 보였다. 축축한 흙의 기운과 묘지가 품은 체념, 특유의 무방비함까지 떠올랐다. 저기에 눕는거구나. 죽음의 다른 이름은 무제구나.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 그러나 그들은, 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멈출 수도 없고, 멈추려 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죽음 같았다. 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아래로, 저 아래로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와 필립 로스의『에브리맨』을 다시 읽다. 처음 읽었을 때도 굉장한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인상 깊다 여겼지만 지금 보니 그건 선 밖에서 바라본 감상에 가까웠다.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는 간결함과 들끓는 두려움과 절망과 대비되는 차가운 문장, 민감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훑는 태연한 시선이라는 그릇이 마음에 들었다면 이번에는 그릇 안에 담긴 내용이 보인다 아마 그건 스스로에게 점차 물결처럼 퍼지는 예감 혹은 본능적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나이 들고 있다, 는 인식이 처음으로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새삼.

 

지금보다 어릴 적엔 아파도 약을 잘 챙기지 않았고 건강 때문에 혹은 염려증 때문에 온갖 것들을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이해를 한다 그 두려움은. 나도 요샌 감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미리 약을 먹고 다친 상처를 방치하지 않고 소독을 한다. 낫겠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물을 묻혀서 상처를 키울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웬만하면 조심해서 빨리 낫는게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심한 멍이 들었을 때 붉은 빛이 푸른, 보라빛으로 변하다 노랗고 갈빛으로 바뀌는 걸 보며 순서대로 잘 빠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일주일이 넘자 차차 연해지는 걸 보며 재생능력에 감사했다. 방심하면 몇 잔이고 높아지는 카페인 양을 제한하고 커피를 내리려다 우유나 차로 바꾸는 경우가 있고 멍하니 앉아있을 때 무심코 손톱 끝을 매만지거나 손 여기저기를 꾹꾹 누른다. 특별히 보양식을 먹거나 약은 챙기진 않지만 -누가 먹으라 하지 않아도- 자기 전에 비타민 한 알을 입에 털어넣고 맛 없어도 브로콜리에 손을 댄다. 의식적으로 물을 많이 마시려 한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어 생기는 자연스러운 주름을 찬미했다면 요샌 그래도 하는 데까지 노력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 수술을 하고 싶다는게 아니라, 예전이라면 나이 들면 주름도 생기고 하는거지, 라면 지금은 나이 들어 주름은 생기지만 최대한 예쁘게 천천히 생기면 좋겠다고 속상해한다. 말하자면, 수단은 납득하기 어려워도 동기는, 목적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형이 건강을 잃기를 바라는 원한 가득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지는 못했다. 질투를 한다지만 그 정도까지 가지는 못했다. 형이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자신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의 건강, 그의 젊음을 되찾아줄 수 없었고, 그의 재능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격앙된 상태에서는 하위의 건강 때문에 자신이 건강을 망쳤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교양 있는 사람답게 불평등과 불행의 수수께끼를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지만. 옛날에 정신분석가가 급성 맹장염 증상을 질투의 증상이라고 그럴싸하게 진단했을 때, 그는 여전히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때 찾아오는 느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질투하는 사람에게서 평온, 나아가서 심지어 현실적인 태도까지 빼앗아가는 감정 상태를 발견했다 - 하위가 생물로서 부여 받은 것이 자기 것이기도 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위을 미워했으니까.

갑자기 그는 원시적으로, 본능적으로 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이 그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 말하길 인간은 스무 살이 넘기 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젊을 때는 젊음을 영광스러운 한편 수치스러워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매혹을 강하게 느끼거나 매혹을 느껴야만 한다고 믿음으로써 치기 혹은 만용 따위를 부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이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지 모르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천천히 나이 든다는 것의 실례實例를. 더 이상 100미터를 십 몇 초 안에 들어올 수 없을수도 있고 숨을 쉬지 않고 50미터의 수영장의 코트를 왕복할 수 없을지 모르고 더 많은 노력만이 예전과 같은 몸매를 얻는다는 것을 모른다. 쿵쾅거리는 헤드폰을 끼지 않아도 절로 청각은 손상되고 눈을 벌겋게 하고 특별히 스마트 기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언젠가 앞에 있는 것이 차차 흐려진다는 것을. 그래서 최대한 그것을 늦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에 젊다. 부자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가난에 대한 무지라면 젊음을 규정하는 것은 쇠퇴에 대한 무방비였다.

