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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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일들은 연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마치 필연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중첩된 우연이 특정한 정조나 감흥을 더 깊은 수렁 속에 밀어넣는다. 예컨대 일어난 순서는 이러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을 봤다. 치매를 앓고 있는 마조리에겐 하나뿐인 딸 테스와 사위인 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월터가 있다. 월터는 인공지능인 만큼- 테스와 존의 이야기로부터 마조리의 추억을 마치 월터 자신의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하지만 그라고 늘 완벽한 건 아니다. 때문에 그는 마조리가 그 대신 ~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다음번엔 마치 그녀와 그의 기억처럼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인공지능 월터는 전적으로 마조리를 수반하기 위해 존재할뿐더러 그에게 정보를 주는 존 역시 사위인지라 애초 존의 진술조차 완벽하진 않기 때문이다. 월터와 마조리에게 있었던 진짜 일들은 두 사람의 기억속에만 남아 있으므로. 연극을 원작으로 했다는 영화는 마치 연극처럼 막과 장으로 구분한 구성을 갖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며 인공지능의 모습은 월터에서 마조리, 다시 테스의 모습을 갖는다. 진짜월터와 마조리, 테스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모습을 갖고 대화를 하고 기억을 완전하게 나누는 식이다. 노쇠한 존의 모습과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우리(관객)는 비단 치매를 앓는 마조리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기억이 조금씩은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포즈의 그 날 본 영화가 <카사블랑>카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인줄은 알았으나 그게 극장도 아닌, 모텔에서 TV로 본 영화라는 것은 몰랐다. 마찬가지로 마조리가 확신하며 말하던, 사프란색 행진은 벤치에서 본 것이 아니라 TV 속 화면이었다. 때문에 기억이란, 결코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면 관건은 기억의 온전함이 아닌 그 기억을 둘러싼 환경과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이 달라져도, 기억의 디테일이 사라졌다 해서 그 감정마저 거짓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기억이란, 사랑이고 관계며 상처와 원망이란 그렇게 깊고 깊고 어려웠다.

 

영화를 본 다음날에 친구를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그녀가 멀리서 오느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절반쯤 읽었을 때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오랜만이라 혹시라도 어색하지 않을까 내심은 염려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화는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 날 밤의 공기처럼, 앤틱한 가게에서 흐르던 재즈팝처럼. 하지만 안녕을 고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지자 설명하기 힘든 공허감을 느꼈다. 버스 유리창에 기대서 우리가 나이를 들었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와 같이 냉소적이었으나 좀 더 어릴 때 가졌던 뜨겁고 열정적인 비관이 아닌 노인의 한숨 같은 체념을 품고 있었고 올 초에 힘든 일이 많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그녀는 이제 흘러간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10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뜨거움과 질척거림이 신기하고 대견하고 불편했는데 이제 그녀는 내일 출근할 이야기와 돌아올 휴가에 대한 기대 외엔 지난한 관계에 대한 고민과 미련은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도 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날에 품었던, 그 광막한 외로움이 뭔지를 알 것 같았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때로는 합쳐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원제 Levels of Life)는 지극한 러브 스토리다. 물론 줄리언 반스의 여타 다른 책들이 그랬듯 이 책 역시 처음부터 그 맥락을 드러내진 않는다. 엄청나게 거시적인, 달리 말해 전혀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줄곧 꺼낸다. 두 번씩이나. 나다르와 베르나르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지만 그게 이 책의 주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갸우뚱해질 무렵, 세 번째 변주가 등장한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곧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땅에 있는 기구가 땅을 밀어내고 하늘 위로 오르듯이, 그도 아니면 반대로 하늘에 있던 열기구가 천천히 하강하듯이, 삶의 층위라는 제목처럼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의 위치가 필요했나보다. 쓰라는 독후감 대신 영화와 친구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글의 본심처럼 말이다(그렇다고 감히 나와 작가를 동일시함은 절대 아니다).

