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시간을 사는 사람, 즉 존은 '시간 밖에서 사는 사람'이다. 유한한 우리의 시간에 비해 존의 시간은 우리와 달리 넉넉했다. 4천 년을 살아온 주인공 존은, 구석기 후반에 걸쳐 현재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맨 프럼 어스>는 현생 인류가 현재를 사는, 아주 아주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다소 획기적인 영화다.

 

 

2021년 나의 첫 영화다. 나는 또 이렇게 SF 장르를 벗어나지 못했다. 책 보다 영화의 편식이 유난히 심한 나를 질책하며 새해 첫 영화를 시청한다. 그리고 황당하게 <맨 프럼 어스> 2편을 먼저 보고 다시 1편을 찾아서 보고 있다.

 


<맨 프럼 어스> 1편은 SF 장르지만, 화려한 CG도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는 영화다. 소박하지만 아주 탄탄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반전의 재미로 이야기는 끝을 낸다. 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존과 그 이야기를 게임처럼 흥미롭게 토론하고 경청하는 사람들만 있다. 장소의 변화도 거의 없고 역동적인 사건도 없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보는 나도 이미 존의 이야기에 빠져 두 눈을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겨울 따뜻한 난로를 끼고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다운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의 이야기는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기고,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억지 같은 이야기다. 난로 옆에 앉아 덤덤히 이야기하는 존이 만 4천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때, 이들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편과 속편에도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은 그가 오랜 시간을 살았음을 증명한다. 한때 고흐의 친구였던 존은 오래된 우정을 간직하듯 고흐의 그림을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닌다.


존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모두 권위 있는 학자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 절실한 기독교 신자 등 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존의 이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들을 놀랍게도 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존은 교수로 아주 능력도 있고 인간성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편의 <맨 프럼 어스>는 그를 아는 동료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진지하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료들의 정을 느낀 존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죽지 않는 존의 시간은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과 연결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그의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한참 흘러 종교적인 인물에 관한 존의 이야기는 이들을 모두 충격에 빠뜨렸다.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사실을 모두 부정하는 획기적인 이야기는 영화 속 인물뿐만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도 아주 불편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반기독교적인 영화로 반감을 살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도 절실한 기독교 신자의 분노가 표출된다. 그들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렇게 이들의 질문과 이야기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듣는 동료들의 힘듦을 느낀 존은 모든 것이 그저 상상을 가미한 이야기라고 마무리 짓는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뭔가 허탈하지만,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안도하고 동료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떠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까지 나의 차분한 마음은 숨겨 둔 이 영화의 대반전에서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의 2편을 먼저 본 나는 허무한 결과를 보며 멍을 때렸다. 그때 쿠키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의미심장한 영화의 반전 수수께끼를 알기 위해 나는 2편을 접하고 1편을 더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 1편이 논리적인 이야기로 지식의 향연을 펼쳐나간다면, 2<맨 프럼 어스 2: 홀로신>은 약간의 스릴러 적인 면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1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편에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정체가 드러나자 떠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1편의 움직임 없던 공간은 2편에서는 조금 확장된다. 학교와 집, 그리고 1편의 연관된 인물의 장소의 공간 확장은 이야기의 범위가 더 다양하고 복잡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고 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존이 늙어 간다는 것이다. 홀로세 마지막을 산 존도 이제 최후를 맞이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이 약간 끊어지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1편보다는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1편의 조용한 전개를 생각하면 속편은 긴장감을 자극하지만, 그 긴장감이 주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학생들의 등장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들의 활동과 존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구조도 뭔가 어설프다. 존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또 그렇게 흥미롭지도 않다. 후반부로 갈수록 존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존의 실체를 알자 기독교적 광신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그에게 질문하며 흥분한다. 조금은 지나친 설정에 영화를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싶은 장면이 몇몇 있었다. 존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범법 행위가 결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먼 행동들은 점점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들의 행동은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분노를 일으켰다. 영화의 설정이 이런 의도였다면 성공이다. 2편의 다소 산만한 설정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나의 부족으로 영화의 충분한 감상은 떨어졌지만,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틀림없다.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나, 그저 이 감정을 놓치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근래 접하는 책이며 영화며 종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비종교인으로 나름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중립적인 편이라 생각했다. 종교가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지만, 근래에 부정적인 면을 너무 많이 접한지라 종교에 대해 자꾸만 편견이 생기고 있다. 본질이 흐려지는 종교의 순기능이 점점 더 왜곡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주인공 존은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다. 하지만 주변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존에게서 사람들은 비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도 느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은 존이 말했듯이 많은 경험에 대한 깨달음의 축적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랜 시간을 죽지 않는 존은 우리에게 선지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불멸의 힘은 마치 전지전능함으로 과대 포장된다. 그래서 그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고 위대함을 발견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존이 말했듯이 그저 자신은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아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지나온 시간을 공부했다고, 단지 오랜 경험의 축적은 우리가 몰랐던 진실에 대해 조금 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존에게 경험의 축적은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느긋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존의 여유가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질문이 제법 많은데,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한숨 짓게 된다.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긴 시간 끄적거려 본 적은 처음 같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도 영화처럼 계속 불편하다.