 

사실 가족 해체는 그의 전공이었다. 그는 세 명의 자식에게서 일관된 유년을 빼앗고 아버지로서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들을 지속적으로 보호해주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 자신은 그렇게 소중했던 아버지, 오로지 자신과 하위만의 것이었던 아버지, 그들 외에 다른 누구도 소유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서 다 받았으면서.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쇠락과 쇠약과 쇠퇴에서 오는 체념과 절망과 회한. 어쩌면 후자가 전자보다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 생각났다. 메멘토 모리와 바니타스를 뜻하는 회화들이 떠올랐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를 기억하며 바니타스를 되새기며 삶을 체념할 수도 있지만 때문에 유한한 삶에 경애를 바치며 열심히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사람의 삶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니러니.

 

처음엔 두렵지 않았고 그 다음은 두려워하지 말자 생각하고 나중엔 두려워도 숨기자 생각하다 마침내 두렵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누구나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연한 척 할 수는 없어도 의연할 수는 없는 것. 인정한다. 나는 나이를 먹는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실은 우리 모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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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1-3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저것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 잘 읽고 갑니다.

Shining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소망 이루시는 한해되세요. 짧은 연휴 즐겁고 의미있게 보내시구요.^^ 아..그리고 아프지 마세요.

Shining 2014-02-04 20:04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멘탈 붕괴 상태라;; 서재도 버려두고 이제야 읽었네요ㅠ 인사가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ㅠ
맥거핀님, 명절 잘 보내셨나요?^^ 좋은 일이 많은, 무엇보다 건강 건강한 한 해 되길 바랄게요 :)

낭만가롱 2016-11-30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 작가의 책을 두 권 이상 리뷰로 쓴 적이 거의 없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번 모두 구어체 리뷰군요. 흐음, 어쩌면 이 작가가 쓰는 글에 어떤 마력 같은 게 있는 걸까요. 침착하고 멋들어진 척 문어체로 꾸려가기보단 수다스럽고 솔직하게 구어체로 조잘대게 하는 것 말이죠. 구병모 작가의 『파과』입니다. 

 

주인공은 60대 여성, 일명 조각이라 불리는 킬러이지만 이 책은 (이른바) 장르소설이 아닙니다. 사건의 과정과 추이를 다루는 쪽이 장르소설이고 사건이 지나간 후 폐허를 다루는 것이 순문학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책은 확실히 순문학 쪽에 속한 소설입니다. 추측컨대, 킬러가 주인공인 까닭은 삶의 페이소스와 육체적 노쇠와 정신적 고갈 등을 한층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다만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꼼꼼히 따져보면 아쉬운 점이 있는 소설이긴 합니다. 인물에 밀착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 공사장 장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아드레날린이 날린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기왕지사 어쨌건 킬러가 주인공이니 피가 흩날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는 좀 더 조밀하게 축조된 싸움 장면이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작가가 특기 중 하나인 유려한 장문도 좋고 책의 전체적인 문제와는 다르게 -그 장면만- 빠르게 끊어서 치는 하드 보일드한 단문이어도 멋있을 것 같군요. 쿠엔틴 타란티노 <킬 빌1>의 눈이 내린 정원 장면이나 니콜라스 윈딩 레픈 <드라이브>의 엘리베이터 씬처럼, 지나칠 정도의 탐미주의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구병모 작가는 2008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이제 불과 등단 5년 차죠. 헌데 문장력이 상당히 좋고(장문과 복문을 구사하는데 달인이시죠) 고르는 어휘 또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적확합니다. 이건 작가로서 대단한 장점이며 『아가미』때 특히 이 점에 매우 흥분했었죠. 아름답고 섬세하고 과감한 강렬한 매력이 있는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국내에서 처음 봤으니까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구병모와 같은 작가들을 만날 때 저는 새삼 감탄합니다. 외국어로 이 말을 전한다면 그 어감과 색채가 한국말과 결코 같아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작가의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책의 별점을 네 개는 거뜬히 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작가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의 침강과 융기를 그려내는데 탁월합니다. 캐릭터의 이름과 성격은 도식적인데 반해 캐릭터 사이에 빚어지는 감정은 복잡하거든요. 『아가미』의 강하와 곤도 그랬었죠. 저는 강하가 곤에게 강하게 끌렸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였다는 말이 아니라(아니 꼭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겠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혐오와 환멸 같은 것 말이죠. 어떤 의미로든 강하는 곤을, 자신 스스로의 생각보다 사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각을 향한 투우의 마음도 강 선생과 그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조각의 마음 또한 한 가지로만은 설명할 수 없겠죠. 작가는 투우의 입을 빌려 먼저 이렇게 선수를 칩니다.

