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색에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이 눈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책을 읽다 내 손에 쥔 책의 표지가 파란색이었고, 고개를 든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책들의 표지가 파란색이 많이 쓰였다는 것이었다. 무심코 이 파란색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쓸데없이 시작된 의지는 파란색에 관한 책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우연이지만, 필연적으로 내 손에 <파랑의 역사>가 쥐어졌다. 그리고 나에게 또 다른 색에 관한 책이 자연히 따라왔다. 또 한 권의 책 <빨강의 역사>는 이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파랑과 빨강의 대비, 색과 함께 지나온 과거는 또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증 유발로 책장을 넘겼다.

 

파랑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

 

색채와 역사,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분야는 회화 분야일 것이다. 색채 그러면 떠 오르는 이미지가 그림들과 화가였고, 짧은 시간 대부분의 생각은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파란색 계열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파란색에 대해서 호의적이다. 대표적으로 좋아하는 색 중의 하나다. 무엇보다 3월의 탄생석 아쿠아마린의 영롱한 푸른색과 나의 연관성은 파란색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든다. 파란색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파랑은 매우 친숙하다. 그리고 시원하고 평화스러운 색으로 인식된다. 또한, 중립적이고 때로는 몽환적인 신비로움을 주는 색으로 묘함을 선사하는 색이기도 하다. 파랑을 떠 올리며 생각하는 대부분의 생각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파랑의 역사>는 말 그대로 역사 책이다. 저자 미셸 파스투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중세사 연구자이며 중세 문장학의 대가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파랑의 역사>는 파란색의 역사를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고찰해 나간다. 파스투로는 색은 사회적 현상으로 색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색은 무엇보다 우선 사회 현상으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색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한 시대에 녹아있는 특정한 문화가 어떻게 색의 역사적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지, 통시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신석기 시대부터 20세기까지 파랑의 역사를 주요 맥락으로 삼는다.

파란색은 태초부터 자연에 널리 퍼져 있는 색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이 파랑을 아주 뒤늦게야 인식하고 재현하고 생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옷감과 의복은 우리가 색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파스투로는 그 시대에 사용됐던 용어들이나 예술, 혹은 회화에 관한 자료들 보다 옷감과 의복은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운 정보를 준다고 말한다. 직물은 당시의 기술과 경제, 사회, 사상, 상징 등 모든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색에 대한 문제들을 거의 다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염색물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이다. 유럽의 염색물은 기원전 4000년 말엽 붉은색이 전부다. 수천 년 동안 직물 염색은 단연 붉은색 염색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중세까지 색의 중심은 흰색, 검은색, 붉은색으로 파란색은 보이지 않는 색이었다. 사회적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파란색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 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색과 우리에게 인식되는 색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름 붙여진 색 사이에서도 아주 엄청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로마 사람에게는 파랑은 켈트족이나 게르만족 같은 미개인의 색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추하게 취급 받았다. 그리고 로마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당시 무지개에 파란색이 없는 4가지 색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많은 학자의 사색과 논증에도 파란색은 빠져있었다. 중세 초까지 파랑의 상징성은 별 것 아닌 것, 보이지 않는 색이었다. 흰색, 검정색, 빨간색 위주였다. 그리고 녹색은 세 가지 중심 색을 연결해 주는 중간색 정도로 취급되었다. 일상생활에 파랑이 쓰이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궁정의 귀족들에게는 버림받은 색이었지만, 농부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한테서 사용되었고, 이는 12세기까지 이어졌다. 파랑의 사회적 인식이나 상징성이 너무 약해서 역사적으로 보이지 않는 색이 된 것이다.

 

 

 

파랑의 가치 상승

 

12세기부터는 파랑은 이제 서양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별것 없는 색이 아니었다. 이제 파랑은 유행하고 귀족적인 색으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칭송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파랑의 지위 상승은 의복으로 나타났으며 예술 창조 활동 등으로 급속히 번져 나갔다. 파랑의 가치 상승은 사회적으로 그 상징성을 부여했고, 색 체계를 새롭게 재편성 하였다. 색의 세계에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 것이다.