 

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은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인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거소가,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구성처럼, 마치 연극처럼 장과 막이 나뉜 글 역시 뒤로 넘기다보면 본의를 알게 된다. 초반에 난해해보이는 난삽해보이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별한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상실에 대한 지긋한 상처의 기록이며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 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그녀는 늙는다는 개념을 증오했다. 이십대부터 자신이 마흔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이어나갈 삶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고요해지기를, 함께하는 옛 추억들이 늘어나기를 고대했다.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주제가 결혼으로 흘러갔을 때, 이마저도 우리가 나이를 먹었구나 실감했다. 더 이상 비장하거나 불안한 투가 아닌 덤덤하고 여상한 어투로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편적인 이야기, 대체로 유아적인 남편과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와 험난한 세상과 가족의 굴레와 무게에 대해서도 말을 나눴지만 결정적으로누군가와 함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공간을 나눠 쓰고, 생활방식을 타협하고, 배려하고 배워가고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들. 가족과도 오랜 시간을 들여 타협했고, 여전히 맞지 않은 부분이 산재해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사람과 함께 집을, 방과 침대를 나눠 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에 대한 탄식을 나란히 뱉었고 때문에 결혼이란 무모한게 아니라 용감한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줄리언 반스는 (우리가 생각한) 용감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즐거워했던 것은 스스로가 앞서 말한, 생활공간을 나눠 쓰는 등의- 결혼생활 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아내와 하는 결혼생활을 아꼈고 거기서 활력과 안정을 얻었다. 때문에 상실 이후는 더더욱 힘겹다. 그를 위로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해보라며 권하기도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나 여태까지의 일상을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일들을 아내와 함께 하는 것, 혹은 혼자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아내에게 설명하고 조언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없이 하는 일을 즐겁지 않거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사별의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부하며 유일무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한 비교 하나를 들어보자.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다른 운전자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별의 아픔, 상실을 이렇게 이성적으로, 자신의 슬픔의 단계와 감정을 분석해서 쓴 글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놀랍게도 세상에는 자신의 슬픔도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에겐 단계와 층위와 해부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작가가 그렇다고 단정지으려는게 아니라 내가 그랬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해서 더 괜찮은 건 아니다. 작가는 중간중간 자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단 이야기를 한다. 어조가 담담해서 마치 농담처럼 들리지만 분명 진심일 거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떠나간 아내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며 자신마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내의 기억도 소실한다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죽음 자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보다 유실된 기억과 사라지는 존재감이 두려워서 죽음을 거두는 마음이라니, 상상하기가 어렵다전날 본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친구와의 만남과 그날의 분위기,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기억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대단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잔인한 거짓의 파편이기도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드러났던 선의의 거짓말과 어긋난 기억을 듣다 보면, 아내를 담고 있는 자신마저 떠나는 것이 두렵다는 작가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한다.

 

진단이 내려진 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는 37일이 걸렸다. 나는 그 사실을 추호도 회피하는 법 없이 늘 직시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미친 사람의 지혜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거의 매일 밤 병원을 나서면, 그냥 하루 일과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내가 분한 마음으로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들은 어쩌면 저렇게 게으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자기들의 무심한 옆얼굴을 여보란 듯 보여주고 있단 말인가. 세상이 이제 이렇게 변하려는 참인데.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도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사별의 고통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와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모습조차 사람들은 요즘 좋아 보인다며 인사를 건넸고 옛말에 남의 말도 석 달이란 말이 맞긴 한지, 있었던 일을 잊고 같이 여행을 가자며 조르는 사람이 신기했다. 머릿속 한 편으론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란 것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어째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인지, 영화에선 툭하면 행성이 부딪히고 외계인이 불시착하던데,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돌아오는 길에 그리도 우울했었나보다. 있는 힘껏 아끼거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도 열정을 다해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는 상태가 평화로운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세상을 살리는 일, 달이 차고 저무는 일에는 관심도 없는 분노에 찬 상실감을 겪는 작가보다 내 자신이 더 노인이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화를 내거나 슬픔을 느낀다는 일들도 기실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집에 거의 다 와서 택시기사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즐겁고 뻔했다. 그러다 마침내 치고 들어오는 경쾌한 질문.

아내 분은 주무시고 있겠네요?”

말없이 감정을 억누른 끝에 나는 가까스로 찾아낸 유일한 말로 답했다.

그러면 좋겠네요.”

