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 2023 제17회
박소해 / 나비클럽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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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의 권위 있는 추리문학상으로 추리소설적 완성, 최고의 단편에 수상하는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1985년에 제정되어 한국 추리문학의 성장을 견인해온 한국의 '에드거상'인 한국추리문학상은 그해 가장 뛰어난 단편 추리 소설에 '황금펜상'을 수여해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제17회 황금펜상은 2022년 11월부터 2023년 10월까지 문예지와 단행본에 발표된 단편 추리 소설들을 대상으로 심사했다고 하였습니다.

계간 미스터리 편집위원 김재희, 박상민, 윤자영, 조동신, 한수옥, 홍성호의 예심을 거쳐 문학 평론가 백휴, 박과육, 박인성 평론가가 본심을 진행한, 치열한 논의 끝에 수상한 이들.

솔직히...

추리문학을 좋아하지만 이런 상이 있었는지 몰랐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좋은 기회로 알게 되었고, 아는 작가님의 이름이 보여 더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작품들이 뽑혔을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추리소설적 감각으로 세상을 해부하며

올 한 해 장르적 결실과 문학적 성취를 이뤄낸 일곱 편의 작품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23년 제17회



수상작 박소해 작가님의 <해녀의 아들>이 포문을 열었습니다.

팔심 평생을 물질로 살아온 해녀의 죽음.

얼핏 사고로 보였지만 곧 살인사건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거슬러 올라 아직 끝나지 않은 제주 4·3 사건과 관련이 있게 되고...

"나 말이 맞는지 니 말이 맞는지는 어디 한번 법정에서 따져보게. 이번 기회에 말없이 파묻힌 수많은 억울한 사연들이 양지로 나올 수 이시믄 좋으키여. 나가 재판받는 법정이 4·3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공론화할 기회가 되어줄지도 모르주."

...

"누구를 죽이지 않고서도 겅할 수 이서마씸.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헙니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어수다."

승주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정말 겅할까? 주목을 끌잰 하믄 쇼가 필요한 법이라. 사람들이 잊으믄 쇼를 해서라도 강제로 기억하게 해사주게. 테러리스트들이 무사 테러를 하크냐?" - page 56

너무나도 먹먹했던 소설.

이 소설은 많은 이들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남았습니다.

잊지 말아야할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설킨 혼돈의 도가니, 4·3.

살암시민 살아진다.

누님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누구든지 살아 있으면 살아지리라. 누님이 저에게 넘겨준 생명을 ,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소중하게 이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세상에 전하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두 번 다시 4·3 같은 비극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대개 '여성'이라 하면 희생자로 다루어졌던 여성상을 벗어나 파격적인 빌런의 모습으로 그려낸 서미애 작가님의 <죽일 생각은 없었어>

40피트 원기둥 형태의 건물 안쪽에 갇힌 채 죽임을 당한 여성, 그 여성의 불가해한 죽음을 파헤쳤던 김영민 작가님의 <40피트 건물 괴사건>

사회를 등지고, 가족으로부터도 은둔하는 주인공이 수상한 외국인 노동자 자히르를 만나면서 파멸, 몰락, 붕괴를 가져오는 모습을 그린 여실지 작가님의 <꽃은 알고 있다>

저에게 짜릿한 반전을 선사해 주었던 홍선주 작가님의 <연모>.

학교에서 사이코패스로 소문난 소녀 '소형'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주었던 교생 선생님 '민우'.

9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이 재회하게 되는데...

열망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소형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나는 그 모양새를 따라 입꼬리를 올린다. 소형이 눈을 감고 살짝 벌린 입술을 내게 내민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반짝이는 그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그사이 짧게 내뱉는 숨에 나의 쾌감이 실린다. - page 222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연모(戀慕)가 아닌 깊은 계책의 연모(淵謀)였음에!

반전에 저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부잣집 막내아들> 드라마를 오마주, 패러디한 느낌을 주었던 박순찬 회장의 생일잔치로 북적거리는 팔각관, 그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그린 홍정기 작가님의 <팔각관의 비밀>

마지막 강한 종지부를 남겼던 송시우 작가님의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10대 여성 청소년 김윤주.