 

12세기에 이르러 성모마리아의 겉옷이나 드레스의 색상에 파랑이 쓰였다는 점이다. 이는 파랑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파랑의 가치 상승과 함께 사회 전반에 파랑의 유행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문학 작품에서도 색의 암시 체계를 볼 수 있었다. 14세기 중반 즈음에 쓰인 작품에서 파랑이 등장한다. 용감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한 인물의 파랑의 기사가 등장하였으며, 이를 예찬하는 궁정 시인들도 등장하게 된다. 카페 왕조는 서양에서 최초로 문장(紋章)에 청색을 사용한 왕조다. 왕이 파랑을 사용한다는 것, 이는 파랑의 인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파랑의 등장은 경제적으로도 큰 파급효과를 만들었다.

빨강을 염색하는 염색 전문가는 파랑을 염색할 수 없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도시의 염색 업자들은 아주 엄밀히 전문화돼 있었고, 이는 왕실과 당국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들이 취급하는 염료는 서로 달랐으며, 염색 기술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고객층이 달랐다는 것이다.

 

15세기 이전까지 염색에서 회화에서 색 제조법을 설명하는 책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창조주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질서와 자연 상태를 역행하는 것으로 악마가 하는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색 조합으로 색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보라색을 만들기 위해 파랑과 빨강을 섞는 일은 결코 일어나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급부상한 파랑은 이제 성모마리아의 색, 왕의 색이 되었다. 이는 파랑이 빨강의 맞수인 경쟁자일 뿐만 아니라,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 의상에서 인기를 얻은 검정과도 겨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파랑은 이제 검정과 함께 도덕적인 색이 된다. 14세기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전 기독교 사회에 걸쳐 증가한 사치 단속법과 의상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이는 검정의 가치 상승을 만들었고 18세기까지 여러 형태로 지속해 근대와 현대의 의상 체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사회적으로 규제가 가해진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와 도덕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겸손과 덕행의 실천을 이어가는 기독교적인 전통과 엄격한 복식 규정으로 사회 계층을 구분하려 했다. 신분 차별을 위해 하양, 검정, 빨강, 초록, 노랑, 그러나 파랑은 전혀 쓰이지 않았다. 파랑은 사회적으로 규정되거나 금지된 색이 아니었으므로 사용이 자유롭고 중립적이며 위험성도 적었다. 그래서 파랑은 검정과 같이 도덕적인 색으로 남을 수 있었다.

 

 

경건한 색의 파랑

 

15세기는 검정이 가장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그리고 어두운 회색 또한, 인기를 얻었다. 이는 16세기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검정은 가장 준엄하고 고결하며, 가장 기독교적인 색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하늘과 영혼을 상징하는 파랑을 점점 동화시켰다.

 

종교 개혁과 색 파괴주의는 교회 밖으로 색을 추방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파랑은 다른 색과 달리 관대한 대우를 받게 된다. 이들에게는 색은 단지 물질에 불과했던 것으로, 색은 사치와 겉치레, 인위적인 것,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종교 개혁은 예술 분야에서도 색을 혐오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이는 서양인들의 색 감수성을 변화시키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의복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엄격함과 간소함으로 강렬했던 빨강과 노랑, 분홍, 주황 등 다른 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 검정, 회색, 갈색 톤의 의상이 주를 이루다가 16세기 말부터는 파랑도 정중한 색대열에 들게 되었다.

 

책에서 저자는 종교 개혁과 함께 형성된 가치 체계, 그 속에서 색에 대한 거부가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통찰해 나갔다. 신교도들의 색에 대한 거부가 미친 영향, 상품들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던 무렵에도 프로테스탄트 계층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신교도적인 윤리는 공업화의 발달로 다양한 색의 물건들을 생산할 수 있음에도 대량 생산품에서 상당히 획일적인 색을 띠었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가 대중의 요구와 경쟁의 위협에도 윤리적인 이유를 들어 오랫동안 다른 색의 자동차를 판매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17세기 페이메이르는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큼 그 누구보다 파랑을 섬세히 다룰 줄 아는 화가였다. 마치 캔버스의 그의 그림은 리듬감 있게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했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페이메이르에 관한 책을 접했을 때 어땠을지 생각하게 된다.



