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오쿠타마에는 태곳적부터 신을 모셔온 영산 '미타케산'이 있습니다.
이곳 산속에 있는 신관저택이 실제 아사다 지로 어머니의 친정집이라 합니다.
밤마다 이모가 들려주는 괴담 같은 잠자리 옛날이야기는 소년 아사다 지로의 상상력을 강하게 키웠고
그 이야기를 각색해 총 11개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겨 있었는데...
'괴담'이라 하면 무서울 거란 제 생각과는 달리 아련하고 안타까웠던...
이야기가 하나씩 끝날 때쯤이면 작게나마 안녕을 빌어주곤 하였었습니다.
이모가 그에게 들려주었던 것처럼 작가는 우리에게도 그때의 그 시공간을 그려주었기에 더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 읽고 나면 이 한마디가 절로 나오곤 하였습니다.
"재미있다!"
첫 이야기였던 <붉은 끈>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였습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방이 있습니까, 하고 남자가 물었어. 첫눈에도 심상치 않았지. 케이블카도 없던 시절에 한겨울 밤길을 올라왔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두 사람의 손목이 여자의 오비 끈에 묶여서 연결되어 있었거든맺어질 운명을 타고난 남녀는 태어날 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새끼손가락이 연결되어 있다는 속설 때문에, 현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가 내세에서 맺어지기를 바라며 붉은 실로 서로의 몸을 연결하고 동반자살하는 사건이 가끔 일어난다. 그 새빨간 끈 색깔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단다. 나는 무서워서 할아버지를 부르러 안으로 들어갔지." - page 10
운명의 붉은 실은
붉은 색의 실이 사람 간, 특히 연정을 품은 두 남녀간의 인연을 이어 준다는 중국의 설화와, 여기에서 유래되어 동아시아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미신적 문화요소를 가리킨다. _ 나무위키
익히 알려진 이야기였기에...
그 끝은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웠던......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에게 빙의한 여우귀신과 신통력을 가진 증조부의 공방전이 그려진 <여우귀신 이야기>에서의 참회의 독백같은 이야기..
"그땐 그랬어. 어린아이의 목숨은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괜찮겠다 싶은 나이가 되기 전까지 온전한 인간으로 쳐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아기는 귀엽지만 언제 또 감기가 더치거나 배앓이가 심해져서 죽어버릴지 모르니까 개나 고양이 대하듯이 귀엽게 키운 게 아닐까 싶어. 안 그러면 잇달아 자식을 여읜 부모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너희는 아직 인간이 아닌 거지." - page 76
빙의되었던 '가나'라는 소녀...
불쌍하다고 생각되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그땐 그랬다는 말이 참으로 울렸습니다.
인상적인 이야기를 꼽아보자면 편집자도 꼽았던 <산이 흔들리다>였습니다.
시기는 다이쇼 12년의 관동대지진
"천재지변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실은 매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의 혼란을 틈타 불령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지고 우물에 독약을 탄다는 겁니다." - page 362
'불령선인'이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조선인을 뜻하였고
불순분자 가운데 일부는 미타케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갔을 때
이타루의 외침이
"천재지변은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가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겠죠. 신령님 탓이라고 한다면 신사가 불타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요."
...
"조선인 탓으로 돌리느니 차라리 신령님 탓으로 돌리는 게 낫습니다. 아닙니까!" - page 367 ~ 368
"그건 아니지, 키쿠 짱.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의심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거야. 그러니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돼. 그리고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나는 말해야 해." - page 372
"이보시오. 잘 좀 생각해보시오. 이 흑색선전은 너무 악질적이란 말입니다. 진리는 인원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게 아니요. 자기 자신에게 물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 page 374
소신 있는 이 발언이.
아니, 작가의 역사인식에 대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는데...
그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신이 깃든 산 이야기』에 나오는 신관 할아버지나 이모는 엄청나게 늙으신 분으로 읽히지만, 실제 나이는 지금의 저보다 젊어요. 노인도,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신의 영역으로서의 산의 존재 방식을 바꾸어서는 안 돼요. 함부로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관념은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가야 할, 대체할 수 없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사다 지로의 이 말을 끝으로 저도 책을 덮어봅니다.
신이 깃든 산은 아무 일 없이 깊어갔다. - page 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