 

이제껏 하나였던 적이 없었던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그리고 하나였던 것을 둘로 쪼개는 것.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둘의 공통점은 용감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했던 것처럼, 열기구를 타고 정확하지 않은 하늘의 틈을 헤치며 날아오르듯, 두 사람이 결합하는 과정과 서로를 잃는 것, 그 후에도 계속 묵묵히 살아가는 것 역시 내게는 똑같이 지극히 용감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용감한 사람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랑을 안고 살아가는 모두의 밤과 낮이 오늘도 평안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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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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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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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백 번 정도 한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개인사를 듣는 것이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는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다.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애정에 눈이 가려지기 마련이고 헌데 인간이란 본디 얼마정도는 서로를 실망시키니. 혼자만의 믿음이 깨지거나 바닥없이 아스라한 배신감에 시달리다보면 가능한 한 사적인 부분을 눈에 두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물론, 언제나 잘 되진 않지만 꾸준히 시도한다. 배우는 캐릭터로, 작가는 오로지 완성한 글로 판단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이 책은 그런 원칙의 면에서 적합하다. 번역가가 이야기해주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는 어느 정도의 개인사가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써내려간 의도나 의중에 대해서일뿐 그들의 성격이나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번역가가 자신이 만난 작가들에 대해서 써낸 에세이로 분류되긴 하나 예상 이상으로 평론적이며 다소 학술적인 접근법을 갖춘 책이다. 일부 발췌한 문단을 빌려오면 이러하다.

 

그는 1959년 첫 장편 구빈원 축제로 미국 예술원 로즌솔상을 수상했고, 이십대 후반인 1960년에 달려라, 토끼를 출간하여 그 세대의 대표 작가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인 1963년에는 켄타우로스로 전미도서상을 받고, 1964년에는 최연소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업다이크는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업다이크가 젊은 시절에 반짝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평생 우려먹는 작가였다는 뜻은 아니다(업다이크 자신은 불가리아 여자 시인에서 베크의 입을 빌려 그런 자화상을 슬쩍 그려내기도 하지만). 상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십대에 들어선 1981년에는 토끼는 부자다로 퓰리처상, 육십대에 들어선 1991년에는 토끼 잠들다로 다시 퓰리처상을 받았다(소설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작가는 업다이크를 포함하여 미국에서 세 명 뿐이다). 토끼는 부자다를 발표한 직후인 1982년에 타임은 업다이크를 두 번째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는데, 이때 표제가 오십 세에 위대해지다였다.

 

(중략) 업다이크는 상복도 많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68년에 발표한 커플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일 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 젊은 시절 잠깐 시민권 운동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 국가기구와도 대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젊은 시절에는 국무부에서 파견한 미소 문화교류 문화사절로 동구를 순회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부시 대통령 부자에게 각각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에 영화적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나보코프가 영화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앞이 보이지 않는 알비누스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영화로 본다면 스크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마지막 장면도 이 소설을 쓰던 시점에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영화와 소리의 결합(1929년에 최초로 도입되었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금은 상투적 수법이 된 지 오래지만, 오나전한 암흑 속에서 소리만 들려줄 때 오히려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알바누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눈앞에 드러나는 현장을 나보코프가 무대 지시 사항이라는 말을 앞세워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러 해석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영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은 플롯의 전개 속도, 또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딱 영화로 만들기 좋게 짜인 플롯과 대사이고, 그런 면에서는 오늘날의 대중소설과 흡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영화적이라는 평이다.

 