가장 사랑 받는 색, 파랑

 

유럽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노예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인디고는 먼바다를 건너왔지만, 유럽의 '대청' 보다 그 원가가 쌌다. 무엇보다 인디고의 착색력은 대청 보다 더 강했다. 이로 인해 대청 산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도시의 흥망성쇠는 또 다른 주류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인디고의 염색도 19세기 말 인공 염료를 사용하게 되면서 천연 염료 인디고의 역사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관련 산업도 점점 치명타를 입고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대는 새로운 발견으로 늘 변화를 맞이한다. 그 흐름에서 살아남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 것이다. 역사가 말하듯이 우리의 시간도 이러한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파랑이 가진 잠재력은 역사 속에서 비교적 약하고 폭력적이거나 금지된 적 없는 무난한 색이었다. 평범하지만 뭔가 있는 색이었다는 점이다. 보편적인 대중성은 극적인 사랑을 받은 색도 아니고 큰 유행을 타지도 않았다.

 

18세기에서 20세기의 파랑의 역사는 혁명의 파랑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상징으로 남기도 한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은 청색 연미복은 당시 청색붐을 일으켰으며 베르테르 붐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발리스의 <푸른 꽃>은 유럽의 낭만주의 꽃으로 그 상징성을 더했다. 파랑은 역사 속에서 그 의미가 다양해졌다. 특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파랑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색 휘장과 삼색기에 얽힌 이야기도 꽤 길다. 그리고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파랑의 이야기도 흥미 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군복은 초기에 꼭두서니로 염색한 붉은 바지와 진한 청색의 군용 외투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시에서 프랑스 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준다. 국가를 상징하는 파랑과 빨강을 버릴 수 없다는 쓸데없는 고집은 많은 군인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결국에는 군복 바지를 연한 회색빛의 청색으로 바꾸지만, 전시에 군인들의 군복을 염색하는 인공 염료를 만들어 내는 일이 쉽지 않기에 청색 바지로 통일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파랑의 대명사 청바지의 역사는 당연, 파랑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청바지의 역사와 상징성에 대해 말할 때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잘못된 청바지에 관한 편견도 언급했다. 20세기 파랑은 이렇게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색이며 옷 색깔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친숙해진 파랑은 파랑의 역사가 말해주었다. 한때 귀족들의 색이자 왕의 색이었던 빨강과 대적하게 된 파랑은 역사 속에서 점점 몸값을 올렸다. 그리고 경건한 색으로 파랑의 전성기에 들어서기도 한다. 낭만주의 시대 파랑은 다른 색을 제치고 월등히 앞으로 달려간다. 파랑의 흔적들은 이제 사회, 경제,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발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여론 조사가 가능한 시기에 든 20세기에 파랑은 다른 색 사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이 가장 사랑하는 색으로 남았다.

 

색채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는 꽤 매력적이었다. 중간 중간 삽입한 자료와 그림들도 꽤 알찬 책이었다. 올해 공들이 첫 번째 책이 되었다. 그 많은 책 중에서 또 편애하는 책이 생겼다. 유일하게 이런 차별은 용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고 <빨강의 역사>를 읽고 있다. 같은 저자가 쓴 책이 각각 다른 번역가에 의해 옮겨졌다. 두 책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개인적으로 <빨강의 역사>가 더 부드럽게 읽혀지는 것은 번역의 힘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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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진짜 재밌죠 전 에코가 중세에 관해 쓴 책보다 더 재밌게 읽었어요 호빵님 따라서 빨강색도 읽어야 겠어요 ^.^

이뿐호빵 2021-01-23 16:24   좋아요 1 | URL
빨강의 역사가 더 흥미롭네요 ~~
중간쯤 읽고 있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침대 위의 세계사
올댓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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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제일 먼저 마주하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지

