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로를 앞에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게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어. 옛날에는 거기 있었던 뜨거운 뭔가를,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 비범한 것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 그것이 더는 내 마음을 떨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도 다시는 이 장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에리를 만날 일도 없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제각기 정해진 장소에서 각자의 길을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아오가 말했듯이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딘가에서 물처럼 소리도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투명한 슬픔이었다. 자신의 슬픔이면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슬픔이었다. 가슴이 헤집은 듯 아프고 숨이 막혔다.

 

 

언제까지고 그 세계에서 살았을 것이다. 찰나와 같은 광기와 백겁의 순수의 세계. 푸른 체온과 다홍빛 목소리의 세계. 완벽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만약 완벽이란 말이 허용된다면 감히 이것 외에 무엇을 자명할까. 무엇을 더해야하거나 덜어야 하는지를 몰랐기에, 본질적으로 더하거나 뺀다는 표현 자체를 잃어버렸기에 마치 프렉탈과 같이 완결된 세계. 공기조차 정연하고 사고마저 정밀한 세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살며 크고 작은 깊고 얕은 경험과 학습을 했을테지만, 그 세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이 있겠지. 그 세계가 아니었다면 카오스와 코스모스 따위는 알 수 없었을테지. 그렇게 제 몸짓을 키워가며 엷은 막이 씌워진 채 완결된 세계에서 혼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셰임, 스티브 맥퀸, 2013

 

관계를 품지 않고서야 관계로 다가가는 남자와 관계를 품어야만 관계로 집적되는 여자. 라면 관객은 그들을 연인 관계로 오해할 것이다. 감독은 관객의 오해를 이해시키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실은 남매 지간이다. 마음을 배제하고서야 몸으로 다가가는 오빠와 몸으로 품고난 후에야 마음으로 닿는다고 믿는 동생. 감독인 스티브 맥퀸은 자잘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무심하게 배제하거나 배치시킨다. 짤막한 대화, 현재의 장면. 관객은 유추할 뿐이다. 어떤 유추가 혹은 누구의 유추가 맞은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고로 내 것이 옳다, 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주장은 없다.

 

짐작 가능한 사실 : 브랜든이 열 살 때 남매는 아일랜드에서 이민 왔다. 아마도 부모는 정착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아니면 본디 무심한 부모였을지도. 남매는 방치되었을 것이다. 브랜든은 제법 듬직한 오빠였을 것이고 씨씨는 철부지 여동생이였을 것 같다(씨씨가 어지른 거실을 치우는 브랜든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해보인다). 타지에서 이방인이 되어 방임 된 남매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고 가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불안은 다른 방식으로 각자에게 똬리를 틀었을 것이다.

 

추측 1. 어쩌면 두 사람은 과거 일종의 관계를 가졌을지 모른다. 단 한 번, 단 하나의 몸짓이었다 한들 무엇이 중요한가. 잘못 된 자리에서 상처받은 그들은 '실수'를 했을 것이고 실수는 (브랜든의)혐오와 (씨씨의)경멸을 낳는다. 이 쪽에 무게를 싣는다면 발화점은 씨씨가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고 브랜든은 발화했을 것이다. 이 경우의 예측은 어쩌면 두 사람이 (실은) 사랑하는 사이일 추측을 낳게 한다. 이 경우, 현재의 손은 과거의 수치shame를 질질 끌려다니며 씨씨의 지리멸렬한 말과 전화가 브랜든의 질투와 한계에 복수하게 만든다.

 

추측 2. 벗은 몸에 대한 거리낌이 없는 태도, 아무렇지 않게 등으로 올라타는 몸짓으로 추측컨대 어린 시절 남매는 제법 사이가 좋았을 터였다. 타의든 브랜든은 동생을 돌봐줬을테고 아주 어릴 적엔 함께 목욕을 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최고로 최초로 아껴줘야 하는 가족이자 타자이자 여성이 최초의 욕망으로 최후까지 살아있다는 건 브랜든에겐 참을 수 없는 수치일 것이다. 씨씨에게 브랜든은 유일한 가족이자 동반자, 이해자이며 브랜든에게 씨씨는 유일한 파괴자이자 승리자다. 이 경우의, 과거의 수치shame는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함께한다.

 

추측2를 통한 결정. 영화의 장치나 균열은 추측1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들지만 추측2를 택할 것이다. 두 사람이 억압되고 얽힌 마음으로 서로를 저주하며 사랑한다면 그들의 죄는 한 가지다. 승인 될 수 없는 사랑. 그러나 브랜든이 일방적으로 -심적으로 성적으로- 씨씨를 욕망한다면 그의 죄는 몇 배로 늘어난다(물론 죄가 늘어난다고 반드시 죄책감 역시 그에 상응해 지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수치가 현재의 손에 붙들려 끌려다니는 과거라면, 후자의 수치는 자신의 발로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걸어다니는 떳떳한 얼굴을 가진 과거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사실만큼 강한 파괴력을 본 적이 없다. 온갖 것을 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마음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허무의 현실의 간극에서만큼 괴로운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결국 브랜든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일의 수치를 느끼는 후자의 인물이다. 그로 인해 그의 모순은 강해지고 학대 또한 깊어진다.

