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헌법
차병직.윤재왕.윤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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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한 번도 읽어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헌법은 한 국가의 상징이자 실체다.˝

대한민국헌법
1987년 10월 29일 전문 개정 공포


우리는 헌법 아래 많은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법 아래 모든 사람의 평등을 추구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 받으며 서로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헌법적 가치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삶은 조금씩 나아가며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우리는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잊고 사는 것 같다.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있는 헌법의 당연성에 대하여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던 것일까. 내가 쟁취한 것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가 법을 찾을 때는 살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이 생길 때다.  사건 사고 뒤의 법률적 처리만 더 익숙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헌법이  싸움의 도구로 쓰여질 때가 더 익숙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일반 시민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헌법은 보통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어려운 벌률 용어와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면, 넘기기 힘든 문장으로 꽉 채워진 아주 무거운 책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물론 내가 이 쪽으로 문외한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여지껏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내 왔으니 말이다.
학창시절 헌법에 있는 기본권과 권리와 의무를 배우며 익숙해진 헌법을 왜 한 번도 읽어 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야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헌법과 헌법 현실은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헌법 개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실성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할 헌법 조항들이 꽤 구시대적 관습법을 따르는 조항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개헌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 선거철마다 개헌론에 대해서 들썩이는 현실을 맞이한다. 개헌을 이끄는 것은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결국 법을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제1조는 너무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은 헌법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도 풀어준다. 헌법을 조금 더 알고 쉽거나 조금 더 지루하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 역사적 사건과 사실에서 헌법 정신이 어떻게 위배됐는지 등 다양한 고찰도 이뤄진다. 의외로 술술 읽힌다.  물론 뒤로 갈수록 복잡한 헌법의 세세한 내용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이는 책을 읽는 순간에도 자기 결정권은 보장된다. 당연히 원하는 것만 골라 읽어도 될 것이다.


헌법은 전문을 시작으로 제1장은 총강이다. 헌법의 전체의 핵심을 요약하고 정리한 글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 읽고 싶은데 다 읽기는 싫고,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선택하여 대략 그 내용이나 성격을 짐작하고 싶다면 총강만 훑어보면 된다˝는 아주 반가운 글이 적혀 있다.


<우리 헌법 전체의 목차>

전문

제 1장  총강
제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 3장  국회
제 4장  정부
           제 1절 대통령
           제 2절 행정부
                       제 1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제 2관 국무회의
                       제 3관 행정각무
                       제 4관 감사원

제 5장  법원
제 6장  헌법재판소
제 7장   선거관리
제 8장  지방자치
제 9장  경제
제10장  헌법개정

부칙


-우리 헌법은 제 1조 2항은 물론 헌법 전체를 통하여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유진오 초안에는 모두 ‘인민‘이라고 되어있었다고 한다. 초안 작성자 유진오가 ‘인민‘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이유는 인민은 국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는 의미로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데는 인민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국가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한 국민은 국가 우월적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민‘이라는 어휘는 심의 과정에서 ‘국민‘으로 바뀌고 국호도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되었다. 이유는 당시 국회위원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용어는 공산당의 용어라며 사상을 의심 삼았기 때문이다. 인민이라는 단어는 구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하던 용어였다.  결국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에 빼앗긴 단어가 되었다.

-p34 총강, 내용중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보통 영토 조항을 헌법에 규정하는 예는 흔치 않다고 한다.  이웃 나라 국경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헌법이 특별히 영토 조항을 둔 까닭은 분단 국가라는 사정 때문이라고 한다. 헌법에 녹아 있는 우리의 아픈 사실은 서로 다른 체제 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낀다. 그리고 현실과 맞지 않는 조항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남북한을 통틀어 일컫는 영토 조항, 엄밀히 말해서 이제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한반도 내에서 각각 두 개의 독립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각자의 헌법 아래에서 자체적으로 너무 오랜 시간 다른 삶을 살아왔다. 자체적으로 유엔 가입국으로 독립 국가로 인정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두 나라를 하나로 보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각각의 나라를 인정하고 서로 평화적 교류를 통해 같이 성장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책에서도 이 조항을 지적한다. 현실과 맞지 않을 뿐더러 모순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현실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동성동본 페지, 호주제 폐지, 간통죄 폐지, 김영란법, 양심적 병역 거부 인정 등 우리 삶을 변화시킨 법이다.
법을 고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헌법이 무분별하게 바뀌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버린 구시대의 관습법같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옭아매기도 한다.
불합리한 제도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헌법의 변화는 분명 필요하다. 헌법 재판소의 결정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헌법 정신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이다.