뭉그적뭉그적 꿈틀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포근한 시간을 최대한 늘여 보고자 발악 하는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을 너. 질질 끌며 무거운 몸을 축 늘인 채 그대로 뛰어 들어가도 탄성 좋은 너는 흔들림 없이 아주 힘 있게 나를 받아내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너의 일관성 있는 태도에 미워할 수 없는 존재, 너란 존재는 나에게 내일을 위한 힘이지

 

나의 하루는 이렇게 침대 위에서 온몸을 뒤틀면서 묵직한 몸을 일으키며 시작한다. 침대는 이렇게 내 몸과 밀착되어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나를 느끼는 녀석일 것이다. '만일' 이라는 조건을 걸어 침대가 생명이 있다면, 사랑하지만 매우 불편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주절주절 거리는 이유는 이 책이 다루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하루는 침대라는 공간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 공간에서 끝을 맺는다. 이 공간이 숙면을 위한 가구가 아니라 지친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친구이며, 그 어떤 영양제보다 더한 에너지 보조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대가 있는 침실 공간은 가장 사적이고 가장 은밀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제목의 침대라는 단어부터 책은 호기심을 끌었다. 


역사는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침대에서 모든 일을 한 시절이 있었다. 우리에게 사적이고 은밀하다는 개념은 근대에 생긴 것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공간에서 불가능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싶을 만큼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침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개인적으로 침대는 쉬는 날에 뒹굴 수 있는 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풍부한 영감과 소재를 던져 준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동안 침대 위에서 군을 지휘했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야기는, 침대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잉태와 죽음, 그리고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베드타임 스토리는 역사에서 빠진 이야기다. 


"거의 모든 사회와 개인의 역사에서 이야기의 3분의 1은 빠져 있다."

1960년대에 건축화가이자 가구 전문가인 로렌스 라이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침대에서 지낸 시간들이 과거 역사를 이해하는 데 공백으로 남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침대는 고고학의 역사에서도 대부분 빠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파내고 훑어보고 고고학자로서의 일을 하려면, 침대는 인류의 수평적 역사를 읽어내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적절한 장소이다.


-<침대 위의 세계사> 중에서 



'아침형 인간', 이 단어는 나에게 패배감을 맛보게 한 단어로 그다지 반가운 단어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아침형 인간이 되지 못하는 불만일 수도 있지만, 그 단어가 한때 모든 성공을 의미하는 단어로 비춰지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잠이 많은 나로서는 여간 불편한 단어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불편함의 조각들이 이 책을 통해서 완전히 부서졌다. <침대 위의 세계사> 이 책은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던져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것 또한 책이 주는 기분 좋은 힘이겠다. 


이중 수면 패턴


자연 세계를 재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1990년대 초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정신과 의사 토머스 베어는 참가자들을 한 달 간 하루 14 시간씩 암흑 속에서 지내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베어는 이 실험을 통해 '이중 수면 패턴' 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밤의 리듬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공대의 역사학자 로저 에커치는 베어의 수면 연구에 힘입어 '이중 수면 패턴'을 기록한 역사 문헌들을 모았다.이 실험과 역사학자의 고찰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중 수면 패턴' 때문에 한밤중에 깨어날 때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 수면 패턴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수면 리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밤에 깨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안고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다음날에 대한 걱정으로 말이다. 자연스러운 이러한 수면 리듬까지도 우리는 스케줄이라는 틀에 묶여 불면증이라는 병을 만들었다. 