 

의지나 선택이라는 말은 왠지 거창한 계획의 일부라도 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어쩌다 보니, 였다. 그가 한 모든 일 가운데 필연적인 것은 많지 않았다. 짊어진 업을 또 다른 업으로 해소하듯이 꼭 이 일을 해야만 내가 살겠다는, 신열을 앓는 새끼무당 같은 절박한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고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을 제거하는 일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아비를 죽인 여자와 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는 보편적인 도덕심이 강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

 

투우가 조각에게 바랐던 것. 그것은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딱 잘라 이것은 그것이다, 라고 동인動因을 밝히거나 마음을 분류하는 것이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또 하나, 저는 조각이 강 선생을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은 섹슈얼 러브일지도 모르고 버리기로 택한 자식을 느끼는 듯한 감춰진 모성일수도 있고 평생을 고독하고 과묵하게 살아온 이가 느낀 이타적 감정에 대한 보답일수도 있죠.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으니까요.

 

 

몇 년 전 버스를 탔는데 어떤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던 누군가의 어떤 모습과 매우 흡사했거든요. 저 혼자만 시간을 거스르거나 그 친구에게 제가 몰랐던 혈육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얼굴, 보다도 체구와 자세, 특유의 청결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시절의' 그 친구와 거의 판박이더군요. 저는 그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 아이에게 한 눈에 반했다거나 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건 향수로 인한 통증 같은 게 아닐까요.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공간, 어떤 방식으로도 재현 불가능한, 심지어 당사자 그 자신도 잃어버린 모습. 타임머신이란 얼마나 절박하고 위험한 희망일까요.

 

저는 투우가 조각에게, 조각이 강 선생에게 애착했던 것은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향수나 회한, 추억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마땅합니다. 통렬하게 탄식하고 애끓듯 그리워해도 그 쪽이 낫죠. 돌아갈 수 없는 회한을 느끼는 사람 앞에 그 회한이 현재형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의 분노, 변질된 회한에 대한 배신감, 그러나 회한에게 인정받고 싶은 뜨거운 절망. 저는 투우가 조각에게 품은 마음이 그것과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조각에게선, 가질 수 없었던 한 시절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혹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어있던 삶의 방식을 실제로 조우했을 때의 애틋함 같은 걸 강 선생에게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방식 나름의 해석이지만 단순한 애호나 애증으로 정의하기엔 두 사람의 호오가 상당히 깊어서 결코 한 가지로 해독 가능한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나 펜로즈의 계단처럼 말이죠.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이중적인데다 자못 뻔뻔한 생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들은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객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평가하더니, 입을 싹 닫고 주관성의 편을 들어 좋은 혹은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하죠. 비판하는 데는 비교적 이론적 근거를 갖추길 선호하는데 반해 호의는 주관적인 요인을 끼워 맞추는 건 또 어떻습니까. 아니, 저만 그런 걸까요. 어쨌든 저는 종종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멋쩍고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전 페이퍼 댓글에서 그런 말을 썼습니다. 걸작은 의외로 쉽게 빠져나간다, 고요. 어떤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벽해서 때론 고결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압도적인 외경심. 그런데 이상하게 지나고 나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아, 그 영화 진짜 후덜덜해. 그 소설 인크레더블하게 멋져. 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 뿐 작품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닌거죠. 때문에 그들은 명예의 전당에 자리할 뿐 마음의 전당에는 착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나고 보면 기억이 나는 것들은 의외로 허술하거나 조악하거나 때론 우스꽝스러운 것들일 경우가 많더군요. 그릇에 실금이 생긴 것과 비슷하겠네요. 얇고 별 것 아닌 실금 사이. 음식이 담겼다 사라지면 실금 사이로 핏물이 들죠. 그리고 그 음식의 색은 빠지지 않아요, 그릇을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말이죠. 완벽하게 조응된 그릇 세트 중에서, 제 눈을 가장 사로잡는 건 바로 그 그릇이라는 점이 이상하고도 당연하죠. 

