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작가 - 43인의 나를 만나다
장정일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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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정일, 작가는 장정일의 서평을 읽은 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문화연구자 이원석에서 역사학자 하영휘까지 43인과 함께한 인터뷰를 묶어놓은 이 책은 장정일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또한 장정일 그 자신의 이야기기도 하다. “저자들은 내 서평을 완성시켜 주기 위해 동원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이 책은 그의 생각이 인터뷰이의 대답만큼이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문화계 43인을 소개하는 역할에 절대 소홀하지 않다. 장정일은 독자를 대신해 인터뷰이를 끈질기게 읽어냈고, 덕분에 읽는 이는 장정일이 아닌 인터뷰이의 이름을 듣고 책을 펼쳐 들고도 그들과의 밀도 높은 만남에 크게 만족할 수 있다. 장정일을 잘 알지 못한다면 관심이 가는 인물의 인터뷰부터 살펴보면서 그들과의 대화 속을 관통하는 장정일의 시각을 따라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더불어 장정일이 인터뷰이의 삶이 아닌 책을 기준으로 그들을 인터뷰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통로 삼아 새로운 책으로 건너가 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기는 좋은 방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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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우 2016-06-1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장정일이라는 작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군요! 좋은 서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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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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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받아든다. 매서운 느낌의 눈 한 쌍이 나를 노려본다. 띠지를 벗겨내면 그저 턱을 괸 남자의 얼굴이란 걸 알게 되지만, 어쨌거나 책 제목이 띠지 위에 있으니 띠지를 벗겨내기도 뭐하다. 책을 닫을 때마다 눈을 잠시 쳐다본다. 이 남자는 폴 오스터일까, 젊은 날의 폴 오스터를 바라보는 신의 눈일까. 저 젊은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솔직히 폴 오스터의 책을 한 권도 읽은 적 없으면서 이 책을 읽는 것이 괜찮은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다 읽은 지금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이 폴 오스터의 첫 책이라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이 정도의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린 시절의 그부터 알아가는 것도 좋지, 뭐. 일단 읽기 시작하는 게 중요한거다. 

 

  다른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 7살 이전 시절 이야기는 더더욱.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그 내용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어린이의 시각으로 어린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어른의 시각으로 이어나가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건지 판단할 수 없어 순수한 맛에 읽는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화자가 판단해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다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심정이 두 가지 나와 문득 과거를 생각하게 만들었는데, 하나는 '가끔씩 딱히 이유도 없이 당신은 갑자기 당신이 누구인지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당신의 몸속에 살고 있는 존재가 사기꾼으로 바뀌거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바뀐 것만 같았다.'로,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던 몇 순간을 연상하게 한다.

 

  대체로 그 순간들은 내가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난 때였는데, 별 것은 아니고 가령 명절이라 할머니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순간이라던가 내 방에서 자지 않고 엄마아빠 침대 옆에 이불을 깔고 자다 일어난 순간 따위였다. 몇 초쯤 지금 내가 어디있는지 파악하려고 하고 몸서리치게 낯선 기분을 떨쳐내려고 애썼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누군가와 말을 하거나 억지로 잊으려고 애를 쓰면 그 기분에서 벗어나곤 했는데, 언제까지 그 기분이 느껴졌는지 구체적으로 생각나지는 않아도 썩 좋아하지는 않았던 감정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가 프랭클린의 장례식을 보고 충격을 받아 슬픔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 모습을 기억하는 부분은 또 내가 생애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목격한 장례식을 떠올리게 한다. 하얀 옷을 입고 오열하는 것에 의미를 몰랐던 나는 그 공간이 그저 무섭기만 했다. 결국 밤에 귀신과 도깨비 그 중간의 무언가가 쫓아오는 꿈을 꿨는데, 예나 지금이나 달리기에는 전혀 자신이 없는 나는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뛰고 또 뛰었다. 비슷한 이미지의 도깨비에게 훗날 또 쫓기는 꿈을 꾼 것을 보면 어지간히 무서웠나보다. 하긴, 난 항상 겁이 많았다.

