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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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때 그 곳을 기억하니. 황량하다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작업실. 너는 겨울동안 그림에 매진해있었기 때문에 말끔한 손은 언제나 물감이 묻어있기 일쑤였고 그것을 발견하는 건 이상하게도 늘 나였어. 그래서 나는 여분의 손수건을 두어개씩 챙겼던 것을 기억해. 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리는 네 등 뒤에 있는 소파에서 책을 읽었지. 방해가 될까봐 자세도 바꾸지 못한 채 숨죽여 있었지만 너는 그 모습을 보고 놀리듯이 웃었어. 네가 타준 코코아를 홀짝이며 먼지 낀 나무창틈으로 들어오는 아이보리색 햇살에 의지해 책을 읽다 지쳐 잠이 들면 언제나 너의 코트가 덮여 있었어. 물감과 목탄과 종이냄새, 네가 쓰는 향수가 섞인 뭐라 하기 어려운 네 냄새. 날 깨우는 건 시간이나 잠의 양이 아닌 그 냄새였어. 

 

그곳도 기억하겠지. 내가 굳이 우겨서 갔던 처음 가 본 겨울의 바다. 그 해 가장 추웠던 날, 하필 바다를 고른 나는 울상이 되었지만 누구도 한마디 책망이 없었지. w만이 가끔 이죽거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을 뿐이었어. 결국 독감에 걸려 돌아왔지만, 소금기조차 사라진 듯한 그 바다냄새는 지금도 기억해, 놀랍게도 말야. 우리 중 누구도 그날, 아니 여러 날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어. 묘하게도 하나같이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는 아마 우리는 현재를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 거야. 사진을 담는 것은 과거가 될 때를 대비하는 거라고, 우리는 서로의 현재이자 역사가 될 터이니 굳이 과거를 남길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오만하게 말이지. 그래서 w가 외국에서 사진을 잔뜩 찍어 보냈을 때 나는 많이 놀랐고 아주 조금 배신감 비슷한 걸 느꼈어. 색채가 두드러진 과일이 잔뜩 실린 시장과 등(燈)이 예쁜 야경,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진 수평선에 걸친 해를 본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더라. 그리고 다시 그 사진을 보지 않았어.

 

 

며칠 전 한 소설을 읽었어. 누군가의 병실을 지키는 자리에서였어. 그는 이미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웠기에 나는 마치 스스로가 식인상어이거나 저승사자가 된 것 같았어. 조금만 애를 쓰면 나도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몸이었어. 꺼끌꺼끌한 숨이 붙어서 가슴은 가쁘게 움직이고, 눈에는 총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는데 식사 시간과 겨우 몇 분을 제외하고는 그마저도 늘 감은 채 잠들어있었어.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밥을 먹었고 때로는 잠이 부족해 졸기도 했어. 갈퀴 같은 손을 붙잡고 억새풀 같은 머리카락을 넘기기도 하고. 건강한 내 몸이 다행스럽고도 부끄러웠어. 그래, 건강했으니까 그 덥고 두툼한 공기를 견디지 못해 잠시 휴게실로 나왔지. 고작 오 분여 남짓이었을 거야. 그런데 그 사이에 환자가 깨어나서 움직이면서 팔에서 링거가 빠졌던 모양이야. 병실로 돌아갔을 때는 검붉은 피가 눈물처럼 떨어지고 있었어, 이미 바닥이 흥건했지. 급하게 간호사를 불렀고 그녀가 링거와 바닥을 정리해주고 돌아갔어. 환자는 다시 잠이 들었고 환자의 발에 묻은 핏자국을 닦다 보니 내 손도, 신발도 피투성이라는 것을 알았어. 물티슈를 이용해 조심스레 닦아내는데 나는 울고 있더라. 놀라서, 무서워서였을까. 그래, 어쩌면. 하지만 두려워서는 아니었을까.

 

그 병실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어. 거친 숨과 지나치게 따뜻한 난방, 핏자국을 닦은 라디에이터와 분홍색이 되어버린 물티슈 사이에 앉아서 책을 읽었어. 왜 하필 이 책을 가져왔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곳에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그냥 읽기로 했어. 아주 천천히 잠이 들 것처럼 읽었는데도 환자는 여전히 깨지 않았어. 책을 덮고 눈두덩을 만지며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겠니. 너의 기억과 책과 병실의 이야기 사이에 대체 어떤 것들이 빠져 있거나 더해졌는지. 실은 나는 잘 모르겠어. 어떤 것이 어느 것을 불러일으켰는지, 무엇이 무엇을 가르켰는지. 그저 ‘그리고’ 너에게 편지를 써야한다는 생각뿐이었어. 너는 무엇이든 빨리 이해하고, 언제나 논리적이었으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인과를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병실에 있었고 책을 읽었고 너를 생각하다 편지를 쓰고 있어.

 

 

내가 읽은 책은 한강의 소설이었어. 『희랍어 시간』이라는 제목이야. 한강의 신간이 나왔다고, 그런데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가늘게 떴어. 뭐라고 할까, 제목에서부터 벌써 고된 느낌이 들었어. 형형한 풍경 그러나 헛헛한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 대외적으로 풀어보면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야. 아니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어. 다만 만나게 되지. 빛을 잃어가는 와중에, 말을 잃어버린 후에. 그냥 그 상태로 거기 있는 상대를 발견해. 격정적인 멜로나 신파 같은 건 아니야. 갑작스럽게 말을 잃은 이의 서툰 독순술(讀脣術)같은, 서서히 빛을 잃은 이의 더듬거림 없는 익숙한 손길 같은 소설이지. 그러니까, 너도 짐작했다시피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글이야.

 

어쩌면 말야. 작가는 어쩌면 이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그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를 위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든 뭔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데, 그것이 자신에게 천착되어 버릴까봐 소설의 형태를 빌린 자기 기록이 아닐까.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 문장과 감정은 또렷하고 선명한데 내용은 흐릿하고 불분명했거든. 그리고 많이 아파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혹은 그 감정의 극단을 짐작하는 사람만이 할 법한 표현과 생각이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소설의 형태를 빌린 일기라고 생각했어.

 

가끔 너무 괴로운 사람들을 소설에서 만날 때, 그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어. 유려한 문장과 첨예한 감각에 감명 받기는 했지만 대체 그녀들은 왜 이리 괴로운가, 생각하곤 했지. 하지만 이제는 그녀들의 아픔이 엄살도 투정도 아님을 알았어. 괴로운 기억을 안고 어쩔 수 없이 그 기억을 공유하며 사는 사람들, 인생이 사실은 불가해한 일 투성이라는 것을 깨지고 넘어지고 다쳐서 알게 된 사람들. 정말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거 말이야. 이 책을 봐봐, 남자는 빛을 잃었고 여자는 말을 잃었어. 하지만 그것만이 둘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남자의 성격과 현재를 설명하는 것이 꼭 빛이어야 하고, 여자의 실언을 증명하는 것이 여자의 상황이어야 하는걸까? 아니, 그건 아닐거야.

