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그래서 예전엔 수첩을 썼고(지금도 손글씨로 쓰는 간단한 일기는 병행한다) 지금은 엑셀파일로 한 해 동안 본 영화나 책, 다녀온 전시회나 여행 일정 등을 정리한다. 사실, 모르진 않았다. 모를 수가 없다. 알라딘 페이퍼나 리뷰만 뒤져봐도 '점점 더 책을 읽지 않아 걱정이다'라는 염려와 민망함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는데다 머릿속을 잠시만 뒤져도 반성할 거리가 넘쳐나니. 헌데 이렇게 잘 정리한 표로 보면 더욱 참담하다.


그러던 와중 모종의 자발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고 덕분에 작년보다는 조금 더 나은 독서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봤자 8월에 간신히 네 권을 읽었고 이 페이퍼는 기억을 돕기 위한 일종의 기록의 장치다. 



  완벽하게 잘 만든 걸작이 아님에도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작품들이 있다. 박민정 작가의 『미스 플라이트』역시 그렇다(그렇다고 이 책이 형편없거나 별로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엄청난 대작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조심스러운 서사와 담백한 진심에서 굉장히 진한 울림을 느꼈다. 또한 이 책이 그 즈음, 시기적으로도 그 당시에 나왔어야 할 책이라고 평한 것도 이해가 간다.


방산 비리, 군대 문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이간질하게 만드는 직장내 문화, 성희롱, 사회적 타살, 갑질 문제 등등. 온갖 뜨거운 감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이 크고도 작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솥에 들어있는 감자를 집다보면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뜨거운게 아파서인지 눈물이 찔끔 난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고들 하지만. 사는게 사는게 아닐 땐, 가버린 사람은 어떻게 보내고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 살아내야할까. 



  『팩트풀니스』역시 책 소개 페이지에 혹해서 읽기 시작했다. 13개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책은 다소 놀라운 정답에 대한 결과로 천천히 이끈다. 이 책의 요지는 한 가지다. 긍정보다 부정이 인식체계에 더 깊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언론과 통계는 공포를 조장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대부분이 짐작하는 것보다 세계는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다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서양의, 그것도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인 스웨덴 사람이라는게 아이러니하거나 다소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혜적인 태도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은 동의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흥미로운 결과가 많았다.


유행성 질병이나 테러, 자연재해보다 알코올과 교통사고,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훨씬 높음에도 대중은 전자에 훨씬 더 관심을 갖고 공포를 가진다는 사실, 중국과 인도 등의 국가에서 탄소배출량이 높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사실 1인당 배출량을 계산했을 때 열강의 서구국가들이 훨씬 더 높은 수치를 가진다는 것과 현재 인구 분포도와 성장률을 고려했을 때 패권은 100년 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옮겨갈 거라는 예측, 생리대 회사들은 여성들의 임신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더 힘쓰는게 이익을 위해 낫다는 주장과(임신을 하면 약 2년간은 생리대 사용이 멈추기에 피임을 할수록 오히려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다) 종교과 관계없이 소득이 자녀의 숫자를 결정한다 등 어떤 것은 '당연히' 그럴만하고 어느 것은 다소 놀랍거나 의외로 와닿는 수치가 등장한다. 심지어 세계의 80% 1세 이하 영아들이 하나 이상의 예방접종을 받으며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중간 소득 국가에 해당한다. 


이렇듯 세상이 내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라는 차근차근한 주장은 분명 마음이 놓이는 말임에도 이상하게 읽고나선 다시 우울해졌다. 왜냐하면 한국은 고소득국가, 4단계 발달 단계에 해당하기 떄문에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지 않음에도 가난하기에 나 역시 가난이 몸 담은 소속 자체가 다를 뿐 여전히 사는게 힘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매할 책이 있어 알라딘에 들어왔다 이 책의 광고를 읽었다. 자신의 독서량과 집중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일 뿐 스스로가 의지만 가지면 얼마든지 '전처럼'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저자는 생각했다. 이론을 점검하기 위해 실험을 했으나 이럴수가, 몇 페이지를 읽다 다른 생각을 하거나 휴대폰을 힐끗대거나 메일을 확인하고는 했고 심지어 자신의 -이른바- 인생의 책이었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유희』는 지지부진한 서사를 가진 책으로 느껴진 저자는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정확히 지금의 내 상황 아닌가. 이 책은 책을 읽는 뇌와 디지털 기기를 접하는 뇌는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고 대조하며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는 만큼의 균형을 책으로 맞추지 않으면 뇌가 완전히 불균형이 되기 쉽다고 말한다. 또한 책을 읽는 방법이 e-book인지 종이책인지에 따라 글을 습득하는 방식과 양의 차이가 있다고 밝히며 책읽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 성인 또한 뇌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졌기에 영유아와 청소년들에겐 책을 읽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지를 설명한다. 


