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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적지 않게 읽었다. 대개는 작가의 아성에 홀려서였고 가끔은 그래,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하는 치기였으며 언젠가는 정말 이 책을 읽으면 글을 더 잘 쓰게 될까 싶은 의문과 더불어 얼마간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 몇은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글도 있었지만 대개는 체화하기 어려운 두루뭉술한 태도를 취하거나 자기 자랑이나 푸념을 하는데 그치는 식이었다. 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유명 소설가나 평론가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배움과 가르침은 전혀 다른 행위이며 선수와 코치는 길이 다르니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책 자체에 실망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종국에는 더 이상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지 않는데에 도달했다. 아마도 이들과 나는 재능의 총량이 다른가보다 또는 프로가 아니니 이 선까지만 하자 내지는 그래봤자 '내글구려병'에 걸린 체념 섞인 결론이었던 것 같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글쓰기의 왕도는 없다는 걸. 설사 그런 비법이 존재한다 해도 그건 글을 쓰는 본인만이 알아낼 수 있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좋은 장비에 먼저 몸을 맡기고 시작하고 싶은 초심자마냥 이렇다 할 조언에 매달린다는 별 수 없는 변명도. 그러니 미리 말해야겠다. 여기 세 권의 글쓰기 책을 골라오긴 했지만 이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진 않음을(일단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가 여전히 중언부언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들이 아주 적게나마 -의식적인 면이든 기술적인 면에서든- 인상적인 도움을 주었고 게다가 좋은 글쓰기 책을 만날 확률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그래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글쓰기 책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글쓰기의 세계는 새로운 도전자가 생긴다 해도 경쟁이 아니라 동종업계의 사람으로서 측은함과 동질감에 응원하게 되는 곳이라고. 글쓰기의 링에 오르는 자를 미워하거나 견제하기보단 응원하게 된다고. 


관찰한 것은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머릿속 하드웨어 용량은 매우 크지만 신뢰하기 어렵다. 신나고 자극적인 새로운 정보에, 키워드 위주로 넣어두었던 아이디어들은 금세 밀려나기 십상이다. 기록은 말하자면 하나의 외장하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주관이란 객관의 반대말로 볼 수 있는데, 객관이 모두가 봐도 다 똑같은 사실이라면 주관은 나의 시점에서 보이는 사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콜라 캔을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영어 스펠링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때로 그 주관을 통해 사람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새롭지 않다고 무시했던 분석의 영역이 열리는 경우가 있다. (중략) 롱테이크 스테디캠 신은 영화를 보는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기술적인 면이지만 거기서 ‘이어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비평적인 시선이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발견하면서 봄으로써 영화에 대한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 삶에 대한 태도까지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글 자체로 독립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 즉 플롯의 마술을 통해 놀라운 철학적 성찰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3월 다음 4월, 4월 다음의 5월로 이어지는 선조적 이야기 흐름 즉 플롯에 대한 관객의 상식과 기대감을 꺾는데, 이게 단순한 잔재주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삶, 의지에 대한 대단한 인문학적 발견을 담고 있다. 그 발견을 독특한 플롯 구성 안에 배치해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플롯의 왜곡은 단순히 사람들을 놀래는 데 멈추지 않고, 예견된 불행을 피하지 않는 의지가 바로 인간성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만약, 뒤섞인 서사적 트릭과 배치가 없었더라면 이 놀라움은 반감되었을 게 분명하다. 이렇듯 꼬여 있는 시간의 매듭을 푸는 것은 단순히 영화적 시간을 푸는 게 아니라 시간의 일직선상에 묶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존재론적 숙제를 푸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 왜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이야기가 플롯에 집중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시간에 매달린 존재이기에 영화와 이야기에서만큼은 시간을 마음대로 다루고자 한다. 슬로우 모션, 플래시백, 교차 편집과 같은 서사적 표현 방식엔 모두 이런 욕망이 담겨 있다.


때론, 그 나이에만 쓸 수 있는 글도 있다. 이 말인즉 지금, 쓰고 싶은 글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남겨놔야 한다는 것이다. 정서도 나이를 먹는다. 그래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나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글이 있다면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20대였을 땐, 돌이켜보면 경중의 우울증을 앓지 않았을까 싶게 매우 예민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 전부에 대해서 예민하다 보니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부족했고, 늘 어딘가 아프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플 때마다 그것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고 무조건 남겼다. 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때로는 선배들의 서투른 농담에 상처받기도 하고, 때론 나약한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더러는 관계 속에서 기진맥진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것들을 기억하고 싶었고 기록을 남겼다. 지금은, 그런 글들은 써지지도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렇게 예민하지도 않다. 더 이상. 그러니, 오늘의 감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강유정, 영화 글쓰기 강의