수면의 산업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우리들의 수면 시간도 규정된다. 제시간에 잠들기와 깨기, 적당한 수면 시간, 규칙적인 수면 시간도 산업화로 인해 사회화 되었던 것이다. 산업 혁명과 수면 보조제의 관계에서 수면 보조제는 인간이 진화론적 측면에서 인간의 또 다른 적응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화에 떠 밀려진 인류에게 어쩌면 이러한 과정은 필수였다는 점이다. 산업화로 인해 우리의 수면 시간은 산업화에 적응하여 그 사회를 성공적으로 살아 가야 했으므로 적당한 수면과 규칙적인 스케줄은 성공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공 조명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깊은 밤에도 오락과 사교를 즐기며 북적거렸다. 이로 인해 대부분 우리의 수명 시간도 불규칙하게 변했으며 편안한 수면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도 공공 조명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19세기 전반 런던은 처음으로 전문적인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조금 더 안전한 수면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호 받고 있을 때 잠을 더 많이 잔다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의 수면 손실은 이렇듯 사라진 이익과 균형을 맞추려는 결과일 수도 있다."



'수면 회피'가 실제로 생산성 향상을 시킨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 속 인물들을 보면서 나는 또 한번 안심한다.  대표적인 인물  레오나르드 다빈치,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등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수면 시간에 대한 불안함을 지웠다. 잠을 적게 자는 것으로 칭송받아 온 대표적 인물 처칠은 '낮잠' 시간을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유명한 말 "낮잠을 건성건성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처칠은 전쟁 때도 그의 수면 습관 때문에 중대한 결정은 거의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장군들이나 장관들과의 회의 또한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역사는 이렇게 또 침대 위에서 바뀌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말하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자신만의 수면 사이클과 시간이 있다. 단지 여기서 우리가 힘들어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르지만, 자신에게 자연스럽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웃기게도 나의 수면에 대해 자꾸만 변명을 하게 되는 기분이 든다. 이중 수면 패턴과 수면 회피를 동시에 다 갖고 있는 것 같아서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근거를 이 책에서 어떻게든 찾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과 성 그리고 침대


과거 여성들의 지위는 단지 잉태와 출산에 따른 목적만이 필요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는 시민의 축에도 들지 못했고 아내의 가장 큰 의무는 출산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영국과 유럽 사회 대부분이 청교도의 교리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 때도 여성들의 위치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 위의 역사는 여성에게도 가혹했다.


침대에서의 분만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산부인과 수술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외과 의사의 의료 기술이 필수가 되고, 산모는 수동적으로 침대에 누워 의사는 기술을 통해 적극적으로 출산을 돕는다. 출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침대 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병원 침대에 관한 이야기에서 초기 병원은 감염과 전염의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는 너무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다는 것조차 설득할 수 없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의료 기술의 발전과 기적 같은 '마취'의 등장은 고통에서 더 이상 신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당연히 출산은 병원 안의 침대 위에서 이루어 지는 과정으로 그 개념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성 산파의 역할이 의사로 바뀐 것은 이전의 가부장 체제의 사회, 출산의 공로를 대부분 남성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는 것이다. 


"침대는 생명 탄생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회복의 공간에서 수동적인 출산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p135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가 남긴 마지막 말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마지막 말에 그의 친구들과 제자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궁극의 죽음이었다. 죽음 직전에 하는 마지막 말에 대해 우리는 묘하게도 의미를 둔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말들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고 전한다. "망자가 대꾸할 리 없으므로 마지막 말은 지어내기 쉽다." 누군가의 명분에 의해 끌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마지막 말로 기억되는 이들조차 자신의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것에 의미를 두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나에게 반가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책을 읽어 가다가 저자의 생각 못지 않게 나와 공감을 이룰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말 그대로 나랑 통했다. 별 것 아니지만 또 이런 것에 기분 좋아진다. 내 손 위에 놓인 책에서 잘 통하는 친구를 찾은 기분이다. 책 중간 중간에서 만나는 이런 공감은 여행지에서 반가운 친구를 사귀는 기분 좋은 경험을 준다.   


6장의 다른 사람과의 침대 공유에서 다시 만난 <모비딕>의 이스마엘과 작살잡이 퀴퀘그의 만남이 한 여인숙의 침대 위였다는 것이다. 책에서 <모비딕>의 한 장면을 묘사할 때 이미 나의 머리 속에 등장한 이스마엘과 그의 친구는 읽는 순간 반가움에 악수를 나누었다. 이 둘은 같은 침대를 공유하며 서로의 친구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침대 공유 문화가 당시에는 당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 존 애덤스와 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침은 최악으로 기록된다. 



