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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L, 너는 며칠 전 내게 가장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냐고 물었지. 너는 소설을 책을 곁에 두고 사는 편이 아니었고 때문에 일종의 추천을 받기 위해 물어본 것이 아님을 안다. 그 질문은 '요즘 너는 어떠냐'는 말의 다른 표현이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지금의 나를 대변할 것이라 너도 나도 확신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너는 물었고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가끔 숨기거나 바꾸거나 모른 체 했다. L, 너는 내가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부러 찾아 보지 않는 친구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그것에 대해 했던 거의 모든 말을 기억했다. 예를 들어볼까. 너는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읽지 않았어도 로맹 가리가 누구인지 그게 어떤 소설인지 왜 그 소설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너는 모두 기억했다. 나는 가끔 그런 너의 면들이 당혹스럽고 무섭기도 했다. 너와 나는 만난지 15년이 되어가지 않은가. 그런데 너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과 딱 한 번 밖에 말한 적 없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느냐. 때문에 지금 너는 존 하트의 신작을 읽었다는 내 대답에 함의를 짐작하려 하겠지. 너는 기억도 하고 이유도 알겠지. 『라스트 차일드』와 『몬스터콜스』가 유독 마음이 쿡 박혔던 까닭.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아이들, 싸우고 뒹굴고 진흙 속에 나동그라진 채 진실이라는 벽 앞에 무릎 꿇린 아이들, 깊은 눈동자에 깃든 절망과 고독, 분노와 허무 같은 것들이 얼마나 시리고 서럽게 다가왔는지 너는 이번에도 기억할 것이다.
사실 내가 선뜻 대답 하기 어려웠던 건『아이언하우스』의 줄거리가 사실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를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일급 킬러, 범죄 조직, 조직의 탈퇴, 아름다운 여인과 도주라니.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내용의 헐리웃 영화만 해도 열 개는 찾아낼 수 있겠지. 더군다나 냉혹한 풍경에서 난데없이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시점이나 유달리 "자기야"를 남발하는 초반부 대사 때문에 맥이 풀렸다. 설렁설렁 읽어야겠군, 귓바퀴를 긁적거리며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공 마이클과 노인(오토 케이틀란)의 시선이 맞닿는 부분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좋은 것 아닌가. 이런 부분들 말야.
하지만 노인은 굳이 그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과 결과, 선택과 대가.
노인 역시 그의 스승이었고, 그의 죽음을 통해 마이클은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에도 노인은 단 한 번도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천박함에 슬퍼했다. 잃어버린 여인들을 그리워했고, 딸이 없었던 걸 애석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껴안고 살았던 세계가 너무 좁았던 것에 한탄했다.
노인과 마이클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없었고 헛된 욕망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힘이란 음식과 거처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도수에 지나지 않았다. 혹독한 어린 시절이 남긴 교훈이었다.
아아, 너의 표정이 떠오르는구나. 항상 너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구나. 대견하고 안쓰러운 표정. 안타깝다, 는 마음을 누군가 네 얼굴에 휙 끼얹어 놓은 듯한 표정. 누가 보더라도 씁쓸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정.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드는건가.
L,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이클을 생각해면 이상하게 헐리웃 배우 마크 윌버그가 떠오른다. 고독하고 피곤하고 의지력이 강한 남자라면 응, 맞아, 맷 데이먼을 떠올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마크 윌버그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지? 마이클에 대한 키나 외모에 대한 어떤 묘사와도 관계없이 한 번에 떠올랐는데 막상 떠오른 이상 다른 인물은 생각이 나지 않더라(아비게일이란 인물은 줄리안 무어나 제시카 차스테인이 떠오르더군, 이것도 묘사와는 관계없이 말이야). L, 나는 늘 정서가 안정된 사람이 좋았다. 감성적인 사람이 좋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인내심과 집요함을 가진 아주 단단한 사람이 좋았지. 감성적인 사람들은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이 때론 지나치게 연약하고 섬세한 면으로 나타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C가 그랬지. C가 왜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나는 그 낙차를 한없이 바라보다 지치고 말았었지. C의 섬세한 문장이 좋았지만 그 문장을 나오게 한 마음들이 이따금 피곤해졌다. 그래, 나는 자신의 기분만으로 타인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고 의연한 사람을 좋아했지. 그렇게 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이 마이클이라는 남자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일류 스릴러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이고 그래서 꽤 도식적이지만 그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지. 강하고 생존본능이 강하고 스스로를 폄훼하지도 숭상하지도 않고 약자에게 약하고 어떤 원칙이라도 일단 수립한 후엔 무조건 지킨다, 침묵의 의미를 안다, 는 것 등등.
(전략) 그리고 그 오랜 세월 내내 마이클은 노인에게 왜 그 힘든 길을 선택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인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사내라면 그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만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마이클은 노인의 팔을 똑바로 펴고 가슴에 구겨져 있던 담요를 가지런히 폈다. 그리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노인의 뺨에 키스하고, 다른 쪽 뺨에 또 키스했다. 마침내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침대 옆 테이블에서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집을 집어 들고, 오랫동안 서서 노인을 내려다봤다. “정말 제게 잘해주셨어요.” 마이클은 그 책을 가지고 나왔다.
거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분에선 약간 뭉클하기도 했다. 그리곤 다시 냉정한 어조로 돌아와 존 하트는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라고 -내가 뭐라고- 생각했지. 우선, 매력적인 주인공을 설정할 줄 알고 그 다음, 매력적인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해야 독자들이 그 캐릭터에 편에 설지 알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울리는 법을 알지. 웃음보다 눈물이 기쁨보다 고통이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니까. 나를 웃게 한 작가는 작품만이 작가의 이름만 기억나지만 나를 울린 작품은 작가, 제목, 그리고 문장까지 기억하니까. 사실 문장력도 꽤 좋았는데 덕분에 발췌 못하는 내가 쪽수를 일일이 적어뒀지. 잠깐, 그래 이 부분.