 

삶에는 뭉툭한 부분과 날카로운 부분이 있고, 옴폭 패인 부분과 오목하게 올라온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이 어떤 단면인지 모르고 그저 묵묵히 걷지. 아픔을, 닿는 순간에에 느낄 수도 있지만, 평평한 길을 걸을 때야 비로소 문득 아, 내가 날카로운 부분에서 발을 베였구나 느낄 때도 있잖아. 깨닫고 나서 지나온 길을 보니 옴폭 패인 곳에 넘어졌던 것 같다고 기억하기도 하고. 이 책에 나오는 남녀가 그런 사람들인 것 같아. 우둘투둘한 길을 걸어오며 피를 흘리는 발, 접지른 발을 갖고도 무심하게 걸어. 자신의 발에서 피가 나는지, 그것이 흐르고 고여 이미 작은 웅덩이를 이루는지도 모른 채 혹은 일부러 보지 않은 채 절룩절룩 그렇게.

 

 

나는 빛을 잃은 적도, 말을 잃은 적도 아마 없겠지만 불현듯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버렸어. 이상하지 않니. 이해한다는 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덧없는 착각인 줄 알면서도 이 둘의 마음을 안다고 느끼는 것이. 나는 사람이 얼마나 좁은 존재인줄 알아. 아아, 그래. 연민은 소모적이고 회한은 소멸되지. 남의 슬픔은 내 것이 될 수 없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지. 어떤 절망의 늪도 타인과 함께 빠지지는 않고, 그 늪을 빠져나온 사람이 반드시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은 적어도 거기에 늪이 있다는 것을 알지. 그런데도. 그냥, 보였어. 행간에서 느껴지는 쉼표와 마침표 사이에 있는, 마침표와 다음 첫글자 사이에 놓인 침묵과 망설임과 두려움 같은 것이. 남자의 비애와 여자의 통탄과 두 사람의 후회와 분노와 절망 같은 것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어.

 

우습지 않니. 빛을 잃어버린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를 읽고 빛 속에서 애써 말로써 감상을 표현한다는 것이, 서글프고 우습지 않니. 좋은 책은 실은 아무 말도 필요가 없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기에 다시 어떤 말이든 하고 싶어지지. 말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몰두할 때는 말은 무의미해지지,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지. 말이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균열이 생기게 될 때야, 점점 커가는 간극을 좁히려 그 간극에 자꾸만 말을 채우게 되지. 

 

그렇다면, 빛을 잃은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빛을 잃은 남자는 말로써 이해시키고 말을 잃은 여자는 빛을 비추어야할까. 남자에게 여자는 빛이 되어주고, 여자에게 남자는 말이 되어줘야 하는 건가. 본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현혹일 수 있기에, 말은 과장이나 실수가 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좀 더 완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남자에게는 빛으로 여자에게는 말로 그렇게 다가가는 것이 차라리 옳은 것은 아닐까.

 

 

병실을 나왔을 때 나는 크게 혼잣말을 하고 뽀얀 해를 올려다봤어. 아직 내게는 빛도 언어도 남아있다는 걸 알았지. 그것을 잃어본 적도 사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이 심히 안심이 됐어. 우습지, 말이란 무용한 것, 본다는 것은 행위 이상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과 빛으로 안도하다니.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링거액이 떨어지던 소리처럼 똑,똑, 그 속도처럼 천천히 소리내어 읊었어.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그 말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켰는지. 소금기 어린 바다, 체온이 묻은 머플러, 뼈가 불거진 손목, 착한 나무처럼 곧았던 뒷모습. 그런 것들이 이렇게나 선연한데. 검붉은 피도 푸른 동맥도 가쁜 숨소리도 이렇게나 안타까운데. 남자의 유예도 여자의 정지도 이렇게나 서글픈데. 완전한 것은 없다니. 얼마나 절망 어린 안도감일까.

 

책 속에선 이런 말이 나오지. 스위스에 방문했지만 사진은 찍지 않았다고, 그때는 나와 세계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눈으로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그래, 내가 w의 사진을 외면했던 건 거기에 낙인 찍힌 칼자국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너는 어떠니.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을 나조차 모르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니. 그때의 너와 세계 사이에 놓인 칼을 나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 너와 세계 사이에 놓인 칼은 어떤 것이니. 칼로부터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방패는 찾았을까.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내년이면 너를 만난지 십삼년이 되고, 너를 잃은지 칠년이 되는구나. 이제 너를 만났던 시간보다 너를 잃은 시간이 더 길어졌어. 하지만 나는 너를 만난 시간부터를 재는 것이 버릇이 됐어. 내가 지금의 너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야. 때때로, 너를 만난 육년이 없었다면 너를 잃은 칠년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그러니 너를 잃은 일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만나지 않은 것보다 잃는 것이 나을테니 말야. 

 

네가 내쪽으로 등을 돌리는 찰나의 너의 머리카락이 흩어지던 모양과 네가 쓰던 향수로만은 절대 재현하지 못하는 너의 냄새와

연필을 쥐던 습관과 곧은 이마, 암갈색 눈동자가 온기를 품던 순간의 벅참. 믿기지 않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알고 있어. 그것이, 그 기억이 나의 빛이자 언어가 되어줄 지도 모르지.

 

이것은 꿈이 아닐거야. 꿈이라면 이 모든 것이 이토록 선명하고 이렇게 모호할 수는 없으니까.

이것은 꿈이 아닐거야, 분명. 네가 있는 세계가 꿈일리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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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2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리뷰도 좋고, 문장도 좋고, 한강의 문장도 좋고.
이거이거, 갈수록 [희랍어 시간] 읽고 싶지 말입니다..

Shining 2011-12-25 13:05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재밌게 보내고 있어요?^^

고마워요, 이건 실은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좋다고 해줘서.
<희랍어 시간> 참 좋아요, 그냥 읽어도 좋았겠지만 이걸 읽은 때가 `지금`이어서
저는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2-24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립다.. 그리워요, 무언가가. 보고 있을 거예요, 편지가 도착했을 거예요. 샤이닝님이 보냈으니까. 우리들 추억은 참 각각이군요. 추억을 꺼내놓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써주어서 고마워요. 소설보다 더 좋네요, 이 이야기가 훨씬 더. 너무 그리워하지 마요, 그리워서 아름답지만, 부럽기도 하지만, 아프니까요. [희랍어 시간]의 문장은 정말 좋아요, 색다르고 낯설어요, 샤이닝님의 글로 다시 읽으니 제가 책을 대충 읽었나 싶기도 하구요. 우리 꿈이 되지 말고 살아요. 그러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lots of luck for you.

Shining 2011-12-25 13:13   좋아요 0 | URL
저 리뷰 쓴다고 구두 약속 한 적 있잖아요. 지킨거에요-_-* <희랍어 시간>은 거의 압도될만큼 좋아서, 오랜만에 책을 읽고 멍해졌어요.