˝헌법은 국가의 최고 규범이며 모든 규법의 기본이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특히 새로 들어선 정권이 정치적 주도 세력이 정략적으로 악용하기 위하여 헌법을 개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 p503 ,제10장 헌법개정




우리가 헌법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헌법은  A4 용지로 16쪽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인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전문적인 법룰 용어로 들어찬 일반 법전과는 다른점이 있다. 헌법은 국민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권 등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담고 있는 따뜻한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헌법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가 즐겨 찾는 책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제는 장르 불문하고 그 경계를 무시하고 싶다.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읽게 된 동기도 있었고  읽은 후 나는 분명 달랐다. 
이 책의 힘은 무엇보다 나에게 든든한 힘을 주는 것 같은 묘한 작용을 한다. 그리고 뭔지 모를 근자감이 생긴다는 점이다.
헌법은 국가권력이 악법으로 우리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듬직한 무기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최근의 많은 일을 겪은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개인적 삶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줄곧 느끼는 중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 하나도 저절로 일어나거나 만들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헌법 정신도 결국엔 우리 삶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개인의 삶을 만들었다.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과 자유를 외칠 수 있는 세상, 헌법이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이 값진 힘을 그냥 낭비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헌법 읽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더 당당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최근 ‘차별 금지법‘ 에 대하여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두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 11조 1조항

현실의 다양한 형태의 차별은 헌법에서 말하는 평등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 위배된다. 이와 관련해서 뜨거운 논란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우리는 관심두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차별의 문제는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나의 문제인 것이다. 시대가 흐르고 발전할수록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차별 문제를 일으킨다. 이제 유전자 차별까지 논의가 되는 현실이다. 기존의 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이 ‘차별금지법‘은 찬반이 뜨겁다. 논란의 시간이 길지만, 과연 무엇이 모두를 위한 것일지 생각하는 과정도 분명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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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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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토리보다 책 속에 녹아있는 작가의 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책을 읽었을 때 맛볼 수 있다. 고전을 접할 때마다 느낀다.

 

 

"존재한다(Exister)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sistere ex)는 뜻이다."p159

 

 

타인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는 사회적인 존재임을 아주 강력하게 인식시켜준다. 우리가 코로나 시기에도 방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 이유다.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많은 것을 바꿔 놓거나 강력하게 주의력을 전환 시키기도 한다. 올해의 낯선 환경이 만들어준 시간은 이 책이 나에게 더 깊숙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험과 도전, 적응기의 대명사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의 로빈슨과 프라이데이의 관계를 뒤엎은 소설,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스'가 쓰여진 시대는 18세기다. 영국이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시대였기에 세상의 지도와 방식과 모든 가치관, 그들의 것이 진리였던 시대였다. 그런 관점이 지금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20세기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그러한 불편한 이야기를 완전히 뒤엎는다. 투르니에의 주인공 로빈슨의 좌초 시기도 서로 100년의 차이가 있다. 당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과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다르다. 그만큼 성숙한 로빈슨인 것이다. 비슷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좌초된 섬에서 적응하는 것 같지만, 비슷한 듯 아주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 나타난다. 방드르디 (프랑스어로 프라이데이)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는 더 살아나는 것 같다.