이 책은 먼저 '영화 글쓰기'라는 걸 명시한다. 글쓰기는 결국 일기와 카드 쓰기로 시작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단계적으로 글을 쓰는 법을 알려준다. 간단한 메모와 수집, 그다음에는 밑그림, 그 위에 긴 글을 쓰기 위해 맞춤법, 비문, 문장 배열 등의 기술적 방법과 미장센, 연출, 배우 등 영화의 무엇을 쓸 건지 다루는 식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자신을 울린 영화가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작품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을 테니. 모두가 정성일과 허문영처럼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물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영화에 대해서 한마디쯤 안 써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의견이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동진, 김혜리, 강유정 등의 글을 읽고 이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뜻이었는데. 정말 일목요연하고 쉽게 잘 썼네. 생각한 적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강유정 평론가의 문장이야 원래도 워낙 훌륭하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쉽고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태도가 절로 느껴지는데다 책을 읽고 나면 뭐라도, 어떤 영화에 대해서라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강유정 평론가의 책이 '영화 글쓰기'에 국한한다면 장강명 작가의 글은 '책을 내자'에 더 가깝다. 다른 두 권에 비해 긴 책이지만 글이 술술 읽히는 데다 개인적인 경험을 제일 많이 다루는 책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제일 넓을 것 같다. 물론 그저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 대뜸 '등단한 작가가 되기보단 앞서 저자가 되길 목표하라' 는 말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반드시 책을 출간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일단은 글쓰기에 한정하거나 아닌면 삶의 어느 영역에 비추어도 유효한 대목이 많은 책이다. 글쓰기는 취미로서도 창작의 갈래에서도 하물며 스트레스 해소에도 매우 좋은 방법이라면서 글쓰기나 저자를 꿈꾸는 데에 나이나 경력에 문제는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뻔한 말이지만 소재를 찾는 법, 메모를 관리하는 방법이나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 참고해야 할 책도 달라진다는 말에도 했다. 


문예창작학과든 글쓰기 교실이든 등록할 때에는 주변 눈치를 무척이나 의식하게 된다. 뭔가를 창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에 대해 현대사회는 나쁘게 본다기보다는 신기하게 본다. 남다른 예술혼과 번뜩이는 재능이 있어야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일로 여긴다. 그래서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몰래 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 자체를 포기해버린다. 예비작가들이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가 문제다.

슬픈 일이다. 창작의 즐거움은 매우 독특하고 크기에 한계가 없는 듯하기에 더 그렇다. 음식은 대체로 비쌀수록 맛있지만 창작의 기쁨은 도구의 가격에 별로 좌우되지 않는다. 대인관계에서 얻는 즐거움과 달리 창작은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만족감을 준다. 스포츠와 달리 운동신경이 둔해도 괜찮고, 종교처럼 자아를 지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온전하고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인간적인 영웅이 되는 길이다. 대단히 평화적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품고 있던 구상을 자기 손으로 정확히 현실에 구현하는 순간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통쾌했다. 기존 작업이나 주변 여건의 영향을 받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하지만 멋지게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것도 재미있다. 들인 시간이 길고 이뤄낸 바의 규모가 클수록 흥분의 강도가 커진다.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친 작업을 마칠 때에는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낚시가 취미인 사람에게 “낚시를 뭐하러 해요? 클릭 몇 번이면 싱싱한 생선을 산지 직송으로 배송받을 수 있는데”라고 따지지 않는다. 골프가 취미인 사람에게 “골프를 뭐 하러 치세요? 프로가 되시기에는 이미 늦었잖아요”라고 묻지 않는다. “프로 골퍼라도 에계 랭킹 100위 밖이면 일반인은 알지도 못하는데요”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정작 낚시나 골프 애호가들은 그런 질문을 받더라도 당당하게 대답할 것이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라고. 그 손맛, 그 희열을 느끼게 위해 하는 거라고.


다른 취미에 대해서도 그렇다. 틈틈이 바둑을 두는 사람, 기타를 치는 지인에게 우리는 그걸 왜 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냥 바둑을 좋아하는구나, 기타를 좋아하는구나 여길 뿐이다. 직장 동료가 댄스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멋지다고 응원해주지, 언제 아이돌로 데뷔할 건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책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그거 써서 뭐 하려고?”하고 스스로 묻고 “내가 그런다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며 자기검열에 빠지는 걸까. 그냥 내가 좋아서 쓴다는 이유로는 부족한걸까. 책 쓰기의 목적이 나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중략) 퇴근하고 틈틈이 하루 한두시간씩 바이올린을 연습해서 전문 연주자가 됐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취미로 바둑을 두다가 어느 날 한국기원에 가서 입단 대회를 치르고 프로기사가 됐다는 사람은? 주민센터에서 방송댄스를 배우다가 연예기획사의 눈에 띄어 발탁될 가능성은 있나? 아주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10년 가까이 피나게 노력해야 겨우 프로로 데뷔할 수 있는 분야들이 있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지 않다. 별다른 교육훈련 없이도 밤에 한두 시간씩 혼자 쓰다가 작가가 되는 사람이 있다. 많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지금 베스트셀러인 책들의 저자들 중에도 그런 작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런 걸 보면 오히려 작가는 아무나 할 수 있다. 바이올린, 바둑, 방송 댄스야말로 아무나 하면 안된다. 각오가 된 사람만 해야 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랬다. 서점 신간 코너에 가면 분노에 휩싸였다. 지인이 책을 냈다고 하면 관심 없는 척하면서 내용을 몰래 살폈다. 그 책에 신통한 데가 없으면 그때서야 겨우 안심했다. 결국 나무의 소중함 운운은 그냥 핑곗거리였다.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작가라는 거룩한 영예를, 다른 녀석이 제 값을 치르지 않고 길에서 주웠다고 여겨서 부린 트집잡기였다. 정의감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었다. 그 흉한 감정은 내 책이 나온 뒤에야 겨우 사라졌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비슷한 시기심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다면, 당장 책을 쓰는 편이 낫다. 최악의 경우에도 전과 다른 차원의 독서가로 거듭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어떤 부분이 어떻게 힘든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작품의 방법론과 기교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피아노를 칠 줄 알면 라흐마니노프가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형편없는 작품을 내고 괜히 썼다며 후회하는 것과 책을 아예 쓰지 않고 후회하는 것, 둘 중에서는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졸작을 써도 실력과 경험이 쌓이고, ‘다음 책’이라는 기회가 또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 기회도 없다.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세 권 중 기술적인 면에서 기억이 남는 책은 다음이다. 적잖은 작법서가 꾸짖듯 맞춤법과 비문, 번역 투의 오류 등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물론 비문과 맞춤법은 문장의 기본이고 고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쩔 땐 그 비문이나 그런 방식의 문장만이 말의 미묘함을 살릴 때도 있지 않은가. 예컨대 짜장면과 자장면은 어감이 다르고 '바람'이 표준어임을 알아도 '바램'이라고 표현할 때. 진부한 표현을 죄악시한다던가 긴 문장은 절대적으로 비문이나 나쁜 문장으로만 취급할 때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장문이 단문에 비해 많은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 건 사실이나). 이미 너무 대중화 된 말조차 무조건 순우리말로 고치라거나 줄임말을 금하는 등의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반면에 이 책은 상황에 따라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좀 더 자유롭게 쓰기도 가능하다는 말로부터 시작한다. 비문도 상관없고 장문도 괜찮다, 그냥 외래어나 신조어를 쓰라는 게 아니라 그 말이 그래야만 하는 근거가 확실하다면 기존의 통념을 깨고서 써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그러한 문장구조나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써야만 했던' 경우가 엄준하게 지켜져야 함은 당연한 전제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적’과 같은 표현은 일본이 서구 언어를 번역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쓰임새가 대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주 편리한 표현 방식이다. 그걸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중복일 때는 빼면 될 것이고. 다음의 예를 보자.