앞서 밴빌이 조이스에게 받은 영향을 이야기했지만, 밴빌은 가디언과 이야기하면서 모든 아일랜드 작가는 조이스 추종자와 베케트 추종자로 나뉘는데, 자신은 베케트 진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특히 아일랜드 내에서 밴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가 능력으로 보나 성취로 보나 베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존 업다이크의 수상경력과 이력, 상업적 성취에 대한 정보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향한 대략적인 중평, 밴빌 자신의 발언과 밴빌을 향한 발언을 인용하는 와중에 자신이 가진 태도나 의견은 숨기는 편이다(물론 이런 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자체가 저자가 그러한 논조에 동조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나). 가능한 한 독자에게 사실만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인상적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을 꺼내든 독자들의 호와 불호는 나뉠 수도 있겠다. 재밌는 건 출판사 역시 이 점을 의식한 것 같다는 짐작이다. 번역서 외에는 책을 내지 않은 저자가 이 책과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두 권을 동시에 발표했다. 물론 같은 출판사다. 공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가벼운 에세이나 일상의 에피소드, 저자의 번역 원칙 등이 궁금하다면 다른 한 권을 찾아가면 된다는 안내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거나 재미가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저자의 이야기도 겻들어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번역과 관련된 그의 생각 일부를 읽을 수 있는데다 작가들의 이야기 중에도 문득 자신의 의견이 새어나올 때도 있다. 이런 식이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 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척하는 삶에서 끝애와 하타가 기대하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사십대로 들어선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로 한 바퀴 원을 그리듯이 다시 히스로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내부보다는 외부를 관찰한다. 공항에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지만, 왠지 노스탤지어도 묻어나는 듯하다.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중략) 사실 나 자신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이야기들이 너무 자신의 내부에 몰입해 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이런 느낌은 알랭 드 보통과 나의 나이 차이, 즉 서로 속해 있는 인생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이p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불안에 와서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외부로 시선을 돌려,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이나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는 외부에 대한 관찰이 글의 출발점이 되는 지점에 이른 듯하다.

 

매카시가 긴 은둔 기간을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보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하니 궁핍도 대단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거의 팔 년 동안 헛간 같은 곳에서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했다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대학에 와서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자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그뒤로 일주일 동안은 또 콩만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곤궁한 생활에서도 죽으란 법은 없더라는 것이 매카시의 말이다. 정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꼭 어딘가에서 살 방도가 나타나곤 했다(한번은 코카콜라가 지원금을 주었다고 하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유명사가 사라진 로드의 흑백의 세계에 빨간 코카콜라 캔이 도드라지게 등장하는 것이 그런 인연의 소산이 아니겠느냐고 한마디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일화 중심이고 의견을 표명할 때 마저 꽤 조심스러운 태도다(알랭 드 보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저자의 생각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 같다). 일각에선 남의 이야기를 빌어온 것처럼 신중하다못해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는 저자로서, 특히 자신이 만난 작가들을 향한 존중과 애정이 깃든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나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별개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겐 일종의 길티플레져 역할을 할 수 있다.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고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작품과 작가 개인을 연결하고 있으니. 

 

저자가 워낙 유명한 번역가인데다 걸출한 작가들의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책에 인용된 작가의 목록만 봐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독자도 많을 거다. 책을 좋아한다면 아마 이 중 적어도 한 명쯤은 좋아할 게 분명하고 작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본 책이 한 권 이상은 될 가능성도 높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저 '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이 흥미롭지 않기 어렵다. 이 책을 읽고나면 필연적으로 이 안에 들어있는 작가들, 그들의 책을 더 만나고 싶어진다. 그러니 짓궂게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자기홍보 수단이 어딨으랴(작가와 독자 사이의 연결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선 번역의 본질과도 비슷한 책이니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가 -번역책으로 만났을 때도 느꼈듯이- 글을 잘 쓰는 문장가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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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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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 때는 질리지도 않고 많이, 열심히 읽었다. 재밌는 것은 재밌는 대로, 재미가 없다 해도 없는 만큼, 좋은 것은 좋되 별로인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자세였던 것 같다. 지금보다 어렸고 또 여리고 유연했던 시기여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제는 더는 그런 식으로책을 읽지 않는다.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그 날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일테면 사람의 일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의 생애서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간 셈이다.

 

내게 다수의 일본 소설들은 그런 시기가 되어 과거가 되어버렸다. 한 때는 그런 정서들을 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서로의 날것을 보이지 않고 보지 않아도 되고, 생활력이 결여된, 그림처럼 아름다운 관계들. 헤어진 연인 사이에도 더없이 무던하고 가족끼리 상처를 주지 않고 친구라도 와나타베와 미도리처럼(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들) 지낼 수 있고,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연하고 미니멀한 삶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삶에 할퀴어지고 나니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쿨한 관계란 생각해보면 거기까지인 사이일 수도 있다는 것, 헤어진 연인은 결코 쿨할 수 없고 가족이란 본디 애와 증사이에서 줄다리를 타기 마련이며 와나타베와 미도리는 결국 친구가 아니었고 에쿠니 가오리의 주인공들은 불륜마저 쿨하다고 여기며 상대가 나를 돌아봐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남에게 상처를 줘놓고 자기연민으로 칭얼거리며 그 와중에도 일은 안 하고 고양이나 껴안고 사는 삶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삶은 대체로 그런 식인 것 같다. 좋으니까 싫어지고 좋은 점이 견딜 수 없어지며 더없이 미워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앞두니 감회가 새로워 서두가 길었다. 가느다랗고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옆으로 땋아서 묶고 에스닉한 셔츠와 펠트로 만들어진 가방을 들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낡은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녀. 요시모토 바나나를 떠올리면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책을 열었는데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쓴 웃음이 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반가웠다.