나폴레옹은 헬레나 섬 유배지 야전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움직이는 침대의 등장과 탐험가와 모험가의 이야기에서도 빠질 수 없는 침대 이야기는 스콧과 아문센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까지 미국 군인들에게 담요와 그라운드 시트(방수포) 만을 지급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침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침대란,

현대인의 숙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모 침대 광고처럼 침대는 숙면을 취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인 과학이 되었다. 그리고 베개며 침구 세트는 다양한 기능으로 상품성을 높이고 광고를 섭렵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침대의 등장과 함께 과연 미래의 침대가 어디까지 우리의 수면을 조종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침대 위에서 쓰여진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때 삶의 역동적인 과정

이 녹아 있는 침대는 사라졌지만, 개인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 온 침대는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시대가 변화고 사회가 다르면 그 쓰임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과거 침대라는 가구가 역사 속에서 단지 가구로써 그 가치를 채우고 있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침대 위에 쓰여지는 시간은 이전처럼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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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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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로타에게 

우리의 열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사랑하는 당신에게

해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원고를 당신께 바칩니다. 

행복을 기념하는 날의 선물로는 영 부적절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게 사랑에 대한 믿음을 주어 

마침내 죽은 가족들을 마주하고 이 극을 쓰게 해준 당신, 

고통에 시달리는 네 명의 티론 가족을 향한 연민과 이해, 

용서의 마음으로 이 극을 쓰게 해준 당신, 

당신의 사랑과 따스함에 고마움을 전하는 의미로 이 극을 바칩니다. 

내 소중한 사랑, 지난 십이 년은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였습니다. 

내 고마운 마음, 당신은 알겠지요. 나의 사랑도! 

1941년 7월 22일

타오 하우스에서 

진 

-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 중에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 극작가로 유진 오닐은 현대 극의 모든 형식을 시험하고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탐험한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가벼운 상업 극에 머물러 있던 미국 연극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미국 극작가라고 한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유진 오닐의 자전적인 요소가 이 작품의 바탕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아일랜드 이민 2세대로 불행한 가족 사와 함께 심연의 아픔이 비극적으로 녹아있다. 그리고 술과 약물, 질병에서 고통 받았던 모든 아픔은 당시 시대 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기존의 이민자와 새로운 이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인종, 종교 등 다양한 차별로 나타났다. 같은 백인일지라도 종교적 이유로 온갖 핍박을 견뎌야 했던 아일랜드인들은 기근과 질병의 악순환에서 힘겹게 적응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누가 백인인가?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에서  이민자의 아픔을 이미 접해서 인지 이 책에 녹아있는 아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등장 인물을 간략하게 이야기 한다면,

 

무신경한 아버지 티론, 

모두가 아버지 티론을 원망하고 욕한다. 

서른 세 살의 큰 아들 제이미,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상을 풍기며 술에 빠져 산다.

제이미 보다 열 살 어린 에드먼드, 

예민한 감수성과 섬세하다. 건강이 좋지 않고 어머니 메리를 닮았다. 

소녀 같은 메리, 

예민한 감수성으로 섬세한 그녀는 약물 중독에 빠진다.

 

 

아일랜드 기독교인 아버지 티론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갖은 노동으로 고된 시간을 보내고 힘겹게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리고 청년 시절 한 때 희극 배우로 유망주를 꿈꾸며 열정을 품었던 젊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티론은 메리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메리를 사랑하지만, 무심한 티론은 아내 메리가 외롭고 홀로 지내는 힘든 시간을 보지 못한다. 그 속에서 출산과 우울은 메리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티론의 직업상 호텔을 전전하며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작은 아들이 홍역에 걸려 죽게 된다. 작품에 나오는 큰 아들 제임스는 이 일로 인한 죄책감으로 술에 빠져 방탕하게 보낸다. 에드먼드는 형 제임스를 따르면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닮은 섬세하고 감수성 많은 에드먼드는 폐 결핵에 걸리고 만다. 극 중 에드먼드는 유진 오닐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다. 