 

제 그릇 세트 중 실금이 간, 색을 머금은 그릇들은 제법 있지만 아마도 그들을 거기에 두는 것은 서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정서가 강한 책에 무척 약하더군요. 뇌과학, 천문학, 숲과 나무, 고래와 와인, 그림과 소설. 그 어떤 이야기이든 그 속에 강렬한 정서가 있는 책에 마음이 흔들려요. 그 서정은 환희나 절망, 체념과 환멸, 회환과 두려움, 등등 갖가지 것들이지만 어쨌든 그들이 비브라토를 만들어내니까요.

 

 

『파과』에서 느껴지는 강직한 애환, 들끓는 체념, 차가운 비애 같은 것이 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犯人조차 범인凡人으로 느끼게 하는 보편적인 쓸쓸함과 상처 같은 것 말이죠. 육체의 퇴화와 정신의 퇴색, 무뎌지는 감각과 느려지는 반응속도에 대한 본능적 공포,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 이대로 죽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라는 식의 자조. 그러나 그 모든 추를 누르는 삶에 대한 애착. 이 모든 뜨거운 파토스를 설명하는 것이 차갑고 서늘한 칼과 같은 문장이라뇨.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돌아오지 않는 것보단 이편이 더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날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네가 발로 치고 짖어대도 내가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도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구해 오라는 게 아니야. 그떄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너는 살아야 해. 만일 저 문이 열려 있지 않다면 너는 배고픔에 지쳐가다 결국 내 시체를 뜯어 먹기 시작할 거다. 그래도 나는 별로 상관없다. 그걸로 너한테 잠깐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하지만 언젠가는 시취가 밖으로 새어 나갈 테고, 배수관을 타고 벌레들이 기어 내려가 사람들이 뒤늦게 문을 따겠지. 그들이 너를 보면 안락사를 시킬 거란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인의 시체를 먹은 개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판단도 그렇고, 변질된 고기를 먹었으니 사람들에게 세균이나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염려...... 하지만 무엇보다...... 아무도 거기까지는 말 안 할테지만...... 네가 너무 늙어서 누구도 너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작가의 글에는 늘 이상한 서늘함이 있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나 풍자나 더 높이 있는 자가 느끼는 냉소나 환멸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구태여 설명하자면 애초에 그런 판에서 태어난 자란 어른아이로 자란 아이가 가진 본능적인 거부감, 더 멀리 다녀온 자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자가 보여주는 냉랭한 무감함 같은 것.

 

'파과'라는 제목에서 처음 떠오른 것은 파과破果가 아니라 과瓜를 파자破字한 파과破瓜였습니다. 8과 8을 더한 여자 나이 16세, 8과 8을 곱한 남자 나이 64세. 64세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가르키는 말.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곧 조각의 인생 같군요. 열 여섯에 입문한 조각은 예순 넷 즈음이 되어 그 곳에서 내려오죠. 과일이 물러지는 시기, 비로소 손톱이 더해지는 시기. 처음과 끝을 잇는, 스스로 문을 열고 닫는, 좋은 제목이라는 감상을 첨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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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8-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장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자신이 연 문은 자신이 닫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군더더기 없고 적당히 감상적인 마무리. 그리고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라는 문장. 그 문장이 나타난 곳이 투우가 눈을 감고 난 후라는 것, 알약 다음에 쉼표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라는 배열. 의례적인 단문을 대할 때도 작가가 문장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좋구요. 무엇보다, 슬프네요.

dreamout 2013-08-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병모에게 처음으로 관심이 생기네요.

Shining 2013-08-28 00:06   좋아요 0 | URL
전 이 작가가 쓰는 문장이나 어감, 복잡한 냉소가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어요(웃음).

2013-09-0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점에서 이 책 샀어요~. 다 읽고 이거 읽으려구요. 별 5개 주셨으니 실망은 없을 것 같습니다~.^^

Shining 2013-09-09 10:44   좋아요 0 | URL
히히. 저의 의견일 뿐인걸요 :^ <방주로 오세요> 읽고 꽤 실망했는데 이 작품은 <아가미>만큼 좋아요. 날씨가 좋아요 섬님. 어디론가 툭 산책을 가야할, 가을 날이군요 :)

아이리시스 2013-09-1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신간평가단에서 받은 책 읽고 Shining님 리뷰도 읽었을 때 이게 왜 좋지, 저는 그 작위성이 주는 날카로움에 베일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작가 별로야, 했는데 이 책도 작가도 Shining님이 좋아하니까 다시 관심? 읽을까? 말까? 뭐가 있나? 이런 생각이 전에 맥거핀님 리뷰 먼저 읽을 때는 안 들었었어요. ^^