 


마침, 묘하게도 넘긴 책이 샤르트르의 <구토>


그의 글이 강하게 눈길을 끄는 건지금 나의 기분을 대변한 듯한 반가움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늘 있는 어떤 확신이나 뻔한 일과는 달리, 마치 질병에 걸리듯 닥쳐왔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나는 기분이 좀 이상하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뿐이다. 그것이 일단 자리를 잡고는 꼼짝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기에,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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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1-01-2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프롬 어스> 인생 SF죠. 2편은 평이 좋지 않아서 걸렀는데, 궁금하긴하네요ㅎㅎ
 
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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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라는 말장수가 살았습니다




16세기 중엽 하펠 강가에 미하엘 콜하스라는 말장수가 살았다.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이자는 당시 누구보다 올곧으면서도 무시무시한 인물로 손꼽혔다.


책은 이렇게 두 문장의 시작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16세기 독일 작센 지방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말 장수이자 상인으로 성공한 ‘한스 콜하제‘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는 가라말 두 마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진다. 말장수인 콜하스는 장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작센 지방의 드롱카 성의 융커의 횡포에 억울하게 가라말 두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  자신의 튼실했던 말들은  삐쩍 말라 비틀어져 죽도록 밭일에 이용되고 있었다.  이 억울한 상황을 콜하스는 법에 호소하기로 한다. 그래서 융커 벤첼 폰 트롱카의 모든 악덕을 법원에 소송하여, 법에 호소하고 부당함에 대해 알리려고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귀족들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융커의 집단은 콜하스의 고소를 모두 기각해버린 것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평소 발도 넓고 평판이 꽤 좋았다. 그의 정직성과 올곧음은 인간 관계에서도 호감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자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이런 든든함도 어쩌지 못하는 힘의 권력이 좌우한 것이다. 콜하스는 자신이 제기한 소송이 고위층의 개입으로 법원에서 아예 기각됐음을 알게 된다. 콜하스는 실망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인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 그는 선제후에게 청원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꾹 눌러 참으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총리실에서 보낸 결정문이 집으로 도착한다. ˝콜하스는 상습 소송꾼˝이 되어있었고, 자신의 말을 찾아가라는 통보와 함께 더 이상 총리실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충고가 들어있었다.


콜하스는 분노하였다. 그리고 억울했다. 심지어 선제후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러 갔던 아내가 죽기 직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한다. 콜하스는 이제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한다. 그의 생업인 장사는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인 말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었다. 콜하스는 자신의 재산과 불법적인 피해에 대해서 보상받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전 재산을 털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기껏 말 두 마리 때문에 무장봉기?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처음부터 무기를 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서 더 이상 억울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 그에게 최후의 방법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청원을 하러 갔던 아내를 잃고 법원의 위협을 받은 뒤에 일어난 일이다.
한 개인이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면, 무엇보다 공적인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도 생각하게 된다.


미하엘 콜하스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의 전 재산을 틀어 불법에 저항해 나가는 것을 접할 때는조금 무모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는 부분이 있기에 콜하스의 직진에 질책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드롱카 성의 횡포는 콜하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콜하스의 봉기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이 책은 루터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숨어있다. 그리고 <미하엘 콜하스>는 영화로도 상영되었다.
보통 법은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법은 정의와는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가끔 현실에서 우리는 느끼지 않을까. 사적 이해관계에 섞여 법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놀아나는 것을 말이다. 책 속의 못된 융커의 영향력을 지금 이 현실에서도 느끼는 씁쓸함이 있으니.


콜하스에게 남은 마지막 보류, 캡슐 속의 쪽지가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충분히 자신의 생명을 보장 받고 아이들에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콜하스는 절대 쪽지를 넘겨 주지 않는다. 미소를 띠면서 쪽지를 삼킨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의 고통만큼 드롱카 성의 융커 또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의 마지막 신념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정의감에 불탔던 미하엘 콜하스는 역사적으로 무시무시한 인물로 표현된다. 조금은 무모하다 싶은 정의감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지만, 현실을 따진다면 콜하스의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 앞에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콜하스는 자신의 죄를 법의 원칙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를 봉기하게 만든 부조리한 융커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감내해야 한다. 여기서 양심이라는 그 단어들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종이보다 가벼운 것이란 걸 아는 우리는, 이 단어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편할 수밖에 없다.