 

 

타인과 관계로 연결된 세상에서 우리의 주의력은 끝없이 분산되고 방해를 받는다. 그러면서 열심히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간다. 그래서 삶 자체에 집중을 못 할 때가 많다. 세상밖에 존재하는 로빈슨의 주의력은 점점 좁아져 갔지만 대신 깊어진다. 타인의 등장에 대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다른 것에 대한 염두를 두지 않아 실수를 만들었다. 그는 섬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호'를 만들었지만, 그 배를 바다로 진수시키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탈출호는 허무하게 "노마의 방주처럼 육지에 우뚝 섰다."

 


고립된 로빈슨은 점점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결국은 상상의 산물에서 허둥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섬에서의 삶은 조금씩 변화를 맞이한다. 원시적 삶에서 이제 문명인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가 어렵게 구한 잉크로 일지를 쓰게 되고 로빈슨의 진정한 섬 생활이 시작된다. 이제 섬은 '탄식의 섬'에서 '스페란차'라고 부르며 섬을 부린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로빈슨은 이제 '스페란차' 섬에서 그 시간의 중심에 놓였다. 그가 발을 디딘 섬의 공간과 시간을 장악해 나간 것이다로빈슨은 '스페란차'의 대지를 한 여자와 동일화했다. 그리고 로빈슨은 스페란차와 결혼하고 그 대지의 품속에서 그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결실을 이뤄냈다.

 


 

흑인 소년, 방드리디의 출현은 로빈슨에게 불안을 안겨 주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의 등장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주는 열쇠가 된다. 어린 방드리디의 천진함과 순수함에서 로빈슨은 자신의 파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며 뭔지 모를 불편함이 남는다.

다이엘 디포의 로빈슨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로빈슨이 힘겹게 이뤄낸 문명의 질서들을 방드르디는 오히려 교란하려는 듯 방해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자연과 동물과의 교감은 로빈슨의 교감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로빈슨이 그 섬에서 이룩해 놓은 속세적 질서를 방그리디는 천성적으로 불편해했다. 종속적인 관계는 일방적인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 세계였다. 재미없는 세상, 책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의 중반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투르니에의 로빈슨 다시 쓰기는 원주민인 방드르디의 위치를 완전히 뒤집는다. 더 강력하게 이야기의 반전이 일어난다. 조금은 지루한 책이 중간을 넘고 방드르디의 등장과 함께 로빈슨의 생활, 그리고 방드르디의 역반응에 대한 모습을 관찰하는 지점이 오면 책은 묘한 쾌감과 함께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여기서 순간 유머스러한 무성영화의 슬랩스틱코미디를 떠올리기도 했다.


 

일명, 방드르디의 '담뱃불 사건' 이다. 몰래 피다 던져버린 불은 문명 세계로부터 로빈슨과 함께 좌초된 모든 것의 집합체 동굴을 폭파한다. 이제 로빈슨과 방드르디, 둘의 뒤집어진 상황은 그들을 더 가까이 한 몸처럼 살 수 있게 했다.

책의 해설 부분에서 이 장면의 묘사를 "자연에 대한 문명의 승리가 이제부터 문명에 대한 자연의 승리로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P 340


 

동굴의 폭발은 로빈슨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질서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좌절보다 로빈슨은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로빈슨도 방드르디 못지않게 그가 이룩한 이성의 질서가 자신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방드르디는 실질적으로 일이라고 전혀 하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의 개념이라고는 일체 알지 못하는 그는 오로지 현재의 순간 속에 갇힌 채 살고 있었다.” p236

 


여러 해를 두고 방드르디를 노예로 부렸던 로빈슨, 이제 완전히 둘의 관계는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외모마저 비슷해졌다. 옷도 벗어 버린 로빈슨의 몸은 태양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피부색도 어느새 구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둘의 캐미는 점점 더 다양하게 이뤄진다. 때론 다툼으로 때론 기쁨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싸움에서 등장하는 허수아비라는 매개체는 정말 둘의 관계를 유치하게도 만들지만, 파괴적이거나 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로빈슨의 시간의 흐름과 속도, 그 방향이 크게 변화를 맞았다.