그 생각은 이상적이다.


이런 경우는 ‘-적’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상이라는 말은 개념만 있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것’은 존재한다. ‘-적’이라는 말을 ‘-스럽다’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이상스럽다’로 바꾸자는 건데, 정말 이상하게 느껴진다.


차별적인 대우, 압축적인 표현, 갈등적 관계


이런 경우라면 차별 대우, 압축 표현, 갈등 관계와 같이 ‘-적인’이나 ‘적’을 빼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렇지만 ‘차별적인 대우’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의미의 강도가 살짝 약해져서 ‘차별에 가까운 대우’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진부한 표현의 장점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 진부한 표현이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도 버리면 좋겠다. 진부해야 할 것은 진부해야 적시에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글을 쓰거나 읽을 때 의식의 흐름은 무척 중요하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리듬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끔 참신함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참신함’을 넘어 ‘기괴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꼭 좋기만 할까. 그렇지만 이런 아포리즘을 만들어 내겠다고 너무 욕심부리지는 말자. 몰입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지 않으면 그냥 편안하게 풀어 나가는 게 좋다. 아포리즘이 없어도 글의 전체 내용이 좋으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좋은 것’은 입소문으로도 퍼진다.          


어떤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자신은 어떻게 브레인스토밍을 하는지 어떤 자료를 뒤적이고 어디까지 찾아보고 고려하는지 직접 자세히 예를 들어 알려주기도 하고 본인의 글을 윤문하거나 인용하는 진솔함도 보여준다. 물론 메모의 중요성과 글쓰기의 의의를 언급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다시 말하지만 보통의 작법서에서 다루지 않거나 금기시 하는 것들을 개인적인 주장과 근거를 설명했던 점이 신선했으며 글쓰기의 동기보단 테크니컬한 부분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혼자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사라지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긴 시간 생각하다 보면 앞에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때도 많다. 메모라도 해야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물론 메모로는 충분치 않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되살리는 실마리’만 될 뿐이니까. 그것만으로 당시 생각을 제대로 기억해 내기는 어렵다. 완전한 문장으로 써 두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가 중요하다. 글로 써 두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셨던가요?’ 물어보면 대개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쓴 것’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생각의 흔적이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글이 자기 생각이다.


나는 즐거운 글쓰기의 순서는 이래야 한다고 믿는다.

(1) - 가슴 속에 할 말 만들기(또는 질문하기)

(2) -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정리된 자료 섭렵하기

(3) - 섭렵하는 동안 떠오르는 대로 메모해 두기

(4) - 스토리 윤곽 잡기

(5) - 쓰기 시작하기

(6) - 자료를 확인하거나 새로운 자료를 찾아가면서 쓰기

(7) - 다 쓴 글을 편집하기

(8) - 일단락되었으면 하루쯤 묵히기

(9) - 편집한 글 고치기(또는 다시 쓰기)

(10) - 교정,교열,윤문하기

개인적으로는 스토리 윤곽 잡기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런 방식이 처음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임을 알게 된다. 어떤 글을 쓰든 ‘자료 조사’ 과정이 축적되면서 미래의 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하다 보면 자료 조사 시간이 빨라지고 스토리 윤곽도 쉽게 잡힌다. 이러한 과정을 오래 거친 사람이라면 짧은 글의 경우 2~3일이면 써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소모적인 글쓰기가 되기 쉽다. 이건 무척 중요한 문제다.