"... 그런데요, 형사님."

"뭐야."

"제 사건, 유명해요? 엄청 난리 났어요?"

김윤주의 눈이 뭔지 모를 만족감으로 빛났다.

"누가 그래?"

"어제 변호사님이요. 저 때문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던데. 그정도예요?" - page 311

폭력적이고 잔혹한 가상 세계에 빠져들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죄 없는 사람을 죽임으로 몰아내기까지...

이 소설은 세상 떠들썩하게 했던 2017년 인천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였는데 이미 넷플릭스 <소년심판>에서도 다룰 만큼 '소년법'에 대해,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절실함을 일깨워주었었습니다.

7인 각양각색이었기에 재미있게 읽었던 이 책.

몰랐던 작가도 알게 되었고 앞으로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져보려 합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황금펜상 수상작들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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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안과
변윤하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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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발상과 무한한 상상력, 속도감 있는 문체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힐링 판타지 소설을 그렸던 작가 '변윤하'.

이번엔 더더욱 신비로운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눈()'

예로부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 여긴 눈을, 그리고 '보름달 안과'라는 신비로운 공간에서 눈을 통해 마주하게 될 이들은 누구일지...

저도 이 공간으로 함께 떠나보고자 합니다.

거울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신비한 공간

보름달 안과




까마귀가 울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그랬던가...

후드득 떨어지던 빗줄기 사이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을 느꼈던 '김은후'.

마치 꿈속에서 보았던 비가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강렬하고 번뜩이는 눈길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검고 반짝이는 눈으로 까마귀가 아버지의 유품인 손거울을 낚아채 휙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필사적으로 까마귀를 쫓아가던 은후.

'거울을 되찾아야 해.'

그곳에서 낡은 창고의 열린 창문 속으로 까마귀가 날아들어 가는 게 보였고

"돌아가신 아빠 유품이거든... 그것만 돌려주면 뭐든 줄게. 반짝이는 거, 아니 원하는 거면 전부 다. 그 거울만 돌려줘."

마치 응답하듯 까마귀가 커다란 날갯짓을 시작했다. 까마귀의 날갯짓에 인 검푸른 바람이 몸에 닿았다.

"응? 뭐든 해줄 테니까, 제발." - page 17

그렇게 까마귀에게 손을 뻗는 순간!

화려한 금박 장식의 거울과 부딪히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저... 여긴 어디야? 분명히 창고에 있었는데..."

"안과야. 그래도 명색이 병원인데 다친 사람을 내쫓을 수 없어서 있게 하는 거야. 조용히 쉬다가 돌아가."

"안과? 여기가?"

...

"평범한 안과는 아니니까. 그 정도는 너도 느꼈겠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 page 21

묘하게 까마귀 같은 느낌을 주는 도선생과 신비하고 차가워 보이는 보조 미나가 진료를 보는 이곳 '보름달 안과'.

이곳에서는 환자가 살아온 인생,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 애정을 두는 장소, 감정의 색깔이나 영혼의 무게 같은 것들을 측정해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환자 차트를 작성하는 일을 하게 된 은후.

은퇴 후 투자 실패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가장, 이국땅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가족을 그리워하는 유학생, 이제 막 빛을 볼 때쯤 부상으로 은퇴해야 했던 발레리나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환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선생과 미나 그리고 은후.

우연히 만나게 된 줄 알았던 세 사람의 인연의 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눈을 뜨고 보게 된 첫 번째 사람을 죽이게 될 운명이다'라는 예언을 받고 아버지에게 학대받다 도선생에게 간신히 구원된 아이 미나.

어릴 적 일찍 돌아가신 아빠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며 그리워하는 아이 은후.

도선생의 숨겨진 이야기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과연 까마귀를 따라가 도착한 보름달 안광에서 은후는 무슨 일을 겪게 될까?

아버지의 유품인 거울은 돌려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그들의 여정을 함께 해 보시길...