Shining 2013-09-11 23:4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우린 은근히 좋아하는게 달라요, 그쵸? :) 저는 그래서 더 좋지만요. 전 이 작가가 구사하는, 혹은 앞으로도 하려고 노력하는 문장이 좋더라구요. 냉소나 자조 같은 정서도 끌리고. 다만 <방주로 오세요>가 워낙 별로였어서, 아직 베스트 작가군에는 좀.. 맥거핀님의 글은 차분하고 이지적인데 저는 무작정 막 좋아좋아좋아요, 하기 때문... 아닐까요?ㅎㅎ
 
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L, 너는 며칠 전 내게 가장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냐고 물었지. 너는 소설을 책을 곁에 두고 사는 편이 아니었고 때문에 일종의 추천을 받기 위해 물어본 것이 아님을 안다. 그 질문은 '요즘 너는 어떠냐'는 말의 다른 표현이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지금의 나를 대변할 것이라 너도 나도 확신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너는 물었고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가끔 숨기거나 바꾸거나 모른 체 했다. L, 너는 내가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부러 찾아 보지 않는 친구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그것에 대해 했던 거의 모든 말을 기억했다. 예를 들어볼까. 너는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읽지 않았어도 로맹 가리가 누구인지 그게 어떤 소설인지 왜 그 소설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너는 모두 기억했다. 나는 가끔 그런 너의 면들이 당혹스럽고 무섭기도 했다. 너와 나는 만난지 15년이 되어가지 않은가. 그런데 너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과 딱 한 번 밖에 말한 적 없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느냐. 때문에 지금 너는 존 하트의 신작을 읽었다는 내 대답에 함의를 짐작하려 하겠지. 너는 기억도 하고 이유도 알겠지. 『라스트 차일드』와 『몬스터콜스』가 유독 마음이 쿡 박혔던 까닭.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아이들, 싸우고 뒹굴고 진흙 속에 나동그라진 채 진실이라는 벽 앞에 무릎 꿇린 아이들, 깊은 눈동자에 깃든 절망과 고독, 분노와 허무 같은 것들이 얼마나 시리고 서럽게 다가왔는지 너는 이번에도 기억할 것이다.

 

사실 내가 선뜻 대답 하기 어려웠던 건『아이언하우스』의 줄거리가 사실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를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일급 킬러, 범죄 조직, 조직의 탈퇴, 아름다운 여인과 도주라니.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내용의 헐리웃 영화만 해도 열 개는 찾아낼 수 있겠지. 더군다나 냉혹한 풍경에서 난데없이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시점이나 유달리 "자기야"를 남발하는 초반부 대사 때문에 맥이 풀렸다. 설렁설렁 읽어야겠군, 귓바퀴를 긁적거리며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공 마이클과 노인(오토 케이틀란)의 시선이 맞닿는 부분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좋은 것 아닌가. 이런 부분들 말야. 

 

하지만 노인은 굳이 그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과 결과, 선택과 대가.

 

노인 역시 그의 스승이었고, 그의 죽음을 통해 마이클은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에도 노인은 단 한 번도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천박함에 슬퍼했다. 잃어버린 여인들을 그리워했고, 딸이 없었던 걸 애석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껴안고 살았던 세계가 너무 좁았던 것에 한탄했다.

 

노인과 마이클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없었고 헛된 욕망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힘이란 음식과 거처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도수에 지나지 않았다. 혹독한 어린 시절이 남긴 교훈이었다. 

 

아아, 너의 표정이 떠오르는구나. 항상 너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구나. 대견하고 안쓰러운 표정. 안타깝다, 는 마음을 누군가 네 얼굴에 휙 끼얹어 놓은 듯한 표정. 누가 보더라도 씁쓸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정.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드는건가.