 

  이런 단편적인 공감을 하면서도 어쩐지 지지부진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지루한 내 마음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그가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어찌나 생생하고 어린 마음에 충격적이었을지 느껴져서 마치 영화를 같이 보는 양 마음을 졸였다. 아마 그 영화를 직접 보면 딱히 재미나지는 않겠지. 그 다음부터는 신나게 쭉쭉 읽었다.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와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남자는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래야지' 싶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는 나의 기분은 '이 사람이랑 친구하고 싶지는 않군'과 '작가의 감성이란 이런 건가? 올 신기한데?' 사이를 넘나들었고, 끝에는 썩 흥미로운 산문이라 결론내렸다. 꼭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젊은 미국인들이 주로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궁금증이 자꾸 생겨나는 건 재밌는 책이라는 증거다.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가 스타가 되기 전의 일상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 않기가 어렵다. 하루키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직접 에세이로 쓴다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몇 개월은 되고 남을 것이다(설마 이미 쓴 건 아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팬이라면 정말로 괜찮은 책일 것이라 확신한다. 중학생 시절에 '빵굽는 타자기'란 표현을 듣고 그 나이에도 대단한 카피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폴 오스터라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빵굽는 타자기'란 말과 이 책 한 권 만으로도 그의 작품 전체가 그려지는 듯 하다. 다른 것도 읽어야겠다.   

 

  추신: 일기에 대해 내가 40년 후에 할 후회를 폴 오스터가 미리 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도 나는 후회할 짓을 하고 있지. 여하간 겁나게 공감된다. 그러니까, 내가 읽을건데, 좀 열심히 쓰면 좋을텐데 말이야.

  당신은 그 당시엔 너무 어려서 나중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될지 몰랐다. 현재에만 갇혀 있어서 당신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가 실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일기장을 내려놓았고, 그 후로 47년 동안 조금씩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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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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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노 요코라는 사람은 나에게 작년까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작년부터 정말 읽어보고 싶은 책의 작가다. 책 내용은 일절 모르지만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라는 말을 책의 제목으로 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내용이 비록 내 마음과 맞지 않아도 일단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던지 당최 도서관에서 빌릴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알면 보통 남들도 다 알더라.

 

  그러던 차에 무려 신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가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 없이 집으로 배송되어 왔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하는 중에 이렇게 반색하고 좋아한 건 처음이야! 배송 온 첫 날부터 읽기 시작한 것도 처음인 듯 하다. 앗싸리 다 읽었지! 잊기 전에 얼른 리뷰도 써야지! 하고 쓴다.

 

  고작 작년에 소개되었는데 벌써 이렇게 인기가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좋았던 구절에 표시해 두었다가 리뷰에 남겨두고 있다. 혹여나 읽는 분들이 있다면 같이 원문을 읽어보시길 하는 마음이 하나, 나중에 내가 다시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 그런데 이 책은 한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 아니라! 한 단원 전체를 표시해놓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윤여정씨가 쓴 책 같지 않아?'하는데 오오. 정말이지 그랬다. 예전에 윤여정 배우께서 힐링캠프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매력적이시던지. 딱 그렇다. 시크하고 툴툴거리신 것 같은데 세련된 인간미가 배어나와서 볼매 of 볼매다. 어쩐지 일본의 또다른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윤여정style'에 빠져 있어서 그랬는지 이 책을 집필할 때 작가의 나이가 무려 40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이구, 몇 년을 제가 올려놓은 건가요! 내가 이렇게도 작가의 나이를 높게 생각했던 것은 그만큼 연륜의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책 말미의 옮긴이의 말이 이번엔 정말 내 마음 같았다.

 

수필의 기본적인 덕목은 달리 표현하면 꾸밈과 대비되는 '솔직함'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 쌓인 것들을 '사실대로' 뱉어 냈다는 것만으로

독자의 마음에 깊은 공감과 감동을 끌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표피적인 솔직함은 단지 가십거리를 더해 줄 뿐이다.

 

솔직함이 읽는 이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오는 것은 깊이가 있을 때이다.

그 깊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인생의 깊이, 그리고 깊이를 꿰뚫는 통찰력의 깊이일 것이다.

 

 

  사노 요코는 가벼운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가볍지 않다. 이런 언니가 내 곁에 있어서 서로 한없이 기대고, 또 깔깔거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아아. 당신은 왜 나와 다른 세대를 사셨나요? 뭐가 그리 급해서 벌써 가버리셨나요? 일본에 계셨더라면 저는 무작정 당신의 동네로 가서 당신을 발견하곤 '나는 당신을 아아아아주 좋아합니다'라고 당신 얼굴 앞에서 외치고 싶어요(당신이 좋아할 지는 알 수 없군요. 어쩌면 당신은 수필에 '나는 이상한 한국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여자는 다짜고짜 내 앞에서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면서 쓰실지도 모르겠네요).