"다시 잠잠해질 거야. 그리고 도 폭발하겠지.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욕망처럼." - page 152

속 사정을 읽고 난 뒤...

참 먹먹하였습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결국 우리가 자초했던 일이었고 치유도 우리의 몫이었음을...

그러므로 살아간다...

저는 이 소설을 이렇게 마무리하였습니다.

새삼 만약 내가 '보름달 안과'에 간다면...

그동안 몰랐던 내 안의 어떤 사연과 마주하게 될까...

잠시 거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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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안과
변윤하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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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거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신비로운 공간으로의 여행.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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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 블루 아이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오렌지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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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직접 목격한 것처럼 표현하는, 역사소설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가 _ <뉴욕 타임스>'

이렇게 극찬을 받은 작가.

그리고 실제로 미육군사관학교에서 6개월간 복무했던 추리소설의 대가 에드거 앨런 포를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재탄생시킨 이 소설의 작가.

'루이스 베이어드'.

드디어 그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올해 초 넷플릭스에 <페일 블루 아이> 영화가 나와서 궁금했던 찰나.

먼저 소설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1830년 웨스트포인트를 배경으로 벌어진 살인과 복수가 전개되는 미스터리.

그 짜릿함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역작.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커커스 리뷰

에드거상 · 대거상 노미네이트작

"나는 누구나 내면에는 가장 추악한 귀퉁이일망정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페일 블루 아이



1830년 10월 26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신생 육군사관학교에 '오거스터스 랜도'는 고용됩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걱정하는 부분은 수사입니다. 상당히 복잡한 데다 덧붙이자면 상당히 예민한 문제라서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오간 대화가 이 학교 밖으로 절대 유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대위님,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아시잖습니까. 내 대화 상대는 호스뿐이고, 녀석은 분별력의 상징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는 이걸 엄숙한 확언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자기 무릎을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저희 학교 생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건 저도 집작한 바입니다."

"켄터키 출신의 2학년생이고 이름은 프라이입니다."

"리로이 프라이요." - page 39

밧줄에 매달린 채 발견된 리로이 프라이.

그런데 그날 밤 새벽 프라이 생도의 시신을 누군가가 옮겼는데 누가 됐든 유례없이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데...

"누가 프라이 생도의 심장을 시신에서 도려냈지 뭡니까." - page 44

그리하여 뉴욕에서 명성을 떨쳤던 은퇴 경찰 랜도가 특별히 소환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숙련가는 학교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탈과 궤변을 즐겼지만 순탄히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령님 그리고 대위님. 두 분은 계속 제 손을 묶고 계십니다. 생도들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지도 못하고, 두 분 허락 없이는 말도 섞지 못하고,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허용이 된다 한들..."

나는 손을 들어 세시어의 반론을 사전에 차단했다.

"자, 이런 것들이 허용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젊은 친구들은 다른 건 몰라도 비밀 하나는 잘 지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세이어 대령님, 이곳 시스템은 비밀을 강요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니 생도들 간 비밀은 같은 생도에게만 공유될 겁니다." - page 126

기만한 관찰력을 지닌 1학년 생도 '에드거 앨런 포'를 조수로 임명하며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수수께끼 같은 단서, 암호들 가운데 그들의 우정과 비밀, 살인과 복수가 서로 직조하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데...

시간은 우리 생각과 다르게 단단하게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쭈글쭈글하며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면 접혀서... 몇 세대를 건너뛴 사람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같은 땅에 서고 같은 공기를 마시게 되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논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살았다고 또는 완전히 죽었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 page 657

와!

그야말로 페이지터너였고 눈을 깜빡일 찰나조차도 아쉬울 만큼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소설의 배경인 1830년 웨스트포인트는 에드거 앨런 포가 당시 실제로 복무했던 미육군사관학교이고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오거스터스 랜도는 포의 작품 『랜도의 오두막』의 주인공 '랜도'와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속 캐릭터 '오귀스탱' 뒤팽에서 이름과 성격을 가져와 보다 더 설득력 있고 절묘한 디테일에 짜릿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한 문장을 꼽자면

Tout le monde a raison

모두에게 이유가 있다

왠지 이번 주말엔 영화를 봐야겠습니다.