실은 며칠 전에 쓴 글인데 올릴까 말까 계속 고민했어요. 리뷰 섹션엔 리뷰를 써야 마땅하지만 결국 이 얘기밖엔 할 수가 없었거든요. 편지를 띄우긴 했지만, 상대방이 봐주길 원하는지 보지 않길 원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그랬는데, 써줘서 고맙다고 해서 고마워요, 진짜로. 체온이 0.5도는 상승한 기분이에요, 지금. 행운까지 빌어주시다니, 아름다운 크리스마스군요^^

2011-12-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입니다. 추천을 한 번만 누르기엔 아쉬운 느낌이네요.
그나저나 누가 그렇게 많이 아프신 걸까요.
요즘은 사람들이 아픈 게 정말 슬프고 싫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파서 요즘 슬프거든요.

저는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지만, 한강에 대해 이상한 호감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 <희랍어 시간>만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소설을 꼭 읽을 거예요. (한강씨에 대한 리뷰를 읽으며 왠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소설가다, 했고요. 그리고 한강씨의 아버지가 한승원씨라는 것, 한강씨는 내가 아는 딱 두 명의 동지 중 하나라는 것. 그 세 가지 때문에 호감을 품고 있어요. 부연>`동지`라 함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딱다구리 그레이트 북스"를 어린 날에 나처럼 소중하게 읽은 사람을 얘기하는데요. 저의 대학교 친구 한 명과 한강씨. 살아오면서 이렇게 두 명 발견했거든요. ^^)

Shining 2011-12-27 23:11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곁에 서있는데 창가에서 검은 것이 안을 침범하려고 기웃거리는 걸 봐버렸어요.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런 것들도 어느정도는 능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걸까요? 그건 아니겠죠. 맘이 스산해요. 섬님의 가까운 분도 어서 쾌차하시면 좋겠네요..

좋아하실 것 같아요, 타인의 취향을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지만^^; 섬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웃음).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라.. 저는 모르겠어요, 이런, 동지가 될 수 없겠어요ㅠ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 주목할 만한 소설 비평 좌담
박진.김남혁.장성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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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담하고 잘 꾸며진 그러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단골 주점에 있다. 오늘따라 손님은 평소보다도 없고 시끄러운 사람들도 없어서 한산하다. 당신의 옆 테이블에서는 독서토론이 한창이다.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친구는 애인과의 통화(정확히는 말싸움인가)로 한창 열을 내다 나갔다 온다는 눈짓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심심하고 무료한 당신은 멍하니 있다 당신의 귓가를 매만지는 소리에 몸을 살짝 기울인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 당신 역시 책을 꽤 좋아하는데다 그들이 말하는 책은 대부분 당신도 읽은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책들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정밀한 표현과 현학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게다가 박식한 내용과 섬세한 태도까지.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아닌 척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언제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자작(自酌)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말하지 않았던 것들, 혹은 말할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엄격히 말하자면 비평집이다. 평론집이라 하면, 도무지 일상적으로 쓰일 것 같지 않은 언어들만으로 작심하듯 골라내 엮고 엮어 자기네끼리만 숙덕거리는 느낌을 받기 쉽다. 혹은 어려운 말들이 마치 자신의 권위를 세워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언어들만을 쓰고 뿌듯해하는 얄미운 얼굴들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평론집’이란 말이 무색하게 즐겁다. 유연한 언어와 일상적인 논제와 소설을 읽는 당신이라면 누구든 동참할 수 있는 주제를 갖추고 있되 -좌담을 녹취한 형식이라- 읽기에도 수월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주제 자체가 흥미진진하다는 것이다. 보통의 평론집은 거의 해설집에 가깝기 마련이다. 과연 작가가 저런 생각으로 글을 썼을까 의구심이 들만큼 분석적이고 집요하다. 한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해 혹은 한 작품의 한 문단 한 문장 지나치게 낱낱이 분석한다. 때문에 보통의 독자들은 평론집을 읽지 않는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외려 이해를 방해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 책의 주제는 노골적이고 재밌다. 실은 잡담거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아, 정말 재밌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서너장 넘겨보다 결국 다 읽고 말았다.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고 물 마시는 것도 멈춘 채 책장을 팔랑팔랑 잘도 넘어간다.

허나 아무리 재밌고 읽기 편해도 이 책은 어디까지나 ‘비평집’이다. 때문에 해당하는 책이나 작가에 대해 읽지 않았다면 무지막지하게 재미없는 책이 될 것이다. 아니, 이 책을 읽지 않으며 실은 읽을 수도 없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해당하는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선입견을 만들까봐 비평을 읽을 수 없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장정일에 대한 담론과 <최근의 문학상 수상작, 어떻게 달라졌나?>에 인용된 네 소설을 읽지 않은 죄로(!) 두 주제에 대해선 눈으로 훑는 정도에만 그쳤다.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야기에 낀단 말인가, 비록 남의 술자리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다, 이 말에는 큰 허점이 있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출판계의 동향이야 어떻든지 관심이 없다면 애초에 이 책을 고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고른 사람이라면 무섭도록 달려가며 읽게 될 것이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이 책의 존재 자체, 존재의 의미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많은 책장에 꽂힌 한 권의 책이고, 신간에 나타난 새 책일 뿐이며, 그저 글자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커다란 둘레처럼 느낄 것이다. 그들의 귀에 눈에 손에 이 책은 필터링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확한 독자 타깃과 고정독자를 갖추고 있다. 소설을 읽는 당신, 그것도 좋아하는 당신, 소설의 미래를 걱정하는 당신, 다른 이와 함께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당신만이 이 책을 연다. 그리고 나의 리뷰를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 그렇다.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지겨운 말이긴 하지만 이 책은 평론집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 쏙 든 문단을 발췌하라면 그 이야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두 밝혀야만 하고, 때문에 특정한 주제나 발언을 언급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이 책이 쓰여진 맥락 자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 누군가 책에 대한,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을 읽는 그 자체가 즐겁게 만든다. 그 중에 고개를 삼십번 쯤 끄덕이게 만든 부분들을 어렵사리 옮기자면 이런 것들.  


박진 맞다. 소설은 독자마다 자기 리듬에 맞게 감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반면에, 영화는 러닝타임이라는 일정한 시간 동안 영화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며 감상해야 한다. 이 점이 수용자뿐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너무 난해하거나 복잡해지면 관객들이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리고, 그러면 결국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마니까.

장성규 그래도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보다는 좋아하는 편이다. 문자 텍스트의 내러티브가 다른 매체를 통해 변형되는 모습을 보면, 원작에서 읽어내지 못했던 점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가 단순히 소설의 내러티브를 영상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소설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재현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 문법의 특성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반대로 영화 문법이 지니는 고유성을 통해서 소설 문법이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성공한 소설의 영화화란 어떤 형태인가?)