 

나는 지금도 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다만 장난으로 하는 놀이가 아니다. 높은 벼랑 위에서 물을 향해 뛰어내리는 아이처럼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푹 빠진 놀이다.

 

주인공 이름은 사야카. 남편인 사토루가 세상을 떠난 후 딸인 미치루와 함께 지낸다. 1층에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사신다. 어느 날 이전에 이 곳에 살던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는데 이야기인즉슨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지금의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마당에 소중한 뭔가를 묻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 말이라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데 혹 괜찮다면 방문을 해서 그 곳의 땅을 파도 되겠냐는 부탁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독특한 일이 생기네 하고 말겠지만 편지의 발신인이 오래전, 사야카가 스무살에 사귀었던 남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야카는 산사인 그의 집에서 함께 산 적도 있고 가족들도 모두 알았다. 당연히 돌아가셨다는 그의 어머니도. 한 때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진지한 사이였으나 모종의 사건이 발생해 그(이치로)와 그의 가족들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믿기지 않을 우연의 일치로 그와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야카는 일본인이긴 하나 발리에서 쭉 살았다. 문화인류학자인 부모님을 여의었기에 가족이나 형제도 없고 정해진 거처도 없다. 그리고 그녀에겐 이른바- 사이코메트리와 같은 초능력 비슷한 재능이 있다. 그녀의 결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지인으로 알고 지내던, 정말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었던 사토루가 시한부를 선고받자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정확히는 아이를 낳아달라고.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토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고, 그의 아이를 낳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둘은 일종의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심지어 사토루의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다 듣고도 그녀를 기꺼이 집안으로 들인다.

 

다소 비일반적인 설정과 상황이 펼쳐짐에도 이상하다는 생각보단 이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언제나 그랬다. 분명히 일상적인 이야기 임에도 오컬트 요소를 넣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말갛고 상냥한 남자주인공과 다정하고 너그럽고 강한, 진짜 어른이 등장한다. 대개는 할머니나 어머니, 이모 등으로. 여기선 사토루의 엄마이자 사야카의 시어머니가 그러하다.

 

네 손,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아팠겠구나.”

시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책임이나 상처나 장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전략) 우붓에 가면 멋진 그림도 사 오고. 새와 숲이 있는 걸로. 현관에 걸어 두련다. 우리 집에서는 잘 없던 일이지, 그림을 걸어 둔다는 거, 즐겁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왜 없어진다고 그래.”

나는 도무지 눈물을 거둘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시어머니가 전부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려 깊고 현명하다. 아들을 보냈지만 미치루와 함께 내 가족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사야카는 부모님처럼 사랑한다. 이 이상한 결혼을 받아들여준 것도 사토루와 사야카가 모르는, 혹은 눈치 채지 못한 점 덕이었다. 아들의 따뜻한 표정, 친구였던 사람의 아이를 낳겠다는 사야카의 결정. 이들 부부는 타이밍이 어긋난, 늦된 사랑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가 있고 이들의 사랑이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거리를 뒀기 때문에 서로를 나무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치로의 편지를 받은 사야카는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를 마주하고 후회를 접고 미련을 청산하고. 임신을 하고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를 안으면서도 변화하고 성장했던 그녀는 이제 완전한 탈피를 한다. 젊었던, 어렸던 시절을 묻어두되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단순하지만 묵직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서로의 옆에 선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미치루의 엄마로 사는 일,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만족하지만. 이들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의 스웨터와 가방 같은 것들이 되어 늘 따라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했던 시절.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첫사랑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문득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플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가 품은 사물이 되고 싶을만큼 강렬하게 뭔가를 염원했던 적이 있긴 했나. 아니지. 분명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읽었던, 지금보다 어리고 여리고 유연했던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그땐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이 내게 유효하게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반갑다는 마음이 든다. 늙고 낡고 시니컬한 나에겐 더 이상 아름답거나 주효할 수 없는 사야카의 사랑과 삶,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과거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겐 충분히 반짝거리는, 멋진 이야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어떤 시절과 시기를 지나는 이에게 이 책이 더욱 아름답길 바란다. 그리고 '이 작가 아직도 글을 쓰는구나' 하고 발견할 수 있고 '변하지 않았네'하는 아쉬움과 반가움이 공존할 수 있도록 요시모토 바나나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요시모토 바나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된 시기를 되짚어 보면 어떤 이는 옛날의 내가 읽던 그녀의 책을 보며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신기하다.