 

  박연준/장석주 작가가 쓴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중에서 '와인 한 병이 누워있다'는 단원이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가끔 그 에피소드가 문득 생각나는데, 따뜻하면서 어쩐지 귀여워서 나의 남편도 그랬으면 싶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문득 생각할 이야기가 한 단원으로 끝나지가 않는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인류여, 인테리어 잡지를 산 날, 유화 물감, 이게 인생이야'는 소단원(자꾸 챕터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지만 국어를 써야지)인데 각각을 전부 베끼고 싶다! 그런가하면 '1만 번 회전하는 세탁기'는 대단원 전체를 베끼고 싶다. 이걸 뭐 어찌할 수가 없다. 사실 뒷부분은 표시하기도 지쳐서 남겨둔 것도 있다.

 

  욕심을 버리고 딱 한 군데, 내가 만약 이 책의 내용을 잊었는데 다시 읽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할 때 내가 다시 읽기를 바라는 부분을 써 놓고 마치려고 한다.

 

 

  아이가 세 살 때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운전하는데, 조용해서 돌아보니

아이가 코딱지를 파서 그걸로 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셋슈(중세 시대의 그림에 뛰어났던 중)를 뛰어넘는 그림쟁이가 될까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은 없다.

어쨌든 나는 그때 아이를 보고 인간은 뭐든 있는 것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저기요, 남의 아이가 아니구요. 작가님 아들이란 말이예요. 하나밖에 없는. 코딱지 얘기 해도 괜찮은 거예요? 이 매력 넘치는 사람같으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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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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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이랍시고 무언가 쓰기 전에 나는 밝혀야겠다.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하게,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의 작품 대부분을 나는 모른다. 나름 그림을 좀 좋아해서 고흐와 샤갈 정도는 관심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름이나마 들어봐서 다행인 인물이 몇몇이오 대부분은 모른다. 그냥 모르는 거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서평을 써낼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작가의 탓(?)도 하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인물 중 많은 이들이 일반적인 한국인에게는 상당히 낯설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지 않았을까?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이에게 이 책은 지독히도 불친절하다. 러시아를 이미 잘 아는 친한 이에게 (제반 설명은 생략하고) 나의 가족 여행은 이러하였다고 사적인 감상을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 그럼 듣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얘기하면서 막 맞장구치고. 그럼 여행에 대한 작가의 지적인 만족감이 한 층 높아지고 좋은 여행으로 기억이 남고 그런 것 말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나는 공감이 안된다는 말이다.

 

  도요토옙스키 부분을 읽다가 '세컨드핸드 타임'을 읽으면서 그들이 왜 책을 버렸다, 혹은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었다 등의 부분이 나왔는지 이해했다. 러시아에서 작가의 위치는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와 좀 다르다. 러시아의 작가들은 계몽주의적 사명을 띤 교사이자 비판적 저널리스트이며 거의 유일한 지식인 그룹니었다. 서구 유럽에서 어떤 인물을 두고 그가 작가인가 사상가인가를 어느 정고 구분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러시아에서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작가는 곧 사상가와 다름없었다.(44쪽) 그런가하면 유명한 대 작가의 좋지 못한 습관도 나온다. 애초에는 산처럼 높이 쌓인 금화를 긁어모으겠다고 덤벼들었으나, 종국에는 이런 지지부진한 나를 넘어서보겠다는, 잃기 위해 안달인 사람의 발악과도 같은 시간들로 이어졌다.(69쪽) 바덴바덴에는 아직도 도요토옙스키가 방문했던 카지노가 남아있다.

 

  톨스토이가 꼽았던 삶의 기본적 태도는 참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있을 지 모를 그런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 것, 숭고한 뜻만 좇을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작은 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89쪽) 그러나 톨스토이의 금욕주의가 육체적 쾌락의 유혹을 거부하기 위한 반증이라는 대목도 흥미롭다.

 

  전혀 몰랐던 화가인 이반 시시킨은 저자 덕분에 알아서 고맙다. 그의 초상화, 비석, 그리고 '자작나무 숲의 개울'이라는 그림이 119쪽에 담겨 있다. 그의 그림을 보러 러시아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에 가보고 싶은 건 처음이다. 그의 그림을 검색해 보았는데 전부 마음에 든다. 그의 그림과, 그의 그림이 대상으로 하던 풍경을 보러가고 싶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일생은 읽고 있자니 너무나 처연하다. 그 시대에 탈 없이 산 사람이 이상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한 명 한 명의 비극이 비극이 아닌 것은 아니다. 주변인들이 암송한 덕에 후대에 작품이 남은 시인이 많다는 이야기도 놀랍다. 러시아에 대해서 이 책이 두 번째로 나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다.