김남혁 희뿌연 화면 처리를 통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관객들이 눈먼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하고 눈먼 자들이 받는 고통을 추체험하게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핵심은 오히려 ‘눈뜬 자’의 고통과 연대의식이다. 눈뜬 자인 의사의 아내는 눈먼 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녀는 두 개의 지옥, 그러니까 국가와 군인들의 공권력이 만드는 하나의 지옥과 공권력의 피해자인 눈먼 자들이 만드는 또 하나의 지옥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이 못 보는 지옥을 지켜보면서 의사의 아내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사실 이 소설에서 눈뜬 자는 의사의 아내 한 사람만은 아니다. 눈을 뜬 사람은 의사의 아내와 화자와 독자, 이렇게 세 명이다. 의사의 아내가 느끼는 고통과 책임감은 곧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와 자신을 시종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눈먼 자들의 지옥을 못 본 척하지 않는 책임감을 이끌어낸다.

박진 정말 그렇다. 소설에 수시로 나오는 ‘우리’라는 호명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남혁 그런데 영화에서는 ‘우리’라는 인칭으로 개입하는 화자의 효과가 사라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당신(관객)은 유일하게 눈뜬 자이니, 의사의 아내와 같은 고통과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각성을 유도하지도 못한다. 영화는 그저 눈먼 자들의 고통을 관음증적으로 구경하게 한다. 원작과 다르게 영화는 눈이 보이는 자들의 고통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의사의 아내는 소설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스크린 셀러 현상에 대한 담화 중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해)


박진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은 충분히 낭만적이고 충분히 비극적이고, 게다가 시대 현실에 대해서까지 말하는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포장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청춘의 고뇌나 낭만적인 사랑과 더불어 80년대 시대 상황까지 말해주는, 굉장히 진지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는 그냥 좀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걸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다.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대해)


김남혁 2000년대 소설에 눈가 등장하는지를 떠올려보면 2000년대 사회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8,90년대 소설에는 민중이나 시민이라는 혁명 주체가 등장했다. 그런데 2000년대 소설에는 속물, 마니아, 백수가 등장한다. 백수하면 이기호, 마니아하면 김중혁, 속물하면 정이현 등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백수들은 자포자기해서 골방에 있고, 속물들은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채 강남을 활보하고, 마니아들은 자기 관심사 외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유폐되어 있다. 이 세 무리는 사회가 변혁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사회는 원래 이런 거라고 냉소한다. 이 세 무리가 만들어내는 2000년대 사회는 이른바 출구 없는 감옥이다.


박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따뜻한 위로든 차가운 위로든, 위로를 주는 소설들에 대해 무조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조건들과 대중들의 요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 사회심리적 의미를 다루는 섬세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대중문학’은 도피적인 위안을 주고 ‘본격문학’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식의 편리한 구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박진 (전략) 그런데 위로라고 해도 다 같은 위로는 아닐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감추면서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너만 잘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위로가 있는 반면, 현실이 정말 끔찍하고 견디기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힘을 주고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위로도 있다. 황정은 소설이 주는 위로는 이 두 번째에 속한다. 누구보다 정직하게 현실의 고통을 응시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나 냉소보다 더 큰 힘을 주는 소설이라서 각별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2010년 놓치기 아까운 소설 중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소설의 힘을 위로라고 말했다. 소설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시대에 위로와 청춘라는 말이 난무하는 책들 속에서. 소설은 마치 한 마리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왔고 기꺼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었다. 어떤 날에는 연출된 기쁨을 골랐다. 그때 소설은 구세주가 되고 기꺼이 기쁨조가 되었다. 슬퍼하기 위해, 아프고 싶어서 읽을 때는 자학이나 자기기만의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샴푸의 종류나 립스틱의 색깔을 고르듯 소설을 선택하기도 했다. 허나 결국엔 특별히 좋아하는 샴푸의 향기, 얼굴색을 밝게 해주는 립스틱만을 남기듯이 마음안에 고이는 것만이 남았다.

물론 오직 위로를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모든 가구와 환경과 인물과 직업과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설정해가며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 이유가 어찌 위로뿐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글을 읽고 가장 공명했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가 나를 위안한 글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따뜻한 격려든 차가운 독려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한 결과이며 때문에 모든 독자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라는 프루스트의 말에 이보다 더 공감할 수는 없다.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술어라고 하지만 때론 접속어에 더 큰 무게가 실릴때도 있다. 예컨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에서 제일 주목해야할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모든 사랑에는 매력과 장점만 있는게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래서의 힘으로 이겨나가지 않는가. 그래서와 그래도 사이에서. 그래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이 책에는 문학이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고 독서에 미치는 마케팅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에 대한 걱정과 비판도 담겨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떤 소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바로 지금 좋은 소설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매번 다시 묻고 고민해야만 했다. 문학을 둘러싼 지금의 상황들은 이렇듯 별로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 소설이 이끌어내는 다양한 생각들과 진지한 고민들이 여전히 우기에겐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그래도’와 ‘그래서’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론 中)

공감을 넘는 동감의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까닭이 그래도여도 물론 좋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라는 말이 왠지 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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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09-1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워요!! 황정은 소설이 내게 다른 소설과 다르게 다가온 부분이 정말 거기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요...재밌네요 :)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Shining 2011-09-16 00:02   좋아요 0 | URL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는 정말...읽으면서 몇번이나 화들짝 놀랐어요. 처음엔 난해해서, 그 다음엔 좋아서. 웬디양에게도 이 책이 좋은 책으로 읽혔으면 좋겠는데요^^

2011-09-1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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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준비운동을 한다. 계곡물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몸을 적시고 수영을 하기 전 스트레칭을 하듯. 김유진의 『숨은 밤』을 읽으려고 『늑대의 문장』을 먼저 집어 들었고 김이설의 『환영』을 읽기 위해 『나쁜 피』를 읽었다. 『나쁜 피』를 손에 들고 당신은 움찔 놀란다. 예쁜 빨간색이다. 잿빛과 핏빛의 중간쯤 되는 선홍색이었다. 어쩐지 불온한 기분이 든다. 당신은 그 계시를 무시한 채 책을 연다. 아무데나 쭈그려 앉아 금세 몰두한다. 길이는 짧지만 부피가 대단히 큰 소설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은 일순 가벼운 빈혈을 느낀다. 선홍빛 책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린다. 당신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즉홍적인 충동을 무시한다. 즉홍적인 것은 언제나 위험하고, 책을 집어던지는 것은 당신이 -아마도 절대- 할 수 없는 행위 중 하나다. 그래서 대신에 당신은 억지스러운 가벼운 미소까지 띄우며 자리를 벗어난다,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그렇게 한다. 『환영』을 받았다. 아직 젊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자의 외출 전 뒷모습이다. 당신은 이런 표지가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의 어느 순간을 포착해낸 듯한 모습, 모른 척 해야 했던 그러나 알아버린 무언가를 목도하는 순간의 처참함을 느낀다. 표지가 마음에 걸린다, 제목은 더욱이 비릿하다. 모르고 목으로 넘겨버린 생선가시가 갑자기 나 여기 있다며 목구멍의 깊은 안쪽에서 꿈틀대는 것 같다. 하지만 한숨을 쉰다. 불안함은 호기심 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당신은 불현듯 지금 활동 중인 한국영화 감독을 몇 명 떠올린다. 이창동, 봉준호,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전혀 닮지 않은 그러나 각각 다른 이유로 대가로 칭송받는 이들이다. 당신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잠시 멈춰서 생각한다. 이창동은 존경한다. 봉준호는 좋아한다, 아니 감탄한다. 홍상수는 당신에게 판단이 유보된 사람이다. 박찬욱과 김기덕의 이름을 입에 담고 당신은 망설인다. 박찬욱의 영민함과 남다름을 인정하지만 그의 그로테스크함은 여전히 의문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서는 경악한다. 당신은 <나쁜 남자>를 보면서 거의 정신적으로 토악질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물론 당신도 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예술이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가장 참혹한 것이 저열함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박찬욱 감독이 자신이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 모든 영화감독들이 허진호와 같은 영화를 -멜로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도. 하지만 꼭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해야 했는지 당신은 자문한다. 인간의 어두움, 이기심, 허기와 탐욕을 꼭 이런 방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지 불평한다.