책의 설명을 읽는 것 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짐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책이긴 하나 대부분의 독자가 막연히 '그러겠지'라고 생각하는 사실을 수치로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가치가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줘야 하는 까닭 중 하나는 동화책에는 일반적이로 쓰지 않은 글귀들이 등장한다는 주장이었다. '옛날 옛적에', '소스라치게 놀라','환상적인' 이라던가 심지어 '마녀'나 '변신'이라는 단어조차 비일상성의 일상성으로 느껴지게 만든다는 골자다. 즉 이야기의 메시지 말하자면 교훈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다양한 단어의 사용 또한 못지않은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다. 이는 요새 아이들은 책을 주면 터치를 한다는 점이나 자꾸 책을 확대하려고 검지와 엄지를 벌린다는 이야기, 글로 쓰여진 설명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내용을 영상으로 만들면 알아듣는다는 보고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이 책을 읽는 내 자신의 집중력이었다. 저자인 매리언 울프가 했던 경험을 공감하며 읽으면서 정확히 같은 태도를 취했다. 책으로 풍덩 뛰어들던 시절이 다시 올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8월은 4권의 책으로 느리지만 천천히 물들었으므로 그것만은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팩트풀니스』에 그런 글귀가 있었다. 더딘 변화라 하여 불변은 아니다. 세상은 천천히, 분명 좋은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고 내 독서생활도 다시 느리지만 분명하게 회복하고 있으니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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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마이클 알메레이다, 2017


그래도 넌 알아보네. 이모가 내게 던진 말에 할머니는 그럼, 예쁘잖아. 지금도 예쁘네. 라고 말하신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기억보다 강한 초기 치매환자에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엄마가 형제 중 첫째라 언니와 나는 할머니에게 제일 오래된 손주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맥락을 놓치고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다가 다시 또 언제 왔냐고 하고 또 어느 날엔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기억은 선행적이지도 않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난데없이 사라지거나 끊기고 다시 이어지길 반복한다. 연세를 생각한다면, 어찌보면 당연한 정도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안타깝고 안쓰럽지만 함께 하는 이에겐 자주 지치고 화를 만드는 병이다. 늙는다는 것, 쇠퇴해지고 몰락해가고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마조리(로이스 스미스)역시 치매 환자다. 본인은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그녀의 기억도 나의 할머니와 비슷하다. 어떤 날은 놀랍도록 또렷하고 명료하지만 어느 순간엔 방금 하던 이야기도 맥락을 놓치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마조리는 그녀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와 사위인 존(팀 로빈스)와 함꼐 산다. 그리고 최근엔 젊은 시절의 남편, 월터(존 햄)의 인공지능도. 월터는 시시때때 나타나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대부분 오래전 이야기. 키우던 강아지나 프로포즈 날 함께 봤던 영화 같은. 월터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지만 사실 그의 대화의 바탕은 테스와 존, 대부분 존의 이야기에 있다. 그러니 애초에 이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이야기는 마조리와 월터로부터 (아마도)테스에게로, 다시 존에게로 몇 번을 걸쳐 넘어온데다 진위 여부를 확인해줄 사람은 월터와 마조리 뿐인데 한 사람은 고인인 되었고 한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으니. 월터는 보통의 인공지능이 아니다. 그는 학습하고 판단한다. 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조리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원하는 바람이나 상상에 따라 기억을 수정해주기도 한다. 프로포즈 떄 함께 본 영화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었지만 고전적인 극장에서 흑백으로 본 <카사블랑카>이면 좋았겠다는 그녀의 바람대로 그 다음번엔 프로포즈 때 <카사블랑카>를 봤다고 말한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든 기억에 대한 상기이든 아니면 그저 대화상대가 필요해서든 존은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지만 테스는 그렇지 않다. 그는 아빠의 모습을 한 월터가 불편하다. 그것도 하필이면 돌아가실 적, 자신의 마지막 기억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더 선명히 기억하는, 한참 젊은 시절의 모습이라는게 불만이다. 