몰입해서 쓰다 보면 다 쓴 뒤에도 그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이 말로 번역될 때 쓰인 말 하나하나에 감정이 붙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착각이다. 글은 차가운 기호일 뿐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말라 버리는 물기 같은 것이다. 몰입했을 때는 상당히 주곤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초고는 독자에게 잘 전달되기 어려운 주관적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주관의 물기가 마를 때쯤 다시 읽어 보면 고쳐야 할 것들이 보인다. 갓 쓴 뒤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적어도 다섯 번 정도 거치기를 권한다.                       - 강창래, 위반하는 글쓰기 


사실 세 권의 책 모두 글쓰기 초보를 위한 글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글을 써 본 사람, 비평이나 평론도 이미 시도해봤으며 어쩌면 창작을 해본 사람들. 평균보다 글 좀 쓴다는 소리는 들어봤으나 스스로에 확신이 부족한 이들. 운 좋게 좋은 글을 쓸 때도 있지만 그게 매번은 아니라서,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이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주저하는 '링에 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글에 가깝다. 게다가 -당연한 말이지만- 여태껏 그래왔듯 저자의 글에 감탄해서 이 책을 읽는다한들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며 앞서 한 말을 반복하자면 작법서를 읽는다 하여 실제의 글쓰기 실력(실력이라 부를 수 있다면)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읽다보면 문득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들도 늘 힘들구나 하는 치사한 안도감이기도 하고 나는 왜 여기서 글을 쓰려고 하는건가 괜한 자괴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래, 뭐라도 써보자. 어떻게든 써보자.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하얀 화면을 마주하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마 이 페이퍼를 읽는 이들은, 위의 책들을 검색하는 사람들이라면 링에 오르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모두에게 조심스럽게 권한다. 어쩌면 이 책이 링으로 향하는 계단이 되어줄 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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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쓰는 글쓰기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재밌있다. 사실 재밌을 수 밖에 없다. 일단 이런 책을 썼다는 것부터 저자가 유명작가라는 방증이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글쓰기에 관한 책을 쓸 정도의 유명한 작가'들은 대개 좋은 문장가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떤 논지의 글이든 대체로 재밌고 유익하며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창작자란 근본적으로 깊이 없는 자기혐오와 근거 없는 자기애 사이에서 널을 뛸 수 밖에 없다는 설득과 마법의 묘약은 없다고 저자가 말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불을 키고 그 책 안의 마법의 묘약을 찾는 내 자신에 대한 저열함, 어쨌든 그들은 삼십 말의 구슬을 꿰고 꿰어 훌륭한 진주목걸이를 만들었다는 걸 알기에 내가 그들에게 동질감을 가져봐야 삼성회장이나 나나 똑같은 갤럭시 폰을 쓴다는 것 정도의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자괴감 말이다. 게다가 온갖 작법서를 뒤적여봐야 좋은 캐릭터를 만들어라, 첫 챕터를 잘 써라, 초고는 원래 10%밖에 남지 않는다 등등 모두가 알지만 아무나 흉내내기 힘든 맛집 같은 이야기를 하니 어째 좌절감만 심해지고 이렇다 할 도움은 되지 않는다.  


 

  먼저 두 종류의 스케치북이 필요하다큰 것작은 것큰 것은 댐 전체의 조감도마을지도도로와 주변 지형 등 큰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하다큰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반복해서 그리면서 수정을 하고수정이 끝나면 그림 속 동네가 우리 동네처럼 익숙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마을 진료소를 생각하면그곳이 어디에 있는 어떤 건물인지 자동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작은 스케치북은 세밀화를 그리는 데 쓴다집 안 구조나방 구조장면이나 상황인물의 동선 등소설을 끝낼 때까지 그려야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예를 들어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후호수에 유기하는 장면을 쓴다고 하자주변 사물의 상태자동차의 깨진 유리창전조등의 각도 등을 하나하나 그려가며 세령과 현수의 동선을 순서대로 정리해둔다.


의도하건의도치 않건소설에는 작가의 일부가 녹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과거든현재든사고방식이든성격이든이는 독자가 알고 있고 독자가 안다는 걸 나도 안다때문에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허세를 떨고 싶은 때가 있다나를 무식쟁이로 볼까봐폭력적인 성격으로 단정할까봐비겁한 찌질이로 여길까봐그럴 때마다 생각한다작가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고세상 모든 것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는 진지한 존재도 아니고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일 뿐이다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위선을 떨게 된다독자는 작가의 위선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위선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차라리 악당을 좋아할지언정누구나 그렇지만특히 작가에게는 솔직함이 중요한 미덕이다.


단어 선택과 문단 구성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동사는 수식어의 도움 없이 스스로 땅을 딛고 설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걸 고른다. ‘뛰다보다 속도나 모양새의 속성을 담은 내닫다’‘치닫다’‘쇄도하다같은 동사를 선호한다. 이런 동사를 쓰면, ‘빨리뛰었다, 라고 쓰지 않아도 된다. 형용사는 아껴 써야 한다. 남용하면, 독자에게 작가가 원하는 느낌을 받도록 강요하는 꼴이 된다. 패션도 포인트가 지나치면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나. ‘아름다운 꽃이라고 쓰는 대신 꽃의 모양이나 색깔, 주변과의 조화를 묘사하는게 낫다. 아름다움은 독자가 알아서 느끼도록 남겨두시고.(중략) 부사는 항생제 같은 거다. 한두 번은 확실한 효과가 있지만 자주 쓰면 내성이 생긴다. 가령 너무라는 부사를 습관처럼 쓰면 정말로 너무한 일에 썼음에도 전혀 안 너무한 일처럼 느껴진다. 문장이 야단스러워지는 면도 있고.