 

 

유진 오닐의 피 땀 눈물이 섞인 < 밤으로의 긴 여로>는 한 장소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1912년 8월의 어느 하루'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 거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작품은 줄곧 어둡고 칙칙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족의 대화는 앞 부분에서 짧게 끝이 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차가운 비난과 질타 뿐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서로의 이야기는 이해 받지 못하고 집안에서 그저 빙빙 돌고 돈다. 


이처럼 <밤으로의 긴 여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극적인 사건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다. 톤도 없고 색깔도 없는 단조롭기 그지 없는 이야기에 쓴 맛만 느낄 수 있는 대화가 오고 간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지만, 눈에서 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공감 포인트를 찾을 때였다. 이 얄궂은 애증 관계에 얽힌 가족 이야기가 짜증 날 만큼 어둡고 지루하지만, 여느 가족의 이야기 한 편을 보는 것처럼 공감을 불러 일으킬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부모 세대, 그 시대를 겪고 견뎌 내야만 했던 세대를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어느 한 나라의 가족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리고 한 가족의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가족 사 만이 아니다. 불편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이야기로 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드먼드를 편애 하는 부모,  형제인 제임스와 에드먼드의 관계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랑은 제임스를 더 방황하게 만들었다. 제임스는 동생 에드먼드를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 사랑에는 질투 또한 무섭게 작용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힘들게 살아 온 아버지 티론의 구두쇠 기질은 과거 자신의 어머니의 두려움이 섞인 푸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색함은 그가 가족들에게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 메리의 약물 중독이 아버지 티론의 인색함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의 불운을 아버지 티론의 인색함 탓으로 돌린다. 이렇게 서로 지나온 과거를 들추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들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결국 가족은 가족이었다. 서로에게 아픈 상처를 주면서도 서로 미워할 수 없는 애증의 끈이 그들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 '돈의 가치'

아버지 티론이 아들들에게 잔소리로 퍼붓는 단어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후회에도 들어있는 단어다. 

이 단어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의미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밤으로의 긴 여로>>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너무 힘들어 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운한 가족 사를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진 오닐은 자신의 삶 밑바닥에 있는 아픔을 다시 꺼내어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사후 25년 간은 발표도 무대에 올리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에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 끔찍한 불행의 가족 사에 대해 적나라하게 녹아 있는 이 작품이 그에게도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오닐이 죽은 지 3년 만인 1956년 스웨덴 스톡홀롬의 왕립 극장에서 초연 되고, 그해 뉴욕 무대에 선을 보이며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밤으로의 긴 여로>>는 1957년 유진 오닐의 네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기록된다. 

 

 


 "인생 교훈에 너무 데여서 돈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건지도 몰라. 그러다 결국은 실수로 잘나가던 배우 인생까지 망쳐버리게 된 건지도. (슬프게) 전에는 누구한테도 이런 점을 인정한 적 없는데. 오늘은 마음이 너무 아파 그런가?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이런 마당에 자존심 세우고 허세 부린들 무슨 소용이겠니."

 

 -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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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3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길이 안 보이는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도 모르겠어.] 오닐이 살아생전에 이작푸 절대로 발표 안하고 사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죠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 이뿐 호빵님 덕분에 ‘밤으로의 긴여로‘ 다시 펼쳐 읽고 싶어집니다.^.^.
 

선물 주려고 샀다가 슬쩍 넘겼다ㅋ

앙증맞은 사이즈와 센스 넘치는 sns문구들
가볍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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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그것이 사람을 ‘만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사람은 사물에 에워싸여 살고 있다. 그것은 유용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물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동물인 것처럼.
이제 생각났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들쩍지근하고 메슥거리는기분이었다. 얼마나 불쾌한 기분이던지! 
그것은 그 조약돌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그 불쾌함은 조약돌에서 내 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 그거다,
- P27

바로 그거야. 손안에서 느끼는 어떠한 구토증.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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