William James had the idea, and it's been confirmed scientifically, that memory is not like a well that you dip into or a filing cabinet. When you remember something, you remember the memory. You remember the last time you remembered it, not the source. So it's always getting fuzzier, like a photocopy of a photocopy. It's never getting fresher or clearer. So even a very strong memory can be unreliable, because it's always in the process of dissolving.


인공지능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그러하나 시간이 흘러 마조리가 떠난 자리에 그녀 역시 엄마의 모습을 불러온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대로 노쇠한 어머니를. 다정하고 인내심 있는 마조리의 모습이 테스는 더욱 화가 난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는 딸이 아니었다고 여긴다. 어머니의 마음엔 닫힌 문이 있었으며 마조리는 존을 반기지 않았고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해준 적이 없으니까. 어리석은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여기면서도 기어코 그녀를 소환해 곁에 두고서는 당사자에겐 할 수 없던,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그러진 진실이 밝혀진다. 월터 말고도 마조리에게 구애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프로 테니스 선수였고 세계랭킹 8위까지 올라간 전적이 있다는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테니스 선수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하지만 존은 마조리와 월터에게 그렇게 말했고 어느새 마조리는 그것을 사실과 혼동해 자신의 기억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들이 키웠던 강아지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고 그들에겐 세상을 떠난, 자살한 아들이 있었다. 다음 장이 되면 비슷한 변주가 이어진다. 남겨진 건 존이고 그는 테스가 떠난 자리를 그리워한다. 이해할 수 없던 그녀의 마지막. 그 후의 삶. 기억과 기억은 중첩되고 중축된다. 그리고 마침내 추운 겨울이 되고 마지막 자리에 월터, 마조리, 테스가 모인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진짜 기억에 대해 듣게 된다. 


네 명의 배우로 이뤄진 영화는 고요하고 정적이다. 처음엔 정적이고 고요하고 시간이 지나도 도통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 다가오면 그제서야 알게 된다. 비단 치매 환자가 아니라도 기억은 누구에게든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 없음을.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아주 선명하게, 사진처럼 남지만 어떤 기억은 바람처럼 흩어지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어쩌면 중요한 건 완전한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그 순간에 느꼈던 그 강렬한 감정의 상흔이나 기억을 해줄 상대를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관계의 역사가 기억의 의미일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월터와 마조리, 마조리와 테스, 테스와 존으로 이어지는 관계도 속에서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그 기억에 의존해 살아간다는 사실이 아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제멋대로 추억을 쓴 사람이 또 있다. 얼마 전 읽은 책의 작가, 줄리언 반스의 가장 유명한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주인공 토니 웹스터다. 토니의 반에 전학 온 친구, 에이드리언을 만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내 그에 대한 매료로 바뀌며 동시에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으로 이야기가 발전한다. 그녀의 초대를 받아 집에 가게 된 토니는 그녀의 집안과 자신 사이의 계층적 괴리감과 가족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불안, 베로니카 엄마의 이상한 말과 스킨십의 여부 등의 여건이 맞지 않아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러다 얼마 후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에 대한 축하를 전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흘러 재회하게 된 베로니카에게서 자신의 기억의 이면을 듣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론 굉장히 불쾌한 소설이었다. 커가는 딸을 질투하고 경계해 노골적으로 딸의 남자친구를 꼬여내려 하는 베로니카의 엄마(남은 사람들의 상처는 생각도 않는다, 책임의식도 없고)도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했지만 결국 이기적이고 즉홍적이며 제 행동에 책임 하나 지지 못하는 에이드리언도, 좋을대로 기억을 왜곡해놓고 자신이 상처 준 상대와 재회하며 내심 로맨스를 기대하는 주인공 토니 또한. 좋은 것만을 쓰고 그리는 것만이 문학이고 예술은 아니라고 하지만 읽고 나서 이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짜증을 유발했던 글이었다(물론 이 불쾌감 역시 작가의 문학적 트릭이겠지만).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불쾌함과는 별개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임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상반된 기억을 할 수 있을까, (정확히는) 어떻게 이만큼의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뜨악함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어느 정도든- 수긍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곡해하고 해석하며 살아가는 면이 있으니까. 덜 사랑하거나 많이 사랑받는 사람,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덜 받고 잃을 게 많은 사람에 비해 고집스럽고 오만하다. 일방적인 상처를 단순히 추억으로 승화하기도 하고 나에게만 좋았던 시절을 상대 역시 그랬으리라 자위하기도 한다. 처음엔 합리화였고 자기기만이었으나 이내는 자기주문을 자기 기억으로 바꾸는 식이다. 토니처럼 사실과 기억의 간극이 어마어마하지 않을 뿐 누구나 크고 작은, 잘못된 기억을 안고 산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잘못된 기억과 증언은 테니스 선수에게만 있지 않았다. 월터가 마조리에게 프로포즈 한 날 본 영화가 <카사블랑카>가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란 것은 관객들도 알지만 사실은, 영화관도 아닌 모텔 방에서 방영된 TV속 영화였다는 것은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마조리는 프로포즈의 순간이 벌거벗은, 정사의 후의 모텔 방이라는 것이 속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소를 영화관으로 바꿨지만 어느새 본인조차 진심으로 믿게 되었으며 치매를 앓는 노년이 되어서는 영화조차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이 데미안을 잃은 후 벤치에 앉아 퍼레이드를 지켜봤다고 했지만 사실 그 일은 실외조차 실내에서, TV의 자료화면을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흩날리는 사프란 색은 맞았다. 