 

(......) 이 모든 일의 증인,

여명에도 황혼에도

방 안을 들여다보는 오래된 단풍나무가,

바싹 마른 검은 손을 내게 내민다.

우리의 이별도 미리 보고,

도움을 주려는 듯 그렇게.

-안나 아흐마토바, '주인공 없는 시', 1940~1962년

 

 

  저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장소와 인물을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있었더라면 훨씬 쫀득하게 읽었을 책임에 분명해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을 전부 알고 있으려면 공부를 엄청 해야 할거다. 그럴만큼 내가 러시아와 그 외의 예술가에 특출난 관심이 있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많은 것을 보고 다니는 작가의 아이들에게 부러움을 표하며 글을 마친다. 많이 돌아다니는 건 언제든 좋은 것 같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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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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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알라딘에서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정말 고마웠던 건 나 혼자 고른다면 절대 고르지 않을 여러 책들을 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은 나에게 뜻밖의 깨달음을 주곤 하는데 특히 내가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세상에. 이런 삶도 있구나. 난 참 작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이 책은 미국의 유명한 사형수 게리 길모어의 막내 동생인 음악비평가 마이클 길모어가 그의 형과 가족을 회고하며 쓴 이야기로, 게리 길모어의 범죄성이 그들 가족의 역사 어디에선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는 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이것은 게리의 행동을 이해-물론 살인은 이해받지 못할 짓이지만-함과 동시에 저자의 상처 또한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7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마치 영화같은 이야기라 쭉 이어가며 읽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아버지에게 학대 받은 어린 시절이 주를 이루는 다른 형제들의 삶과는 달리 저자는 유난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이 차이가 있어서인지 형제들은 그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가족에 온전히 포함되지 못한 채 주변자적인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가족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때때로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너도 결국 다르지 않다고.

 

 

  아니다, 결단코 나는 그런 것 따위는 믿지 않는다. 몇 년 전, 내가 옛집에 가보려고 했던 이후에, 마침내 작고 어두운 방 안에서 무엇인가 섬뜩한 것과 마주쳤을 때에도, 그것이 내 생의 최악의 순간에 내 목을 움켜잡고서, "난 널 알아. 네가 마지막이지. 자, 이제 널 데리러 온 거야."라고 말했을 대조차도,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니야, 이 유령은 실재가 아니야. 이 유령은 다른 곳에서,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나타나는 거야. 그 순간에도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유령보다 더 무섭게 나를 움켜잡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만약 부모 중 누가 게리에게 더 악영향을 끼쳤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버지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읽는 내내 혹시 어머니가 현명한 자였더라면, 가족 중 누군가는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역량이 있었더라면 결국 사단이 나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두꺼운 책 안에서 그 어머니가 현명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딱 한 부분 뿐이었다. 물론, 현명한 여자였다면 과거도 알 수 없는(그러나 어쩐지 어두운 냄새가 나는) 남자랑 훌쩍 결혼하지는 않았겠지.

 

 

  그때 어머니가 그 난장판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큰 빗자루를 들고 와서, 프랭크 형의 머리를 내려치면서 말했다. "그만 좀 해. 그만하면 됐잖아. 프랭크, 내가 널 경찰에 신고했다. 어서 밖으로 달아나." 프랭크와 게리는 깜짝 놀라, 싸움을 멈추고 어머니를 봤다. "이제 그만 게리를 놔둬라." 어머니가 프랭크를 보며 다시 말했다. 프랭크는 몹시 침통한 얼굴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꽝 하고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이때 어머니가 맏형 프랭크의 편을 들었더라면 게리는 가족들의 부고를 들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기를 치며 떠돌아다니는 불안정한 가족과 아버지의 가정폭력 속에서 어머니는 중산층의 번듯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사기 같았던 사업은 어쩐지 자리를 잡아서 그들을 여유로운 환경에 두었지만 이미 형제들은 동네에서 악명 높은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특히 둘째 게리와 셋째 게일렌이. 그리고 게일렌이 먼저 칼에 찔려 죽는다. 물론 게리는 장례식에 오지 못했다.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며칠 동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게일렌이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문병을 가지 않았다. 곧 퇴원할 텐데, 뭐.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했다. 그럼 그때나 가봐야지.