당신이 읽은 김이설 작가의 두 책은 마치 김기덕 감독의 영화 같았다. 그 안에 담긴 촉감과 깊이와 조도(照度), 냄새는 물론 내용마저도 닮았다. 그들이 애써 만들어낸 것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침을 퉤, 뱉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관에 나와서 밝은 햇살을 축복하고 책을 덮고 나서 자신의 현실에 안위하게 만드는 것.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릴 것 같았고 슉 하고 군내 나는 낯선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내용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외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싶었다. 『환영』은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편에서 조금 더 보탠 정도의 글이다. 페이지만 짧은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가 짧고 건조하다. 하드보일드에서나 볼 법한, 헤밍웨이가 쓸 법한 단순한 구조를 가진 단문의 문장뿐이다. 작가의 단문에는 운율과 리듬이 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지긋지긋한 내용을 물 흐르듯 한 번도 막힘없이 읽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게다가 이렇게나 기가 차는 경악스러운 상황들을 연이어서 늘어놓고 정작 자신은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다. 귀찮다 못해 무기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한쪽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귀지를 후 하고 불어내는 말투다. 물의 낙하소리와 계절의 미묘한 변화만이 유일하게 작가가 개입해서 묘사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체념한 나른한 동시에 억센 여인의 목소리가 오히려 이 상황의 비참함을 강렬하게 대비시킨다.

무엇보다 당신은 인물들의 생동감에 감탄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을 그야말로 노련하게 재생시켰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살아서 숨 쉰다. 그저 ‘현실에 있을법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팝업북을 펼치기라도 한 듯 입체감이 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작가들의 캐릭터가 2D라면 그녀의 인물들은 3D나 4D 어떨 때는 아이맥스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뱉는 침은 당신이 서 있는 땅바닥에 끈적거리며 떨어지고 오토바이의 굉음은 귀를 찢을 듯 하고 닭기름의 미끌미끌한 감촉들이 손가락에 묻었으며 걷지 못하는 간난쟁이의 젖냄새는 당신의 코를 자극한다. 덕분에 당신은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끔찍하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냄새나 감각이나 이명처럼 글을 읽고 나서는 많은 것들이 당신 곁에 찰싹 달라붙는 것 같아 당신은 기겁을 하며 머리카락을 털고 씻고 갈아입게 된다. 작가는 생동감을 그려내는 특별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냉담하고 하드보일드하다. 행복이란 몇 가지를 끊어내고 몇 개를 바꾸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쉬이 손에 닿는 것이 아님을. 마지막에는 해피 엔드, 라는 건 드라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면서 작가의 냉담함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냉담함을 품기 위한 노력에 마음이 아린다.  

 

이제 당신은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해야한다, 아무리 내키지 않다 하더라도. 하지만 당신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하는지, 기실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윤영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시작인가, 민영의 가당찮은 사업이 이유인가, 덜컥 생긴 애가 문제인가,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 남편의 탓인가. 그 모두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내 실수와 너의 과오, 너의 미련함과 그의 아둔함을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어느 것도 바뀌지도 되짚을 수도 뒤집을 수도 없는 뻔뻔한 사실들일 뿐이다. 

윤영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억척스러운 여자라고 당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은 이 여인을 욕하지 않는다. 저것 외에도 사는 방법이 있노라고 다 당신 탓이라고 싸늘하고 적당한 경멸을 던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당신은 불행을 자초한 거라고 멀찍이 서서 혐오해서도 안 된다. 나라면 절대 저런 식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거만하게 장담해서도 안 된다. 그건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이었다. 인생의 바닥을,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잼통의 밑바닥을 긁어 모으듯 삶의 밑바닥을 허우적 대본 적 없는 이들은 누구도 윤영을 욕해선 안 된다. 당신은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삶도 내 의지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어째서 또 다시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익숙한 착각에 빠졌을까. 때론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주먹에서 휘둘리고 있다고 당신 역시 생각해본적이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의 삶조차 그러할진데 윤영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당신을 버리고 벼린다면, 당신은 윤영보다 더 순결한 삶을 살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윤영이, 윤영의 가족이 과하다고? 아니다, 당신은 알고 있다. 가족이란 때때로 정말이지 갖다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가족은 서로에게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다는 걸. 가족이기에 더 못 견딜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불행하게도 당신도 대충은 안다.

인간은 때론 놀랍다. 어떻게 저런 일들을 모두 겪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런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두고 죽을 용기로 살지, 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이들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의 생(生)의 무게, 삶의 이유와 존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다. 당신은 내가 아니고 그녀가 아니며 그녀는 내가 아니고 당신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까지고 ‘당신’으로 남아 그녀를 바라본다. 당신은 그녀를 응원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다. 말릴 수도 없고 격려할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일이 다 잘 될거라는, 시간이 해결해줄거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지껄일 수 없다. 그저 바라본다. 외출준비를 끝낸 그녀가 구두를 신는 순간 그녀는 ‘나’가 아닌 ‘당신’일 뿐이다. 

 

당신은 여전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김이설 작가 역시 좋아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선뜻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당신의 좁은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곱고 축복받은, 번듯한 길을 놔두고 진흙이 질척대는 어렵고 외면 받는 길을 걷는 그들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는 분명 이따위 것이 문학이냐고 예술이냐고 말할 수도 있고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냐며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신들의 전기(傳記)를 뒤적이며 당신을 프로파일링하며 제 멋대로 근거를 짐작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가족들조차 타인에게 자랑할 수도 없다.