하긴 기억이란 원래 그런 면이 있다. 어떤 것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허무하게 흩어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별 것 아님에도 평생동안 기억하게 된다(예컨대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업시간의 일부를 지금도 기억한다. 맛은 좋지만 금세 변해버려서 에이 이 신숙주 같은! 이라고 부르다보니 숙주나물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선생님의 억양과 초록 칠판을(숙주나물의 어원이 진짜 이런지는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기억하고 싶어서), '금세'란 '금시에'란 말이 줄어들어 된 말이라는 고등학교 2학년 국어선생님의 글씨체를 이상하게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는 만나지 않는 사람의 생일을 지금도 기억하지만 그 사람의 생김새는 이제 흐릿해졌고 내겐 그렇게나 행복했던 시간이 누군가에겐 지옥의 동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곡으로 뽑는 이소라의 <바람의 분다>에도 이런 가사가 나오지 않는가. 

 

사랑은 비극이어라그대는 내가 아니다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오래 전부터 한 생각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쓴 편지를 받은 모든 사람을 찾아가 그것을 회수해오고 싶다. 그 순간의 감정들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아니다, 얼마쯤은 그렇다). 하지만 그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 그 날 것 그래도의 열정이 지금에 와선 뜨겁고 과하다고 생각해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생각이 나 이불 속을 파고들 때가 있다. 그래서였나. 없애달라고 부탁했던 책이 출간된 카프카를 동정한 적이 있고 때론 (그럴리도 없지만)유명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그러면 편지, 일기, 낙서 등이 모두 공개가 될테니. 점점 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정해진 것도 없고, 불멸도 없는 삶이라면 지나고 나면 타버릴 감정들로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찬란하지만 그 기억이 확실하지도, 진실되지도 않는다면 또한 참담하고 비참하리라는 생각에. 비극은 사랑 뿐만이 아니다. 기억이 다르게 적힌다는 것. 그게 기억을 잃는 것만큼 큰 비극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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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1-04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일이 있기도 하겠지요 누군가는 별로였는데 그걸 아주 좋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다 자신한테 좋게 기억하는 건지... 누군가와 기억을 맞춰본 적이 별로 없어서 다른지 잘 모르기도 합니다 저는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더 많은 듯해요 좋은 일도 있었을 테지만, 안 좋은 것들이 그런 걸 다 덮어버린 건 아닐지...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달라서 기억에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한테만 좋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그렇게 했는지, 그러지 못했을지도...

