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계절 - 귀주대첩, 속이는 자들의 얼굴
차무진 지음 / 요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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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그렇지 않아도 <고려거란전쟁>이 한창 반영되고 있는 요즘.

역사를 빛낸 많은 명장 가운데 강감찬과 고려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거워진 요즘.

이렇게 소설로도 만난다는 건...

꼭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역사와 미스터리 서사의 절묘한 교합으로 이루어낸 또 하나의 드라마!

바로 읽어보았습니다.

고려거란전쟁 마지막 20일의 미스터리

귀주대첩 스무 날 전,

그 성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너도 걸렸던 거야. 암시에."

여우의 계절



1019년 2월 6일.

대원수 강감찬이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바치니 왕은 영파역까지 나와 영접하였습니다.

왕은 강감찬의 왼손을 잡곤

"노고가 많았어요. 정말 노고가 많았어요, 할아버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신하에게 그런 말을 사용할 수 없는 노릇이거늘...

그런 왕에게 감히 청할 게 있다는 그.

"이번에 고려가 이길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조종의 공덕과 선대 현인의 도움을 얻은 폐하의 이기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두 번째는."

"으흠, 두 번째는?"

"곤궁하게 살았으면서도 적을 한 명이라도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싸운 구주 토민과, 북계 백성들의 호국 의지였나이다."

"암요. 그렇다마다요. 그들에게 보상해야 합니다. 아니, 아니,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 그들이 첫 번째이지요. 이제 그들은 여력이 나고, 봄이 오면 김매고 농사지으면서 안도하고 태평성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당장 전사자의 유골을 수습해서 제사를 지낼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뭡니까? 세 번째는?"

"우리를 승리로 인도한 호국 영령의 음덕이 있습니다. 청컨대, 국사를 지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써온 그 영령을 배향하고, 사찰에 칙령을 내려 닷새를 기한으로 분향하고 염불을 외게 해주시옵소서. 신, 간곡히 청합니다."

"아고, 아고,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할아버지." - page 11 ~ 12

사위가 낮처럼 밝습니다.

겨울 북계의 밤.

다름 아닌 여우난골 마을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란인 애꾸는 저쪽, 병풍 앞에 이불을 반쯤 덮고 앉아서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두 명의 고려인 여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애꾸는 저것들을 데리고 갔을 때 상급자에게 고려인 귀족 여자로 속일 수 있을지를 가늠했지만 그냥 혼자 처리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어어어어?

거란인이 실그러졌습니다.

그리곤 방 안 가득한 피비린내...

"온니 말대로 야만인이 참말로 방에 들어왔네. 온니는 앞날을 참 잘 맞혀. 야만인은 패물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러네. 귀신같은 우리 온니. 예쁘고 힘센 우리 온니." - page 30 ~ 31

바로 두 여인은 과거와 미래를 보는 예지를 지닌 '설죽화'와 '죽이는 병'에 걸린 '설매화' 자매였습니다.

버려진 땅, 북계 구주의 외딴 방어성 내 토속신을 모시는 사원에서 고려군 핵심 기마대의 여섯 장교가 잔인하게 살해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에 대해 대원수로부터 설죽화와 설매화 자매, 북방의 만능 사냥꾼 각치가 진실을 파헤칠 것을 의뢰받게 됩니다.

하지만...

사건은 파헤칠수록 실체가 벗겨지기는커녕 고려군 내부의 수상한 기미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결국 그들은 이 북계의 왕, 늘 원숭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고려군 대원수가 현존하는 생명체 중 가장 사악한 존재임을 느끼게 되는데...

각치는 그를 구속하고 있는 탈을 차마 벗겨내지 못했다.

"각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달리하면 미래가 바뀔까?"

각치 표정이 굳었다.

"그럴 것입니다. 각하의 결심이 바뀌면 미래도 바뀝니다."