책은 8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졌다.
나머지 이야기도 꽤 담고 있는 의미가 많다.
그 중에서 두 편만 간단히 이야기 하면,


<O. 후작부인 >

천사같았던 이가 하루 아침에 악마처럼 보인다.

조금은 황당한 광고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짧지만 임펙트가 있다.
자신이 천사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가장 선량하고 순수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은 더 극에 달한다. 흰색의 오점이 더 크게 부각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소설이다.
조금은 황당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이야기다.


<칠레의 지진>

당시 시대상 스캔들일 수밖에 없는, 연인의 비극적인 운명
그들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희망의 밧줄 하나가 들어온다.
죽으려고 하는 순간 땅이 요동 친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연인은 각각 홀로 이 난리 속에서 기를 쓰고 버티고 살아 낸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들은 살아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살아있음에 신께 감사한다. 또한 눈에 들어 온 무시무시한 지진의 잔해를 보며 하느님의 능력에 무서움도 느낀다.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세상에서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를 보여준다.
인간사가 늘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늘 우리가 아는 아쉬움을 남긴다.

어느 정도 수습과 안정을 찾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이 모든 재앙의 책임을 따져 물어야 했다. 재앙의 원인과 하느님의 노여움 그리고 하느님의 관용을 말한다. 이 정도로 그친 것에 감사하면서 죄를 다시 묻는다.

이 연인의 불경스런 죄는 재앙의 불씨가 되고, 결국 이야기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듯 한 상황이 벌어진다.


클라이스트 소설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사람들의 이야기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거의 변화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 때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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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2 2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오에 겐자부로의 책에서
텍스트로 다룬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은데 제가
원전을 만났는지 헷갈리네요.

리뷰를 찾아 보니 한 십년 전쯤
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

종교개혁에 나섰던 루터가
뒤이은 농민전쟁에서는 농민들의
편이 아닌 제후 편에 선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뿐호빵 2021-01-03 00:02   좋아요 2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셨나요ㅎㅎ

책에서 중재자로 나선 루터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고지식한 성서주의와 교리주의 였다는 사실에 분명 한계가 있었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남은 휴일도 즐겁게 보내세요~~~
 
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앙드레 지드, 그를 알고 싶다~




앙드레 지드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작품 <좁은문>에서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절망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의 부인 마들렌 롱도를 연상시킨다. 앙드레 지드는  사촌 누이 마들렌 롱도와 결혼을 한다. 그의 삶을 녹인 작품이란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앙드레 지드를 첨으로 만났던 작품이 <좁은문>이다. 이번에 그의 작품을 몇몇 읽으면서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가 본인의 삶이 더 인상적이다. 전 생애를 담은 자신의 일기와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을 보면 지드를 더 이해할 수 있으려나 하지만 짧은 그의 연보를 확인하는 순간 느꼈다. 아프리카 여행과 그의 성 정체성 그리고 많은 그의 연인들 그리고 부인, 그의 작품만큼 참 다양한 삶을 추구했던 지드, 그의 생각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릴 때부터 엄격한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던 앙드레 지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청교도의 엄격한 규율과 제약에 대해 반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의 아프리카 여행은 또 다른 세상의 경험이었고 그에게서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낸다.  앙드레 지드는 ‘양성애‘자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은 여행 중 오스카 와일드, 앨프레드 더글라스를 만남으로 더 깨닫게 된다. 하지만  사촌 누이 마들렌 롱도와 결혼을 한다. 나는 슬프게도 이 결혼을 축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드를 대충 알기 때문에 그녀가 지드를 향했던 마음이 배신 당하는 순간, 그녀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말이다.



1909년 출간된 사촌 누이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을 담은 <좁은문>은 이루어지지 않은 순수한 사랑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제는 이 둘의 모순적인 사랑을 아는 나이인지라 그저 답답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지드 또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그의 다양한 작품 활동과 그의 다양한 연애 활동은 그가 끊임없는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그의 연애는 그의 친구 아들 마르크와 사랑에 빠져 런던으로 도피행각도 벌인다. 그 일로 아내 마들렌의 복수는 앙드레 지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편지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해 받기 힘든 이러한 자유는 지드의 영혼이 한 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이 넘쳐 한 곳에 국한될 수 없는 에너지를 그는 생활에서도 작품에서도 풀지 않았을까.



모든 예술가가 그런 자유를 누리며 살았디고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 그들이 나와 다른점은 틀을 넘나드는 유연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적인 요구조차도 무색할 용기는 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역사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런 다름과 용기일지도.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절대 아니란 것을 안다. 살면서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아는 요즘엔, 나의 틀과 세상의 틀을 깨고 나온다는 것 자체가 죽음만큼 두려움이란 것을 말이다.