좋은 기억을 만들려고 하는 건 어떨지, 그건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제법 다독가에 가깝던 시절이 있었다. 다독가란 이런 사람이다 하는 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며 내 자신이 그 기준안에 부합하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독가에 가깝다고 에측할 만한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시절'일 뿐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허무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책을 읽지 않아서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책과 영화 정도는 평생을 걸쳐 좋아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진 탓이었다. 4월에 쓴 포스트에서 말했듯이 한 생을 걸쳐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는 삶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늘 그렇지만, 나는 늘 너무 내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면이 있었다. 기록을 뒤져보니 2015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2016년과 작년은 진정 암흑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단지 권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력과 기억력에서도 형편이 없던 시기였다. 다행히도 영화만큼은 꾸준히 보았으나 그건 위로라고 할 게 못되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는)영화는 책보다는 수동적인 매체이며 영화를 적게 보는 건 책을 적게 보는 것보다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적기 때문이었다. 즉, 나는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많다는 뜻이었다.


집중력과 인내심, 끈기가 사라졌다(아니, 사라졌다니? 내 안에 그것들이 있기는 했다는 게 우선 놀랍고 그 '있기는 했다는' 것들이 탈탈 털어 사라진 기분이 들어 암담하다). 친구의 생일을 잊어버리거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만졌으며 자고 일어나도 피곤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쓰는 행위가 번거롭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고 쓰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거지같았다.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표현력이 더 떨어졌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 관조적이고 회의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무기력감이 심했다. (모두 다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서도)전형적인 디지털 중독이었다. 이 말을 입에 담는게, 인정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이건 그냥 순도 백퍼센트의 부끄러움이었다). 그나마, 정말 그나마 스마트폰을 들기 전에 읽어둔 책마저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더 상황은 나빴을 거다. 

 