그런 면에서 정유정 작가의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꽤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근거로 추정컨대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별다른 과장을 하지 않는 편이다문학의 숭고함을 강요하지도 그것의 지난함을 과용하지도 않는다자신의 경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지도 않으면서도 은근한 웃음으로 영업비밀을 숨기는 맛집처럼 굴지도 않는다허황된 예를 늘어놓는 대신 본인의 작품 속 본인의 문장을 인용해서 말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경탄하거나 힐난할 필요도 없으며 막연한 예시가 아니라 사실적인 이해를 돕도록 한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어떤 곳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시치미를 떼는 대신 스티븐 킹요시다 슈이치켄 키지레이먼드 챈들러 등 감흥을 받은 작가들을 가리지 않는다자신이 썼던 책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샅샅이 밝히고 그러면서도 인칭이나 묘사문장의 구조 등 모든 작법서에 등장하는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소재를 얻는 방법, 소재를 얻은 후 플롯을 구성하는 방식, 인터뷰를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 등에 대해서 대부분의 작가 혹은 작법서에서 -고의이든 아니든- 빠뜨리는 부분을 꼼꼼히 기록한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과정을 따라 봐야 동등한 글을 반드시 쓸 수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냉담하고 예리한 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의 위치는 좀 애매한 편이다. 작가 혼자 일방적으로 원고를 써낸 구조가 아니라 인터뷰 형식인지라 상대적으로 덜 지루하며 이야기의 논조를 바꾸긴 쉬운데 대신 진짜 이런 대화를 문어체로 주고받았나? 너무 작위적인 대화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 부분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선 내가 작가와 저자편집자가 아니니 뭐라 할 순 없지만 약간 불편한불안한 부분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어디서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글쓰기의 과정에 대해 들을 수가 있을까. 태반의 강의와 작법서, 작가들의 글쓰기 노트에선 볼 수 없었던 내용이 이 책 안에 담겨져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되거나 혹은 글을 더 잘 다루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느 부분이든 유효한 면이 있을테니 한 번쯤은 읽기를 권하는 바다. 


자, 하지만 이렇게 친절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친절하기에 더더욱- 우리는 위축되고 주눅이 든다. 플롯을 다루고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주어와 동사, 형용사와 부사와 목적어를 붙이는 방법을 알고 백 날 스티븐 킹의 글을 필사해봐야(심지어 그의 책들을 길다... 너무... 길다......) 작가는 커녕 의미있는 글조차 쓰지 못할거란 겁을 먹는다. 자기애나 자신감 대신 자기혐오와 자기비하에 시달리고 결국엔 쓰고 싶었던 내용조차, 주제나 문장은 커녕 소재의 끄트머리조차 붙잡기가 힘들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 읽기나 할까? 읽히지 않을 글을 대체 무엇 때문에 쓰려고 하는가? 달음박질 친 영감을 따라잡긴커녕 제 자리에 서서도 밭은 숨을 쉬게 된다. 

 

 

  나는 당신이 글쓰기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하고 싶다느낌과 상상력과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 다른 창조적인 일도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당신이 쓰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당신은 무언가를 배운다글쓰기는 당신에게 유익함을 주고당신의 이해를 확장시킨다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설령 내 글이 앞으로 다시는 출판되지 않을 것이며그것으로 단돈 한 푼도 벌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나는 기꺼이 계속 글을 쓰겠다.


영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영감은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온다. 당신이 글쓰기를 시도한다고 해보자. 아마 첫날에는 그다지 많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타자기나 종이 앞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한두 시간쯤 아무 생각 없이 머리카락만 쓸어 넘길 것이다. 전혀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좋은 일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다만 당신은 줄곧 타자기 앞에 앉아있어야 하며 공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조만간 무언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 또한 당신은 내일도 잠깐 틈을 낼 것이고, 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영원히 언제나 그렇게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은 재능이 있고 독창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랫동안 뚫고 나오지를 못한다. 사람들은 너무 겁을 내고 너무 자의식적이고 너무 자존심이 세며 너무 부끄러워한다. 그들을 구성, 줄거리, 통일성, 전체, 일관성 등에 관해 지나치게 많이 배운 것이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쓴 글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이다. 그건 도달하기 어려운 먼 곳까지를 볼 수 있는 시야를 당신이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 글을 쓰라고 다독이는 작가들은 대개 유명하고 성공했으며 대단한 문장가들이다. 마크 트웨인, 스티븐 킹, 레이먼드 챈들러, 조지 오웰,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 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를 읽어봐야 한숨밖에 터지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브렌다 유디트의 『글을 쓰고 싶다면』은 부담을 훨씬 덜어주는 책이다(그렇다고 저자가 덜 유명하거나 문장이 덜 훌륭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앞서 말한 작가들이 쓴 글들이 대개 '내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등에 대해서 개인적인 관점에서 마치 회고록처럼 접근하는 것과 다르게 이 책은 나와 너, 얘와 쟤가 가진 모든 불안에 대해 보편적으로 접근한다. 영감을 얻을 수 없다고 믿는 잘못된 괴로움의 어리석음이나 내 문장이 읽히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누군가 비웃을 수도 있다는 망설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씩 내딛는 용기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실패자이며 앞으로도 실패자이니 그 실패가 모두 의미없는 것은 아니라는,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뻔한 말들을 믿게 하는 묘한 진솔한 힘이 이 책 안에 있다. 물론 허황된 일반론적인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라 실존인물과 주변인이 쓴 글과 본인의 글을 인용하는 등의 예시를 통해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이상하게도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뭐라도 쓰고 싶고 느끼고 싶고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그 소망을 충동질한다는 면에서 이 책은 꽤 소중하다.