 

죄의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열 가지 죄가 한 가지 죄보다 더 큰 죄의식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중대한 일이 사소한 일보다 더 깊게 느끼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쪽에 의식을 싣느냐, 라는 인간의 무의식이 개입될 뿐이다. 죄의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죄를 짓든 짓지 않든 느끼는 것이다. 죄를 진 후엔 사후승인으로서 착종하고 죄를 짓지 않을 땐 가상의 죄를 떠올리며 몸을 떤다. 실제의 죄와 죄의식 사이에 반드시 인과 관계가 존재하진 않는다. 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죄라고 믿느냐, 죄를 지은 후에야 죄라고 믿느냐, 라는 인간의 의식이 개입할 뿐이다.

 

라는 것이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의 가정. 내가 스티브 맥퀸이었다면, 두 번째 추측에 힘을 싣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무, 무엇도 잡을 수 없는 체념, 탐닉하는 죄가 부끄러워 탐닉하는 죄의 반복, 내부의 악마와 외부의 천사의 언쟁. 브랜든을 그 모든 공허와 싸우는 인물로 그려낼 것 같다.

 

 

 

 

 

Andrew Newell Wyeth, Airborne, 1996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그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너는 세계의 바깥으로 걸어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에 새삼 전율한다. 돌아갈 수 없는 명징함이 주는 지르르한 두려움과 그리움. 할 수만 있다면 지구의 바깥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은 수치와 절망. 어떤 달변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 슬픔도 아픔도 그리움도 후회도 그럭저럭 올바른 감정. 그러나 완전하진 않다. 굳이 말하자면. 비감하다. 단어가 입천장에 닿아 까슬까슬하다.

 

 

우주 내 시간이 순응적이고 유연하긴 해도 오직 현재만이 존재함을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미래로 가서 상황을 변화시킬 수도, 과거로 달아가 무언가를 바꿔놓을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갇혀 있다. 비록 우리의 기억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볼 떄는 과거 역시 환각일 수 있다. 우린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는 문은 잠긴 채 저 먼 곳에 있다. 인류가 발명한 사진, 영화, 영상 기술은 과거를 좀 더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었지만, 우리가 벽에 걸린 사진이나 책상 위의 기념품 등의 물리적 증거들을 아무리 많이 모은다 해도 과거와 실제로 접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의 비극인 동시에 해방이다. 나는 올빼미를 보았던 그 밤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어린 나를 처음으로 두렵게 떨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설레게도 했던 최초의 폭풍우를 다시 겪지 않아도 된다. 실은 1초 전은 100년 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끝없이 재창조되는가! 또한 우리에게 미래는 불투명하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하면서 현재를 일종의 주변적 시각으로 보고 있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에의 절망과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의 확신. 영화도 소설도 시간조차. 무척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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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7-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Q84』가 목적을 가지고 한 걸음씩 다가가도록 정밀하게 축조된 세계라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문득 목격한, 접어둔 이야기를 내려놓기 위해 써내려간 세계같다. 전자가 감탄이 일 만큼 '잘 쓴' 소설이라는 감상이 든다면 후자는 감정에 탐닉해 적어낸 소설이라는 감상. 『1Q84』가 가장 멀리 넓은 깊은 곳으로 뻗어간 집적된 글의 완성이라면 『색채가 없는』은 여전하다 싶은 글. 여전하다는 건 좋은 뜻으로 한결같다는 것이고 나쁜 뜻이로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이미 완성된 세계'에 사용한다. 소설 자체는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소설을 지나는 바람 같은 통증에는 마음이 동했다.

2013-07-17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7-1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좋을 것 같아요, <세상의 혼>. 다른 책, 뭐지, 밤- 그것도 유명해서 기억하고 있는데 두 권 다 장바구니에 확 쓸어담고는 결제의 기약이 없;; 6,7월에 책을 진짜 많이 산 것 같아요. 이제 그 많던 적립금 다 없앴어 ㅠㅠ 알사탕도 다 바꿔썼어요. 으흙흙흙

<셰임>은 언젠가 보도록 할게요 :) 결국은 책도 보고 영화도 보겠다는 소리. (이런 약속은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어 ㅠㅠ)

Shining 2013-07-19 22:49   좋아요 0 | URL
좋아요 이 책. 좋네요. 아직도 다 안 읽긴 했는데(페이퍼 쓸 때 읽고 있던 책이었거든요. 바로 저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는ㅎㅎ) 좋네요. 밤의로의 여행도 좋던데. 하긴, 밤과 시간. 맙소사 어떻게 안 끌릴수가 있겠어요?(씨익) 저는, 책의 논지도 핵심도 당연히 엄청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서정이 있는 책이 좋아요. 어떤 얘길해도 -심지어- 뇌과학에 대한 책이라해도. 나름의 정서가 담긴 책을 사랑해요(잘 쓴 글, 좋은 책과는 좀 다른 의미로?) 그런면에서 이 책 좋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