우리의 지능지수는 18세에서 25세 사이에 가장 높다뇌는 25세에 최대 크기가 되고이후에는 쪼그라들기 시작하여 무게가 줄고 빈 공간이 액체로 채워진다.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 경은 말했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감동적이고고무적인 업적은 25세 사이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창조성은 30대에 절정에 달한 뒤 급격히 쇠퇴한다사람들이 창조적인 성취를 해내는 것은 대부분 30대 때이다드가는 말했다. ‘25세에는 누구나 재능이 있다. 50세에도 재능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위안이 필요하다면 지식적인 면을 생각하자어휘력은 20세일 때보다 45세일 때 3배 풍성하다. 60세의 뇌는 20세 때보다 정보를 4배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 데이비드 쉴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우선 기억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기억은 나이가 든다고 굳어지는 것이 아니다나이가 들어서도 경험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상기한다면 그 기억들은 강화된다이때 일기와 시간이 아주 유용하다노화되는 두뇌는 기억의 보조도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나이 든 사람들은 단어를 잘 외우지 못한다그리고 어제 혹은 일주일 전의 일을 즉석에서 기억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낀다그에 반해 재인식을 하는 힘은 젊은 사람들만큼이나 뛰어나다어떤 단어를 기억에서 자유자재로 불러올 수는 없을지라도 단어를 본 뒤 그와 관련된 일은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대니얼 삭터는 체험한 것들을 메모해두거나 사진으로 찍어두라고 권한다원천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수단들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다른 한편 회색세포의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두뇌가 얼마나 빨리 노화하는지는 두뇌를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훈련은 뉴런의 기능을 개선해 나이가 들어서까지 높은 사유능력을 갖게 한다이는 최근의 방대한 연구들을 통해 입증한 사실이다가령 규칙적으로 강의를 듣는 노인은 별로 머리를 쓰지 않는 동년배의 노인보다 기억력이 월등히 좋다낱말퍼즐만 맞춰도 효과가 있다게다가 정신 활동은 알츠하이머병도 예방해준다자극은 두뇌의 노화를 늦춰어준다두뇌를 쓰지 않으면 40세부터 그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한다반면 일생 동안 두뇌를 사용한 사람은 나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간이 질주한다는 느낌이 덜할 것이다그들에게는 중년의 세월이 더 느리게 간다  - 슈테판 클라인,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가뜩이나 완벽한 인도어indoor인간인데 이러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이미 내 뇌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가장 창조적인 시기마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갈지도. 두려움이 가까스로 게으름과 권태를 밀어내기 시작했기에 힘을 돋우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다시 시작한다. 어릴 적 추리소설로 글을 읽는 재미를 배운 것처럼, 일단은 가볍고 '재밌는' 글부터 읽고 있고 독서 자극하는데는 다독가들의 기록만한 게 없는지라 책에 대한 책도 읽고 있다. 닉 혼비의 글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싶고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천천히, 다시, 책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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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0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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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실감하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다. 내 경우엔 조카가 자라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본 게 몇 년 전이구나 할 때 가장 절실하게 실감한다. 전자는 뿌듯함과 아련함과 다행스러움이 섞여있다면 후자에는 전적으로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스민다. 누군가가 어떤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부진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쉼없이 움직였지. 내가 이렇게 제 자리에 주저않아 있을동안.' 하고 생각했다. 선거 역시 따지자면 후자와 비슷하다. 벌써 총선을 몇 번, 대선을 몇 번, 심지어 보궐 선거에 투표도 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 제법 많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년 전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아침에 입었던 옷과 신었던 신발과 눈이 채 녹지 않은 곳을 밟으며 걸어갔던 그 냉기와 혹독함까지도. 후보자에는 늘 되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늘 나쁜 선택지만 고른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가 함께 견뎌야 할 투표의 결과가 혹독해 나는 늘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승리나 획득의 경험이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실감한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껏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도 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기는게 아니라 견디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우린 늘 나쁜 선택지만 뽑았으니까. 하지만 어렵사리 거둬낸 첫 걸음은 그 값만큼이나 무척이나 맛있었다. 과장하자면 황홀했던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어제 아침은 그 날 아침과는 달랐다. 아마 5년 뒤에도 어쩌면 그 뒤에도 역시 어제를 기억하겠지. 어제 입은 옷과 신었던 신발과 취임사를 보던 사람들의 표정과 비온 후 오랜만에 깨끗했던 공기까지도. "2017년 5월 10일, 대한민국이 다시 시작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울컥했을 때, 새삼 모두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산재해있는 문제는 너무나 많고 크고 무겁다. 반드시 돌아서는 사람이 있을테고 기다리지 못해 지쳐 떨어져가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발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다시는 방관자로서 혹은 회의론자를 가장한 비겁자로 지내지만은 않겠다. 적어도 나만은 그래야 한다고 어젯밤 생각했다. 맹신이 아니며 지지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나쁜 선택지만 뽑아왔던, 말이 안 되는 말만 들어왔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는게 그것이 대견할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새로운 시작, 하고도 첫 날이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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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아침엔 늘 부족하다. 저녁형 인간이라 평생을 그러해왔지만 요샌 새삼스러울 정도로 그 간극이 심하다. 밤에 깨어있다고 특별히 무얼 더 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늘 생각하는 건 졸려, 보다도 그냥 차라리 잘 걸, 에 가깝다. 멀뚱히 눈만 뜨고 괜히 책장을 뒤적거리거나 더는 정리할 것도 없는 서랍을 열고 닫는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걸까. 오늘은 진짜 진짜 안 마시겠다고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아침의 다짐은 밤이 쓰러트리고 밤의 결심은 아침에게 매일 패배한다. 


잠과 커피, 손거스러미와 두통, 무기력증과 허무함, 비어버린 열정의 잔, 미지근한 냉소의 그릇, 진심이 아닌 상냥함과 친절하지 않은 진실. 지독하게 얽혀 끝과 끝을 모르는 실타래를 풀어내기보단 그냥 통째로 몽땅 다 어딘가에 버리고 싶어진다. 며칠 전 본 영화 <라이프>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 게다가 그 웅장하고 비장하고 불온한 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오는 곡이 Norman Greenbaum의 <Sprit in the sky>라니. 비겁함에 느끼던 수치조차 사라진 밤, 잠이 오지 않는다.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When I lay me down to die 
Goi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Goi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I'm gonna go when I die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Prepare yourself you know it's a must 
Gotta have a friend in Jesus 
So you know that when you die 
He's gonna recommend you 
To the spirit in the sky 
Gonna recommend you 
To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you're gonna go when you die 
When you die and they lay you to rest 
You're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Never been a sinner I never sinned 
I got a friend in Jesus 
So you know that when I die 
He's gonna set me up with 
The spirit in the sky 
Oh set me up with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I'm gonna go when I die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I'm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 Norman Greenbaum, Spirit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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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0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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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4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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