물론 이 두 권의 책을 읽는다고 갑자기 놀라운 문장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런 기적은 이 두 권 뿐 아니라 어떤 책을 읽는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들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길 바라고 그 마음이 실현으로 옮겨질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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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그것이 바로 틈새였다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던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그러나 그들은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그들은 멈출 수도 없고멈추려 하지도 않았다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번째 죽음 같았다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아래로저 아래로 내려갔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일 년의 나머지 절반이 머무는 6월이다. 그것도 벌써 유월의 사흘이 지나갔다. 지난 달은 행사도 많고 연휴도 있는 날이라 그런지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쏜살같이 지나간 기분이다. 필립 로스의 타계 소식을 들은 지 열 흘도 훌쩍 지났지만 미처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책은 대여섯 권 읽었고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 책이 나오길 기대하고 기다리곤 했는데. 더 이상은 '새 책'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헛헛하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필립 로스. 보내는 구절은 그의 소설 중 단연코 제일 좋아하는, 그리고 모든 소설을 통틀어 아마도 손꼽아 좋아하는 책인 『에브리맨』에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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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 아니, 생각이 났다. 지금 머릿속을 부유하는 책은 뭘까. 절대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달의 궁전』이고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였으니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뉴욕 삼부작』일 가능성도 있다. 발밑에 뽀득뽀득 밟히는 눈과 넘어지지 않으려 펭귄처럼 걸어야 하는 겨울날에 읽기에 폴 오스터는 적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적어도 현재의 기준에선 그렇다. 날씨 때문이라면 러시아의 대문호들의 것을 읽어야 할 것이고 이 우울하고 파괴적인 감정에 걸맞으려면 이언 맥큐언을 읽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곳에 배를 깔고 누워 코지 미스터리를 읽어도 좋고 정반대의 날씨를 경험하고자 남미의 작가들을 읽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어찌됐건 읽고 싶은 글이 있고 생각나는 책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거기에 읽어 온 기억 때문에 머릿속에서 글귀를 헤집어야 한다는 것 또한. 어찌됐건 읽어온 책들이 머릿속 안에,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든 감춰있든 하기에 떠올랐을테니. 시작은 폴 오스터였지만 끝은 그러니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퍽 새해에 어울리는 다짐이었다. 


지난 달에는 오랜 티켓을 정리했다. 인쇄된 글자가 날아가 몇 개는 아예 보이지 않았고 3년 전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은 5년 전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엔 기억이 생생한건지 아니면 내가 매일을 그저 그런 날로 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추위 속에 찾아간 미술관도 비를 홀딱 맞고 들어간 서점도 땡볕을 걸어 보고야 만 영화도, 그 구질구질한 날씨들은 예상보다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남은 것은 미술관에서 본 그림의 파장과 그 날 서점에서 만난 책이 집에 있다는 사실과 땡볕 속에서 보고 나온 영화가 (이른바) 인생 영화가 되었다는 것 뿐이다. 많이 보고 열심히 읽고 꾸준히 쓰고 잊지 말고 기록해야 하는구나. 아, 그래서였나보다. 매일 찍는 사진의 파노라마,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었던걸까. 하긴 <패터슨>을 보며 늘 같은 루틴을 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실인가, 성실이란 얼마만큼 놀라운 재능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었으니 그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가 분명하다. 


어찌됐건 폴 오스터가 읽고 싶은 오후다(그러나 발췌한 문단은 『달의 궁전』이다. 단언컨대 이 장면 때문에 이 책을 좋아하게 됐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거기에는 소설과 희곡역사책과 여행기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나에게 있어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 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같은 글을 읽고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폴 오스터달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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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1-11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달의 궁전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Shining 2018-01-12 22:25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설레는 말이네요. 이 글을 읽고 책을 읽고 싶어졌다는 마음이요(흐뭇) :)
 


 

현재 헐리웃은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파문으로 매일매일이 시끄럽다. 그는 커리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여자들만을 상대로 이런 일을 자행했으며 자신의 주변인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중에서도 남자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행동해왔다. 그의 폭력을 고발하려는 여자들은 꽃뱀 취급을 받았고 커리어가 끊겼으며 취재를 한 로난 패로우의 용기는 어머니의 지지를 등에 업은 금수저의 치기처럼 치부되었으며 로난 패로우가 소속된 NBC는 이 일을 덮으려고 했던 증거가 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헐리웃 내에 든든한 연줄이 있는 기네스 펠트로나 안젤리나 졸리, 로잔나 아퀘트, 케이트 베킨세일 등도 그 타깃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른바 쟁쟁한 금수저라고 불리는 카라 텔레빈과 레아 세이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많은 피해자들은 힘이 없고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돈이 적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더 쉽게 타깃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 또한 얼마나 무력하고 수치스러운데 심지어, 하물며 그것조차 아니었다. 여자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하다못해 재력과 지위와 유명세조차 젠더폭력 아래의 있다는 것은 허망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만행은 와인스틴 집안의 경영권 싸움의 영향으로부터 번졌을 거라는 사실과 그의 공고한 카르텔을 유지했을 수많은 프로듀서들, 감독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는 점이다(레아 세이두의 지지문으로 짐작컨대 결코 적지 않은 남성들은 이 문제를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명명백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한 올리버 스톤은 벌써 세 건의 성희롱으로 고발되었으며 지지발언을 한 벤 애플렉과 로버트 로드리게즈 역시 성폭력 가해자로 추가 고발이 들어오고 있다. 제인 폰다의 증언으로는 장 뤽 고다르를, 레아 세이두의 발언을 토대로 압델라티프 케시시 역시 영화를 이유로 희롱과 착취를 하는 행동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헐리웃의 관행이라고 보일 정도로 줄줄이 이야기가 들려오는 중이다). 남배우들 역시 다수가 침묵하고 있음에도 화살은 여배우들에게 향한다. 당신은 정말 몰랐느냐, 당신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몰랐을리가 있냐, 그 당시에 짐작하는 부분이 있다면 왜 말하지 않았나 등등. 침묵한 언론과 음험한 방관자들과 직접적인 가해자들을 두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사상검증을 행하고 있다. 심지어 남배우들을 간단한 지지발언에도 "멋있다"고 찬양하면서 여배우들은 비겁자라는 낙인을 찍어 연대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대체 왜 피해자의 행실을, 옷차림을, 연기력과 커리어를 따지는지 피해 젠더인 여성배우들에게만 촉각을 곤두세우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비상식과 불평등과 폭력적인 세상의 장관을 보고 있으니 점차 내가 비정상인건지 의심하게 될 정도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내가 최근 내린 답은 이렇다.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행동해도 되니까.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력을 저지르곤, 쉽게 잊고 산다. 가해자는 자신이 한 일을 몰라도 되는 입장이다. 그래서 항상 피해자가 폭력을 증언해야 한다.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특히 남녀 구도의 폭력 사건이 있을 때면 대다수 사람은 개인적인 일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한다. “여자가 그럴 만했겠지.”“그러게 왜 그런 놈을 만나서. 남자 보는 눈이 그러니...” “여자가 처신을 잘 했어야지.” 이러한 시선을 매일같이 반복되는 젠더 폭력을 여전히 사적인 일로만 치부하게끔 한다.