 

 L,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이클을 생각해면 이상하게 헐리웃 배우 마크 윌버그가 떠오른다. 고독하고 피곤하고 의지력이 강한 남자라면 응, 맞아, 맷 데이먼을 떠올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마크 윌버그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지? 마이클에 대한 키나 외모에 대한 어떤 묘사와도 관계없이 한 번에 떠올랐는데 막상 떠오른 이상 다른 인물은 생각이 나지 않더라(아비게일이란 인물은 줄리안 무어나 제시카 차스테인이 떠오르더군, 이것도 묘사와는 관계없이 말이야). L, 나는 늘 정서가 안정된 사람이 좋았다. 감성적인 사람이 좋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인내심과 집요함을 가진 아주 단단한 사람이 좋았지. 감성적인 사람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이 때론 지나치게 연약하고 섬세한 면으로 나타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C가 그랬지. C가 왜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나는 그 낙차를 한없이 바라보다 지치고 말았었지. C의 섬세한 문장이 좋았지만 그 문장을 나오게 한 마음들이 이따금 피곤해졌다. 그래, 나는 자신의 기분만으로 타인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의연한 사람을 좋아했지. 그렇게 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이 마이클이라는 남자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일류 스릴러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이고 그래서 꽤 도식적이지만 그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지. 강하고 생존본능이 강하고 스스로를 폄훼하지도 숭상하지도 않고 약자에게 약하고 어떤 원칙이라도 일단 수립한 후엔 무조건 지킨다, 침묵의 의미를 안다, 는 것 등등.  

 

(전략) 그리고 그 오랜 세월 내내 마이클은 노인에게 왜 그 힘든 길을 선택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인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사내라면 그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만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마이클은 노인의 팔을 똑바로 펴고 가슴에 구겨져 있던 담요를 가지런히 폈다. 그리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노인의 뺨에 키스하고, 다른 쪽 뺨에 또 키스했다. 마침내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침대 옆 테이블에서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집을 집어 들고, 오랫동안 서서 노인을 내려다봤다. “정말 제게 잘해주셨어요.” 마이클은 그 책을 가지고 나왔다.

 

거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분에선 약간 뭉클하기도 했다. 그리곤 다시 냉정한 어조로 돌아와 존 하트는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라고 -내가 뭐라고- 생각했지. 우선, 매력적인 주인공을 설정할 줄 알고 그 다음, 매력적인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해야 독자들이 그 캐릭터에 편에 설지 알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울리는 법을 알지. 웃음보다 눈물이 기쁨보다 고통이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니까. 나를 웃게 한 작가는 작품만이 작가의 이름만 기억나지만 나를 울린 작품은 작가, 제목, 그리고 문장까지 기억하니까. 사실 문장력도 꽤 좋았는데 덕분에 발췌 못하는 내가 쪽수를 일일이 적어뒀지. 잠깐, 그래 이 부분.

 

그것은 둘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거짓말이었다. 새벽의 손가락은 아직 하늘을 할퀴어 빨갛게 물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 내일은 오지 않았다.

 

줄리앙이 말한 게 분명했다. 말과 눈이란 잉크로 그 그림을 색칠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열어 보이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줬을 것이다. 줄리앙은 자신의 감정을 남과 나누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줄리앙의 힘은 타인의 선의, 어렸을 때 망가진 적이 없는 강하고 현면한 타인들의 선의를 믿는 데서 비롯됐다.

 

아직까지는 어떤 게 거짓말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플린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그 작은 거짓말들이 뭔가 더 큰 거짓말의 열쇠가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사람들은 -편의상 분류하길- 장르문학이라면 문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대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골조를 축조하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탁월한데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조율할 줄 알아야 하고 문장력 또한 기막히지. 스티븐 킹도 존 스칼지도 마이클 코넬리와 스콧 스미스, 로렌스 블록(얼마 전에 읽었던 그 끝내주는 제목, 응, 『아버지들의 죄』의 작가)도 그렇잖아. 존 하트의 문장력도 발군이더라.

 

하지만 작가의 문장에 비해 이 책의 만듦새는 아쉽다. 메인카피는 물론 앞, 뒷표지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거든. 반전을 언급하라는게 아니라 '사랑이야기'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불편했지(넓은 의미에선 사랑이겠지만). 존 하트가 다루는 이야기는 단지 한 여자와의 사랑만이 아니라 동생, 가정, 가족에 대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체된 가정, 지키지 못한, 지킬 수 없었던 가정과 또 하나의 가정을 위한 간절한 바람 같은 것. 때문에 이야기는 A로 시작해서 B,C,D로 흘러가는데 이 와중에도 A알파, 베타, 감마 이런 식으로 곁가지가 많이 생기는구나. 덕분에 산만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반전보다는- 그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고이지 않고 콸콸콸이든 졸졸졸이든 계속 어디론가 흘러가거든. 당연히 독자인 나는 그 위에 뗏목을 띄우고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으니. 나는 호수에서 강으로 바다로 점점 흘러든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독자가 다음 장을 넘길지를 아주 잘 아는, 서사 장악력이 좋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단 두 권만으로 이 작가가 '좋다'라고 생각했던 건 작가 스스로의 저변에 깔린 가치관 때문인 것 같다. 별 것 아닌 듯 써내려간 짧고 강력한 문장, 예를 들면

   

어떤 행동을 하건 결과가 따르고, 어떤 선택을 하건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노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점에 있어선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나쁜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수 있는지 처음 맛본 사람의 절망감.