어떤 책들은 기억 속에서 계절과 함께 박제된다. 지르르르 귀가 얼얼해질 만큼 울어대는 매미와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티의 유리잔, 손안에 꽉 들어찬 청사과의 맛. 이 책을 떠올리면 아마 이런 것들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 자신도. 이 모든 것이 추억의 맛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달고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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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4 0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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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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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나는 왜 네가 아니고 너인가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자라면서 들은, 읽은, 때로는 출처가 불분명한 인디언들의 일화나 명언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인디언(정확히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지혜와 현명함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두 늙은 여자의 책 소개를 읽고서도 여타 다른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짐작했다.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 말이다. 보라, 책 띠지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하지만 막상 책장을 펴서 접하게 되는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든 개의, 일흔 다섯 해의 여름과 겨울을 보낸 노인들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들은 부족 전체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대개는 젊은 여자들이 그들을 보살피는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다른 노인들을 보살폈고, 그들에게 공동부양은 당연한 의무이나 책임이었느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자신의 몫은 해내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기아와 추위와 이동은 사람들로부터 온정을 앗아가는 대신 실리적인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족 전체의 손해일 뿐 결코 인력이나 노동력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사와 칙디야크는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그나마 그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빼앗지 않는 것, 그들을 직접 죽이지 않는 것(과연 이쪽이 더 잔인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이 부족과 족장이 베풀 수 있는 남은 정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당연히도 사와 칙디야크에겐 큰 슬픔과 두려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 거동도 쉽지 않은 이들을 놓고 떠나는 것은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가족이 없는 사와 다르게 칙디야크에겐 딸과 손자까지 있었으나 그들 역시 집단을 등지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곁에 서지 못한다.

 

이제 부족은 떠났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 사와 칙디야크에겐 무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복수심이나 반골기질, 아니면 차라리 치기에 가까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존을 향한 투지가 사와 칙디야크에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의지가 솟아났다. 게다가 그들은 둘이었다. 비록 상대도 나만큼이나 지치고 낡고 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 보다야 나을 터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죽자고.”

 

그들은 남은 짐을 꾸려 여정을 떠난다. 자신의 부족과 마주치지 않도록, 또 다른 포식자 즉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아. 그 곳은 어릴 때 그들(정확히는 그들의 부족)이 살던 곳이었다. 자신들처럼 늙은 이가 그 곳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그 곳이 그들 기억에서와 일치하다면, 고향은 안식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 일념으로 얼어붙은 강 위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무릎과 다리를 이용해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칙디야크는 몸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이 사의 미소 짓는 얼굴을 비추었다. 사는 자부심에 찬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수없이 했던 일이지만, 내가 또다시 해낼 줄은 몰랐어.”