 

카라 텔레빈은 그의 추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노래를 불렀고 자신이 배역을 따낸 후에도 근거가 그 날의 시간 때문일까봐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레아 세이두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했고, 제인 폰다 정도 되는 유명세가 있는 사람조차 두려워서 지지 발언을 할 수 없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인터뷰했다. 왜 항상 피해자는, 여성을 자기 검열을 해야 할까. 성적 추행은 물론 성폭력을 당한 후에도 여성은 자신의 처세를 돌이켜본다. 내가 여지를 주지는 않았는지, 오해를 하는 행동을 한 게 아닌지,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증인이나 증거가 있는지, 내 옷차림이 단정했는지, 술에 취하지 않았는지, 새벽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지, 상대방의 차나 집 근처가 아니었는지, 어둡고 낯선 곳에서 일어난 일인지 등등. 그 모든 것을 고려하는 사람은 피해자다. 용기를 내 고발을 하거나 고소를 하면 '꽃뱀'으로 취급받고 반대로 고발이나 고소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추행이나 희롱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심지어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나 합의된 성관계를 한 '싼 년'이 된다. 상처를 치유하기는 커녕 그것을 내놓은 것조차 사회의 이해가 필요한데 당연히 사회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고분고분한 대상을 찾는 심리는 ‘내 뜻을 거스를 때 혼낼 수 있다’는 당위를 전제한다. 상대가 여성일 경우 으레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의 특성을 일컫는 ‘맨스플레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단지 ‘가르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가르칠 수 있다는 불평등한 구도 자체가 폭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맨스플레인이 대중적인 언어가 돼서 대화를 하다가 “아, 내가 또 맨스플레인했네”라고 말하는 남자가 많아졌다. 문제는 ‘말’만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식을 성찰하고 변화하려는 노력 없이 “내가 또 맨스플레인 했네. 이렇게 말하면 또 맨스플레인으로 보이나?”라는 손쉬운 반응은, 결국 자신의 상황을 희화시키며 권력관계는 그대로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반영한다.

 

택시를 탈 때 남녀가 느끼는 온도 차에 관한 글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택시에서 카드로 요금을 지불할 때 택시기사에게 욕을 듣는 경우가 많아서 카드를 내밀 때마다 눈치 봐야 했다는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그런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남녀 모두가 놀랐다. 나도 항상 택시를 타고 카드를 내밀 때면 “죄송하지만 제가 카드밖에 없어서요...”라며 미안해했다. “아,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카드야. 아휴. 현금 없어요?”라고 따지던 기사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던 거다. 어쩌다가 “아니, 그게 왜 죄송한 일이에요. 당연히 카드도 되죠.”라고 말하는 기사를 만나면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당연히 카드 결제가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었다니?

여기에서 의심 없이 ‘우리’라고 믿어왔던 집단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이 사안에 대해 남자들은 카드로 지불하는 건 손님의 ‘권리’가 아니냐고 말했다. 누군가는 ‘권리’로 당연히 누려왔던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그전까지 서로 몰랐다.

 

뉴스에선 곧잘 여성상위시대라며 떠든다. 근거는 공무원 임용 비율이나 의,약학대 합격률이나 사관학교 수석 등이다. 인류의 성별sex는 현재까진 두 가지다. 여성 아니면 남성. 세계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예수의 탄생부터만 따져도 2017년동안 남성이 늘 앞서왔다. 이제와 몇 해 여성이 앞서면, 그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자꾸만 떠들어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많다면 그게 어떤가. 여성도 남성과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게 무슨 국가적 위기라도 되는 것처럼, 요즘 여자애들은 기가 세서 아들들 기가 죽을까봐 걱정이라는지 참 예민들도 하시다. 적어도 상위시대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과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한다던가 한 시대decade 정도는 내리 독점한다거나 아니면 암묵적인 가산점을 받거나 해야 하는게 아닐까. 여전히 기업은 같은 성적임에도 남성을 여성보다 선호하고 여성들에게 결혼을 할 건지 말 건지와 아기는 안 낳아야 너의 커리어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각인시킨다(남성의 경우엔 기혼이 될 것을 기본값으로 두거나 아이가 생기면 오히려 퇴직하거나 이직할 가능성이 적게 점쳐지므로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단다).