 



스페란차는 이제 기름진 땅으로 가꾸어야 할 황무지가 아니다. 방드르디는 이제 내가 교육시켜야 할 야만인이 아니다. 그 양자는 다 같이 나의 온 주의력을, 관조적인 주의력을, 신기한 것에 감탄하는 듯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내가 그들을 매 순간 처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들이 지닌 마술적이라 할 만한 새로움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p275



 

빈슨은 깨닫는다. 그 모든 것의 덧없음과 가벼움을 떠나 무상함을 되찾아 지내게 되었다. 모든 낯익음 것들의 소멸이 가져다주는 결핍에서 그의 사유는 깊어졌다. 이제 로빈슨은 자연의 한 부분처럼 작아졌고 방드르디와 함께 공존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반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항상 우리는 무언가로부터 균형이 깨어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 같은, 일이 벌어진다. '화이트버드호'의 등장이다. 하나가 된 이 섬에 외부인의 개입이 일어난다.


 

화이트버드호의 등장은 스페란차에서 로빈슨과 방드르디와의 균형에 손상을 입힌다. 몰랐던 것에 대한 앎, 방드리디는 이제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로빈슨은 과거의 파괴적이고 세속적인 삶에서 자유를 찾았음을 알게 된다. 극과 극의 통함과 극과 극의 그리움은 서로를 정반대의 상황으로 끌고 갔다. 로빈슨은 과거 그렇게도 탈출하고 싶었던 섬에서 남아있기를 원했다. 그럼 방드리디는 어떨까? 이 책의 방드리디는 참으로 능동적이다. 방드리디의 선택에서 로빈슨은 미련인지 뭔지 모를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로빈슨 또한, 다시 시작되는 시간을 받아들인다. 이제 로빈슨은 늙었고 다시 섬에 홀로 남은 막막함 앞에서 새로운 소년, 자안 넬자페브의 등장은 로빈슨의 앞으로의 시간이 어떻게 다가올지 생각하게된다. 그리고 그 소년의 이름을 지어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이제부터 너의 이름음 죄디란다. 그건 하늘의 신인 주피터의 날이디. 그건 또 어린아이들의 일요일이기도 하단다." 



 

시간의 지배에서 인간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유한한 운명은 뫼비우스 띠처럼 무한한 시간에서 늘 작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그 시간의 크기를 줄이려고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있는지 깨닫는 요즘이다. 그렇게 아쉬움만 가득한 올해의 마지막 달에 만난 책 중에서 이 책은 나를 더 생각하게 한다. 언젠가부터 책이 던지는 질문과 생각을 즐기게 된다. 그렇다고 책에 푹 빠져 사는 사람도 되지 못한다. 그저 때때로 손이 가는 책을 읽고 때때로 즐기면서 책을 통해서 삶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다. 다양한 관계가 적은 나에게 책은 그렇게 세상의 별나고 새로운 삶과 만나게 하는 매개체이다. 형제가 된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관계가 깊어질 때 서로의 애증 관계도 깊어졌다. 그때 방드르디의 허수아비는 정말 나에게 웃음을 가져 준 장면이기도 하다. ‘허수아비를 통해서 그들의 갈등은 파괴적으로 치닫지 않았다. 나에게 책이 그랬다. 세상을 살면서 부딪히는 갈등에서 책은 방드르디의 허수아비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갈등을 웃어넘길 수 있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작가들에 대한 나의 애정이 늘어날 때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이 넘쳐난다. 내 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틈틈이 읽을지도 나를 때론 속박한다



이렇게 또 책은 나의 시간의 자유를 구속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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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2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죄디란다. 그건 하늘의 신인 주피터의 날이다. 그건 또 어린아이들의 일요일이기도 하단다‘
이쁜 호빵님 전 이 마지막 구절을 가장 사랑합니다.^@^


이뿐호빵 2020-12-22 20:10   좋아요 2 | URL
ㅎㅎ공감입니다. 헉,근데 오타가 장난이 아니네요ㅋ
급 부끄러워 집니다~~

scott 2020-12-24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 오타 수정하고 댓글 달아요 ㅋㅋ
이뿐 호빵님 방에 트리 한그루 심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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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뿐 호빵님^.~