각치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원숭이탈을 바라보기만 했다. - page 418

몰입감도 장난 아니었고 생동감 넘치는 장면 묘사가 어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끔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미래를 보는 예지력을 지닌 설죽화와 살인병에 걸린 설매화 자매, 북방의 만능 사냥꾼 각치 등 등장인물은 예기치 못한 상상으로 이끌었었고 역사 사실과 스토리텔링의 교합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팩션이 아니었는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문장을 꼽으라면 저는 이 문장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각치는 들고 있던 가면을 썼다. 그래야만 자신을 보호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님을 말해야만 하늘이 자신을 숨겨줄 것만 같았다. 탈은 그런 것이니까. 탈을 쓰면 그것으로 주목받지만, 속에 숨은 자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 - page 363

우리는 전쟁의 명성만을 알지 실제 그 이전이라든지 그 이후에는 관심이 없기 마련입니다.

고려거란전쟁 마지막 20일의 미스터리.

정말 이런 일도 있지 않았을까...

책을 덮어도 그 여정동안 함께 해온 감정이 남아 여운이 남아 맴돌았습니다.

1,000년 전, 반도인은 이족의 도움 없이, 오직 그들 힘으로 그들 것을 지켰다. 그 복으로 근 100년을 당당하고 무탈하게 지냈다. 그들 후손은 달랐다. 1,000년 동안, 지금까지도, 어딘가에 빌붙어 자신을 상징하며 살고 있다. 감히 상상한다. 다시 우리 힘으로 우리 것을 지킬 수 있기를. 원이탈의 혼령이 우리 등 위에 내려앉기를.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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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누수 일지
김신회 지음 / 여름사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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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로 40만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여름 사람' 김신회 작가.

'누수 일지'

책 제목을 보고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우여곡절이 있을지...

무엇보다 이 책은 사실을 기반으로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팩션(Fac-tion) 에세이'라는 점에서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을 거란 기대감으로 읽어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내 집에서 불안감 없이 편안히 지내는 것

1인 여성 가구의 피, 땀, 눈물 어린 여름의 기록

에세이스트 김신회의 축축하고 수상한 본격 누수 체험기

나의 누수 일지



또독... 또독... 또독...

성실하게 글을 써 마감하고, 원고를 엮어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 것으로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전업 작가.

그러던 어느 날.

음...?

천장이 젖어 있네?

의자를 딛고 올라가 보니 몰딩 이음매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누수인가?!

그동안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고, 싫은 소리도 할 줄 모르는, 책임감과 용기마저 부족한 회피형 성격의 '나'는 생애 처음으로 피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윗집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동안, 자신이 꼭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도 결코 좋은 이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제껏 믿어온 것과는 달리 감정적이고 미성숙하며, 타인에 대한 신뢰와 관대함도 부족하고, 내 것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마침내 이웃과 마주할 용기를 냅니다.

'나'는 '누수'로부터, '윗집 이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건 뭘까. 약간의 얼룩과 자국을 남긴 도배를 보수하기 위해 거실 전체를 새로 도배하는 것? 생각만해도 지친다. 이웃과 법적 싸움을 벌이는 것? 상상만 해도 기빨린다. 이미 한 달간의 다툼으로 진이 쏙 빠졌는데, 이 생활을 수개월 더 이어가야 한다니 끔찍하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내 집에서 불안감 없이 편안히 지내는 것.

그를 위해선 뭘 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현실적으로 들리던 선배의 조언이 조금씩 마음에 스민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보내줬으면 좋겠다.' - page 165

책을 읽으면서 이 말에 참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경험과 시간이 쌓일수록 직관을 따르는 게 뒤탈이 없다. '해야 할 것 같은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마음의 소리'는 직관적인 선택이다. 이성적인 판단의 기준이 '세상'이라면, 직관적인 선택의 기준은 '나'. 내가 이제껏 쌓아온 경험과 시간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일은 고집이나 뒤처짐이 아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으로 만들어온 과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난데없는 소동으로 차근차근 망가지는 일상을 목도하면서, 우선순위를 잊고 허둥대는 나를 보았다. 옳은 길은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이 내 길은 아닐 수 있다. 나의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없어 보이고 겁쟁이 같고,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나에게 맞는 걸 고르는 게 맞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 일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보는 것이다. - page 178

'누수 일지'였지만 결코 누수 일지만은 아니었던 이야기.