 

칙디야크는 오랫동안 친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죽음은 반드시 닥쳐올 터였다. 그녀는 자신들 두 사람이 과연 이 엄혹한 계절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목소리 속에 깃든 열정이 그녀의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해주었다.(중략) 그러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힘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끼며 사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두 여인은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러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사는 오랫동안 사냥을 한 적이 없었고 오랜 시간 더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여겨왔기에 먹잇감을 발견하고 집중을 해 정확한 위치를 겨냥해 손도끼를 던져 해낸 첫 번째 성공은 의미가 깊었다. 비록 작은 다람쥐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이 어쩌면더 큰 사냥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존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노마지도老馬知途라고 하던가. 마침내 터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고 땔감을 주워 불을 피우면서 그녀들은 오래 전 가졌던, 이제는 잊혔다고 생각했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한다. 낮에는 사냥을 하거나 덫을 설치하는데 전념하고 밤에는 옷가지나 담요를 만들었다. 행동에 패턴이 생기고 몇 가지 요령과 기술이 붙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이동을 하고 사냥을 하고 심지어 식량을 비축하기까지 한다. 가끔씩 치받는 두려움과 설움을 묻어두고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최대한 깊게 잠을 자던 그들은 점차 서로를 좀 더 깊이 알아가며 지난 날을 떠올린다. 

 

그들의 부족은 이런 한가한 대화에 귀중한 시간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여인은 긴 저녁나절 동안 예외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상대의 힘겨운 과거에 대해 알게 되자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커져갔다.


사실 사와 칙디야크 모두 같이 지내기에 썩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둘은 불평이 많았고 쓸모없는 잡담을 하길 좋아하고 자신들의 나약함을 과시하거나 동정받으려는 태도를 취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지팡이는 커녕 사냥을 하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영민하다. 게다가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처럼 늙고 보잘 것 없고 성가신 상대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꽤 오랜 시절을 함께 했음에도 말이다. 사와 칙디야크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종종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삶과 그들이 어릴 적 보고 듣고 느꼈던 것, 한 때는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등. 대화를 나눌수록 사와 칙디야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연민하게 되고 지난 시절 자신들이 얼마나 짜증나는 사람들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두 늙은 여자』의 재밌는 점은 이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인디언의 지혜'라는 교훈으로 묶이는 결코 훈훈한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와 칙디야크는 버려졌고 부족들은 그들을 버렸고 심지어 버림받은 이들의 태도 역시 끈기 있고 현명한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인디언'이란 이름 하에 무작정 현자가 들려주는 훈화로 묶이지는 않되 그녀들이 절망하고 희망을 갖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반면교사를 통한 성장 이야기라고 할까. 사와 칙디야크는 힘이 없고 나약하고 의지 또한 없었지만 오히려 버려졌기에 자신들의 삶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 스스로가 강하고 현명하고 부지런하며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는 기세를 몰아 큰사슴을 쫓아갔다. 그녀는 젊은 때처럼 힘차게 달릴 수 없었다. 달리기라기보다는 절뚝거리는 경보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커다란 짐승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중략) 그녀는 자신이 그 큰사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즈음 그들은 살아남은 자신의 부족민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살아남은 노인들을 보며 경탄을 하며 용서를 구한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전히 배신감과 복수심을 잊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고 또한 딸과 손자가 보고 싶었기에 그들을 용서한다. 대신 자신들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립적인 객체로서 그들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가 떠올랐다. 버림받은 이가 대륙을 횡단하며 이동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살을 에는 추위와 배신감이라는 감정과 결국엔 수천 킬로를 가로질러 생존했다는 이력도 그렇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마지막에는 사와 칙디야크가 실제로 이동한 경로가 지도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독하디 독한 겨울동안 일흔 다섯, 여든의 노인이 이러한 길을 이동하며 생존했다는 사실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레버넌트>의 실제 인물인 휴 글래스도 4,000km를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등을 다친 후에, 기어서 말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인간이란 때론 또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가 깨닫는다(예를 들어 휴 글래스가 결국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점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이 글의 초반에 썼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두 늙은 여자』는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이 맞다. 책 띠지에도 써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옳다, 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성장소설이자 지혜로운 삶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예감은 틀린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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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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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작가가 말하길 요새의 문학은 위악적인 인물만 등장한다고 한다(팟캐스트였나 라디오였던가 아니면 지면 인터뷰였나. 분명 그 말은 또렷한데 이상하게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위선적인 인물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 인물이었다면 요새는 저마다 위악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차이가 뭘까 어느 쪽이 더 나은 예술의 화자일까 생각해보았다. 결국 뭔가를 꾸미거나 위장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한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요새는 희미하게나마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꽤 올드한 소설이다. 이른바 달동네라고 불리는 S동에 사는 주인공 고마니는 재개발이 몇 번씩 좌절된 지어진 지 40년이 되어가는 주택에 산다. 실패와 부진한 소득을 이유로 몇 번을 전업한 분식집 사장님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모자란, 하지만 사실 자신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라고 주장하는 어머니와 함께.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체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만 체조를 배우는 학생이 되어있었고 꿈은 고마네치처럼 뛰어난 체조선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느새 고만고만해진 삶을 살고 있는 현재는 실업자이기까지한 평범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한 주인공이다. 그녀가 천천히 회고하는 자신의 지난 삶은 특별할 것이 없다. 시작점이 평균보다 낮고 진폭이 클 뿐 가계의 부채라던가 재개발에서도 채택되지 못한 버려진 공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가난하고 별 볼 일 없긴 해도 부모님이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아,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그녀는 어릴 적 체조선수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열망만으로 체조를 배웠고 꽤 오랫동안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믿기도 했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고마니라는 것은 제2의 고마네치가 되기 위한 운명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나야 애니까 암것도 몰랐지. 근데 엄마는 어른이었잖아. 진짜 내가 체조 선수 돼서 메달 따 오고 그러는 거 기대했던 거야?”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너한테 체조 가르치는 게 좋았어. 엄마 노릇 하는 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내가 엄마 노릇 한 거라고는 그거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엄마는 그 이후로도 계속 먹여주고, 입혀주고, 꾸준한 잔소리로 나를 닦달하며 충실하게 엄마 노릇을 해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생각하는 엄마 노릇의 기준은 좀 다른 모양이다. 나는 왠지 씁쓸해 보이는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체조 선수를 꿈꾸며 에어로빅 학원에 다니던 열 살의 내가 아니라 그 시간들을 부끄럽게만 기억하는 스물다섯의 나였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원장도 그렇고코치도 그런 것 같고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아마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 되었다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디아 고마네치의 삶 역시 녹록하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사실은 시대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인생까지도 좀먹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을 했고 그곳에서도 적지 않은 고생을 했겠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 굳건히 제 삶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가 세운 기록과 이름 역시 불멸하지 않으며. 그에 반해 고마니, 아니 우리 대부분의 삶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일까 고마니가 하는 생각들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재능 부족에 대한 한탄과 게으름에 대한 수치, 비겁함에 대한 자기혐오, 그러나 나 역시도 이 정도는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자기연민까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퍽 공감간다. 