이뿐호빵 2020-12-24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우 ~~
감동입니다😍

덕분에 행복 거득한 ㅋ 크리스마스 보낼께여~~♡
그리고 sc0tt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eBook]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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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볍지 않은 SF




과학 기술에 대한 선망과 두려움과 이 모든 것들의 집약체인 이 장르는 또 지극히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게 보여준다. 너무 솔직해서 때론 불편하기도 하다.
눈 앞에 펼쳐질 이상적인 꿈에 도취되는 속도를 눈으로 느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때때로 철학자의 눈으로 인류의 성찰을 담은 이야기는 과학기술의 양면성, 윤리적 딜레마에서 항상 생각하게 만든다.



책상 위에 몇 권이 쌓여있는 소설들은 나의 이온 음료가 된다.
그래서 책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읽는 책이기도 하고, 뭔가 피곤해질 때 손을 뻗는 책이기도 하다. 아껴 놓은 비상식량 초코바 같은 것이다. 때론 카페인의 역할도 분위기 전환의 친구이기도 하다.  갑자기 구차하게 변명같지도 않은 것으로 핑계를 대려고 버벅거리고 있는 내가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조금은 뒷북 치고 있는 것 같아 머슥해서다.
이렇게 젊은 SF작가 김초엽을 조금 늦게 만난 핑계를 대고 있다.


한때 우리에게 가장 가까웠던 곳,
어느 순간에 와서 가장 먼 곳이 되버린 상황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안나가 맞이한 운명처럼 말이다.


열심히 한 시대를 살았던 안나, 그녀가 몰두한 시간 뒤에 찾아 온 것은 기약없는 기다림이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슬렌포니아 행성행 티켓은 그저 떠날 수 없는 그녀의 안타까움만 안겨 주었다. 자신이 맡은 연구만 끝나면 먼저 슬렌포니아로 이주한 가족에게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놓인 안나는 가족과 생이별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계산기는 실효성과 합리성의 원칙 아래  이러한 개개인의 삶은 무시한다. SF소설의 과학적 상상은 어느 정도 현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것이다.


지구에 남겨진 안나의 삶은 작은 희망의 티켓을 들고 그저 기다리고 기다린다. 가족이 있는 행성으로 가는 길이 그녀의 목적이었고, 사실상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언젠가는,


이 막막한 단어의 숨막힘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 퍽퍽한 밤고구마를 삼킨 답답함을 연상케하는 단어들이 꽤 있다. 그 중 ‘언젠가는‘ 이 단어의 답답함은 정말 막막하고 가슴을 치게 한다.  책 속의 안나와 대화하는 청년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답답한 심정에 감정 이입이 돼 웃픈 현실을 마주한다. 맞장구를 치면서 아주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안나는 자신이 연구한 냉동 수면 기술로 동결과 각성의 반복으로 이 긴 기다림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녀의 연구가 비록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에겐 달랐다. 그녀가 쏟아부었던 시간이었다. 그로인해 잊혀진 시간과 살아보지 못한 시간에 대한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나는 이 시간에 단단히 묶여서 풀고 나갈 수가 없었다. 안나에게 이 시간의 배신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생각하면, 안나의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열정과 그 시간의 배신 속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안나의 이 말이 가슴을 때리고 머리를 울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의 객관성을 따진다는게 참 가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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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 가볍지 않은 SF는 장편 소설인

<<지구 끝의 온실>>

  일기예보처럼 당연히 그날의 미세먼지 체크는 일상이 되버린 지금이다. 매년 봄의 불청객 황사만을 걱정하던 시간이 있었다. 여기에  미세먼지라는 녀석으로 어느새 계절을 벗어나 황사마스크가  우리 일상에서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로  집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마스크는 일종의 의복이 되버린 현실을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진보된 과학 기술과 발달, 이 모든 것은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책은 더스트로 인해 인류는 대멸종의 시간을 버티고  7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인류 재건의 시기에 돌입한다. 인류가 만든 과오를 인류가 수습하는 단계인 것이다.
더스트 이후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태계로 그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지금의 조건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을 이 책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멸망과 재건의 시대

