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빨강 머리 앤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나를 감싼다.
그 뭔지 모를 감정들에 대해 표현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저는 더 많은 단어들을 알고 싶어요.
그럼, 제 기분에 딱 맞는 말을 할 수 있잖아요. ˝
(P95)
어느새 꽉 차기 시작한 나이지만, 아직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과 내 기분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 단어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다.
‘누군가는 가르쳐 주겠지‘하고 기다린 시간은
아무도 나에게 그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찾아나선 여행이 책장을 넘기는거였다.
학창시절을 지나 사회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답은 나를 위한게 아니었다. 그래서 답을 찾는게 숙제였고 고역이었다.
남일 대신하는 억지스런 불편함은 이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늘 억울함을 담고 살았던 건 아닌지 싶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감정을 털어버리는게 쉬운건 아니다. 나만 부당하고 나만 억울하고 나만 힘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정은 쉽게 비워지지 않는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빨강 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 머리 앤, 우리의 친구~
영원히 귓가에 남아 있을 노래와 함께
앤을 사랑한 모든이의 사랑스런 친구 앤
나의 능력이 부족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해지고
살면서 난간에 부딪혀 멍하니 앉았을 때
마침, 나에게 반가운 친구가 찾아 왔다.
백영옥작가의 에세이집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은 ‘밀리 오리지널 에디션‘으로 두 달에 한 번씩 나에게 찾아오는 책 선물이다.
곳곳에 흩어진 책장과 서재는 온,오프라인 상관없이 만들어 놓은지가 오래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반가움도 찾아 올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될 것 같다.
언제나 낙천적인 앤의 밝은 얼굴에는 앤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앤의 ‘상상의 힘‘은 그녀가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런 앤의 긍정적인 힘은 어른이 된 나를 찾아와 다시 따뜻함을 안겨 준다.
요즘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샘솟게 하는 많은 것들이 나의 지나간 시간을 자꾸만 소환하게 만든다. <작은 아씨들>의 씩씩한 조와 <피너츠> 스누피를 거치고 이제는 <빨강 머리의 앤>이다.
반갑게 찾아온 앤은 어른이 된 지금 나에게 많은 어록을 남기고 있다.
어른이 되고 사람들과 관계에서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가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상처입고 상처를 준다. 그런 어른들에게 앤은 여전히 솔직하다.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고 이 에세이를 쓴 작가 또한 어른이 되어 앤을 다시 만났다. 이제는 앤의 순수하고 낙천적인 밝음이 아픔이란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앤이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의 말, 어릴 때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린드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앤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에서 진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어른이 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실수 많은 어린 앤의 순수함과 솔직함은 아직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다.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나에겐
어린 앤의 모습이 그대로 기억되면 좋으련만 아니다.
린드 아주머니의 무덤덤함을 이해하는 순간, 앤의 사랑스런 말에 마냥 빠져 들수는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있다.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 이 생각난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이 불에 옮겨 붙었다하면 하염없이 뜨거워 지는 것
쓸쓸히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ㅡ‘연탄 한 장‘ 중에서
살면서 뭔가에 뜨겁게 열정을
쏟아 부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약간 딜레마에
놓여 있다.
갈팡질팡 하던 찰나에 찾아 든 이 책이
뜻하지 않던 반가운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는 앤이 아니라,
앤을 알고 있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만난 작가의 말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 어떤 일을 좋아하는 데 필요한 게 꼭 ‘열정‘만은 아니다.
탁월한 능숙함이 그 일을 좋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열정이 폭발적이며 뜨겁다는 건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
내가 아는 열정은 오히려 들뜨지 않고 차분한 것이다.
열정은 컨디션이 가장 좋지 않을 때도,
도무지 그 일을 할 마음이 나지 않을 때 역시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냉정한 에너지에 가깝다.˝
(삶에 힘을 주는 적당한 온도 , p150)