작가란 차암 잔인한 사람이에요. 이 소설을 쓰는 도중, 아내는 어느 날 눈시울 붉히며 말했습니다. 작가가 울지 않으면 독자도 울지 않는다는 '조지 무어'의 말은 한편에선 진실이고 한편에선 거짓입니다. 아내는 그 양쪽 편을 보지 못하여 상처 받았고, 나는 그 양쪽 편을 보았기 때문에 상처받았습니다. 이것은 소설일 뿐야.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가공의 인물이란 말야.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박범신 - 킬리만자로의 눈꽃, 작가의 말 중)

"무엇보다도 이 소설 때문에 나처럼 괴로웠을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건넨다. '내가 쓰는 소설의 의미'와 '식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이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선인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김이설 - 환영, 작가의 말 중)

물론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쓰고 싶은 글을 안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상처를 받게 될 남편에게 미안해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작가란 차암 잔인하다는 말, 작가의 아내로써 살아간다는 그 무게감을 담은 말 앞에서 당신은 박범신 작가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식구가 쓰는 소설’과 ‘작가가 쓰는 소설’의 의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인내했을 김이설 작가의 남편에게 덩달아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작가가 작가로서만 살아간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 그런데 아내로서의 엄마로서의 가족으로서의 모습보다 작가로서의 모습을 우위에 둘 수 밖에 없었다는 것. 하필 이렇게 토악질 나는 생생한 절망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아름답고 몽실몽실한 길을 놔두고 기어이 그 길로 가고 말리라는 고독한 전언. 언제까지고 ‘당신’일 수 밖에 없는 당신은, 그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감정과는 별개로 당신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김이설 작가의 책을 읽는다. 기어이 그 길로 가고야 마는 당신, 나는 당신 옆에서 작지만 또렷한 호롱불을 비춘다. 그것은 당신으로써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니까.

   

 

  

 

덧) 인칭을 구별 할 수 없는 이상한 리뷰. 애초에 '당신'은 독자인 '나'를 의식하고 쓴 관찰문이었다. 나 자신을 '당신'으로써 떼어놓고 쓰겠다는 의미이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소설과 지나치게 가까워져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당신'으로서 나는 타자로써 윤영을 결국 관찰하고 관망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조의 의미로 썼다. 

하지만 쓰다 보니 기본형인 당신 1(독자로서의 나)을 필두로 소설 속 윤영을 가르키는 당신(2)과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향한 당신(3) 그리고 작가를 향한당신(4)까지 다양한 의미로서의 당신이 난립하게 되어버렸다. 모호하지만 그 모호함조차 특성이라 변명해보며 구분되지 않은 '당신'이 판치는 이상한 리뷰가 되었다.   

현기증나는 현실만을 묶어 재현한 이 책을 읽고 가장 깊게 사로잡힌 생각은 '문학의 숭고함'에 대해서였다. 참 이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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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영화와 '그런' 문학도 당연히 필요한데, 손이 냉큼 뻗지는 않아요. 박찬욱 영화 하나 빼고 다 보고, 김기덕 영화 반 정도는 본 사람이 할 얘긴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나저나 이제 진짜 김기덕 영화는 손이 안 뻗나 봐요. <풍산개> 안 봐지더라고요. 나이 먹어 그런가, 자극이 싫어요.ㅎㅎ)

Shining 2011-08-03 11:59   좋아요 0 | URL
저는 박찬욱 감독은 '역시 세련되고 똑똑하다'고 매번 생각하지만 '좋다'라는 느낌은 못 받는 편이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볼때마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하게 되요-_-;; 하지만 미안하고 고맙고 거북하고; 늘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요.

아, 김이설 작가는요 (비록 두 권 밖에 안 읽어봤지만^^;) 독특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처럼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어요.
 
결혼의 변화 - 하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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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롱카가 사랑한 남자, 그녀의 전남편 페터는 ‘시민’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사는 남자다. 평생을 스스로의 기준과 엄격한 규율로 마치 자신을 타인처럼 대하고 다루며 살아온 남자. 아마 칸트처럼 일과가 늘 완벽하게 짜여진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폭풍이 휘몰아친다. 감정의, 자멸의, 스스로를 기꺼이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종의 광기의 바람이.

광기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일세.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광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네. 그런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려보지 않고 그런 지진에 의해 토대가 흔들려보지 않은 삶, 지금까지 오성과 예의범절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유지된 모든 것을 울부짖으며 내동댕이치고 지붕 위의 기왓장을 날려버리는 돌풍에 휘말려보지 않은 삶, 그런 삶은 초라할 걸세. 바로 그런 광기가 내 인생을 덮친 게야.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너울거림을 인정한다. 자신의 비겁함과 불안까지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과 아내에 대한 연민과 불운함, 그리고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처하게 될 모든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가 참으로 가엾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일롱카의 관점에서 읽을 때는 냉혈한에 비겁하고 무책임한 -심지어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라며 페터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가 되어 음조의 변화도 없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런, 그는 그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희망을 원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데 불현듯 얼마간의 준비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오직 자신만을 향한 다가오는 바람, 토네이도처럼 무시무시한 돌풍. 사랑의 광기라는 재앙 앞에 그는 내진설계조차 되지 않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을 할 준비는 물론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약하기 짝이 없는 구조물.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건축물도 토네이도를 막을 수는 없으니. 그는 도망치고 부인하고 두려워하다 결국 유디트에게로 뛰어든다. 아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흡수하고 만다.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개인으로서 나라는 인물이나 내 사회적인 위치나 남성으로서의 인간적인 특성이 아니었네. 나는 그녀한테 모든 행복과 불행을 의미하는 수수께끼 같은 기호로 가득 찬 비밀문서 같은 존재였네. 그녀는 나와 같은 상태에 이르길 일평생 갈구했어. (중략) 유디트는 서서히 나라는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서, 내가 자신이 ‘바라던 초록색’이 아니라고 느꼈네. 오랜 세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던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갈구하는 것,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절대로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네. 우리가 함께 살면서부터 우리의 지난 세월을 열병처럼 뒤덮었던 견디기 어려운 긴장은 사라지고 없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히 남자와 여자, 신체적인 약점과 일상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녀는 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나를 원했네. 내가 성직자나 다른 세상에서 온 숭고한 존재이길 바랐어. 그러나 나는 다만 희망을 버리지 않은 외로운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  

이보게, 나는 기적을 믿었네. 어떤 기적을 바랐냐는 뜻인가? 그저 사랑이 초인간적인 신비스러운 영원한 힘으로 외로움을 덜어주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고 사회와 이름, 재산, 과거와 추억이 우리 사이에 쌓아 올린 인위적인 벽을 허물어주길 바랐네. 나는 마치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에 아직 온정과 동정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은밀히 힘차게 심어줄 손을 찾는 사람 같았어.

일롱카의 이야기가 멜로드라마의 서사였다면 페터는 부르주아적 자질과 강박,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알았다. 그리고 무엇을 두려웠했는지도 알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추문의 대상, 호기심 어린 시선의 응담함을 알았다. 페터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바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열적인 애인이나 헌신적인 아내 등이 아니라 자신을 관찰하며 조소하는 정념(情念)의 상대뿐이다.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도 지속되지도 못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자신을 먹이로 던지며 많은 것을 바꾸거나 포기했지만 유디트는 돈을 가져갔고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제시했으며 자존심을 훔쳐갔다. 유디트의 시선과 그 안에 담긴 함의(含意)와 감정을 읽어내며 견뎠다. 그리고 한참을 더 바라보다 끝을 선고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우아했다.