더스트를 피하기 위해 당시 세계 곳곳에 사람들은 거대 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돔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돔이었다. 당연 돔으로 피할 수 없었던 다른 생물들은 살아 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돔으로 피할 수 없었던 생물들이 인간 이외의 생물만이 아니었다.  언제든 우리에게는 억지로 소외되거나  제외되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어떤 종은 멸종을 맞이 했고, 어떤 종은 적응하며 변이를 맞이했고, 또 어떤 종은 거의 멸종 직전 회생의 기회를 얻는다.
살아 남기 위한 각자의 방식으로 적응하는 과정은 돔 안에서도 돔 밖에서도 치열했다.

죽음과 가능성

죽음과 탄생은 늘 공존, 극과 극의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늘 통한다는 사실이다. 멸종과 그 위에 다시 쌓아 올려지는 다른 종류의 삶은 인류의 역사이며 시간의 흔적이다. 지금 우리의 삶도 누군가의 삶을 바탕으로 차곡차고 쌓여진 문명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더스트는 땅 위의 모든 살아있는 것을 손상시킨다. 작은 틈을 파고들어, 숨 쉬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

˝메말라 붙은 숲 위에 새로운 종의 식물들이 덧 씌워 졌다. 이제 예전과 같은 숲은 없었다.˝


더스트 폴로 인해 수십 년 전 대멸종을 겪은 인류는 재건 이후의 생태계 변화를 조사하게 된다.
개량종으로 뒤덮인 산, 자연은 인간의 무수한 개입으로 인해 파괴되고 또 멸종위기라는 재앙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위기에서 ‘적응‘하고 버티기 위해서 인간은 또 인위적인 개입을 하게 된다.  적응하고 변이된 생태계 또한 자연스런 적응이 아닌 인간의 개입에 의한 적응인 것이다. 이는 문제해결을 위한 영원한 답을 찾은 것이 아닌 일시적인 시간 벌기다. 이렇게 지금도 인간은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분열과 내분

모든 것은 이해관계에서 시작되었고 이해관계에서 틀어졌다. 어떠한 공동체라도 그 성립은 계약관계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거래의 성사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관계는 이어진다. 하지만 이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그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다.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온실‘ 그 희망을 위해 서로가 감내해야 했던 힘듦도 참아냈던 그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해 무너진다. 안전하다는 경계 그 경계에서 치뤄지는 다툼들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의 목적은 이제 사라지고 서로를 공격하며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흩어졌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에 대한 개입이 인류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해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것 같다. 멸망과 재건의 과정에서 인류의 역사는 늘 쓰여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명감이란 단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보통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에 대해서 우리의 목소리는 늘 그들의 훌륭한 정신에 대해 칭송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그들의 속내를 말이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를 구한 인물에 대해 칭송할 때 책은 말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었다고.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했고 그 호기심이 족쇄가 되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것만이 다였다고. 거창한 사명감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세상을 구했던 모든 행동들이 이타적인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도 살아야 했고 자신의 시대를 꽤 착실히 살았던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안다. 보이지 않는 목적을 위해서 달려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부질없는지 우리는 때때로 느낀다. 나 자신이 가끔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예측할 수도 없지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살아내며 하나씩 채워 간다는 것이다. 살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걸 생각하면 누구나 비슷하고 누구나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을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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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17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김초엽작가님 작품에 관한 글을 두번째 봅니다!ㅎ 이쯤되면 읽어야만 한다는 계시네요!ㅎ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이뿐호빵 2020-12-17 22:56   좋아요 1 | URL
ㅎㅎ젊은 작가의 감성과 함께
짧은 시간, 즐독하실겁니다~~