'크리스찬 베일'이 그려낼 랜더의 모습이 너무나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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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토끼풀이 내게로 왔다 - 산책자와 400년 느티나무와의 대화
김건숙 지음 / 바이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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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독특했습니다.

붉은토끼풀?

검색을 해보니 '레드 클로버'라고 하였습니다.

괜스레 '클로버'라는 말에 설렜던...

책을 읽기 전 이 책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소개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림책 활동가이자 숲해설가인 저자 '김건숙'이 그림책과 일반 책에서 가려 뽑은 문장을 들고 숲을 걸으며 사색한 결과물을 모은 책이라 하였습니다.

책과 걷기.

이보다 더 좋은 조합이 있을까!

저도 저자와 함께 가만히 거닐어보며 사색의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당신을 성장시키는

지혜를 만나는 설렘의 순간

내 안의 품은 생각들이 꽃피고

열매 맺는 길을 함께 걸어볼까요?

붉은토끼풀이 내게로 왔다



"어르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오래 사셨으니 우리 인간보다 훨씬 많은 지혜를 갖고 계시지요? 그걸 제게도 나누어주세요."

400년 느티나무에게 건넨 질문.

그러자 낮은 목소리로 서서히 입을 열며 대답해 준 느티나무.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네. 내 가지들을 보게나. 햇볕이 많이 닿는 곳은 더 빨리 잎이 나오고, 그렇지 않은 곳은 아직 나오지 않은 곳도 있다네. 지금 이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 해도 그게 전부 나일세. 나는 그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한다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것까지도 받아들인다네. 그저 묵묵히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가장 나다움을 만들어가지."

느티나무의 자세로부터 받아들이고, 내려놓고, 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죽은 가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잎을 내면서 성장을 멈추지 않는 느티나무처럼 한 발 한 발 나아가자. 상록오색길을 걷듯! - page 49

그렇게 저자는 상록오색길에 문장을 들고나가 걸으며 계절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고 엽서에 써 간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설계하니 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순간을 공유하고자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었습니다.

제목에서 보았던 <붉은토끼풀이 내게로 왔다>로부터 저도 반성하게 되었었습니다.

토끼풀을 많이 닮았지만 모조품인 듯해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풀.

누군가 토끼풀이라고 하면 아니라 부정했던 이 꽃을 검색해보니 '붉은토끼풀'이었던...

단정 짓는 것의 위험성을 알려주었던 붉은토끼풀.

이번 상록오색길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붉은토끼풀에게 다가간 것은 단순히 꽃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열리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심하게 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내게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를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고 뇌리를 때렸으니 말이다. - page 88

이제 함부로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을.

관용과 포용력을 키울 것을.

저도 모르게 만들었던 벽으로, 닫힌 문으로 흐르지 못했던 물길이 덕분에 흐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와닿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왔어도 뒤돌아보면 후회가 남는...

그렇다고 되돌아간들 그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 아니 저에게 건넨 이야기...

숲을 이루는 거대한 가지를 가진 어르신 느티나무는 작은 잎들을 달고 있다.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잎을 키울 생각은 왜 안 할까? 목련이나 마로니에나무, 상수리나무, 감나무 등은 어린나무들도 잎이 넓고 크다. 잎이 큰 것은 빨리 성장하기 위한 전략이란다.

그렇다면 어르신은 천천히 자라기로 작정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후회도 없다는 말일까? 느리게 가더라도 하나라도 그 많은 잎들에게 고루 사랑을 주려고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상함이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가지 숲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랑이 몇백 년을 이어가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 page 138 ~ 139

느티나무 잎처럼 오늘 맞은 하루 귀히 쓰고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함을 한 수 배웠습니다.

걷기의 미학을, 사색의 미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와닿았던 문장과 단어들이 제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언젠가 내면의 나무로써 자라나 저에게도 인생을 살아갈 지혜를 건네줄 나무를 기다리며...

오늘은 왠지 문장 하나 들고 나무에게 말을 건네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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