앙드레 지드의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은 그의 절친인 테오 반 뤼셀베르그의 딸 엘리자베스와 만나게 되고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캐서린‘을 낳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의 우정은 금이 가게 된다.
그의 가리지 않는 양성애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는다.
그는 또 다른 연인과 아프리카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의 아프리카 여행은 그에게 다양한 관점과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지드는 반식민주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 활동으로 이어졌고 끊임없이 일기를 적었다. 지드의 책은 거의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 많다. 이러한 그의 역동적인 활동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녹았고,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의 삶에 있어 아프리카 여행은 큰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고, 그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지드의 마지막 사랑의 종착지는 마들렌이었다.
오랜 별거 후에  마들렌과의 재결합은 아내의 병환이었지만, 아내 마들렌은 사망한다. 194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앙드레 지드도 결국 죽어서는 그의 아내 마들렌 옆에 안치된다. 사후 카톨릭 교회가 그의 작품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의 다채로운 생애를 보면서 다음 책을 기약한다.
자신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은 책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
이렇게 또 2021년에도 지드와의 만남에 연결고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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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12-31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뿐호빵 님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올 한 해도 감사했습니다~

이뿐호빵 2020-12-31 23:2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더 많이많이 행복하시고 복도 거득거득 챙기셔요~~~

겨울호랑이 2020-12-31 2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뿐호빵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뿐호빵 2020-12-31 23:23   좋아요 2 | URL
감사드립니다
남은 시간도 행복하시고 새해에는 더 즐겁게 행복하세요~~

레삭매냐 2021-01-0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뿐호빵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보니 지드의 책은 한 개도
읽은 게 없네요 ㅠㅠ
 
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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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속에서 사랑이라는 한 줄기 빛이 다가왔다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환하게 그녀를 감싸며 비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한꺼번에 빛이 쏟아지는 순간, 그녀는
다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제르트 뤼드의 눈에 세상의 빛이 들어오는 순간,
들이닥친 혼란은 그를 지상에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고 괴로움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눈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 교양곡‘은
그가 귓병으로 오스트리아 빈 근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 중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직접 이름을 붙이기도 한 이 교향곡의 인상적인 자연의 풍경을 암시하는 묘사는 섬세한 작품으로 길이길이 남았다. 자연은 그에게도 위안이었다.

앞을 볼 수 없던 제르트 뤼드가 색의 명암을 이해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전원교양곡>이었다.
음계의 높낮이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며 이해를 도왔다.


이야기는 목사가 우연한 계기로 시각 장애를 가진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시작 된다. 그리고 아내 아멜리의 미묘한 갈등은 제르트 뤼드를 중심에 두고 있다. 하지만 목사는 외면한다. 직감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부인한다. 제르트 뤼드가 눈을 뜨는 순간, 아멜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상상하고 사랑했던 목사의 모습이 목사의 아들 자크였다는 충격은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목사와 아들은 그녀를 동시에 사랑했었다.
목사는 자신의 감정을 무시했고, 아들의 사랑 또한 무시했다. 아니 알면서도 자신의 내적 갈등은 아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적 교리와 명분이 때론, 우리의 삶에 있어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저 맹목적으로 흘러가게 만든다는 믿음에 반감이 생길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지드는 분명 그런 반감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책의 인물들은 그저 표현하지 못한 솔직함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목사는 결국에 자신이 사랑한 제르트 뤼드도 아들도 모두 잃는다.
안타까운 결말이 주는 허망함은 종교도 사랑도 모두가 헛점 투성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헛점으로 수없이 구멍난 2020년의 마지막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회도 미련도 많은 시간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구나!
그래도 나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 앞에 다시 희망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난 마침표를 찍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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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때 전원교양곡 읽고 충격(결말에)받았었던 기억이,,모딜리아니에 초상화속여인이 작품과 너무 잘맞네요.

이뿐호빵 2020-12-31 23:34   좋아요 1 | URL
저도 중학교때 접하고 뻥찌던 기억이ㅋㅋ
추천했던 친구에게 엄청 원망했었조

늘 관심가져 주시고 따뜻한 응원 감사드립니다 ~~
 
[eBook]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라틴어 수업 1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아주 오래전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생각나게 하는 책

e북으로 가볍게 접하고
짧은 시간 가볍게 읽었다

어려운 라틴어 강의는 없다
하지만, 한동일 교수가 젊은 청춘들에게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는
그들의 삶에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
인생 초보를 위한 지침서 같은

여전히 인생 초보자 티를 내지만,
읽는 동안 나름 나는 중급자로 넘어가는 시간을 사는구나
싶다


20대의 청춘을 넘긴 자의 여유로운 눈빛이 나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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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쁜 호빵님 2021년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해피뉴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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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 福마뉘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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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1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진짜 라틴어 수업
교재인 줄 알았더라는 말이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