막시무스 2020-12-17 22:57   좋아요 0 | URL
근데, 지구 끝의 온실은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되네요! 오프라인 전용인가요?

cyrus 2020-12-18 08:46   좋아요 2 | URL
To. 막시무스님 // 내년 초에 <지구 끝의 온실> 단행본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밀리의 서재 단독 전자책의 개정판으로 나올 수 있대요. 작가님이 소설을 다듬는다고 보시면 돼요. 이상 작가님 오피셜입니다. ^^

이뿐호빵 2020-12-17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그럴겁니다ㅜㅜ
밀리의 서재 정기구독 책이라...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석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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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 혼자 놀 수 있는 자


자유로부터의 도피행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것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불안과 무기력함에서 새로운 동아줄을 찾는다. 그리고 그 동아줄을 잡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나의 고독과 불안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나는 누군가가 이끄는 줄을 잡고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이의 선동에 동요하고 그대로 녹아들지도 모른다.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인지, 그 결과가 어떻게 일어날지 의심하지 않는 삶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는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회적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했던 시대였다.

근대에 와서 인간은 자유로워졌다. 더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고 비판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책은 말한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는 과거 권위주의 권력이나 규제에서 쟁취한 자유를 말한다. 전통적인 규제에서 조금씩 벗어나면 날수록 우리에게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유를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막는 ‘내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데 매혹되어, 자유가 전통적인 적들한테 거둔 승리의 의미를 ‘내부‘의 제약과 충동과 두려움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p120)

우리의 인격 발달에 큰 영향을 준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적 활동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외부로부터의 속박을 해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자유를 얻어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개인을 더 고독하게 만들었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으며 개인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 항상 개인은 외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인간이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자 결국에는 ‘히틀러‘라는 괴물의 하인 역할도 충분히 받아들 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가 가져다준 자유는 개인에게 불안과 고독을 가져다 주었다. ‘고독‘ 혼자라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은 살기 위해 새로운 유대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자기와는 별개의 실체로 잊어버리도록 버려둔다. 그러면서 새로운 안전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

도피의 메커니즘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경향은 극과극이다.

˝정반대의 욕망인 것 같지만 심리학적으로 이 두 경향은 모두 자신이 외로움과 무력함을 참지 못하는데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기본적 욕구의 결과다.˝ p173

힘의 두 가지 의미

‘지배‘나 ‘능력‘ 중 하나를 뜻할 수 있다. 이 두 성질은 서로 배타적이다.
˝지배라는 의미에서 파워는 능력의 도착이다.˝

가학-피학적인 사람을 특징짓는 것은 언제나 권위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용어로 대신 사용해도 된다고 한다.

자동 인형형 순응

주관적으로 느끼는 개인의 감정과 감각까지도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거나 나의 생각과 느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것처럼 느낄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의 정신적 행위가 자발적이라고 확신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떤 특수한 상황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그 실험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짜 생각, 내 머릿속의 생각들에 대해서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 ‘가짜 생각‘들이 반드시 비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합리화에서 고찰 할 수 있다. 비합리적인 합리화를 시킨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

합리화는 단지 내 속에 있는 감정적 편견을 확인해 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존의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에서도 진짜감정인지 가짜감정인지 구분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근대 사회의 자동인형화한 개인은 무력감과 불안감의 증대로 인해 언제든지 새로운 권위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이를 역사적 나치즘에서 찾았다.
히틀러 그는 무력한 집단하고만 싸워 자신의 용기를 쌓아나갔다. 기회주의자에겐 유화책이 오히려 증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개인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이를 인정하고 더 높은 힘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높은 힘에 용해되어 이 높은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개인은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주장이었다.
개개인의 힘이 모여 하나의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이 사라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진실은 힘없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다.˝

이 진실이라는 것도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와 욕구에 뿌리를 둔다는 데 있다.


대중의 무리에 섞여 내가 아닌 척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안정감을 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안정감에 취해 자신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허무감과 허망함만 남는다. 그 원인을 안다면 정말 행운아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과 분리된 괴리감은 불안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가 속한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무서워한다.
같지 않다는 것은 무리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처럼 심각하다.