그것은 둘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거짓말이었다. 새벽의 손가락은 아직 하늘을 할퀴어 빨갛게 물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 내일은 오지 않았다.
줄리앙이 말한 게 분명했다. 말과 눈이란 잉크로 그 그림을 색칠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열어 보이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줬을 것이다. 줄리앙은 자신의 감정을 남과 나누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줄리앙의 힘은 타인의 선의, 어렸을 때 망가진 적이 없는 강하고 현면한 타인들의 선의를 믿는 데서 비롯됐다.
아직까지는 어떤 게 거짓말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플린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그 작은 거짓말들이 뭔가 더 큰 거짓말의 열쇠가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사람들은 -편의상 분류하길- 장르문학이라면 문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대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골조를 축조하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탁월한데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조율할 줄 알아야 하고 문장력 또한 기막히지. 스티븐 킹도 존 스칼지도 마이클 코넬리와 스콧 스미스, 로렌스 블록(얼마 전에 읽었던 그 끝내주는 제목, 응, 『아버지들의 죄』의 작가)도 그렇잖아. 존 하트의 문장력도 발군이더라.
하지만 작가의 문장에 비해 이 책의 만듦새는 아쉽다. 메인카피는 물론 앞, 뒷표지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거든. 반전을 언급하라는게 아니라 '사랑이야기'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불편했지(넓은 의미에선 사랑이겠지만). 존 하트가 다루는 이야기는 단지 한 여자와의 사랑만이 아니라 동생, 가정, 가족에 대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체된 가정, 지키지 못한, 지킬 수 없었던 가정과 또 하나의 가정을 위한 간절한 바람 같은 것. 때문에 이야기는 A로 시작해서 B,C,D로 흘러가는데 이 와중에도 A알파, 베타, 감마 이런 식으로 곁가지가 많이 생기는구나. 덕분에 산만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반전보다는- 그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고이지 않고 콸콸콸이든 졸졸졸이든 계속 어디론가 흘러가거든. 당연히 독자인 나는 그 위에 뗏목을 띄우고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으니. 나는 호수에서 강으로 바다로 점점 흘러든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독자가 다음 장을 넘길지를 아주 잘 아는, 서사 장악력이 좋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단 두 권만으로 이 작가가 '좋다'라고 생각했던 건 작가 스스로의 저변에 깔린 가치관 때문인 것 같다. 별 것 아닌 듯 써내려간 짧고 강력한 문장, 예를 들면
어떤 행동을 하건 결과가 따르고, 어떤 선택을 하건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노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점에 있어선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나쁜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수 있는지 처음 맛본 사람의 절망감.
세상은 잔인한 곳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실제 현실이 그런 것처럼 다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죽고, 부모들은 부모로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잔인한 행위라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우린 의심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어." 제섭이 말했다. "우릴 무너뜨리는 건 바로 진실이야."
와 같은 부분들. 『라스트 차일드』가 서사 그 자체, 아이의 태도만으로 사람을 망치로 탕탕 두드리는 것 같았다면 『라스트차일드』는 이렇게 무심하게 펼쳐진 적확한 표현들이 마치 스크류나사처럼 군데군데 사람을 구멍내는 것 같았다. L, 얼마 전 지친 얼굴로 너는 더 이상 공감이니 동감이라는 말을 믿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면서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 이해한다고 착각할 뻔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에게서 표정이 옮았다. 안쓰럽다, 는 물감이 내게도 수채화처럼 번졌다. 우리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짐작할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경험에 일반론이 있지 않은 것처럼, 삶에도 일정한 톤은 없었다, 고 말했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나도 모르게 생각해봤다. 우연처럼 불행하고 필연적으로 고독한 어린시절을 보냈을까. 어떻게 이렇게 절망과 좌절, 회의와 자책에 대해 짧고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강의 글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삶의 끝까지 내지른 사람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 피로, 애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가까스로 가지 하나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 그 사람이 다시 삶이라는 대지로 올라오려고 노력하는 듯한 처절함과 처연함 같은 것 말야. 존 하트의 문장 면면에는 서사에는 묘한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의 절대적으로 그러나 타의로 불행을 너무 일찍 배운 사람들의 강박, 강함과 약함이 와이퍼가 되어 이야기라는 유리를 닦아내고 있는 것처럼.
그래, 냉정히 말해 그에게도 분명 약점이 있다. 나로선 두 번째로 읽는 글이라지만 그는 매번 유사한 주제 -아버지의 부재, (다의적 의미에서) 남겨진 아이들- 를 쓰고 있다는 면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편이한 소재로 이야기를 갈무리 지으려는 모습 같은 것들이 걱정스럽긴 하다. 하지만 나로선 그가 자신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몹시 불행하고 부조리한 것을 가르쳐주는 어른이 존 하트라면 나는 그 뒤에 선 참관자일 수밖에. 진실이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반발할 수 있겠냔 말인다. 어떤 숭고함이나 존엄함이 아닌 그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이 있던, 그런 사람에게 달라붙은 껍질같은 체념에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L, 공정하게 바라보자면 역시 그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에겐 이야기를 축조하는 재주가 있고, 인물을 어떻게 창조해야하는지를 알며, 스릴과 서스펜스의 이완과 수축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의 본질을 정확히 아는 작가를 어떻게 좋은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단 말인가,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