그동안 모든 경험은 삶의 거름이 된다고 믿어왔는데

누수만큼은 예외다.

집에 물이 새면 삶이 줄줄 샌다.

아, 인생이 누수네!

내 인생 자체가 누수됐어!

_'작가의 실제 일기' 중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누수'를 겪고 있을까?

잘 헤쳐나가고는 있는 걸까?

왠지 이 말이 정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기분이 내내 좆같은데 한 번은 웃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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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한의원
배명은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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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 일본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리고 한국엔 수상한 한의원

개인적으로 <코코>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이기에.

이 문구를 보자마자 덥석 집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Yes24 크레마클럽 한국소설 1위!라는 기염을 토했다는데...

더더욱 기대가 되는 이 작품.

과연 저 수상한 한의원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저도 한 번 방문해 보았습니다.

"제 한을 풀어 주세요.

그럼 나아요."

수상한 한의원



부원장 자리를 빼앗겼다. - page 9

태어나 보니 집이 가난했고, 엄마는 자식보다 돈을 택하는 사람의, 그런 집의 아들이었던 '김승범'.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한의원을 따라 한의원에 자주 갔었는데 넓은 마당에 번듯한 한옥을 바라보며 이런 곳에 산다면 엄마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반짝반짝 빛이 나던 장소.

아무튼 그 기억이 이어져 한의대를 지망했고 합격까지 했으며 한의사로 성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대형 한방병원의 부원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병원장이 돈을 밝히니 성의를 보였건만!

승범의 돈만 먹고 다른 사람을 부원장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자네가 환자들에게 비싼 약을 팔아서 우리 한방병원의 수익을 일궈낸다는 건 사실일세. 그러나 그뿐이야. 자네는 환자를 대할 때 너무 사무적이야. 그에 대한 컴플레인도 만만치 않아서 한방병원의 이미지가 말이 아닌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의사가 사람만 잘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일회성이지. 환자와의 소통을 통한 공감대가 전혀 없으니 자네에게 치료받았던 그들은 서비스가 더 좋은 한의사를 찾지 않겠나? 여기 송기윤 선생을 보게. 김 선생과는 달리 환자들의 아픔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얼마나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아픈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으니 병원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이달의 한의사'에도 뽑히고 그러는 거지. 그게,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말이야." - page 13 ~ 14

'내가 꼭 명의로 떠서 다시 인 서울 한다!'

그리하여 인적이 드문 '우화시'로 떠나게 됩니다.

지방 독점 한의원으로 대성하리라!

하지만 승범의 기대와 달리 환자가 전혀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출신의 유명한 한의사라고 홍보해도, 마을 유지에게 힘써 달라 부탁해 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반면, 평범해 보이기만 한 맞은편 '수정 한약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대체 그곳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건데?

수정 한약방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염탐하던 중 생각지도 못한 '존재'와 마주치게 됩니다.

바로 '귀신'.

그리고 비법도 알게 되는데...

"고 선생이 귀신을 고쳐 주면 그 귀신이 사람 열 명을 데리고 오는 게 값을 치르는 방법이야."

"정말 귀신이 사람을 홀린단 말입니까?"

"그렇지. 봐, 벌써 내가 한의사 양반을 돕고 있잖아? 그러니 우리 심도 있게 얘기를 해 보자고. 그렇게 도망만 치지 말고." - page 70

대박 한의원을 꿈꾸는 승범의 좌충우돌 귀신 치료 대작전!

바로 시작하였습니다.

"자, 모두 줄을 서시오!!!"

우화시에 도착하자마자 걸레 빤 물을 자기에게 들이부은 수정이 마음에 안 든 승범과 돈만 외치면서 귀신 환자 치료법을 쉽게 얻어가려는 승범이 마음에 안 든 수정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떻게 된 게, 얘기를 하면 할수록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른 승범.

그러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하는데...

한의사, 한약사 그리고 귀신이 만들어내는 유쾌하고 쌉싸름한 위로!

덕분에 마음이 훈훈해졌었습니다.

힐링 판타지.

어쩌면 조금은 뻔하게 흘러가겠지만 그럼에도 감동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큰 위로를 받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대 돈이 아닌 사람과 사람임에.