‘자유‘는 굴레였다. 자유가 주는 불안함이 늘 나를 칭칭 감고 있다. 많은 고독과 불안을 초래하는 이 줄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만 잡고 있으면 나에겐 그래도 자유라는 것이 주어진다.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한 나의 행위에 대한 제약이 거의 없는 동아줄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동아줄을 내가 잡고 있는 것이 아닌, 나를 칭칭 묶고 나는 그 줄에 감겨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때가 있다. 그런 안정감을 누리고 살았던 것이다. 몰랐을 뿐이다.
책에서 말한 무언가로부터의 도피 행위인 가학적-피가학적인 상황인 이 권위주의에 묶여서 나도 모르는 불안과 두통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와 포조가 생각났다. 서로에게 묶여 이제는 어느 한 쪽에서 그 끈을 끊을 수도 없고, 누가 누구를 묶고 누가 누구를 끌고 가는지를 말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면서 더 떠오른다.
정체도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기다리는 시간에서 온갖 방법으로 그 시간을 버텨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세상에 투명인간으로 존재하는 삶을 말이다.
적응이라는 명분으로 순응하며 사는 삶 말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안정감은 보장 받은 삶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정감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즘 깨닫는다.
자발적 행동 스스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고 뭔가를 하나씩 깨달을 때 찾아오는 짜릿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리오네트처럼 우리는 거대한 누군가의 줄에 매달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무대위, 나도 모르게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무대 위를 활기차게 누비면서 연기하는 자동 인형들이다. 조용히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고 안정감이 최고의 행복으로 착각하고 산다. 이것이 삶에 대한 책임감이라 생각한다.



책에서 말한 적극적인 자유는 무엇인가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 인간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 경험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을 말한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p279)

자유라는 문제에서 해답은 자발적인 활동이라고 말한다.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서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위협 받는다. 하지만 자발적 활동,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본 모습을 희생하지 않아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와 자연 그 모두와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힘이 ‘사랑‘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의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
(p281)

그리고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로 일이다.
자발적으로 살 수 있을 때 자신을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자아가 아닌 타인의 자아의 고유성도 최대한 존중해주는 성장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과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심리적 문제, 인간 존재의 물질적 토대는 물론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 정치적 구조에서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적극적인 자유‘와 개인주의 실현을 위한 자아 실현으로 가는 자유는 우리가 속해 있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실현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썼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잠깐 묻고 싶다. 에리히 프롬의 문제제기, 지금의 21세기 민주주의 실현은 어디까지 왔을까. 모든 개인의 생존에 기본이 되는 활동에서 개인의 실제적인 자유와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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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지는 못하였으나 오래 전,
에리히 프롬 선생의 <사랑의 기술>
읽고 나면 사랑 기술자가 되는고야?
하면서 친구들하고 떠든 기억이
나네요.

제목이 아주 거창하네요. 자유에서
도피하면 노예가 되는 건가?
죄송합니다, 쿨럭.

이뿐호빵 2020-12-0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랑의 기술 전수 받고자 열심히 읽어내긴
했지만, ㅋㅋ
그런건 책으로 얻어지진 않더라고요
역시 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헌법은 제1조 2항은 물론 헌법 전체를 통하여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유진오 초안에는 모두 ‘인민‘ 이라고 되어있었다. 초안 작성자가 국민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 우월적 느낌을준다.

p34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니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 데 인민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안의 ‘인민‘은 국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국민‘으로 바뀌고 말았다.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민국‘ 으로 변경된 것과 함께 일어난 일이다. 그 주된 이유는 북한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윤치영은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인민이란 용어는 구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하던 용어였다.

1948년 7월 1일부터 시작한 국회 본회의 헌법 초안 제2회독 때 국회의원 진헌식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몇 개 조문을 제외하고일반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문에서는 모두 인민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역시 윤치영 의원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좋은 말을 공산주의에 빼앗긴 셈치고 포기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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