 

살림살이가 지저분한 남성은 결혼할 때가 된건데 요리도 잘 하고 깔끔한 여성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에서조차 이야기한다. 아이를 안 낳는 게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며 내가 낳은 아이가 무슨 세금 대신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한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그렇게나 관심이 있는 사회는 아기를 낳은 후에 나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를 낙태한 여자는 악마보다 못한 년이 되는데 같이 아이를 만든 남자는 도망가고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그래놓고 자신의 여자친구가 낙태를 하면 신고를 하는 남자가 적지 않단다).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면 남편 등골 휘게 하는 게으른 여자가 되고 맞벌이를 하면 아기를 남의 손에 키우는 모성애 없는 여자가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남편이 된 남자와는 상관이 없다.

 

그룹 내 절반의 인원이 나머지 절반을 차별하고 폭행하고 착취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화를 내겠지만 그것이 남성이고 여성이라면 '아니'라고 한다. 난 내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그녀를 때린 적이 없으니까. 엄마가 있고 여동생도 있으니까. 딸을 낳고서야 여성 인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전까진, 자기가 본 모든 여자들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나 진배 없다.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염산을 붓고 때리고 죽였다고 해도 여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이유'룰 찾으려 든다. 여자를 강간하고 성희롱하는 건 '일부 남자들'인데 나를 '일부 남자들'에 포함시키는 건 내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라고 펄쩍 뛴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당신이 여자를 안 때리고 안 죽인 걸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건가.

 

이 책의 이야기는 사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그것을 진폭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당신의 경험의 차이다. 정말 운이 좋게도 성차별이나 희롱에서 꽤 벗어나서 살아왔던 나 자신조차 '아, 그런 분위기 알지.'라거나 '그런 순간들이 있지.' 라는 생각을 했으니 당신에게 아픔이 있다면 이 책은 어쩌면 상처위에 뿌려진 소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눈물이 찔끔 날 수도 있다. 분노와 좌절과 무력감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을 덮은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아픔을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극복할 수 있음에 대한 먼지 같은 희망과 연대 같은 것 말이다. 읽으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고 슬퍼씅며 이것을 '여자들끼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한밤중에 씩씩대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인류의 절반이다. 우리도 사회의 구성원이며 같은 국민이며 똑같이 세금을 내고 의무를 지고 권리마저 갖고 있다. 그런데 왜 늘 우리만 다치고 무서워하고 설명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하며 우리끼리만 웅크려서 연대해야 하는걸까.

 

“페미니즘이 대체 뭐예요?” 우리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종종 묻는 말이다. 얼핏 페미니즘을 알고 싶어서 묻는건가 싶지만, 뒤에 붙는 말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페미니즘이 대체 뭐기에 남녀 간 대립을 조장해요? 나 보고 (여성)혐오한다고 할까 봐 요즘은 말 한 마디도 편하게 못 하겠어요. 혐오라는 말은 마치 벌레같이 느낀다는 건데, 저는 정말 여자친구 사랑하거든요. 성희롱이나 성차별도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잖아요. 약자의 문제, 권력의 문제. 근데 꼭 성별을 부각하는 건 남녀 갈등만 조장하는 거 아닌가요? 직장 상사 여자에게 성희롱당하는 남자도 있잖아요. 남자도 강간당해요. 그런데 왜 여자만 피해자라고 생각하지요? 여자는 약자가 아니에요.”

이쯤 되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여성혐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여자를 싫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애초에 ‘갈등’을 절대 악으로 여기는 전제까지. 듣다 보면 상대방이 페미니즘은 물론, 요즘 핫하다는 여성혐오에 대한 개념도 공부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문제에 답하길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 정도다. 기초부터 하나하나 알려주거나, 좋은 책을 소개해주거나, 바쁜 척하거나. 에너지가 가장 많이 쓰이는 건 물론 첫 번째 방법. 하지만 막상 여성혐오가 뭐고 어떤 게 문제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대방은 으레 “여자도 남자 몸 쳐다보잖아요”“여자도 남자 혐오하잖아요”라며 몇몇 예시를 들면서 모든 것을 해명하길 요구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본적인 책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면, “페미니스트들이 공부하라면서 가르치려고만 드니까 나 같은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거예요”라며 역정을 낸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 없어요”라는 대답도 자주 돌아오는 멘트다.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대화를 그만두려 하면 이러니까 페미니즘이 반감을 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난 일주일 동안만 무려 네 번, 일방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손님이 찾아왔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스스로 페미니즘이라는 공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질문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무척 당당하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을 모르는 건 ‘일반인’인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고, 알기 위해 찾아온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배우려는 자세 없이 따지듯 묻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적이다. 그러면서도 내게 요구하는 태도는 한결같다. ‘외면하지 말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달라.’            - 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꽤 긴 발췌문이었지만 정말 너무너무 공감이 가는 문장들뿐이라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매너가 있다는 사람들조차 굉장히 시혜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어디 한 번 말해봐라, 라는 식으로 굴 때가 있다. 그게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라는게 씁쓸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우리의 대부분이 돈이 적어서, 집안이 평범해서, 그들보다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할 더 큰 가능성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국의 헐리웃의 그녀들조차 자신들만의 폭력에 갇혀 살아가고 있었다. 내 자신이 뭐라고, 나보다 훨씬 좋은 처지에 있을 그들을 동정하려는게 아니라 그저, 예상 외의 무력감과 환멸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능력과 재력과 지위와 위치와 무관하게 여성은 늘 젠더폭력에 약자라는 것을. 그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한은 늘 끝없이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수치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막막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끝으로 문유석 판사의 칼럼 중 인상적인 꼭지를 하나 첨부한다(http://news.joins.com/article/20737388). 그의 이야기처럼 앞으로 더 불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지' 불편하다는 마음만을 느낀다는 것이, 그 어리석은 순진함이 솔직히 부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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