 

세상은 잔인한 곳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실제 현실이 그런 것처럼 다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죽고, 부모들은 부모로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잔인한 행위라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우린 의심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어." 제섭이 말했다. "우릴 무너뜨리는 건 바로 진실이야."

 

와 같은 부분들. 『라스트 차일드』가 서사 그 자체, 아이의 태도만으로 사람을 망치로 탕탕 두드리는 것 같았다면 『라스트차일드』는 이렇게 무심하게 펼쳐진 적확한 표현들이 마치 스크류나사처럼 군데군데 사람을 구멍내는 것 같았다. L, 얼마 전 지친 얼굴로 너는 더 이상 공감이니 동감이라는 말을 믿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면서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 이해한다고 착각할 뻔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에게서 표정이 옮았다. 안쓰럽다, 는 물감이 내게도 수채화처럼 번졌다. 우리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짐작할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경험에 일반론이 있지 않은 것처럼, 삶에도 일정한 톤은 없었다, 고 말했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나도 모르게 생각해봤다. 우연처럼 불행하고 필연적으로 고독한 어린시절을 보냈을까. 어떻게 이렇게 절망과 좌절, 회의와 자책에 대해 짧고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강의 글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삶의 끝까지 내지른 사람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 피로, 애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가까스로 가지 하나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 그 사람이 다시 삶이라는 대지로 올라오려고 노력하는 듯한 처절함과 처연함 같은 것 말야. 존 하트의 문장 면면에는 서사에는 묘한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의 절대적으로 그러나 타의로 불행을 너무 일찍 배운 사람들의 강박, 강함과 약함이 와이퍼가 되어 이야기라는 유리를 닦아내고 있는 것처럼.

 

그래, 냉정히 말해 그에게도 분명 약점이 있다. 나로선 두 번째로 읽는 글이라지만 그는 매번 유사한 주제 -아버지의 부재, (다의적 의미에서) 남겨진 아이들- 를 쓰고 있다는 면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편이한 소재로 이야기를 갈무리 지으려는 모습 같은 것들이 걱정스럽긴 하다. 하지만 나로선 그가 자신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몹시 불행하고 부조리한 것을 가르쳐주는 어른이 존 하트라면 나는 그 뒤에 선 참관자일 수밖에. 진실이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반발할 수 있겠냔 말인다. 어떤 숭고함이나 존엄함이 아닌 그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이 있던, 그런 사람에게 달라붙은 껍질같은 체념에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L, 공정하게 바라보자면 역시 그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에겐 이야기를 축조하는 재주가 있고, 인물을 어떻게 창조해야하는지를 알며, 스릴과 서스펜스의 이완과 수축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의 본질을 정확히 아는 작가를 어떻게 좋은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단 말인가,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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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5-0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괴팍하고 난폭하게 이야기가 튀는 경향이 있어서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번이 두 번째, 존 하트가 세상을 보는 나아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냉혹함과 연민이 함께 있어 별 수 없이 마음이 동한다. 리뷰는 실제 L과 나눈 이야기의 일부. 요새 리뷰 쓸 때 친구들 덕 좀 본다.

아이리시스 2013-05-0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이 부럽네요, Shining님 그런 얘기도 매일 듣고! 사실 같이 읽고 말할 수 있으면 가장 좋긴 하겠지만 저는 안읽고도 읽은걸 다 얘기해주는 그런 관심사(독서취향) 다른 친구가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같은걸 읽자,읽어라,읽었으면좋겠다, 이러는 편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진짜좋은건 혼자만 알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주고 싶고, 이런 이기심 작가들에게 괜찮을까요?ㅎㅎ

존 하트도, 마이클 코넬리도 못 읽어봤지만 리뷰읽으니 좋네요, 좋아요!