페터는 제일 낭만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사랑을 했다. 희망을 희구하는 것, 상대방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 그것이 가장 나쁘다. 가장 비현실적인 동시에 가장 자학적이다. 사랑이 사랑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실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 남편에게서는 파슬리 냄새가 나지 않았어. 나는 눈물 글썽한 두 눈을 감은 채 그 사람의 냄새를 맡고 전율했어. 그 사람에게서는 건초 냄새가 났어. 우리가 이혼하던 날처럼. 내가 처음으로 그 사람 침대에 누워서 씁쓸한 건초 냄새 때문에 메슥거렸던 그날 밤처럼. 그 인간은 그때도 변함이 없었어. 몸도 의복도 냄새도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더라고.

유디트는 페터의 그 점을 원했고 증오했다. 마치 어디선가 배워온 것 같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목을 조르고 싶었다는 그녀.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솔직했다. 그래서 그녀는 페터를 소유함으로써 페터가 포함 된 세계를 가지기러 결심했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 그들은 태어나면서 갖고 있었던 것들을. 결국 페터와 신분을 함께 갖게 되나 그녀는 조금도 만족할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것에 마침내 닿게 되면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기 마련이다. 믿기지 않을만큼 큰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거나 그것을 경멸하게 되거나. 밑에서 올려다보며 동경하던 것에 닿았다는 것은 내가 올라갔거나 상대가 내려왔다는 말이니까. 자신의 상승을 깨달을 때는 그것이 한없이 고귀해보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은 그를 혐오한다. 유디트는 허무해진다. 조소하며 비소한다. 막연하게 깨닫는다. 자신이 그의 침대를 차지하고 부인이 되고 마음껏 집을 휘젓고 다닌다 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해도. 자신은 여전히 그의 부인이나 애인이 아닌 하녀로써 스스로를 느낀다는 것을.

자격자심이란 말은 없는 자들의 사전에만 등재되어 있다. 부자의 장점은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 말처럼 진짜 부자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고 때문에 자신이 무얼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뺏긴다’와 ‘잃는다’는 애초에 갖지 않은 것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말 없는 사람들은 뼛속까지 배인 열패감과 분노, 조바심을 감추지 못한다. 혹여 훗날 돈이나 명예, 지위를 갖게 된다하더라도 그들의 태도에서는 프롤레탈리아 특유의 기질이 드러난다. 아니, 오히려 바로 그 때 그들은 뼈저리게 깨닫는다. 귀족의 옷을 입을수록 자신은 -타고난- 귀족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페터는 진정한 부르주아다. 그의 복제한 듯한 미소, 비슷한 수 십 벌의 양복, 감정을 배제한 화법,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과 가히 우아하다고 할 수 있는 관대함이 얼마나 유디트를 애타게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차라리 페터가 화를 내고 으르릉거리며 그녀를 원망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와 다투기라도 했다면 유디트는 그를 떠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기꺼이 사랑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무심한 자와 싸우느니 적개심을 가진 자와 싸우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는가. 단단하고 한결같은 벽과 부딪히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그 벽을 조금도 상처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상처받았다.

그래서 유디트가 페터를 안았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자신이 그 냄새를 그리워했다는 것과 그만큼 증오한다는 것을. 그 냄새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 페터의 부르주아적 기질을 상징하며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근성을 확인시킨다. 절대로 이해할 수도 합일될 수도 없는 깊은 격차의 강물 같은 것이 바로 그 ‘냄새’ 안에 담겨있다. 전쟁 통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페터를 어떻게 그녀가 사랑할 수 있을까.

고백컨대 나는 유디트 알도조를 뇌쇄적인 아름다움과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진 팜므파탈의 전형이라고 상상했다(변명하자면 이름도 유디트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 상처입은 여자일 뿐이었다(그래서 새 애인에게 자산을 탕진하듯 자학적으로 모든 걸 내주는 것이 아닐까, 페터의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그런 시기가 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하긴 일롱카는 연약하고 우아한 귀부인으로 페터는 지독한 냉혈한으로 공상하며 읽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사념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페터 자신과 주위의 시선은 물론, 일롱카의 페터와 유디트의 페터도 닮지 않았다.

문득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는다. 모든 사랑은 일반화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때문에 세상에 사랑보다 더 이기적이고 도취적인 감정은 없다는 것을. 같은 이유로 어떤 사랑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아는 나 자신이 세상에 하나 뿐이듯 내가 아는 그(또는 그녀)도 단 한 명 뿐일테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라고 말한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얼마나 탁월한지. 결국 그들은 서로를 관찰할 뿐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상대의 투과상을 비출 뿐이다. 그리고 주변인에게 말한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으로. 일롱카는 페터를 페터는 유디트를 유디트는 페터와 세자르를(세자르란 인물은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의 모호성과 사상도. 그는 이들 셋 모두와 닿은 동시에 아무와도 닮지 않았다). 사랑도 다른 것들처럼 마지막이 답이 된다. 결국 헤어졌잖아, 라는 말 앞에서는 그간의 어떤 아름답고 고결한 추억도 모두 그저 그런 것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풍화되고 희석된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방식을 취하며 누군가의 사랑을 희구하며 살고 있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이 ‘사랑의 변화’ 나 ‘결혼’이 아닌 ‘결혼의 변화’인 이유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대화의 시기가 서로 어긋나있어 지금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페터가 말하는 시점에 유디트는 어디에 있었을까, 일롱카는 여행을 떠났을까 그 때는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할까. 유디트가 말하는 시점에 일롱카는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페터는 어떨까. 그는 미국으로 갔을까. 일롱카가 죽은 것, 유디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까. 숨겨진 인물들이 지금은 어느 공간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상상하고 예상하게 만든다.

새삼 작가의 위엄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만다. 마치 빙의되기라도 하듯 세 사람의 목소리는 제각각인데 모두가 굉장한 설득력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일롱카에게서는 처절하기까지 한 안타까운 구애의 목소리가 들리고, 페터에게서는 두려움이 묻은 냉정함, 근본적인 외로움과 현재에 대한 따가움이 느껴지고 유디트에게서는 계급의 차이가 느껴진다. 페터의 가족에 대한 묘사,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과 따라할 수 없는 초연함에는 분명한 계급(계층이 아닌)의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곳곳이 숨어있는 망각과 시대와 현실과 전쟁. 이런, 산도르 마라이의 글은 여전하다. 저도 모르게 삶의 정수를 관통해 온 사람, 너무 많은 것을 겪고 알아온 노인의 목소리. 폐허에서 발견한 물을 머금은 수선화 같고 쓸쓸하기 그지 없는 첼로의 선율 같기도 한 그 목소리와 언제 어디서 어떤 페이지를 읽어도 훔치고 싶은 문장이라는 것 역시. 휴, 그의 글은 절대 도서관에서는 읽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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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단단한 하드커버와 많지 않은 페이지, 예쁘지만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여인의 얼굴. 헝가리의 대문호라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난 책인데 신기하게도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책 속에 고개를 파묻고 마음껏 활자 냄새를 들이키며 도서관 한 구석에 앉아 -일명 나만의 자리- 책을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아, 이것이 바로 거장의 문장, 그의 숨결이구나. 초의 미세한 떨림, 커튼의 흐느낌, 깊은 호수의 잔잔한 파동, 은식기와 촛대의 우아함, 겨울 별장의 나무 냄새와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담담하고 차분한 말투, 그렇지만 어딘지 고압적이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한 목소리. 마치 억겁의 시간들을 지나 온 사람, 그야말로 견고하고 부드러움을 가진 노인이 보내는 시선의 온도가 느껴졌다. 책장을 덮고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에 안도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니 하마터면 이 책을 훔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갖고 싶은 문장, 탐이 나는 책, 세상의 이 책을 모두 없애고 나만이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글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것이 마라이와의 시작이다.  