 

 

  저자가 어쩐지 형을 보러가고 싶지 않아 방문을 차일피일 미루는 이 부분이 나는 -형제 중 비교적 평범한- 저자가 이 아수라장 같은 가족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차라리 외면해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끝까지 어머니 곁에 남는 프랭크만이 병원을 다녀간다. 그리고 회복세를 보이던 게일렌 갑자기 죽는다. 물론 방문을 미룬 행동은 저자에게 큰 후회로 남는다. 가족을 외면해버리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가족을 외면해 버렸을 때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이는 별로 없다.

 

  게리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와도 게리는 그것을 잡지 못한다. 이를 보고 저자는 게리에게 화를 냈지만, 어쩌면 평범한 상황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에게 평온한 대학교가 주는 위압감은 어쩌면 범죄를 편안히 느끼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결국 익숙한 것을 좋아하니까. 범죄에 익숙한 그의 모습은 사실 자업자득이라는 생각과, 불우한 환경 탓도 컸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그러나 이것을 환경 탓으로 돌려버린다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파국을 맞지 않은 이들은 무어란 말인가. 외면하기엔 안타깝지만 동시에 포용하기엔 너무나 타락한 인생이었다.

 

 

  게리를 만나고 온 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 잤어. 이제 다시는 게리를 보러 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지.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으니까. (중략)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단 하나 마음에 걸린 건, 내가 진심으로 게리를 사랑했다는 걸 그 애가 모른다는 사실이었어. 게리는 결국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하고 갔을 거야.

 

 

  게리는 두 건의 살인사건을 저지른다. 감옥에서 게리는 도주 중 잡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자에게 와 범죄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을 것이고, 저자는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저자를 죽였을거란 이야기를 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게리는 죽음을 선택한다. 사형 제도가 제대로 부활하지 않았던 곳에서 부활한 사형제도의 첫 사형수가 되기를 자처하는 그의 이야기를 미국 전역은 주목한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나또한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시끄러운 뉴스 뒤의 누군가는 자식이, 형제가 사형수가 되어 어느 날 죽을 것이고 그에 대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있다. 프랭크와 저자는 게리가 진심으로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에 그를 위한 노력을 모두 포기한다.

 

  살아남는다면 인생에서 더 이상 자유는 없을 사형수에게 죽음이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형수에게 사형이란 어느 아침에 다가올 지 모를 끔찍하기만 한 미래라고 생각했었다. 사형을 선택하는 사형수를 보고 당시 사회가 얼마나 놀랐을 지 짐작이 간다. 그런 태도는 어쩐지 사회의 반성을 불러왔을지도 모르겠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횡포가 가족을 망가뜨렸다. 그것을 주변의 누구도 바로잡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보듬어주지 못한 소외된 사람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데 문제는 정말로 우리의 인생이 '계속'되며, 인생에 있어서 죽음 말고는 종지부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게리와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사람들, - 우리 가족들과 게리에게 살해된 사람들- 그들만이 이 이야기의 종말을 선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 끝마친 사람들이고, 과거의 유산에 대해 대가를 치렀거나, 혹은 대가를 모면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남아 있는 우리들은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계속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었다. 죽은 자들의 유산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삶을.

 

 

  게리의 이야기가 끝난다고 해서 가족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집 안에 자신을 고립시켰고, 저지는 가족을 떠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프랭크는 잠적을 해버린다. 10년 간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들이 재회했을 때, 어디선가 내 동생은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겠지 하며 위안했다고 프랭크가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차라리 프랭크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가족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결국 끝까지 남았고, 잘못 된 길을 가지 않았고, 마지막 남은 동생에게 기억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알고보니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었던 그는 저자보다 훨씬 짙게 죽은 자들의 유산을 계속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삶이 그 모든 유산을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의 유산은 사라져야 하며, 자신과 프랭크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으니 곧 사라질 것이라 여러 차례 기술한다. 그것을 그렇게 당연한 듯이 쓸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대체 얼마만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고통을 남에게 더 큰 고통으로 갚아준다. 누군가는 자신을 파괴하고, 누군가는 감내해내며, 누군가는 도피한다. 사회와 그것이 길러낸 악(惡)에 대해서 고민해 보게 하는 책이다. 자신의 치부를 이리도 적나라하게 밝힌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탄을 표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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