Shining 2013-05-04 23:56   좋아요 0 | URL
하하. 아이님께도 얘기해드린 적 있잖아요? 좀 되긴 했지만 그 책이요 그 책. 원하신다면 다른 책도 해드릴 수 있슴돠_-b

네, 사실 그게 좋죠. 각자의 취향과 기호가 있고 겹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나누는 것. 그게 같은 것을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을 때도 많아요. 그런데 한편으론 거의 한번도 같은 것에 대해 얘기 해본적이 없어서, 그러니까 독서 토론회 같은 걸 나가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볼땐 있어요. L은 제가 한 얘기를 습자지처럼 빨아들여서 기억해요. 어떨땐 좀 무서울 정도로ㅎㅎ 그 엄청난 기억력 덕에 L은 책,영화 엄청 많이 읽고 보는 사람인 줄 안다네요 주변 사람들이(웃음).

전 언제나 그래요. 제일 좋은 건 나만 갖고 싶죠. 하하하. 근데 좋은 것 중 어떤 건 혼자 알고 싶고, 좋은 것 중 어떤 건 나누고 싶고. 약간 다른 것 같아요 :) 오늘 날씨 정말 좋아요, 주말 잘 보내고 있어요?

맥거핀 2013-05-0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하루키 소설 <어둠의 저편>에 보면 네가 한 일을 잊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너를 찾아낼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조직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어요. (소설의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점,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점, 뭐 그런 거는 조직, 범죄 그런 것을 다룬 책이나 영화에서 저를 가장 무섭게 만든 점이었습니다. 마피아는 잊지 않는다, 뭐 그런 것 말이죠.

하기는 뭐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기원에 있는 권선징악 같은 것도 결국은 행동에는 결과(대가)가 따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또 한편으로는 그 대가를 어떻게 치뤄낼 것인가, 주인공이 그 대가를 끝까지 잘 치러내도록 돕는 것도 소설가의 몫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구요.

Shining 2013-05-07 11: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 근데 그건 어떤 세계든, 자의든 타의든 한 세계에 속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그 세계(?)는 필연적인 폭력과 집요한 추적이 따른다는 것이 다를 뿐_-;

그렇군요. 코엔 형제의 영화도 떠오르고 미하엘 하네케도 생각이 나네요. 지금 읽고 있는 폴 오스터도. 행동엔 결과가 있고 선택엔 대가가 있다는 것, 을 말로도 행동으로도 잘 표현하는 것이 좋은 작가 혹은 감독의 몫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존 하트는 괜찮은 소설가에 속할지도요(웃음).

다크아이즈 2013-05-0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샤이닝님의 L을 질투합니다. ^^*
L처럼의 역할을 할 수도 없지만 어쩐지 그분이 마구 부럽습니다. 샤이닝에 L이라... 환상의 조합인데요.
전요, 님의 이 말에 확 꽂혔어요.

<감성적인 사람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이 때론 지나치게 연약하고 섬세한 면으로 나타나 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C의 섬세한 문장이 좋았지만 그 문장을 나오게 한 마음들이 이따금 피곤해졌다. 그래, 나는 자신의 기분만으로 타인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이런 경험이 있거든요. 섬세한 감각 때문에 타인을 피곤에 빠뜨리는 부류를 제가 못견뎌했던 아픔 같은 기억들. 자책하지만 결코 되돌아간다해도 견뎌낼 수 없었던 한 시절... 그렇다고 의연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건 고백하겠어요. 아무래도 저처럼 좀 덜떨어진 부류들에 애정이 좀 있는 듯...

오늘도 샤이닝님 신선한 자극 안고 물러납니다.^^*

Shining 2013-05-09 12:59   좋아요 0 | URL
칭찬쟁이 팜님! ^^ 팜님이 인용해주신 덕에 탈자(타인, 인데 타, 가 지워졌더라구요. 쿡쿡)를 찾아냈어요, 감사합니다(꾸벅).

개인적으론 외적 자아가 단단한 사람이 좋아요.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먼저인 사람, 밋밋하게 보이지만 가까워지면 내적 자아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겉이 더 단단한 사람이요. C의 섬세하고 예민하고 날선 부분을 좋아했는데,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고 강점이자 단점이 된다는 걸 알아내기도 했고요. 그런데 팜님, 덜 떨어지셨다니(웃음). 팜님처럼 날카로운 지성과 감성을 지니신 분께서_-*

저는 오늘도 팜님의 칭찬을 꼴깍 마시며 오후를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