'한의원'이란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위로.

그래서 수정이 건넨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같이 일가친척 하나 없는 사람은 이런 일이 있을 땐 이렇게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이들이 소중한 법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자네도 모든 사람한테 인덕을 쌓아. 높이를 보지 말고 낮게 봐. 여기 낮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 그 좋은 눈썰미로 그들의 속내를 읽어 내고 도와줘. 할 수 있는 만큼." - page 374

저도 이곳에서 마음의 치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코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보다는 조금은 어른스러웠던, 그래서 이들보단 좀 더 현실적인 힐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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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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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아마 읽어보지 않았을 이야기...

그렇기에 사람들이 독서모임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 책을 읽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답이 아니길...

"처음 만날 때는 열예닐곱 살의 청소년이었던 이들이

지금은 서른 즈음의 청년이 되었다"

10년간 정성스럽게 기록된 가난과 성장의 시간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2010년 본격적으로 빈곤 대물림에 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이십여 명의 청소년과 가족들을 만났고 2016년 논문을 끝낸 후, 이들이 어른이 된 이후의 삶까지 계속 따라가는 책을 쓰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책!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조부모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우울증과 중독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소희'

성실하게 생활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으리라고 믿지만 한편으론 불안한 모범생 중의 모범생 '영성'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말 원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가는, 에너지가 넘쳤던 '지현'

가족의 무관심과 방임 속에서도 사색하는 시간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찾은 '연우'

어머니의 병과 빚 때문에 꿈을 포기하다가 독립하게 된 '수정'

전과자라는 편견과 오해 속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바꾸고 채워나가려는 '현석'

'돈 좀 만지는 사장님'이 되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전념하는 '우빈'

학교 밖 청소년으로 자존감이 많이 낮았지만 이제 자기 자리를 찾은 '혜주'

이렇게 여덟 명의 청(소)년을 만나 인터뷰하며 이들의 가족 문제와 진로 고민, 우울증, 탈학교·가출과 범죄, 그리고 사회 진출과 성인으로서의 자립, 청(소)년의 노동 경험 등의 심층적인 이야기를 기록하며 마지막에는 교육·노동·복지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제안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난'이라는 굴레...

벗어날 수 없는 건 가난한 가정의 부모는 사회적 지지체계가 약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타의 다른 수단이 없어 대물림되고...

그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취약해지기 쉬우며 삶에 여러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빈곤은 "단순히 낮은 소득이 아니라 기본적 역량의 박탈로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 역량은 "개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이다. - page 146

가난을 벗어난다는 것은 역량을 되찾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가난, 가족,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장하고 자기 자신을 고유한 욕망을 지닌 독립된 개인으로서 이해하게 될 때 아이들은 부쩍 성장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언급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돈이 많지 않지만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

이들은 모두 가정 내에서 일정 정도의 가난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행과 연결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경제생활과 세상살이의 신산함 때문이라고.

가난해도 가족 간에 충분히 화목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크게 느끼지만 사회는 너무도 냉정하였습니다.

자신의 욕구 실현이 번번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사회적 존엄성에 침해를 입고, 이렇게 침해된 존엄성은 주체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며,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질곡이 됩니다.

결국, 오랜 시간 축적된 빈곤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고, 거기서 만들어진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행복감을 추구하려는 가능성을 모두 훼손합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외면해서는 안 될 우리들의 문제임을 저자는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철이 든 이들.

그럼에도 이들을 통해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와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사회적 제도 이전 우선 저부터 그들을 마주했을 때 다정히 손을 건네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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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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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미스터리'라는 특출한 영역을 개발하여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부 아리스가와 아리스로부터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

라는 평을 받은 '히가시가와 도쿠야'

사실 저자의 작품을 읽은 건 없지만...

드라마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는 재미나게 보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작가에 대해 아무런 정보는 몰랐고 그저 '유머 미스터리'라는 점에서 끌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에 띄었던 히가시가와 도쿠야 데뷔 20주년 기념작으로 그동안 그가 쓴 작품들 가운데 가장 스케일이 크고 분량도 길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작품이 그동안의 전작으로 쌓은 작가만의 무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기에!