, 무슨 애들이 입이 저렇게 거칠어. 화장은 또 저게 뭐고.”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착한 애들이야.”

에휴, 우리 아버지,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가게 잠깐 비워도 오뎅 하나 꺼내 먹는 법이 없는 애들이야. 음식 남기면 안 된다고 꼭 싹싹 깨끗하게 먹고 가고.”

그것만 보고 착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너는 그럼 말하는 것 조금 듣고 쟤들이 어떤 애들인지 어떻게 아니?”

할 말이 없어졌다.


받아 적는지 잠시 조용하더니 경력이 십 년이나 되시네, 라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허허 웃었다. 경력, 경력이라. 십 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 취직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위악과 위선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본다. 악을 흉내내는 것과 선을 꾸며내는 것은 왜 다른걸까. 짐작컨대 위악이란 악, 혹은 나쁜 것을 연기하기 때문에 그 내면에 의식 속에선 스스로가 '적어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가정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위선은 스스로를 그리 훌륭하지 않게 평가하는 와중에 선을 추구하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확대 해석하자면 일종의 겸양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 책 속 인물들은 밋밋하지만 수수하고, 정직하지 못한 순간조차 솔직하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혐오를 하지 않거니와 에둘러 변명하지도 않지만 나서서 변호하지도 않는, 어찌보면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심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차라리 믿음직스럽다. 한국문학이 뻔하다는 담론에서 곧잘 등장하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약자에 대한 혐오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불륜이나 불손함 혹은 폭력이나 욕설 없이도 충분히 귀기울만한 이야기를 해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보면 어쩌면 실패 후의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생각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실패 이후의 어른이 된 나 자신도 지금처럼 성실히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희망마저 갖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작고 보잘것 없는 희망이었지만 이상하게 기운이 나고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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