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는 남자는 손목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 큼직한 시계 자판을 감싼 황금빛 시곗줄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생명이 사라진 남자의 거무튀튀한 흙빛 얼굴과 초점을 잃은 허연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햇빛을 튕겨내며 반짝이는 시계는 여전히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 page 13
어느 한적한 주택가에 피칠갑을 한 시체가 발견됩니다.
고가의 명품 시계, 화려한 슈트, 미모의 아내, 피 묻은 명함 한 장...
생전 수백억 대 자산으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던 에버그린 투자자문회사의 대표 정상구 씨.
"정상구 그 인간은 한마디로 개새끼예요. 머리 좋은 개새끼. 그래서 원하는 건 어떡해서라도 손에 넣고 죗값은 안 치르죠." - page 29
막대한 부만큼 원한 관계 또한 차고 넘쳐났던 그.
호시탐탐 그의 인생을 훔치려는 안준영을 지목하지만, 모텔 욕조에서 산에 부식되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살해되면서 수사는 대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처음엔 정상구, 그다음엔 안준영...
둘 사이엔 에버그린 투자자문회사라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혹시 정상구를 죽인 사람이 안준영도 알고 있었던 걸까...?
범인이 노리는 건 에버그린이라는 사기조직 자체인 걸까...?
그리고 몇 달 뒤.
국과수 감식 결과에서
"안준영 집에서 나온 DNA와 모텔에서 발견된 사체의 DNA는 일치하지 않았어."
"하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물품은 모두 안준영 거였는데..."
"범인이 심어놨나 보지." - page 282 ~ 283
이제껏 사체가 안준영이라는 가정하에 수사를 진행해왔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
안준영이 아니라면 대체 모텔에서 발견된 신원불명의 인물은 누구인가...
두 번의 살인 사건과 수면 위로 떠오른 다섯 명의 용의자들, 형체도 없이 증발한 알리바이!
과연 그날의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 걸까?
"새빨간 거짓말보다는 진실이 한 방울쯤 섞여 있을 때 사람들은 더 잘 속아 넘어가는 법이거든." - page 35
일확천금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사람들.
결국 벼랑 끝에 내몰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 그들을 바라보며 마냥 비난을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욕망을 가로챈 괴물들.
그 서슬 퍼런 그물에 걸려들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처럼
탐하는 자는 계속 굶주릴 것이며, 취하는 자는 계속 찾게 될지니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육신을 집어삼켰도다.
다오, 다오. 더 많은 꿀을 다오. 더 많은 피를 다오.
그렇게 나를 위해 지옥문을 활짝 열어다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복수'의 방식이었습니다.
사기 범죄 정도야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
'당한 사람들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라는 분위기마저 조성된 사회에,
범죄자가 저지른 범죄가 선량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던졌던...
하지만 이런 사건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현실에...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존재는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그들의 왕국에서 충성을 다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남이 가진 것을 뺏기 위해 칼부림도 서슴지 않을 것이기에...
이 차가운 진실 앞에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황금빛 욕망.
한방으로 인생 역전을 노리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했던 이 소설.
지금도 어디선가 행해지고 있을 것이기에 안타까움만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