그의 글은 마치 고성(古城)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한 때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점잖고 부드러운 신사가 살던 곳. 그런 곳의 붉은 벨벳 의자에 앉아 둔탁하고 세심한 나무 결들을 쓰다듬는 순간이랄까, 다락방에 숨겨둔 먼지 낀 하얀 천 뒤에 숨은 여인의 그림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니면 코안경을 낀 백발 노인의 서재에서 부드러운 빛을 맡으며 책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마라이의 글은 언제나 이런 곳을 떠도는 듯한 백일몽에 시달리게 한다. 그는 고루하고 먼지 냄새 나는 ‘이미’ 지나 버린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애쓰며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척하며 어른인 걸 잔뜩 티내며 그럴듯하게 굴지도 않는다. 애써 이해하거나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고, 복잡한 이야기를 진리인 척 하지도 않는다. 거창한 스토리텔링이나 복잡한 플롯, 다각적인 인물들도 물론 그가 만들어낸 세상과 무관하다.

그는 그저 애정과 배려, 관심을 담은 눈으로 우리의 시간을 목격하고,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무연하고 단단한 표정으로, 수많은 함의와 상처를 안은 채. 강하기 때문에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알기 때문에 부드러울 수 있는 마음으로. 그래서일까. 마라이의 글을 읽다보면 안도감과 뭉클함 같은 것이 혼종된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그토록 모질게 살지는 않았다는 것,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누군가 긍정한다는 것에 위안 받고 인간의 연약함에 구원받는다.

너 혹시, 다만 의미가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도 않아.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있어. 아까 시내를 지나 이곳으로 오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 그것은 정말 거짓 없는 순수한 기쁨이었어. 전에는 다른 할 일이 있었고, 다른 데 정신이 쏠려서 세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그러다 그 사람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세상을 얻었어. 손해 보는 거래였다는 뜻이니? 나는 잘 모르겠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전략) 어제만 해도 복수나 구원을 갈구하고 그가 절실하게 사람을 필요로 하거나 전화를 걸어오거나,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되기를 바랬는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동안에 상대방은 멀리서 즐거워 할 수 있어. 너를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복수심은 곧 그리움과 구속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며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날이 온단다. 거리에서 그 사람과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아. 그 사람이 전화를 걸면 예의바르게 대꾸를 하고 그 사람이 만나고 싶어 하거나 만날 수 밖에 없으면 만나는 거야. 굳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중략) 이제는 복수를 원하지 않아, 정말이야. 진정한 복수, 유일한 완벽한 복수는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그 사람이 이제는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랄 일도 없는거지.

이별을 당하고 (혹은 결행하고)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상처냈었던가. 과거를 희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수정해야만 했는가. 마라이의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누군가와의 이별에 라벨을 붙여가는 단계에 있었다. 좌절과 분노와 이성의 단계를 지나 나의 잘못과 그 사람의 잘못을 구별할 수 있었고, 자신의 나약함과 허기와 어두움에 질려있기도 했다. 그 사람의 괴로움을 위해 마치 악마처럼 집착하고, 그의 행복함을 순교자처럼 바라던 시간조차도 끝나 있던 시간. 잊어버린 척 털어내거나 기뻐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지친 상태였다. 어느 순간에야 문득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순간 그가 나의 삶에서 온전하게 빠져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길고 축축한 끝나지 않을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았는데. 그 터널의 끝은 광희라고 생각했건만 기억나지도 않는 틈에 빠져나와 이미 빛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아, 인생의 어느 한 시간이 역사가 되어 끝나 있었다. 앨범에 년도를 매기듯 사진에 제목을 붙이듯 시간의 현재형은 사라지고 끝장조차 이미 넘어가있었다.

엄청난 쾌감과 안도감을 즐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씁쓸함에 떨었던 것 같다. 마이너스적인 생각을 할 때가 차라리 나았을까, 그때는 애정이나 연민이나 하다못해 원망이라도 들어있었을텐데. 이제는 무색 무취의 투명한 병 속에 시간이 봉인되었다. 한 때는 가장 가까웠던 어떤 이가 이제는 그저 A나 S등의 이니셜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 말끔함에 놀랐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 어느 곳에서도 그때의 그 아름다움을 지닐 수 없기에. 허망함에 웃었고 쓸쓸했다.

일롱카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때의 내가, 아니 우리 모두의 '그 때'가 떠오른다. 페터와 관련된 시간들이 박제된 생물처럼 그녀 인생에 전시되었을 때, 페터와 그녀의 행복이 서로 조금도 이어져 있지 않음을 깨달을 때, 일롱카는 세상의 빛을 다시 발견했을까. 그녀는 사실과 감정을 얼마만큼 잘 구분했던 것인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광기는 그 순간의 그들의 세계관이 ‘그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데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광기는 종종 상대에 대한 미화와 자기연민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말이다. 페터의 모습을 바라보며 화장을 다듬는 그녀, 악어 가죽 지갑을 그저 ‘물건’이 아닌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일롱카의 모습을 두고 의구심과 연민으로 마음이 싸늘하다.

그래서인지 일롱카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페터에 대한 거부감으로 배가시켜 책장을 넘겨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일롱카의 시각처럼 그는 무뚝뚝하고 낯설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그토록 무자비하고 냉담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상대의, 때로는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상대가 그 사랑을 받을 마음이 있건 없건을 떠나서- 늘 고독하다는 것 또한. 페터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가 사랑한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는 하권으로 넘어간다.

 

 


* 하권의 리뷰를 이어서 올리기 위해 (무려) 작년에 쓴; 글을 일부 수정해 재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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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9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0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봄, shining님의 추천 책, 음악은 모두 성공이었기 땜에, 이 책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Shining 2011-08-01 14:55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소 부담스럽지만(우물우물;) 이 책만은 자신있게 추천합니다(으쓱으쓱). 산도르 마라이니까요_-* 『열정』과 함께 그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하권보다는 상권이 좋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