큰 기대감을 안고 읽어보았습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정수를 펼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낸 수작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상상을 초월한 사건의 진상!

"범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는 뜻이지.

야, 거기 너 말이야, 너!"

속임수의 섬



"실례합니다, 벤텐마루호의 선장님 계세요? 야노 법률 사무소에서 나왔는데요."

외딴섬에 가게 된 변호사 사야카.

그곳에 가는 이유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인공인 『모모타로』 그림책으로 유명한 출판사의 오너가 사망하자 고인의 유지에 따라 외딴섬에 모여 유언장을 개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푸른 바다에 외따로 떠 있는 섬 하나.

섬 전체가 커다란 점프대를 연상시키는 특징적인 실루엣.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조타실의 선장이 큰 소리로 말합니다.

"다들 잘 봐 둬. 저게 비탈섬이야."

유언장 개봉을 위해 모인 이곳은 섬의 유일한 건축물이자 돔 모양 전망실과 헬기 착륙장을 갖춘 가족 별장이었습니다.




스님의 염불이 마쳐지고 드디어 공개된 유언장.

어떤 사람은 심각한 표정, 어떤 사람은 상쾌한 표정으로 저마다 방을 나섰고 사야카는 막중한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젠 모처럼 방문한 외딴섬에서 느긋하게 여가를 만끽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전 1시.

문밖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립니다.

"꺅!"

에이코의 외동딸 사이다이지 미사키가

"얼굴이 새빨간 남자 도깨비였어요. 두 발이 땅에서 몇십 센티 떠 있더라고요!"

"공중에 떠 있었다고?"

"네."

"공중에 떠 있었다면 역시 귀신 아닐까?"

"에이.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빨간 도깨비도 있을 리 없잖아!"

"있을지도 모르죠. 비탈섬은 오카야마의 섬이니까." - page 105

오카야마의 외딴섬에 도깨비섬 전설은 으레 따르기 마련이기에 그저 헤프닝으로 끝냈는데...

오전 8시.

"에이코 씨? 혹시 미사키 말고 다른 사람도 찾으시나요......?"

에이코는 고개를 똑바로 끄덕였다.

"맞아요. 제 사촌 오빠 쓰루오카 가즈야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 같아서요. 어디로 간 걸까요?" - page 112

이마에 쩍 벌어진 상처로 바닥에 누운 쓰루오카 가즈야.

충격을 받은 미사키는 잠꼬대하듯 중얼거립니다.

"그건 빨간 도깨비가 아니었어...... 그때 쓰루오카 씨는 이미 죽은 뒤였던 거야......"

하필 태풍으로 꼼짝없이 섬에 갇히고 만 그들.

유언장 개봉을 담당한 변호사 야노와 쓰루오카를 찾아 섬에 데려온 사립탐정 고바야카와는 경찰을 대신해 사건을 수사하려 합니다.

하지만 사건은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들고...

이 과정에서 23년 전 섬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살인사건이 더해지면서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수수께끼의 베일이 하나둘 벗겨지는데...

"확실히 그렇게 볼 수 있는 상황이군. 발이 미끄러져서 실수로 떨어진 건지, 아니면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내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23년 전 사건 때와 완전히 똑같은 전개인데. 정말로 그럴까?" - page 274

과연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지...

그리고 그 끝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공중에서 떨어지는 불티. 새빨간 혀를 연상시키는 불길이 청동으로 만든 모모타로와 그의 동료들을 집어삼켰다. 도라쿠 스님은 합장한 자세를 유지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오. '화강장'의 머리가 떨어졌군...... 이걸로 이 저택도 운명했어......" - page 456 ~ 457



고립된 외딴섬, 기묘한 저택, 살인사건.

여느 추리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이지만 이 소설의 매력은 그야말로 가끔 사건의 정곡을 찌르는 역할을 하는 '유머'였습니다.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더 짜릿했고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을 마주하기가 싫었습니다.

저자의 필력에 전작들이 궁금하였습니다.

'유머 본격 미스터리'라는 그만의 독특한 작풍.

그 매력에 빠져 그의 작품들을 역주행해 보려 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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